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천사의 심판자리

아빠와 함께 2024. 5. 5. 09:59

20240503a 울산강의-역대기하(3강) 3장 1절 : 천사의 심판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하 3장,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렇게 돼 있지요. 이미 성전 짓는 장소는 정해져 있습니다. 솔로몬이 정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하나님 사이에 만났던 그 장소가 성전 짓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지요. ‘성전은 만남의 장소다.’ 이 만남의 장소에서 뭘 할 거냐? 만남의 장소에서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묻고 답하고’가 이루어지는 곳. 신약에서 성도를 하나님께선 성전이라 하잖아요. 성전은 이게 되는 곳, 묻고 답하고가 이루어지는 곳이 성전이에요.

성도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일어나야 돼요.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가 아니 되지요. 물어야 돼요. 묻는 겁니다. 그런데 질문은 어떻게 생기는가? 질문은 일어 터지고 난 뒤에 생겨요. ‘인간의 의식은 사건 이후의 온다.’ 인간의 의식은 사건 후에 오니까 어떻게 돼요? 항상 늦어요.

인간은 죽지요. 인간은 왜 죽느냐 하면 미리 답을 몰라서 죽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이 우리를 뭉개버립니다. 평생 살아왔던 그 나의 인생이 나를 뭉개니까 이와 같은 공식이 되죠. ‘나는 나의 의해서 무너진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나에게 깔려죽는다.’ 내가 죽는 이유는 나한테 깔려죽어요. 나 때문에 내가 죽어요.

하나님께서는 남 탓하지 말라는 거예요. 평소에 하는 모든 것이 너를 죽였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응답이에요. 하나님의 답변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일 터지고 난 뒤에 의식해요. 아까 했지요. 의식은 사건 후에 오기 때문에 항상 늦어요. 죽고 난 뒤에 ‘나 왜 죽지?’ 이렇게 돼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나 아직 안 죽었는데, 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 안에 죽음이 들어있어요.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어떤 주인공이 호루라기 불다가 잘못해서 삼켜버렸어요. 그런데 마침 유명한 소프라노의 성악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어요. 고요하게 아름다운 여자 오페라 가수의 노래를 경청하고 있는데 앞에 있는 찰리 채플린에서 자꾸 호루라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 안에 누구든지 들어있는 호루라기가 뭐냐? 죽음이라는 겁니다.

죽음이라서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와 걱정을 엑엑 하면서 계속 내놓는데 이미 죽음이 우리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죽음이 우리한테 삼킴을 당했기 때문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우리의 통제권한을 벗어납니다. 죽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과 염려, 걱정은 미래에 대한 내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그 걱정은 내가 어떻게 관리대상이 안 됩니다. 빡세게 기도한다고 없어질 게 아니에요. 교회 나온다고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이야기가 아니고, ‘네 안에 괴물 있다’ 이걸 이야기하는 게 성경이에요. 이게 답이에요. 우리는 답을 알고 질문을 나중에 해요. 하나님 왜 딸꾹질이 왜 생깁니까? 네 안에 네가 통제 못하는 다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우리가 원치 않는 게 들어있는 것, 이걸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 말고 타자, 남이죠. 내 안에 타인이 들어와 있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선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타인이 뭐냐? 그게 바로 괴물이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 사탄입니다. 우리 허락도 없이 사탄이 들어왔어요. 사탄의 종이 귀신인데 귀신의 특징은 꼭 거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람한테 있든지 아니면 돼지한테 가든지 귀신은 영체가 되어서 따로 있질 못하고 완전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들어와서 기거합니다. 그래서 인간 속에는 본인이 감추지도 않았는데 본인 안에 숨어있는 게 있어요. 본인이 일부러 감춘 것도 아닌데 뭔가 숨어들어왔어요.

그 숨어있는 것을 인간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항상 의식은 사건 이후에 들어오지요. 그 괴물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난 뒤에 의식하는데 어떻게 의식하느냐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약점이 안 들키는 식으로 모든 의식과 행동은, 생각들은 그렇게 움직입니다. 누굴 만나서 이야기해보세요. ‘저 사람이 내 약점을 알아채면 안 되는데’ 그러한 전제를 깔고 누구와 이야기하고 대화하고, 그리고 그 사람과 만나요.

만약에 상대가 우연히 실수해서 그 사람이 뭘 감추는지 몰라요. 우리는 살기 바쁜데 남 감추는 걸 밝혀내는데 신경 쓸 게 안 되잖아요. 그런데 우연히 지나가는 말, 개념 하나가, 단어 하나 무심코 이야기했는데 ‘이번 거래 건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하고 발칵 성을 내고 나가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상견례를 갔는데 아주 조심스럽잖아요. 그래서 결혼식은 이렇게 하고, 애들 축하해주면서 양가가 빛내줍시다, 하고 좋게, 좋게 이야기를 하는데 남자 쪽 사돈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약간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농담 비슷하게 ‘우리 그날을 위해서 운동 열심히 뱃살 나온 것도 줄이고 사진 잘 받도록 옷도 깨끗하게 입고 옵시다’ 이랬는데 그 소리 듣고 갑자기 저쪽 사돈이 ‘그렇다면 이번 혼사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온다면,

도대체 내가 건들지 말아야 될 뭘 건드렸는지 모르지요. 왜냐? 저쪽은 약점을 감춰놨는데 이쪽은 뭘 감췄는지 모르고 그냥 이야기했는데 그렇게 나온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바깥사돈은 안 오고 안사돈만 왔는데 바깥사돈이 젊을 때 사고로 하반신 마비된 거예요. 그 말을 일부러 끄집어낸 것도 아니에요. 그냥 건강하게 반듯하게 합시다, 이건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고 한 이야기에요. 근데 듣는 사람은 이번 혼사 없는 걸로 합시다. 그래서 파토 났다.

이 말은 뭡니까? 인간은 평소에 자기가 들키고 싶지 않는 괴물과 동거하고 있다. 괴물이라 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유령,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 속에 들어온 것. 인간은 유령과 함께 동거하고 있어요. 감추고 있어요. 유령이, 귀신이, 인간은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게 해요. 내가 네 속에 있는 것을 남한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네 속에 있다는 것.

모든 인간이 이렇게 자기가 남한테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을 품고 세상을 살아가니 행복이란 것? 물 건너갔어요. 자기 약점이 있으니까.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치명적인 약점, 자기에 의해서 통제 안 되는 약점을 남들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잠잘 때 코를 골아. 우리 딸은 공부를 못해.’

이게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는 겸손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큰 덩어리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 작은 약점, 자기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고, 남한테 겸비한 모습, 겸손하게 보일 수 있는 약점을 계속 계발해서 남들 내줌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 딸이 공부를 못하고 게으르고, 그게 내 약점의 끝판이라는 그것까지만 탐색하도록 인간은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잘 살지 못해요. 우리 집은 하꼬방인데. 평수 47평. 그게 살 집인가요? 아니지요. 차 두 대밖에 없어요. 나 인생 뭐하고 사는지 몰라.’ 남에게 허세부리는 게 아니고 자기 딴에 나에 대해서 더 이상 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문제는 남들이 나에 대해서 알 생각하지 말라. 내 숨어있는 아지트에 함부로 발 들여놓을 생각하지 말라. 가만두지 않고 죽여 버린다는 그러한 살인충동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그런다고 해서 철저한 자기 방어태세가 해결책이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내 한계 너머 뭐가 있는지 인간은 자기를 몰라요.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분명히 나보다 센데 그 정체를 몰라요, 인간은. 그냥 거기에서 그 호루라기에서 뭔가 불안이 자꾸 생겨나요. 남들 보기에 애 공부 잘하지, 만사형통하지, 부부사이 좋지, 하는 일마다 다 잘되지 이런데 분명히 행복해야 돼요. 그런 요건들 다 갖추면 분명히 행복해야 되는데 그 행복을 시시하게 만드는 더 큰 공포가 그 어떤 행복으로도 커버가 안 돼요.

내 속에 있으면서 내가 관리 안 되고 그러면서도 계속 ‘가만있어 더 깊이, 계속 숨어있어 들키면 안 돼. 너 들키면 나 자살하는 거야. 들키지 마. 가만있어’ 이런 식으로 협상과 타협을 해야 겨우 숨 고르기에 나서는 그 괴물, 참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 이것을 뭐로 커버하는가?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찾으면서 어떻게 대충 덮어볼까 하는 식으로 하지만 그것 뻥뻥 구멍 다 뚫립니다. 소용없어요.

왜냐? 교회 다니는 것은 내가 하지만 항상 의식은 내가 원치 않는 사건 이후에 오기 때문에. ‘하나님, 이럴 순 없습니다’ 맨날 속으로 하지요. 주일학교 때 불렀던 노래, 내게 강 같은 평화, 율동할 수 있습니까? 노래 부르면 애들한테 뭐라 했어요? 이 말씀처럼 네 마음은 예수 믿으면 평화롭다고 이야기하지요.

이 노래 가사처럼 네 마음은 이제부터는 성령에 의해서 강 같이 평화롭게 될 거야, 라고 하면서 하는 도중에 내 율동이 맞나, 안 맞나? 율동 못하는 걸 들키면 안 되는데, 하고 약점으로 작용하지요. 내게 강 같은 평화, 노래 부르면서 그것이 내 약점을 노출된다는 의식이 사건 이후에 오는 거예요.

그래서 뭡니까? 인간은 눈치 채기가 항상 늦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구원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항상 늦게 오기 때문에. 여러분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차 밀려서 늦게 오는 것 말고, 강의시간 늦게 오는 것 말고.

인간의 의식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항상 뒤 수습하듯이 오기 때문에 이게 수습이 안 돼요. 수습이 안 되면 그만큼 공포스러움이 또 내 속에 있는 내 속의 약점이 나를 이겼다는 데서 오는 후회감,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것, 이게 인생에 평생 동안 하는 짓이 이 짓이에요. 그러니까 뭐라 했습니까? 내 인생이 나를, 나는 나에게 깔려죽는다. 내 속에 있는 괴물을 내가 어떻게 처리를 못해서.

그러니까 나니까 내가 통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메시아를 기다리죠. 내가 안 되니까 나보다 메시아 와서 구원자 와서 내 속에 있는 귀신, 괴물, 마귀 어떻게 처리해 달라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메시아는 이미 왔다는 거예요. 이미 오셨기에 오지 않아요, 메시아는.

예수님 재림은 이미 오신 분의 재림이에요. 오신다가 아니라 오신 그분의 다시 오심이에요. 그래서 이미 오신 분이 오시지 않으면 그 인간에게는 주님이 재림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오신 분이 오셔야 재림이 성립되지 이미 오신 분이 우리 속에 오지 않는데 재림도 그 사람한테는 관계없어요.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내 허락 없이 주님이 내 속에 들어왔다는 뜻이에요.

그걸 로마서 8장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어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절) 그 성령을 제공할 수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지도 않은 성령을 우리 교회 오면 성령 넣어드리겠습니다. 어디 교회가 가스충전소에요? 돈 내면, ‘어떻게?’ ‘가득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가? 안 돼요.

교회는 있는데 늘 가스가 없어요. 성경에 그게 여러 군데 나옵니다. 가게는 차려놨는데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이스라엘이 그리 했고 이방나라가 그리 했어요.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 왕이 나와요. 이 사람이 성전 기념 파티를 엽니다. 유다나라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 사람 바보 같아요. 성전에 있던 그릇 가져왔지요. 다니엘 5장 보면 나와요. 전리품이라고 그릇 가져왔잖아요. 그것 왜 가져오지요? 화를 자초한 거예요.

그릇을 왜 가져옵니까? 사무엘상도 마찬가지죠. 사무엘상 4장부터 전쟁 시작하고, 5장에 보면 블레셋이 언약궤를 가져오지요. 그것 왜 가져와요? 바보 아니에요? 그것 언약궤 이스라엘 것 아닙니다. 누구 것이냐 하면 여호와의 것이에요. 그러나 블레셋 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전쟁했다 생각 못하고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과 전쟁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겼는데 누구는 못 이겼어요? 여호와 하나님을 못 이긴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 사람은 이스라엘 패배를 앞장세우는 하나님의 전략에 속아 넘어갔어요. 이스라엘의 패배를 전면에 내세운 여호와 하나님의 전략, 내 백성이 패배함으로써 여호와가 이기는 이게 하나님의 언약 방식입니다.

옆집은 절에 가고 이쪽은 교회 간다. 절에 간 사람은 만사형통해서 부자 됐고, 교회 간 사람은 있는 돈도 날리고 완전히 파탄 났다. 그래서 절에 간 사람이 부처가 예수를 이겼다고 하잖아요. 그게 우리 주님의 전략입니다. 참 전략치고는 참혹하지요. 망했어, 망했어. 그 전략에 망한 거예요. 언약궤를 왜 가져가요? 가져가서 블레셋 신상 모가지 날아갔지요.

모가지만 날아갔습니까? 그 언약궤를 도저히 여기 있을 것이 아니라 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데 가는 곳마다 이번에는 사람들 모가지 날아가 사람들이 다 죽어요. 신상부터 사람들이 막 죽어요. 독종에 죽는다고요. 악질이 번창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감당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방민족이 여호와를 감당을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무서운 여호와를 감당하고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이방민족은 감당을 못해요.

그럼 감당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그들이 오늘 성도 아닙니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때부터 감당하지 못한 분을 모시게 되는 거예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찾아오지 않으면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고 돼 있으니까요.

그러면 메시아는 이미 와버렸어요. 이미 메시아가 왔단 말이죠. 왔기 때문에 자기 구원을 위해서 교회 나온다는 것은 이거는 사기 당한 거예요. 그 목사한테 사기 당한 겁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 있는데 왜 구원이 필요합니까?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가장 제일 큰 오해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소유하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뭘 가져오기 때문에? 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멀쩡한 내가 하나님마저 소유하고 복 소유하면서 멀쩡한 내가 더 멀쩡하게 된다는 거죠. 이 계산 하에 교회 나오잖아요. 교회 나와서 박살나려고 교회 나오는 사람 누가 있어요? 사람들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합니다.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이 나한테 어떤 실적을 줘야 돼요.

여러분 가끔은 가계부 쓰잖아요. 뭐 수입이 있어야 가계부 쓰지, 수입도 없는데 가계부 쓸 것도 없고. 그런 사람도 있지만은. 뭐 들어와야 쓰지, 아무 것도 안 들어오면 필요 없지만. 좀 들어왔다 싶으면 가계부를 쓰잖아요. 가계부 왜 씁니까? 최선을 다해서 손해에 대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손해되는 것을 줄이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앞으론 절제해야 되겠다고 가계부를 쓰잖아요.

가계부 쓰듯이 인간은 멀쩡하게 있고 거기다 하나님이 천국의 주인이라 하니까 그것 괜찮네, 하고 그걸 소유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인간이. 소유하려고 또 복 준다니까. 그래서 더욱더 자기가 빛나고 싶은 거예요. 사는데 편하게 살고 싶은 겁니다. 인생 악착같이 힘들게 괴롭게 살았는데 하나님 믿고 이제 편해볼까, 이러는 거예요. 이걸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로 우상이라 하는 겁니다.

우상을 정리해볼게요. 간단하게 정리됩니다. 혹시 하늘나라에서 시험 치거든 정답 쓰세요. 우상이란 나를 위한 신. 참 외우기 쉽지요. 나를 위한 신을 우상이라 해요. 그게 예수가 됐든, 삼위일체, 여호와가 됐든 명칭은 관계없어요. 무조건 나를 위한다면 그 예수가 우상이고, 여호와가 우상이에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도 없이 괴물처럼 쑥 들어왔다는 말은 뭘 바꾸겠다는 말이에요? ‘나를 위해서’를 뭘로 바꾸느냐 하면,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바뀌지 아니하면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국민학교 다닐 때 수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찍개라 했어요. 고상하게 말해서 지킴이, 학교지킴이, 그걸 찍개라고 이야기했어요. 성경에 천사가 있는데 그룹이란 천사는 찍개에요. 뭘 지키는가? 생명나무를 지키는 거예요. 천국 지킴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천국에 가겠다고 나서면 누가 거부합니까? 천사가 막아버리죠. 넣어주질 않아요.

그런데 왜 교회는 많은지? 이게 참 교회가 많다는 게 수상해요? 왜? 천국에서는 안 넣어주겠다는데 천국에 들어가자고 사람들 모아서 으샤으샤 시위하듯이 통성기도하고 집회하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뭐하는 시추에이션인지 뭐하는 상황인지 이상하잖아요. 저쪽 본부 쪽에서는 안 받겠다는 데 우리는 죽고 난 뒤에 대책이 있어야 된다고 윽박지르고 있어요. 하나님께 압력을 가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들의 압력에 말려드실 분입니까, 그런 분이에요? 아니면 하나님이 뜻이고 뭐고 모르겠고 우리 하나님 이름으로 그냥 놀자는 판인지?

그 교회에서 겉으로는 주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돼요. 근데 그들이 교인들이 감추고 있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주를 위해서 살 테니까 주님도 나를 위해서 행운을 주시겠습니까, 구원은 보장하시겠습니까’가 뒤쪽에 감추고 있어요.

내가 주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할 테니까 이 정성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딴 사람은 지옥 갈 때 나만은 천국으로 빼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인간은 거래하는 쪽으로 나오지요. 그 거래는 인간 대 인간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한테는 거래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확정을 내린 거예요.

아까 제가 어려운 글이지만 다시 한 번 써보겠습니다. ‘의식은 사건 후에 오기에 항상 늦다.’ 이 문장이에요. 의식이란 것, 예수님이 누구고 하나님이 누구고 의식은 사건 뒤에 오기에, 사건은 이미 결정나버린 뒤에 와서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사건은 터져버렸으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선 일을 할 때에 우리하고 의논하거나 합의하거나 거래하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아요. 앞에 있는 것 다 줄이면, 구원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어떤 정성을 바쳐도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신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구원도 안 받는데 교회는 왜 가는가? 지금 인간은 구원을 못 받지요. 구원이 없어요. 안 되지요.

그럼 인간의 뜻은 뭡니까? 구원 안 될 것 같으면 내가 미쳤다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느냐,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인간적인 근본적인 인간의 죄와 괴물 의식에 의하면 구원받는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 용의가 있다는 뜻이 되잖아요, 그죠? 이게 바로 마귀의 생각, 사탄의 생각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인간을 구원 없다고 해서 계속해서 인간 속에 진짜 인간이 몰랐던 것, 하나님께서 일을 차단시킴으로서 안에 있는 인간이 왜 구원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발췌해내시는 겁니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 속에 나는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 안 되는 근원적인 것이 나를 구원 못 받게 했구나, 하는 사실을 인간을 알아야 돼요. 눈치 채야 되고, 그리고 내 속에 있는 괴물은 우리 손으로 처리가 안 됩니다. 괴물이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의 거래하듯이 되는 게 아니에요. 서로 좋게, 좋게 되질 않아요. 이미 들어왔으니까요.

안에 있는 이미 들어온 사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걸 노려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 15절, 여러분 아시죠.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운다? 뱀의 후손과 싸워요. 그게 약속이에요. 하나님께선 그 약속을 위해서 우리 안에 우리가 처리 안 되는 사탄이 있다는 걸 노리고 주께선 찾아오지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사탄을 향하여 찾아오지요.

찾아올 때 자비를 베풀겠습니까, 아니면 복수를 하겠습니까? 복수를 하지요. 사탄, 너 좀 맞아야 되겠다고 복수를 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서 복수를 해주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하나님의 자비라고 이야기하죠. 그걸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의사가 있는데 안에 암세포가 가득한 환자가 왔어요. 그럼 의사가, 객관식 문제입니다. 다음 중 의사가 환자를 사랑하는 방법, ①생일 챙겨준다, ②꽃다발 사준다, ③같이 결혼해준다, ④배 짼다, 몇 번입니까? 배 째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어요.

환자가 말하기를, ‘의사 선생님, 저 이쁘지요?’ ‘이쁘고 자시고 간에 이쁜 건 맞는데 쨉시다. 겉모습은 이쁜데 속은 괴물이네요. 괴물 있는 것 몰랐지요? 내가 꺼내줘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찾아온 이유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역대상 21장에 나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렇게 시작하지요.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그다음에 “다윗을 격동”했지요.

다윗이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했습니까? 못하지요. 왜냐하면 이미 사탄의 종인 귀신이 다윗과 교류하는 입장에서, 그걸 죄라 합니다. 사탄이 원하고 있고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 것이 죄거든요.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데 사탄이 원하는 바가 인간 속에 욕망으로 자리 잡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사탄이 격동한다는 것은, 다윗은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하면 친근감, 친밀함을 느끼지요.

제가 대전강의 두 번째 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이것이 어떠냐 하면 자연스럽다 했어요. 자연스러워요. 그만큼 우리는 그동안 죄와 친하게 지내왔기 때문에. 죄와 친하게 지내왔다는 말이 어려우면 바꾸겠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 사는 욕망과 친하게 지냈어요. 자기를 위한, 아까 손해 보면 안 된다 했지요. 이익 봐야 돼요.

남이 불행하든 말든 자긴 행복해야 되고 편하게 살아야 돼요. 자기에게는 고민거리가 일체 오면 안 돼요. 그게 자연스러워요. 그게 죄라는 사실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건데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의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모습은 아니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것을 제시한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려면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해야 지킬 수 있는 거거든요. 이참에 계시가 뭔지 정리까지 할 것도 없이 간단하게, 하나님의 계시란 십자가가 나오는 게 계시에요.

성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친밀한 것, 하나님이 창세전에 생각해놓은 바가 우리를 경유해서 이게 하나님 앞에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 계시의 환원이라, 환원이라 하는 것은 원래의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가는 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이 절차 가운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겁니다. 천사도 동원시켜서 배제해요. 천사는 너는 낄 자리가 아니야, 하고 우리를 배제해버리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하셨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배제당하는 거예요. 배제당하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알려줄 때 그게 바로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가 계시 해석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해서 탈락돼야 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주님 나라로 환원돼야 된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 속에 나오신다면 여러분들은 언약에 걸려든 사람, 언약에 의해서 언약 사람이 되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언약 사람의 표현을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데 언약 사람은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는다?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구원받는다? 아니지요. 이삭 구원받는다? 아닙니다. 야곱 구원받는다? 아닙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구원받고, 이삭의 하나님이 구원받고, 야곱의 하나님이 구원받아요.

구원받는다는 것은 원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이 지상에 이름으로 오시고 그 이름이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주의 자리 찾아가는 게 구원이에요.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걸 고백하지요. 하나님은 나를 사용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너는, 그다음에 성령이 임하면 어떤 사람이 된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의 증인이 된다?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 되는 겁니까? 예수의 증인 되는 거죠, 예수의 증인. 이게 감이 오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다윗과 인간에게는, 참 이런 것도 골치 아프고 어려운데, 그냥 지나가듯이 이야기할게요.

인간의 기억은 항상 과거의 산물이에요. 과거가 없으면 없는 게 기억입니다. 과거가 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기억이 있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음을 인간이 느껴요. 왜? 인간 속에 기억은 뭐라 했습니까? 과거가 있기에 미래는 과거에 포함 안 됐기 때문에 기억 속에는 미래가 오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미래가 인간 속에 이미 와버린 거예요. 오실 분이 미리 와버렸어요. ‘이미’와 ‘아직’은 인간세계에서는 같지 않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가 ‘아직’이에요. ‘아직’ 속에 ‘이미’가 들어 와버린 거예요. ‘이미’가 ‘아직’이고, ‘아직’이 ‘이미’가 된 겁니다.

미래가 과거밖에 모르는 우리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내가 설계하는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이 설계하는 인생을 펼치게 돼요, 우리가. 그런데 우리는 과거만 알고 있잖아요. 과거만 기억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돼요? 그걸 펼치면서 뭘 배제하겠습니까? 인간의 행함을 다 배제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가 뭐냐? 하나님의 행함이 은혜가 아니고 믿음이 은혜지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행함이 아니고. 로마서에서. 그것도 값없이. 값없이 의롭게 하는 방법을. 왜 ‘값없이’란 말을 할까요, 정말 값이 없을까요?

제가 대전강의 두 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에 값없이 구원받는다 하니까 공짜, 공짜니까 아까 계산에서 손해 안 보겠네. ‘하나님, 공짜라면서요? 그 공짜 저한테 주세요.’ 소유지요. 달라하는 것은 나는 멀쩡하고 공짜니까 챙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는 말이, ‘값 내놔라.’ 십일조. 십일조로 값이 되겠어, 그게? 감사헌금. ‘그까짓 것 되겠어?’ 제 목숨 바치고. 그 목숨도 값이 안 돼요.

예수님이 치렀던 값은 인간이 목숨을 바쳐도 턱도 없이 값을 치룰 수 없는 그 값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그 값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값없음이 인간을 장악하는 것,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값없음이 우리를 장악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걸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값으로 쳐주질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복이에요. 성도의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어떤 짓을 해도.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짓, 헌금하고 전도하고 천 가지 그것도 짓이지만 인간이 생각하는 어떤 악독한 짓도 그 값없음과 상관없어요. 세리와 창기 얼마나 나쁜 짓 많이 했겠어요. 상관없어요, 구원에. 내가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이걸 아는 걸 자비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덮쳐지는 것이지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매사가 사랑이지 우리가 사랑을 써먹고 사용하는 게 아닙니다.

안 믿는 남편들이 아내가 교회 가니까 뭐라고 합니까? ‘너는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자비심이 없나. 내가 술 좀 먹고 들어온다고 그걸 용납 못하다니.’ 이게 자비다. 프라이팬 들고 자비가 뭔지 정신 들게 해봐? 자비란 프라이팬으로 맞아 머리 빵꾸나도 그걸 감사하는 게 자비에요. 어려운 사람 돈으로 구제하는 게 자비가 아닙니다.

가장 좋은 자비는 자기가 하나님께 당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최고의 자비에요. 나 까불다가 이렇게 당했다고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 믿음 소유해서 믿음으로 천당 갈 줄 생각했던 이것이 얼마나 사기고 거짓말이란 사실을 고백하는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나한테 일어난 일을 너도 일어날 거니까.

결국 이 이야기는 첫째 시간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인간 속에는 본인이 감춰놓은 게 있는데 본인이 감춰놓은 걸 처리를 못해서 인간은 맨날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서 신앙적인 생색을 내지요. 그 생색내는 방법이 뭐라 했습니까? ‘나는 이렇게 성질도 급하고 이런 죄도 짓고 이렇게 나쁜 짓도 했어요, 하나님.’

남들 보기엔 굉장히 회개하고 반성하고 신앙적인 사람처럼 보이지요. 그게 뭐냐 하면 진짜 큰 약점을 교묘하게 감추려는 술책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상대방이 눈치 채는 약점을 제공함으로써 나에 대해서 깊이 알 생각하지 마, 그러니까 초 치는 방식, 이게 우리 안에 괴물이 마귀가 그런 식으로 했던 겁니다.

바로 역대상 21장 1절,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어떻게 다윗을 성전의 핵심으로 만드는지 그거는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합시다.

 

 

20240503b 울산강의-역대기하(3강) 3장 1절 : 천사의 심판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찾아온 영물이 있었어요.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과 친하게 지냈어요. 줄곧. 사탄의 말은 속속 들어와요. 그러나 주님의 말은 낯설어요.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귀신이 주의 말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그 거부하게 된 현상을 신약 로마서에선 뭐냐? ‘왜 자꾸 나보고 죄인이라고 그래? 나만 가지고 그래. 왜 자꾸 나를 죄인이라고 그래?’

여기서 그리고 내가 온전치 않은 완전한 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아니까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 성실함을 주님이 이성적이니까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말은 이미 사탄이 우상이란 것, 다시 말해서 신이죠. 신을 이미 알고 있어요. 로마서 1장 21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있으되 뭘 모르느냐 하면 영화롭게 하는지 몰라요. 어떻게 영화롭게 하는 걸 몰라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언약이 주어짐으로써 성사되는 것이지 인간이 영화롭다, 영화롭다 해서 영광스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영광스럽게 오실 그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람들이 거부했다는 말은 인간도 인간 지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하는 것은 내 속의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내가 이렇게 한다. 내가 저렇게 한다. 내가 바르게 영광 돌려야지, 이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을 찾아온 이유는 네 속에 있는 괴물의 정체를 밝혀줄게, 이거에요. 밝혀주시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동안에 어디서 시달렸는가를 우리 속에 내가 모르는 그 괴물을 밝히 드러내려하는 겁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탄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면서 다윗이 요압이 말려도 소용없어요. 인구조사를 해버렸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는데 여기서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돼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역대하 3장하면서 역대상 21장을 거론해야 하는가? 그것은 역대하 3장 오늘 본문하면서 이 전 장소가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 보는 거예요.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인간은 늦게 의식하거든요. 항상 늦어요. 사건은 일어나고 인간은 늦기 때문에 인간은 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조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여기서 칠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했는데 결과가 뭐냐? 이스라엘 백성 칠만 명이 죽어요. 그 칠만 명 죽은 것에 대해서 다윗이 조치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치할 수 없지요.

그런데 역대상 21장에서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15절에 나옵니다.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라고 돼 있지요. 천사, 천사는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 천사가 하는 것이 누굽니까?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죠. 이게 딱 하나의 연결 구조를 형성해요. 다윗은 이 바깥에 있습니다. 이 구조 바깥에 다윗이 있어요.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규정을 했습니다.

타작마당에 서서 뭘 했는가? 심판을 했지요. 몇 명 죽었다 했습니까? 칠만 명 작살났어요.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복수입니다. 내 율례, 법도를 왜 어겼느냐에 대한 복수에요. 처절한 복수지요. 복수가 멈추질 않습니다. 복수가 계속 칠만 명 죽었지만 팔만 명, 구만 명 계속 확대될 조짐이 보여요.

역대상 21장에 16절에 보면,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다윗은 관찰자입니다. God's view 이거는 ‘신의 관점’이에요. 신의 관점에서 그 결과가 칠만 명 작살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해요. 하나님이 정당한 조치를 한 거예요. 다윗은 이 신의 관점을 쳐다보고 있어요. 관찰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섰던 천사가 칼을 들고 예루살렘 쪽을 가리키면서 계속해서 작살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17절에 보면, 다윗이 베를 입고 이렇게 해요.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제가 했습니다’란 뜻이에요.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지금 참 이게 하나님의 전략이 아주 교묘해요. 하나님께서 범죄 했다 해놓고 다윗에게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 거예요. 첫 번째는 삼년 동안 기근, 두 번째는 석달 동안 네가 대적에서 패배하는 것, 또 삼일 동안 전염병이 퍼지는 것. 이 세 가지 중에 고르게 했어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칠만 명 죽기 전이거든요. 칠만 명 작살나기 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번 일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복수를 하겠다는, 하나님은 복수하는 것만 생각해요.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백성을 이렇게 했으니까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한 대로 했으니까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복수하면 그냥 복수하시지요. 왜 세 가지를 제안하고, 그것에 네 가지, 다섯 가지가 아니고 달랑 세 가지 제안하고 그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는가? 이것은 이 복수에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이 왕이 God's view 하나님의 관점에 참여토록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했던 짓거리에 복수를 누가 하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복수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용의가 돼 있는지 묻는 거예요.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내 인생에 깔려죽는다 했지요. 그게 하나님의 전략이란 말이죠. ‘하나님이여 잘했으면 복 주시고 못했으면 벌주세요.’ 이게 인간의 관점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인간 자체가 스스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인 거예요.

그렇다면 복은 뭐냐? 내가 나로 인하여 내가 무너지는 관점에다가 초청받는 것, 그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인 것을 하나님의 관점과 공유되는 것, 합류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복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오셔서 날 구원하길 원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너는 이미 구원되지 못한다는 그 관점을 네가 오케이 하라 이 말입니다.

그럼 다윗이 인구조사한 것은? 인구조사 안 해도 다윗은 망하게 돼 있어요. 사탄이 격동케 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본래 내 모습이 어떤가, 나는 하나님의 관점에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그 구조에 다윗에 편입시켜 넣어주는 거예요. 셀프심판? 내가 나를 때리게 만드는 것? 우린 이런 생각하면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님을 저주하는 것은 잔인한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 독자를 남의 손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라고 한 그거는 잔인한 것 아닙니까?

역대상 3장 1절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이 모리아산에 창세기 22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이삭을 갖다 바친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의 관점은 한 결 같아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그 일에 참여된 자만이 예수님의 나라, 천국 간다는 뜻이에요. 주님이 자기를 때렸던 거기에 합류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이거는 나 죄인입니다, 한다고 합류되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합류되는가? 그냥 마귀 짓을 하는 게 합류에요. 마귀 짓을 하세요. 하고 그다음에 주께서 찾아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으로 찾아올 때 주님의 철저한 복수가 우리한테 참 합당한 주님과 만남의 순간이에요.

세 가지 제안을 했다. 이걸 아까 첫째 시간에 한 것과 같은 뜻인데 다시 해보면, 만남이라 하는 것은 대화에요. 묻고 답하고. 아까 첫째 시간에 첫 번째 이야기한 거예요. 묻고 답하고, 주님 안에서 교제인데 교제는 묻고 답해야 돼요. 항상 성도는 주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계속 물어야 돼요. 어떤 걸 묻느냐 하면 내가 나를 어떻게 죽일 수 있습니까, 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묻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성도의 믿음 있는 행함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죠. 그럼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이죠. 산 믿음 되는 행함이 뭡니까? 어디서 내가 소실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어디서 내가 없어질 수 있는가? 없어져야 마땅한 내가 어떻게 없어질 수 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두 가지 나왔지요. 하나는 기생 라합,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는 것.

우리는 자기가 내가 소실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나의 주인 되시는 분이 오셨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뭐가 방해가 되겠어요? 자꾸 내가 펄펄 살아있으면 자꾸 내 계획과 내 꼼수와 내 기대성이 계속 나오겠지요. 사람이 사는 게 제일 힘든 게 뭐냐 하면 뭔가 고대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인생이.

이번 연휴에 놀러 가는데 날씨 좋아야 되는데, 이게 뭡니까? 하여튼 어린이날 비 오면 부모가 제일 좋아해요. 놀이동산 안 가도 되잖아요. 갔다 오면 파김치 되고 힘들어서 그다음 날 출근 못해요. 그냥 선물 마징가Z 하나 사주고 티비에서 만화영화나 봐라. 그러면 최고의 어린이날 되지요. 그런데 어린이날 화창하다. 이제 죽은 거예요. 국가정원에 데려가서 대나무 숲에 가서 30분 놀아선 안 되는 거예요. 한 세 시간 놀아보면 젊은 엄마는 놀 수 있습니다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주일 동안 몸살 나요. 도저히 힘들어서 안 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내가 힘들어 안 돼요. 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나의 의가 잘남이 살아 있거든요. 이것 때문에 남을 의식해요.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나에 대해서 점수를 어떻게 매기는 것 때문에 늘 이렇게 쇳덩어리 같은 걸 짊어지고 살아가요. 상견례가 힘든 것도 그렇고, 명절 날 어른 만나는 것도 힘들어요. 시집 안 간 딸내미가 명절에 가면 뭡니까? ‘너 아직도 시집 안 갔나? 너 시집 언제 갈 건데? 순주 좀 보자, 손주.’

지금 나라 정책상 1억 주면 애 낳는다 하는데 1억 줘도 애 안 낳아요. 왜 그러냐 하면 옛날의 여자들은 애 낳는 것이 시집의 평가를 인정을 받는 건데 요새는 여자든 남자든 나 하고 싶은 일에 성취감으로 이미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데 아이까지 낳으면서 인정받을 것 뭐가 있어요? 내가 잘하는 짓거리로 인정받으면 됐지.

이건 젊은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젊은 사람들 교육 어떻게 시킬 겁니까? ‘애야 그게 아니고 결혼했으면 벌써 삼년 넘었는데 빨리 애 낳아라.’ 1억 주길 기다려? 안 돼. 그럼 2억 주길 기다려? ‘어머님, 내가 성취될 게 남았습니다. 내가 배고픕니다.’ 월드컵 4강 돼야 돼요? 도대체 그 배고픔 해소, 그 욕망 해소 되려면 어디까지 가야 되는데? KBS 사장 돼야 되는지 어디까지 가야 돼, 도대체? 성취성이 뭔데, 차 벤츠 타야 돼요, 뭐 해야 돼요? 아파트 자기 아파트 사야 되는 겁니까, 뭡니까?

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자기가 자기한테 시킨 거예요. 사탄이 시킨 건데 내가 평소에 나한테 시킨 거예요. 내가 얼마나 큰 성과를 냈는지 스스로 그걸 자기한테 축하고 싶은 겁니다. 자기가 자랑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자랑스럽던 내가 아까 역대상 21장 17절에는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된 거예요. 남 건들지 말고 나와 내 집을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하거든요.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온 그 고백을 들은 거예요. ‘나는 내가 소멸되는 것이 나의 원천에 합당한 주님의 조치입니다’를 스스로 거기에 참여케 하는 거예요. 내가 망가지고 내가 무너지는 것이 나라는 존재에 딱 맞는 맞춤 하나님의 처리방법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하는 장소가 어느 장소라 했습니까? 천사가 어디 섰다고 했어요? 오르난의 타작마당, 복수를 감행하는 그 마당, 칠만 명 죽는 그 마당.

삼년 동안 기근, 그리고 석 달 동안 다윗이 적들에게 쫓겨 다니는 것, 이미 그것 다윗이 다 경험했어요. 그러나 세 번째는 다윗이 아직 경험 못한 겁니다. 일 년 만에 한 오천 명 죽는 건 경험했는데 단 삼일 동안 칠만 명 죽었잖아요. 그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인식의 전환을 시키는 거예요.

뭐냐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것은 우연한 것이고 자연스럽고 세상에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데 그걸 신의 손길이었다, 신의 기적이었다, 그렇게 오버해서 해석할 필요 뭐있어? 그건 뭐 이 세상에 하도 변화무쌍하니까 어떻게 요소와 요소가 부딪치다보면 그런 급작스런 큰 변화가 오지, 라고 생각했다면 삼일 만에 집중해서 칠만 명이 죽은 것은 이건 누가 개입한 거예요.

누가 개입한 거예요? 하나님이 개입했잖아요. 하나님이 개입했다면 아울러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네가 인구조사를 한 것은 네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고 사탄이라는 영물이 괴물이 개입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는 것보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사탄이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실제성reality를 우리가 인정해줘야 돼요. 이 세상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과 노력과 거기서 생겨나는 게 아니고 악마의 요소를 반드시 주도적으로 집어넣어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주고받고 대화, 대화가 중요해요.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다윗의 관점이 뭐로 바뀝니까? 사탄을 염두에 둔 관점으로 세상보기가 되는 거죠. 악마의 관점을 두고. 그리고 악마는 모든 인간의 친구고, 악마의 일은 인간들이 쌍수로 대환영하고 있다는 이러한 현실성, 그걸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성전을 제단을 쌓는 것은 뭐가 되느냐? singularity 다시 말해서 특이성이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 어떻게 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아니죠. 특이성이에요. 특이성이라 하는 것은 뭐는 아니다? 보편적은 아니고 특이성이죠. 그러면 우리 교회 교인 몇 명이라고 헤아리는 것은 특이성입니까, 보편적입니까? 보편적이죠. 보편적이라는 것은 악마적이죠. 그리고 인간은 악마적인 것밖에 할 수 없어요. 인간은 사탄을 넘어서서 행하질 못해요. 사탄이 허락한 안에서만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 한계의 자연스러움. 인간은 한계가 지어져있고 그 너머에서는 미지에요. 미지의 것이에요. 모든 인간이 하는 것은. 다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대비해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워해요. 그러면 그게 하나의 고대함이 되고 기대함이 되고 목표가 되고 비전이 되고 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이성은 뭐냐? 그렇게 기대하고 노리고 있는 그것을 어떻게 해요? 내부적으로 이미 복수를 감행하고 공격을 하고 뭘 하느냐? 심판을 해버려요. 다윗에 대한 심판. 다윗에 대한 심판의 그 자리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에요. 다윗이 제대로 하나님 앞에 ‘나는 지금 내가 심판 받을 입장이다’ 자,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왕이지요.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면 역대상 21장에 보면, 그 오르난 이 사람이 왕이 와서 제단을 쌓아야 되겠다, 할 때 오르난 이 사람이 돈 달라 했습니까, 아니면 거저 준다 했어요? 역대상 21장에 보면 23절에, “오르난이 다윗에게 고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의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아까 이 조직표 봅시다. 하나님, 그다음에 누가 왔다? 천사. 그다음에 밑에 뭐가 있습니까? 오르난이죠. 오르난의 타작마당. 이렇게 돼 있지요.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뭡니까? 다윗은 관찰자지요. 오르난의 옆에 천사가 서서 복수로 칠만 명 죽이는데 그는 관찰하고 그걸 느끼고 있지요. 자기가 죽는 게 아니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자기가 관찰하고 있고 주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자기가 끼어든다는 말은 이것은 다윗이 뭐로 바뀌는 겁니까? 오르난이 다윗이 제사한다 하니까 다 드리겠다고 했지요. 이거는 다윗이 오르난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께 뭘 해야 되겠어요? ‘다 드리겠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제가 말씀드리면 자아 소멸이에요.

내가 뿅 하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가 왜 인생이 남아 있는가? 남아있는 이유는 바로 죄를 계속 짓기 위해서 남아있고요. 왜 죄를 지어야 되느냐?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이게 우리가 이 자리가 하나님의 복수의 자리면 복수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자리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 다윗처럼 드려야 될 존재가 되는 거예요.

드리면 어떻게 되느냐?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는 죄만 지었으니까요. 죄 짓는 것조차 주를 위해서 죄를 지어야 될 처지에 있음을 그것까지 하나님께 늘 드리는 인생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안 된다. 내가 값을 치러야 돼.’ 하는 말은 그 값을 누가 주느냐 하면, 다윗이 값을 치르지만 나중에 다윗이 오르난 자리에 있으면 그 값은 누가 치르는가?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하나님이 제공하는 제물이 다윗을 구원하는 값이 되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는 값이 되는 겁니다.

자, 이 자리가 참 보통 자리가 아니지요. 그래서 역대상 29장 봅시다. 11절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이걸 오늘날 우리가 아나운서 읽듯이 읽고 그대로 외워서 반복하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지요.

이렇게 하기 위해선 뭡니까? 우리가 인구조사를 해야 되지요. 우리가 학급 담임도 아니고 우리가 다 교회 목사도 아니고 인구조사할 일이 있습니까? 왜 인구조사를 매일같이 하지요? 젊은 아빠, 엄마들 애 유치원 갔다 오면, ‘우리 애 한 번 보자. 오늘 몇 점 맞았어? 다 맞았어?’ 참 어린이집은 시험 안 치지.

‘한 번 보자. 손 씻고.’ 뭐하는 거예요, 지금? 챙기지요. 왜? 내 소유거든요. 남은 모르겠고, 나는 내 소유를 챙기는 거예요. 내 집안의 자녀에요. 그리고 내 집안의 자녀는 나의 영광과 나의 자부심이고 나의 존재의 이유가 돼요. 그것이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는 건 상상도 못하지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걸 보세요. ‘아브라함은 믿음도 좋다. 나는 때려죽여도 못하지.’ 아브라함도 못했어요. 우리도 때려죽여도 못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들 못 바치면 우린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우린 뭐냐 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들을 차마 못 죽이는 나를 죽이잖아요. 누가?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우리는 어떤 말씀도 못 지켜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를 죽이시는 겁니다.

제가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대전강의가 예상보다 상당히 어려운 게 많아요. 그중에 하나가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과 관련해서 이런 내용입니다.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모른다.’ 이 세상에 유일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지 나머지는 죽음이 아니에요. 이것 예를 들게요. 마태복음 20장 찾아봅시다. 거기에 이야기의 시작을 ‘천국은’이라 돼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찾으셨죠.

천국은 이와 같으니 포도원에 일꾼 모집하는 그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느 대목에서 천국을 발견하는가? 포도원의 주인이 일꾼이 없다. 가보니까 놀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놀고 있는 사람 중에서 네 명 뽑으면 되는데 네 명을 뽑지 않았어요. 아침 열 시에 한 명 뽑았고, 열두 시에 한 명 뽑았고, 오후 세 시에 한 명 뽑고, 오후 다섯 시에 퇴근시간 여섯 시인데 한 시간 앞두고 한 명 뽑았어요.

네 명을 뽑을 때 어떻게 뽑았습니까? 따로, 따로 뽑았어요. 순차적으로 뽑았어요. 시간을 순차적으로 함으로써 천국이 무엇인가를 주께서 설명하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천국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천국은 틈에서 와요, 사이. 처음에 온 사람 1번 타자, 그 사람은 본인이 아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노동의 가치, 시간의 가치, 자기 행함의 가치를 안다고 생각해요. 여기 가치, 가치, 가치 붙어있지요. 가치 또는 의미, 의미, 의미라 해도 돼요. 가치, 가치, 가치가 누가 안다? 내가 알지요. 내가 아니까 내가 안다. 뭐를? 어떤 게 가치 있는지 안다. 그러면 이 말은 나는 가치 있다가 돼요.

지금 주님께서 설명하는 건 뭡니까? 천국이죠. 천국은 있는데 처음 온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주께서는 천국을 설명해서 일단 당겨 올라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마찬가지에요. 네 번째 온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네 번째 온 사람은 뭐냐 하면 ‘나는 가치 있다’와 뭐와 가장 관련성이 없느냐 하면 내가 받은 품삯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요. 이상해요. ‘진짜 주인님 이래 나오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한 시간 일한 품삯을 주는 게 아니고 하루 온종일 한 품삯을 줘버리니까 이거는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공평하지요. 그러니까 천국은 어때요? 천국은 벌써 어떤 나라다? 불공평하고 이건 오류에요. 오류고 더 나가서 천국은 거짓됨이에요. 꼭 뭐와 같으냐? 가짜 같아. 누구 입장에서? 인간이 살아온 인간의 관점에서 천국은 대립되는 거예요. 일치되지 않습니다. 바친 만큼 복 받는 게 아니에요. 기도한 만큼 응답받는 게 아니에요. 기도하고 헌금할 때는 반드시 나의 가치를 표현한 거거든요.

마태복음 5장 잠시 보겠습니다. 33절에,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하지 말라” 앞에 뭐가 붙어요? “도무지” never, 결코 맹세하지 말라. 이 뭐냐 하면 모든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과 네 몸 한 쪼가리라도 나의 의미와 나의 노동의 가치가 묻어있는 것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맹세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내가 이 정도 했으니까 이제는 내 성과를 주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라고 해서 인간은 맹세를 하는 거예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지금의 행함이 내 미래를 결정하는데 내가 좀 기여할 수 있잖아요. 그런 가치는 있지 않습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거는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이미 메시아가 심판의 칼날을 들고 이미 왔다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뭐 해야 돼요? 항복, 우리는 항복이죠. 항복이 두 자잖아요. 그걸 두 자로 바꾸면, ‘감사’ 석 자로 바꾸면, ‘고마움’ 다섯 자로 ‘고맙습니다’ 마귀 들린 귀신 들린 내가 귀신을 품고 더불어 항복합니다. 이 귀신 내 힘으로 뽑아내지 못한 나란 존재를 하나님 앞에 굴복당합니다. 일종의 전리품이죠. 하나님 전쟁의 전리품으로 그냥 포로 잡혀온 거죠.

천국을 설명하는데 품삯을 줄 때 제일 끝부분에 온 사람에게 하루치 임금을 줘버려요. 그리고 난 뒤에 마태복음 20장 15절 16절 보면 이런 말씀 있어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다시 말해서 인간의 모든 관점은 선한 게 하나도 없고 모조리 다 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질문할게요. 먼저 된 자가 먼저 되고, 나중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의식이 누구 의식이겠습니까? 인간의 의식이죠.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장남,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차남. 이게 인간의 당연한 상식이죠.

그런데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이삭의 당연한 상식을 뒤엎어버립니다. 바꿔버려요. 엎어치기죠. 그래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엎어치기당한 거예요. 엎어치기당하면서 내게 엎어치기를 할 수 있는 분은 내가 노려서가 아니라 주께서 찾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나한테 사건으로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사건이 먼저 나고 의식이 나중에 그 사건 뒤에 오는데 그 사건은 내가 이걸 알아야 구원받는구나가 아니라 내가 뭘 알아도 구원되지 못하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뭘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엎어치기를 당해버려야 돼요. 내가 전복돼야 된다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아까 다니엘서 벨사살 하다 말았는데 벨사살 왕이 파티를 열면서 성소에서 은과 금 기명을 가져와서 술을 마셨어요. 우리가 승리했다고. 벨사살 가치 있지요. 자기가 왕으로서 승자 입장에 있잖아요. 성공자니까 인정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요. 손모가지는 없고 손가락만 있는 거예요. 그리고 벽에다 글씨를 쓰는 겁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이런 거예요.

그냥 벽돌 벽이 있다 합시다. 벽돌 쌓아놓은 벽에 벨사살 왕이 한 짓이 뭐냐 하면 이 벽에다가 문 그림을 하나 그려놓고 이 문을 열면 우리가 천국 간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같잖습니까? 지가 문 그려놓고 이 문 열면 천국이라 하는 이게 말이 돼요, 안 돼요? 말도 안 되지요. 벨사살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는 거예요. 어떤 여호와를 믿는 나라를 정복했으니까 우리가 믿는 마르둑 신은 여호와보다 더 세다, 그걸로 증명히 됐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이 벽에서 손가락이(겁난다, 정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 거예요. 글씨를 써버리면 이게 뭐예요? 이게 바로 천국을 통하는 문이에요, 문. 천국은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가는 게 아니고 벨사살 왕 같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 판에다가 주께서 심판의 글씨를 쓸 때 그 글씨가 문이 되는 겁니다. ‘너 잘렸어, 너 잘렸어. 너는 심판 받아야 돼. 왜냐하면 그것은 네가 나빠서가 아니라 네 한계 너머를 네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네가 할 수 있는 건 하지만 할 수 없는 건 못한다는 그것 때문에 심판 받아야 돼.’ 그걸 지적해주는 거예요.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그 장소가 오늘 역대하 3장에서 그 장소를 뭐라 했습니까? 그 장소에 뭐가 세워진다 했습니까? 성전. 이제 성전은 반대에요.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는 장소에요. 요나가 물에 빠져서 고기 뱃속에 들어갔지요. 요나가 어딜 향하여 물었습니까? 성전을 향하여 묻지요. 어떻게 답변이 왔습니까? 죽음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아요.

이게 뭐냐 하면 열왕기하 8장에 나오지만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기도한 게 있어요. ‘여기를 향하여 기도하면 우리가 병도 낫고 전쟁도 이기고 우리 죄도 용서받는 성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성전이 오늘날 어디에 있지요? 찾아와야 있지요. 성령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야 성전이다. 드디어 성전 됐으니까 구원받겠네’가 아니라 우린 어떤 입장에 들어가야 됩니까?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야 돼요. 다윗이 성전 짓는 장소가 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지요. 다윗이 보기에 다윗 자기 말고 천사가 어느 자리에 서있었습니까? 나 말고 오르난이란 사람, 그 사람 자리, 천사가 함께 있는 그 자리 다윗은 바로 제단을 쌓을 때에 그 조직된 천사가 섰던 그 자리, 심판의 자리, 심판이 합당하다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정받은 그 자리에 심판의 자리에 들어선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은 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돼 있어요. 그 십자가 자리는 주의 자리인 동시에 사도 바울은 누구의 자리다, 이제는? 내가 있을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에요. 마땅히 심판 받을 자리에요. 범사에 감사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래서 계시란 뭐가 나와야 된다? 십자가가 나와야 돼요. 십자가가 나와야 내가 엎어치기를 당한 게 나와요. 예수 피로 구원받았고, 헤헤거리는 것은 엎어치기를 (당한 게 아니라) 이건 예수님의 피를 이용한 거예요. 예수님 부활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는 멀쩡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안 다치기를 원하고 있어요. 자신의 가치를 포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대하 3장 봅시다. 거기서 나오는데 3장 핵심이 10절에 있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그다음에 11절, “두 그룹의 날개” 됐습니다. 두 그룹이죠. 이 그룹이 창세기 3장 24절에 하는 일이 뭐라 했습니까? 지킴이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는 그룹이에요, 그 그룹이. 그룹이 끝까지 지성소에서 인간이 멀쩡하게 구원받는 것을 차단시키는 기능이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기 25장 17절에서 22절에 보니까 바로 속죄소 이야기, 거기에 그룹들 또 나와요.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무장한 그 그룹들이 속죄소까지 접수를 했다는 말은 생명나무 가는 길과 이 저주받은 땅, 그 사이에 뭐가 있어요? 천사가 있지요. 그 천사를 성전 안에다가 금으로 만들었잖아요. 만들었다는 성전은 곧 뭐냐 하면 천국과 이 세상의 틈이 되고 그 사이가 되는 거예요.

그 틈과 사이로 이쪽에 사탄이 지배하는 인간세계의 가치와 의미, 하늘나라를 인간들이 넘지를 못했으니까 막혀서 넘지를 못한 그 나라의 생명나무의 차이가 어떻게 된다? 서로 전복된다, 서로 반대가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게 거꾸로다. 반대가 돼요. 그 반대된다는 그 모습을 성전 안에 들어옴으로서 알 수 있는데 성전 안에는 누가 죽느냐? 희생제물이 죽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이 틈에 오셨어요. 오셔서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뭐가 없다? 생명이 없다.

이 틈이 A와 B라는 동그라미의 교차되는 이 틈이 한쪽은 A에 맞물려있지만 B에도 맞물려있어요. 두 개에 맞물려있다고요. 그래서 여기서 예수님이 하는 말은, 인간세계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말을 하신 거예요. 심지어 열한 제자, 열두 제자도 몰랐습니다.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몰랐는데 나중에 열한 제자에게 누가 찾아오지요? 오순절 날 성령이 찾아오지요. 성령이 찾아오니까 찾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한꺼번에 알게 되었어요. ‘나는 내 생각은 다 엉터리구나. 내가 생각한 천국, 내가 생각한 여호와, 내가 생각한 예수님, 성령 모조리 다 엉터리였구나.’ 왜? 나의 소기의 목적과 노림수와 내가 챙기는 것과 관련해서 나는 성경을 해석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육신이 아직도 있으니까.

‘주여, 나를 철저하게 나의 행함을 받지 마시고 가치를 안 받아주셔서 그 빈자리에 피만 묻히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피로 흰옷을 입었다고 돼 있어요. 딴 것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더러운 죄를 씻김 받은 사람은 종려나무를 들고 천국을 갑니다.

그럼 성경은 왜 있는가? 그 죄가 무엇이냐 하는, 이것을 통해서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오늘도 우리에게 쏘아대는 겁니다. 엤다 맞으라고. 그럼 우리는 뭐냐? ‘아야 고맙습니다.’ 매일같이 매일 얻어맞아가면서 고마움과 감사가 나올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 하는 것만 눈에 보면서 살아온 그것이 얼마나 가짜이고 마귀 짓인 것을 몰랐습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향하여 찔러죽일 수밖에 없는 사탄의 짓인 것을 이제는 기쁨으로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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