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만들기
2024년 4월 2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3:4-6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3: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하나님의 집’은 야곱이 형 에서와 헤어지면서 나타납니다. 이는 에서는 따로 자기 집 만들기에 나선다는 뜻입니다.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창 36:6)
이는 에서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집과 상관없이 혈통을 이룬다는 겁니다. 야곱의 앞길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언약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집’이란 곧 언약이 이 지상에서 스스로 이루어 나가시는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집이 이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육신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실제로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 신체의 실제성이 천국의 실제성을 말해준다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이방민족의 실제성이 지옥의 실제성을 나타냅니다. 즉 ‘나 천국 가는 것’만 믿을려고 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지금 실제로 지옥가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하나님의 집’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공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집’이 되는 겁니다. 마치 거미가 자기 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실을 뽑아서 자기 집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은 인간 육신의 실제성으로부터 언약의 유무에 따라 실제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과 만났던 지역을 ‘벧엘’이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벧엘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무려 그동안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다시 돌아오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수집하고 가졌던 우상들의 패물과 물건들을 새롭게 벧엘에서 제사하면서 땅에 묻어버립니다. (창 35:4)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없는 형 에서의 노선은 그들이 믿는 신은 없이 빠진 신, 곧 우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상’이란 나를 빼지 못하고 섬기는 신을 말합니다. 신의 명칭이 뭐가 되었던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방인들의 기도에 이런 모습들이 가득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그렇다면 천국백성인 성도는 어떻게 기도하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기도의 재료가 되는 존재로 개입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해야 할 성도 자신의 일이 애초에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걱정할 일도 애초에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자신의 집을 짓는데 있어 합류당한 처지에 있습니다.
뜨거운 팬케익 위의 놓인 하나의 각설탕처럼 결국 녹아 없어질 때, 그 단맛이 팬케익에 흡수되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하여 야곱의 외부환경은 점차 야곱의 내부 환경이 됩니다. 집이 없었던 야곱에게 드디어 집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도 언약으로 말미암는 일입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창 30:30)
이 야곱의 집은 장차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하나님의 집을 위해 개시가 되면서 중도에 모세를 거치게 됩니다. 이 노선에 공통속성이 흐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때리기 위해 언약을 품은 자기 백성을 때리시는 겁니다. 이 아픔에 참여하는 자가 이미 하나님의 집 사람입니다.
이런 합류의 예를 들어오면, 마가복음 7:27-28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녀와 개를 구분하시는 예수님의 안목에 이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은 합류합니다. 인간에게 시선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시선을 대상을 살피게 되면서 자기 욕망충족에 합당한지를 검토하게 됩니다. 그 대상에 합류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그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거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이 이방여인은 개와 자신을 합류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 비유’가 됩니다.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가 거리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제사장, 다른 한 사람은 레위인입니다. 그들은 강도 만난 자라는 대상에 합류하고 싶지 않고 거리만 남기고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라미아인은 강도 만난 자와 자기를 합류시켰습니다. 이 이야기에 예수님 자신이 하실 일을 미리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겁니다. 도대체 어떤 자리가 하나님의 집을 이루는 개시점이 될까요? 그 높은 곳? 아닙니다. 저 낮은 곳? 아닙니다. 인간들이 상상조차 못하는 더 낮은 배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 집사와 이디오피아 내시가 나옵니다. 그들의 만남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보면, 그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낮은 곳’이 나옵니다. 성령에 의해서 내시는 이 낮은 곳에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곧 ‘합류’입니다.
성도는 이처럼 주의 이름과 끊어지지 않는 이유는, 거기서 하나님의 슬픔이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없는 자들은 자기 욕망에 본인들이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를 대표할 대표 개념을 찾지 못해 허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집’에 있는 자들은 자기 육신에 하나님의 율법으로 새겨지게 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신 11:18)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성도는 이미 천국이라는 환경의 일부가 되어 있고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환경의 변함을 보여주기 위해 성도는 본인의 자아도 그 사랑에 연동해서 같이 변하는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모델이 아니라 예수님이 모델임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4강-히브리서 3장 4-6절(집 만들기)240428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3장 4-6절입니다.
히브리서 3:4-6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여기 하나님의 집이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나오느냐 하면, 야곱으로부터 나오죠.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과 분리되면서 에서와 따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삼촌 집으로 가는데 거기서 밤중에 꿈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에 개입했습니다.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할 때에 16절에,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세기 28장 16절의 말씀에서 야곱이 그동안 몰랐다고 하는 대목이 나와요. 뭘 몰랐는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자기가 알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여기서 정리가 되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고 하나님께서 야곱과의 만남에서 없던 집이 새로 생긴다. 하나님께서 언약, 약속을 통해 야곱에게 주게 되면 그 만남,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의 집이 장소냐? 야곱은 그걸 장소로 여겼는데 그건 야곱이 오해한 겁니다. 벧엘, 하나님의 집은 장소가 아니고 여정이고 과정이에요. 야곱이 하란까지 갔다가 오면서, 벧엘로 시작해서 벧엘로 올라오는 데 20년 걸렸습니다. 20년 동안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 어떤 변천 과정을 겪어서 그 속이 채워지는가를 야곱의 일대기를 통해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떤 집이라고 하면 거주해서 들어갈 곳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3장에서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그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집 되기’에요. 집이 되는 것. 성도는 ‘천국 되기’이고 불신자는 ‘지옥 되기’에요. 자신이 지옥이라는 집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자연물에서 그걸 찾아볼 수 있는데 거미에게는 자기 몸통만 있고 집이 없어요. 그런데 거미가 입에서 줄을 뿜으면 그게 거미집이 됩니다. 거미가 먼저 있고 본인이 지을 집이 자기 몸통에서 나오는 겁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언약은 야곱이라는 인간과 만나고 거기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내뿜듯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 여호와의 집이예요.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봐야 가든 말든 하지 천국이 눈에 보이질 않는데 과연 들어갈 수가 있는 건가?’ 보통 그렇게 스스로 의심하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교회 아무리 다녀도 그 의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이 실재하고 있다, 인간이 몸통이 실재하고 있으면 천국도 실재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의 몸통이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과 만나는 거예요. 사다리 타고 하늘의 천사가 언약을 이루기 위해 야곱의 몸통을 찾아올 때 야곱이라는 몸통, 육신이 실제로 있잖아요. 실제로 있으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도 실제로 있다는 겁니다.
뭘 보고 아느냐? 야곱을 보라는 거예요. 야곱의 인생이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갔어요. 하란으로 가면서 거기서 20년 동안 보내고 가축 떼와 처자식 합해서 15명이죠, 아들 12명, 딸 하나, 부인 두 사람, 그렇게 데리고 오면서 하란에서 브니엘, 브니엘에서 숙곳, 숙곳에서 세겜, 세겜에서 벧엘, 벧엘에서 베들레헴, 베들레헴에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습니다, 그다음에 헤브론, 아버지 이삭이 있는 브엘세바, 다음에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 여정이지요.
그 여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집이 어떻게 형성이 되는가? 야곱이 이렇게 인생을 살았다고 ‘아, 하나님의 집은 이런 내용으로 채워지는구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똑같은 인간의 몸통을 가지고 육신을 가졌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재료가 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집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이 두 개를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에 나온 내용이에요.
야곱이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 것은 언제 있었느냐? 제가 아까 말씀드린 형과 헤어질 때예요. 그러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야곱에게 어떤 일이 있는지도 주목해야 하지만 야곱과 헤어진 형 에서는 어떻게 살았는가예요. 에서는 나름대로 자기 집을 지어요. 야곱도 실제로 몸통, 몸인 육신이 있었고 에서도 육신이 있으니까 둘 다 확실하게 없다고 말 못 해요, 둘 다 인간의 신체를 가졌으니까.
그런데 하나의 신체, 에서의 신체는 신체에서 신체, 신체, 신체만 보여줘요. 그런데 야곱은 신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로서 천국의 실재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특이하죠. 야곱은 어떤 신체를 보여주는가? 창세기 35장에 보면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사다리 꿈을 꾸고 난 뒤에 삼촌 집을 거슬러 오는데 20년 걸렸고, 그다음에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나님께서 지시를 내립니다.
지시를 내릴 때 어떤 점이 달라졌느냐? 창세기 35장에서 두 번째로 벧엘로 갔을 때는 그동안 섬겼던 모든 우상과 패물과 액세서리와 모든 신상들을 거기에 묻어버려요. 묻어 버리고 거기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육신을 갖고 몸통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천국을 간다는 말은 뭐냐? 내가 골라잡아서 가는 게 아니에요. 내가 골라잡고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친히 내 몸통을 가지고 천국의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인간의 모습, 어떤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그 여정을 밝히면서 결국 그 여정을 거치면서 일어나는 변화는 뭐냐?
바로 이 땅의 모든 것을 우상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우상을 이제 묻어 버리는 거예요. 뭐 부처나 알라신 그런 걸 묻어 버리고, 조상 숭배 이런 것도 묻어 버리느냐?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자기 잘난 체하려고 그런 걸 했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성경이 뭘 묻어 버리느냐는 거예요. 그런 걸 알려면 에서, 하나님의 집과 관련 없는, 같은 아버지에서 나왔지만 저주받는 에서 쪽에서 그들의 하루 일과, 그들은 평생 무엇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에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야곱의 가치가 없어져요. 그러면 에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에서 이전에 할아버지가 있어요.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 때에 언약으로, 약속으로 개입했을 때 또 둘로 나눠져요. 한쪽은 이스마엘 쪽이고 한쪽은 이삭 쪽입니다. 이삭은 노선이 서로 달라요. 그래서 이삭 계통으로, 야곱 계통으로, 요셉 계통으로, 모세 계통으로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로 이렇게 계통화가 될 때, 하나님의 집이 나중에 예수님으로 완성이 될 때 저쪽으로 쪼개져 나간 하나님의 집과 연관되지 않은 저쪽 인생들은 도대체 머릿속으로 뭘 생각하고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는가가 성경에 나온다, 이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에서가 누구와 혼인하느냐 하면, 이스마엘 쪽과 혼인을 해요. 거기서 나오는 게 에서의 집이에요. 그런데 이쪽 야곱의 집은 없어요. 하나님의 집이에요. 실제적으로 인간의 몸통, 실제로 있는 인간의 몸통을 가지고 천국이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게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난 교회 와서 하나님 믿으니까 천국 간다고요? 그러면 여러분이 보여줘야 할 이스마엘의 모습은요, 에서의 모습은요? 그게 여러분 속에 들어있는 그리스도에 의해 추방되어 있고 “너는 아니야.” 하고 쫓겨났던 그 쓰레기, 그 쓰레기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확인이 되느냐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 적용시키면 20대 때 그때 교회 안 다녔을 때예요. 20대 초반에 가끔 미팅하고 할 때 대구의 중심가가 향촌동, 동성로 이쪽이 다운타운이었거든요. 대구의 젊은 애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 다방에 앉아서 세 시간, 네 시간, 성냥개비 부러뜨려서 쌓아가면서 흘러 나오는 팝송 들어가면서, 하이웨이, 캘리포니아 드림, 이런 거 들어가면서 그때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네 시간 동안 수다 떨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는 거예요.
그때 젊을 때 그들은 재미나게 서로 이야기를 하고 이바구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지만 나중에 보니 딱 두 자로 정리가 돼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욕망이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집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관심조차 없어요. 그저 욕망이었습니다. 욕망을 어떻게 구체화하는지 그거였어요.
욕망을 왜 이야기하느냐? 욕망 속에 자기가 소멸되지 않고 소실 되지 않기 위해 이야기 한 겁니다. 욕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뭐냐? 내가 얼마나 가질 수 있느냐, 내가 어느 정도로 끌어모을 수 있느냐 그거였어요. 지금 지나고 나서 보니까 그 뜻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에서와 이스마엘의 관심이 전적으로 거기에 있었어요. 복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내 것으로 전환 될 수 있는지, 남의 것이 내 것으로 어떻게 전환될 수 있는지 거기에 치중했던 겁니다. 그 이스마엘과 에서의 가문이 마지막 때까지 확장되는데요, 그 확장 된 것을 이방 민족이라고 하고, 그 이방 민족이 믿는 신이 우상이라고 되어 있어요.
우상이라는 것은 명칭 자체가 의미가 별로 없어요. 힌두교 시바신인지, 알라신인지, 여호와인지, 예수인지 그건 아무 의미 없고 그 신을 믿는 이유는 내가 소멸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유지하면서서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신을 동원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집과 전혀 관련 없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 되기, 지옥 만들기의 일원이에요.
자기가 뿜어내는 그 거미줄이 자기를 칭칭 감아서 그게 지옥이 되게 하는 거예요. 죽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인간은 이미 지옥 되기를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을 했어요.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상 섬기는 불신자들의 어떤 변화가요, 그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변화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소멸하게 하는 변화가 아니고,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의식으로 다가와요.
예를 들어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부산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어떤 대학교 행정실에 어떤 아주머니가 교회를 다녔는데 자기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전까지는 대충 교회 다니다가 애가 아파 죽게 됐을 때 그때부터 빡세게 기도해 응답을 받아서 아이가 그 병에서 낫게 되어 ‘아,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이구나.’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 저게 바로 기독교 우상이지.’ 그게 바로 우상인 겁니다. 자기가 잃어버린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이 더욱 강화되었어요. 뜨거운 팬케이크 위에 각설탕 하나 딱 놔 보세요. 시간이 지나면 녹아 없어지잖아요. 그게 소멸이에요. 야곱도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자기 것 챙기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만나면서 언약과 만나면서 어느새 야곱이 소실돼요, 소멸돼요.
야곱이 소멸되는 데 그 소멸이 전체가 아니고 나중에 야곱이 아파요. ‘세상 살다가 없어지면 할 수 없지 뭐. 허무한 게 세상인데 없어지면 없는 대로 살지.’ 이게 아니고 그거보다 더 내려가요. 그 과정 속에서 야곱에게 난데없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기지 말아야 될 아픔이 발생 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집을 만들기 위해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의논을 했는데 그 의논 중 하나가 아버지가 아들을 때리는 겁니다. 저주받으라고 때려요. 그러니까 야곱이 아픈 것은 아버지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때리기 위해서 야곱 자신을 때려버리는 거예요. 그 때림, 그 아픔을 공유하고 거기에 합류될 때 비로소 야곱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응답받아서 자식 소중한 걸 알았다고요? 나중에 자식이 결혼하게 되면 아마 이런 이야기 할 거예요. 엄마가 자식 보고 “나 사는 거? 다 너 때문에 산다.” 이렇게 이야기할 겁니다. 그러면 그 자식이 무슨 이야기 하겠어요?
“엄마는 엄마 인생사세요. 엄마 인생에 날 끌어들이지 마세요. 부모는 내 일부일 뿐입니다. 엄마는 내 일부에요. 그런 소리조차 부담됩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요양병원에는 넣어주겠는데, 비용도 대겠는데 나 너 때문에 산다는 그런 이야기는 제발 좀 그만하세요.” 에서가 에서의 자식을 낳은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집, 천국이죠, 신약에 오면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 천국을 위하여, 인간의 몸이 실재하니까 거기부터 출발해서 천국의 실재성을 보여주고, 그뿐만이 아니고 지옥의 실재성도 보여줍니다. 보여줄 때 하나님만이 알고 있던 아픔을 그 안에 삽입을 시켜주는 거죠. 삽입을 시키는 그것이 요셉의 여정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서 형인 에서가 자기를 자꾸 죽이려고 하니 야곱이 에서하고 헤어져서 삼촌 집으로 피신하기 위해 떠났는데 그때 뭘 느끼느냐? 야곱이 자기 집이 없어요. 야곱에게 집이 없습니다. 나중에 라반의 집으로 들어가요. 라반의 집은 라반의 집이지 자기 집이 아니거든요. 역시 집이 없어요.
그런데 라반과의 만남을 통해서 라반이 열 번씩이나 야곱의 품삯을 일방적으로 조종해서 자기 조카인데도 불구하고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를 한 거예요. 그걸 누가 알았느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알았어요. 알고 라반의 재산을 뺏어 야곱의 집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게 창세기 30장 30절에 보면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언제 내가 내 집 세우냐는 겁니다. 이미 결혼도 했고 다 했는데요. 라반은 야곱의 집을 인정을 안 해요. 그냥 내 집의 머슴 하나죠. 야곱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하는 게 아니고 어디 가도 시집 못 갈 정도로 눈이 너무 안 좋은, 시집 가기 불가능한 그런 언니를 1+1로 야곱에게 덤터기 씌우는 식으로 사기를 친 겁니다.
가만 보니 야곱이 상대적으로 예쁜 자기 둘째 딸 라헬을 좋아했거든요. 그러니까 조건을 붙였어요. “네가 7년 동안 일하면 내가 해 줄게.” 그런데 사랑이라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7년 동안 일하는데 7일 같이 했다는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의 특징은 뭐냐? 내가 없어도 괜찮아요. 내가 없어져도 괜찮고 그대만 있으면 나는 없어도 괜찮아요.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와요. 자기 유익을 구치 않는다는 것이 뭐냐? 내 목숨 그리고 내 것 되기, 여기서부터 벗어나는 게 사랑의 힘입니다. 내 것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 게 사랑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성경 구절인데요. 어떤 점이 좋은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대목입니다.
네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이제는 의인 되었으니 천국 가.’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 되기’에요. 하나님의 의가 되는 데에 우리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좋은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다시 나를 챙길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내가 있고 내 천국을 챙기는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좀 깊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이 있다는 말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대상 따로, 시선 따로 두 개가 떨어져 있어요. 떨어져 있으니까 그 대상은 내 소유의 대상이 되고 내 욕망을 유발하는 원인이 돼요. 아, 저 옷 가지고 싶다, 저 차 사고 싶다, 나는 저런 자식 낳고 싶다, 이건 가지고 싶은 내가 주체로서 하나의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고 내 앞의 대상들이 나와 떨어져 있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어떤 사람이 천국 가니까 나도 천국 가고 싶다, 천국이 대상이 되고 만 거예요. 욕망의 대상이 된 겁니다. 전형적인 마귀의 유혹이에요, 그게. 천국은요, 내가 쟁취할 소유물이 천국이 아니고, 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천국 되기에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만나면 그냥 내가 천국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불신자는 ‘지옥 가고 싶다.’가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지옥이 되어 가요. 자기 욕망에 미쳐서, 자기의 결핍에 미쳐서 아무리 먹고 아무리 가져도 욕망의 모자람 뿐이에요. 이건 못 고칩니다. 예를 들면 정신분열증 환자, 정신분열증 환자의 특징은 자기 몸이 조각조각 파편화되었어요. 조각났어요.
조각난 나를 다시 하나의 나로 만드는 대표 개념이 없는 것이 정신분열증 환자입니다. 몸도 실제로 있고, 눈도 실제로 있고, 코도 있는데 그게 하나로 통합이 안 되어 있어요. 통합이 되지 않은 걸 정신병이라고 하고요, 통합이 되었는데 통합된 게 자꾸 도망을 쳐서 제대로 통합을 했다는데 만족스럽지가 않아요, 결핍이 생기는 이걸 히스테리라고 합니다. 신경증이라고 해요.
인간은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정신병자 아니면 신경증 환자. 정신병 아닌 자가 세상에 없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동화 이야기해드렸잖아요. 토끼 따라서 굴 속으로 들어가요. 들어갔는데 거기는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몸이 줄어들었다가 커지기도 하는 이상한 나라에요.
엘리스는 자기 몸을 자기가 조종하는 게 아니고 환경이 조종하는 거예요. 외부 환경이 내부 환경까지 침투해서 나는 하나의 매개체의 불과한 거예요. 환경 자체가 움직인다, 를 보여주는 하나의 재료가 되는 것이 그 이상한 나라, 그 세계의 현상이에요.
그게 바로 지옥이고 천국입니다. 언약대로 움직이지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 세계가 천국이에요. 수류탄이 있는데 보면 옆에 홈이 패여 있잖아요. 폭발하면 쇳조각 하나하나가 다 튕겨져 나가요. 그럴 때 우리 자신을 수류탄으로 본다면 왜 나는 회사 가서는 딴 소리 하고, 집에 와서 또 딴 소리 하고, 교회 와서 딴 소리 하고, 왜 나는 하나로 통합이 안 되고 환경 따라 상황 따라 자꾸 변질자로, 위선자로 행동을 하는지 내가 봐도 답답하다, 나는 언제 어디에 가서도 한결같은 나 다운 나 주체자로서 행사를 하느냐, 이것 가지고 자꾸 고민을 하는데 그게 정신분열증 환자의 증세죠.
그런데 이걸 생각해보세요. 그 수류탄을 누가 터트렸는지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터트린 걸 자꾸 주워 모으려고 하지 말고, 자꾸 변명하려고 하지 말고. 변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술꾼들이 술 먹으면서 아주 이상한 짓 하다가 깨면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술만 먹으면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다른 이웃 사람이 술 먹고 행패 부려서 시끄럽다고 하면 이번엔 평소에 얻어맞던 부인이 나서서 이야기합니다. “우리 남편이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술 먹어서 그렇지 기억만 사라지면 선행하는 본심은 유지가 됩니다.” 자기가 얻어맞아 놓고 또 자기가 나서서 변명을 해요.
기억이 사라지면 선행하는 본심이 있다고 어떤 재벌 딸에게 비서가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 사장 이름이 혜인인데 “우리 사장님은 기억이 없어서 그렇지 본성은 선해요.” 이런 대목이 <눈물의 여왕> 보면 대사가 나와요. 자, 그럴 때 우리가 이러한 에서의 세계, 이스마엘의 세계에 둘러싸인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와 어떻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집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경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된 것이 맞다고 확답할 수 있는?
미리 결론적으로 이미 천국 온 사람의 특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애초부터 우리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해야 될 일이 우리 자신에게 애초부터 없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어떤 누구를 모델로 해서 그걸 쟁취하겠다고 해버리면, 하나의 대상을 두고 그 대상은 나의 유혹 거리가 되어 내 것 만들겠다고 되어버리면 여전히 이것은 천국 되기가 아니고 나 되기에요. 나를 나답게 되기에요. 결핍된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행복으로 채우는 거예요.
이게 교회 간다고 해도 전부 우상입니다. 내가 소멸되지 않고 있어요. 내가 소실되지 않고 있어요. 얹은 치즈가 녹아야 맛이 나는데 치즈가 딱딱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요리의 맛이 납니까. 주께서 죄만 있는 우리를 천국 만들기 위해 집어넣을 때 그 우리가 녹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가 천국에 스며들게 하는 거예요. 죄 없는 천국은 없습니다. 그 죄와 주님의 아픔이 만나서 죄 사함이 되고, 그럴 때 그것이 내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로 의가 되어 버려요. 의 되기에요, 의 되기.
그래서 내가 천국에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내가 걱정할 일은 애초부터 아예 없었어요. 내가 걱정할 일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걱정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응답받았다? ‘하나님 좋아라. 이제 응답받은 그걸 아껴야지.’ 이건 전형적인 이방인들의 기도에요. 그들도 하나의 여정인데 지옥 가면서 하는 여정이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나와요. 이 대목 없었으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교회가 얼마나 이방인들의 기도인지 모를 뻔했죠. 마태복음 6장 7,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뭘 본받지 말라고 해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 이 말입니다. 왜? 그건 이방인들의 기도니까요. 그럼 그걸 본받지 말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8절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되어버린, 이미 천국에 들어온 사람의 기도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딱 듣고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에 여기서 또 두 부류로 나눠져요. ‘그러면 기도 안 해도 되겠네?’ 하는 부류가 생겨요.
그런 발상이 떠오른다는 말은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탐내는 게 저기 있는데 이건 그냥 얻을 수 없으니 기도 빡세게 해서 얻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빡세게 안 해도 얻을 수 있다면 ‘내 것 내가 챙기는데 기도할 게 없네?’라는 식으로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이죠. 그런데 성경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없다니까, 네가! 넌 소실 대상이지 네가 있어서 원하는 걸 채우는 식의 종교는 교회 와도 불교랑 똑같은 거예요. 절간에 온 거예요. 본받지 말라니까요.
그러니 그 당시에 이 이야기를 들었던 제자들은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좀 납득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기도하지 말라는 이야기인지, 그러면 기도 안 해도 다 주시는데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게 논리적으로 합당하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나온 이야기가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이 뭐냐면 기도는 내가 하고 너희들은 나의 기도에 합류하는, 나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서 동원되어야 될 재료예요. 하나의 음식 재료가 되는 거예요. 채소, 미나리, 시금치, 잡채의 재료 있죠.
자기 자신이 소실된다는 것, 그 대상 속에 자기가 사라진다는 그 이야기를 누가복음 10장에서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로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예수님이 시작하면서 뭐부터 하느냐?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거반 죽게 되었어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 ‘강도가 잘못했네. 사람을 왜 때리고 돈을 왜 뺏어?’ 우리의 관점은 그 관점이에요. 주님은 그게 아닙니다. ‘저기 강도 만난 사람이 있다.’ 이건 하나의 대상이 돼요.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고, 그래서 거리가 있어요. 그런데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봤어요. 보고 나서 ‘강도 만났네. 내가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있네.’ 거리가 있지요.
‘그런데 나는 지금 바쁘네.’ 그냥 지나갔어요. 대상을 남기고 나는 내 길로 갔다 그 말이지요. 그다음에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어요. ‘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네. 다 죽어가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 할 내 일이 있잖아.’ 그냥 갔어요. 그런데 그다음에 나오는 사람, 불신자라고 욕을 되게 얻어먹는 사마리아사람이 지나가다가 ‘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네. 저 대상 속에 나를 집어넣어야 되겠네. 그러면 저 대상 속에서 나는 소멸되지.’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 강도만 사람의 이야기는요, 예수님 본인 이야기에요.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36절에 보면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강도 만난 사람의 그 상황, 그 처지와 합류된 사람이 이웃이 되겠지요. 그 이웃이 바로 율법이 되는 겁니다. 그걸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걸 아픔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픔.
하나님께서 천국을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 때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겪는 아픔을 자기 입으로 거미줄 뽑아내듯이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게 되면 그 뽑아낸 아픔의 관계망, 촘촘한 아픔의 거미줄, 거기에 합류된 자가 바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천국 되기’에요.
‘뭐 예수님만 그 정도 되지 일반인, 우리같이 보통 사람은 남의 아픔에 참여하고 오지랖 떨고 할 이유가 없잖아.’ 구제하는 것도 환자의 신경증적인 모습이거든요. 구제하는 것도 욕망입니다. 구제하면서 자기 욕망의 결핍을 메우고 스스로 자기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이 남을 사랑하고 돕는 거예요. 이거 정신병이에요. 늘 자기 해야 할 일에 쫓기는 겁니다. 매달리고요.
그래서 그런 사람은 없지요. 없는 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8절인데 여기 보기 전에 마가복음 7장 25, 26절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어떤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께 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에요.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이지요.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달라고 요청을 해 왔을 때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27절에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말은 “너는 이방인이잖아. 지금 유대인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라고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니까 2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상아래 개들도,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이 하는 그 대조, 이방인은 개고 유대인은, 언약이 있는 자는 자기 백성이라는 그 구조, 그 구조에 이방인 자신에게 합류시키는 식으로 끼어든 거예요.
‘너희만 인간이냐? 우리도 인간이다. 너희만 천국이냐? 우리도 나름 천국 간다.’ 이게 아니고 “천국을 못가는 것이 맞는 이야기인데, 지옥 가는 게 맞는 이야기인데 행여나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있으면 영생 얻을 수 있습니다. 제가 지옥 가는 것을 당연시하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개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씀드립니다. 나에게는 조금도 천국 갈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제가 너무 잘 알지요. 나 같은 이까짓 것이 왜 천국을 가요? 지옥이 합당하지요.” 그 이야기를 해요. 이방인이.
그러고 난 뒤에 사도행전을 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했는데 여기에 사도행전 8장 그 대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천사가 와서 빌립집사한테 갑자기 계시를 줍니다. 너 일어나서 남쪽 가사(현재의 가자지역)로 떠나라는 겁니다. 26절에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그런데 27, 28절에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그때 성령께서 빌립집사 보고 도킹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10, 9, 8, 7…, 딱 타이밍 맞춰서 이쪽은 성령이 임한 빌립집사가 내시에게 접근하고 그때 내시는 하필 성경 이사야를 읽는 그 순간에 딱 아다리로 만났어요.
29, 30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31절에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할 때 빌립이 이사야를 설명하는데 그 뽑아낸 구절이 뭐냐?
32, 33절에 나옵니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33. In his humiliation his judgment was taken away: and who shall declare his generation? for his life is taken from the earth. 이 대목입니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저 낮은 곳, 그걸 원천으로 하는 그 어린양에 관한 이야기가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사야의 말씀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저 낮은 곳, 다시 말해서 천국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은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곳, 그 만날 수 있는,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그 언약의 원천, 수류탄 터져버린 그 지점, 나를 산산조각 낸 그 지점, 내가 왜 저주받아야 되고, 내가 왜 개 같은 존재고, 내가 왜 천국 가서는 안 되고 지옥에 꼭 가야 되느냐를 알려주는 그 지점, 그 지점에 합류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낮은 곳, 아무도 그 낮은 곳이 있다는 것에 관심도 없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전부 달려가고 있어요. 제가 광주강의 하면서 이번 23세 이하 카타르 아시안 컵 대회를 예로 들었습니다. 신태용 감독은 이제 조져놨다. 왜? 인도네시아 팀 4강도 아직 목마르니 이제 우승까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려고 하게 된 거예요. 그것은 저주지요.
그런데 반면에 황선홍은 복 받은 거예요. 이제 잘리게 되었어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낮은 곳, 그 낮은 곳에 그분의 어린양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을 당한 거예요. 무슨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은 것이 아니고 빼앗김을 당한 거예요. 나쁜 짓을 해서 욕 얻어먹은 것이 아니고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아무 원인도 없이 일방적으로 목숨을 빼앗는 그 아픔에 하나님께서는 에디오피아의 최고권력자 내시를 말씀으로 이끌어내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도행전 8장 36절에서 ‘세례’라고 한 거예요. 세례, 합류하는 것, 주님의 아픔에 합류하는 것, 천국이 시작된 그 지점에 합류하는 것. 그 집은 하나님의 집, 예수님의 집이에요. 모세는 그 집의 사환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처럼. 집은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이 집이 된 것처럼, 지난 낮 설교에서 한 것처럼 모세도 집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감으로 약속의 땅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서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 세례에 대해서 출애굽기 13장 9절과 13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유월절을 언급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9절에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여기 미간이 나와요, 미간. 이마 사이 여기를 미간이라고 해요. 이 미간에 네가 율법을 새기라고 한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가 상당히 난감하지요.
그게 구체적으로 나와요. 신명기 6장 6-8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미간에 붙여서 표를 삼아라.
이 미간이 뭐냐?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여호와의 이름. 정중앙 급소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어요. 성경 말씀을 이 미간에 문신으로 새길까, 뭘 어떻게 하나, 이렇게 고민하게 되잖아요. 신명기 11장 18절에 약간 더 구체적으로 나와요.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이것을 가지고 현대정통유대주의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고무줄로 상자, 신명기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만들어서 띠처럼 해서 머리에 채울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게 했어요. 그 상자를 직접 봤는데 예뻐요. 그래서 특별한 날이 되면 미간에 붙여서 그걸로 천당 가겠다는 거예요.
이게 순진한 것인지 바보인지. 말씀을 미간에 붙이라는 이 율법의 말씀은 우리가 지킬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킬 수도 없고, 우리는 지킬 책임도 없는 자예요. 성경 어떤 말씀도 인간의 신체의 실재성을 통해서 천국의 실재성을 연관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신체에서 우리가 하나의 각설탕처럼 또는 치즈처럼 녹아 없어져요. 우리의 신체가 녹아 없어지는데 녹아 없어지는 장소가 뭐냐?
빌립이 만났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어디에 합류했는가? 예수님의 몸의 실재성에 합류할 때 그때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 우리를 지배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의인은 주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주의 이름과 끊어질 수가 없는 이유가, 우리 속에서 주님의 아픔과 슬픔이 계속 나오기 때문이에요. 아픔과 슬픔.
주님의 아픔과 슬픔이 계속 나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에서와 이스마엘의 욕망덩어리로 계속 살게 해주시는 겁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 자존감, 자존심, 자부심, 자기의 명예, 이것은 내 집안사람이니 챙기고, 너는 저리 가라 하고 따돌리고 하는 그런 것, 너무나 육신적인 것을 우리 안에 생동감 있게 벌이면서 거기서 나온 결론은 뭐냐? 세상 누가 뭐래도 나는 여기 있다는 것, I am here.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모르겠고,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내가 확실하게 실제적으로 믿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바로 여기 있다.
그때 주님은 묻습니다. “어떻게 있는데?” 어떻게 있는지를 묻습니다. 내 욕망 때문에 주님이 신음소리 내고, 주님이 아프고, 너 때문에, 네 욕심 때문에 피를 흘렸다는 그것을 위해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이거 안 하고, 저거 안 하고, 착하게 살고, 그거 아니에요. 그것은 절에 가서 알아보세요.
성도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얼마나 인간이 고집이 세고 나만 챙기는지 이것은 말로 표현 안 될 정도로, 내가 나한테 환장할 지경으로 내가 나를 못 말려요. 자기에 대한 아집과 이기주의는 이건 아무리 감춰도 감춰지지를 않아요. 끝까지 자기를 승리자로 만들고 싶어요. 내세우고 싶은 거예요. ‘봤지? 나 이 정도야. 대한축구협회 봤지! 나 신태용이야, 나 이정도야!’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 자신, 나라는 우상, 여러분 평생 아주 친하게 고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래야 내가 의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에 울고 계시고 아파하시는 주님의 신음이 계속 여러분에게서 흘러나올 때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천국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얼마나 못된 존재인지를 갈수록 느끼게 해주시고 저 낮은 곳보다 남한테 지지 않으려고 높은 곳을 지향하는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게 얼마나 세상사는 재미고 보람이 된 것인지. 이런 정신병자를 위하여 주께서 피까지 흘려주면서 주님의 그 능력으로, 십자가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천국 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니 이것만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