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롬 11장 13-18(감람나무)140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1장 13절에서 18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54페이지입니다.
로마서 11:13-18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성경을 보기 전에는 다들 다 똑똑한 사람인데 성경을 보는 순간 멍하게 아예 천치바보가 됩니다. 이게 방금 우리가 읽고 보았던 이 말이 당체 무슨 말이냐 하는 것도 모를뿐더러 이 말을 우리보고 왜 하느냐 하는 문제도 우리가 당체 이해할 수가 없죠.
이 성경 로마서 10장 말씀 없이도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 탈 없습니다.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말씀을 구태여 대해야 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도록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여기 나오는 그 용어 자체가 왜 이런 용어를 써야 되는지도 그 의도도 그 의중도 우리가 파악하기가 힘들어요.
13절에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이렇게 돼 있는데 여기 이방이란 말 자체도 우리 듣기에는 상당히 기분 나쁘게 만드는 말이 되는 겁니다. 뭐 사람 가운데 이방인 어디 있고 자기 본토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같은 인간이면 똑같은 인간인데 왜 성경은 이스라엘 따로 구분하고 이방인 따로 구분해서 차별대우하는지, 사람이 사람 중에서 이렇게 차별대우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게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이방인 너희들”라고 하니까 도대체 이방인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쁜 의미로 쓰인다 이 말이죠. ‘지옥 갈 인간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이방인 되어서 지옥 갈 존재라면 그러면 지옥 안 가고 이방인 아닌 자가 있다는 말인가? 그게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이다 말이죠. 그걸 보려면 그걸 보려면 이게 신약이니까 구약으로 되돌아가서 너희들은 얼마나 잘났는가 한번 보자. 봐야 된다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하루하루 생활이 바쁜 이 시간에 언제 로마서 11장의 이방인이라는 개념 하나 얻기 위해서 다시 구약을 들추는 그런 여유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여유 있더라도 보지도 않지만. 그래서 우리가 나름대로 똑똑하게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잘난 체 하고 나오는데, 성경만 갖다 대버리면 바보가 돼 버려요. 도대체 이쪽 세계하고 저쪽 세계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우리가 구원받는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우리가 다 들으면 후딱후딱 알게 되는 그 세계와 다른 세계로 이사 가는 걸 의미한다 말이죠.
그러면 이사를 가려면 그쪽 가는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꽃보다 누나’란 프로가 있어요. 거기 보면 나이 많은 여배우하고 젊은 이 승기 배우하고 놀러 가는데 이 승기란 배우가 여행가기 전에 꼼꼼하게 노트에 다 적는데 한국에서는 차표를 매표소에서 파는데 유럽에서는 아! 운전사한테 직접 사면되는구나. 이런 것까지 다 알아서 하니까 여행이 편리한 거예요.
우리가 이쪽 세계만 머물 것 같으면 이거 로마서 11장 13절~18절 알 필요도 없고 그건 들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세계가 현재 같은 인간들끼리, 그러니까 인간들만 있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이냐, 누가 이방인이냐를 따져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 세계에 있는 우리가 이제는 우리가 가야 될 세계는 이방인 따로 있고 유대인 따로 있다는 그걸 따짐으로써 그 의미가 생기는 그 세계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쪽 세계에 가야 되기 때문에 여기 오늘 11장 13절에 “내가 이방인들에게” 이방이란 단어가 탁 튀어나온다 말이죠. 그냥 하루하루 살 것 같으면 이방 알아서 뭐할 건데요? 이스라엘 알아서 뭐할 건데요? 이스라엘도 나라 중에 하나인데 아무 의미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언급하는 이 용어 하나하나가 가야 될 나라에 대해서 소개하려면 이 개념들 속에 파고들어 가야 이 개념 속에 놓여 있어야 그 안에서 얽히고 설킨 그 법칙이 우리가 가야 될 세계 원리와 법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 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보니까 이스라엘 유대인 따로 돼 있다.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이방에는 언약이 없는 곳이고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정보를 먼저 입수한 사람들이고 이방들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가 없이 그냥 같은 인간과 인간들끼리의 자기 자체적인 법을 만들어서 살았다 이 말이죠. 이방인들은 자체적인 법을 만들어서 살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법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게 차이점이다.
그 정도로 알고 그 정도로 알면서 우리가 안다고 싶지만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정도로서는 먹히지 않는 더 어려운 내용이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17절에 보면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갑자기 나무가 왜 나옵니까? 어디 작목반 반장이 지시받을 일도 아니고 농사짓는 일도 아닌데 갑자기 나무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말이죠. 인간 이야기하다가 나무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이 말이죠.
인간 이야기에서 성경에서 나무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무는 인간을 고정화된 물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고정적인 물체로 만들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의 동결 형상이 일어나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사라지고 늘 변화되잖아요. 그런데 변화되는 그것을 ‘너희들은 감람나무다.’ 요즘 말로는 올리브 나무죠. ‘너희들은 올리브 나무다.’라고 규정한다는 말은 그 규정하는 순간 이것이 하나의 스톱이 되면서 시간도 스톱, 공간도 스톱되면서 그 안에서 어려운 말로 하나의 ‘고형 화’라 하는데, 콘크리트 화,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리죠. 그러면 굳어버리면 거기서 시간도 동결되고 장소도 동결되고 고정돼 버립니다. 고정된다는 말은 인간이 아무리 나이가 많고 어떻게 변화가 일어나고 세계정세가 어떻게 바뀌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도 하나님 보시기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목사님, 처음 올 때는 내가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인간 되다가 나는 은혜 받아서 집사가 되고 이제는 권사가 되었습니다.’라고 오래 다닌 사람들이 목사한테 자랑 질 하고 싶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게 아니고 교회 오기 전이나 교회 와서나 이미 너는 감람나무나 올리브 나무에 속했다는 그것의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는 나름대로 일기장을 펴놓고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해서 교회 와서 인간 돼서 지금은 이렇게 착하게 삽니다. 그걸 자랑 질 하고 싶지만 주께서는 걷어서 찢어버린다 이 말이죠.
감람나무의 의미를 아느냐? 콘크리트 화 되는 것, 사람을 드럼통에 집어넣고 콘크리트 집어넣어 볼까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드럼통 있을 때는 맘대로 움직였죠. 그런데 거기다 사람 집어넣고 콘크리트 타설해서 집어넣으면 나중에는 완전히 굳어져 버리죠. 조각품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의 조각이 되는 겁니다. 올리브 나무는 하나님이 만든 작품이고 조각품 이예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조각품의 원리에서 밖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반복, 반복, 반복되는 거예요.
성경을 우리가 로마서 11장 감람나무, 올리브 나무를 모르게 되면 우리는 자꾸 일기 쓰듯이 교회 나오게 돼요. ‘오늘은 성경 2장 봤다. 내일은 3장에 도전해야지. 오늘은 기도를 30분 했는데 다음에는 새벽기도까지 나가줘야지. 다음에는 기도 2시간 해볼까, 금식까지 해볼까, 올해는 2014년에는 신앙이 좀 더 성숙되고 점점 더 깊어져야지.’라고 자기 스케줄을 짜게 돼요.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이동해야 될 그 세상의 원리를 모르고 이 땅에서 종교적인 도 닦는 그 버릇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겁니다.
사람을, 이스라엘을 감람나무로 올리브나무로 만들었고 이방인을 그 올리브나무에 참 올리브나무에 접붙이는, 돌 올리브나무였는데 그것이 접붙임을 통해서 진짜 올리브나무에 합세해서 구원받는다.‘라는 이야기를 이 본문에서 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할 때 우리가 뛰어들려면 ’나‘라는 인간, 늘 시간적으로 발전되기를 원하고 성장되기를 원하는 ’나‘라는 인간이 어떤 고정된 올리브나무라는, 콘크리트 화된 그 속으로 변화되려면 우리는 어떤 현상을 거쳐야 움직이는 내가 스톱된 나로 달라질 수 있는가, 그 메카니즘, 그 과정을 우리가 알아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올리브나무 앞에서 우리는 이런 용어가 나오면 우리가 바보가 돼 버려요. 멍하니. 오늘 아침에 어머니가 교회 오셔서 하는 말이 ‘왜 정신이 없다. 멍하다.’ 멀쩡한 사람도 성경 앞에서만 멍해요. 당체 이게 무슨 말이며 왜 이 이야기를 내가 봐야 되며 이거 안 보면 무슨 탈이 나는지, 왜 구태여 이 말씀을 우리가 들어야 되며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당체 모르겠다. 이거 없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인간이 올리브나무가 되려면 모든 걸 빼앗겨야 됩니다. 그동안 자기가 자랑했던 거 다 빼앗겨야 됩니다. 마치 장정이 군에 갈 때와 똑같아요. 세상에서 젊었을 때 친구와 놀던 거 그거 스케줄, 그런 인식, 사고방식, 완전히 전부 다 무장해제 다 당해야 됩니다. 다 당하면서 올리브나무 되기 전의 인간을 인간 1이라고 한다면, 올리브나무 되고 난 뒤에 나온 인간을 인간 2로 봅시다. 그러면 올리브나무 되고 난 뒤에 올리브나무라는 고형 화된 나무에서 새롭게 뽑아내는 인간상이 나와요. 그 인간상이 올리브나무 원칙에 준해서 새롭게 탄생된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인간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래요. 정보 하나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저쪽 천국에 이사 가려고 하면 이 땅에서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박탈당해야 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여기서 17절에 접붙임 당한다는 거예요. 접붙임 당한다는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접붙임 당한다는 것은 이질적인 것, 성질이 다른 것이 원통에 붙는다는 뜻이거든요. 이거는 되도 않은 것이 온다 말이죠. 붙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러한 이야기가 원래 진짜배기가 있는데 거기에 가짜가 들어와서 진짜로 탈바꿈 된다. 그런 이야기를 로마서 11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로마서 11장 이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 사건이 뭐냐, 바로 하나님이 일부러 이 땅에 내려와서 ‘아나 이게 진짜 진리야. 이게 하나님의 진짜 속마음이야.’ 하고 터뜨려줬더니만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이방인들도 하늘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돼 버려요.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 그 저질은 일 때문에 전혀 하나님의 언약 밖에서 저주 받아야 될 지옥 갈 인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가 되는 겁니다.
아! 이 말이 엄청난 어려운 말을 하는데 이 말을 쉽게 이야기해서 제가 예를 들 테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정답을 이야기해보세요.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는 말과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의 차이점이 뭐냐, 그게 질문입니다. 쉽게 한다 해놓고 더 어렵게 했죠? 설명해 드릴게요.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라는 말은 뒤에 늬앙스가 붙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대로 없애면 안 됩니다. 하나님.’ 그게 강력하게 작용해요. ‘하나님,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책임지세요.‘라는 게 뒤에 붙어 있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알아서 먹이고 입히시고 하셔야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답습니다.‘ 라고 따질 수 있는 여건이 돼요.
그런데 신이 세상을 만들어 버리면 만들어진 세상을 지옥 보내든지 불태우던지 없애든지 깨든지 병들게 하든지 날 죽이게 만들든지 사업 폭삭 망하게 하든지 그거는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뜻이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만들었다. 이 말은 이방인을 만들어서 이방들도 십자가 때문에 용서 받아서 천국 간다는 이 말과 모든 인간은 천국 갈 수 있다는 말고 달라요. 나누어 놓고 가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당연히 갈 권리가 있다고 주장 못하게 만들고 천국 갈 수도 없는 인간이 가게 된 것은 나 말고 다른 곳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덕분으로, 공짜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치입니다. 기독교는 도 닦는데 아니에요.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구원을 시도합니다. 우리가 알아서 구원받기를 원해요. 고통 받는 이 하해 같은 이러한 고통의 바다에서 어떻게 구원할까. 인간이 종교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의 고통과 외로움과 절박함속에서 시작하거든요. 시끄럽게 시작해 버리면 결국은 뭐냐 하면 거기다 신을 도입해 봐야 그거는 ‘하나님 나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내팽개치면 하나님 나쁘죠?‘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해야 돼요.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으면 나를 그냥 무시하지 말고 알아서 챙겨 달라는 이야깁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거는 십자가도 필요치 않고 그거는 교회 와서 도 닦아서 착한 일 해서 자기가 알아서 천당 가려는 그런 가짜 교회밖에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올리브나무를 고형 화 시킨 것은 그냥 인간 바깥에 세워놓게 되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자꾸 따져요. ‘하나님이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살게 합니까? 왜 가정 하나 건사 못하고 이렇게 갈라서게 만들고 깨지게 만듭니까? 왜, 하나님은 어떻고 저떻고, 저떻고 어떻고, 왜 그렇게 불평불만이 많은지. 진짜 하나님 만나면 때려죽이고 싶다. 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사고방식 이예요. ’하나님 만나면 때려주고 싶다. 하나님 만나면 내가 따질 거야. 천국에서 하나님 보기만 하면 하나하나 따질 거야. 그때 엉덩이에는 왜 종기 나게 했는지, 따질 거야. 하는 거예요.
거기에 반해서 ‘하나님 만나면 엎드려 경배해야지.’ 하는 것은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엎드려서 경배하고 숭종해야지. 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죽였고요. 하나님 만나면 때려죽일 거야. 내가 따질 거야.‘ 한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믿게 되었어요. 대역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건 뭐냐, 인간이 올리브나무가 고정 화 되면 거기는 뭐가 있냐 하면 접붙임이 가능한 상처, 상처를 내어서 상처에서 이방인도 용납되는 상처를 내는데, 이 말은 뭐냐 나의 상처가 나의 존재보다 먼저 있는 거예요.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말입니다. 방금 한 이 말이.
나의 상처가 나의 있음보다 먼저 있다는 것. 우리의 상처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어디 부딪히면,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있는 나에게 상처가 날 때 내가 있음이 우선이고 상처는 나중이 되잖아요. 하나님은 그러한 시간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가 먼저 있고 십자가를 노리면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상채기를 내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하나님은 자신이 십자가 죽기 위해서 오셨다 이 말이죠. 그걸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이해를 못한 거예요. 베드로는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택한 나라 하나님의 아들의 몸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몰랐던 게 있어요. 베드로 앞에서 그리고 제자들 앞에서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것을 십자가 이전에 이야기했어요.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하는 말이 ‘예수님,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겁니다. 제가 일어나도록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인간의 일만 생각하다가 진짜 하나님의 일을 막아서기 위해서 지금 장난질을 치는구나.’
자기 제자 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했어요. 술 먹고 자기 마누라보고 ‘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남편이 있지만, 스승이 되어서 그것도 자기 스승이 불러서 채택해서 제자 만들어 놓고 그 제자보고 ”사단아 뒤로 물러가라.“ 하는 그런 스승 봤습니까? 우리는 삐져서 안 논다고 물러갈 겁니다.
왜 갑자기 사단이 등장합니까? 베드로가 몰랐던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몸통을 꼬리가 2개 있어요. 이스라엘은 2개의 과거를 가집니다. 그걸 이스라엘도 몰랐고 베드로도 몰랐던 거예요. 그걸 알고 있던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던 겁니다. 꼬리가 2개 있고, 여러분, 꼬리가 2개 있는 악어 봤습니까? 변종 인간. 돌연변이 돼서 생긴 걸까요? 꼬리가 2개라서 꼬리를 잡고 갈 때 이 꼬리가 몸통의 일에 이르게 되는 제대로 된 그 꼬리인지, 아니면 이 꼬리가 그냥 곁가지로 빠져버리는 몸통으로 이르게 될 꼬리인지 꼬리를 쥐고 있는 사람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한계가 뭐냐 하면 인간은 항상 꼬리를 잡고 몸통, 하나의 신을 찾아간다는 그런 방식 외는 인간이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이스라엘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여기고 그 이스라엘 속에 눌러 앉아 있으면 메시야가 찾아와서 자기들 구원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오늘날 교회 교인들이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그 오류와 똑같은 오류를 지금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 거예요.
꼬리가 2개이니까 이건 돈 놓고 돈 먹기지, 어느 꼬리가 몸통에 이를 것인지, 구약은 몰랐어요. 그러나 신약에 와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사도들은 진짜 구약의 꼬리가 뭔지 알아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상처가 없는 역사는 이스라엘이 아니요. 상처가 있는 그 역사만이 진짜 이스라엘과 십자가와 연결된 이스라엘이라고 본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 “선지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매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 했던 사람이라” 거기에 근거해서 구약을 찾아보니까 구약에 진짜 몸통과 관련된 모든 꼬리에 해당되는 선지자들은, 진짜 이스라엘들은, 택한 백성들은 아벨에서 스가랴 경로를 거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끄는 노선에 놓여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아벨, 억울하게 죽었죠. 스가랴, 바른 소리하다 돌에 맞아 죽었죠. 세례요한, 바른 소리 하다 접시에 모가지 날라 가 접시에 담겼죠. 예수님, 십자가 죽었죠. 예수님 이후에 모든 사도와 선지자들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전부 다 영혼으로 돌아다닌 사람들이죠. 육체는 이미 죽은 걸로 간주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입장에서 살았죠.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바쳤습니다.
접점 지점. 죄 있는 이방인도 용서가 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방인은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쪽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자꾸 말이 어려워지는데 다시 합시다.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도 용서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절대로 이방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나라가 먼저 이 땅에 등장했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리가 몸통이라고 자부하게 만들어서 그 자부하게 된 그들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는 거예요. 오해를 유발시켜서.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들은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죠. 왜, 말씀대로 그대로 해석했으니까. 문자대로 그대로 해석했으니까. 그러니까 오해하지 않고 우리는 누가 뭐래도 구원받았다고 자부심을 가진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살인을 당하므로 말미암아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냥 오해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다 까발려 준 거예요.
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깁니까? 오늘 본문같이 어려운 내용은 첨 봤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몇 명 안 되지만 여러분 각자 꿈을 꾸죠. 여러분 생각에는 각자 꿈을 꾼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의 꿈은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하나의 꿈을 꿉니다. 왜, 그 꿈의 내용은 전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상에서 보고 들었던 그 꿈을 그냥 편집해서 각자 나누어서 배당받아서 꾼 꿈 이예요.
천국의 꿈은요? 야곱이나 꿔요. 예수님이나 꿔요. 아벨이나 스가랴나 꾼다고요. 인간들의 꿈은 자기 주체적인 꿈을 꾼다고요. 그거 들어보면 다 납득이 돼요. ‘그거 나도 몇 년 전에 꿨어.’ 다 납득이 된다고요.
꿈을 꾸는데 딸이 시집가는데 아니 웨딩드레스가 아직 오지 않았네. ‘빨리 와야 되는데, 빨리 와야 되는데.’ 하는데 그만 예식이 다 지나가 버렸어요. ‘어휴, 꿈이다.’ 이게 뭐예요? 우리기 고대하고 기대하고 은근히 노리고 소망한다는 게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겁니까?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그렇고 그런 세상 속에서 있던 그중 파편화 된 하나의 내용을 우리는 그냥 꿈으로 자기가 재해석해서 한 거예요. 제가 그런 꿈 많이 꿔요. 제 꿈에 보면 이런 꿈도 있어요. 수천 명한테 설교하는데 강대상이 높아서 아무리 해도 마이크가 안 돼서 하다 깨어보면 꿈 이예요.
인간은 전부 다 주께서 올리브나무라고 이스라엘이라고 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는 돌 올리브나무, 썩은 올리브나무, 지옥 갈 올리브나무라고 이미 규정받았습니다. 내가 있기 전에 올리브나무가 먼저 있고, 다시 말해서 ‘나’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내가 있을 자리부터 마련해 주신 겁니다. 그 꼬리에 몸통, 그것을 출애굽기 4장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아들이란 말은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는 자가 아들 이예요.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서 아버지를 몰라요.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은 아들이라 했으니까 아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겠네요? 알기는 뭘 알아? 몰라요. 그런데 아들 이예요. 왜 아버지를 모르면서 왜 아들이라고 하느냐? 그들이 실패한 자리가, 바로 실패하게 만든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에요.
그들은 오해하기를 나는 아들이니까 마땅히 아버지를 안다고 설치죠. 그 설친 그것이 진짜 아들을 살해하는 동기로서 작용하는 나라가 이스라엘나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입장 이예요. 누구라고 어린양 아니면 어린양의 죽음 아니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요.
여러분 자녀가 군에 갔습니까? 여러분 자녀가 멀리 이민 갔습니까? 어디 가도 괜찮아요. 구원은 어린양뿐입니다. 구원은 그 애가 교회 다니든 안 다니든 간에 그 애가 어느 나라에 가든 간에 그 애가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관계없이 구원은 오직 어린양,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그걸 이스라엘은 어린양을 직접 잡으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어요.
아들이란 호칭은 들어놓고 자기가 아들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몰랐어요. 자기가 ‘나는 아들이 아닐 거야.’ 이러면 되는데 ‘그래, 우리보고 아들이래. 그러면 나는 아버지를 잘 알지.’ 그게 문제였어요.
진짜 아들 말씀 드려요? 진짜 아들은 상처가 나야 돼요. 상처가! 상처가 있어야 죄인도 용납해 주고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는 그 상처가 있는 자만이 아들 이예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들이냐, 진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그분이 아들이냐는 겁니다.
몸통은 십자가에요. 십자가와 연결된 꼬리만이 그런 과거 역사만이 진짜 이스라엘이고 십자가와 연결되지 않은 그것은 가짜 꼬리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 몸통 속에서 일어나는 그 반복되는 그 작용, 십자가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올리브나무라는 고정된 스톱된 그런 표현을 주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이 올리브나무 안에서 가짜 올리브나무도 용납이 되는 자리를 만들려는 생각은 스스로 진짜 올리브나무라고 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몰랐는가? 아버지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막은 아버지와 아들 외에는 아무도 몰라요. 이거는 제 말이 아니고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와 아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막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리아, 마르다 하고 오빠 나사로 세 식구가 살았어요. 살았는데 그 세 식구가 예수님에 대해서 평소에 참 대접을 잘 해드렸습니다. 그들이 대접할 때 그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리아, 마르다가. ‘나는 지금 예수님 잘 섬기고 있고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니까 이 상태에서 어떤 하자나 어떤 문제점 없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다. 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시름시름 아파요. 그래서 마리아, 마르다가 119 전화해서 얼른 예수님 호출했죠. 그런데 이 구급차가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지연시킵니다. 뭔가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그들의 오해 내용이 뭔지를 가르치려고 하신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 듣고 그때 예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움직여서 다가갈 때에 마르다 마리아가 화를 내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 다른 말로 우리 가정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시고 왜 무책임하게 방치하셨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졌겠죠.
그런데 그 마르다 마리아는 감람나무 이런 걸 몰라요. 자기는 마르다 마리아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스라엘이 했던 오해를 똑같이 지금 되풀이 하고 있는 겁니다.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주님이 찾아가서 하는 말이 “네가 나를 믿느냐?”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 마르다 마리아야.”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 나사로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음을 통해서 자기 누이동생 둘을 산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오빠가 먼저 앞서서 그 자리로서 두 누이동생을 끌고 가는 겁니다. 네가 산 자리에서 나를 믿는 것은 믿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이미 죽어버린 오빠의 자리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오빠의 자리, 이미 죽어버린 오빠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무릇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자리가 오빠의 죽은 자리에요. 그 오빠의 죽은 자리가 출입구가 되는 겁니다. 그게 몸통으로 통하는 출입구에요. 꼬리에서 몸통으로 갈 때는 반드시 접붙임을 통해서 내가 살면서 생각했던 모든 믿음 소망 사랑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위주로 오빠가 죽은 게 아니고 오빠를 위해서 오빠 자신의 자리가 현재 마리아 마르다의 자리가 가짜인 것을, 다시 말해서 유일하게 아들이 아는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고 개뿔도 아버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그 가짜 자리에서 진짜 아버지를 아는 자리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자리까지, 지금 끌어당기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진짜 교회 모습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헌금을 반을 감췄다가 죽어버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습니다. 그 교회라는 게 뭐냐 하면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이처럼 교회 다니고 11시 예배드리고 이게 교회가 아니고 이게 죽을 수도 있는 그 자리만이 유일한 현실 이예요. 하나님께 헌금 잘못 드렸다고 죽을 수 있다는 그 자리만이 얼마나 실감나는 자리고 진짜 숨겨진 천국의 자리입니까? 장난삼아 교회 오고 놀이 삼아 교회 왔다가 갔다가 이러한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그런 교회 다니기가 아니라 진짜 교회는 내가 헌금을 한들 이 헌금이 제대로 된 헌금일 수가 없잖아요. 왼 손이 한 걸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 하는데 어느 인간이 그런 인간이 있습니까? 왼손이 하면 다 알게 되는데. 그러니 이 자체가 가짜인 거예요. 가짜면서도 가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방인이고 단순히 이방인은 주님 앞에 배제당해도 할 말이 없는 자리인데 어째서 이렇게 헌금해도 어설프고 기도해도 어설프고 예배 참석해도 어설프고 집에 갈 생각부터 먼저 하고 모든 게 이런 생각밖에 못하는 우리가 어째서 내가 영생을 얻느냐 이 말입니다.
그 접붙임! 십자가 때문 이예요. 십자가 때문에! 십자가 때문에 우리를 이방인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비로소 우리는 이방인의 의미가 먼저 새롭게 등장하는 거예요. 아! 내가 이방이지 참. 이방인이지.‘ 난 인간이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올리브나무 바깥에서 같은 인간들끼리 키 몇 센티에 몸무게 얼마, 그때는 다 똑같은 인간들 이예요. 고만고만한 인간 이예요.
어젠가 전화 왔었어요. 태국에 선교사로 가 계시는 이목훈 목사님이 전화해서 전화를 하다 보니 30분 간 전화 했어요. 그래서 물었어요. ‘이목훈 목사님, 대구에 남산동에 있는 수정교회라고 하면 합동 측에서는 힘 꾀나 쓰는 좋은 교회, 파르테논 신전처럼 교회도 이쁘게 지어놨어요. ’거기 당회장이 왜 나가라고 언질을 줬나요? ’아니요.‘ ’그럼 교인들이 싫어하는 가요?’ ‘아니요.’ ‘그럼 왜 나갔습니까?’ 물었거든요. ‘나는 어디 가도 일할 수 있는 줄 알고 나갔습니다. 어디 가도 보람 있는 일을 할 줄로 생각하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가 보니까 내가 아무 일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나가보니까 비로소 보입디다.’ 이래요.
인기라는 게 문제에요. 목사가 인기 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을 망쳐버렸어요. 여기서 인기 있었기 때문에 딴 데 가도 인기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대구 있다가 대전 가면 인기 있습니까? 두 세 사람도 함께 있으면 주의 교회라 했는데 뭔가 잘 되고 뭔가 사람들이 나를 찾을 때 ‘야, 나는 뭔가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사용되는구나.‘라고 여길 때 그게 잘못이었다 이 말이죠. 목사님은 거기서 나왔기 때문에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왔더라도 살긴 살았는데 다시 들어오려 하면 자리가 없어요. 말은 ’다시 들어오세요.‘ 했는데.
‘나’라는 인간이 주님의 접붙임 아니면 항상 나는 저주의 자리가 가짜 참기름에 불과한, 진짜 올리브기름이 아니고 가짜 올리브기름일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가짜기 때문에 참으로 되돌리려는 생각도 나지를 않죠. 이 말 이해되시겠습니까?
자기가 가짜라고 여겼다는 것은 진짜가 따로 있다는 뜻인데 그 정도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그런데 사람은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가짜라고 보지를 안 해요. 내가 믿는 것은 진짜 예수님이고 진짜 하나님이고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언제 가짜가 등장하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바로 주님도 버림 받았다면 그럼 나도 같이 버림 받는 게 당연하다는 걸 느낄 때에 바로 나는 나를 하나님이 만드신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만들었으면 내가 하나님 보고 책임지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 나를 지옥 보내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 나는 어떤 거기에 대해서 반발할 권한이 나한테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 그 정도로 나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감람나무의 특징을, 참 올리브나무의 특징을 뭐로 보느냐 하면 접붙임을 받았다는 그 사실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착각해서 우리가 진짜라고 하다가 가짜 올리브나무가 그리스도라는 진짜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몸통 이예요. 이스라엘은 몸통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진짜 아버지를 아는 몸통에 갖다 접붙임을 받았을 때 그걸 보고 뒤늦게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오! 나도 접붙여서 십자가 피에 접붙여서 구원받아야 되겠다.‘라고 시기 나게 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테마거든요. 이게 스토리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되면 돼요. 쉽게 해서 붕어빵, 저는 붕어빵을 구워 봤는데 붕어빵을 구을 때 뚜껑 열고 밀가루 주전자를 붓고 앙꼬 넣고 뚜껑 덮고 한 칸 뒤로 돌리고 불판에 돌리고 다시 뚜껑 열고 붓고 덮고 돌리고 열고 넣고 덮고 돌리고…….
우리 일상의 삶이라는 것은 늘 주님의 십자가 불판 위에서 아버지 불판 위에서 매일 이렇게 한 칸, 한 칸씩 또 다시 십자가의 진액을 받고, 진액을 받고, 그래서 하루를 견디고 또 진액을 받고 견디는 그런 삶입니다.
신명기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은 불판 위에서 나온 나라에요. 그때 하나님께서 음성 줄 때에 불에서 음성이 나왔다. 불판 위에서 이스라엘 있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몰라요. 이방인들의 신이라는 것은 자기들의 무능을 보충하는 보충 물이예요. 신이라는 존재는 자기의 무능과 한계를 대충 땜질하기 위한 보충적인 개념이 신 개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진짜 시내 산 밑에서 그들은 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는 사실, 누구든지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다 소멸해 버린다는 것을 진짜로 그들은 받았어요. 따라서 그들은 불판 위에서 말씀대로 못 살면 불에 탄다는 사실을 너무나 진솔하게 직접 만난 사람들 이예요.
바로 그 자리가 지금은 십자가라는, 누구든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십자가로 이렇게 버림받는다는 그 아버지의 진솔한 진짜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 때 우리는 거기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아버지의 그 아들이 되는 겁니다. 아들로서 다루어지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불평과 불신앙의 역사라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모든 역사도 매일같이 불평과 불신앙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따지고 대들고 욕심내고 세상 것 좋아하는 그런 나쁜 역사를 품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용서받는 그런 입장에 현재 놓여 있습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같은 유리그릇에다 술을 부으나 물을 부으나 보기에는 똑같이 보여요. 투명하니까. 마셔보면 다르죠. 교회 제도 11시 예배드리기, 헌금하기, 수련회 가기, 또 청소하기, 남들 보기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똑같은 간판 걸었지만 우리 인간들 보기는 똑같이 보이지만,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접붙임을 아는 자와 십자가 없이 자기 잘남에 자기 뽐내기 위해서 봉사하고 교회 오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그런 사람을 우리 주님께서는 골라냅니다. 다 구원해 내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 돼요. 바로 오랫동안 우리 몸이 적응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제는 주님 없이도 내 힘으로 신앙생활 할 것 같이 생각이 든다면 그게 바로 저주 받을 이방인이고, 지금도 그런 나를 지금도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의 피로 말미암아 주님이 받은 그 상처 때문에 감히 말도 안 되는 그 구원에 쑥! 들어오게 됐다는 이 사실이 어린양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이 우리가 어디 가도 이 세상 어디 가도, 독일 가나 이태리 가나 어디를 가도 항상 그것이 귀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어디 가도 이스라엘의 진짜 아들의 몸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다시 돌아보게 하시고, 참 말도 안 되는 말씀 앞에서 다시 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과거 역사 자랑하고 자기 잘난 거 자랑하고 싶어 지금도 숨을 쉬고 있지만, 나사로가 누이동생을 죽음으로 가르친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십자가 죽음으로 저희를 새롭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