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22장 53절 (어두움의 권세) 240507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22장 39절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보면 기도하는 내용이 어떤 기도했는지 4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기도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이 기도 내용은 먼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요구사항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감 잡을 수가 있지요. 그 요구사항이 뭐냐? 이 잔을 마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잔을 마신다는 것,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아버지의 뜻에서 배제되어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또 뭘 모르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잔을 마시라는 뜻을 줬다는 것을 모를뿐더러 예수님께서 그 잔이 철회되기를 혹시 아버지의 뜻이 바뀌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는 이것이 자기의 뜻이 있지요. 아버지의 뜻 하나, 예수님의 뜻 하나, 뜻이 서로 구분되어있습니다. 뜻이 구분되어있는데 그럼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왜 이 땅에서 사셨는가? 구분되어 있는 이 뜻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통합의 뜻은 하나로 축약이 되어있어요. 하나로 뭉쳐져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잔. 쓴 잔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잔 주시면 잔 마시면 되지 그게 뭐가 문제냐. 문제는 이 잔이 예수님에게 죽음을 야기하는 잔.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이 잔이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우냐 하는 것은 이 잔이 얼마나 힘들다 하는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천사들이 와서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이 잔의 내용이 예수님의 피부를 뚫고 나옵니다. 피부를 통해서 표현이 돼요. 땀이 뭐로 바뀌는 거예요? 땀이 피로 바뀔 정도로 짜냈다. 한약 짜듯이 쭉쭉 짰다. 겟세마네 뜻이 뭐냐 하면은 기름 짜는 거예요. 기름 짜듯이 쭉쭉 짜는데 짜게 되면 땀이 피같이 되었다. 그래서 주님의 땀도 뭐를 겨냥하느냐. 피를 겨냥. 피를 흘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살아있는 육신을 피 흘리기 위해서 죽으셔야 됐던 겁니다.
죽기 위한 죽음, 이건 자살이죠. 이건 아니에요. 자살은 아니고 피를 내는데 이 피가 잔의 용도로서 쓸 만한 피를 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신체를 거기에 결부 시켜서 기도를 한 겁니다. 누가 했느냐? 예수님이 했지요. 다른 사람은 여기서 배제당합니다. 여기서 필히 덧붙여서 알아야 될 사항은 바로 유월절의 양에 관한 겁니다. 집집마다 양을 키웠다. 의미 없습니다. 양고기가 맛있다. 의미 없습니다. 양과 가족처럼 친하게 지냈다. 별 의미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양을 뭘 끄집어내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 하면은 양의 피를 끄집어내서 그 피가 그 집안을 대신해서 문지방과 문설주, 아래쪽과 기둥 같은 데에다가 피를 바를 때 비로소 유월절 양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월절 양의 피를 냄으로서 여기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홍해가 갈라져요.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 이걸 한번 연결시켜봅시다. 양 죽었는데 공간이 변하지요. 시간은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이 탈출할 그때가 새로운 날의 시작이에요. 첫날 여호와의 밤, 그 밤. 양 죽었는데 시간과 공간이 틀어진다. 뭔가 협조한다. 시간과 공간이 찢어진다. 깨어진다. 양 죽었는데 틀어지는 거예요. 그럼 이 양은 무엇과 관련성이 있느냐 하면은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이 양의 피로서 표현되었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계속 양 잡으면 홍해 갈라지듯이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듯이 해가 멈추듯이 신비로운 양만 계속 잡아 죽이면 이스라엘은 천하의 최후의 나라, 민족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양이 죽으면 시간과 공간이 반응을 나타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양을 봅시다. 양을 초월한 양 되기. 인간들이 아는 양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지시를 했더니만 그 양이 초월적인 위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위상적인. 기존의 양, 일반적인 양이 알고 있는 것을 초월한 양 되기 위상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플러스 알파 정도가 아니에요. 양에다가 플러스 알파 정도가 아니고 이거는 엄청나게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양의 피를 발랐는데 이 양이 어느 정도로 양 자체를 초월했느냐 하면은 양의 피가 발리지 않는 집마다 그 집에는 전부 다 곡소리 나고 대를 이어서 그 집안을 살린 복되기 살린다고 간주되는 맏이가 죽어요. 둘째, 셋째가 아니라 맏이가 죽어요. 이것은 그 족보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는 겁니다. 양의 피가 없다고 해서. 이걸 보면서 야 우리는 양 하나 잃는 손해 봤는데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대자연까지 동원시켜서 우리를 협조하고 도와주는구나. 우리 정말 신난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양 죽음의 전후. 양이 죽고 난 뒤의 전과 후. 전과 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양 죽고 난 뒤에 후에는 대자연이 움직임을 보인다. 대자연은 인간이 이루는 문명이나 문화보다 월등하죠. 그래서 양은 뭐보다 월등하냐. 인간의 솜씨 인간의 생각 인간의 기대치보다 월등한 거예요. 왜? 인간은 시간과 대자연에 예속된 입장이란 말이죠. 인간은 그냥 자연에 순응할 뿐이고 어쩔 수 없이 자연환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집집마다 애굽 사람 장자 죽이기 위해서 몰래 독약을 탔다든지 그런다고 해서 그 가정이 죽진 않아요. 출애굽기 보면 방앗간 뒤에 있는 여종의 자녀도 죽어요. 왕의 장자도 죽고 심지어 교도소에 가 있는 죄수의 장자도 죽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 나이, 성별, 학력, 가정환경 이런 거 일체 종교 일체 안 보고 뭐만 딱 본단 말이에요? 양의 피가 있는가? 그것만 봐요. 양의 피가 있는가.
특히 양의 피를 바르고 탈출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 사람들이 홍해 쪽으로 하나님께서 몰아넣지요. 몰아넣는데 사람인데 바다를 통과해요. 사람인데. 죽음의 전과 후는 양 죽기 전에는 홍해를 못 건넙니다.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대자연이 손을 봐가지고 홍해 바다까지 길이 나서 통과했지요. 여기 뭐가 기인한다? 양의 특수한 위상이 양의 죽음이 자연 세계까지 관여가 되는 어떤 우월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양의 피가 우월성을 보여준다는 말은 홍해 바다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양을 따라 올 인간류와 양을 따라올 수 없는 인간류로 인간을 둘로 나누는 겁니다.
홍해 바다 앞장서서 가니까 애굽 군사들이 히브리인들과 자기하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생각 안 할 수 있습니까? 같은 사람 맞지요. 같은 사람이니까 너 통과하면 나도 통과한다. 너는 뭐 별거냐? 하고 따라왔다가 어떻게 되었어요? 자연이 또 움직여가지고 반응해가지고 히브리인들 갈 때는 물이 양쪽의 벽이 되가지고 가만 있었어요. 그런데 뒤에 애굽 군사가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물 벽이 무너져가지고 그 애굽 군사 다 물에 빠져 죽고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마차와 군복 같은 게 바다에 떠돌아 다녔습니다. 왜 너는 되는데 나는 왜 안돼 이런 생각했죠. 그걸 왜 구원받은 사람에게 묻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구원받은 사람이 양 죽을 때는 자기가 구원받은 이유를 몰라요. 자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받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통과했고 뒤따라온 애굽 군대들은 물에 빠져죽는 게 당연하다. 인간이 바다에 빠져죽는 게 당연하지 누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물에 빠져죽는 이게 이상한 겁니까? 인간은 누구한테 못 이겨요? 인간은 자연한테 못 이기잖아요. 자연보다 누가 더 세다? 양이 더 센 거예요. 그만큼 인간은 보잘 것 없는 겁니다. 자연한테 쪽도 못써요.
유월절 양 때 히브리인들이 오해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는 되고 애굽인들은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별시켰다는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나라를 구분시켜서 우리는 살리고 너희 애굽 사람들은 몰살시켰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할께요.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셋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 1번 인간, 2번 자연, 3번 양. 어느 쪽에 속해야 돼요?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은 자기는 인간이고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보호할 것이고 그 증거로서 매일같이 반복되는 양의 희생.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는 양들의 희생. 양과 동행하면서 우리는 살았다.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이 선배가 되고 이들의 후배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오늘 누가복음 22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12제자들이었어요. 우리한테는 양이 있고 양 제사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양을 받아주시고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
주님께서는 양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걸 사람으로 바꿔버려요. 예수님으로 바꿔버립니다. 예수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바꿔버려요. 그게 바로 여기 22장 1절에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 날 대비하라고 했습니다. 아까 양의 죽음의 전후라고 했지요. 전후. 전에는 자연이 꿈적도 안 했는데 후에는 자연이 움직이더라. 양을 보호하려고 움직인 건데 이스라엘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였다는 거예요. 오해한 겁니다.
자, 예수님의 죽으심 전후를 봅시다.
■전 예수님이 십자가 죽기 전에 사람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은 유월절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한다 그거였죠. 그리고 우리는 유대백성이고 다른 이방민족하고는 우리 유대백성은 이미 홍해를 통해서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우리를 지켜주고 하나님께서는 이방민족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어요.
■후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는 제자들이 공중에 붕 떴어요. 제자들에게 어떤 혜택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죽으시고 예수님께서 그냥 단독으로 부활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요. 하나는 해방감. 해방감을 느껴요. 아 메시아인줄 믿었잖아. 아니네. 뭔가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주님께서 죽어버리니까 그 후 소감이 어떤 소감이냐 하면은 죽음을 나타내는 경향성.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해방감입니다. 그래 갈 사람은 가야지. 가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어때요? 자기 자신이 은근히 기대와 고대를 했다가 그 예수님이 죽어버렸으니까 죽었다는 말은 없어졌지요. 그냥 사라진 거예요. 그럼 남아있는 자는 누구지요? 예수님을 기대했다가 남아있는 자가 누굽니까? 자기 자신이죠. 그 당시 백성들도 예수님께 기대했다가 혹시나 했다가 행여나 했다가 역시나 끝났어요. 그러니까 자기 할 일로 돌아가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었지만 자기는 뭐가 된다? 멀쩡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그리워 하면서 생활이 피폐해진다든지 생활이 힘들어진다든지 뭐 그런 게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지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냥 떠나보내는 거예요. 그냥 보내고 정작 중요한 나는 있으니까요. 이런 해방감이 있다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시간과 공간 어떤 변화가 여기 없어요.
그리고 12제자 봅시다. 11제자. 1명은 배신하고 죽었고 11제자 봅시다. 11제자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는 아마 열렬하게 자기가 협조다운 협조를 바짝 했지요. 곧 주님이 메시아로 등장하는데 로마도 해방하고 민족을 해방하는데 하나님의 모든 예언대로 하는데 평소의 주님의 습관이 그거였어요. 무슨 일 해놓고 “이것은 말씀에 응하려 함이다” 이랬다고요. “말씀에 응하려 함이라” 구약 성경에 보면 쭉 나와 있잖아요. 그 구약성경의 마지막 최후의 승리는 뭡니까? 이스라엘이 다윗왕국이 되는 거예요. 모든 이방민족을 통치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여기 말씀하시는 “12고을을 다스리라” 할 때에 12고을, 공간이잖아요. 12. 누구 이야기하는 거예요? 12지파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전면적으로 유다나라 이스라엘을 개편하는 거예요. 기존의 유대나라 가지고는 안 되고 이게 진짜 다윗시대에 약속한 그거 아니니까 예수님께서 일을 벌여서 모든 장관들부터 해가지고 제대로 다윗왕국 같은 영광스러운 성전도 만들고 영광스러운 그 왕국으로 리모델링하는 거예요. 인테리어 업자 시켜가지고. 깔끔하게 깨끗하게 진짜 사람들이 고대하고 기대하는 아! 이거지 이거! 이게 이스라엘이지. 이게 구약의 말씀대로 성취지 라는 것을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해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히마리 없이 죽었어요. 약하게 죽어버렸어요. 죽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해방감은 아닐 거예요. 신난다 이게 아니고 허탈감. 기억 속에 있는 기억의 입각한 자포자기. 기억 때문에 생긴 자포자기. 그동안 우리가 뭘 본거야? 우리가 실제로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우리가 도대체 어디가 잘못이야? 어디서 실수한 거지? 어디서 우리의 판단 미스가 왔을까? 아무리 봐도 그 분은 메시아 맞는데 왜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은 왜 낌새도 안 보여? 꿈쩍도 안 해. 오히려 예수님을 죽인 저쪽 세력이 더 기가 살았어. 뭐 징후가 보이지 않아. 그 징조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누구한테 실망해야 돼요? 예수님한테 실망하는 겁니까?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한테 실망해야 돼요? 수정에 나서야 되겠지요. 그럼 누구 수정하겠어요? 죽은 예수님 수정하라고 하겠어요? 누구 수정합니까? 자기 수정해가는 거예요. 뭔가는 모르지만 우리 쪽에서 입력 오류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input output이 안 맞았다. 양쪽 다 해방감을 느끼는 자들이나 12제자나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둘 다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유월절의 홍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은 따라오지 말아야 될 자와 따라와야 될 자를 구분하잖아요. 구름기둥, 홍해 같은 것을 통해서. 사실은 히브리인들이 홍해바다에서 그냥 통과할 때 시간적으로 거기서 시간이 멈췄어요. 왜 시간을 멈췄느냐 하면은 애굽 군사가 따라오기까지 기다린 거예요. 아 하나님 무섭지요. 그냥 다 뒤따라오게 해요. 그리고 같은 공간에 같이 당도했어요. 했는데 애굽 군사들이 몰랐던 것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커튼을 만들어가지고 혼란을 만들었을 뿐이지 공간은 같은 공간이에요. 그러고 난 뒤에 홍해 게이트를 열어라 해가지고 유대인들은 거기 들어갔고 들어간 것 보고 애굽 군사들이 어! 왜 홍해 바다가 벽이 되었지? 아 좀 기다려보자.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겠다 하고 시간의 차이가 별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시간의 격차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와서 저쪽 차단해버리니까 그 짧은 시간의 간격이 하나님을 따라올 백성과 따라오지 말아야 될 백성을 하나님께서 구별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양 피의 효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둘 다 살아있어요. 둘 다. 유대인들은 양만 잡으면 된다는 거예요. 양만. 양만 잡으면 하나님이 대자연을 움직여서 우리 이스라엘을 지켜준다. 여호수아 전쟁할 때 봐. 해가 멈췄잖아. 여리고성도 마찬가지고. 얼마나 많은 기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 가기 전에 몸이 많이 아팠다. 몸이 많이 아팠는데 뭐 간증 들어보니까 몸 아픈 사람이 갑자기 꿈에 주님의 계시가 나타나가지고 너를 낫게 해주마. 이렇게 해가지고 그 사람이 몸이 나아가지고 평양 대부흥 운동. 교회에 그런 전설이 있어요. 그 과정을 들으면 우리는 뭘 기대합니까? 나도! 나도! 나도!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그걸 기대하고 빡세게 기도하지요. 뭣 땀방울 핏방울까지는 안 되지만.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 다 믿고 부활 다 믿고 믿었는데 나중에 별로 아무런 어떤 달라진 게 없어요. 달라진 게 없으니까 새 생명 되었다 치고 갑자기 해방감이 생기는 거예요. 해방감이. 내가 개혁주의 신학 다 하고 알 거 다 알고 해봤는데 별로 은혜 안 된다. 남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딱 하나 남았어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자. 복음은 아니까. 나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잖아요. 해방감을 느껴요. 갑자기. 해방감을. 자연이 그냥 어떤 징후도 안 보여주니까. 약간의 허탈감, 낙담, 낙심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 지나니까 그것도 사라졌어요. 야 고기 잡으러 가자. 도시어부. 이덕화 따라서 낚시. 고기 잡으러 가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자기 집으로 가고 다 한 거예요.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양이 쎕니까? 예수님이 쎕니까? 어느 쪽이 쎕니까? 예수님이 더 쎄지요. 그런데 양은 죽었는데 시공간은 바뀌잖아요. 홍해가 갈라졌잖아요. 그런데 더 쎄다는 예수님 왔는데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늘이 갈라졌습니까? 땅이 갈라졌어요? 없어요. 잠시 잠깐 해가 어두워졌지만 오래간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그날하고 말았어요. 없어요. 그래서 뭐 제자들이 그냥 좋은 기억으로 삼겠다.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유월절 양보다 못해요. 누가요? 예수님께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뭡니까? 천사까지 돕도록 천사까지 힘을 내가지고 이건 뭐 산고의 잉태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냥 땀이 피가 되도록 짜서 기어이 성사 시켰습니다. 뭘 성사 시켜요? 그 잔을 예수님이 마시는데 성공했어요. 성공하면 뭐 합니까. 우리한테 아무것도 티도 안 나는데요.
어디서 오해를 한 거냐 하면은 지금 유월절 양하고 홍해 갈라지고 구름기둥 불기둥 반석에서 물 나오고 멋진 기적들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그들은 유대인들은 계속 본인들이 살아있었습니다. 살아있어요. 다시 말해서 적들은 홍해바다에서 죽었지만 우리는 살았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덤 안에 모든 시공간이 무덤 안에 다 모여요. 그러면 이 세상은 무덤이 돼요. 무덤 안에서 애들 유치원 보내고 학교 보내고. 무덤 안에서 장사하고. 이 세상 자체가 무덤이 됐어요. 시공간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걸 여기 오늘 22장 53절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너희 때예요. 시공간이 무덤 밖은 너의 세대, 너의 역사인데. 무슨 역사냐? 어디의 역사입니까? 어둠의 권세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 사람을 구별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과 그 외의 모든 인간을 구분합니다. 예수님과 모든 인간. 예수님만이 무덤에 부활하고 나머지는 어디서 살아간다? 어둠의 권세의 세력 안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은 이 대자연은 하나님이 인간을 가두는 무덤으로 활용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대자연이 안 변하는 것은 무덤이 안 변하는 이치와 동일하지요. 이 대자연은 깨지지 않지요. 무덤이니까. 무덤의 특징은 그 안에 들어있기만 해도 이미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유월절 피와 같이 시공간을 움직여요. 시공간을 움직이는데 그 시공간 전체가 예수님이 가신 그 세계와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한 이 세계의 시공간이 차이 나는 시공간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흘린 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전제가 뭐냐 하면은 무덤 있고 그 무덤은 예수님의 무덤 있고 예수님의 무덤 바깥에 어둠이기 때문에 어둠의 권세가 예수님의 무덤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못 들어오면 지옥이죠. 영원토록 지옥에 사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성도에게 주는 복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살다가 예수님의 무덤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홍해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은 무덤인데 죽은 무덤 안에 뭘 기다리고 있느냐? 예수 안이고 이게 바로 생명의 세계에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구원받는 사람의 특징은 내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산다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그 다음에 무슨 말 했습니까? 산다죠. 그런데 세상은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 뭐다? 이게 저주받아 죽는 죽음이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나오지요.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은 놔두고 예수님과 더불어 무덤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에요. 들어와서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니까 이 십자가 바깥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요? 바로 악마의 권세 안에서 시달리고 있는 생명 얻지 못한 살아있는 죽은 자들이죠. 살아있는 죽은 자들. 얼마나 사도 바울의 논리가 과격합니까? 협의 대상이에요? 협의하거나 양보 좀 합시다 너무 협박하지 마세요. 이렇게 해도 넘어갈 생각이 죽어도 없어요. 협박 공갈이 아니고 리얼리티예요. 리얼리티.
십자가가 진실한 것처럼 십자가의 결과도 진실한 거예요. 마치 유월절 때문에 홍해가 갈라진 것이 진실인 것처럼. 역사적 체험을 그들은 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은 맨날 양 제사 드리면 그때처럼 보호할 줄 알았지요. 그들이 망했잖아요. 그들이 결국 망해버렸잖아요. 양만 잡는 거예요. 양만. 줄기차게 양만 잡았어요. 양 잡던 그들이 누굴 잡았습니까? 예수님을 잡아요.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양 잡을 때 그들은 해방감을 느낀 거예요. 뭐 양 잡으라 해서 양 잡았고 제사하래서 제사했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스스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겠네. 계속 본인이 살아있는 거예요. 본인이. 양 피로 죄 사함 받았고 이제는 내 하는 대로 하면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어두움의 권세에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에 시간과 공간이 죽음을 겨냥해서 왔다고요. 왜냐 하면은 천사조차도 예수님 잔 마셔야 됩니다. 마셔야 됩니다. 마셔야 됩니다 하고 쥐어짜듯이 마시라고 기도를 했거든요. 천사들도.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원래 천사들이 바람을 운행하는 자들이에요. 히브리서에 나와요. 바람과 불 천사 담당이라고. 그 모든 시공간의 변화가 오직 예수님의 피에 다 쏠려있단 말이죠. 그럼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는 말은 이제 진짜 시공간은 예수님 시대에서 완성이 되고 말았어요. 바깥에 흐르는 시공간은 뭐냐 하면은 어두움의 권세가 작동하는 시공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은 역사에요. 역사. 갈 때까지 가보자 언젠가는 되겠지. 젊은 사람들 기도할 때 하잖아요. 하나님 올해 안 되면 내년에 어떻게 좀 장가 갈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다. 그다음에 나는 솔로 한번 나가볼까요? 튕긴다. 난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희망이에요 희망. 인간이 자기 것이 없으면 희망이 없어요. 주체가 없으면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없으면 살 맛이 없습니다. 그럼 뭡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에요? 계속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희망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살 맛이 나도록 다시 말해서 내가 안 죽는 식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내가 안 죽는 식으로. 이게 유대인이고 이게 이스라엘 사람이 한 거예요. 하나님 뭐 하십니까? 날 도와줘야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욕이 아니고 제가 지어낸 용어인데 따라 챙겨놓은 자기만의 아지트, 세계. 이것을 자기 안에 키우는 거예요. 키우기 때문에 뭐가 안 들어와요? 무덤 안에 무덤이 생겼다는 소리가 자기가 만든 꾸준하게 일궈낸 자기 세계가 닫힐까봐 이걸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걸 shield 친다. 방패 친다. 복음 들어가면 무조건 밀어내요. 쉴드 쳐요. 저주야 오지 마. 저주야 오지 마. 저리 가 저주!!! 김저주 박저주 저리 가! 쉴드 치는 것, 자기를 커버하면서 계속 밀어내요. 나는 해방감 만끽하는 것으로 살겠다는 거예요. 전에처럼 양 잡고 복 받는 거 그거 좋았잖아요. 구약에. 복 받지도 않았어요. 망했으니까.
그걸 누가하느냐 하면은 안상홍이 하는 거예요. 유월절 회복하라고. 그게 먹혀 들어간다고요. 하나님이 필요 없어요. 내 세계가 나의 희망이고 나의 자부심이고 나의 가치고 나의 의미에요. 내 세계를 건드려버리면 이건 용서가 안돼요. 용서가. 그런데 유월절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분노가 들어있어요. 시편 7편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매일같이” 뭐 하시는 분이다? “분노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 매일같이 분노한다. 누굴 향해서 분노하겠어요? 사람 향해 분노하는 거죠. 그런데 그 시편 7편11절 말씀이 안 들리고 쉴드 당해서 추방당하는 이유가 내가 아끼고 싶고 내가 유지하고 싶은 나만의 의미 있는 세계가 따로 여기서 내가 만든 나만의 소박한 창조세계가 따로 마련되어있어요. 내 안에. 내 안에 나의 무덤이 있는 게 싫어. 그게 싫다 이 말이죠.
예수님 피를 이용해가지고 내 세계를 따로 키우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안에 대마초 키우는 거예요. 하다하다 자기 안에 경작을 해. 구약에는 이방민족처럼 돼지 잡아서 영광 돌려요? 아니면 양 잡아서 영광 돌릴까요? 본인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지만 신약에는 일체 없습니다. 예수님 오셔가지고 모든 말씀이 예수님께 된 이상은 ‘내가 뭘 하면 내가 살 수 있습니까’가 없어요. 왜? 진작에 죽어야 될 대상이고 모든 시공간에 대해서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노래 안 하고 가사만 보겠습니다. 이 가사 쓴 마음, 심령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돌아올 줄 모르고’
이게 뭐에요? 자기만의 시공간이 있지요.
‘서쪽 하늘 문 틈새로 새어드는 바람에 떨어진 꽃냄새가 나를 울리네
가야해 가야해 나는 가야해 순이 찾아 가야해
누가 이런 사랑을 본적이 있나요 나이는 18세 이름은 순이’
참 간단해요. 순이를 왜 찾습니까? 내가 어릴 때 봤던 18세 순이가 나의 창조 세계에 행복의 요소로서 이미 갖추어져있는 거예요. 그런데 18세 순이를 나이 80 되서 찾고 있다고요. 지금쯤 찾아봐야 70이 넘었어요. 그런데 자기 마음에는 18세 순이에요. 18세에서 스톱 됐어요. 똑같은 거 아닙니까? 우리 아들 취직되는 거, 내가 이렇게 돈만 벌지만 장가가고 시집가게 되면 엄마 효도해줄게 야야 마음만 해도 고맙다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이 세상에는 나를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왜? 해방감 때문에. 해방감. 나 혼자 살고 싶어. 나 혼자. 나 혼자 사는 조건이 뭐다? 쉴드 치는 것. 방패를 나를 지키는 방패를 쳐버리는 거예요.
아까 십자가 후에 제자들이 자괴감 갖는 것은 뭐 때문입니까?? 기억 때문이죠. 우리가 교회 30년 50년 다녀보세요. 가면 어떤 기억이 있느냐 하면은 나도 간증집회 할 정도로 어떤 기적 같은 그 기억들이 있다고요. 기억들이 있는데 그게 잘 실현이 안 되니까 그런 기적 같은 간증은 포기하더라도 은근히 우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 기적이 빨리 한 두 가지 건져서 남들한테 나 이렇게 하나님 사람 맞습니다 하고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은 그런 충동이 있을 거예요. 그것이 침해당하면 쉴드 쳐버립니다. 그것이 침해당하면. 나 신앙 있다는 것을 티내는데 그것에 훼방질하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안 듣지요. 거부해버립니다. 십자가 얻고 성령 얻고. 언약 얻고 있는 것은 자신의 기억만 있는 겁니다. 그리고 10분 쉬어야 될 기억만.
■강남-누가복음 22장 53절 (어두움의 권세) 240507b-이근호 목사
예수님은 전후 사정을 다 알고 계세요. 예수님은 이미 전후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하신 말씀 중에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 받고 부활한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 뒤돌아보니까 군데군데 예수님께서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다 섞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제자들이 알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장 9절 한번 봅시다. 이제 우리가 알아차릴 차례지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여기 돌 나오지요. 돌이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습니까? 돌은 인간들 보기에는 무생물, 다시 말해서 생명이 없는 무생물체에요. 또 돌의 특징은 뭐냐? 죽은 거죠. 돌의 특징은 죽은 거예요. 죽고 존재 흔적만 생명의 흔적이 아니고 죽은 존재의 흔적만 그 자리에서 시공간의 일부로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발로 차도 아무 소리 안 하고 차이는 그 너무나 무능력한 쉴드 치지 않습니다. 돌이 막 피하고 이러지 않아요. 그런데 그 돌이 무엇과 접촉이 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이 되어버리면 그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의 속성을 보여주는 그날이 온다는 거예요. 이걸 이미 제자들에게 다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어요.
이번에 누가복음 19장 40절 한번 봅시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거 과장법입니까? 죽음 안에서 살아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님의 그 무덤 안에 시공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할 때에 구약에 전쟁할 때에 지진이라든지 또는 우박, 여호수아 전쟁할 때는 뭐가 멈췄습니까? 해가 멈추었다. 시공간, 시간과 공간 대자연이 전쟁을 치르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면서 이끌지요. 18만5천명 죽은 거 보세요. 아침에 천사가 와서 앗수르 군대 다 죽였지요.
왜 그렇게 히스기야 왕 때 그렇게 죽이면서 왜 이스라엘 왜 망하게 했는가? 성경에 보면 수백 군데 나와 있어요. 내가 이스라엘 멸망시키는데 앗수르와 바벨론은 내가 쓰는 몽둥이라고 했습니다. 몽둥이 들고 누굴 치느냐? 자기 백성을 친다. 자기 백성을. 멀쩡한 자기 백성을 왜 치느냐? 멀쩡하지 않았어요. 멀쩡하다 멀쩡하지 않았다 기준을 어디에 기준 하느냐? 그 이스라엘 안에 선지자를 보냅니다. 선지자를 보내는데 선지자를 보내는 족족 선지자를 핍박하고 때로는 죽이기도 해요. 예레미야도 여러 번 죽이려고 했고요. 하여튼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 겁니다.
아까도 했지만 다시 한번 묻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 안 듣습니까? 그 이유가 뭡니까? 자기 안에 기존의 시공간을 통해서 자기만의 세계를 여기에다가 형성하는 거예요. 자기만의 세계를. 내 것이 있으면 내가 된다는 것. ‘나’가 된다는 것.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나’가 되는 거예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요 실은요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할 때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그런데 마태복음 6장 33절 한번 봅시다. 주님께서 정말 무책임한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원하는 것을 줄게 이렇게 한다고요. 이게 참 무책임하고 인간에게 능력 없게 만드는 건지. 인간은 순서를 바꿉니다. 입을 것 먹을 것 주면 그 나라 의를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인간은 내가 사는 게 우선이에요. 그 나라 의는 일단 살고 보고 나중이에요. 그 나라 의를 구하는데 조건부로 구합니다. 뭐냐 하면은 내 것 살려주면 제가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주님께서 인간들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마태복음 5장 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 옛 사람이라고 되어 있지요. 옛 사람. 인간은 옛 사람 밖에 없어요. 그런데 새 사람은 없어요. 새 사람은 누구한테 있느냐 하면은 나는 너희 할 때, 너희는 예수님이 먼저 생기고 난 뒤에 예수님에 의해서 생산된 자기 백성을 너희라고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하루라도 맹세 안 하고 산 적이 없어요. 맨날 기도하고 맨날 맹세하고 해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나님 뭐 하십니까? 나를 지켜주세요. 나를 지켜주세요. 맨날 이게 인간들의 하는 일이에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이 너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럼 기도하지 말라는 건가? 갑자기 해방감이 확 밀려오네. 기도 안 해도 되네. 이게 아니고 기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이 그 나라 의에요. 예수님의 하는 일에 네가 휘말려 들어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이상으로 다른 것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다시 말해서 네가 끼어들 시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네가 함부로 할 수 있는 하늘아 땅아 예루살렘아 어떻게 해달라. 네가 요구할 쨉도 못되고 그런 자격도 없고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인간은 겁을 집어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어둠의 권세도 이미 죽었고 성도도 이미 죽었고 둘 다 죽었어요. 뱃지가 주의 이름이냐? 아니면 행함책이냐? 뱃지만 달았을 뿐이지 양쪽 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한결같아요. 마찬가지에요 양쪽 다. 겁을 집어먹을 자격도 입장도 있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겁이 나서 하는 게 기도에요. 겁이 나서. 그래서 성도의 기도는 겁을 내서 하는 기도가 아니고 오늘도 말씀대로 저에게 쏟아져주시옵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말씀 안에 주님이 살아있어요. 저의 지금 살아있음을 통해서 증거 되게 해달라 표현되게 해달라 그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도는 바닥이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바닥을 주신 거예요. 모든 일에. 다시 말해서 모든 일에 자기 연민을 끼워넣지 말라. 스스로 자기한테 어후 불쌍해 이러지 말란 말이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느껴지지요. 이것은 뭐냐?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기 싸움을 했지 영적 싸움은 주님에 의해서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영적싸움을 할 마음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우리는 나의 싸움에도 지금 헉헉 거리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영적 싸움까지 우리는 할 자신감이 없어요. 영적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연보다 월등한 존재의 싸움이에요. 대자연을 뛰어넘는 그 존재에 대한 싸움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싸우라 이 말이죠. 어떤 싸움? 영적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을 하면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아까 바닥 했잖아요. 바닥에 놓인 게 뭐에요? 돌. 돌 같은 존재. 돌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돌이 자기 연민에 빠질 리가 없지요. 내가 여기 놓여있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되어있고 딸로 태어났다 아들로 태어났다 정했습니까? 아니지요. 말씀이 도달할 때 돌은 비로소 살아있게 됩니다. 말씀의 살아있는 도구로서 우리는 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이 안 오면 그냥 돌이죠. 도올 김용옥 되지요. 그냥 돌이에요. 그런데 그 돌을 가만두지 않지요. 악마가 사람 되게 만들지요.
자, 하나님의 영적 전쟁은 어떻게 하는지. 성경에서 영적 전쟁하라고 하는데 모호하게 느껴지고 감이 잘 안 잡힐 거예요. 신약은 아니지만 구약에도 영적 전쟁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은 다윗이었어요. 다윗이 영적 전쟁을 할 때 다윗 본인도 굉장히 난처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은 본인이 하지 않고 주님이 하셨는데 사람들은 누가 했다고 자꾸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다윗 본인이 했다고 오해를 하니까 참 다윗 입장에서 난감한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다윗에게는 성신. 그리고 다윗 본인이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윗을 가지고 라이벌로 여겨가지고 공격을 해대요. 그 사울에게 뭐가 들어갔느냐 하면은 그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다 했습니다. 이건 그냥 미친 거예요. 자기 사위를 못 잡아 죽여가지고 창으로 던져도 안되고 사위도 나쁜 사위도 아니고 혜택도 많이 입었어요. 사울 왕이 악신 들렸을 때 사위가 기타 치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악신이 잠시나마 떠나있었어요. 그런데 집요하게 사울은 오직 진짜 한 놈만 죽인다 있잖아요. 한 놈만 잡는다. 오직 다윗만 잡아요. 왜 그래 정말. 왜 하나만 죽여요 그래. 다윗 숨겨줬다고 그 동네 제사장 다 죽여버리고요.
이게 뭐냐? 우리는 이제 알지요. 악마는 언약맨을 노린다. 언약이 있기 때문에 노린 거예요. 다윗에게 언약이 있기 때문에. 그걸 누가 아느냐? 귀신이 알지요. 귀신 들린 사울이 다른 사람은 관여도 안 해요. 언약을 받은 자를 노리죠. 신약에 오면 누굽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악마는 알아요. 그러나 악마 밑의 인간들은 그걸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악마가 시키는 대로 그들은 본성적으로 십자가라는 무덤 안에서 죽어야 영생이 있고 다른 데는 영생이 없어요. 십자가 안에만 영생이 있다는 이 사실을 질겁을 하지요.
그럼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되죠. 그래서 다윗의 가치를 알아주는 걸로 구약에. 다윗과 함께 있으면 생명, 다윗과 함께 있지 않으면 적 이렇게 돼요. 그러니까 유월절 날 양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 아니면 곡소리 나는 거. 점점 더 이것이 그 율법이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가요. 그 기준이. 내부로 들어오면서 이스라엘 자체에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두 패로 나뉘어져요.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엘리아와 함께 7천명 나머지는 가짜. 바알과 함께. 나머지는 바알과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천국 갈 자와 절대로 천국에 들어서는 안 될 자를 구분하는 식으로 오늘날 성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성도. 성도. 자기 싸움하고 있으면 안돼요. 영적싸움을 해야 되는데 자기 싸움하면 안됩니다.
사무엘상 25장에 거기에 여인 하나 등장합니다. 이름이 아비가일. 이 아비가일이 성경에 이뻐서. 안 그랬으면 다윗이 결혼 안하죠. 25장 3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이렇게 나오지요. 둘 다 돼요. 총명하고 용모 되고. 구약이니까 구약적 안목으로 봐서 여기서 총명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들릴라 같이 얼굴 이뻐도 성질 더러우면 그건 안 되고. 그런데 문제는 그 아비가일이 기혼자라는 거예요. 유부녀에요. 남편이 뭐냐? 나발이에요. 나발. 이름이 나발이에요.
자, 나발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은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이방 족속이죠. 기준이 뭐냐 하는 거예요? 다윗 따르면 살고 따르지 않으면 죽는 이 기준에 있을 때에 그 기준이 나 다윗 믿을래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다윗을 따름으로서 자기 쪽에서 자기 세계, 작은 자기만의 세계가 언약으로 인하여 더불어 무너져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 것 안 다치고 구원 받는 방법은 없어요. 내 세계가 무너지는 거예요.
그럼 그 당시에 기혼녀이니까 그 세계는 가정의 세계죠. 남편에게 주도권이 있으니까. 그런데 우연히 다윗이 먼저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나발부터 만났죠. 나발이 양털 깎고 있으니까 다윗이 소년들 보내서 좀 도와달라고 했고 나발은 안 도와주는 거예요. 정치권들 너희들 싸움에서 나 너희 편 들기 싫다. 요즘같이 깡패들이 입후보 다 하는데 너 뭐 보고 도와주나 뭐 이런 거랑 똑같은 거예요. 차기 대통령 될래? 이런 식으로. 나는 전혀 희망 안 보이는데? 다윗?! 요즘 돌아다니는 깡패 나부랭이가 한 둘이 아니야 이런 거예요.
그때 다윗과 함께 있는 사람이 600명 정도 있었는데요 다윗이 뭘 공격하느냐 하면은 여기서 이상한 질문, 사울에게는 그렇게 쫓기면서도 욕 한마디 안하던 다윗이 이방족속 갈멜족속 나발에 대해서는 다윗이 자기 할 일을 해버려요. 자기 할 일 뭡니까? 언약을 지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맺은 언약에 대해서 모독하는 것은 이거는 가자지역 남부까지 완전히 폭격을 해버려요.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거죠. 휴전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어딜 휴전해. 싹 밀어버려.
그런데 문제는 아비가일의 평가가 어디서 그런 평가가 되었느냐 하는 거예요. 아비가일은 뭐냐? 남편 집안 죽어도 내가 이 비언약과 더불어 내가 시집은 비언약 집안에 왔지만 시집 왔다고 와서 시집에 내 몸을 맡기긴 싫다. 나는 다윗을 안다. 왜? 골리앗을 이겼잖아.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있음을 다 안다고요. 그 장인어른이 그렇게 괴롭혀도 다윗은 말 안하고 계속 기름부음의 위치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하나님께서 주신 왕 자리는 이건 내가 쟁취한 자리가 아니라 이거는 어디까지나 양을 하게 하신 왕의 소관이 되는 거예요. 왕의 소관. 성도가 누구 소관입니까? 성도는 성고 소관이 아니에요. 성도가 성도 되게 하고 천국 가는 것은 누구 소관입니까? 이게 주님 소관이죠. 적어도 이걸 믿어야 성도지요.
말은 이렇게 설명해놓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네~ 좋겠네는 믿음이 아니지요.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게 아니고 이거는 원하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그냥 나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거예요. 내가 빼도 박도 못 하고 안돼요. 내가 천국 가는 이 노선을 내 힘으로 변경을 못 시킨다니까요. 일부러 한번 시켜보지요.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하면서 해보죠 되는가. 성경책 막 찢고 해보세요. 너 오늘부터 지옥 간다 이게 되던가요? 그래서 성도는 겁을 낼 자격도 없는 거예요. 겁을 먹을 자격도 없어요. 내 인생을 내가 할 것 같으면 겁 먹지요. 남들 평가 생각해서. 내가 나 죽는 것도 나와 상관없는 일. 내가 죽는 것도. 주님이 알아서 죽일 거예요. 죽어가면서 박수치면 돼요. 저 잘 죽였습니다 박수치면 돼요.
홍해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하지 마세요.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따라올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오늘날 성도가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 믿고 복음 듣고 따라갑니다. 나가! 나가리 된다. 안돼요. 내가 뭘 하는 게 주께 끌려가는데 전혀 기여를 못해요. 보탬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운명 같은 것. 내가 어떻게 손댈 수 없는 운명 같은 것. 그걸 바로 사랑이라고 하지요. 사랑은 하나님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는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해봤어요? 저사람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지 않는 관계. 결혼하기 직적의 남녀. 너무 심했나? 결혼식 2시간 전. 결혼식 입장 100m전. 상대에게 다 줘도 조금도 아깝지 않는 것. 왜 아깝지 않을까요? 상대는 평가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을 오해했어요. 사랑의 조건에 양이 대신 죽어주는 거지 나는 안 죽는 거예요.
그런데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은 나 죽는 것에 네가 합류하는 조건 하에 사랑이고 영생이고 생명입니다. 죽는다 해가지고 뭐 이렇게 선교하다 욕 얻어먹는 거 아니고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평가를 내가 중지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 왜 자꾸 아프나!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 내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일체 내가 평가를 중지하고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 삶이 무슨 삶입니까? 믿음의 삶이에요. 믿습니다 삶이 아니고 그분의 결과물이 나라는 그 관계의 싸움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게 되면 거기서 성도 아닌 사람은 티가 나요. 화를 막 내요.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 공격하느냐. 왜 열심히 하는데? 열심히 하니까 불신자의 공격이 화가 나는 거예요. 그쪽에서 너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네 안에 예수 키우려고 했잖아. 대마초 피우듯이 키우니까 공격하는 거예요.
사울의 공격을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반응 안 했습니다. 너 말이야! 하고 막 술 먹고 달려들면 아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술 깨거든 이야기합시다 이런 식으로. 술 깨거든 이야기합시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니까 아내가 화가 나가지고 네가 뭐야! 이렇게 하니까 여보 잠깐 술 깨고 이야기하자 말리는 것처럼. 술 먹는 남편 없잖아요. 그럴 일은 없는데. 나는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이걸 믿는 게 아니에요. 이게 믿어져요. 내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고. 소유권이 내게서 주님께 넘어간 것을 설명할 수 없어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따라올 수 없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존재로. 거기서 나에게 기대했던 사람들이 어떤 인간적인 면에서는 좀 미안해요.
여기서 나발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18절에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에게 가자 해가지고 직접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다윗을 만납니다. 그럴 때 21절에 다윗이 이런 선언을 해버려요.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 말을 하고 있는데 아비가일이 이런 말을 합니다. 25절 “내 남편은 불량합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복수하지 마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된 일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고 이걸 덧붙여요. 26절에. 그러고 난 뒤에 38절에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다윗이 쳤습니까? 누가 쳤습니까? 다윗은 안 쳤어요. 다윗은 나발을 죽일 마음이 없어요. 왜? 아내가 대신 사과를 했기 때문에 죽일 마음이 없는데 누가 개입합니까? 여호와가 개입했죠. 여호와가 개입했다는 말은 천국에 갈 사람과 따라오지 못할 사람의 개입에 누가 개입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개입해서 다윗 주위에 사건을 유발시킨 겁니다. 사건을 만드는 거예요. 이게 오늘날 성도의 존재의 위상입니다. 성도가 “너 지옥에나 가라” 하고 저주하고 돌아다니는 게 성도의 할 일이 아니에요. 성도는 그 나라 의에 관한 것을 주님에게 지시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자, 이래가지고는 이해 안 되니까 더 간단하게 합시다. 성도는 뭐냐 하면은 ‘내가 뭘 할까요’가 아니고 주님으로부터 지시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은 지시받는 게 안 보이고 저 사람 따라하기, 흉내 내기, 저 사람이 구원받으면 나도 저 사람처럼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자기 입장에서 하는 거예요. 할 때 평을 하는 거예요. 성도는 남을 평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지시받기 때문에 평을 해도 누가 평을 해요? 주님께서 그 사람으로 평할 거예요. 주님께서 왜냐 하면은 내가 주님 지시 따른 이것이 내가 따르고 싶어서 따르는 게 아니고 주님 지시가 나의 의도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 더 쎄기 때문에 그럽니다. 이게 바로 그 치열하다는 영적전쟁이에요. 전혀 치열하지 않아요. 무덤덤해요. 남들이 하는 일에 무덤덤한데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전쟁의 현장이에요. 가장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 그냥 무덤덤해요. 예민하지 않습니다. 나는 돌이야. 나는 그냥 지시에 따라서 부르짖는 돌이야. 그냥 나는 돌이거든요.
39절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나발이 무슨 악행 했습니까? 떠돌이한테 쌀이고 뭐고 다 빼앗겨야 돼요? 그래야 속이 시원해요? 나발은 다윗을 도와주기 싫어서 안 도와준 게 아니고 다윗이 누구냐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도 그렇게 불신자도 그렇고 그들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예수를 알아요.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그 죄를 사하고 그걸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이걸 불신자도 알아요. 어떤 국민에게 25% 선교가 되려면 이미 100% 복음을 다 아는 국가에요. 25%가 가만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나발을 불었겠습니까. 알아도 아 예수님은 훌륭하구나 하고 끝났어요. 끝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열심히 일하기 나름이라고 이렇게 정리된다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악하다는 생각을 안 해요. 비바람 부는 날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애쓰는 어머니. 장한 어머니 상장 줘야 되지 않습니까? 악한 자에요. 왜? 자기 세계, 내 자식 잘된다는 자기 세계. 내가 창조한 내 세계 때문에 예수님 복음이 먹히질 않아요. 나는 멋있게 살고 싶고 성공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복음이 안 들어와요. 세상에 이처럼 무서운 일이 없고 이처럼 자연스러운 일도 없어요. 너무나 평범한 일이에요 이게. 오히려 예수님한테 지시받는 게 이상한 일이지 그냥 나는 이미 죽었다. 죽은 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그걸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게 아니고 성경이 그러니까 그런 거지 뭐 라고 이거는 기적에 속하는 겁니다. 돈 주고 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고 난 뒤에 이렇게 해놓고 다윗이 아비가일한테 가가지고 다윗이 당신을 아내 삼고자 합니다. 복음이 통한다 이 말이에요. 프로포즈. 지금 다윗에게 아내가 있는데 추가! 밥 하나 추가시킨 거예요.
또 43절에 보면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그럼 여기에 아히노암은 왜 아내가 되었는가. 복음 통하겠지요. 다윗 좋겠다 하지 마세요. 다윗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자기 뜻이 아니고 자기 주변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언약의 가족들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를 지금 다윗이 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의 욕심 같은 것은 여기서 용납이 안 되지요.
자, 영적전쟁을 보면서 다시 누가복음 돌아가봅시다. 이제 보셨으니까 이제 이 말은 이해가 되실 거예요. 55절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벌써 정경이 눈에 훤하지요. 모닥불 빛에 의해서 베드로 얼굴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겠지요. 그러니까 이 말은 베드로의 얼굴이 확실치 않다는 거예요. 베드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렇죠.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그것도 사람들 있는 데서 나발을 불었어요.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네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너가 나 언제 봤다고! 일단은 대차게 한번 나가보는 거예요.
자, 보세요. 여기서 베드로가 어느 대목에서 예수님 믿었습니까? 어느 대목에서. 지금 자기 처신을 누가 조정하고 있어요? 자기가 조정하고 있지요. 마귀가 그것을 알고 있지요. 마귀가 알고 있고 베드로는 본능적이에요. 본능적으로. 단지 어두운 불빛만일까요? 무슨 권세입니까? 어두움의 권세에 이미 베드로는 놓여있어요. 어두움의 권세는 시간도 흐르고 공간 시간이 이미 있는데 그게 사람들은 현실 세계라 이야기하고 주님은 미리 뭐로 규정했습니까? 어두움의 세계라고 이야기하고. 베드로는 그걸 어두움의 세계라고 이해 못하고 이건 내가 알아서 처신하면 내가 안 죽고 있는 그런 현실 세계라고 보고.
그런데 어두움의 권세가 쪼아옵니다.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그러니까 이제 베드로가 약간 큰소리를 더 냈겠지요. 왜냐하면 강한 부정이 있어야 됩니다. 나 아니야! 나 아니야!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맞아! 맞아 그 사람 맞아. 얼굴이 왜 팔려가지고. 맞아 라고 할 때 그때가 뭐냐? 어두움의 권세죠. 어두움은 저녁부터 어디까지? 다음날 어디까지입니까? 새벽이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는 소리 나는 짐승은? 닭.
바로 베드로는 어두움의 권세 앞에서 베드로의 자신의 위상은 보잘 것 없다는 어두움이 나보다 쎄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는 빠져나가지도 못할 뿐더러 아예 빠져나갈 생각조차 안 했다는 사실. 비록 예수님이 자기 눈 앞에 보여도 다른 데 보면 예수님하고 눈 마주쳤다고 나와 있거든요. 예수님이 있어도 우리 인간들의 기본은 뭐냐?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를 있으나 마나한 그런 이순신 장군 강감찬 장군 정도 존경하는 인물 그 정도지 정작 존경하고 중요한 인물은 어두움의 권세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으려면 나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다는 거예요. 이걸 베드로가 보여주는 거예요. 베드로가 큰 일 한 거예요. 닭이야 새벽 되면 우는 게 자기 역할이니까. 꼬끼오 하고 우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보면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자, 여기에 베드로 있습니다. 베드로 눈에는 주변 사람들이 보이지요. 주변 사람들. 베드로는 이걸 뭐로 보지 않습니까? 어두움의 권세에 매여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냥 나도 사람 너도 사람 사람 대 사람 정답게 사는 것이 유일한 인간 현실의 정확한 규정이고 정의내린 거죠. 인간이 알 수 있는 현실은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여기 닭이 울었단 말이죠. 닭. 닭은 원래 새벽에 우는 것이 자기 할 일이니까 그래야 알을 낳으니까 울겠지. 그런데 갑자기 닭 우는 것과 이것을 한꺼번에 어디에 집어넣습니까? 이 모든 배경 위에 뭐가 있었다? 주님의 예언 주님의 말씀이 있었던 거예요. 주님의 말씀의 주인공으로서 베드로를 지목했다는 사실이에요. 베드로를 지목했다는 사실.
주님이 베드로를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11제자에게 “나는 너희를 끝까지 사랑한다” 했잖아요. 베드로가 배신하는 것도 예언되어 있지만 배신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는 너를 놓치지 않고 만든다는 말씀도 아울러서 우리는 기억을 해야 돼요. 내 행동 엉망이다 개차반이다 이거는 기억하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한다. 우리를 의인되게 했다는 것. 그 사실을 이러한 자기의 파멸과 무너짐을 통해서 긍정적인 주님의 조치도 확신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에게 믿음 주시는 방법이에요. 너 망할 대로 한번 망해봐라. 나한테 기대 걸고 나한테 자부심을 가지는 그것이 얼마나 어두움의 권세 안에서 히마리 없이 날라가는지를 네가 인생 살아가면서 체험을 혹독하게 체험을 해봐라. 예수 믿는 사람치고 동생한테 잘 해주고 해도 소용없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게 나의 의에 불과한 것. 뭔가 무섭고 두려워서 나의 평가가 겁나서 주님 평가보다도 남들의 평가. 너 예수 믿더니만 별로다 그 소리 겁나서 그 모든 것이 반드시 우리가 치러야 될 뭐라고요? 복된 체험이었습니다. 그래야 내가 무너지니까. 그래야 내가 무너져요. 그래야 내가 돌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하면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돌인데 구원 안 하면 어떻게 돼요? 돌은 부르짖게 되어있다니까요. 돌로서 돌이 인간되어 부르짖는 것이 아니고 돌로서. 돌로서 부르짖고 호산나 하고 외치게 되어있단 말이죠. 그래서 62절에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통곡한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고요. 그 다음에 63절부터 66절까지 예수님 눈을 가리고 때렸다 했잖아요. 우리 입장을 때리는 사람으로 생각해보세요. 때리는 사람은 어디에 속합니까? 어두움의 권세에 속하지요. 어두움의 권세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어두움의 권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이건 예수님이 규정하신 개념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냥 장사하고 밥 먹고 살고 월급쟁이 하고 직장 생활하는데 무슨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두움의 권세 아니에요. 자기는 천사 같애. 아침의 천사. 엔젤. 아침에 활짝 깨어있는 천사 있잖아요. 아침에 맑은 이슬을 머금은 천사.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싶어가지고 남한테 뒤지지 않는 깔끔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자부하는 사람인데 어두움의 권세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뭐 이단이나 신천지.
오늘 아까 유투브 이단이란 걸 녹음을 했어요. 첫 문장이 뭐였던가요. 내가 바로 이단이라고 생각해야 된다. 이단은 나 말고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이단이다. 내가 이단. 그러니까 여기 만약에 우리가 취직해가지고 경찰로 취직해가지고 그때는 로마 군병으로 취직해가지고 파견근무하면서 자칭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가 왔다. 때렸겠어요? 안 때렸겠어요? 때리지. 왜? 간수는 누구보다 높으니까? 죄인을 사람 대우하면 나중에 간수를 물어뜯어요. 그래서 길을 잘 들여야 돼요. 이유 없이 때려줘야 나는 이유 없이 맞아야 될 존재인 것을 알고 고분고분하게 되거든요. 그게 바로 매뉴얼대로 하는 거예요. 욕하고 때려서 너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아무 쓸모없는 존재. 너를 때리는 우리가 지금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생각을 우리가 대변해서 우리가 당신을 폭력을 행사하겠다 해서 간수니까 대표해서 그렇게 하지요.
그 다음에 65절 보세요.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욕 얻어먹었어요. 바로 이것이 마셔야 될 잔 안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예수님 잔 안에 이스라엘 등장인물 가운데서 자기를 치는 로마 군인들까지 역할 다 맡아가지고 다 들어있는 거예요. 이 잔을 주님께서는 마시면 주님은 영생입니다. 영생이에요. 따라서 어느 인간이 이걸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하지요.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못해요. 예수님만 생명이고 예수님만 살아있고 나머지는 어두움의 권세에 매여 있는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은 무덤을 만들어요. 십자가 무덤을 만들고 성령을 보내가지고 자기 택한 백성을 그 무덤 속까지 들어와요. 십자가 속까지 들어와요.
그러면 나는 이미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주께서 이미 나에게 지시를 하시는 주님이 살아있는 식으로 산다. 이걸 내가 믿어라가 아니라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일은 이렇게 추진되고 있다. 이게 믿어지는 게 이상할 정도에요 믿어지는 게. 자신은 바닥을 치시고요 아무것도 없다 무의미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기뻐하고 이것도 감사하고 자기가 무의미할 때 아무 것도 아닐 때 nothing일 때 모든 일에 감사하는 주님의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놀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보다도 내가 일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고 민감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스스로 내 것 만들고 내가 높아지려는 의욕 때문에 생긴 현상이오니 주여 우리로 하여금 바닥을 치게 하시고 낮게 하시고 모든 것이 주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