주일설교

광야

아빠와 함께 2024. 5. 6. 08:44

광야

2024년 5월 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7-11

(3: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3: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3: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3: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왜 하나님께서 노하실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고대하는 자기 길은 결코 하나님이 가시는 길과 같지 않습니다. 다릅니다. 동시에 천국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점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광야를 경유하게 하셨습니다.

광야를 통해서 인간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다투게 되고 또 하나님을 시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투는 이유는, 자신이 고대하는 장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보탬이 되는지 측정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기대하는 ‘나의 길’에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지상의 하나님’에게 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 힘들게 여겨지는 그 광야 길에 하나님께 같이 통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바로 ‘주의 이름의 삶’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동행하시는 하나님 자체에 관심이 없고 그 하나님이 자신들의 포부를 충족시켜주시를 바란다는데 있습니다. 이 차이로 인하여 벌어진 사태가 바로 시험이고 다툼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약속의 땅을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어쨌든 살아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즉 지금 살아야 약속의 땅에서는 산다 라는 의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지금  죽어야 비로소 동행하시는 주님과 그분의 율법이 보인다’입니다. 광야는 스스로 생존을 추구하는 모든 시도가 다 좌절되는 조건으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사람이란 어떤 난관과 역경에 부딪치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오기가 생겨 더욱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됩니다.

교회 나와서 성경을 보면서 광야 이야기가 나오니 그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원망하고 불평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즉 하나님과 시험과 다툼이 없는 것이 자신이 약속의 땅,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감을 잡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광야가 어떤 곳인지 크게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아니하면 결코 약속의 땅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란 광야시절의 마감이 아니라 도리어 광야 삶의 확장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바는,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한 세계’가 하나님에게 일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구약의 끝자락에 주어진 계시인 말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 1:2-3)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통해서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 덩어리 자체’를 만들고, ‘미음받은 자’가 아니라 ‘저주 덩어리된 자’를 만드십니다.

우리가 내가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 자체임을 알아야 하고 불신자는 자신이 저주받는 자가 아니라 저주 자체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 곧 ‘자아’를 몽땅 다 뽑아내십니다. 마치 이불 정리하면서 비닐을 닫고 비닐 구성에서 진공청소기 꽂아서 공기란 공기는 모조리 쪽쪽 뽑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남는 것은 이불 뿐이지요.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보자기에 해당될 뿐입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자신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면 결코 주인행세를 하지 못합니다. 민수기 22:25에는 발람이 탄 나귀는 천사를 봅니다.

하지만 발람은 그 천사를 보지 못합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민 22:25) 인간의 모든 두려움은 자아 의식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를 통과시키면서 그들의 두려움과 그들의 죽음마저 그들과 상관없는 현상인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광야는 ‘인간들로부터 시험받은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십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필요로 하는 삶의 환경’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입니다. 광야는 이런 시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난데없이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 아말렉 족속은 저주받아야 될 에서의 가문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이들 아멜렉은 족속의 땅 차지가 공격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이 지구상에 나타나지 말아야 될 이스라엘 족속 자체를 없애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12:14에 나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즉 광야란 단순히 인간의 생존 투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들이 살고자 하는 의욕은 배후에 뱀, 곧 악마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전쟁이란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만큼은 ‘있음’으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 전쟁해야 합니다. ‘물없음’, ‘양식없음’으로 말입니다.

광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도말될 대상임을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출 17:14) 이스라엘까지 배제하십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기드온을 통해서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드온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이 시험에 동원된 것이 솜과 이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부터 시험을 받으시면서 도리어 인간이 얼마로 죄로 응축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시험을 하십니다. 이로서 성도의 삶이 늘 하나님과 동행해서 주님의 이름만 높이는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해대고 다투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느끼면서 이 세상에서 없는 십자가 피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히브리서 3장 7-11절(광야)240505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7-11절입니다.

히브리서 3:7-11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이 본문에 보면 인간의 실상이 ‘인간 대 인간’으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께 노하는 본성을 지니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광야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옛날 인류를 대표해서, 인류의 샘플이죠,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에서 나와서 그냥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고 튜브 같은, 관 같은 기능으로 광야를 경유해서 약속의 땅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약속의 땅이라는 곳이 인간이 왜 들어갈 수 없는 땅인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거예요. 거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여기 본문 10절의 말씀처럼 이 세대가 자기 길은 열심히 챙기는데 여호와의 길을 몰라요. 왜냐하면 자기 길을 챙기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의 길이 자기 길과 충돌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보면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걸 분명히 해 두시기 위해서 광야를 거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재 자체 안에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요소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모르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화나게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은, 나는 내 편이고자 애를 쓰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내 편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로 인하여 화 안 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요.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쪽에서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분노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너는 너의 앞가림만 계속 신경 쓰고 있지 그걸로 인하여 하나님의 길이 어떤 식으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이런 점이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 계시지 무슨 하나님의 길이 있느냐, 하나님이 둘로 나뉘어져서 두 분 하나님 중에서 한 분이 이 땅에 내려왔거든요. 인간세계에 참여를 했다, 이 말이죠. 인간세계에 들어오신 하나님은 나름대로 자기 길을 가요. 율법을 주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길이 하나님의 길인 줄 오해하게 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 길은 나를 화나게 하는 길이고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네 길은 어떤 식으로든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가는 길인 것을 너와 동반되어 있는 율법이, 그걸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율법이라고 하는 건 내가 굳이 지켜야 될 말씀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의 샘플된 이 이스라엘에 있어서 광야 생활은 율법이 그냥 지켜야 될 것이 아니라 삶의 체험장이에요. 삶의 체험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있음으로써 매사가 그들의 원대로 뜻대로 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이 율법대로예요. 율법대로 되는데 내 뜻은 안 돼요. 둘 중에 어느 것 하렵니까? 내 뜻대로 되렵니까, 율법대로 되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과 광야라는 환경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겁니다.

내 뜻을 포기하지 못한 채 하나님 말씀 지켜서 내 뜻이 수월하게 이뤄지게끔 하는 꼼수를 인간은 쓰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 인간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거기 율법을 집어넣으니 사달이 나는 거예요. ‘아, 내 뜻이 나를 망치는 뜻이었구나.’ 나는 내가 나를 망친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난 항상 내 편이라고 여기면서 평생을 살아온 거죠. ‘나만 잘 되면 돼. 나만 편하면 돼. 나만 행복하면 돼.’ 이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화나게 만들었어요. 율법이 그걸 증명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광야는 뭐냐? 광야는 율법을 지킬 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스스로 자기 환경을 만들어가면서 인간이 그 율법 안에서 율법은 율법대로 지키지 못하고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키고 안 지키고 와 상관없이 율법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8절에서 10절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이 내용은 시편 95편 8-10절의 내용을 거의 베꼈는데요, 빠뜨린 게 있어요. 약간 차이가 나요. 시편 95편 7절부터 보면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하고 8절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 보면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므리바라는 장소, 맛사가 맨 므리바에요, 같은 장소인데 사건과 사건을 분리해서 표현하기 때문에 므리바, 하나님과 다투었다, 그다음에 맛사,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편인지, 우리를 도와주시는 편이면 좋겠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었으면 좋겠네. 과연 그런 하나님일까?’ 하고 인간 쪽에서 테스트한 그 지점이에요.

시험했다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할 입장이 안 되는데 감히 시험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 편인지 아닌지를 내 방식을 동원해서 측정에 나선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화나게 만든 겁니다. “네가 왜 나를 측정해? 누구 좋으라고 측정해? 네 꿍꿍이가 뭐야? 날 측정해서 네가 얻으려는 게 뭐야?”

이것은 “너 교회 나와서 얻으려는 게 뭐야?” 같은 이야기에요. ‘나 교회 나왔다. 왜? 하나님이 날 도와주는지 안 도와주는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아니면 애초부터 없는 존재인지 시험하려고 교회 나왔다.’ 그러면 그 교회는 맛사와 므리바가 되죠. 하나님과 충돌하는 곳,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장소, 그래서 몽땅 지옥 가는 집단, 그렇게 되는 거죠.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거니까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다투지 않고 시험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맛사와 므리바를 빼는 식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또 하거든요. 그런데 이 광야라는 것은 애굽의 연속이에요. 다시 말해서 광야를 경유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도 없어요. 샘플이니까요, 샘플.

모든 인간의 샘플이 이스라엘이니까 광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약속의 땅에,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도 므리바와 맛사를 경유하지 아니하면 이 땅에 태어난 존재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시험하는 중이기 때문에 시험하는 시료가 빠져버리면 하나님은 시험하지 않습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안 해요.

인간이 현미경 앞에 놓여있는 시료거든요. ‘안에 또 뭐가 들어있어 나에게 이렇게 대드나? 여기 뭐가 있어서 이렇게 나에게 달려들고 반항해?’ 이걸 테스트하는 주체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 테스트 하는 장소가 광야예요. 그리고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건 불신자든 불신자가 아니든 간에 전부 다 이 광야를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구약 이스라엘은 그런데요. 지금 여기 구약에서 맛사와 므리바, 이 장소를 분명히 언급했는데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그걸 뺐습니다. 그 이유가 굳이 이스라엘에게 한 테스트를 다른 민족에게 똑같이 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왜? 샘플이 대들었으면 다른 민족도 마찬가지에요. 이미 테스트가 끝났어요.

그 끝났다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우리의 샘플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았잖아요. 그럼 끝났어요. 내가 누구냐는 문제에 대해서, 나는 어떤 존재냐는 문제에 대해서 십자가로 이미 확정이 났습니다. 괜히 “내가 누구입니까?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물을 생각하지 마세요.

구약이 끝나고 히브리서는 신약이에요. 신약 입장에서 구약은 뭐냐? 아직 시간마저 완성되지 않은 기간입니다. 그걸 유예의 기간, 시간 유예의 기간, 시간이 아직 ‘유예’, 남아있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우리가 이 땅에서 심하게, 이 척박하고 어려운 삶의 환경에서 살아서 우리 자신이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은 구약적 발상이에요. 아직 구약적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때 구약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물이 없고 먹을 양식도 없어서 얼마나 원망을 했을까? 난 구약 사람들이 하나님 원망하는 거 충분히 이해한다.’

제가 전에 이스라엘을 간 적이 있는데 광야, 바로 맛사 그 동네에 갔었어요. 하나님께 원망한 그 장소 그걸 그대로 기념물로 해놨는데 정말 사는 거 자체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황폐한 지역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남성만 60만 대군이 와서 거길 지났으니 원망하잖아요.

그 이스라엘 사람의 한계가 그거에요.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대들었다. 야, 우리는 이런 것 밖에 안 되는구나, 알았다.’ 하잖아요. 그러나 그건 여전히 구약적 발상에 머물러 있는 거고, 신약에 오게 되면 아무리 힘든 인생 속에 살면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구약은 하나님이 만든 광야 세계가 있지만 신약의 인간들은 스스로 이 세상을 광야라고 여깁니다. 광야라고 여겨서 교회에 나와서 이 광야 설교를 듣습니다. 거기서 인간들은 어떻게 정리하느냐? ‘고생하면 언젠가 낙이 온다.’는 식으로 정리를 해요. 광야 같은 이 세상, 결혼식 할 때 주례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하죠,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겠습니까?” “예!” 서로 돕고 의지하고. 목소리에서 이미 티가 나요. ‘결혼식 끝나기만 해봐라.’

광야 같은 이 세상, 힘든 이 세상,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도리어 삶의 의욕을 부추기는 환경이에요. 힘들죠? 어렵죠? 괴롭죠? 하지만 오기가 납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이 광야라 하고 힘들다 하지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난 오기가 나서 못 견디겠다. 난 살면 살수록 이 광야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영광 돌리겠다.’ 이거 되지도 않는 이야기죠.

이렇게 삶의 의욕을 부추기는 식으로 광야를 해석해버려요. 그래서 이 광야 이야기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갑자기 얼굴에서 빛이 나면서 자신만만 해한다고요. “그들은 못난이 되어 실패했지만 나는 이 광야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거기에 또 어디서 들은풍월은 있어가지고 “이건 내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은혜로 되는 겁니다.” 혹시나 내 조직적인 지식 체계에 미흡한 게 있을까 싶어 단도리 또 하거든요.

광야라고 하는 건 인간을 살려주는 은혜가 아니에요. 그동안 살려준 은혜를 전부 회수하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은혜를 줘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줬던 은혜를 다 빼앗아가 버려요. 회수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벌써 옛날 구약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하나님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이라는 똑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구약 사람도 마찬가지고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힘들게 힘들게 살면 살려줄거죠? 그렇죠?’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동안 힘들게 산 그 보람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살려줄 거죠?’ 이런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광야라는 것은 은혜의 교체 공간입니다. 내가 살아야 된다는 은혜를 다 뺏어감으로써 ‘네가 이 환경 속에서 필히 죽어야 된다’는 걸, 은혜를 교체해줘야 비로소 약속의 땅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 교체를 했던 자가 딱 두 사람 있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도 광야라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내가 떵떵거리며 사는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되 말씀은 살리는 바로 그 상황의 완성이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알아챘어요. ‘아, 나를 살리는 게 아니구나.’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살리는 그 장소가 약속의 땅이고 그걸 통과하는 튜브같은 공간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얼마나 수난받고 모욕받고 비난을 받는지, 고생고생하는 하나님 모습을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진실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빼는 겁니다. 쭉쭉 빼는 거죠. 이사할 때 부피가 많이 나가는 솜이불 같은 건 부피를 줄여야 하잖아요? 시장에 가서 비닐 하나 사 이불 넣고 자크 채우고, 작은 구멍만 열어서 진공청소기 넣어서 윙~, 하면 그 안에 있는 공기는 쭉 빨려가서 이불 덩어리만 남아있게 되죠.

광야가 바로 그것이에요. 모든 인간 요소는 쭉쭉 다 빼버리고 오직 진리 덩어리만 달랑 남게 만드는 것, 진리만 남는 거예요. 율법만, 하나님의 정신만 덩어리로 남는 것, 그게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데리고 약속의 땅까지 이사하는 방식이에요. 인간의 것은 일체 하나도 섞이지 않아야 해요. 다 뽑아야 돼요.

그럼 신약의 성도는 뭐가 되느냐? 내가 되는 게 아니에요. 나라는 건 다 뽑았으니까 내가 되는 건 없어요.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고, 나 구원이 되었다든지 뭐 이런 게 없어요. 나라는 것은 구원이고 뭐고 다 빼버렸으니까. 남아있는 것은 진리의 덩어리, 그리고 그걸 감싸고 있는 진리의 보자기밖에 없어요. 보자기 밖에 안 되죠.

인간은 그런 사람 없어요.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사람이 아니고 진리 덩어리에요. 껍데기만 사람 모습이죠. 이게 로마서 9장 21절에 나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이렇게 두 개의 보자기를 만들어요. 둘 다 하나님의 속성이 들어옵니다. 하나는 사랑의 속성이 들어오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속성이 들어와요. 말라기에 보면요, 말라기가 구약의 끝자락입니다. 끝자락에 인간은 다 빼버리고, 인간은 보자기의 껍질에 불과하고 신약이 돼야 나타날 성도가 등장해요. 성도는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가 말라기 1장 2절에서 3절에 나옵니다.

거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야곱과 에서가 형제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형제간이라는 그 자체를 계시로 사용해서 야곱이라는 계시 따로, 에서라는 계시를 따로 했는데 야곱이란 계시는 사랑 덩어리, 에서라는 계시는 저주 덩어리예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광야라는 공간을 통해 생산해냅니다.

이러나저러나 나라는 것은 쭉쭉 다 뽑아내죠. 그래서 광야라는 자체를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간단한데요. 내용이 너무 함축돼서 듣기는 어려울 거예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했다, 또는 지나왔다, 이게 구약적 관점이라면 신약적 관점은 성도가 곧 광야다, 움직이는 광야다, 이렇게 보면 돼요. 왜냐하면 시간적 유예가 있는 게 구약의 광야라면 신약에서는 시간적 유예가 없어져요. 시간의 완료가 돼요. 광야 시절이 인간 속에 계시라는 이름으로 성도 안의 본질로서 차곡차곡 담기게 돼요. 진리 덩어리로서. 그래서 성도가 가는 쪽은 그 존재 자체가 불신자에게 부딪힘이 되고, 다툼이 되고, 그들에게 시험 거리가 되는 거예요.

‘너 뭐야? 같은 DNA를 가진 네가 뭔데 말이 안 통해? 너 내 아들 맞아? 당신 내 아내(남편) 맞아? 같은 부부인데 왜 말이 안 통해?’ 이러고 있단 말이죠. 성도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 자체가 성도를 그렇게 만들어서 그래요. 자, 어느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지 성경적으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3절과 14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면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여기서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한다.’ 이 대목 체크, 그리고 다음에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여기서 ‘광야’라는 데에 체크, 그 두 개를 합쳐보면 보이지 않던 악마의 행함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바로 하나님의 율법과 동행하는 백성이 지상에서 움직이고 있을 때 포착이 된다는 거예요.

악마도 포착되고 하나님의 언약 사용도 같이 포착이 되면서 역사의 실제 사건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 자체가 실제 사건들을 역사 속에 일으켰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통 역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사람이 일으킨 거잖아요. 뭐 역사에서 몽골이 침입을 했다든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는 것은 다 사람이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는 것 말고 뱀이, 악마가 하는 일이 실제로 역사 속에 하나의 흔적으로서 드러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남자를 낳은 여자가 등장해야 해요. 남자를 낳은 여자, 메시아를 품었던 여자가 등장해야 돼요. 이러니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설교에서 이야기하는 광야가 뭐냐? 말씀, 율법, 언약이 주인공이에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냥 시다바리라고요. 말씀이라는 건 뭐냐? 주의 이름이 말씀과 함께 등장하잖아요.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광야는 보이지 않는 자가 주인이에요. 보는 것만 보는 인간들은 종이 돼요. 주인이 못 되고 종이 된다고요.

그게 민수기 22장 25절에서 29절에 나오는데 여러분 다 아는 거니까 그냥 제가 줄여서 설명해보겠습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데 그때 25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발람이 나귀를 탔는데 나귀가 뭘 봤느냐 하면, 나귀가 주의 천사를 봤어요. 그런데 누가 주의 천사를 못 보고 있느냐? 나귀 위에서 나귀를 종 부리듯 부리고 자기가 나귀를 타는 주인이라고 여기는 발람 선지자는 천사를 못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광야에서 일어나요.

광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은, 누가 말발이 센가 하면, 사람인 발람이 말발이 센 게 아니고 사람에게 종노릇하는 나귀가 말을 해 버립니다. 따지고 덤벼들어요. “나 아니었으면 당신 죽었어.” 발람은 그것도 모르고 ‘이 진돗개 같은 게 왜 말을 안 듣지?’ 막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 나귀가 하는 말이 딱 이거에요. “왜 때리느냐? 누가 잘못했는데 날 때리냐?” “이게 어디서 대들어?” 누가 누구한테 대드는데? 발람 네가 하나님한테 대든 거예요.

인간들은 이 세상이 힘든 세상인 걸 누구나 다 알아요. 어린 애가 아닌 이상은 다 알아요. 인간은 자기가 태어나 사는 이 세상이 광야가 안 되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빨리 광야에서 벗어나 약속의 세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요. 먼저 그게 성취된 사람은 결혼을 하고 그게 안 된 사람은 결혼을 계속 유예하고. 못 하죠, 뭐. 나이 서른도 안 됐는데 결혼했어요, 우리 찬호 씨. 아마 내가 예상하건대 신랑 신부 양쪽 친구들 엄청나게 올 겁니다. 왜? 아무도 결혼 안 했으니까. 대단해요~.

인간은 나름대로 이 세상이 광야 아닐 거라고 여기고 거기서 자기만의 세계관을 만듭니다. 그걸 어디서 가르치는가? 학교에서 가르쳐요.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생물적으로, 물리적으로. ‘이 변화무쌍한 자연 세계, 험난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야 한다. 이게 인간의 지혜고 굴욕을 이기는 의지의 인간들이다. 지금껏 인간세계는 이렇게 문명을 이뤄왔다. 따라서 후손들이여! 자연이 험하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코로나가 범람하더라도 힘내자. 지혜를 모으고 이겨내자. 광야? 우리 힘으로 버텨내자.’ 이 교육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줄곧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광야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이 세상은 자기를 살리기 위한 터전, 땅, 환경 개선, 탄소 줄이기, 메탄 가스 줄이기, 온실 효과 줄이기, 이런 식으로 해서 후손들에게 살만한 세계를 물려주자, 이게 구호가 되는데 놓치고 있는 게 출애굽기 17장에 있는 이 말씀을 놓쳤어요.

8절에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아말렉이라는 존재가 등장한다는 사실, 광야를 통과하면서 아주 핵심적인 사건이 아말렉이 이스라엘에 달려드는, 전쟁하는 이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창세기 36장 12절에 보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이 아말렉입니다.

제가 아까 말라기 말씀드렸죠. 에서는 끝까지, 끝내 저주 덩어리가 돼야 돼요. 그리고 같은 쌍둥이 동생이지만 야곱은 끝내, 끝내 이기리라 하잖아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끝내 사랑 덩어리가 돼야 돼요. 내가 사랑 받는다, 가 아니라 거기서 나를 빼세요. 진공청소기를 가지고 나를 빼세요. 그냥 우리는 굴러가는 사랑 덩어리.

애들 사탕 빨다가 땅에 떨어지면 막 굴러가잖아요. 나와 사탕이 잠시 분리돼요. 사탕은 땅에서 막 굴러가지요. 그 굴러가는 사탕, 그걸 사랑이라고 봅시다. 사랑은 나를 차버리고 사랑 그 자체로 굴러가게 되어 있고, 내가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가 나와 떨어져서 저주 자체가 굴러가는 거예요.

인간의 ‘나’라는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인정한 적이 없어요. 나는 둘 중에 하나로 붙어야 돼요. 사랑에 붙든지 저주에 붙든지. 이게 인간입니다. 이게 피조물의 역할이에요. 사랑과 저주가 우선이지 인간은 달라붙어 있는 흙덩이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된다는 것은 애초부터 성경에 처음부터 끝까지 나왔던 적이 없어요.

구약은 하나의 시간이 유예된 기간이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상대해 주는데 신약이 되어버리면 이제 인간을 상대할 수 있는 그 기간이 끝나버려요. 이제는 인간 대신 누구를 상대하느냐? 하나님이 예수님과 상대합니다. 예수님의 속성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저주를 저주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고, 또 하나는 사랑을 사랑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공의의 능력과 그리고 사랑의 능력, 자비의 능력과 공의의 능력 둘 다 예수님이 함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스토리에요. STORY OF JESUS, 예수님 이야기에요. 우리 이야기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광야, 고생하면 낙이 올 거라는 거, 희생한 만큼 덕을 볼 거라는 거, 인간 자기가 힘들여서 자기를 살리려는, 그래서 언젠가는 빠져나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없애버리는 방법은 바로 인간이 감당 못 할 아말렉, 곧 저주 자체와 전쟁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말렉은 바로 저주 받아야 될 에서의 손자, 에서의 직계 자손이에요. 따라서 아말렉은 땅을 노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노립니다. 그것도 특수한 사람, 어떤 사람?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을 노리는 게 아말렉이고, 그 아말렉은 요한계시록 12장을 구약적 광야에서 미리 맛보여준 거예요. 남자를 잉태한 여자를 공격하는 것, 그럴 때 악마는 역사적 실체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수님과 마귀 싸움에 놀아난 겁니다. 인간은 주인공 아니에요.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을 품고 있다는 단지 그 이유뿐이에요. 악마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의 왕 되세요, 땅은 우리가 먹겠습니다. 이 세상은 악마가 왕이 되는 세계가 되겠습니다. 그걸로 해서 우리는 휴전하고 퉁 칩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데가볼리의 귀신 들린 자를 찾아왔잖아요. 그때 귀신이 하는 말이 “왜 오십니까? 그냥 우리를 이대로 살도록 놔두지, 우리 인간들끼리 살도록 놔두지 왜 하나님이 사람 사는 땅에 오십니까? 하늘에 그냥 계시지. 시간이 안 됐는데, 때가 안 됐는데 왜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이거 사람 말이 아니에요. 귀신 말입니다. 귀신의 뜻은 한결같아요. 악마는 한 번 내뱉은 말 철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신으로 바꿔줄게. 선악과는 잊어라. 선악과는 네 속에 들었어. 선한 양심 악한 양심, 네가 이제 파악했잖아. 이제 선악과 아는 지식으로 우리 너도 나도 다 같이 신처럼 살자. 이게 이상적인 인간세계잖아. 네 속에서 거부감 일어나지 않지?”

거부감이 안 일어나요. DNA 가진 인간 치고 거부감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고 싶어요. 내 세계가 절대적 세계이고 싶어요.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천국가고 싶어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가고 싶은 거예요. 나를 안 다치고 구원받고 싶은 겁니다.

그 악마의 아이디어에서 만들어 낸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기독교라는 것이고 그게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안 다치고 천국 갈 수 있는 거예요. 보람상조에요. 그런데 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하는 인간만들기는 아주 특수한 인간이에요. 이걸 악마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보통 광야가 물 나오고 고기 나오면 살만하다,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순진한 생각이고 아말렉은 아예 이, 스, 라, 엘, 이라는 그 종족 자체가 없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광야에 보내서 아말렉이, 악마가, 저주받을 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남자를 품은, 메시아를 품은 여자를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체험케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출애굽기 17장 1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계시지요. 또 계시가 추가된 거예요.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계시가 만들어내는 작업 됨, 생산된 계시가 이스라엘화 하면서 움직이는 겁니다.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이 하나님이 계시는 세상에서 아예 네가 아예 마땅히 없어져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때 이스라엘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이긴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출애굽기 15장 12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땅이 그들을 삼켰다. 인간들은 부동산 없이는 못살아요. 땅이 있어야 살아요. 땅이 멀쩡하고 그래야 내가 땅에서 살아요. 귀농을 하든지 귀촌을 하든지 살 수 있어요. 땅이 엎어져 버리면 우리가 기댈 마지막 언덕은 날아가 버립니다. 살 곳이 못 돼요, 땅 자체가 없어버리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땅을 엎어버려요. 땅을 엎어버립니다. 땅을 엎음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덕 보고 내가 살 수 있는 마지막 열두 척의 배까지 다 몰살하게 만들어요. 그게 광야입니다. 그게 광야에요. ‘나는 이미 엎어졌다.’ 그걸 이미 눈치챈 자가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아하, 하나님은 나를 살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는 언약을 살리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감을 잡고 그것을 알아채고 그것을 기뻐하는 자가 갈렙과 여호수아예요. 그래서 갈렙과 여호수아에 있어서의 약속이 땅의 모든 토속민들은 엎어질 대상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땅을 믿고 살아요. ‘땅이 있으면 나 산다. 땅 없으면 나 죽는다.’ 이걸 다 엎어버리는 거예요.

‘약속 있으면 살고 약속 없으면 죽는다.’ 이게 아니고 살만한 땅이 있으면 나는 살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에게 살만한 땅을 주시고 환경 주시면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하고 기뻐하겠습니다.’ 이게 엎어질 에서의 자식이고, 저주받을 자식이고, 이게 엎어질 인간들이에요.

따라서 아말렉전쟁을 하는데 아말렉을 이스라엘을 공격한 자, 다시 말해서 감히 건방지게 감히 영원히 저주받을 자들이 영원히 사랑받을 자들을 공격하는 환경으로써 광야를 사용하신 거예요. 영원한 사랑, 영원한 자비에 대해서, 값없이 의롭다 함에 대해서 공격하는 그자가 우리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악마 그 자체에요.

여러분, 악마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물론 악마는 안 보이지만 악마의 탈을 쓴 자들이 바로 남자를 품은 여자를 공격하는 자가 악마예요. 제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괜히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복음 이야기해서 성질 돋우지 마시고요. 그것은 일종의 승리감에 도취 되어서 복음 이용해서 자기 승리하는 재미로 살아가려 하는데 please~, 제발 그러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쪽에서 시비 걸게 되어 있으니까 그때까지 그냥 기다리세요. 전도한답시고 괜히 다가가서 ‘너 복음 알아?’ 이런 식으로 자꾸 이상한 문자 보내지 마시고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오게 되어 있어요.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영원히 저주받을 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한 마디입니다. “어쨌든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성경에 보니까 광야가 나오는데요. ‘오케이, 내가 광야 인정합니다. 광야 인정하는데 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사람은 살아남았고 그 뒤에 백성들도 약속의 땅에 들어갔잖아요. 광야라는 것은 괜히 겁주는 것이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교훈 삼으라고, 한번 실패했으니까 너희는 이제 성공해야지, 라는 교훈을 주려고 놀이동산의 일종의 코스처럼 줬겠지’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런 해석의 결국의 본심은 뭡니까? ‘성경해석이 어떻게 되든 나는 모르겠고 어떻게든 나는 애 데리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달랑 그것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너 무섭지?” 인간은 죽어 있는 게 무서운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 무서워요. 살아 있는 내 모습이 제일 무서워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뭘 빼는가? 쏙 빼는데 ‘무서워함’ 자체를 빼버려요. 그리고 나의 죽음 자체를 빼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으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죽는 것 하고 너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죽음은 내 일이지 네 일이 아니다. 너와 상관도 없는 죽는 일에 네가 왜 벌벌 떨고 있느냐?”

여러분이 그동안 평생을 살아가면서 뭘 착각하신 거예요? 이 착각, 우리가 하는 착각에 대해서 아주 친절하신, 친절에 넘치시는 우리 주님께서 사사기 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착각하고 있는지 우리보다 착각의 선배가 있어요. 착각의 선배가 이 약속의 땅, 광야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약속의 땅에서 어떤 착각을 했는지 나옵니다.

이름이 기드온이예요. ‘기드온’이라 하면 한국교회 한창 부흥된다 하던 6, 70년대 거리의 간판에 기드온이라는 것이 많았어요. 기드온 제과점, 기드온 미용실…, 지나가던 사람이 ‘기드온이 뭐지?’ 해서 전도가 된다고 한 거예요. 기드온 제화점, 이런 거요. 기드온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제가 70이 되었으니 벌써 50년이 지났어요, 50년 지나고 기드온을 다시 봤어요. 사사기 6장 36-40절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했잖아요. 기드온이 시험을 해요. 그러니까 광야나 약속의 땅이나 성질이 똑같아요.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 아닙니다. 광야가 연장되고 확장된 장소가 약속의 땅이에요.

거기서 기드온이 하나님께 시험합니다. 양털 한 뭉치를 가지고 하나님을 테스트해요. “제가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것을 좀 용납해 주세요.”라고 부탁합니다. 처음에는 한 번만 하려고 했어요. 이슬이 양털에만 내리고 그 나머지 마당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아서 바짝 마른 땅이 되도록 해주시면 이번 일이 내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생각이라는 것을 제가 인정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제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내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36, 37)

그러니까 기드온이 얼마나 용의주도합니까? ‘하나님 믿는 이것이 내 생각일거야. 남들 안 믿는걸 봐. 남들 복음 안 받아들이잖아. 이것은 어디까지나 뭔가 살아온 환경이 나를 이렇게 착각으로 몰아넣은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 남들이 하지도 않는 짓을 내가 왜 해? 진리라 하는 것은 보편적 지식이, 상식이 진리가 되지 나 혼자 우기는 것이 진리일 수 없잖아. 그러면 남에게 욕 얻어먹잖아. 내가 나한테 속아넘어가면 안되지. 단도리 제대로 해야 돼.’ 이런 생각을 기드온이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한테는 고맙지요.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한 번 보여달라는 거예요. 보여줬어요. 아침에 가니 양털을 짜보니 물이 주르르 나와요. 38절에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찌기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여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땅을 만져 보니까 이슬이 하나도 없어요. 적어도 인간 같으면 이쯤 해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나와야지 이건 또 뭡니까? “죄송합니다만 한 번 더.”

뭐 삼세판입니까? 한 번 더. 이번에는 반대로 합니다. “양털에만 물기가 없고 그 외에는 축축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여 내게 진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나로 다시 한번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39, 40)

이게 무슨 뜻인지를 지금껏 몰랐는데 광야를 생각하면서 제가 처음 알았어요. 양털 뭉치 안에 인간의 죄가 모인다는 사실이에요. 죄란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로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하나님 쪽에서 연락이 와야 비로소 내 안에 죄가 모이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그것, 처음부터 나는 죄 덩어리라는 것을 내가 그동안 몰랐는데 내가 주님을 테스트하는 그것이 내가 죄인인 것을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테스트였어요, 그게!

그리고 그 테스트하는 환경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 광야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모호하거나 관념이 아니에요. 우리는 한시도 한순간도 매일같이 하나님을 테스트 안 하고 지나간 적이 없습니다. 매일 테스트해요. ‘이렇게 해요? 저렇게 해요? 하나님, 어느 선택을 하면 내가 자식하고 밥 먹고 살겠습니까?’ 맨날 테스트해요, 이 땅에서. 맨날 테스트합니다.

인간은 두 체제를 원해요. ‘그냥 하나님 할아버지는, KFC인가 있지요, 금복주 할아버지처럼 그냥 하늘에 계시고 땅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가 도움 요청할 때나 오셔서 기적 베풀어주옵소서.’ 이게 두 체제에요. 시스템이 앞뒤 두 개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묵사발 난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이 광야에 의도적으로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주의 이름이 이 땅을 찾아와서 인간을 관통했다는 거예요. 인간세계를 관통한 거예요. 인간이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거기서 맛사와 므리바가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수성은 뭐냐? 없는 게 나와야 돼요. 물 없습니다. 양식 없습니다. 없는 게 하나의 샘이 되어서 나올 때 광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신약의 성도가 대화할 때는 없는 게 나와야 돼요. 없는 것을 주고 받아야 돼요. 이걸 아말렉, 다시 말해 저주덩어리가 알고 공격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이 땅에 없던 분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것도 인간세계에 없는 것을 주십니다. 그게 선악 세계에는 없고 따로 감추어놓은 생명 나무에서만 나오는 것, 인간에는 없는데 하나님에게만 있는 생명을 줘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아말렉이 이것을, 이스라엘을 공격하지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뭘 집어넣었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이스라엘 존재가 아예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도 에서의 그 후손 이스마엘의 소원이 있습니다. 죽자 살자 알라의 이름으로 그렇게 전쟁을 벌이고 이스라엘을 인질 삼고 공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자체가 이 세상에서 도말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데모까지 막 하지요.

아말렉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은 무기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때 없는 무기가 등장해요. 광야라는 곳이 하나님이 아말렉과 싸우는 그 공간도 광야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내치는 그곳이 광야입니다. 왜냐하면 물 없다고, 물 달라고 원망했기 때문에. 양식 없다고 원망했잖아요. 다퉜잖아요.

물이 있을 것 같으면요,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우리가 물을 찾고, 양식을 찾아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인도한다면 굳이 광야라는 코스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광야 없으면 천국도 없어요. 그게 오늘 히브리서의 말씀이에요. 광야 없으면 천국도 없어요. 광야를 거쳐야 비로소 천국이 있어요.

광야라는 것은 뭐냐? 없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거예요. 물이 없는데 물이 나오고요, 양식이 없는데 양식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없는데, 내가 성도가 아닌데 성도 되게 하는 현상이 광야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뭘 통해서? 가만있는데 저주받을 자들이 달려들어요. 우리가 이길 무기도, 재간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만 품을 뿐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서 아말렉이 패배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지팡이, 지팡이가 겨냥하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 보이지 않는 이슬, 보이지 않는 이슬 쪽과 이슬 없는 바짝 마른 그쪽, 그쪽이 이슬 쪽, 죄로 축축한 쪽과 동반해서 일어난 전쟁이 기드온 전쟁이에요.

너 혼자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네 생존, 생계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죽는 이 땅에서 주님이 어떻게 죽었다가 영생을 얻고 부활을 얻는 그것을 보여주는 세상으로써 네가 여기 이 세상에 합류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끝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왕 죽으면서 뭐 할건데요? 이왕 죽는 거 뭐 할겁니까? 바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양털 솜이 축축하게 이슬로 젖는 것처럼, 무거워서 더는 얹을 수도 없을 정도로 솜 같은 우리 인생 나 위주의 죄로 꽉 채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없는, 있는 내가 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폼내는 있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없는 주님, 보이지 않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모든 인간의 지혜와 모든 지식을 어리석게 만들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피가 똑똑해서 살려는 우리를 구원해내는 놀라운 이 동행을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광야 안에서 우리의 모습이 나를 살리기 위함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나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나는지, 꽉 차 있는 진리가 못난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진리답게 드러나는지 하루하루 주께서 허락한 인생을 살면서 남은 인생 전체가 주님의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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