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5a 울산강의-역대기하(2강) 2장 6절 : 죽음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역대하 2장,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자기 권영을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그다음에 솔로몬이 일꾼들을 그리고 감독들을 위하여 두로, 지중해에 있는 해변도시에요. 두로 왕 후람에게 협조를 구했고, 궁궐과 성전 짓는데 도움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했잖아요.
그런데 역대하 1장에 솔로몬의 기도 가운데서는 성전을 짓겠다는 기도 내용이 없어요.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서 지혜를 달라고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위해 지혜를 달라고 하면서 성전은 왜 짓는가? 지혜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되잖아요. 굳이 성전은 왜 필요하냐 말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이유는 여기 역대하 2장 6절에 나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관대 어찌 능히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이렇게 돼 있잖아요. 그러면 성전을 건축하지 말든지. 하나님을 모실 성전을 인간의 힘으로, 그리고 하늘의 능력이라도 주를 모실 성전이 안 된다면 아예 차라리 기도한 내용대로 백성을 위해서 가르칠 그런 지혜 달라고 하지 성전을 왜 짓느냐 이 말이죠.
그 뒤에 6절 끝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내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기 모시려는 것이 아니고 만남의 장으로 삼으려고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지구는 둥글지요. 평면으로 생각해봅시다, 편평한 평면. 평면으로 생각할 때 솔로몬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자기가 만나는 것은 하나의 점으로 보는 거예요. 평면 위의 점이다.
그러니까 이거는 솔로몬에 의하면, ‘분향하려 함이라’ 하나님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 점을 하나 꼭 찍듯이 지점 하나 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거대한 성전을 짓기로 구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점을 찍는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여기 평면으로 보면 인간세계죠. 전체 인간세계 속에 이스라엘도 평면이고, 다른 전체도 평면이에요.
평면에 저 많은 세계 있지만 하나님과 통하는 하나의 점 같은 점찍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중에 또 점 하나 찍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겠어요? 분향하는 장소니까, 영화관에 매표소, 조그마한 창구에서 돈 받잖아요. 동대구역에서 표 끊을 때 그처럼 교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창구 하나 점찍듯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을 크게 지었으니까 하나님 여기에 넉넉하게 계시라는 것은 솔로몬 생각에는 없습니다. 연락만 잘 되면 돼요. 하나님께 연락만 잘 되면 되거든요. 그렇게 될 때 여기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 본인이 왕이에요. 솔로몬이 왕이라고요, 그렇지요? 그러면 평면 되는 이스라엘은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느냐 하면 솔로몬의 말을 들어야 돼요.
그러면 솔로몬이 왕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솔로몬의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분은 누구죠? 이스라엘에서 솔로몬의 말을 듣지 않을 자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없는데 여기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이 등장해요. 4절에,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여기 주의 이름이 등장한다고요.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은 솔로몬이지만 솔로몬의 말을 들을 필요 없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해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이스라엘 전부를 지배했습니까, 아니면 전부를 지배 못했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지배 못했지요. 이게 성전의 존재 이유입니다. 나는 나타난 왕이고 숨어있는 왕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지은 책 중에 잠언이 있습니다. 잠언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나타난 것은 왕의 일이고, 숨어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 했단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왕 되심의 연락책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런데 나타난 하나님의 연락책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솔로몬의 뜻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백성들아 내 말 들어. 내 말 들으면 너희들 잘 돼. 왜? 내가 하나님과 잘해 볼 테니까’ 이게 아니에요. ‘너희들은 내 말 듣고 나는 따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으면 복은 너희에게 골고루 주어진다’ 그런 뜻이 아니고 솔로몬 자체에, 초반부터 나오는 어려운 건데 할 수 없이 쓰겠어요. 왕 자체의 결핍성을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자기 자체의 결핍성을 스스로 후벼 파는 겁니다.
멀쩡한 데 손가락으로 코 후비면 뭐 나옵니까? 피 나오지요. 멀쩡한 데 피를 막 내는 거예요. 나를 후벼서 내 속의 피까지 내게 만드는 분을 의도적으로 모시는 일이 왕이 해야 될 일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도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일상을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코피 나야지요. 내 인생을 내가 지배할 수 없는 결핍의 자리를, 스스로 그걸 마련해줘야 되지요.
그러면 솔로몬에 있어서 온전한 내 인생이 성립됩니까, 성립되지 않습니까? 성립되면 안 돼요. 그러면 여기서 내는 결론은 뭐냐? 성도는 자발적으로 나는 온전치 못하다는 결론이 나와요. 나는 자발적으로 흔쾌히 기쁘게 너무 고맙게도 내가 어설프다는 사실을 기꺼이 늘 같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 하나 할게요. 성도가 복음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더 추구하고, 추구하고, 더 알게 되면 결핍이 줄어들까요, 결핍이 늘어날까요? 코피의 깊이가 더 깊어져요. 전에는 코피가 찔끔 인데 줄줄 코피가 더 나게 돼 있어요. 전에는 내가 손가락으로 코피 냈는데 이제는 주님의 손가락이 내 마음에 완전히 허접하게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솔로몬이 원하는 것은 뭐냐? 이 백성들로 하여금 특히 백성들이죠. 만약에 솔로몬의 신하들이 있다면 요새는 공무원이잖아요. 국가의 공무원을 뭐로 바꾸느냐? 천국의 공무원으로 바꾸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공무원 중에 제일 우두머리가 누굽니까? 솔로몬 자기거든요. 자기가 연락책이거든요.
지금 이 나라가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솔로몬이 왕이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박아놓은 순간 그다음부터는 이것은 솔로몬 본인도 하늘나라의 공무원이에요. 히브리서 3장에서 이걸 모세가 일했는데 모세는 뭐로 일했는가? 주님의 종으로 일했다는 거예요. 주님의 종으로 일했으니까 이 말은 뭐냐? 그냥 인생을 시키는 대로 살면 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에 자기가 책임진다, 안 진다? 책임지면 안 돼요. 책임질 것 없어요. 만약에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그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진 거예요. 책임진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최종 책임자가 나 말고는 달리 없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손에 달렸다는 믿음을 말하거든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불신의 세계입니까.
그래서 솔로몬이 이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공무원을 천국의 공무원으로 만드는 거예요. 전 백성들을. 그러면 만드는 방법이 있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만드는 방법을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역대하에 나오는 방식이에요. 만드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해요.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을 비교하면 됩니다. 이걸 비교해야 돼요, 대조해야 돼요. 이것 대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나님 나를 이해해주세요, 이러면 안 돼요. 반드시 대조를 해야 돼요.
나는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이 가상히 여기겠지, 하는 것은 대조할 수 있는 주의 일을 모를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나름 열심히 하지요. 자기가 보기에 또 다른 사람 보기에 자기는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하니까 굉장히 우수하고 훌륭해 보이지요. 그러나 대조는 타인하고 같은 인간끼리 대조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거는 하나님의 공무원이 안 된다고요. 천국 백성이 안 돼요.
천국 백성은 누구와 기준이 되느냐 하면 내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삑사리 났는지 어떤 점에서 전혀 무관한 일인지 전혀 상관없는 일에 내가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발견할 때 그때만 하나님의 일이 보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하는 모든 일은 무엇에 훼방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 훼방되는 식으로 한 겁니다.
왜? 인간의 일은 자기가 온전 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신약에 오면 내 자신이 온전하게 살려는 것을 세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 바르게 사는 사람들 그냥 백 프로입니다. 자기 의에 미쳐 살아가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율법에 의해서 자기 의를 챙기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거예요.
자기한테 완벽과 완벽, 특히 거룩함, 자기의 거룩의 완벽, 경건의 완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은 뭡니까? 자기 의는 쌓여가고 그만큼 하나님의 의는 안 보이고. 언제 적 하나님 의에요. 하나님 의가 뭐지? 하루 종일 스물네 시간 자기 하자 없고 실수 없는 그런 일상생활을 매진하는데 정신 팔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뭔지 잊어버렸어. 뭔지를 몰라요.
하나님의 의는 자기 의에 몰두하고 매진한 것 때문에 상처 받은 그분의 의가 하나님의 의에요.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 때문에 피해 입은 분의 의가 그분의 의에요. 그래서 대조해야 된다고요. 그러면 우리 자신이 지금 하루하루 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하게 되면 금방 떠올라요. ‘당신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는 다음에 대한 질문에 답변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당신은 무엇을 필요로 합니까? 이 질문을 유치원 다니는 다섯 살 애한테 물어보세요. ‘너 뭐하고 싶어?’ 간단하지요, 질문. ‘난 엄마하고 놀고 싶어.’ 이러하겠지요. ‘난 사탕 먹고 싶어. 빵 먹고 싶어.’ 그게 다섯 살 애가 하는 하루 종일 일이에요. 내게 필요한 일을 한다고요. 그러니까 애들도 자기 일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 알아요.
인간은 자기 인생을 뜨개질합니다. 매일같이 자기 인생 짜 나가요. 거미만 거미줄 짜는 줄 알아요? 인간들도 인생을 짜 나간다고요. 물어보세요. ‘당신은 지금 나이 먹을 때까지 뭘 짰습니까?’ 그러면 답변은 간단해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짰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것 뭡니까? 당신이 필요했던 것은 뭡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나는 나와의 동질성이에요.
인간이 필요한 것은, 이거는 아주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요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다가서지 않아요, 인간은. 누구에게 다가설 때는 내게 필요하다 싶어서 다가서거든요. 그런데 다가서는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이런 건 좀 적어놓으면 좋겠는데…. ‘너는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이게 바로 동질성이에요.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은 네가 나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이걸 두 자로 ‘친구’라고 합니다. 사람은 나와 동질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있어요. 그것 못 찾으면 솔로입니다. 혼자 살아야 돼요. 결혼은 왜 합니까? 자식 교육 왜 시킵니까? 자기 자식이 개성 따라 가는 걸 그냥 방치합니까? ‘네 개성대로 살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늘 뭘 느끼느냐 하면, ‘너는 내가 꾸며놓은 동질성에 같이 끼어들었으면 좋겠다.’
여러분들이 할아버지가 되어서 손자와 할아버지 관계에서 제일 좋은 관계는 애가 바닥에 엎드려서 지 마음대로 할 때에 할아버지가, ‘여기서 그러면 안 돼’ 이러면 애들이 이질성을 느껴요. 이질성은 싫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같이 엎드리면 애들이 까르르 난리가 나요. 좋아하는 거예요. 아동들이 자기와 똑같은 수준에 맞춰서 똑같은 행동을 할 때 애들은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 동질감으로 인하여 자아가 확대 돼요. 내가 그만큼 내 친구가 많아지고 풍성해져요.
성경에도 나오지만 그것을 가지고 뭐냐? 소유.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 것이 있어야 살아요. 지금까지 정리해봅시다. 인간의 모든 일의 목적이 뭐냐? 내 것이에요. 내 것이 있을 때 내 존재감을 느껴요. 사람이 가진 게 없으면 자살밖에 안 돼요. 아직까지 자살하지 않는 것은 내 것이 단단하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재산이 있을뿐더러 내 가족도 있고 내 교회도 있고.
내 체면과 위신을 남한테 제시할 만한 든든한 근거가 있을 때는 인간은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일입니다. 인간의 일은 내가 단단하게 내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그걸 확대해 나가는 겁니다. 확대해 나가면서 가까운 친구, 친인척 하면서 ‘너 나하고 생각이 같지, 그렇지? 우리 친구하자.’ ‘난 아저씨를 존중해. 나는 삼촌이 제일 좋아.’ 이런 말을 아이들이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자기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데, 물어봅시다.
그 확대가 어디까지 나아가겠습니까, 궁극적으로? 확대되고, 확대되고, 확대되면 어디까지 나아가겠어요? 시원하게 답변해보세요. 내 동질성을 확대하면 누가 말려들길 원하는데 그 최종적으로 말려들길 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묵언수행 하시는가? 하나님이에요. 나를 위한 하나님이에요. 그것 때문에 교회 가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미쳤어요? 아닙니다. 자기를 긍정하는데 하나님마저 내 편 됐다는 그 안도감과 안정감이 죽어서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률을 높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의 일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에요. 자기 존재의 확대, 자기 소유의 확대. 그렇다면 무엇과 무엇을 대조하라 했습니까? 솔로몬을 통해서 자기 일과 그다음에 하나님의 일이죠. 하나님의 일과 대조를 해야 돼요. 자꾸 하나님의 일을 나한테 포섭하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내 편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대조가 돼야 돼요, 대조가.
대조하는데 하나님의 일이 뭐냐? 솔로몬은 뭐냐? 솔로몬은 없는 존재입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솔로몬은 이 땅에 없는 존재에요. 인간은 자기가 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까지 정복하려 합니다. 반대로 솔로몬은 존재하지 않아야 됨을 보여주는 존재가, 나는 존재하지 말아야 할 존재가 바로 솔로몬이에요. 대조해야 돼요.
한쪽은 있음입니다. 있으니까 있는 나를 천국 보내야 돼요. 그런데 솔로몬의 존재는 뭐냐 하면 없음을 바탕으로 현재 솔로몬의 신체가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고 몸이 있잖아요. 그 몸체가 하나의 맛있는 피자 판이라 하면 없음의 피자 판에 얼룩을 만들어요. 구멍을 만든다고요. 코피 내는 이야기했지요. 없음이 있음을 장악해서 뻥뻥하고 구멍을 내요. 이걸 위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뻥뻥 위에서 평면적으로 보면 이렇게 돼요. 완전히 걸레 같아.
솔로몬이 없다는 말은 성전 짓는 프로젝트를 솔로몬이 했습니까, 아버지가 했습니까? 아버지 다윗이 했지요. 그러면 솔로몬은 솔로몬 내가 여기 있다고 출발하지 말고 나는 없는데 아버지만 있다고 봅시다. 아버지 다윗만 있다고 한다면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보자는 거예요.
다윗에게 있어서 솔로몬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나님의 성전의 아이디어는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전 짓겠다고 했고, 하나님께서는 네 식으로 짓는 게 아니고 내 식으로 짓겠다고 했단 말이죠. 벌써 다윗이 성전 짓겠다는 것은 다윗의 일이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대조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대조적으로 다윗의 일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했지요.
응답이 뭐냐? 네 식대로 하는 것은 나는 거부하고 내 식대로 성전을 짓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짓겠다는 성전은 뭐냐 하면 바로 네 자손이 성전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참 골치 아픈 이야기,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나님, 성전 재료 다 마련했습니다. 짓겠습니다.’ ‘그런 식의 성전은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네 몸을 통해서 후손을 나는 성전으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나는 너의 후손과 함께 영원히 있겠다’고 예언했어요.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무엘하 11장에 일이 하나 생겨요. 그게 뭐냐 하면 다윗이 부하 우리야 장군의 처, 밧세바를 건드렸지요. 지금 다윗에게 솔로몬 전에 자기 자식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한 다윗의 자식은 어디서 생겼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때는 솔로몬 없어요. 그냥 다윗이 있을 뿐이에요. 다윗이 부하직원의 아내를 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과 부하직원이 아다리가 되어서 임신이 됐네요. 요즘 같이 임신되기 그렇게 힘든데 한 번에, 단박에 임신이 됐어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그 임신된 애는 다윗의 아들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부인의 남편의 아들입니까? 족보 참 복잡하지요. 드라마에 나올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아들입니까, 아니면 다윗과 관계했던 밧세바란 여인의 남편의 아들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아무거나 하나 찍어보세요.
성경은 우리야의 아들로 봐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우리야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나오듯.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 남자 이름이죠. 그다음에 또 뭐가 나옵니까? 우리야, 남자 이름 나오지요. 왜 남자가 두 명 나오지요? 솔로몬에 의해서 그냥 육에서 평면에서 평면으로 가야 될 족보가 하늘로 수직적으로 올라가요. 인간의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틀어져야 돼요.
여러분들이 성도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할아버지가 아버지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았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건 육에서 났기 때문에 육이에요. 성도라고 할 수 없어요. 뭔가 틀어지려면 거기에 뭔가 개입이 돼야 돼요. 내가 아는 조상의 육적인 족보, 이 족보의 방향을 그냥 지옥행으로 지옥으로 가는 방향을 천국으로 돌리려면 여기에 새로운 요소가 투입이 돼야 돼요.
‘할아버지가 아버지 낳았고, 아버지가 아들 낳았다.’ 이건 뭐, 그래서 뭐? 이건 그냥 육이에요, 육.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았다. 아버지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이 죽었다. 그럼 뭡니까? 끊어졌지요. 분명히 죽었는데 자식이 새로 나왔다. 보세요.
점입니다. 성전은 그냥 점 하나 찍는 겁니다. 이 점은 구멍이거든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구멍을 내는, 점을 찍는 거예요. 이쪽이 이스라엘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스라엘에서 구멍 쪽이 천국이죠. 이스라엘 쪽에서 구멍 뚫어서 우리는 천국 간다, 이러하잖아요. 이게 바로 틀려먹은 거예요. 이건 그냥 종교에요. 이것은 안 받아줍니다. 문제는 구멍 뚫린 것 중에서 이쪽에서 이쪽으로 온다는 거예요.
솔로몬이 점찍었든 말든 솔로몬이 찍은 점을 통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인간 쪽에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있을 수 없는 구멍을 통해서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복음이 친히 내왕한다니까요. 나는 가만있는데 복음이 구멍을 뚫고 찾아오는 그게 구원이에요. 인간은 어떤 노력해도 구원 안 됩니다. 그건 마음에서 조작해내는 거예요. 자기의 이성과 판단이고 결심이지 그거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지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은 뒤쪽입니다. 구멍이니까. 뒤쪽에 이쪽으로 통과해 올 때 뭘 통과하느냐? 다윗언약을 통해서 통과, 다윗언약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통과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서 살았던 하나님의 뜻이 통과하면서 이게 죽음이 되고요, 다시 죽음에서 가면서 삶이 돼요. 구멍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땐 죽으려고 오셨어요. 근데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 됩니까? 사셨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고 보니까 예수님은 죽으려고 하는데 예수님 외의 모든 사람들의 일은 뭡니까? 일을 왜 해요?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 나의 일과 주의 일을 비교해보라고요.
솔로몬 그 이야기 잠시 제쳐두고, 같이 연관돼 있는 거지만. 본디오 빌라도와 요한복음 19장인가 예수님과 대화해요. 요한복음 18장 끝부분에 본디오 빌라도에 예수님이 심문 받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본디오 빌라도가 어떤 취지에서 예수님에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너는 왜 나타났느냐, 라는 취지로 예수님께 계속 심문합니다. ‘너는 이 세상에 왜 나타났어?’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가 왜 나타났느냐, 라고 질문하는 것은 질문하는 본디오 빌라도 자기는 있음이 돼요. 나는 이 세상에 확실하게 있는 자라는 겁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본디오 빌라도가 너는 이 바닥에 왜 태어났어, 왜 나타났느냐는 거죠. 그런데 본디오 빌라도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질문을 보탰어요. ‘너는 왜 태어났느냐?’ 이 질문이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이야기할 때 니고데모가 질문부터가 전제가 깔려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했지요. 이미 태어난 내가, 이미 여기 있는 내가 무엇을 하면 하늘나라 갈 수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그리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한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질문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뭐냐? 나는 뭘 하면 됩니까, 라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선 제가 아까 답변했잖아요. 자기 동질감의 확장, 자기 소유의 증가 그것뿐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덜 죽는 방법, 내가 고생 덜 하는 방법, 내 평안과 행복에 대해서 단단하게 고정시켜놓는 그 일이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이에요. 남은 인생 편안히 살고 넉넉하게 살면 좋겠다, 그게 우리 마음속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이 말이죠. 그게 우리의 일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화난다, 슬프다, 분노가 일어난다, 짜증난다, 어떤 경우입니까? 내 소유가 위태로울 때, 나의 존재감을 나의 동질성을 네가 흠집 낼 때 성질나지요. 성질난다는 말은 평소에 내 하는 일은 이미 확정했다, 정해져있는 거예요. 나는 나다운 나, 이것 동질성인데. 니고데모가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 이리 이야기했어요. 내가 뭘 하면 됩니까, 하니까 주님의 답변은, 인간들이 토대로 단단하게 기본으로 여겼던 그걸 건드려버리지요.
‘다시 태어나라. 다시 태어날래? 내가 분명히 말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본다. 천국? 천국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 다시 태어나야 돼.’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기존에 태어난 것을 네가 무효로 할 용의가 돼 있느냐는 것. 네가 하는 모든 일의 집대성을 와르르 무너뜨릴 용의가 돼 있느냐? 하나님의 일은 다시 태어나는 건데 ‘이왕 태어난 것 밀어붙이면 안 되겠어요?’ 이게 인간의 일이에요. 열심히 할 테니까 말씀대로 살 테니까 착하게 살고 거룩하게 살 테니까 그냥 이대로 살고 이 조시로 가면 안 되겠어요? 이게 인간의 일이에요. 주님의 일은 그것 다 무효야.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성전이라는 점을 찍어놓으면 구멍이 생기고 구멍 속에서 하늘나라의 바람이 불지요. 바람이 불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솔로몬이 다스리는 나라에 없는 자가 인정받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소유가 없는 자가 인정받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솔로몬의 재판이에요. 솔로몬의 재판에서 누가 이겼습니까? 내 자식이라고 우겼던 아줌마가 이겼습니까, 자기 자식을 포기한 쪽이 이겼어요? 포기한 쪽이 이겼지요. 그게 바로 솔로몬의 자기 입지에요.
솔로몬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애가 죽었어요. 죽어버리면,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다윗, 이쪽은 밧세바, 애가 일주일 만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 자리는 무슨 자리가 되느냐 하면 애가 죽어 없다가 아니라 죽은 자의 자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확보가 돼요. 죽은 자의 자리에요.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이 뭐라고요? 성전.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이 친히 스스로 인간을 만나는 장소를 하나님 쪽에서 만든다고요. 예배당 짓는다고 만나는 게 아니고. 그 만나는 장소가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다윗은 밧세바를 통해서 왜 만나느냐? 다윗에게는 무엇이 주어졌느냐 하면 다윗언약이 주어졌어요. 약속이.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을 했다고요.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만 일하기 때문에.
다윗에게 약속을 했고, 그 약속된 자리가 역사적으로 어떤 징후를 남기는데 그 징후가 뭐냐 하면 죽은 자의 자리에요. 육과 육이 만나서 너와 내가 만나서 뭐가 됐다, 무엇을 생산했다? 죽은 자가 없다가 아니라 죽는 자는 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죽은 자의 자리가 있다’와 비교되는 것은 뭐냐? 모든 사람들, ‘내가 여기 있다’와 비교돼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우리의 일은 뭡니까?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내가 사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너희들은 이제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자기를 죽었다가 사신 분을 위해 살라 했어요(“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대조가 또 나와요.
주님을 위해서 살아라, 이 말은 한 게 아니고 무엇은 아니고 무엇이다. 이제는 널 위해서 살지 말고, 무엇을 위하여? 널 위해 있다가 죽었다가 사신 자, 하나님의 언약, 예수님이죠. 약속이죠. 구멍이죠. 하나님의 출입구죠. 하나님의 출입구를 위해서 그걸 증거하는 용도로 너는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언약의 자식이에요. 언약의 생산물이다.
하나님께 찾아온 생산물이 하나의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죽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음의 자리가 만들어졌지요. 이 죽음의 자리에서 첫 번째 나타난 인물이 누구지요? 누구십니까? 솔로몬이죠. 솔로몬은 국가공무원이 아니고 하늘나라 공무원이 됐어요. 그 바탕은 하나님의 하늘에서 오신 언약이 바탕이 된 새로운 존재가 등장한 겁니다. 솔로몬에게.
처음에 했던 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역대하 2장 다시 보겠습니다. 2장 6절,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관대 어찌 능히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하나님을 모시겠습니까? 자, 모시면 소유가 돼요. 모시면 내 권력 안에 들어와요. 내가 하나님을 모실 수 없음을 분명히 해요. ‘하늘의 어떤 큰손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나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뭐만 할 뿐이다? “그 앞에서 분향하려 함이라” 연락책, 여기 구멍 있네. 하늘나라 통하는 구멍이 여기 있네, 하고 그 구멍을 소개하는 연락책으로서만 본인 존재하는 겁니다.
이왕 어려운 것 계속 해봅시다. 여러분 감당해야겠어요. 마태복음 22장 42절에서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먼저 선방 날리는 질문을 했어요. 그전에는 바리새인이 맨날 질문했어요. 메시아냐, 네가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느냐 했는데 이 대목에 와서는 예수님이 먼저 질문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떻게 주님이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 라고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예수님 질문이니까 답변해보세요. 주님은 그리스도는 메시아는 어떻게 오느냐? 다윗의 자손으로 옵니다.
시간적으로 다윗이 먼저 태어났고 나중에 거의 천년, 구백 년 후에 예수님이 태어나잖아요.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안 보니까. 하여튼 그 후에 메시아가 온다면, 너희들 말이 그렇다면 어떻게 후손이 다윗의 선조가 될 수 있는지 답변해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46절에,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왜 답변을 못하지요? 왜 답변을 못할까?
여러분들은 예수님 질문에 답변할 수 있습니까? 이 답변하는 것과 여러분 하루 돈 버는 것과 먹고사는 것과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상관이 있어요. 그걸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종이, 구멍 뚫릴 종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에게 찾아올 때 구멍을 뚫는 이것이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으로 구멍을 뚫어놓으면 ■하나님 쪽에선 그냥 약속,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만 ■이 말씀이 인간세계에 오게 되면 이게 뭐냐? 희생이 돼버려요. 이 땅에선 사람들이 오직 자기의 소유와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존재만을 위해서 사는 그러한 세계에요. 이러한 세계에 하나님의 자손이 섞여 들어오면 그 하나님의 메시아는 죽임을 당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이 구멍이 없는 채로 인간들이 살게 되면 그런 인간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데 도움 되고 보탬 주는 힘주는 하나님으로 오해를 하게 돼 있어요. 열심히 착하게 살면 복 주고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는 그 하나님을 안다고요. 선하게 인도해서 천국까지 하나님과 합세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선하게 인도하고 바르게 인도해도 그게 선하게 바르다는 그 일이 자기를 망치는 일이에요. 왜? 자기 부정과 자기 부인을 안 되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연세 들어서 간 안 좋고 이러면 피부질환이 생기는데 피부질환이 뭐냐? 피부 밑에 있는 악한 질병이 피부를 뚫고 와버리면 여기에 얼룩덜룩한 반점들이 생기지요. 그게 징후가 생겨요, 징후.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와버리면 하나님께선 여기에 징후를 남긴다고요. 그런데 그 징후, 징조가 얼룩덜룩한 반점이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거부하고 싶은 일들이 벌어져요. 막 외면하고 그래요.
그 반점 중에 하나가 이런 답변이에요. 예를 들어서 ‘네가 원하는 건 뭐고, 필요한 건 뭐야?’ ‘내가 원하는 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면 질문하신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굳이 살 이유를 대봐라.’ 네가 굳이 살아야 될 이유가 있어, 라고 한다면 인간들은 망치 들고 그 질문한 분을 때리겠지요. 그게 희생이에요. 그게 솔로몬의 성전의 의미입니다.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지혜 달라고 했지만 막상 솔로몬의 답은 뭐냐?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출입구였어요.
그러면 이 구멍에서 일어나는 현상, 이 점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여기서 이 땅에서 태어났음이 돼요. 태어남이 무효가 돼요,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언약으로 오셔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이 태어남이 무효가 되면서 이게 죽음이 돼요. 그다음에 여러분 아시다시피 부활, 부활 다음에 뭡니까? 승천. 그다음에 뭐냐 하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거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신경 보면 나와요. 태어났고 죽었고 부활하셔서 승천하는 것, 사도신경 초반에 전반부 내용이 이거에요.
여기서 뭐냐? 태어났는데 태어나서 하는 것이 이게 다가 아니고 태어남이 반드시 뭐냐? 죽음, 십자가 죽음에서 다 이루었다가 돼야 돼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게 인간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까?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전의 존속은 뭐냐 하면 죽음, 그 앞에 있는 솔로몬과 백성들로 하여금 늘 새로 시작하고 늘 그것이 마지막으로 끝나는 것에 시간루프(time loop), 시간이 반복되는 일을 성전 앞에서 그들은 그걸 느껴야 되는 거예요. 요즘 식으로 하면 십자가 앞에서 느끼듯이. 오늘 태어났다, 시작. 잠을 잔다, 오늘로 끝났어요. 내 인생 끝났어요. 내일 아침 눈 떴다, 시작. 또 끝났어요.
다시 말해서 태어나서 죽는 게 아니고, 그건 세상 사람이고. 죽기 위해서 태어났음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래야 되는가? 그래야 내 것이 내 것 아님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것이 내 것 아님으로. 내 것이 아닐 때 내 태어남도 내 뜻이 아닐 때 이것은 뭐냐? 솔로몬이 속해 있는 다윗언약에 속한 백성들이 되는 겁니다. 그때 그건 하늘나라의 공무원,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 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늘 새롭게 물어야 돼요. ‘내가 왜 태어났지?’ 만약에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해요. 몰라. 우리는 몰라요. 이유도 없이 살고, 따라서 죽는 것도 이유가 몰라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살고, 이유도 모르고 그냥 죽는 것이 인간세계입니다.
인간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안 사람들은 비로소 인간의 일과 나에게 일어난 주의 일이 얼마나 대조적이고 다르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되겠지요. 10분 쉽시다.
20240405b 울산강의-역대기하(2강) 2장 6절 : 죽음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죽는 것보다 태어나는 것이 더 어렵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음으로서 취소시킬 순 있지만 나의 태어남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태어나야 내가 뭘 죽든지 할 텐데 태어난 것을 어떻게 취소합니까?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인간 손에 맡겨진 적이 없다는 거예요. 모두 다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보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다는 것은 가룟 유다가 어떤 대책을 세우란 말이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너 같은 사탄에 속한 존재가 있어줘야 십자가 사건이 뚜렷해지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인간은 십자가 사건을 위한 재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태어난 것도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과 관련돼 있는가? 다윗의 자손의 태어남과 관련돼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은 다윗의 자손의 태어남, 다윗의 자손은 뭐라 했습니까? 메시아라 했지요. 지금 다윗 이후에 솔로몬, 계속해서 점점 더 예수님 오실 때까지 메시아가 올 때까지 연결성, 연결을 뭐로 케이블을 뭐로 하느냐? 다윗 약속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다윗 약속이란 추상적인 말이 아니고요. 다윗의 약속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의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경우들의 연쇄사슬, 다윗에 일어나는 연속적인 사슬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는 겁니다. 다윗은 왜 태어났는가? 다윗은 나중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알게 돼요.
내가 태어난 것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왜? 시편 51편에 보면, 내 어머니가 누구다? ‘내 어머니가 죄다. 죄가 나의 어머니고, 나는 그 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아하 얼마나 시원합니까? 우리는 왜 그런 고백을 못해요. ‘너거 엄마 뭐하시노?’ ‘우리 엄마 죄 지었는데요.’ ‘그럼 너는 누구야?’ ‘나는 죄의 자식이죠, 뭐.’ 왜 담대하게 그 고백을 못하느냐 말이죠. 왜 자꾸 열심히 주의 말씀 지키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게 얼마나 그 술책, 그 사기술, 사기거든요.
성전은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성전은 다윗의 자손이 태어나는 장치입니다. 그러면 나의 것은 무엇과 바꿔치기해야 돼요? 성전 자체와 바꿔치기해야 돼요. 고린도전서나 후서에 보면 우리 자신을 성전이라 했으니까. 성전 되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고 한다는 그 사람은 언약관계 속에 구원받은 사람이고,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전 되고 시도하는 것은 그건 탈락이에요. 나의 태어남은 태어나서 구원받아야지, 가 아니라 태어난 자체가 성전에서 태어나야 돼요.
그럼 성전이 뭐냐? 바로 죽음의 자리에요. 태어나서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죽기는 죽는데 다윗이 죽는 이유를 알았던 그 자리 안에서 우리가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언약적으로 주선을 해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주선을 해줘요. ‘야, 너 태어난 것이 어딘 줄 알아?’ ‘저 죄에서 태어났는데요.’ 죄에서 태어난 그것이 성전의 토대가 되고 기초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내가 죄에서 태어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드러내는 그런 공간, 죄인과 십자가 지신 분의 만남이 성전으로 구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이 언약의 완성인데 그러면 그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느냐? 우리가 못해요. 우리가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알든 모르든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죄 짓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것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죄 짓는 것만 하는 거예요. 이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요. 즐겁지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답변을 해보세요. 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봤어요. 룸살롱이란 걸 봤어요. 룸살롱 볼 때마다 늘 기억에 남는 것은 거기 소파가 놓여있는 방이란 그것 기억나는데 자, 문제입니다. 룸살롱에서 여자들이 손님으로 온 남자를 기쁘게 해줍니까, 남자가 거기서 일하는 종업원 여자를 기쁘게 해줍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어느 쪽입니까? 룸살롱 가보신 적 혹시 있습니까? 실례지만 갔다고 치고 답변해보세요.
룸살롱 갔을 때 돈 내는 남자가 여자를 기쁘게 해줍니까, 돈을 빼내기 위해서 유혹하는 여자들이 남자를 기쁘게 해줘요? 어느 쪽입니까? 또 묵언수행하시네요. (여자들이…) 아니에요. 남자가 여자를 기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의미는 나로 인하여 남이 즐거울 때 극치의 종교감을 느끼는 거예요.
김정은도 마찬가지지만 김정일 지도자 동지에게 기쁨조가 있잖아요. 연산군의 기녀들이 있잖아요. 그 기녀들이 까르륵 까르륵대기 위해서 연산군이나 김정일이 망가집니다. 징기스칸이 자기 동족, 자기 식구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극한의 잔인함으로 다른 종족을 다 죽여 버렸어요. 그것도 불태우고 이랬어요.
왜 그런 짓합니까? 나라는 존재가 남을 기쁘게 할 때 최고의 희열을 느껴요. 나 하나 때문에 남들이 기뻐할 때 비로소 사는 존재의 이유를 거기서 찾는 거예요.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 때 백성들은 이제 죽은 거예요. 벌써 자기 뜻대로 못 살아요. 솔로몬은 성전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기 예속된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에 예속된 백성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너희들도 한 번 죽어봐라.’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복음이고 십자가고 성전, 의도적으로 기피합니다. 그 단어 자체가 내가 추진하고 있는 내 인생의 스케줄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 자체로 보람돼야 돼요. 가치가 있어야 돼요. 나 하나 희생해서 여러 명을 살려야 돼요. 그럴 때 사는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알지요?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 ‘조금만 기다려줘 나 달려갈 테니.’
중국집 배달하면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잠잘 때 너무 피곤해서 엎어지고 손에 사진 쥐고, ‘기다려줘, 기다려줘. 너한테 달려갈 테니’ 이게 존재의 이유잖아요. 어미가 짐승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마찬가지고 자식 잘 되기 위해서 그 모진 겨울밤 된 통으로 맞아가면서 시장바닥에서 손님도 없는데 밤새도록 일하는 것 보세요. 그것 누가 시킵니까? 아니에요. 네가 있음에 나는 비로소 존재의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인간은 나의 가치를 보장하는 조건 하에 상대와 바꿀 용의가 있어요. 내 가치만 죽이지 않고 내 가치만 모독하지 않는다면 이 몸 바쳐서 나는 뭘 해도 해요. 진주의 논개, ‘몸 바쳐서, 몸 바쳐서’ 하는 노래 있지요. <논개>(이동기, 1982) 만약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 평생 살면 주위로부터 치사한 존재라고 욕 되게 얻어먹어요.
그렇다면 두 번째 시간에 어려운 것부터 시작해봅시다. 이 인간의 존재는 나 자신의 이름의 가치, 나의 가치를 내 목숨 바쳐서라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마귀 들린 거죠. 자기의 절대화를 포기할 생각 없다니까. 마귀가 그런 존재 아닙니까. 이 안 되는 걸 어떻게 하게 하느냐는 겁니다.
다윗 같은 경우야 밧세바 하면서 나단 선지자 찾아와서 지적하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야. 당신이 욕하는 사람이 당신이야. 당신은 그 사람 욕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왜 욕할 줄 몰라’ 할 때 성신이 임해서 그때 알았어요. 죄가 어머니라는 것, 진짜 마귀가 내 엄마라는 사실, 그걸 발견했지요. 그러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뭡니까? 성전이 찾아오는 유일한 나라에요. 성전이 구멍 뚫고 찾아온다면 그 이스라엘 나라는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오시는 메시아를 죽여 버리는 기능을 해줘야 돼요. 죽여 버려야 돼요. 왜? 지옥이 온통 죄인이기 때문에 그 기능에 충실할 때 비로소 그들은 일 끝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추후적으로 내가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전혀 구원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을 파악할 때 그 사람이 언약에 속한 사람,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론상 천국 백성은 굉장히 쉬워요. 자기가 죄인의 괴수임을 인정하면 되는데 문제는 내 자신의 가치라는 것은 내 힘으론 포기 안 되거든요. 심지어 이런 꼼수 같은 것이 교회에 범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당장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그러니 이런 고백을 하는 나는 얼마나 가치 있습니까?’ 이런 꼼수 있잖아요. 이건 뭐 때려도 안 되고….
그 안 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해요. 전쟁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터가 생겨요. 이스라엘 백성은 숫자가 적습니다. 적은 자로 하여금 많은 이방민족과 전쟁을 해서 승리하게 하거든요. 승리하면서 여기서 뭐냐? 부산물, 또는 전리품이 나와요. 그 전리품을 한 곳에 모아요. 이 터가 뭐가 되느냐 하면 성전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윗언약의 목적은 성전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에요. 성전입니다.
전쟁을 통해서 터가 마련되고, 터가 성전으로 나중에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 점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31장 9절, 약간 복잡해요. 민수기 31장 9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 아이들을 사로잡고 그 가축과 양떼와 재물을 다 탈취하고” 이렇게 전쟁을 했거든요. 전쟁을 했는데 민수기 31장 21절에서 25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이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법률이니라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이렇게 돼 있지요.
다윗이 군인입니다. 다윗이 성전 짓겠다고 제안을 하기 이전에 다윗은 무수한 전쟁에 나가서 무수한 승리를 했어요. 위세를 떨었지요. 그래서 다윗은 자신만만하게 ‘이제는 전쟁은 이길 만큼 이겼고,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니 이제는 떠돌아다니던 그 성전, 초라한 데 있던 언약궤를 내가 거창한 집을 지어서 영원히 우리 이스라엘과 함께 삽시다, 하나님.’ 이런 식으로 성전 짓겠다고 했어요.
자, 이 다윗이 성전 짓겠다는 게 뭐가 문제가 되는지 요한복음 6장 27절 잠시 봅시다. 왔다 갔다 해도 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여기서 대조가 나오지요. 썩는 양식의 일이 있고, 영생할 양식이 있지요. 요한복음 4장에 우물이 있는데 계속 물 떠와야 될 우물이 있고, 아예 우물이 우리 마음 안에 박혀서 계속해서 매일같이 새로움이 나오는 우물, 두 종류의 우물이 있다는 거예요.
남자 여섯 갈아치웠던 죄 많은 여인에게 남자 여섯 명 있다는 그 공로로 영생의 샘물을 줬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여자들 남자 여섯 빨리 숫자 채우려고 바쁠 거예요.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속에 영원한 성령으로 샘물이 되리라는 말을 도대체 사마리아 여인에게 왜 제안을 했는가? 그 이유가 나중에 제자들 왔을 때 알려줘요.
그게 뭐냐 하면 추수할 때 추수 당하는 쪽은 아무 것도 한 게 없음이 분명해져야 돼요. 천국의 알곡이 되어서 천국 갈 때 천국 가게 된 당사자는 아무리 요모조모 생각해도 자기가 천국에 갈 때 보탬이 되는 어떤 일이 전혀 없어야 돼요. 그래야 값없이 추수라는 그 취지가 살아요, 값없는 구원이.
그러면 그 여자가 한 일은 뭐냐? 남자 밝히는 것 했어요. 그것도 남자 밝히는 것도 얼굴이 돼야 되지 얼굴도 안 되는데 재주가 없지요. 여자는 남자를 왜 밝혀야 되느냐? 여자는 남자 덕분에 살고자 하는 거예요. 요새도 그렇지만 옛날도 마찬가지에요. 한 번 물면 세퍼트처럼 안 놓잖아요. 안 놓는 이유가 이제부터 네가 날 먹여 살려라, 해서 꽉 무는 거예요.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썩는 양식이 인간이 하는 일의 다입니다. 양식은 있는데 썩는 양식이에요. 썩는 양식을 먹는 그 인간은 어떻게 됩니까? 섞지요. 당뇨에다 비만에다 고혈압에다 세월 가면서 점점 썩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약속하기를 뭐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지요. 내가 돈 번다고 얼마나 고생합니까? 그런데 그런 고생 없이 이제는 먹기만 하면 영원히 죽지 않는 그러한 일이 있다니까 우리 쪽에서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합니까, 묻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답변이 29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뭐냐 하면 일은 네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다 해버리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뭐 뒤에 남긴 것도 없어요. 깔끔하게 다 마무리 지어버렸어요. 문제는 그분이 다 마무리 지었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에요.
만약에 그분이 예수님만이 다 했음을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 자기 일에 대해서 점수를 안 주지요. 0점 처리해버립니다. 내가 하는 일에 0점 처리, 0점 정도가 아니라 -500점 처리해버려요. 그러니까 내 자신이 무가치하고 의미 없고, 이거는 마이너스라고 내가 그것을 인정하는 그걸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서 그다음의 문제가 있어요. 그다음의 문제가 뭐냐? 그렇게 ‘나는 죄인입니다, 죄만 지었다, 나 하는 건 무의미하다’ 이렇게 고백하면 구원받느냐 하는 거예요. 그렇게 구원받을 것 같으면 맨날 나는 죄인이다, 하고 돌아다니지 뭐. 그래도 안 돼요. 그럼 뭐냐? 여기에 다시 민수기 31장 22절에 보면,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 이것은 전리품입니다. 전쟁함으로서 다른 상대가 갖고 있던 것을 빼앗아온 거예요. 하나님이 빼앗아서 이스라엘한테 주었다, 이렇게 되잖아요.
하나님이 적들에게 빼앗아서 이스라엘에게 주었다. 일차적으로 맞는 것 같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하나님이 빼앗아서 그걸 누구한테 주었는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 본인에게 돌렸다’가 돼요. 여러분 차이점 아시겠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뭐냐? 하나님의 것을 스스로 해서 돌리는 통로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이스라엘이 있는데 점이 구멍이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다. 구멍을 통해서 주께서 와서 이 구멍으로 돌아가는 그 마당, 통로, 환경 역할을 누가 제공하느냐? 이스라엘이 제공하는 거예요.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함으로써 ‘이게 생명이야. 네가 이 땅에서 매일같이 밥 먹고 사는 게 생명이 아니야.’ 그거는 죽음의 지연이죠. 자살의 지연이에요. 죽음을 좀 더 지연시킬 뿐이지 절대로 생명 아닙니다. 썩는 양식이에요. 늘 목말라서 물 마실 우물 찾아야 돼요. 그건 영생 아니고 그것과 대조되는 게 따로 있어요.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사는 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이 구멍으로 살 때에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호응하게 되고 연동하는 삶을 살 때 그게 주의 일에 합류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구멍을 뭐라고 하느냐? ‘터’라고 해요. ‘너희 내 덕으로 승리했지?’ ‘승리했습니다.’ ‘많이 모았어?’ ‘많이 모았습니다.’ ‘가져 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아닙니까?’ ‘누가 너한테 준다 해? 내가 가져야 돼.’
가져갈 때 뭘 가져가는가? 여기에 민수기 31장 23절에 보면,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불을 경유하게 만듭니다. 불에 견디면 정결이 되고 거룩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되고, 불을 못 견디면 그거는 안 되는 거예요. 이거는 바치면 안 돼요. 이 집합소에, 하나님의 전리품 집합소를 뭐라 했습니까? 한 자로 터. 그 터는 뭐가 기다린다? 불이 기다려요. 불을 견디면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고, 못 견디면 이건 탈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전리품이 되잖아요. 이걸 아셔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은 물건에 대해서 전리품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전쟁, 하나님의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전쟁에 나왔던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전리품으로 삼으신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너는 전에 마귀에 속했어. 내가 전쟁 일으켜서 마귀한테 이겨서 너를 마귀 품에서 뺐어온 거야.’ 주여, 감사합니다. 주를 믿습니다.‘ ’아아 나 그 말 안 믿어.‘ 그럼 뭐예요? 불을 통과해야 돼요.
고린도전서 3장 봅시다. 3장 10절, 불을 통과하는 방법 나옵니다. 불을 통과한다고 또 몸 단련하고 그러지 마세요. 그건 불을 통과하는 방법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에 보면 성전 이야기 나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누구다?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께서 태어났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것처럼 너희들도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땅은 주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주님의 나라가 아닌데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도가 되려면 우린 이 땅에 태어나면 안 돼요. 하늘에서 태어나야 돼요. 그런데 하늘에 태어나려면 하늘에 원정출산 가야 되느냐? 아니죠. 하늘 되신 분이 이 땅에 이미 오셨어요. 그래서 그 오신 예수님 안에 응집돼야 되고 집합해야 돼요.
뭘 가지고? 내 행한 것을 가지고 그 터에 집결해야 됩니다. 집결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불로써 통과해야 돼요.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고전3:12,13,) 시험하는 거예요, 테스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테스트에 통과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통과하는 방법은 고린도전서 3장 7절에 보면 나옵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 버는 일을 해야 돼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하면 안 돼요. 열심히 하면서 열심히 하는 이 일이 자체적으로 어떤 이유도 없고 맹목적이라는 것을 느껴야 돼요.
내가 하는 이 일을 그냥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통과하면서 그걸 기뻐해야 돼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자체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아무 것도 아닌데 이 일을 어디로 가져오느냐? 계속 그리스도 앞에 내놓는 거예요. 내놓으면 바로 ‘이제 알겠지? 네 어미가 죄라는 걸 알겠지?’ 비로소 십자가에서 나의 일과 주의 일, 하나님의 일이 거기서 대비가 되는 거예요.
나는 평생 밥 먹고 살려고 하는 일, 그런데 주께서는 엉뚱하게 난데없이 너의 죄를 위해서 내가 죽는다는 그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 그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거예요? ‘나는 나름대로 얼마나 애썼는데 그것 때문에 자식 둘 다 키웠고, 이만큼 살았습니다. 아파트 마련한 것이 열심히 일한 보람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고린도전서 3장 7절, 아무 것도 아닌데? ‘이게 왜 아무 것도 아닙니까? 내가 이것 때문에 허리 나가고 발 아프고 얼마나 내가 코피 나고 일하다 쓰러져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다 죽는 수가 있겠다 싶어서 좀 쉬려고 치면, ‘아빠’ 하고 매달리죠. 애가 있기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나름 내가 나 하나 때문에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징기스칸까진 아니지만 룸살롱에서 돈 뿌리는 남자처럼 자기의 고생한 것을 돈을 뿌림으로서 아가씨들이 깔깔깔 웃을 때 비로소 자기의 사는 보람을 거기서, ‘야 나도 남을 웃게 만드는구나. 나한테 이런 가치가 있었네’ 그걸 자기 가치 확인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아무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그게 연결이 되겠습니까? 연결이 안 되지요.
갈라디아서 6장 8절 봅시다. 결론은 아직까지 제가 미루고 있어요. 계속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따라가 보는 거예요.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또 대조가 돼 있어요. ‘바르게 말씀대로 사세요’ 이게 아니고, 너는 평소에 뭐하고 있느냐를 먼저 지적하고, ‘그게 아니고’라는 말을 해요.
그러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면 하지 말지 뭐. 집에서 복음이나 연구하고 그냥 아무 일도 안 하면 되잖아요. 그걸 복음 폐인이라 해요. 맨날 복음 좋아요, 해놓고 폐인처럼 살아가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북한 김일성이 제일 좋아하는 구절 아닙니까. 지는 귀족이 되어서 놀고, 북한 인민들은 막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서. 김일성이 누구와 친구냐 하면 목사와 친구거든요. 기독교에 대해서 훤해요. 그래서 북한은 기독교화 된 유교주의 나라입니다, 모든 조직이. 그러니까 통일교에요. 신천지, 통일교와 똑같은 게 북한이에요.
그러나 기준은 뭐냐? 기독교교리가 아니고 유교에요. 나라에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 말 들어야 되고, 여자는 남편한테 꼼짝 말아야 되고. 조선에서 내려온,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거든요. 조선의 유교를 바탕으로 기독교의 조직화, 통일교 같은 그런 신천지 같은 기독교교리로 조직화되어서 자기가 민족의 태양처럼 살아가는 그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느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에요. 이 말 뜻은 뭐냐? 네가 일 안 하면 너한테 양식 주어지는 그 아픔은, 남들이 네가 해야 될 일을 대신하는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남이 감당을 해야 되는 거예요. 너는 놀아서 좋지. 죽으라고 놀고 있는 너한테 양식 대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 데,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타인한테 다가갈 때는 다 자기한테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다가가는 거예요. 따라서 남 이용하는 거죠.
그러면 해답을 내릴 시점이 왔습니다. 히브리서 3장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약간 복잡한 게 있기 때문에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16절에서 19절인데 제가 이 구절을 왜 찾아드리느냐 하면 히브리서 3장 16절, 17절에 보면 이게 나와요. 단어가 이스라엘 나오고, 애굽 나와요. 여러분 아는 이야기니까 다시 해봅시다.
애굽 나라 있을 때 이스라엘 나라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때 히브리인들 있었고 이스라엘은 없어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될 때 여기 뭔가 요건이 갖추어져요. 뭔가 어떤 요소가 딱 가미되니까 없던 이스라엘이 생겼어요.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무슨 요소가 가미되었는가? 율법이 들어가니까 율법을 구체화해야 될 나라 하나 만들어진 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오늘 강의 다 들었으니까 여러분, 설명하고 그냥 막 갑니다. 이스라엘 존재는 이스라엘 자체의 존재 의의는 없어요. 율법을 살리는 요건, 조건 하에 이스라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율법 떠나면 이스라엘 날아갑니다. 근데 자체적으로 율법의 의 생긴다면 없던 이스라엘 새로 생겨나는 거예요. 이스라엘 위한 이스라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율법 모세를 줬기 때문에 모세언약이라 해요. 모세언약 율법의 완성이 다윗언약이에요. 이런 건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고 그냥 막 지나갑니다. 모세언약은 율법이고, 율법이 없으면 이스라엘 자체가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뭐가 있는지 보세요. 내가 여기 있고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다? 그런 것 없어요. 그건 이스라엘이 오해한 거예요. 내 속에 있는 그것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는 거예요.
복음이든 율법이든 날 위해 존재하는 건 이 땅에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말씀 편이지 내 편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내 편 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중간과정에 있는 그냥 껍질,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 속을 관통해서 하나님 스스로 하나님을 완성하는 껍질에 우리가 동원된 거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아 내 백성아 여수룬아 하고, 너는 내 것이라고 돼 있지요. 그거는 뭐냐 하면 바로 새로 오실 메시아를 담는 운반체,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민족을 새로 만든다는 거예요. 율법을 위해서, 어린양의 제사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새로 만들었다는 취지에요. 그 취지 날아가면 없어지지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이스라엘은 율법을 위해서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3장에서 그들이 이 율법의 정신에 화합치 않기 때문에 어떻게 했는가?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17절) 이래 나와요. 여기 인간 위주가 없어요. 하나님의 음성, 율법, 말씀 그것 순종치 아니하면 다 잘라 내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취지를 잘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순종합시다. 이게 땡 탈락이에요. 그러니까 순종합시다, 하는 말로 이 말 준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말씀에 우리가 순종하면 우린 드디어 안식이 되어 갑니다. 이러면 반대로 해석한 겁니다. 이런 뜻이 아니고, 잘 들어보세요. 율법은 인간의 어떤 의도에도 놀아나지 않는다, 그런 뜻이에요.
율법은 고집이 세서 율법은 추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밀어붙이지 우리가 율법을 이용해서 내 구원받겠다하는 그런 인간의 수작에 주님은 놀아난 적이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히브리서 3장 18절에 ‘맹세’라고 해요. 히브리서에서 맹세는 누구한테 맹세하느냐? 하나님이 하나님께 맹세한 걸 맹세라고 합니다. 참 어렵지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떻게 해요? 보내신 하나님이 따로 있고요, 보냄을 받은 하나님이 따로 있고 둘 사이의 관계성을 맹세라고 합니다. 내가 아들에게 준 일은 인간들이 어떻게 불순종하든 순종하든 관계없이 반드시 다 맹세는 맹세대로 성취시킨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엎어지면서, ‘거봐 순종 안 하니까 작살난다 했어, 안 했어? 했지. 그러니까 맹세는 맹세대로 남는 거야’ 그 이야기하려고 말씀 주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이것 보면서 얼마나 가슴 조마조마했습니까? ‘하아 순종 안 하면 잘린데. 오십 년 교회 다닌 것 소용없데. 이제부터 순종 잘하자.’ 그게 잘린 거예요. 그게 벌써 잘린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맹세가 주도한다는 사실을 여기 이 말씀을 통해서 발견을 해야 돼요. 그러면 나는 주님을 떠나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그것이 기뻐져야 되거든요.
자, 아들이 하는 일을 믿는 것이 뭐다? 우리가 어린애로 유치원으로 돌아가서 말 그대로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오케이? 오케이. 그런데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살리시는 그분이다, 오케이? 오케이. 뭐가 문제입니까? 얼마나 기뻐요. 갑자기 내가 거기 왜 낍니까? 내 행함이 왜 낍니까?
그러니까 내 행함을 낄 때에 성령께서 귀를 잡아당겨요. 학교에서 요새는 그러면 학교폭력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썽꾸러기 너 나와, 나와 잡아당기잖아요. 성령이 하신 일은 주의 하신 일은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는 말은 성령께서 매일같이 우리의 귀를 잡아당겨서 너의 일이 나의 일을 훼방하지 말라고 잡아당겨주는 요것, 요게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네 일에 의미 두지 말라 했어, 안 했어? 또 의미를 두네, 이게. 좀 비켜라. 십자가 가리지 말고 비켜. 너 잘난 것 너의 의잖아. 왜 주님의 의를 가려버려.’ 잡아당기는 거예요.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주의 일에 협조하려고…’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너보고 주의 일 하라고 한 적 없어. 그냥 내 하는 일에 전적으로 믿고 너는 자신에 손을 놔버리는 게 주의 일이야.’ 늘 잡아당기죠.
이것을 이렇게 하게 됩니다. 지금 히브리서 3장 16절 이야기는 이거에요. 모세 율법은 불신과 신자를 가려내는 구분하는 기준이 되겠지요. 기준 역할 합니다. 이게 모세 율법이에요. 그런데 모세 율법의 완성이 뭐라 했습니까? 성전이라 했지요. 자, 솔로몬이 성전 지은 이유가 나옵니다. 성전을 짓게 되면 그다음에 뭡니까? 성전은 불신과 신앙을 믿음을 구분하는 그 시대에 솔로몬 시대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럼 아까 이야기한 것 봅시다. 성전을 지었던 취지가 솔로몬이 뭐라 했느냐 하면 내가 성전을 지은 것은 하나님을 가둬두려고 한 게 아니고 그냥 입구에서 하나님의 연락책으로 분향함이라고 돼 있지요. 그러면 솔로몬의 존재를 봅시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다시 정리하면, 솔로몬의 존재는 뭐냐 하면 내가 성전 지었으니까 구원받습니다. 이스라엘 왕으로 지혜롭게 하니까 나 구원했죠? 이게 아니고요. 솔로몬의 존재는 뭐냐? 다윗에게 돌려요. 아버지 다윗에게 돌린다고요.
아버지 없으면 내가 없다가 아니라 아버지가 밧세바와 간음하지 않았다면 누가 없다? 내가 없는 거예요. 아버지의 죄 지음이 없으면 누가 없어요? 내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 죄인의 대표자 다윗이란 아버지를 둔 거예요. 그러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자녀가 돼요. 다윗의 자손이 주님이니까. 주님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죽은 자리요. 이 땅에서 죽은 자리가 됨으로써 메시아 됨을 보이는 겁니다.
제가 이리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반격할 거예요. 예수님은 죽은 자로 메시아 아니고,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건데 그런 사람들에게 묻지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온 동네 다 나타났습니까? 아니지요. 부활한 주님을 다른 사람이 찾아갈 수 있습니까? 절대로 못 찾아갑니다. 부활함으로서 인간 대 예수님은 끝났어요. 단절되었어요.
그러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뭡니까? 십자가에요. 보고 믿는 것이 복 된 게 아니에요. 보고 믿는 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마한테 이야기하기를 네가 보고 믿느냐? 그거는 다가 아니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거예요. 보지 않고 어떻게 믿어집니까? 보지 않는데 어떻게 믿어집니까?
그게 아까 이야기한대로 피부질환이에요. 우리 속에 있는 우리가 우리의 인생 속에 덕지덕지 이게 표면의 증상처럼 발열한다 할까, 또는 얼룩덜룩한 피부염이 생기는 거예요.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인생의 표면에 올라오는 거예요. 올라오게 되면 그건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내가 기도한 내용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느새 나의 탐욕과 욕심과 욕구와 육적인 열매들이 내 피부, 내 인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배설물이라 해요. 토해낼 배설물들이 내 인생 세월에 계속해서 얼룩덜룩한 자국을 남기고 있어요. 그것 내가 원했던 겁니까? 해답 나왔습니다. 내가 어떻게 주의 백성이 됩니까? 내가 어떻게 천국 갑니까?
간단해요. 내 인생이 십자가 사건의 징후, 증상으로 사용된다. 십자가 사건이 옴으로써 내가 얼마나 이기주의며, 나는 나밖에 모르며, 나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돈, 돈, 돈만 챙기는 것이 나의 기쁨이지 하나님 복음으로 기뻐한 적 없는 내가 원하지 않는 이러한 요소가 계속 내게 생각나게 만드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예요, 내 속에.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한 일이 아니면 누가 한 거겠어요? 마귀가 했어요, 누가 했어요? 성령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뭐 하라고? 십자가 사건이 네 속에 지금 일어나고 있고 벌어지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솔로몬입니다. 이게 왜 솔로몬이냐? 솔로몬의 말년을 보세요. 어떻게 됐습니까? 성전 지어서 하나님 잘 섬겼지요.
그런데 말년에 어떻게 됐어요? 있는 나라 건사하기 위해서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 공주와 결혼해서 군사적으로 낭비하지 않고 일가친척 만들어서 안 싸우고 평화롭게 한다면 이스라엘 나라는 수출품들이 무사히 다른 나라와 교역으로 농사짓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이윤을 남기고 그 이윤 남긴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국민소득을 높일 수 있어요. 그 정책을 한 겁니다.
어디서 잘못됐어요? 율법이 이스라엘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위해서 이스라엘 있는데 이게 반대가 되어서 우리나라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 도와주소서가 돼버려요. ‘내 가정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 도와주소서. 우리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하나님 도와주소서.’ 이렇게 돼버린다고요.
그런 가운데서 솔로몬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자기가 이 지경된 것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지요. 그게 전도서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다 헛되다. 내가 공부 많이 했는데 공부 많이 한 것도 다 몸만 피곤할 뿐이고, 내가 사치라면 사치, 극락의 기쁨은 다 누려봤는데 무너져가는 이빨부터 눈부터 전도서 마지막에 나와요.
내 체제가, 그러니까 이거는 현대건설 짓다만 아파트와 똑같은 거예요. 골조만 남은 점점 더 골조가 내 모습이에요. 끝에 있는 살점, 인물 좋은 내 모습이 내 모습 아니고 그거는 가상이고 세월이 나를 쥐가 치즈를 갉아먹듯이 세월이라는 쥐새끼가 나를 갉아먹으면 나는 그냥 골조만 남는 거예요. 결국은 중력을 이기는 내 척추만 남고 척추도 무너질 거예요. 귀도 안 들려요, 눈도 어두워져요. 이게 바로 인간 아닙니까. 이게 율법 아래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물어야 돼요. 나는 왜 태어났는지? 이렇게 무너지려고 태어났다.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질문은 뭐냐? 내가 왜 태어났는가? 정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우리를 활용해주신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성령이 임해야 압니다.
하아, 허접스러운 그릇인데 십자가를 담는 그릇으로 죽을 때까지 죽을 때 망가지든 깨지든 간에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의 더러운 죄를 내가 내 인생 살면서 그걸 표면에 이렇게 다 노출되도록 주께서 하시니 세상에 강도보다 더 심한 강도, 세리, 창기보다 더 더러운 존재가 나라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발견될 때 우리 자랑하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터, 십자가 터.
모든 것 이미 지옥 불을 이긴 그 예수님의 터를 말할 수 있는 복음이 나오는 장소, 주님이 죽으신 자리가 있는 장소 그걸 가지고 뭐냐? 우리를 언약의 백성, 천국 백성이라 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신약의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치밀하게 일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마음 편하고 돈 많고 시간 남아돌면 내 인생 목적 다 이룬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의 죄는 깊이 감춘 채 남하고만 비교했던 저희를 이제부터는 십자가 죽으신 예수님과 날마다 대조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