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1a 울산강의-역대기하(1강) 1장 6절 : 솔로몬의 자기포기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하 1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그렇게 생각하지요. 방금 했던 그 말씀 그 뒤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궤가 나옵니다. 언약궤. 4절에, “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쳤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여아림에서부터 위하여 예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그다음에 이 궤가 어디 있었느냐 하면 13절에, “이에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 회막 앞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치리하였더라”
일천 번제를 드리는 장소가 기브온 산당, 예루살렘과 상당히 가까운 곳입니다. 여기에 방금 제가 언급했던 등장인물을 다시 칠판에 적어보겠습니다. 다윗 아들, 솔로몬, 그다음 여기 하나님 등장하거든요. 그다음 궤, 언약궤를 말합니다. 아들은 관계를 말하고, 다윗 아들 솔로몬, 하나님, 언약궤. 그 뒤에 일천 번제 드리고 난 뒤에 솔로몬이 기도를 할 때 언급되는 어떤 무리가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백성이 나옵니다.
이런 조합, 다윗 아들 솔로몬, 하나님, 언약궤, 백성 이 조합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서로 대조가 되는 결론에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는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다. 이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조합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다, ‘나’ 자리에 하나님이 율법을 구원한다, 또는 하나님의 언약을 구원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언약을 구원한다.
이 두 가지가 같을까요, 상반될까요, 대조될까요? 대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이것만 있으면 이러한 다윗, 솔로몬, 하나님, 언약궤, 백성 이것이 나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라고 하나의 결론만 맺어지면 우리한테는 별로 어려운 게 없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다는 나를 비껴서 ‘하나님은 언약을 구원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②번의 결론에 노출되면 ②번 결론의 방해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①번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가 아니고(not a but b 용법입니다), but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구원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언약을 구원한다는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니고’에 뭐가 있어야 돼요? ‘그것은 아니고, 아니야’가 먼저 등장하는 거예요. 그 ‘아니고, 아니야’의 등장 용도로서 동원되는 게 뭐냐? 하나님은 나를 구원한다, 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또 하나님은 백성을 구원한다. 이러한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나님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그래서 ①번을 거쳐야 돼요. ①번을 거쳐야 ②번에 도달돼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팽개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팽개친다는 말, 또는 다른 말로 적당한 것은 뭐냐 하면 나의 것이 깨어졌다. 그런 말로도 할 수 있어요. 내 것이 깨어지고 내 세계가 와해되고 무너지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다 없어지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은 언약을 구원하는 것을 인간은 알 수가 없습니다. ①번이 ②번을 가리고 방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①번부터 먼저 나오거든요. ①번부터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 강의하기 전에 ②번을 지워보겠어요. ②번을 제가 언급했기 때문에 ②번이 있다고 생각하고 ②번을 지워보겠습니다. 그럼 남는 건 뭐만 남게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한다’가 남겠지요. 그러면 이 ①번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역대하에 다윗 아들 솔로몬, 하나님, 언약궤, 백성 이렇게 나오면 어떤 개념이 나오고 어떤 단어가 나오든 어디에 다 쏠리게 돼 있어요?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건지신다’에 초점이 모아지겠지요. ②번을 모르니까 이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나를 구원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그 어떤 경우라도 와해되지 않는다’ 또는 쉬운 말로 깨어지지 아니한다. 이렇게 이해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역대하에서 솔로몬이,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게 시작됩니다. 솔로몬이, 솔로몬이 왕이잖아요. 백성들에게 뭘 보여주려고 한 겁니까? ①번이겠습니까, ②번이겠어요? 솔로몬이 보여주고자 한 게 뭐였던 거예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이게 인간은 불가능합니다. 쉬운 말로 하겠어요.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백성들은 이미 자기 뜻이 굳어져 있습니다. 뭐로? ①번으로 굳어져 있어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한다는 뜻으로 이미 백성들은 굳어져 있지요. 하나님은 나를 복 주신다, 굳어져 있지요. 이것을 피해서 백성들이 원하는 것 말고 솔로몬이 백성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나를 구원한다는 백성들이 은근히 노리는 것과는 이게 완전히 대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쉽게 설명하려고 애를 써보겠어요. 쉽게 들어갑니다. 백성들은 결혼해서 백성들은 부부가 되어 뭘 낳기를 원합니까? 자식을 낳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솔로몬은 자기 자식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대하의 내용에 대해서 일천 번제나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서? 자기의 원수 죽는 거나 자기의 수명이 길거나, 자기의 재산에 관심 없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만을 알리기를 원했을 때에 솔로몬은 자기 자신한테 관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관심이 없지요.
그러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면 솔로몬은 어디에 관심 있을까요? 오늘 이 강의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솔로몬은 어디에 관심 있는가? 놀랍게도 아버지한테 있어요. 다윗에게 있습니다. 이미 솔로몬 자신이 자기를 포기했어요. 솔로몬 자신이 자신을 포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얻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획득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솔로몬을 통해서, 역대하 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1장, 2장, 3장을 통해서.
①번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②번이 나타나지 않는다 했지요. ②번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뭘 건진다? 백성을 사람을 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모세 율법을 모세언약을 건진다했지요.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걸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으며 그것은 평소에 사람이 원하는 것에서 방해받고 온 거예요.
솔로몬이 기도할 때에 기도 내용에 뭘 안 했다는 거예요? 자기의 수명 오래 가는 걸 안 했다 했지요. 자기가 부자 되는 걸 하지 않았다 했지요. 원수가 자길 공격하는 것, 그걸 위해서 지켜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했지요. 이건 내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나를 지키는 기도를 안 했단 뜻이에요. 그러면 솔로몬이 지키고 싶은 게 뭐냐 이 말이에요.
그거는 바로 아버지께 주었던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에요? 다윗이지요. 솔로몬은 다윗에게 철저하게 종속돼 있어요. 철저하게. 와아 이거 사실은 무서운 이야기에요. 솔로몬은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종속돼 있다. 왜? 자기한테 언약이 안 왔어요. 누구한테 언약 왔습니까? 아버지한테 온 언약이거든요. 아버지한테 온 언약이 무슨 언약? 다윗언약.
다윗언약에만 왔고 자기에겐 안 왔기 때문에 자기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말은 자신을 지키는 용도로 하나님을 끌어당기지 아니 했다는 말입니다. 이걸 확장시켜서 이야기하면 솔로몬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이에요. 솔로몬의 소원은, ‘아버지에게 준 언약이 이 땅에 이뤄지게 하옵소서’ 이거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땅에서 이뤄지는 주기도문은 어디서 어느 사건을 통해서 완성이 됩니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성되지요. 그러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데 왜 십자가라는 죽음 사건이 벌어져야 됩니까? 땅에 있는 인간들의 방해, 무엇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방해되는지를 같이 동반해서 들춰내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여러분, 십자가 믿지요? (웃음) 내가 나의 존재성, 나의 소유성,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 그러한 생각, 의식 무엇에 방해라고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게 방해물이 된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우리가 안 들었다 칩시다. 뭐 들어도 마찬가지지만 하여튼 모른다고 칩시다. 들어도 모르긴 마찬가지인데, 이것 다 지워볼게요. 이걸 지우게 되면 이 칠판은 화이트보드는 비어있습니다. 지웠으니까 비어있지요.
여기서 누구에게 글 써보라 한다면 이 빈 공간에 어떤 글이 채워지겠습니까? 너무 질문이 허황되어 죄송합니다. 그냥 답변하겠어요. 이것은 나의 이야기로 채워지는 거예요. 나의 인생이야기로 채워져요. 그런데 이 상태가 어떤 상태냐? 언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 언약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나의 이야기가 내 ‘빈 마음’(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뜻하며, 철학에서는 보통 영어식 번역인 '빈 서판(blank slate)'으로 통용된다)의 전부를 차지하고 나의 인생이야기가 내 심령을 전부를 차지하고 내 머리의 생각과 의지의 전부를 차지합니다.
이 나의 이야기, 나의 인생이야기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써질까요, 안 써질까요? 당연히 쓰여지지요. 왜? 교회 다니니까. 당연히 쓰여진다 이 말이죠. 하나님 이야기도 쓰여지고, 무슨 이야기도 안 사라지고? 나의 이야기도 같이 쓰여지는 거예요. 나의 이야기 일부로서 하나님 이야기가 개입되는 거예요. 하나님 이야기에 의해서 나의 이야기가 없어져야 되는데 추호도 없어질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을 포함해서 구원되길 원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의 인생, 나의 이야기는 뭘 뜻하느냐 하면 어떤 이야기를 쓰던 이건 변명입니다. 어떤 변명? 구차한 변명. 노골적으로 지저분한 변명. 인간이 신 앞에 하나님 앞에서 내놓는 모든 것은 전부 다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말씀대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사는 게 좀 후달리네요. 바쁘네요.’ 이런 변명 이야기가 빈자리를 채워요. 하나님께서 변명 이야기하라 했습니까? 듣지도 않습니다. 안 들어요. 안 듣는데 인간들은 주저리주저리, 주저리주저리 하니까 어떤 시가 생각나네.
청포도 - 이육사(1939)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주저리주저리 계속해서 이어지듯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변명+변명+변명+변명+……, 주저리주저리 이어져오는 거예요. 왜 변명을 하느냐? 왜 인간들은 자꾸 변명을 늘어놓습니까? 그거는 사는 것이 억지니까. 사는 것이 억지로 살아요. 이게 바로 인간이 처한 형편입니다. 억지로 삽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산다는 것은 비참한 짓입니다. 비참한 짓을 하면서 그래도 죽기는 싫을 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은 뭐냐? 자기연민. 자기연민에서 글자 하나 빼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드디어 나옵니다. ‘자기 의’
율법을 배제하고 언약을 배제하고 꼭 쥐는 것은 나, 신이시여 나는 나를 연민을 갖고 불쌍히 여기니까 하나님도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불쌍히 여겨서 이 처참하고 비참하게 인생 억지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좀 봐주소, 이거에요. 나름 하나님 위해서 애썼습니다, 하고 그다음 주저리주저리 나오는 게 뭡니까? 변명이죠.
자기연민, 자기 의, 사는 것이 억지, 인생은 죽지 못해 산다. 인간은 죽지 못해 살아요. 그래서 기도한답시고 하나님께 눈만 떴다 하면 나를 힘들게 한 원수를 내 대신 보복 좀 해주시고, 내가 몸이 아프니까 오래 살게 해주시고, 또 남한테 꿀리지 않는, 자기가 생각해도 처참하게 사니까 부자 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것 외에는 기도할 게 없네요. 기도 끝. 이렇게 되지요.
내 위주로 사니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어요. 나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결론이라고 이미 확정됐어요. 확정짓고 난 뒤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저리주저리 나오는 것은 이미 변명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인생을 정당화하고(자기 의)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이 비참한 가운데서 그냥 몸부림 만부림 쳐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노리는 것은 뭐냐? 내 자식 잘되는 거예요. 내 자식 나와요, 내 자식. 역대하 초반에 솔로몬은 자기 자식에 관한 이야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이 말은, 이것도 어려운 말인데 솔로몬에 와서 시간은 다윗언약은 시간적으로 스톱이 된 거예요. 스톱이 됐다는 말은 최고 완성단계의 언약을 하나님을 주셨다는 것을 솔로몬이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전에 신명기 때 하나님이 예언을 했어요. 그 예언한 것이 어디서 최종 스톱이 됐다고 솔로몬은 믿었습니까? 아까 역대하 1장에 무슨 이야기 나왔다 했습니까? 다윗 나오지요, 아들 나오지요, 솔로몬 나오지요, 하나님 나오지요, 그다음에 제가 뭘 썼습니까? 언약궤 나오지요. 언약궤가 스톱이 돼버리면 이거는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구원하는 최종 레벨에 이르렀다는 거예요. 최종점에 이른 거예요.
사람들이 이에 관심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행복하고 싶은데 환장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에 대해선 들어올 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필요한 것 달라 이 말이야, 하고 땡강 부리는 것과 똑같아요. 하나님에 대해서. 왜 하나님은 내 뜻에 응답치 아니하십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하나님이 지 요구에 왜 응답해야 되는데요?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언급해드릴까요? 언급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응답, 기도의 응답, 그렇게 사람들이 헷갈리는 기도의 응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3절,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끝.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끝이에요. 다윗의 아들 누구지요? 솔로몬이죠. 하나님의 아들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 예수님이 아버지의 언약에 의해서 영광 받으면 그것이 끝. 그것으로 끝났어요. 그게 기도 응답이에요. 거기 인간이 왜 낍니까?
인간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죽지 못해 사는 것. 그것은 뭐냐? 이 세상이 인간과 맞지 않는 곳이란 뜻이에요. 우리가 태어난 것은 맞는데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이 우리 인간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누구한테 맞는 거예요?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겁니까?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나니, 어디서요? 이 세상이란 공간에서. 언제 말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시간이죠. 이 시간과 공간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었고 뭡니까? 인자를 위함이었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요한복음 12장 23절에 보면,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돼 있지요. 어디서요? 이 세상에서. 언제요? 인자가 죽으실 그 시점에.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고 하잖아요.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고 했지요.
다시 물어봅시다.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제시하려는 게 뭡니까? 아까 똑같은 질문했어요.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솔로몬이 제시한다면 솔로몬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달이나 자기 사수, 자기 잘 되는 것, 거기 포함이 됩니까, 안 됩니까? 포함이 안 되지요. 그래서 자기포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데 자기 뜻이고 뭐고 솔로몬은 그렇게 신경을 못 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존재하게 하는 것은 누구냐 하면, 본인이 아니고 아버지 이름이 누구에요? 다윗이고, 다윗에게 준 아버지의 언약이 있어요. 그 언약을 위해서 자기가 언약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성취를 보이기 위해서 자기가 아들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났으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벤다고 사람이 태어났으면 자기 포부나 뜻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걸 솔로몬에겐 하나님이 인정 안 해준다는 거예요. 아버지 뜻으로 끝났어. 네 뜻은 필요 있다, 없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걸 흔쾌히 솔로몬이 받는 거예요. 내 뜻이 필요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예수님 왔으면 예수님 뜻이 중요하지 내 뜻은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종요하지 않는 겁니다.
참 얼마나 보세요. 인간들은 이 세상을 억지로 살면서 사는 족족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방해하고 공격하고 그걸 저주하잖아요. 하나님이고 뭐고 나한테는 내가 더 중요해. 진짜 그들이 속에 하고 이야기, 대외적으로 외치고 싶은 이야기, 저 높은 산에 가서 외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신이시여, 신이 있다면 내 소원 좀 들어주소’ 그것 딱 하나에요.
바로 인간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된다는 것을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통해서 기도 응답 받으면서 인간들의 모든 뜻은 응답에 이를 수 없는 오히려 응답을 훼방하는 거짓된 응답을 요청하는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언약을 구원한다, 건져낸다. 어디에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사람은 건지는 게 아니고 언약을 건집니다.
근데 인간은 행동을 하게 되면 내 행동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따지지요. 왜 따집니까? 올바른 행동은 나를 구원하고 나쁜 행동은 나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이런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런 의식 자체가 누구 생각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지키는 것을 포기 못한 생각이에요.
그럼 다시 솔로몬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솔로몬이 왕이잖아요. 여기 보면 1장 1절에 보면,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물어볼게요. 솔로몬이 획득하지 못한 게 뭡니까? 솔로몬이 왕위가 견고하고 왕 되었고 많은 재물이 넘쳐났는데 솔로몬이 획득하지 못한 건 뭐지요? 많은 재물도 획득하고 왕위도 획득했는데 획득하지 못한 것, 그것은 솔로몬 자신의 자리가 자기에게는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획득하면 안 돼요, 내 자리는.
솔로몬은 자기 자리를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께 받은 자리가 있습니다. 이게 두 번째로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거예요. 자기 자리를 포기하고 대신 획득한 자리가 있어요. 왕위를 포기하고 대신 받은 자리가 뭐냐? 기름 부음의 자리에요. 이건 광주강의 때 제가 했지만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 다윗은 자기가 왕 됨을 원했습니까, 아니면 어떤 자리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리라고 귀히 여겼습니까? 어떤 자리를 귀히 여겼지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을 해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성경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못 죽입니까? 사울에게 뭐가 결합돼 있어요? 기름 부음이 있지요. 기름 부음이 있다고, 기름 부음이. 기름 부음은 신적인 겁니까, 인간적인 겁니까? 신적인 거죠.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돼 있지요. 주 안에 거하라, 공간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영향 받지 않는 공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동됨이 없는 특별한 공간, 신적 공간, 이 이름을 ‘기름 부음’이라 했어요. 기름 부음으로 주 안에 있게 된 겁니다.
그러면 요한일서 2장 27절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 준 거예요, 성도에게 준 겁니까? 성도에게 준 거죠. 성도에게 주었다는 말은, 백성들에게 주었다는 말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생성되는 백성,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생성되는 왕, 솔로몬 왕이 아니고 아버지의 언약대로 기름 부은 그 자리 안에서 솔로몬은 왕이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윗언약에 의해서 기름 부음이 있는 왕을 가진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까 요한일서 2장 27절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기름 부음에 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니다, 성도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들어보니까 무척 쉽지요. 그런데 기름 부음의 자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내가 내 자리에서 획득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한다. 거부해버려요. 왜? 인간 것 받지 않고 대신해서 기름 부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내가 획득한 것 쥐고 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쥐고 있다는 것, 재물만을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얻었다고 하는 굉장히 고상하고 거룩해 보이는 모든 것들, 사람은 그 안에 자꾸 거하고자 하거든요. 그게 아까 제가 그걸 뭐라고 하느냐? 그걸 획득했다고 해요. 인간이 내가 획득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획득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외연적인 외부적인 조건이 뭐냐 하면 시간+공간, 시공간이 돼요. 인간은 시공간 속에서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온갖 공작과 노력을 다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세 번째 중요한 것, 나 첫 번째 뭔지 모르겠어. 하여튼 세 번째 중요한 것, 솔로몬의 번제란 뭐냐?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렸거든요.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를 일천 번이나 했으니까 최고 번제, 최고점을 찍은 번제, 끝장낸 번제, 번제의 끝장, 천 번이나 번제했는데 번제는 뭐냐 하면 시공간을 벌리는 것, 틈을 내는 거예요. 시공간에서 시간을 찢어버리고 공간을 찢어버려서 틈을 내는 겁니다. 자, 시공간에 틈을 내니까 기도의 응답이 주어졌지요. 기도 응답 받았잖아요.
첫 번째, 솔로몬이 했을까요, 기름 부음이 했을까요? 어느 쪽입니까? 솔로몬이 한 게 아니고 기름 부음이 했지요. 이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아까도 다윗과 사울 이야기도 했지만 이거는 누구한테 받은 거예요? 아버지 다윗이 받은 거죠. 아버지 다윗이 받았다고 해서 기름 부음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건 아니에요.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이 언약 속에서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건물 있다고 성전 되는 게 아닙니다. 성전 안에는 제일 필요한 요소가 담겨 있어야 돼요. 성전의 지성소 제일 깊숙한 곳에 안치된 게 뭘까요? 언약궤죠. 그래서 아까 언약궤 이야기 나온 거예요. 산당에서 일천 번제 드릴 때에 언약궤 중심으로 드린 거예요. 그리고 성전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고 솔로몬도 아니에요. 뭐가 주인공입니까? 언약궤에요. 언약궤 있어야 언약의 인물화가 돼요. 언약의 인격화가 돼요. 언약의 인격화란 것은 언약궤가 사람으로 변화, 변신되는 겁니다. 사람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언약궤.
아까 강의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주고자 한 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사람의 머리에서 나와서 백성에게 줘버리면 백성들은 자기들이 백성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들은 뭘 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원합니까, 아니면 내 뜻이 신에 의해서 후원받기를 원합니까? 도움 받기를 원하지요. 그렇게 해서 도움 받으면 인간이 노리는 게 뭐예요? 자기 구원이잖아요. 참 이거…
인간은 생각하든 행동을 하든 심지어 기침을 하던 뭘 하든 시공간, 자기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활용해서 자기 구원을 도모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신의 뜻은 뒷전이에요. 신의 뜻보다 내 뜻이 중요하다고요, 내 뜻이. ‘주여,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말은 그럴싸한데 이미 자기 뜻을 포기한 게 아니에요. 자기 뜻을 포기 안 했다는 말은 내가 이미 가진 것, 획득한 것을 잃어버리기 싫다는 고집 같은 거예요.
‘내가 평생 이것 일궈왔는데 이걸 잃어버려, 미쳤어? 이것 없으면 나는 못 살아. 이것이라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내가 이 땅에서 고생했다고.’ 참 더럽게 살았는데 비참하게 살았고 참 찌질하게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그게 자기연민이잖아요. 자기연민이 굳히면 뭐가 된다 했어요?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 자기 의 있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구원이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기름 부음이 있어야 돼요. 기름 부음은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노력한다고 내가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여러분이 기름 부음을 획득했으면 기꺼이 여러분들이 획득한 것을 무가치로 내팽개칠 수 있어요. 내팽개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갖고 있어도 괜찮아요. 신경 거기 안 써요. 내가 획득한 것 신경 안 써요.
인간들이 획득한 것 중에서 제일 버리기 싫은 것이 뭐냐?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자식 바치라 했지요. 자식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하겠어요? ‘내가 자식을 죽이면 어떻게 살까, 자식 살까, 자식 죽을까?’ 이것만 생각하고 올라갔을 것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 생각에 없었던 게 있어요. 빠진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여호와이레’에요. 하나님이 자기 자식, 그것도 미운 자식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라 했을 때에 그때 비로소 그 근처에 등장한 게 여호와이레입니다. 어린양이었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우리는 그렇게 발견되는 겁니다. 성경 공부한다고 발견되는 게 아닙니다.
나를 목 졸라 죽을 때마다 내가 평생 애쓰고 사는데 힘들 게 사는 나를 목 졸라 죽이는 그때 목 졸리면서 눈 떠보니 뭐 있어. 누구야 너? 누구기는 널 살리는 죽이는 어린양이지. 어린양이 나를 목을 조를 때, 목을 졸라서 요새 기침이 나는가? 목을 조를 때 누구십니까? 여호와이레다, 됐냐? 너의 것 받지 않는 여호와이레다.
이 시공간, 말씀을 같이 나누는 시공간 어디 갔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더 획득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 더 획득한 것을 안 놓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자식? 재산? 돈? 다 저질스럽게 살아가는 하나의 단면들입니다. 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억지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죽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는 그 버릇, 내 것 지킨다는 그 더러운 버릇, 개 같은 버릇, 귀신들린 버릇 그것이 바로 솔로몬이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나 왕 됐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그 전의 그것과 똑같아요. 우리 자식도 왕 된다, 그것도 아니에요. 내가 이야기할 것은 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떤 식으로 이어져왔는지 어떻게 해서 언약궤가 내가 보기에 여러분 백성들 보기에 언약궤가 왜 있는지? 언약궤가 있다는 말은 공간적으로 있다는 거고 일천 번제 드린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그만큼 시간을 소비했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나 그 드린 시간과 그 공간의 대가로 응답이 오는 게 아니에요. 왜? 번제니까, 번제란 말은 뭐냐 하면 불이 있어야 되고, 불 위에 제물이 있어야 되죠. 불이 뭘 태웁니까? 제물을 다 태우는 거예요. 일천 번제니까 몇 번을 태운다? 천 번을 태우는 거예요. 번제의 끝장을 보는 겁니다. 번제의 끝판 왕이에요. 이것은 시공간을 태워버리는 거예요.
시공간을 태우는 그 번제의 순간 흐르는 시간을 솔로몬이 포집, ‘날아다니는 것을 꼼짝 마’ 묶어버리는 포집하는 거예요. 시간을 묶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공간을 찢어버리는 겁니다. 공간을 찢어야 위에서 뭐가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겠지요. 진짜 숨어있던 누구도 몰랐던 하나님의 뜻이 찢어져야 나오는 거예요. 이게 마가복음 1장에도 나옵니다. 하늘이 찢어지사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니, 예수님 세례 받을 때 그 대목이에요. 하늘이 찢어지는 거예요.
닫혔다는 말은 시공간이 닫혔다는 것. 닫힌 상태에서는 인간이 획득한 것만 거기다가 집중적으로 유지할 뿐이지 전혀 어떤 것도 주의 뜻은 없습니다. 시공간이 찢어져야 돼요. 구약에서는 뭐냐? 언약으로 찢어져요. 언약이 뭐냐? 모세언약, 번제지요. 율법에 제사법이죠. 제사법에서는 홀라당 다 태우니까.
죽음은 시간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죽었으니까. 제물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또는 그러한 번제를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비로소 그 자리는 솔로몬 왕이 된 자리가 아니라 바로 기름 부음의 자리고, 기름 부음의 자리에서 인간은 솔로몬이 왕이라는 그것과 기름 부음의 자리의 토대 경쟁, 토대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기름 부음과 솔로몬의 왕위, 여기서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지요. 응답의 요소에 솔로몬의 왕위다움, 솔로몬의 왕위라 하는 것은 세습제에요. 솔로몬의 아들도 포함되지요. 솔로몬 본인도 포함되고. 이것이 바로 응답된 토대에 기여할 것이냐, 아니면 기름 부음이 기여할 것인가? 어느 쪽이겠어요? 왕상 11장 36절,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다윗의 등불이죠. 그래서 제가 했잖아요. 솔로몬은 아버지를 바라본다고요. 다윗은 죽었어요. 죽은 아버지를 바라본다고요. 시간이 거꾸로 가는 거예요. 기존의 인간 시간은 미래로 흘러가야 되는데 미래로 흘러가지 않아요.
언약이 시공간이 찢어짐으로써 다윗언약의 시공간이 이게 중간에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천정이 찢어지면서 위에 있는 것들이 쏟아지듯이 쏟아지면서 그 쏟아진 자리에서는 시간은 멈추지요. 그게 다윗의 뭐라고요? 다윗의 등불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토대였습니다. 10분 쉽시다.
20240301b 울산강의-역대기하(1강) 1장 6절 : 솔로몬의 자기포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솔로몬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은 곧 백성이에요. 백성 전체가 자기 자신이에요. 내 백성이 아니고 다윗의 백성이에요. 끝까지 다윗의 백성. 왜? 다윗의 등불은 안 죽으니까. 그 다윗과 하나님이 약속했지 솔로몬 본인이 약속하지 않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성전. 다윗언약에 의하면 사무엘하 7장에 나와요. 언약에 의하면 내가 너를 솔로몬의 집이 되게 하는 게 아니고 다윗의 집이 된다 했어요. 역시 다윗의 집은 인간들이 이 땅에선 알 수 없어요. 언약이 언약대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공중이 찢어지면서 제공되거든요.
번제할 때 불이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하나님께서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다윗언약 플러스 그전에 있었던 모세언약의 결합, 거기에 대한 목격자가 솔로몬이에요. 이제 솔로몬 은퇴해도 괜찮아요. 왜? 솔로몬의 존재는 어디에 함몰됐느냐 하면, 어디에 덮쳐졌느냐 하면 다윗의 존재에 함몰된 입장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도에게 뭐가 주어졌다 했습니까? 기름 부음이 있다 했지요. 이게 참 건방진 거예요. 왜냐하면 기름 부음은 누구한테 주어지게 돼 있어요? 메시아한테 주어지게 된 거예요, 메시아. 그전에 선지자, 왕에게 주어졌지만 최종적으로 메시아에요. 메시아에게 주어질 기름 부음이 성도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성도가 ‘이건 내 거다’ 이게 아니고 예수님 안에 성도가 함몰되었다 이래 보시면 되는 거예요. 마치 다윗 안에 솔로몬이 함몰된 것처럼 함몰된 거예요.
그렇게 함몰되었으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얻을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내가 획득한 것 말고, 주님에 의해서 획득한 것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게 있지요. 그러면 내가 획득한 것은 주님의 죽으심 앞에서 나는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죠. 인간이 획득한 것을 눈싸움 할 때 뭉치지요. 인간이 한 것을 단단하게 뭉쳐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의입니다. 자기연민.
그래서 사람과 대화할 때 뭐냐? 일종의 눈싸움이에요. ‘이씨 나도 이런 것 있어’ 하고 ‘간다 내 응축된 눈 맛을 봐’ 던지는 거예요. 그럼 저쪽에서 맞고 가만있습니까? 저쪽에서도 자기 의로 뭉치지요.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판사다. 됐냐?” “너 한 달 수입 얼만데?” “한 달 수입 일억이다, 됐냐?” “너 몇 평짜리 아파트 살아?” “나 이백 평짜리. 너 차 뭐 타는데?”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는데?” 이런 것. “너거 아버지 박사냐?” “우리 아버지 석사도 안 했다, 왜?”
사람들은 보세요.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잖아요. 이 전쟁은 누구 전쟁입니까? 나의 전쟁이죠. 그걸 누가 했습니까? 사울 왕이 했어요. 사울 왕이 블레셋 골리앗에 덤벼들지 못한 이유가 평소에 모든 전쟁을 자기 위신과 결부된 자기 전쟁, 자기 의로운 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 이길 때 자기 전쟁했습니까? 분명히 다윗이 이야기했어요. 이번 전쟁은 내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누구에게 속하냐? 하나님의 전쟁이라 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이라 했어요.
자, 두 번째 강의에서 약간 복잡하지만 이걸 추적해봐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떤 공간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는 그 지점이 뭐냐? 언약궤 있는 지점이에요. 여러분 신기하지 않습니까? 언약궤가 아담한 상자에요. 아카시아 상자에 금박 입힌 겁니다. 한 팔십 센티, 높이 오십 센티 그 정도. 1.5규빗, 1규빗 요런 길이. 그냥 상자에요. 누가 만들었어요? 누가 제작했습니까? 사람들이 제작한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제작했는데 누가 임한다? 하나님이 임한다. 아하, 이거는 무서운 일입니다. 신기하다기보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에요.
성도는 죄인이죠. 죄인에게 기름 부음이 임한다? 어떻습니까? 신기한 일이에요,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일이에요?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에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언약궤에 임한다는 게 왜 무서운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벌이시기 때문에. 무슨 전쟁? 하나님 전쟁. 하나님 전쟁을 하는데 전쟁은 반드시 상대자가 있지요.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인간들이에요.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는 전쟁하러 왔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터에 뭐가 등장하는가? 언약궤가 등장하지요. 아까 공부한 것 여기다 적용시켜 봅시다. 인간들의 전쟁은 자기 구원전쟁이죠. 이스라엘의 모든 말씀은 바탕이 시간도 그렇게 공간이 어느 공간입니까? 농업 하는 농사짓는 공간이죠. 농사짓는 공간에서 전쟁을 한다, 이거는 무슨 싸움이냐 하면 터 잡아내기 싸움이고, 터를 땅 붙드는 싸움이죠. 또는 땅을 확장하는 싸움입니다. 구약의 환경 자체가 공간이.
약속의 땅이라는 구체적인 터 있잖아요, 땅. 그 땅을 얼마나 확보하느냐, 그 전쟁이었어요. 모든 인간이 그러하니까 하나님도 그 전쟁에 끼어든 거예요. 그 전쟁을 해서 그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젖과 꿀이 흐른다. 이것을 뭐로 봅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모습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생각한 거예요. 그게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면 자기는 구원받았다. 이 전쟁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기필코 뭘 해야 돼요? 승리를 해야 돼요.
그러니까 땅이 있고 내가 살고, 내가 사는 그 땅에서 여유롭게 풍족하게 사는 것, 이 모든 모습은 인간이 자기 승리의 구현체로 그렇게 간주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대로 자식 낳고 이스라엘 나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그럼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자기 구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뭘 구원한다? 언약을 구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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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서 인간 구원 아니다. 언약 구원이다. 인간 구원에서 언약 구원으로 바뀌는 데서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의 이름은 어떠한 일들을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있느냐? 그 개입하신 말씀의 개입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찾아봅시다. 그 취지는 이렇습니다. 인간 구원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 본성을 엎어버리고 언약 구원으로 나갈 때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했기에 그것이 인간 구원이 아니고 언약 구원이 될 수 있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우선 여호수아 보기 전에 신명기부터 보겠습니다. 예언부터 먼저입니다. 신명기 27장 1절,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이렇게 돼 있지요.
보세요. 이 열두 지파가 어떻게 돼요? 뭐를 중간에 놓고 그 언약궤를 바라보면서 양분돼 있지요. 한쪽은 축복하기 위한 여섯 지파, 맞은편에는 저주하기 위해서 따로 분리된 여섯 지파, 그래서 합하면 열두 지파. 그러면 6+6=12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여섯 이야기하고 싶은 축복+여섯이 이야기하고 싶은 저주’를 합하면 축복과 저주를 확정짓고 실현시키는 무엇의 등장? 율법의 등장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는 인간의 존재를 위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 내부에 담고 있는 복과 저주를 노출시키기 위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한 겁니다. 이게 신명기 27장에서 예언된 거예요. 예언입니다. 예언해봤자 실제로 돼야 알지 뭐 예언으로 끝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27장에 예언된 것이 여호수아 4장 1절에서 5절에 보면 드디어 그것이 실현이 되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때 무엇을 앞장세웁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워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찾지 마시고 정리된 것을 칠판에 쓰겠습니다. 민수기 2장 이야기에요. 민수기 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머물러야 될 백성이 아니고 목적이 있어요.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제일 서글픈 감정은 언제 일어나지요? 평생을 살면서 서글픈 감정이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돌아갈 데가 없을 때, 내 몸을 안정적으로 누일 돌아갈 데 없어. 여러분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 되지요. 해당이 안 되면 멀리 놀러갔다고 합시다. 서 목사님 전화 안 돼서 놀러간 줄 알았어요.
아무리 그것이 풍경이 좋고 경치가 좋아요. 그러나 슬슬 노을 지고 밤에 몸이 피곤하고 여행에 지쳐버리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듭니까? 이곳은 내가 있을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 나는 빨리 어디로 가야 돼요? 집으로 가야 돼요. 그게 편해요. 그래서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 했잖아요. 특징이 뭐냐 하면 발붙일 데가 없어요. 이 땅에. 그게 성도의 운명이기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징은 떠나야 돼요. 아까 첫째 강의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본인이 살기 위해서 떠나야 됩니까, 아니면 율법이 완성되기 위해서 떠나야 됩니까? 율법이 완성되기 위해서 떠나야 됩니다. 나 위주가 아닙니다. 내 행복 위주가 아니에요. 내게 실린 말씀이 말씀대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부역꾼이에요. 영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고 감을 영광인 줄 알아야 돼요.
가는데 방향이 열두 지파를 4대로 나눠요. 제1대 진영이 뭐냐? 유다, 잇사갈, 스블론. 그뒤에 제2대 진영이 따릅니다. 르우벤, 시므온, 갓. 세 개씩이니까 열둘이니까 몇 부대로 나누겠어요? 네 개 나오지요. 그다음에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제3부대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언약궤가 나옵니다. 언약궤와 붙어있는 지파가 있습니다.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는 모세언약의 중심입니다.
모세가 어느 지파지요? 레위 지파지요. 모세언약이니까. 다윗은 어느 언약이지요? 유다 지파지요. 유다언약이에요. 다윗언약은 유다언약이에요. 모세 지파에서 유다 지파로 바뀐다는 말은 하나님의 멜기세덱의 언약이 지상에 구체화될 때 일단은 레위 지파를 거쳐서 그다음에 유다 지파로 옮겨집니다. 그 이유가 뭐냐? 레위 지파는 모든 인간들이 다 지켜야 될 거예요. 하지만 유다 지파, 다윗언약은 모든 인간들이 못 지켜요. 단 한 사람 지킬 수 있는 분을 하나님이 따로 줘요. 공부했으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따로 준 사람이 왕입니까, 기름 부은 자입니까? 왕이 아니고 기름 부은 자에요. 오늘날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에요. 본인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본인도 이상해. 본인이 말씀 지고 가는 것도 복음 지고 가는 것도 이상하고요, 자기가 구원받은 것도 이상해. 자기 획득한 것, 자기가 노력한 것, 자기 의로움 아무짝도 소용없는 게 이상해. 지가 죄 지은 것도 소용없어요. 죄 짓고 잘난 것도 소용없어요. 그냥 기름 부음이 있어요. 여러분, 기름 부음이 있는지 보세요. 이걸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선지자의 재현, 제사장의 재현, 왕의 재현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황공하게도.
제3대가 에브라임, 므낫세, 그리고 베냐민. 제4대가 단, 아셀, 납달리. 이렇게 가는데 옮기다가 멈춥니다. 이스라엘이 멈춰요. 멈췄을 때는 1대, 2대, 3대, 4대가 어떻게 붙는가? 1대는 북쪽에 붙어요. 2대는 동쪽에 붙고, 3대는 남쪽에 붙고, 4대는 서쪽에 불어요. 그러면 중앙이 비겠지요. 중앙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일반인 접근 못하도록 단도리하고 지키고 있습니다. 마치 창세기 3장 24절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키는 거예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도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도록. 함께 하는 게 맞는데 가까이 하면 죽고. 인간은 가까이 하면 죽기 때문에 인간을 뭐로 봅니까?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요. 죽은 자인데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죽은 자로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고 있는 그러한 양상을 구약 때부터 이미 말씀이 구현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포진하고 이렇게, 이렇게 움직이라는 그 말씀이 함께 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간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는 겁니다.
언약궤 있으니까 언약궤에 인간이 접근하면 죽지요. 인간이 죽는다는 말은 인간에 무엇이 소용없다? 시간과 공간이 소용없는 거예요. (옷에 가시가 찔렸는데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지 마음에 사탄의 가시가 있어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약간 아쉽다.) 인간의 시공간,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이 평소에 살아오면서 이렇게 늘 감안했던 시공간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지켜주는 시공간이 따로 있어요.
우리가 지금 오늘 본문이 뭡니까? 솔로몬의 성전이잖아요. 언약궤죠. 그러면 성전은 뭡니까? 성전이란 인간의 시공간을 찢어버리고 하나님과 인간을 만나게 하는 곳이 성전이에요. 그러니까 성전은 시간을 붙잡아두는 장치, 하나님이 만든 장치. 오늘날 이 성전을 놀랍게도 성령이 있는 사람을 성전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들으면 황공무지로소이다. 아무 볼품도 없고 본인이 봐도 너무나 하찮고 내세울 게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짊어지는 말씀 자체가 우리보고 성전이래요.
그럼 그 말은 우리보고 말씀을 지키란 말입니까, 아니면 말씀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이야기에요, 어느 쪽이에요? 말씀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거죠. 주실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이 내가 나를 구성하려고 하는 모든 재료들 있잖아요. 내가 스스로 하는 조립에 구성할 자재를 주께선 다 흩어버리고 찢어버리고 깨버리신다. 나 이 정도야, 하면서 동원됐던 각가지 그럴싸한 나다움의 조건들 있잖아요. 그것을 주께서는 발가벗겨버리죠. 벗겨내죠.
제가 어느 날 한옥의 기왓장 교체하는 공사를 본 적이 있어요. 기왓장 물론 까만 기왓장이지만 햇빛 비추면 멀리서 보면 반짝반짝하잖아요. 그런데 기왓장 들어내니까 거기에 하찮은 합판 나오더라고요. 뭐 볼품없어요. 숱이 가득한 머리털에 버짐 있어보세요. 볼품없지요. ‘영구 없다’ 나오는 것 있잖아요. 그게 기계충 먹어서 뻥 뚫리잖아요. 성도는 기름 부음이 함께 있어야 되고 말씀으로 덮여있는 것이지 말씀과 떨어져버리면 정말 볼품없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성도라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있다는 말은 열두 지파한테는 뭐가 있느냐 하면 땅을 유업으로 받아요. 그걸 분깃이라고 하고 기업을 받는데 그렇다면 레위인들은 무엇을 분깃으로 받지요? 땅이 없어요. 성막의 일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성막의 일이란 것은 실제로 부동산 있다, 없다? 부동산 없지요. 인간이 자기 몸 하나 누일 시공간 자체가 레위인들한테는 그것을 유업으로 주지 않았어요.
물론 레위인이 거할 땅은 있어요. 48개. 통합되지 않고 흩어졌지만. 또 도피성도 있고 줘요. 하지만 레위인의 본질은 그 땅에 산다가 아니라 나는 언약궤 붙들고 산다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붙들고 산다는 말이 멋있어 보이지요. 말을 살짝 바꿉시다. 나는 나의 죽음과 붙들고 산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게 바로 인간은 못해요. 왕이 하셔요. 예수님이 오셔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상황이 그대로 되도록 한 겁니다.
그 레위 지파가 언약궤만 있으면 돼요. 하나님의 약속만 있으면 돼요. 그러니까 이 땅의 수명이나 생명을 더 끌고 갈 질질 끌고 갈 필요 없어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그게 바로 솔로몬이 기도한 거예요. “하나님, 저 수명 연장 안 해도 괜찮아요. 제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백성은 백성이 아니니까. 백성은 사람 있다고 백성이 아닙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삼킴을 당해야 그게 백성이에요. 나는 성도가 아닙니다. 기름 부음이 나를 삼킬 때 성도 돼요. 말씀이 나를 삼킬 때 성도입니다.
그런데 요새 교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규정하지 않고 지 마음대로 규정해요. 교회 이십 년 다녔다. 어쩌라고? 나 복음 안다. 어쩌라고? 그게 무슨 성도에요. 복음을 획득했겠지. 교회 다닌 걸 획득했겠지. 그게 왜 성도 아니냐 하면 나를 설립하고 나를 조립하는데 교회 다닌 것, 시공간 속에서 내가 획득한 것을 덕지덕지 붙여서 나를 유사 성도로 조립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이야기 아니고 누구 이야기? my story 자기 이야기입니다. 자기 이야기는 입만 떼면 뭘 낳는다? 변명. ‘바빠서 못 왔습니다.’ 입만 떼면. 누가 오랬어요? ‘주의 은혜로 못 갔습니다.’ 이러면 얼마나 쉬워. 바빠선 못 간다 하지 말고 주의 은혜로 못 갔다하면 얼마나 좋아요. 안 좋은가? 지금 얼굴 표정이……. ‘내가 교회 발을 끊은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이런 말을 왜 못해. 자신만만하게.
솔로몬은 죽은 세상에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뽑아내느냐에 자기는 전력을 하면서 먼저 자기부터 포기를 합니다.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그 일천 번제의 모세 율법이 우리 아버지 다윗을 통해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그는 알았어요. 자, 계속해봅니다.
여호수아 4장 4절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 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그러면 언약궤는 몇 개에요? 한 개. 지파는 몇 개에요? 열두 개. 그러면 12가 되는 숫자를 지금 요단강 앞에서 12를 뭐로 변신시켜야 돼요? 숫자를 뭐로 합니까? 하나로 만들어야 돼요. 그럼 12는 개성이 몇 개겠습니까? 12지파 개성이 몇 개 되겠어요? 열두 지파니까 열두 개 개성을 뭐로 한다? 단 하나의 언약궤 개념으로 뭉쳐야 되겠지요.
인간이 자발적으로 그걸 하겠습니까? 자기 개성 드리겠습니까? 자기 고집, 자존심 버립니까? 안 버리지요. 그러니까 시공간에 위기가 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요단강 저쪽에서 물이 범람했어요. 이건 도저히 못 건너가요. 건너갈 수 없어요. 다시 뒤론 못 가요. 사막이니까. 절망이에요, 절망. 절망할 때 내 행함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내 행함이 내 구원에 애초부터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 순간이 내가 처리하는 그 이상의 과도한 위기가 왔을 때입니다.
인간에게 궁극적인 위기는 뭐냐? 자기가 사라지는 것, 죽는 거예요. 인간이 이해하는 시공간, 그 시공간은 언제까지 인간이 그걸 계산하고 염두에 두는가? 본인이 숨 쉴 경우에만 그래요. 죽고 난 뒤에는 그 시공간 하고도 작별해야 돼요. 결국 인간이 시공간을 이용하려고 애를 썼지만 인간에게 돌아온 것은 자기 죽음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죽기 위해서 삼일절 잘 보내고 있어요. 인간의 극단적인 개성을 보여주는 이런 시가 있어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많이 해라 표범 많이 해)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서 죽는(얼어서 죽어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 나면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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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왜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요)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이게 나의 my story 아닙니까)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타올라서 뭐하는데)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고독한 남자의 불타는 영혼을(남자 같은 소리하고 있다 정말)
양인자 썼고 조용필이 불렀던 <킬리만자로의 표범> 가사 내용이잖아요. 오늘 못 써먹을 줄 알았는데 써먹었네. 인간은 이 가사 내용이 전부입니다.
솔로몬은 왕이잖아요. 왕 됨을 포기한다고요. 내가 왕이 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받은 언약 앞에 나는 무식 그 자체라는 걸 인정하는 게 왕이에요. 여러분이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음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이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걸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의 결합니다. 그 상태는 기름 부은 상태에요.
솔로몬의 열두 개 돌이 하나의 기념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벌써 열두 지파가 돌 하나씩 해서 탑을 세웠다는 말은 결국은 모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의 구원은 없고 하나의 언약궤 취지를 위해서 그들은 열두 지파로 구성돼야 됐다는 거예요. 열두 지파로 구성됐다는 말은 치마폭처럼 어디로 모아져야 된다? 언약궤로 모아져야 돼요. 그 언약궤가 모시는 그곳이 뭐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여호수아 8장 30절,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자,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명기 27장에서 분명히 예언을 했지요. 모세가. 예언은 어디까지나 그 당시 이뤄진 게 아니잖아요. ‘뭐 예언이니까 될 수도 있고 안 되도 그만이지 뭐.’
사람들의 관심사가 자기 행복에 있기 때문에 예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요. 내 위주로 살지 예언 위주로 안 살잖아요.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말씀 위주로 안 살아요.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나 위주로 살잖아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열두 지파로 사는 게 아니고 딱 하나에요.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이름 있는 장소, 그곳이 어디다? 언약궤. 하나의 언약궤를 위해서 살아야 돼요.
그래서 그들은 예언대로 드디어 에발 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언약궤를 에발 산, 저주 산과 그리심 산, 축복 산 둘 중에서 ①언약궤는 그 가운데 둔다. ②언약궤를 에발 산에 둔다. ③언약궤를 그리심 산에 둔다. 몇 번입니까? 갑자기가 두 개씩 하다가 세 개씩 하려니까…, 언약궤를 에발 산에 두지요. 저주 산에 두지요. 산 중간에 두는 것도 아니에요. 에발 산에 둬요. 산을. 여호수아 8장 30절,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의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기능적 차이에요. 그 기능적 차이가 뭐냐? 에발 산의 기능이 아까 뭐를 선포한다 했습니까? 저주지요. 다시 말해서 저주를 선포한다는 것은 제단이 언약궤의 단이 우리 저주 산에 있다, 라는 것을 맞은편에 있는 그리심 산에 있는 지파들을 향하여 쏘아대는 거예요. 또는 세상을 향하여 말씀이 확산되는 겁니다. 그 점을 생각해봅시다.
저주 산과 그리심 산 중간에 따로 제3의 장소에 제단, 언약궤가 있는 게 아니고 언약궤가 어디 있습니까? 저주 산에 있지요. 제단이 여기 있어요. 그러면 제단이 있는 곳에 뭐가 나온다? 저주가 나온다는 것은 너희 모든 인간들아 너희들은 저주받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디로 오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라 이 말이죠.
제단에서 쏘아대는 게 뭐가 나옵니까? 복이 나와요, 저주가 나와요? 저주의 화살을 쏘게 되면 슈슈슈 하고 쏘아대면 인간이 말씀을 성경에 나오는 걸 알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인간사는 것이 억지로 살고, 인간사는 것이 처참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문제는 그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몰라요. 성경에 보니까 그게 바로 저주받은 모습이에요. 그게 바로 저주의 동네, 저주의 패밀리, 저주의 세상, 곧 지옥이에요.
어디가 지옥입니까? 울산. 아름다운 국가정원이 있는 울산이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살면서 지옥에서 서울대학 보낸다고 애 많이 썼습니다. 의대 보낸다고. 또 같이 지옥 갈 학부모들이 쌤이요 잘 봐주소, 해서 신경 억수로 썼을 거고. 교장 선생님부터 해서. 인간은 서울대학 외에는 갈 곳이 없어. 올해부터는 또 수정해야 돼. ‘서울대학 외에는 갈 곳이 없어’에서 의대 말고는 갈 곳이 없어. 의대 이천 명 증원하기 때문에 서울대학 학생 다 튀어나와요, 이제. 의대 가려고.
도대체 인간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가지요? 갈 곳이 없어요, 갈 곳이. 그냥 지옥 안에서 뺑뺑이 돌아요. 자식교육 그렇게 시켜놨어요. 명절 때 “너희 잘 있제?” “어머님 지옥에서 잘 살고 있어요.” 왜 이런 응답이 없어요? ‘지옥 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답변이 안 와요? 자식들 와서 세배하고 나면 덕담을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지옥에서 버텨라.” 이런 덕담. 돈 오만 원 주면서. 왜 그런 덕담이 오고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벗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어릴 때 장난삼아 했어요. 거북이 등껍질 벗기면 뭐가 나올까? 말로 하니 너무 잔인하다. 장난삼아 했는데 인간은 이 잔인함이 노골적이에요. 아예 말씀을 벗겨냈어요. 말씀을 벗겨내니까 생살에 누가 갖다 붙습니까? 귀신들이 갖다 붙은 거예요. 인간의 껍데기는 귀신 껍데기에요. 좀비 같아. 귀신들 뒤집어쓰고.
귀신이 얼마나 압박을 합니까? 돌이 떡 되게 하라. 인기가 있어야 인간답다. 세상 권력을 차지해야지. 이거는 내 삶을 중압감을 압박감을 주는데 정말 거친 숨을 쉬어도 존재의 무게, 마귀가 주는 삶의 무게를 견딜 수가 없어요. 김소월 시인이 쓴 유명한 시가 있어요. <진달래꽃> 있잖아요. 그 사랑의 가벼움이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인간적인 사랑도 이 정도 가벼움으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사랑이 뭐냐? 지 보기에 역겹거든 우습게 여기면 그냥 밟으소서. ‘죽어도 주님 사랑합니다.’ 왜? 나의 인생이 원천이 어디서 나온 저주인지 알았기 때문에.
그게 뭡니까? 말씀에서 나와요, 저주가. 모든 저주가 말씀에서 나와서 그 말씀에서 나온 그 대상자가 뭐냐? 저주받았지요. 말씀 받았잖아요. 그럼 말씀 받은 것을 다시 제단을 향하여 돌려드릴 때는 뭐로 돌려드려집니까? ‘심봤다! 복 받았다!’ 하는 것으로 돌려주는 거예요. 그래야 열두 개성이 하나로 응축이 되는 거죠.
이 삼일절에 참석하지 못한 여러 사람들은 주님의 그 사랑에 의해서 오늘도 밟히고 가족들과 처참하게 밟히면서 저주받은 시공간을 즐기고 있다가 나중에 집에 가면, ‘참 피곤한 하루였구나’ 하고 피곤한 몸을 침소에 누일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나를 구성하지 마세요. 나를 조립하지 마세요. 시공간에서 내가 획득한 것으로 크리스마스트리 만들지 마세요. 덕지덕지 자기 몸에 부착하지 마세요. 반대로 그걸 복이라 하는데 복을 말씀이 와서 뜯어내도록 허용하세요. 그 복은 내가 획득한 거예요. 정신 차려서 획득한 거예요. 정신 차리지 마시고 뜯어내서 정신 못 차릴 때 말씀이 다 뜯어내서 후벼냅니다. 코 후비듯이. ‘여기 언약궤 있네.’ ‘하나님의 일이 이 안에 들어있네.’
솔로몬은 그걸 감수했어요. 백성은 백성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백성을 내치진 않아요. 아버지가 기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기름 받음을 성전 세웠던 조건 하에 기름 부음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솔로몬 본인만, 아들도 아니에요. 나중에 아들들 나라 망해요. 본인만 뭐가 돼요? 성도가 돼요. 본인만 성도가 되니까 외연, 바깥의 범주 스케일을 넓힙니다.
성전을 가지고 넓혀버리면 거기는 백성도 아닌 자들이 뭐가 되겠어요?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언약궤 본인의 작업의 결과들이 생길 겁니다. 그 백성이 솔로몬의 자식이 아니고 다윗의 자식이 돼요. 다윗의 후손들이 됩니다. 그들에겐 뭐가 있느냐? 다윗의 등불이 있어요. 그 등불이 북쪽 나라 날아가도 남쪽 유다는 지켜줍니다. 등불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모세+백성들’ 같이 나왔지요. 여기서 하나 빠진 게 있어요. 모세도 있고 백성도 있는데 추가적으로 뭔가 하나 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누가 방향타 역할 합니까? 모세? 아니죠. 백성? 아니지요. 그들은 갈 곳을 모릅니다. 약속의 땅에 이정표 보고 간 게 아니에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합니다. 인도하는데 지리적으로 인도한 게 아니에요.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주의 이름에 복종하는 그 길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에요.
광야라 하는 것은 자기를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물도 끊어놨어요. 양식도 끊어놨어요. 고기도 끊어놨습니다. 게다가 아말렉 같은 미친 자들이 전쟁을 하겠다고 옵니다. 진퇴양난이에요. 내 인생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럼 자기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누굴 쳐다봐야 돼요? 모세를 쳐다봐야 되지요. 백성들은 모세를 쳐다봤습니다만 처음에는 원망으로 쳐다봤지요.
모세는 누굴 쳐다봅니까? 주님 쳐다봅니다. 나보고 어쩌라고요? 이게 인간과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운데 모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백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씀이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성도는 뭐냐? 약속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 그 약속에 의해서 인도받는 사람,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냥 홀몸인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들어붙어서 기름 부음이 들어붙었습니까? 말씀이 말씀대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을 이제는 그 말씀이 우리의 나의 잘남을 뜯어내고 발가벗기고 그래서 우리 안에 성령이 있음을 들춰질 때까지 저희들을 이끌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