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2장 30절 (현실의 현실화) 240401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2장 21절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 스스로 자기와 인간관계를 일방적으로 연결시키죠. 여기 21절에 보면 “보라 나를 파는 자”, 나를 파는 자에요. 나, 예수님입니다. 어떤 진실을 규명을 할 때에 내 중심으로 진실을 볼 수도 있죠. 3+5=8이다. 누가 봐도 이건 7이 아니고 8 맞다. 이거는 내가 보기에 진실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보고 3+5=얼마지요? 8,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고 “나를 파는 자가 나와 함께 있다”. 아무리 가룟 유다가 수학 박사라도 주님께서 수학을 얼마나 잘하느냐 물리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가룟 유다하고 나하고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을 주님께서는 이걸 진리 또는 진실 이렇게 규정하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끼리 얼마나 친하고 잘 사느냐 그런 건 묻지 않지요.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느냐가 결정적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21장에 보게 되면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라고 되어있고 그 다음에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이 무너지는 거예요. 이 세상 천지가 대자연 천지가 무너지는데 이 무너짐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무너지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과 관련 있다는 거예요. 너하고 관련 있어서 무너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하고 관련해서 무너짐이 있다는 겁니다. 그날이 뭐냐? 인자가 올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요. 누가복음 21장 25,26절에 보면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라고 나와 있잖아요. 누구 때문에 흔들리느냐는 거예요 이게. 너 때문에 흔들리는거야? 아니면 부처 때문에 흔들리는거야? 마호메트 때문에 흔들리는거야? 누구 때문에 흔들리죠?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이 대자연이 흔들리는 게 된다는 거예요.
그럼 진실은 뭐냐 하면은 진실은 내 중심으로 3+5=8이다 이거 백날 알아도 이건 진실이 돼요? 안돼요? 진실이 아니고 예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가 이게 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예수님 중심으로 이걸 보지를 못해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중심을 보면서 대자연, 우주 대자연과 자기가 직접적으로 이렇게 연결 시켰어요. 직접적으로 이렇게 관련 있다고 본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쫓겨나서 땅의 토지를 갈면서 이마에 땀을 흘릴 때까지 살면서 그들의 관심사는 이 환경이 이 자연환경이 나에게 얼마나 식량을 공급해줄 수 있느냐?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느냐에 전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관여하고 이런 건 모르죠. 자기 살 궁리를 생각하니까 인간이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이 대자연, 이 대자연이 무너지면 자기는 못 살잖아요. 어쨌든 간에 대자연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길 바라는 이것 때문에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에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그렇게 이야기할 때는 이거는 뭐냐 하면은 현실 재조정. 현실을 재조정에 나서야 된다 이 말이죠. 그동안 너희들이 한 현실은 자기의 살 궁리, 자기중심의 현실관이었다면 이걸 뭘로 조정해야 돼요? 예수님 중심으로 조정을 해야 돼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현실의 현실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제대로 새로 중심 잡아서 정리할 필요 있다 이 말입니다.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현실화가 없어요. 현실 그 자체로 그게 인간은 전부거든요. 굳이 현실을 현실화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는 작업이 현실을 현실화시키는 작업에 나섭니다. 기존의 인간의 중심의 현실에서 예수님 중심의 현실로서 그것을 전환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전환시킬 때 어떻게 전환을 하느냐? 이 대자연이 뭐냐 하면은 공간이잖아요 이 우주가. 3차원이죠. 3차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2차원으로 바꿉니다. 2차원으로 바꾸고 그 다음에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몸으로 바꿔버려요. 이게 바로 현실의 현실화에요. 현실이 현실화되지 않으면 이게 바로 환상이에요. 환상. 망상이 돼요. 왜냐 하면은 이것은 인간의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봤을 때 현실은 3+5=8이라고 하지요. 이게 진리라고 했어요? 진리가 아니라고 했어요? 이게 진리가 아니지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3+5가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망상인 거예요. 주님의 시작하는 현실의 현실화에 인간들이 알고 있다 자부하는 물리적 수학적 공식 같은 것이 현실화에 전혀 끼어들 수가 없는 겁니다. 그 현실을 모르니까 아까 누가복음 21장처럼 이 세상이 와르르 무너질 때 세상이 왜 무너지지? 이 안정적인 세상이 왜 무너지지? 아까 했잖아요. 세상이 왜 무너진다 했습니까? 그거 누구 때문에 무너진다고 했지요? 인자가 임하니까 무너지는 거예요.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방문하니까 무너지는 거예요. 그게 진실이다 이 말이죠. 내가 똑똑해서 뭘 이렇게 알고 내가 뭘 알고 연구하고 탐색했다 이거는 진실이 아니에요. 그건 현실도 아니고 망상이고 예수님과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이 대자연 3차원 세계가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몸과 관련되기 위해서 먼저 2차원부터 먼저 걸치고 3차원 넘어와요. 2차원 이게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 3차원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된다는 말은 2차원을 그냥 이렇게 이해하면 쉬워요. 필름입니다. 필름. 필름은 인화지 뒤에 뭐가 있느냐? 이미지로 붙어 있지요. 이미지. 3차원 공간이 3차원 우주가 그냥 제대로 그냥 3차원대로 움직이도록 그렇게 허락한 게 아니고 그 안에 기차가 달린다고 봅시다. 3차원 안에 기차. 광야를 지나는 기차. 이게 무슨 역사죠? 이스라엘 역사죠. 언약을 싣고 달리는 기차, 그 언약의 작용하는 그 따라서 멀쩡한 이방민족들의 운명이 파멸하거나 항복하거나 골로 가거나 그들이 무너지거나 안 그러면 그들이 항복하거나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plan 이게 뭐냐 하면은 면 또는 내재면. 이게 2차원이에요. 필름 면. 필름 안에 보면 필름 안에 보면 뭐가 들어 있어요? 촬영한 이미지가 들어 있잖아요. 이미지. 딱 들어붙어있지요. 기차처럼. 현실을 2차원으로 압축시켜놓아가지고 이걸 이스라엘 역사에 실어서 그냥 마지막까지 종말까지 내딛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구약 역사에요.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겁니다. 현실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3차원을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되도록 농축시켰다 또는 축약시켰다 또는 거기에다가 집대성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특이한 역사에요. 특이한 역사인데 어떻게 특이하느냐 하면은 일단 이스라엘 역사는 없는 나라에요. 없는 민족인데 생겼다. 없는 민족이 생겼지요. 없는 민족이 생기면서 그 나라가 나중에 도로 없어진다. 잠깐 있었는데 없어져요. 잠깐 있으면서 없어지면서 이 와중에서 드러나는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은 언약의 실 내용, 실질 내용. 실제로 언약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실제 내용이 구체화되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남은 자, 남은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만들었으면 다 구원해야 될 건데 하나님 구원하지 않아요. 계속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잘라낼 때 잘라내는 그 도구가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엘리야 시대 때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지만 바알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7천명 있었어요. 많아 보이지만 사실 얼마 안돼요. 그런데 그게 그 표현이 로마서에 나옵니다만 바알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남은 자가 된다는 말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마땅히 모든 인간은 바알에 굴복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관으로서는 이게 마땅하다는 거예요. 바알의 유혹을 이길 재간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게 로마서에서 뭐냐 하면은 은혜로 남았기에 7천명이다. 은혜. 하나님께서 따로 빼돌린 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해서 은혜의 작용으로 언약의 작용입니다. 은혜의 작용으로 빼돌렸는데 남은 자가 7천명 남아있다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4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들이 똑똑하고 믿음 좋아서 남겨진 게 아니고 하나님이 개입했더니만 7천명 남은 거예요.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그러면 남은 자가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하나님에 계속 따라 붙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바알 섬기면서 하나님을 떠났는데 그 떠남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떠나지 못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드러낼 자를 계속 남겨둔 자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났고 엘리야 시대 때는 7천명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7천명은 어떤 고백을 해야 되느냐 하면은 로마서 11장 6절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남은 7천명이 해야 될 고백은 뭐냐? 나 착해서 남은 게 아니라는 고백을 해야 돼요. 내가 훌륭해서 내가 바르게 살아서 남은 자 되었다는 고백을 하지 말아야 될 자들이 7천명 남아있는 겁니다. 이걸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의 필름으로 보게 되면 필름 자체가 7천명이지만 나중에 가면 더 적어져요. 점점 더 적어지는 거예요. 적어지다 가 특징이 뭐냐? 아까 이스라엘 없어진 나라죠. 남은 자가 하나도 없어요. 남은 자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이유가 어떤 어떤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은혜를 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은혜를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의 하신 일 그 자체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언약대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작용을 한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 역사가 이렇게 결국 하나도 없다는 말은 마지막에 남은 자가 단 한 사람만 남게 돼요. 한 사람만. 그러니까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3차원에서 시작했다가 2차원, 면. plan, 내재면. 현실을 필름처럼 보고, 필름 앞뒤로 현실의 모든 이미지를 앞뒤로 꽉차있다고 보시면 돼요 현실이. 필름을 이렇게 흔들어버리면 세상 현실도 같이 흔들려지는 거죠. 이스라엘 역사를 흔들어 버리면 덩달아 세상역사, 나머지 이방민족도 같이 2차원 면을 따라서 흔들리는 거예요. 세상을 3차원으로 보지 말고 2차원으로 보자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납득이 될 거예요. 왜? 그들은 언약에 이미 주어진 언약, 이미 이루어진 언약 앞으로 이루어질 언약 그러니까 뭐가 돼요? 하나의 시간의 계열이 돼요. 시작, 끝이 있는 연속적인 직선이 돼요. 직선은 공간이 아닙니다. 그냥 연결해보면 그냥 선이죠 선. 면적을 가지면 이건 하나의 내재면. 흔들어 버리면 필름처럼 흔들어지지요. 필름을 옆으로 보면 뭡니까? 하나의 선이 되지요. 언약의 시작과 완성, 그게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내내 외쳤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언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게 선이란 말이죠. 선. 우주선 타고 목성에 가고 그거는 3차원적이죠.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은 이 언약이 미리 주어진 언약이 앞으로 어떻게 시간 따라서 마지막 때에 어떻게 성취되느냐. 이게 그들의 선지자들의 관심사입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사죠. 이 2차원의 이미지를 담아버릴 때에 아직도 정신 못 차려가지고 그 언약 속에 들어가서 미래의 예언된 언약을 기다려야 될 텐데 지금 나는 얼마나 잘났느냐 이렇게 우긴다면 그건 흔들어버리면 환상 덩어리로 다 떨어져나가죠. 환상, 3차원으로. 내 중심의 3차원은 다 떨어져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에 남은 자 한 명도 없고 남은 자 누구밖에 없다? 모든 언약의 성취자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3차원, 2차원 그다음 뭐냐? 1, 한 분. 오직 한 분만 남게 되는 거예요. 모든 언약의 성취자 한 분,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21절에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어떻다고요? 언약의 유일한 남은 자인 나에 대해서 저주하고 나를 팔아먹으려는, 팔아먹는 이유는 그만큼 밉다는 거예요. 싫다는 겁니다. 싫으니까 팔아먹지요. 좋아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 한 분을 싫어서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고 죽음에 넘기도록 팔아먹은 거예요. 그럼 죽는다는 것은 이 현실세계에서 소멸되는 거죠. 날라가버리죠.
그러면 마지막 남은 자인 예수님이 가룟 유다한테 팔려서 십자가에 죽어서 날라가버리면 남아 있는 현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어떻게 되겠어요? 자연세계와 더불어 몽땅 다 와르르 무너지죠. 누가복음 21장 35절 말씀처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제 이 세상의 재앙 이유를 아시겠지요? 현실이 한 분에게 응축되어있는데 3차원 공간이 현실인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은 현실을 현실화시켰다. 모든 현실을 예수님 몸 안에다가 다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했잖아요. 지금껏 있었던 세상의 해와 달, 예수님 마지막 오실 때 해와 달과 별 다 무너지지요. 별들도 무너진다 이 말이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별, 해와 달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존재할 때 존재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이 존재했던 겁니다. 이게 마지막 때에 드러난 사실이죠. 해와 달과 별들과 모든 자연세계. 그러니까 현실세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춰주는 일종의 스크린이죠. 영화 스크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때문에 3차원 이 현실이 있다면 예수님이 사라진 입장에서 다시 예수님이 오시면 그동안 제대로 된 무너질 현실 말고 새롭게 될 현실이 예수의 몸을 통해서 복구가 되겠습니다. 영광스런 현실의 복구. 창조세계의 복구. 이 말은 기존의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충분치 않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확실치 않았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하게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때 예수님의 주 되심을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와야 현실이 주님 중심으로 복구가 되어야 가능하겠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현실복구에 있어서의 관심사는 어떤 관심사냐 하면은 이 세상을 창조의 원래 뜻에 온전하게 합치되지 못한 이 창조물,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작업에 나서는가?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은 죄, 무엇이 죄냐? 무엇이 의냐? 죄와 의에 대해서 기준세우는 작업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3+5=8 나는 맞췄어! 나는 진실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진실은 뭐냐 하면은 무엇이 죄며 무엇이 의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이 작업이 진실이에요. 그 무엇이 죄냐? 무엇이 의냐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할 때는 의가 되고 예수님과 함께 못할 때는 이게 죄가 되겠지요. 주님의 관심사가 죄냐 의냐 관심이 그렇게 가는 거예요. 왜? 이 창조가 제대로 창조의 본 뜻, 예수님 중심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쪽으로 나가시는 거예요. 선과 악의 구분 짓는 것부터 주께서는 계시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28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라고 되어있지요. 이거 보세요. 예수님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눠져요. 한 쪽은 악, 한 쪽은 선. 또는 하나님의 의. 이런 식으로 이제는 예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중심으로 일할 때에 그러면 여기 12제자들이 전부 다 가룟 유다보다 더 훌륭한 사람입니까? 다 의인이에요? 그들 남은 자 아니에요. 남은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12지파를 다스립니까? 다 죄인인데. 그것은 주님의 하시는 일로 인하여 계속해서 기존의 무너질 세상, 이 세상이 무너집니다. 아까 21장 봤지요. 해와 달 다 무너지지요. 인자 올 때 다 심판받지요. 이 무너질 세상에서 계속해서 질문을 유도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행위를 통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이 질문을 하도록 그렇게 환경이 조성되어있는 겁니다.
자,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기대하는 거예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무엇과 연계된다는 거예요? 답과 연계되지요. 질문을 인간들이 하고 예수님이 하는 일을 통해서, 답은 누가 제공하고? 주님 쪽에서 제공함으로서 주님께서는 12지파에 앉을 천국 백성들을 드디어 구성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질문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럼 이걸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일에 대해서 관심 있는 자는 주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는 무엇이 제공되는가? 답변이 제공될 것이고 그들은 바로 예수님 중심에서 벌리는 새로운 현실의 현실화, 제대로 된 새로운 현실복구에 대해서 그들은 다스리는 자, 예수님처럼 다스리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강의 끝. 이게 주님의 작전이에요. 주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시작을 가룟 유다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가룟 유다의 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이 이 세상이 필히 무너져야 된다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으니까 다른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3절에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질문을 하게 해요. 누구지? 누구지? 예수님을 팔아먹다니. 우리 가운데 그런 배신자가 있단 말인가? 질문을 하게 하는 거예요 질문을. “서로 묻되”. 그러니까 가룟 유다의 이 작업조차도 예수님의 개입된 자율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게 22절입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이스라엘 언약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필름같이 2차원입니다. 모든 이 세상의 모든 3차원 현실이 2차원 언약 속에 2차원 속에 다 포함이 되어있지요. 그래서 그 언약에 보면 뭐냐 하면은 뭐가 나옵니까? 복이 나오고 저주가 나와요. 복과 저주가 나와요. 복과 저주가 되려면 샌드위치같아요. 여호수아에 그런 게 있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하는 대목이 나와요. 여호수아 1장 한번 봅시다. 7절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율법이 패널, 그런 2차원적인 경계선 라인에 구실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라인의 구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줄을 쭉 긋는 것과 똑같아요. 줄을 쭉 긋는 것. 줄을 쭉 그어버리면 3차원 세계에서 네가 과연 2차원 라인에 들어올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보고 “줄 똑바로 서서 따라와”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줄 똑바로 서서 따라와. 3차원 공간 좌우로 살피지 말고. 초등학교 애들 소풍갈 때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얼마나 합니까. 참새 짹짹. 오리 꽥꽥 왜 자꾸 합니까? 라인 따라 오라는 거예요. 라인 따라. 라인 따라 오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의 폭이 돼요. 폭. 그걸 세상 사람들은 이런 소리해요. 너 왜 자꾸 고지식해! 이래요. 그런 소리 안 들어봤습니까? 뭐 신앙생활 해야 듣지. 너 왜 고지식해.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 다른 것에도 좋은 가치가 많아. 좋아 복음 좋지만 다른 것도 좋다고 이야기해. 이런 식으로 압박감이 안 들어오던가요? 이것도 좋지만 저것도 좋다는 건 어떤 경우냐 하면은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볼 때 그래요. 언약 중심이 아니고 라인 중심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봐 버리면 두루두루 3차원에 내가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하는가? 우리는 라인 중심에서 질문을 안 해요. 내 환상에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것만 따지면서 질문을 하는 거예요. 내 환상에. 이 무너질 세상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세상은 멀쩡하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나도 멀쩡하고 그러면 됐지 뭐. 제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다들 여기 있잖아요. 진실이 왜 필요하지? 한번 답변해보세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잖아. 나는 여기 있는 나를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진리, 진실이 왜 필요하죠? 내가 여기 있는데.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데. 진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요 그다지.
내가 여기 있다에서 내 중심이잖아요. 여기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실생활이라고 합니다. ‘실생활’. 이 실생활과 관련되는 사자성어가 뭐냐 하면은 ‘생활물가’에요. 실생활, 생활물가, 내가 있다. 우리가 생활에서 이것 3개 빼놓고 뭐 더 중요한 것 있습니까? 있어요? 교회 50년 다니고 뭐 복음 많이 알고 그딴 게 무슨 소용 있어요. 지금 생활물가가 올랐느냐? 양파 값? 대파 값?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우리한테 중요한 게. 석유 값, 기름 값, 전기세, 실생활.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이것보다. 오늘 참석 안하신 분들은 다 이거이거. 또 참석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주께서 못 가게 한 사람도 있지만. 지금 그 사람들의 관심사가 뭐에요? 생활물가 아닙니까. 돈 수입은 한정되어 있고 누가 살아야 돼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누가 살아야 돼요? 내가 살아야 되죠. 이것만 해도 충분하잖아요. 이 관심사가 99.9999999%에요. 노래있어요. 99.9. 복음이고 뭡니까. 0.0000001% 잖아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중심이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뭐 중심입니까?? 내가 여기 있음이 중심이에요. 내가 여기 있음 중심. 내가 여기 멀쩡하게 건강하게 잘 살면 되지. 물가 오르더라도 수입되면 내가 무슨 걱정 있어. 애가 공부도 잘하고. 그런데 진실, 진리 쓰잘데기 없는 거 왜 알아야 돼요? 알 필요 없지요.
거기에 대한 답변은 누가복음 21장 35절에 나옵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게 무너져요. 내가 여기 있음, 3차원 공간이 이게 무너지니까. 무너지는 징조가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난리도 아니고 특히 25절에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달과 별도 다 무너지니까 문제잖아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은 12제자들도 사실은 여기에 속해요. 12제자가 하나님의 율법도 알고 다 알잖아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유대인이 백날 율법을 알고 해도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가 모든 인간 언약이 인간을 없애버렸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언약이 언약 지키겠다는 이스라엘 역사를 없애버렸어요. 이스라엘 역사만 없앤 게 아니고 언약을 지키신 누구도 없앴어요? 예수님도 가룟 유다가 와서 없애버렸잖아요. 그러니까 참 이런 거예요. 그냥 메시아 없다 치고 그냥 살자 이거예요. 메시아 없다 치고 그냥 살자. 이게 왜? 그게 속 편하니까. 나는 나 하는 대로 살래. 요즘 라일락이 많이 핍니다. 휴대폰 들고 라일락 꽃이 이쁘다고 찍어요. 찍을 때 그 라일락의 꽃 모습은 찍을 수 있는데 향기는 찍힙니까? 안 찍힙니까? 향기. 이거 발명해야 돼요. 냄새나는 필름만들어야 해. 라일락 향기는 안 찍히지요. 이 라일락이 존재한다 이쁘다 좋아요. 하지만 라일락은 향기 내는 맛으로 사는 거잖아요. 향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왔지요 목수의 아들로. 예수님이 계시다. 나도 있지. 이거는 막 가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풍겨내는 언약적인 그 반응들 그러한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향기를 지금 뿜어내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러다가 말겠지 뭐. 그러다가 말겠지 이래요. 우리는 이 세상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향기도 없으면서 눈에 보이는 사진만 찍고 실제론 향기가 전혀 없어요. 자기 중심이니까. 없다는 것을 우리는 뭐로 표현할 수 있느냐? 반복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반복인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반복이 있어요. 1. 습관성 반복. 자전거 타고 이런 것. 헤엄치는 것, 운전하는 것, 오래 하다보면은 딴 생각해도 운전할 수 있어요. 몸에 배여 있는 습관성. 2. 기억성 반복, 이걸 가지고 지식이라고 합니다. 지식. 성경지식은 내가 다 안다. 다 안다. 마태복음 7장 나오는 이야기 다 알아요. 지식이에요. 지식. 이 반복이 내 중심을 바꾸지 않아요. 여전히 이런 습관성 반복, 기억성 반복도 굳건하게 내 중심으로 그냥 가는 겁니다. 세 번째는 이건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반복인데 3. 죽음의 반복.
지금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장 이야기할 때 어느 제자도 감히 짐작 못했어요. 예수님께서 내뱉는 이 말씀이 예수님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어느 제자도 짐작을 못했습니다. 죽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발언하고 있는 거예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꺼져버리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라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기존의 현실세계를 현실화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을 뭐로 바꾸느냐? 이 세상을 죄의 천지로 만들어요. 죄의 천지. 몽땅 악의 천지.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가 아니라 모두 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로 만드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은 이 지식적 반복이 되게 되면 이게 1,2번은 내 중심이거든요. 내 중심이라는 것은 내가 굳이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중심이에요. 내가 안 죽으려고 복음 이야기하는 것은 뭡니까? 주님 중심이에요? 내 중심이에요? 내 중심이에요. 나 살겠다고 복음 연구하는 것은 내 중심이란 말이죠. 내가 왜 죽어? 내가. 이런 것도 아는데 이런 것도 기억하는 내가 왜 죽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도로 예수님을 죽여버린다고요.
모든 인간을 죄인 되게 하심으로서 내 중심으로 버틸 수 있는 그것은 이 세상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그 원인과 내 중심으로 사는 그 이유와 원인과 서로 통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내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계속 여기 있는 나를 계속 있게 하잖아요. 그게 바로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게 환상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내가 잘되기 위해서 이 기억성 반복가지고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은 여기서 의인과 죄인을 인간들이 구분해요.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면서 구분하는 본인은 반드시 어디에다가 집어넣겠습니까? 의인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나쁜 인간이 다 있나. 이거는 죽여야 돼. 바리새인의 기도 나오지요. “나는 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간음하지 아니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습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자기중심이잖아요. 나는 여기 있고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선한 존재로 있고 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렇게 한 것이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이 율법에 비출 때 나는 선하다는 거예요. 왜? 나는 율법을 지켰으니까. 주님 보기에는 누가 율법대로 살았대?! 그 율법이라는 언약, 언약은 예수님만 남은 자니까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가 없어요. 율법의 완성이 언약의 완성이 나한테 주어졌을 때 그 주어진 결과가 뭐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겁니다. 그럼 이 땅에서는 진리 없는 세계가 돼요. 아예 없어요. 진리가 없어요. 진리가 없고 남은 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달랑 그 하나가 남는 겁니다.
그럼 누가복음 22장부터 쭉 나오는 이야기는 제자들이 이 이야기를 할 때 알아먹었어요? 못 알아먹었어요? 전혀 못 알아먹는 거예요. 33절에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지금 무슨 소리하는지 못 알아들어요. 왜냐 하면은 31절에 사탄이 개입되어있었던 거예요. 사탄이 개입되어있는 그 상황, 악마는 눈에 안 보이죠. 인간에게는 대자연과 실생활과 생활물가, 거기에 무슨 악마가 있어요. 시장가서 악마 한 그램에 얼마입니까? 이런 거 안 묻잖아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환상 속에 있는 거예요. 나는 착하다는 환상 속에. 그걸 가지고 28절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환상, 시험, 유혹. 악마가 뒤집어씌운 유혹 속에 나와 함께. 너는 모르지만 그때 나는 너희들이 당하는 그 유혹에 그때 나도 같이 있었잖아. 주님이 같이 있는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12지파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직 그들은 몰라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이 환상이라는 게 얼마나 우리를 뒤집어씌우는지 습관성 반복, 기억성 반복. 그러면서도 세 번째는 싫어해요. 살기 위해서 첫 번째 두 번째 들어가요. 세 번째는 싫어요. 이 환상, 이 환상은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인간의 환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강남-누가복음 22장 30절 (현실의 현실화) 2404016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2장 37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불법자의 동류.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인밖에 없잖아요. 죄인밖에 없다 이 말이죠. 지금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언약대로 뭐냐 하면은 죄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의인으로 바꾸는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남은 자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지요. 남은 자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럼 현실을 현실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부터 해서 현실로 확대시켜 나갈 필요가 있어요. 예수님 현실. 그럼 전의 창조 전의 현실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물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걸 알고 있어요. 왜냐?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 이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없어져야 창조가 완성되지요.
왜냐 하면은 천국에는 이제는 선악과나무가 없어요. 생면나무밖에 없습니다. 두 개의 나무가 하나로 종합이 돼요. 완성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럼 기존에서는 따먹지 말라는 거예요. 따먹지 말라 누굴 겨냥했느냐 하면은 창세기 3장 15절에도 나오지만 그게 바로 사탄과 관련되어있어요. 악마와 관련되어 있고 그 악마가 해야될 일이 뭐냐 하면은 모든 창조물 세계를 시험에 들게 만들어요. 그러면 악마의 의해서 시험에 들게 되는 그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작전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악마의 시험에 빠지고 빠진 시험의 능력을 충분하게 해치고 거기서 끄집어낼 때 누가 끄집어내느냐에 따라서 그 끄집어낸 사람이 의인이 돼요. 의인이 끄집어내면 의인 되고 보통 사람이 끄집어내면 보통 사람 되겠지요. 그런데 오롯이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의인 예수님만 남은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끄집어내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의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예수님과 예수님 사이에 예수님1 예수님2 사이에 죄인과 동류가 된 예수님과 거기서 벗어난 의인된 예수님의 주님에서 주님으로 가는 그 과정, 주님으로부터 주님1 주님2로 가는 과정 이 절차, 이 필름, 이 절차가 죄인 속에 들어가면 의인되는 거예요. 죄인 속에 들어가면. 죄인의 동류라고 하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이사야 53장12절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왜 주님께서 범죄자 중에서 하나가 되느냐. 실상은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은 자기 백성 보고 너의 위치가 어디에 있어야 되느냐를 말씀해 주는 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우리 위치가 어디입니까? 의인의 위치에요? 범죄자의 위치에요? 범죄자의 위치죠. 그런데 아까 제가 강의할 때 그 범죄자가 본인이 범죄자라고 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지요. 왜냐 하면은 악마가 뒤집어씌운 유혹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나는 착한데 저 인간은 죽여야 돼 나쁜 놈이야. 나름대로의 선악 체체가 가동시키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 자체가 뭐냐? 시험든 거예요. 자기는 착하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착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남들은 죽어도 나는 살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아까 원칙 다시 해볼까요. 1. 나는 여기 있다. 2. 실생활. 인간에게 실생활은 나의 확대된 현실이에요. 내가 여기 있으면 뭐합니까? 나가 돈을 벌어야 밥 먹고 살지요. 이게 뭡니까? 내가 현실에 쳐들어가는 거죠. 사람들 만나고 나를 위한 현실이 내 나름대로의 소박하나마 스스로 가만있지 않고 확장시키는 겁니다. 어서 오세요. 내 현실의 확장이죠. 내 현실의 확장. 아이고 물건이 비싸네. 갑자기 기존의 현실 생활물가와 내가 관련성이 있는 겁니다. 이 환상, 이 환상에 대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낍니까? 못 느낍니까? 못 느끼죠. 못 느끼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못 느끼는 이유가 내가 사는 게 참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참 사는 게 힘들고 괴롭고 쓸쓸하고 그럴 때는 뭐가 필요해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이게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준비한 노래가 이 노래. ‘환상’입니다. 인간의 환상을 어떤 식으로 표현했는지 보겠습니다.
for my lady 무디 블루스가 노래한 ‘for my lady’
My boat sails stormy seas 내 배는 폭풍의 바다를 항해해요
Battles oceans filled with tears 전투의 바다는 눈물로 가득하죠
At last my port's in view 마침내 (나의) 항구가 보이고
Now that I've discovered you 이제 당신을 발견했으니까요
Oh I'd give my life so lightly 오. 나는 내 삶의 무게를 바칠 거예요.
For my gentle lady 내 상냥한 여인을 위해
Give it freely and completely 자유롭고 온전하게 주겠어요
To my lady 내 여자에게.
여기까지.
나중에 여러분 들어보세요. 1976년도 노래인가 그럴 거예요. 이 가사 내용을 보게 되면 인생의 험한 것 가운데서 뭘 원하느냐 하면은 나의 모든 상처가 사라진다. 내 상처는 오직 내가 원하는 고결한 숙녀를 만날 때 내 상처가 비로소 해소가 된다고 환상, 꿈을 갖게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가사에 보면 각자의 꿈을 그녀와 공유해보세요. 그녀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오 마음 편히 내 인생을 뭐하겠다? 바치겠어요. 고결한 나의 연인 당신에게. 이 가사에 의하면 그 큰 항해하는 힘든 바다 같은 이 세상에서 마음 편하게 내 몸과 마음을 갖다바칠 누구? 고결한 나의 여인 숙녀 같은 여인을 만나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더는 고민이 없고 행복하겠다는 그 노래에요. 환상이죠. 왜 환상이냐 하면은 고결한 숙녀, 나의 여인 딱 어떤 연상이 떠올라요? 일단 살찌면 안돼요. 빵 많이 먹어서 뚱뚱하면 안돼요. 고결 아닙니다. 탈락입니다. 벌써 환상이죠. 그 다음에 고결한 여인은 배관 장인이나 하수도 공사하면 안돼요. 밥도 숟가락 말고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어야 돼. 술 담배하고 이런 고결한 숙녀는 없어요. 조건을 보세요. 조건이 너무 일방적이에요. 고결한 숙녀가. 완전 강수지. 너무나 일방적인 자기중심의 이상 모델. 이상적인 모델. 여리여리하고 일단 허리는 가늘고 봐야 돼요. 허리는 가늘고 맨날 바지 입고 돌아다니면 안돼요. 항상 무릎 밑에까지 오는 치마 입어야 돼요. 이게 for my lady. 변진섭 노래하고 다른 겁니다. 다른 노래에요. ‘숙녀에게’하고 달라요.
이런 노래로 자기를 보호할 때 그 이런 고결한 숙녀 같은 환상을 누가 만들어 내느냐? 마귀가 만들어내요. 마귀가 만들어내고 거기에 마음 빼앗기게 만들 때 그걸 가지고 시험 들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시험 들었다. 내 환상에 내가 미쳐버릴 때.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for my lady’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틈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원하는 여인상을 내가 만들겠다는데 예수님이 왜 거기 끼어듭니까? 이 현실은 나의 실생활의 확대, 내가 아플 때 괴로울 때 위로할 수 있는 이상형 이상적인 나의 여인상. 내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사랑하고 싶은 그런 여인상 그것만 족한 거예요. 그거면 충분한 거예요. 여자도 마찬가지죠. 지독하게 나만 사랑하는 남자. 나랑 밥먹을래?! 나랑 죽을래?! 하는 소지섭 같은 쎄게 나오는. 우유부단하지 않고 올라면 오고 갈라면 가라가 아니라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같이 죽을 수 있다는 그런 강단이 있는 남자. 그 강단 있는 남자가 또 뚱뚱하면 안돼. 또 키 작으면 안돼. 키 커야 돼요. 180이상 돼야 돼요. 항상 멋있게 입어야 되고 가끔 오토바이 타줘야 돼요. 막 뒷자리에 태우고요. 이것도 환상이죠
그러니까 아까 습관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그런 사람을 원한다는 말은 이미 인간은 뭐가 됐다? 그런 현실에 습관화 되서 푹 젖어든 거예요. 그럼 그 습관은 어디서 온 겁니까? 내가 속해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전염된 겁니다. 전염된 거예요. 전염된 것을 어렵게 이야기해서 ‘동일시’. 동일시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될 수 있는 대로 남과 틀어지지 않고 남이 생각한 것과 일치되려고 애쓰는 내 처신을 말합니다. 남과 다투지 않고 남한테 어긋나지 않고 그 분위기에 흡수해서 그 분위기가 주는 안정적인 권세 앞에 권세 속에 나도 안정 있게 거기서 끼어들어서 안정적인 나의 생활을 보장받고자 하는 그러한 습성. 이게 동일시에요. 될 수 있는 대로 마음 맞춰서 생각을 맞춰서 말이 서로 통해서 하나 되기를 소원하는 거예요. 나를 왕따시키지 않고 품어줄 수 있는 그런 조직이나 단체 그런 가족에 속하고 싶은 충동. 그게 바로 동일시에요. 세상에 그걸 가지고 유혹 받았다고 악마의 유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제 말은 뭐냐? 어떤 인간도 자기 죄에서 벗어날 위인은 없고요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겁니다. 밤에 꿈을 꿔도 어떻게 하나가 되어가지고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내 모습을 꿈속까지 등장해요. 남들이 나를 인정해주고 알아주고 환영해줄 때 비로소 세상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겁니다. 그걸 어디서 보장해주죠? 교회에서 보장해주죠. 교회에서. 사랑하는 주님 앞에~~~같이. 교회에서 보장해주는 거죠. 형제 환영해줍시다 박수 치시고 이런 식으로. 우리 교회는 당신을 인정할 준비가 만반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번만 딱 와도 어디 사십니까? 관심 가져줄 때. 이 말은 당신의 마음을 우리 교회에 여전도회에 맡기세요. 우리가 당신의 생활에 불편함 어려운거 우리가 조언해드리겠습니다. 준비가 되어있지요. 그래서 교회가면 교인 돼요. 교회가면 교인되지요. 성도가 되는 게 아니고 교인된다고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결코 교회는 자기 부정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긍정의 더욱 더, 이 동네는 긍정해도 괜찮아요. 우리 다 용납해줍니다. 얼마나 사회에서 찌들려서 억눌리면서 살아왔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서 뭐든지 다 용납해줍니다. 그렇게 받아주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 동일성, 동일시는요 뭐냐 하면은 불연속성이 없어요. 뭐가 없냐? 단절이 없어요. 나의 소망과 주님의 소망 사이에 이게 끊어짐이 없이 순탄하게 계속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진다는 거예요. 성화 되고 성화 되고 성화 되게 되면 나중에 천국에 골인된다. 중간에 끊어주는 게 없어요. 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세 번째 ‘죽음의 반복’이 없는 거예요. 너 죽어야 돼. 죽어야 돼. 매일 죽어야 돼. 이 죽음의 반복이 없어요. 끊어짐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그들은 끊어짐이 없이 불연속성이 없이 단절이 없으니까 동일시하면서 내가 여기 있다면 점점 더 지식을 아까 두 번째 기억의 반복이죠. 기억은 자꾸 지식을 누적시키고 비축시키게 만들어요. 계속 쌓이는 거예요. 이렇게 지식들이 계속 쌓이죠. 쌓이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겁니다. 문장을 적어볼게요. 사건을 총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해답이 없다. 사건을 총체적으로 알지 못하면 해답이 없어요. 안다 안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 남아있는 것이 미지라는 것이 있잖아요. 아까 동영상 했지요. 안다고 했지만 어디까지 알아야 되지? 그럼 그거 모르면 제대로 해답 내렸다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내리죠. 한꺼번에 다 알아야 돼. 한꺼번에. 한꺼번에 다 알아야 1년 더 살지 않더라도 6개월 더 살지 않더라도 지금 죽어도 해답을 알고 죽을 수가 있어요. 해답을 알고. 세상 어떻게 끝나고 이걸 한꺼번에 알고 죽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지식만 쌓이게 되면 그 지식이 최종적인 해답을 보장해주지를 못합니다. 도대체 공부를 어디까지 해야 돼? 이렇게 되거든요. 창세기 원어로 공부했다? 그럼 창세기가 성경 다 입니까? 출애굽기 남아있잖아요. 출애굽기 원어로 공부했다. 그럼 다입니까? 레위기 원어 또 남아있는데. 원어로. 그럼 요한계시록 다 끝났다. 그럼 끝나는 겁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연관성을 또 알아야 돼요. 전체 다를. 제가 주일 설교엔가 했지요. 창세기 1장 2절을 한번 봅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라고 되어있지요. 이 구조를 한번 보세요. 이게 구조적이거든요 구조적. 자, 밑에 바탕은 뭐냐?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죠. 아주 깊이 있는 흑암이죠. 그걸 쳐다보듯이 마치 비둘기가 수면에 날듯이. 그걸 누가 날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날고 있지요. 그러면 지금은 해답을 어느 쪽이 있어요? 하나님 신이 알고 있지요. 밑에 흑암과 이거는 해답을 모르죠. 빛이 없으니까 해답을 모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거기에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있었다 이렇게 된다고요. 빛이 있으라 함에 있었더라 되게 되면 이제는 뭐냐 하면은 빛이 빛 되려면 흑암 공허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해답은 어디에 결집되어있다? 빛 안에 다 들어있다가 되는 거예요.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아까 라일락 이야기했잖아요. 라일락은 찍을 수 있지만 향기는 없다고 했잖아요. 해와 달과 별, 누가복음 21장에 나오는 말씀들. 이거는 창조물이에요. 창조물. 그런데 창조물로서 창조의 원리 원칙을 다 알 수가 있어요? 없어요? 이게 없어요. 미흡한 거예요. 하나님이 보기 심히 좋았더라 하는 것은 만들어놓은 존재는 좋았어요. 좋았지만 그 창조물 자체가 창조의 모든 원리를 다 알 수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해와 달 별 물질이죠. 사물이에요. 진흙으로 뭘 만들었어요? 인간. 사물이죠. 라일락 있지만 향기 없잖아요. 인간은 있지만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잖아요. 언약을 완성한 인간은 아니다 이 말이죠.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어버린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이면서도 이거는 하나님의 창조와 괴리된 거고 괴리 정도가 아니고 인간은 어디에 속했어요? 사탄의 손아귀에 놓여있는 겁니다. 악마한테 장악된 거예요. 그럼 우리한테 문제 있다 이 말이죠. 우리 안에 문제 있는 인간이 악마가 시키는 대로 내 중심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내 중심이 되다 보니까 뭡니까? 예수님 중심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냐? 죽어버렸어요. 죽음의 반복이에요. 사람은 안 죽을려고 한다 이 말이죠.
시편 37편 10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자, 악인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이 말씀이 시편 37편 10절에 나오잖아요. 이 말씀을 누가 이해하느냐 하면은 예수님만 이해해요. 왜? 예수님은 결론까지 다 알고 계시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만약에 그냥 문제 있는 인간이 말씀에 보니까 악인이 없대. 악인이 없는 모양이다. 없습니까? 온 천지 악인인데. 자기를 포함해서. 성경 말씀하고 자기가 아는 현실, 내 중심의 현실에 성경 말씀이 하나도 맞아 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하나도 없어. 첫 번째 강의할 때 이게 면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 역사, 면. 하나님께서 양 잡으면 용서해준다 했지요. 이게 현실이 양이라는 동물 가지고 할 때 그래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양 잡는다고 죄 없어집니까? 아니지요. 구약이 하나의 면으로 되어있던 것이 예수님의 단독행위, 예수님 한 분으로 집약이 되어있어요.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진리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 내포되어있다가 이스라엘 역사가 끊어져요. 남은 자만 남기고. 남은 자 남겼는데 남은 자가 7천명 있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아무도 없고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님만 남은 자라고요. 나머지 예수님 빼고 나머지는 12제자 모두가 진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그만큼 인간존재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중심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언약을 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오해하고 있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예요. 오늘 누가복음 22장 보지만 이게 무슨 뜻인지 베드로가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런데 시편 37편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 어디 있나? 그 많던 악인 어디 있지? 아무리 찾아볼래도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없어졌어요. 이게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더 이상 악인들이 없을 것이며”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누구 중심일 때 그렇습니까? 내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에요. 그러면 중요한 것은 내가 죄인 되서 의인 됐다 할 때에 내 중심에서 무슨 중심으로 바뀐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 중심으로 바뀐다는 말이에요. 바뀌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기는 뭘 해요 우리는 시험 들었는데 할 게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야 돼요. 죄인의 동류가 되어야 돼요. 예수님1은 죄인 되신 분이에요. 예수님2는 그 죄인에서 벗어나신 분이 예수님2에요. 그러고 난 뒤에 예수님2가 우리에게 성령을 줘요. 성령을 줘버리면 이렇게 돼요.
1. 내가 여기 있다. 이거 환상입니다. 여러분들이 첫째 강의 잘 들었으면 이게 환상인줄 알아야 돼요. 내가 여기 있다 이게 망상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환상이 아니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내가 여기 있다 잘못된 겁니다. 망상이에요. 2. 주여 누구십니까? 묻잖아요. 답변이 있어야죠. 주님이 하신 일은 우리에게 뭘 유도한다? 주님의 하신 일에 질문을 하게 해요. 3. 내가 너 안에 있다. 이게 답변이에요. 1번하고 3번하고 다르지요.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있다를 내가 나한테 쓰면 안 되고 누구한테만 써야 된다? 예수님에게만 존재 동사를 써야 돼요. 우리에게는 부사 형용사 아름답다 좋다 키 크다 잘났다 이런 거, 이런 것은 다 뭉개집니다. 다 부서지고 동사만, 존재동사만 주님이 내 안에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밥을 먹었다 잠을 잤다 이것을 풀이하게 되면 주께서 잠자게 했다 밥먹게 했다 이렇게 돼요. 주님께서 아프게 했다 목쉬게 했다 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제 좀 이렇게 영안이 활짝 열리십니까? 그렇게 어렵던 성경 전체가 확 열리십니까? 서울강의에서 이 단어 했어요. ‘both’. 같이 더불어. 이거 빼면 성경해석 하나도 못해요. ‘같이 더불어. 내가 너 안에’.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너희 안에서 작용한다. 움직인다’. 말씀이. 말씀 지킬 생각하지 말고 말씀이 네 안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존재동사, be동사에요. 있다 있음 존재함 이런 뜻이에요. 있음. 우리는 껍데기죠. 껍데기고 주께서 있음이 돼요. 그럼 내가 현실에서 손님 만나고 친구 만나고 하는 현실은 누구 현실입니까? 내가 확장하는 현실이 아니고 나를 가지고 주께서 확장시키는 주님의 현실이 되는 거예요. 이걸 12제자가 누가복음 22장에서 주님께서 계속 예언만 해요. 예언만. 못 알아들어요. 제자들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데. 계속 주님께서 자기 현실을 확장시켜요. 나중에 너희들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다 알아들어. 지금 몰라. 무슨 말인지 몰라.
누가복음 22장 34절 봅시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닭 우는 시간이 언제냐 하면은 새벽이에요. 자, 이 새벽이라는 것은 해가 뜨는 것이 새벽이잖아요. 또 닭은? 닭은 닭이지 뭐야. 닭은 닭이죠. 그런데 새벽 해 뜨는 것 닭, 이 현실은 누구 손 안에 놀아나고 있어요. 주님의 말씀, 주님이 만들어내는 현실을 드러내는 도구와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구와 수단 가운데서 누구도 포함 돼요? 베드로 본인도 포함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죄인이었다. 그러면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이 이게 뭐냐 하면은 진실이죠. 아 요새 물가 장난 아니야. 진짜 돈 2만원 들고 살게 없네. 자, 묻습니다. 이거 진실입니까? 진실 아닙니까? 문제 어렵다. 요새 물가 장난 아니게 비싸다. 진실입니까? 진실 아닙니까? 진실이에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4장 한번 볼까요? 4장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다시 묻습니다. 요새 물가 장난 아니다 비싸다. 이거 진실이에요? 진실 아니에요? 진실이에요. 주께서 느끼게 만드니까. 요새 당신 얼굴 굉장히 좋다. 진실입니까? 진실 아닙니까? 진실이죠. 성도가 하는 것은 다 진리입니다. 아 이거 위험한 발언, 요 위험한 발언. 그래서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여기서 당당해야 돼요. 당당하려면 뭘 반복해야 되는가? 죽음을 반복해야 돼요. 죽음을 반복. 왜? 예수님의 죽음이 내 안에 있을 때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첫 번째 반복은 습관성 반복. 두 번째 반복은 기억의 반복. 세 번째 반복은 죽음의 반복이죠. 그런데 죽음의 반복 세 번째를 흉내 내서 시험 든 사람은 2번으로 갈아타려는 사람이 있어요. 방금 이거 들었잖아요. 뭐든지 주의 뜻이다. 이게 들었거든 들은 게 있다니까. 지가 무슨 짓해도 주의 뜻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식인데도 불구하고. 이건 뭐 3번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있느냐? 반복이에요. 반복. 죽음이 예수님이 한번 죽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우리는 어떠냐 하면은 무엇에서 벗어나야 되는가? 나, 자아의 동일시에서 여기서 벗어나야 돼요. 왜? 동일시는 환상이고 망상이기 때문에. 환상이고 망상입니다. 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베드로를 보았다. 그런데 베드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장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주께서 아십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할 때 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을 인정했잖아요. 사랑받았으니까. 그게 탐이 나는 거예요 그게. 탐이 나가지고 그걸 세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 지식으로 그걸 차용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이야기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도 저렇게 이야기해야지. 그렇게 이해해버리면 뭐냐 하면은 성경을 통해서 환상, 환상이 뭐라 했습니까? 자아 동일시. 베드로가 고백한 것을 동일시하면서 그걸 흉내 내고 나도 따라함으로서 내가 베드로와 같은 신앙이라는 동일성을 우기고 동일성으로 일치하다고 자기가 우기고 싶은 거예요. 동일시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단절이 없지요. 끊어짐이 없어요.
그러면 이럴 경우에는 아까 2번 지식의 반복이 아니고 진짜 죽음의 반복이 되려면 어떻게 그러면 2번이 아니고 3번에 머물 수 있느냐? 3번에 계속 머물 수 있느냐? 여기에 도와주는 것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사탄이에요. 악마. 악마가 도와줍니다. 악마가 도와주는 게 무섭게 하는 것이냐? 무섭게 하는 게 아니고 무섭게 생각하지 마시고 사탄은 아주 온화하게 양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부드러운 얼굴을 하거든요. 아까 고결한 여인 했잖아요. 사탄은 환상을 만들어내요. 환상. 항상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환상을 만들어내야 내가 그 환상과 일치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치하려고. 그러니까 내가 누구와 동일시한다? 베드로와 한 배를 탔다 나는 이제 성도다 할 때에 악마가 그것을 환상으로 만들어버리죠. 나는 베드로와 같은 존재다. 같다 할 수 있지만 일부러 존재라고 하는 것은 be동사를 일부러 드러내기 위해서 표현한 겁니다. 나는 베드로와 같은 존재다 또는 나는 진짜 성도와 같은 존재다 라고 be동사를 나와 동일시 시켜버려요. 같이 봅니다. 그러면 내가 아까워요? 안 아까워요? 이 정도까지 수준까지 올라간 내가 아깝지요. 그러면 뭐냐 하면은 이것은 실은 지금 이런 상태에서 죽는 게 무섭고 두려워서 이런 발악을 하고 있다고 보면 돼요. 사탄이 환상을 만들어내는데 이거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라고 되어있지요. 여기 지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허락 없이는 사탄도 절대로 베드로를 강탈하지 못한다 하는 거예요. 허락 없이는. 그러면 베드로가 이 이야기들을 때 이해했습니까? 이해 못했습니까? 이해 전혀 못했거든요. 이해 못한 그 발언이 어디 나오느냐? 36절에 나와요.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그러니까 38절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여기 칼 두 개 있나이다 하는 거예요. 대화가 이상하게 풀리지 않습니까 지금. 지금 우리가 현장에 있다고 봅시다. 현장에 있다면 우리는 베드로의 수준을 벗어날까요? 벗어나지 못할까요? 벗어나지 못해요. 지금 우리가 현장에 있다 해도.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제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전에는 전대도 없었잖아요. 신발도 없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이야기했다고요. 예수님이 이야기한 거예요. 제자들이 제안한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시켰다니까. 시키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칼을 가져야 되겠구나. 그러니까 우리한테 칼이 두 개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게 이게 뭐가 문제지요? 여기서 뭐가 문제가 됩니까? 주님이 이야기했고 거기에 호응해서 반응했는데 도대체 제자들이 문제점이 뭐냐 이 말이에요.
참 성경이 엄청나게 어렵지요. 왜 칼을 가지라고 했느냐 하면은 33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 지금 자기가 배신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왜? 자기가 자기를 잘 안다고 보고 자기 동일시 있고 자기가 잘 아는 이것이 환상인줄 몰랐어요. 마귀가 허락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탄도 몰라요. 나는 내 결심으로 주님 따라가면 그걸로 ok라고 여겼던 겁니다. 자신만만한 거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6장 한번 봅시다. 16장 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이게 끝이었습니까? 뒤에 뭐가 있습니까? 죽임을 당하지요. 죽임을 당하지요. 그 다음에 3일 만에 살아나지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어디까지 듣느냐 하면은 많은 고난을 받고, 여기서 제자들은 화가 나고 낭패를 느끼는 거예요. 우리가 폼으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닌데.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보기에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할 때에 이게 지금 예수님 뜻과는 상관없는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예수님의 일을 망치기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한 거예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 절망적인 사태가 일어난다고 그렇게 베드로가 이해한 겁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우리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오늘 본문 봅시다. 누가복음 22장 33절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주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목숨 바쳐서 저라도 주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뭘로 지키는데? 우리한테는 칼이 있습니다. 그걸 아시고 주님께서 칼 버리라고 했지. 신발 버리라고 했지. 돈? 없으면 돈으로 사지요. 돈 주고 칼 사면 되잖아요. 돈 버리라고 했지. 그러나 이제는 사. 너희들도 나와 이별해야 돼. 그리고 너희 챙길 것은 너희를 보호해줄 나는 없다는 겁니다. 자, 보호에요. 보호. 그동안 제자들이 생각하는 식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모르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호했지요.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제자들을 보호했냐는 것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한 거예요. 그러나 제자들은 사탄의 존재를 의식 못하고 힘과 힘으로 주님은 힘 세니까 물위를 걸었으니까 귀신 쫓아냈으니까 그 힘으로 그동안 우리를 보호한다는 거예요. 그 보호의 스크린이 이제는 철회돼요. 그게 날라가버려요. 덜렁 이제는 발가벗긴 채 남아있는 것은 사탄에 노출된 제자들의 형편입니다. 그땐 어떻게 해야 돼요? 예수님의 보호막이 사라질 때에 인간은 노골적으로 자기의 본색의 바닥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지키랴.
여러 번 했지만 다시 봅시다. 내가 여기 있다. be동사 내가 여기 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생활고, 생활걱정. 나를 지킬 자 누구밖에 없기 때문에? 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면 호신용으로 뭐 있어야 돼요? 금. 나한테 금이 있어야 되는 이유가 있구나. 있어야 된다는 말은 그동안 주님이 우리를 보호한 것은 우리가 주님한테 보호 받기를 원했던 그 방법과 환경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이제는 서서히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악마의 환상과 유혹으로부터 보호했는데 그들은 내가 나를 지켜주는 식으로 주께서 지켜줬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이제는 얼마나 허망한 망상에 불과한 것을 너희들이 이제는 내가 없을 때에 혹독하게 그걸 체험해야 되는 거예요. 칼 두 개 있다고? 칼 두 개 들고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가가지고 제자 10명 모여가지고 벌벌 떨었어요. 벌벌 떨었습니다. 누가 와서 똑똑! 하면 어!!!누구세요?!!!누구세요?!!! 주님께서는요 아예 노크도 안하고 그냥 들어왔어요.
이 말은 뭐냐? 오늘 결론입니다. 주님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았어요. 주님은 주님1과 주님2, 주님은 주님하고 상대했습니다. 주님이 죄인이 되셔야 하고 그 다음에 그 주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진짜 죄인은 죄를 지어서 죄인은 선악체계고요 진짜 죄는 인간이 뒤집어 쓴 망상 그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사탄의 유혹에서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죄였던 거예요. 40절에 봅시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 다음에 뭡니까? “유혹에 빠지지 않게” 자기 망상에 자기가 환장하지 않기를. 나 여기 있다를 최우선적으로 하지 않기를. 내가 여기 있다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는 그 주님과 옆에 있다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있는 그 수준까지 그 목적까지 주님의 일은 멈추지 않고 주께서 우리를 죄인이 의인되는 그날까지 주님의 일은 계속되었던 겁니다. 마귀를 이기고. 우리의 힘으로 이긴 게 아니에요. 주님의 기도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드디어 시험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위해서 목자가 된 겁니다. 그 다음 차례는 우리 차례죠. 우리 차례입니다. 늘 어디 가더라도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하세요. 아이고 더워라. 아이고 배고프다. 좀 먹자. 진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그것을 친히 이기시고 심지어 주께서 우리조차 이기시고 따라서 우리 안에 계셔서 주께서 하라 하는 대로 움직여 나가는 그런 당당한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