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불 속의 성전

아빠와 함께 2024. 2. 5. 08:33

20240202a 울산강의-역대기상(27강) 29장 15절 : 불 속의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9장, 역대상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다윗 왕이 솔로몬에게 물려주려고 한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왜 자식한테 성전을 굳이 물려주는가? 성전은 어떤 인간도 천국에 가지 못 한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하나님 쪽에서의 만드신 확실한 뜻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가로막아버리는 그러한 장치가 성전입니다.

성전 할 때 이것 하나만 생각하면 돼요. 성전은 불이 있는 곳.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에 그냥 막은 게 아니고 뭐로 막았느냐 하면 두루 도는 불로써 막아버려요. 두로 도는 화염검 불붙는 천사를 통해서 성전 가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화되고 막혔다, 가지 못 한다가 다윗 시대에는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성전으로 나타납니다. 성전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천국을 가지 못 한다. 갈 수가 없는 곳이라는 걸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면 다윗 이전에 모세는 뭘 했는가? 하나님은 가지 못한다는 것을 뭐로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는가? 가지 못 한다는 것은 불이 있어 가지 못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집에 가게를 안 한다든지 해서 별 안 바쁘면 올 수 있지 않겠는가? 안 바쁘기 때문에 못 가는 것이 아니고, 안 바빠도 못 가고 바빠도 못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모세는 뭐냐 하면 율법으로 천국을 갈 수 없다는 것을 막아놨어요. 신명기 4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불붙는 산,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났는데 모세만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불이 붙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는 불을 뚫고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모세가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불러주니까 그렇게 된 거고.

그리고 신명기 5장 24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불 가운데 나오는 음성이에요. 불이 붙는 가운데 음성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라 했습니다.

여호와가 소멸하는 불이다.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여호와를 만날 수 없다.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 그런 뜻입니다. 어느 인간이 불을 통과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 합니다. 그것을 다윗 시대에 분명히 보여주는 게 성전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전 이전에 성전은 율법에서 나온 건데 이 율법에서 성전의 기능을 했던 것을 ‘성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레위기 10장에 보면 성소의 특징이 잘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0장 19절에, 오늘 성경 엄청나게 찾을 거예요. 많이 찾습니다.

레위기 10장 1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어디서 죽느냐 하면 성소에서 죽어요. 성소에서 맞아죽는다든지 심장마비로 죽은 게 아니에요. 성소에서 죽일 때 확실하게 죽이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누가요? 제사장이. 자기 직장인데 직장에서 불을 다루는 자가 불에 의해서 죽습니다. 죽고 난 뒤에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의 아들 네 명 중에서 두 명이 죽었어요.

레위기 10장 16절에,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속죄제 드릴 염소는 제사장이 일단 고기는 먹고 불살라야 되는데 그냥 불살랐어요. 그래서 모세가 왜 율법대로 하지 않느냐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크게 노할 때에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모세 조카입니다. 형님 아들이거든요. 그때 형인 아론이 여기에 대해서 성경해석에 대해서 반박을 하게 됩니다.

반박하는 게 뭐냐 하면 모세 쪽 주장은 이거에요. 18절에,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할 때에 19절에, 아론에 모세에게 반박하기를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 듣고 좋게 여겼다고 돼 있어요.

이게 18절, 19절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뭐라고 지시했고 지시한 것에 대해서 뭐라고 반박했는데 이 이야기 듣고 ‘그래 그 말이 맞네’라고 했느냐? 그 취지가 뭔지를 잘 알아보기 힘들지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뭐냐 하면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법대로 하자. 속죄제 염소는 고기부터 먹고 나중에 나머지는 불태워야지 고기도 안 먹고 불태우면 되겠느냐, 라고 했을 때에 아론이 반박하기를 지금 우리 일하는 직장이 장소가 성소다. 고기 먹고 잡으나 안 먹고 잡으나 여기에서 우리 아들 둘, 나답과 아비후가 죽지 않았느냐?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럼 모세 해석할 때 제대로 하자는 게 뭐냐 하면 성소 이곳이 바로,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성소 이곳이 불로서 사람을 죽이는 곳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 속에 정중앙에 배치를 해놨어요. 하나님은 불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이 이스라엘이 인정할 때만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성소가 가운데 있고 바깥은 성소 덕분에 성소에서 나오는 살려주는 그것에 의해서 그들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랬어요.

따라서 율법의 정신은 고기를 먹고 불태우나 고기 안 먹고 불태우나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그것 아니라도 향로 불을 제단에서 들여오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했다고 죽여 버린다면 고기를 먹고 난 뒤에 잡았느냐, 안 잡았느냐 보다도 다른 변수가 생겨버리면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이게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나는 평생에 살인한 적이 없다, 라고 하는 사람 있을 거예요. 또는 ‘나는 지금까지 간음한 적 없다’ 이런 사람 있단 이 말이죠. 그러나 그 사람은 뭘 빼먹느냐 하면 간음을 안 하나 살인을 안 하나 간에 우린 이 땅에 뭐 하러 태어났다 이 말입니까? 불로써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것 하나 위반 덜 했다고, 그건 지켰다가 그 불로 사람 죽이는데 무슨 소용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율법의 해석이에요. 이래도 불에 죽고 저래도 불에 죽게 하겠다는 것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취지에요.

하나님께서 이런 취지를 가지고 모세 율법으로 왔기 때문에 오늘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남기는 유산이 뭐냐? ‘성전’이에요. 왜냐? 성전은 불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성전이 불이 있는 곳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생소하게 들으면 안 돼요. 그걸 약간 여러분한테 익숙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불로 통과한 짐승의 피가 묻은 것, 이러면 좀 상세하게 되지요.

인간은 자기 죽음을 양이나 염소한테 전가시키고 그때부터 양과 염소는 자기 죄를 전가시킨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데 그 마주치는 결과는 뭐였습니까? 제단에서 홀라당 불에 타죽는 거예요. 그겁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모세 때는 성소였고, 그걸 매일같이 고정적으로 본격화하는 것은 뭐가 된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떻게 해도 천국에 못 간다. 이걸 확실히 해주는 것이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왜 그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는가? 다윗은 자식이 열 명 있었어요. 다윗이 생각하기에 유일한 자식은 이겁니다. 다윗의 후계자를 보통 누구라 하죠? 다윗의 후계자는 솔로몬이죠. 여기 우리가 역대상 29장하면서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라고 아예 지정을 해줬습니다. 아들에게 이 나라를 물려준다.

다윗의 후계자는 솔로몬인데 다윗이 생각하는 진짜 자식은 뭐냐? 다윗의 죽음,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지요. 아버지의 죽음이 담겨있는 자식이 솔로몬입니다. 다윗에게 유일한 자식이라고 한다면 솔로몬인데 열왕기상에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왕 될 때 아도니아란 사람이 있어요. 솔로몬은 네 번째고 아도니아는 세 번째 아들이에요. 큰 아들, 둘째 아들은 죽었고 세 번째 아들이 육신적인 서열상 자기가 후계자라 해서 자기가 왕 되려고 다 꾸몄지요.

그런데 솔로몬이 아도니아를 죽입니다. 아도니아가 왜 후계자가 될 수 없는가? 아도니아는 아버지의 죽었다는 사실을 담을 수 없는 자식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언제 죽었는가? 다윗은 본인이 죽었다는 거예요. 본인이 죽었다가 두 번째 본인이 돼야 돼요. 다윗₁이 죽어야 다윗₂가 돼요. 그러면 첫 번째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었고, 첫 번째 다윗은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것이 다윗이 생각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 보면, 밧세바를 범하고 난 뒤에 밧세바 남편을 죽이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하게 됩니다. 그때 나온 시가 뭐냐 하면 내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음이라. 다윗에게 누가 있다? 모친이 있다. 모친의 죄를 누가 인수받았다는 거예요? 다윗이. 인간의 죄는 하나님 앞에, 아까 했지요. 인간이 천국에 못 가는 이유는, 인간이 에덴동산에게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불로써 못 가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다윗은 모친의 죄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모친의 죄의 자식은 뭐냐 하면, 이건 다윗의 죽음을 의미하는 겁니다. 왜? 죄 값은 사망인데 죽잖아요. 다윗은 자기가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비로소 내가 육신은 살아 있지만 실은 내가 이미 죽은 자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가 죽은 자란 사실을 누굴 통해서 아느냐? 자기가 죽인 우리야 장군을 통해서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나의 죽음은, 본래 내 모습을 알려주는 것은 나는 죽을 자라고 기정사실화시키는 어떤 자의 죽음만이 우리의 진짜 본질을 알게 하는 거예요. 본인이 죽었고 두 번째로 태어난다는 것은 본인의 죽음을 담고 있을 때 그게 두 번째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 말이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신약에 오면 이 말이 어려운 게 아니라 쉽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죽는 것은 너의 죄로 인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뭐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죽음 안에 천국 백성이, 인간은 천국 못 가요. 불로 갈 수 없는 인간이 어떤 조건 하에 죽느냐 하면 누가 인간이 죽었다는 사실과 그 죽었다는 것을 완전히 종결시킬 수 있는 다른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₁, 다윗₁은 통과 못하지만 그 다윗₁의 죽음을 품고 죽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안에서 두 번째 다윗은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지요. 아브라함이 죽었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아브라함이 요한복음 8장 56절에 ‘내가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했다’ 이 말이죠(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면 죽어야 될 것은 아브라함₁이고, 그리스도,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화시키는 또 다른 분, 또 다른 분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죠. 그 또 다른 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부활 속에 자기는 새로운 아브라함₂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리가 천국에 가지 못 한다는 것이 이게 여러분, 슬픈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문항이 두 개밖에 안 되는데? 우리가 천국 못 간다는 게 슬픈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이죠. 더 이상 내 운명과 내 팔자에 대해서 내가 신경을 그만 써도 되는 거예요. 심지어 자살해도 구원받는다니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게 자살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번개탄 안 피워도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죽은 인간이 살려하니까 이 자체가 우악스럽고 억지스러운 행동 아닙니까.

자살을 착각이거든요. 내가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착각이에요. 이미 죽었는데 또 뭘 죽어요. 태어날 때부터 죽었는데 뭘 또 죽어요. 그러니까 착각인 거예요. 착각의 비극적인 결말이 자살이잖아요. 우리는 지연된 자살이고. 매일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가게 하겠다고 하고, 이미 죽었는데 뭘 하겠다 하고.

예수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다시 설명하면 다윗의 후계자는 뭐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품은 자만 솔로몬이다. 왜냐하면 우리야를 다윗이 죽였지요. 우리야의 아내가 누굽니까? 밧세바지요. 이 밧세바에서 난 아들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이에요. 솔로몬이 밧세바를 통해서 났다는 것은 우린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솔로몬,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 물론 육신의 아버지는 다윗이지요.

그런데 다윗으로 하여금 너를 낳게 한 그 아버지는 누구냐? 두 번째 다윗이 되는 것은 누구의 죽음 때문입니까? 우리야 장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시편에 보면. 주께서 꺾으신 뼈로 나로 즐겁게 하옵소서(시51:8) 자기가 꺾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꺾었다는 거예요. 자기가 우리야 장군을 죽여 놓고 주께서 꺾으신 뼈라고 하는 거예요.

왜? 다윗이 이미 죽은 자, 이미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행동을 어떻게 살인을 하던 안 하던 이미 죽어 마땅한 자로 들통 내게 하신 것은 우리야 장군이 맞닥뜨렸고 우리야 장군이 그때 시키는 대로 놀았으면 되는데 휴가 와서 시키는 대로 곱게 안 해서 자기 아내와 합궁을 했으면 아무 일이 없는데 휴가 줘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친구와 술 먹고 하다가 결국은 죽었잖아요.

다윗 입장에서는 ‘네가 뭔데 내 시키는 대로 안 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요. 근데 반대로 다윗이 죽어 마땅한 거예요. 다윗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불쏘시개 역할, 그냥 소모되는 역할로 우리야 장군이 들어간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서는 족보를 솔로몬의 아버지를 누구라 하느냐 하면, 솔로몬의 어머니를 밧세바라 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누구라 하면 다윗이라 하지 않고 ‘우리야에게서’ 우리야로 보고 있지요. 솔로몬을 억울하게 죽은 우리야의 자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아버지가 누굽니까? 육신의 아버지 말고 죄를 넘겨준 아버지 말고 우리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는 누굽니까? 아바 하나님, 하나님이 육신으로 죽은 우리를 두 번째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거예요. 지금 다윗을 통해서 그 절차를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 안다 치고 계속 진도 나가겠습니다. 다윗의 후계자는 솔로몬입니다. 그럼 솔로몬에게 아버지가 되어서 자기 후계자 솔로몬을 위해서 선물을 주는데 그 선물은 뭐냐 하면 성전이다. 왜 성전을 주느냐? 성전은 현재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어디를 못 간다?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몸을 누구나 갖고 태어났다. 천국에 갈 수 없는 게 기정사실이 된 거예요. 어떻게 해볼까란 생각조차 해선 안 되는.

왜?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 당시는 성전을 통해서 못 간다는 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성전은 뭐가 있습니까? 불이 있다. 상시적인 불. 상시적인 불이 피워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거기 가면 죽어요.

역대상 29장에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바 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1절)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보세요. 솔로몬에게 성전을 물려주지만 사실은 솔로몬 안에, 솔로몬은 다윗의 자식이잖아요. 솔로몬이란 자식 안에 뭐가 반복되느냐 하면 죽은 아버지가 반복되어야 한다. 더 상세히 이야기해서 아버지를 죽이게 한 사건의 반복이 되면 그것이 뭐냐 하면 다윗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자식, 다윗의 자식, 다윗의 자식 해서 마지막에 뭐가 나오겠습니까? 다윗의 후손이 나오겠지요. 다윗의 후손이 누구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 35장인가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을 예수님을 다윗이라고 이야기해요. 37장 24절, 내 종 다윗이 그들의 뭐가 된다? 왕이 된다. 희한하죠.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된다.” 다윗 이미 죽었는데, 죽어 버렸는데? 다윗의 후손이 왕이 된다, 말이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거든요.

예수님 오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요. 다윗의 자손인데 여기 왜 다윗으로 돼 있지요? 그 자손 안에 뭐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다윗이 그대로 살아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저는 다윗의 사건이라 하는데 성경에선 다윗의 사건이라 하지 않고 다윗의 언약이라고 해요. 더 풀이하면 다윗의 언약사건, 다윗에게 일어났던 그 일, 다윗은 이미 죽은 자였는데 꺾으신, 다윗 대신 죽은 어떤 분의 죽음이 와서 죽어 마땅한 다윗이 살아버렸어요. 생명을 얻게 된 거예요.

그 죽은 다윗을 살리는 그 장치, 천국에 못 간다는 하나님의 약속품어 있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가 돼요. 우리 안에 십자가 사건 터지면 나는 못 가는데 십자가 사건이 담고 있는 나는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천국에 도착을 도달해버린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불을 통과하면 우린 어떻게 됩니까? 죽지요. 그 죽음을 미리 앞당겨버린 거예요. 사건 안에서.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나를 죽게 한 사건 안에 천국이 담겨 있었던 겁니다. 그게 언약이기 때문에 약속이기 때문에. 그것을 반복하는 게 뭐다? 이게 성전이라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사건 터졌어요. 에덴동산에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인간들이 이 세상에 추방되었잖아요. 추방될 때 그냥 추방되었습니까? 이 땅에 기다리는 게 있지요. 저주가 기다려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 땅으로 온 게 아니고 저주의 땅으로 온 겁니다. 인간의 저주의 땅으로 갔다 이 말이에요. 인간은 저주의 땅으로 추방되었으니까 저주받은 인간이 에덴동산은 들어갈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에덴동산에는 뭐가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았느냐 하면, 뭐가 있느냐 하면 생명나무는 멀쩡해요. 선악과는 따먹었지만 생명나무는 멀쩡하잖아요.

그러면 생명나무가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생명나무가 작동하는 방법은 선악을 아는 자는 이 에덴동산에 살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생명나무가 가동을 하는 중이란 뜻이에요, 그게. 생명나무가 그냥 있다가 아니라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자는 이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는 그 일을 계속하면서 생명나무는 존재하는 거예요.

인간이 저주받아야 생명나무가 의미가 사는 거예요.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줘야 천국이 의미가 살아요. 뭐 지옥 갔다. 안 됐다. 이러지 마세요. 생명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지옥 갈 자는 지옥 가야 돼요. 마귀와 추종자는 지옥 가야 된다고요. 그러면 생명나무가 자기 고유의 활동을 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몸부림치는 남편이 일주일 동안 출장 갔다. 그럼 아내는 침대에서 편안히 잘 잤겠지요.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 집에 남편이 왔다는 티가 어디서 납니까? 밤에 아내가 침대 밖으로 튕겨 나왔을 때 ‘아하 이 집에 남편 왔네. 드디어 몸부림치는 사람 왔어.’ 몸집 작은 아내는 침대 밖으로 떨어져나가야 진짜 이집에 남편 온 게 티가 나잖아요.

생명나무는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해줘야 이게 천국다워요. 천국에서는 생명나무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추방을 하는 거예요. 저주받을 자를 저주받을 자 맞는다는 것을 생명나무가 불을 뚫고 이쪽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는 뭐라 했어요? 그게 율법이에요. 율법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불에서 나오지요. 뒤에서 불을 통과해서 이쪽으로 오는 거예요.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성소를 통해서 오고, 다윗 때는 뭐로 온다? 성전. 다윗은 성전 만들기를 준비했으니까 만드는 걸 통해서 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성전에 의해서 저주받은 자가 있다는 말은 그러면 성전의 기능, 그리고 취지가 완성이 되게 되면 이 성전은 성전의 어떤 기능 때문에 지옥이 발생되는지 알려주는 것이 다 드러날 때 비로소 성전 기능은 완료가 되는 거예요. 생명나무가 저주를 유발했다는 거예요. 생명나무에서 활동이 저주를 유발했다. 바로 그 취지를 담아버리면 그 사건이 담아 있으면 그 사람은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계속 활동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 나오시는 그곳으로 돌아간다. 성도는 예수님이 나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인간은 천국에 못 간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 갑니까? 성도는 이미 천국에 와 있지요. 인간은 천국 못 가지만 성도는 이미 천국에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인간과 성도 사이에는 이게 인간의 힘으로 성도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안 되지요.

이런 거예요. 불가능한 것 속에서 어떻게 가능이 나오느냐 하는 이야기를 성경이 하고 있어요. 불가능은 전제입니다. 인간은 불가능한데 다른 나라에는 성전이 없잖아요. 인간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느냐 이 말 아닙니까? 불가능한데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여기에 뭐가 돼야 돼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려면 외부적인 것의 투입될 때 들어가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속에 외부적인 것이 있어요? 뭡니까?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사건, 성령, 하나님의 은혜, 선물, 복음 다 외부적인 거예요.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이 여러분 속에 들어갈 때 외부적인 것의 투입으로 말미암아 불가능한 것이 뭡니까? 가능하게 된 겁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소질 이거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물어봅시다. 불가능한 것이, 오늘 히터가 고장 나서 은근히 내심 기대했지요. 오늘은 안 졸겠지 기대했는데 이게 불가능한 일이네요. 불가능한 것이 외부에서 투입됐다는 이 말은, ‘외부적인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본래적인 것’ 인간은 처음에 만든 본래적인 것을 상실했어요. 잊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본래적인 것을 외부적인 것으로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우린 본래적인 것을 잊어버렸으니까.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는 본래적인 것을 찾아갈 수 없어요.

그러면 이제부터 본래적인 것이 무엇이냐, 본래적인 것이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가? 다윗의 자식한테는 본래적인 것을 물려줘요. 여러분도 여러분 자식한테 본래적인 것을 물려주세요. ‘니 목적이 뭐냐’ 그런 것 주지 말고, ‘네가 원하는 뭐냐’ 보지 말고. 네가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본래적인 거예요. ‘네가 아무리 애써도 이미 죽은 자야. 너는 천국 못 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투입되는 것이 본래적인 거예요.

본래적인 것이 뭐냐?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은이에요. 이게 에스겔 28장 16절에 나옵니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이게 산인데 하나님의 산이에요. 산이란 말은 에덴동산에서 물이 흘러나오지 다른 데서 물이 흘러나와서 에덴동산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가 있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강이 네 개 있어요. 비손 강이 나오고 기혼 강, 힛데겔이란 강이 나오고 유브라데라는 강이 나와요(10~14절).

비손이란 뜻은 뭐냐 하면 ‘거품’이다.

기혼은 ‘터져 나옴’ 분출되는 것,

힛데겔은 ‘급류’,

‘풍족함’의 유브라데. 유브라데는 풍족함, 결실이란 뜻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산인데 터져 나왔으니까 급류니까 산에서 뭐가 내려온다? 물이 사방으로 급작스럽게 흘러내려간다는 뜻이에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느냐? 지금은 홍수 이후기 때문에 현재 지리적으로 찾을 수 없어요. 홍수로 육지가 엉망 되었으니까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노아 홍수 이후에 저주를 받은 땅이기 때문에 여기서 에덴동산을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이 인간이 출생한 본래적 동산이거든요. 본래적 동산이 이게 산이고,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어요. 에덴의 동쪽. 본래적인 것은 첫 번째 뭐라 했습니까? 이게 산이다. 우뚝 솟은 산이라 물이 급류로 분출하듯 흘러가요. 물이 모이는 곳이 아니고 물이 흘러가는 곳이에요. 본래적인 것이니까. 두 번째는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다. 본래적인 겁니다.

그러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은 어떻게 됩니까? 율법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그냥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지기 때문에 율법을 인간이 지켜서 타고 율법이 있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어요, 없어요?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거는 성전 산, 모리아 산도 마찬가지에요. 이것도 산이에요. 성전이 있던 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올라갈 수 없는데 출입구가 몇 군데냐? 출입구가 한군데에요. 에스겔 40장부터 42장까지 성전 측량하는 것 있지요. 성전 측량을 보면 성전의 구조가 뭐냐 하면 출입구가 동쪽이에요. 성소의 입구도 동쪽, 솔로몬 성전의 입구도 동쪽, 에스겔에 나오는 최후의 성전 입구도 동쪽. 동쪽에서 누가 와요. 누가 오느냐? 여호와가 와요, 동쪽으로.

동쪽에서 여호와가 오기 때문에 이거는 위에서 갖다 붓는 식으로 분출하는 식으로 주는 겁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그냥 일방적으로 퍼부어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만찬할 때 내 떡 내 잔을 마시라고 그냥 주는 거예요. 외부적인 것이, 본래적인 것이 그냥 주는 겁니다.

주시는 취지가 네 쪽에서 못 올라오는데 이미 너는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어떤 시도나 어떤 노력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에게 본래의 것이 은혜로 주어지게 되면 그 본래의 것을 따라서 오신 그 출입구를 따라서 같이 어딜 갈 수 있느냐? 그 본래 낙원으로 갈 수가 있어요.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어떤 분이 이런 전화를 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목사님, 낙원과 천국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낙원이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에 준해서 천국 갈 사람이 대기하는 곳이 낙원이에요. 예를 들면 십자가 달릴 때 강도보고 예수님께서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지요. 아직 천국은 아니에요.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엘리야, 모세와 예수님이 변화산에 나타났을 때 모세와 엘리야 가는 곳이 바로 낙원입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도 거지가 어디 갑니까? 천국 갔습니까, 낙원 갔습니까? 아브라함의 품, 낙원에 가 있었다고요. 그 낙원에 간 자가 천국 가려면 어떤 사건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사건이 일어나야 낙원에 있는 자가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 전화한 분이 뭘 생각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14장에서 베드로보고 너는 가지 못 한다. 처소가 마련되면 나 있는 곳에 오게 한다 할 때 그 처소란 곳이 비로소 천국이란 것을 자기가 처음 알았다는 거예요. 믿는 자가 가는 곳은 낙원이지 처소가 아니에요. 처소는 예수님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을 때 앉아있는 그곳에 같이 합류하는 게 처소가 돼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거.

왜 주님께선 그런 복잡한 절차를 왜 그렇게 구상을 하셔야 되느냐 이 말입니까? 그거는 끝까지 인간은 본래의 분이 오시지 아니하면 본래의 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본래의 장소,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기껏해야 낙원에 가지만 그거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의로 인하여 가는 곳이에요. 예수님의 의는 십자가 죽고 부활해야 주어지는 거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천국 가면 죄 용서받는 자가 아니고 의인이 되는 거예요. 거룩한 자가 되는 겁니다. 단순히 나쁜 것 용서받은 정도가 아니고 본격적으로 의로운 자가 돼요. 누구로부터 인정받아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다고요.

따라서 솔로몬이, 역대상 29장, 솔로몬이 외부적인 것을 역대상 29장 4절에 보면,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장인)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그리고 여기 7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 역사를 위하여 금 오천 달란트와 금 다릭 일만과 은 일만 달란트와 놋 일만 팔천 달란트와 철 십만 달란트를 드리고” 이렇게 돼 있어요. 어마어마합니다.

금 삼천 달란트, 요새는 백이 톤 정도 돼요. 은 칠천 달란트, 이천사십이 톤. 이거는 다윗의 개인소유입니다. 역대상 22장에 나오는데. 그건 개인소유고 그다음에 백성들이 낸 금은 오천 달란트인데 백칠십 톤, 일만 다릭(페르시아 금전으로 백삼십 그램)이 백이십구 톤 돼요. 은 만 달란트가 삼백삼십팔 톤 됩니다. 이건 백성들이 감당해야 돼요.

그러니까 다윗도 개인적으로 내고 백성들도 개인적으로 내고. 물론 백성들이 많이 내지만 다윗도 못지않게 많이 내요. 그렇게 해서 금, 은, 철, 놋으로 완전히 그리고 기타의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민 것이 바로 뭐란 말입니까? 그게 바로 성전이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 이 땅에서 하늘나라가 어느 정도 인간의 것으로 묘사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대단한 곳이냐를 성전을 짓고 이걸 누구한테 넘긴다? 자기는 죽고 난 뒤에 누구한데? 아들 솔로몬에게 넘기는 겁니다. 거기에 담긴 의미가 뭐냐? 10분 쉬고 합시다.

 

 

20240202b 울산강의-역대기상(27강) 29장 15절 : 불 속의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성전 짓는데 있어서 다윗만 참여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다윗과 온 회중이 다 여기에 매달려서 물자를 제공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소 짓는데도 마찬가지에요. 출애굽기 35장 20절에 보면, 성소를 만들고 거기에 제사 지내는 여러 가지의 기구를 만드는데 있어서 필요한 자재들을 물품들을 제공하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가슴 핀과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 왔으되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무릇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 왔으며 무릇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자는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무릇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자는 가져 왔으며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낳고 그 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을 가져 왔으며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낳았으며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 왔으며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 왔으니 마음에 원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남녀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빙자하여 명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즐거이 드림이 이러하였더라”(출35:20~29)

우리나라 IMF 터질 때에 집집마다 금 수저라든지 돌 반지 내놓는 식으로 한 마음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역대상 29장에도 마찬가지로 여기서 백성들이 드릴 마음이 있었단 말이죠. 방금 출애굽기에 대해서 역대상 29장 14절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에덴동산의 산, 하나님의 산에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의 길인데 그 하나의 길을 열어주는 것, 하나의 길이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외부적인 거예요. 결정할 수 없는 불가능, 결정 불가능한 내 마음을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 결정 가능한 마음이 된 겁니다. 그러면 결정 불가능한 내 마음은 이거는 죄로 인하여 죽은 마음이라면 이미 영생을 얻은 마음은, 결정 가능한 마음으로 영생 얻은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복음이라는 이 상황을 위해서 그동안 우물쭈물하던 내 인생을 결정 못하던 자들이 결정적인 복음을 위해서 여기서 갖다 낸 겁니다. 드린 거예요. 합류를 시킨 거예요. 더는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더는 내가 아니고 이쪽에 결정 가능한 속에 들어가 버리면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주의 것이라는 것은 나는 없다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나는 어떻게 됐고? ‘나는 무엇이다,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가 아니라 ‘나는 목사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었다. 죽은 자가 나다’ 이 말입니다.

결정 가능이 생명나무가 이 땅에서 작동할 때는 너 죽었어, 라는 방식으로 작동을 하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것을 몸에 품으면 그 사람이 산 사람이에요. 성도에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세상 살기 굉장히 쉽지요. 이래 이야기하면 우리교회 예배당 짓는데 얼마 내야 됩니까, 이래하거든요.

내는 게 아니고 그냥 내지 마시고, 그냥 가지고 맛있는 걸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이게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마트 가서 밀키트 칼국수 사서(2인분 하더라도 1인분밖에 안 나와요) 점심 먹더라도 주께서 주의 것 먹이시는 방법이란 말이죠. 지중해 크루즈 여행해도 주께서 크루즈 여행하라고 시키신 일이란 말이죠. 뭐 이해됐지요? 교회 예배당 얼마 내야 됩니까, 그런 것 있어요? 내기는 뭘 내. 가만있어도 내 것이 아닌데 뭘 내요.

그 조건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 나는 죽었다는 사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품을 때 나는 주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런 노림수, 꼼수 쓰지 마세요. 그런 것 없어요. 내가 죽지 아니하면 천국 가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죽는 방법은 절대로 안 죽어요. 죽는 척이나 하지 절대로 죽지를 못해요, 인간은. 내가 나를 죽여서 죽은 나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이란 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성전이 다윗언약에 속합니다. 다윗언약의 요소가 성전이에요.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로 하여금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되새겨주는 일을 해요. 그게 신약에 오면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성령께서 우리 앞에 십자가를 들이대는 거예요.

그러면 쉽게 해서 성령께서 뒷주머니에 십자가와 묵주 갖고 있다고 이마에 갖다 대는 거예요. 주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허망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귀신아 물러가라고 십자가를 우리 이마에다 딱 대고, 어디 귀신이 나타나느냐? 죽은 자가 내 인생이, 니 인생이 어디 있어요. 죽은 잔데.

그래서 성전의 취지는 여기 15절 봅시다. 좀 더 다윗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요.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이 이야기를 왜 굳이 합니까? 성전 건축하는데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성전은 있어야 되고 나는 없어져야 되고, 그런 뜻이에요.

내가 없어지는 것과 병행해서 성전이 생겨나야 된다. 숨어있던 성전이 죽은 나를 통해서 노출돼야 된다,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성전을 뭔가 바치는 게 아니라 내 자체가 성전의 재료가 되는 거죠. 에베소서 2장에 우리는 성령 안에 한 성전으로 지어간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21, 22절)

그러면 성전을 짓는다는 말은 나의 일평생은 나의 장례식장을 건설하는 비용이다. 장례식장을 다른 말로 하면 무덤이죠. 나의 평생은 내 무덤을 만들기 위한 시간이 우리 일평생입니다. 알라스카의 에스키모가 이글루를 만들 때 바깥에서 만드는 것도 있지만 안에 들어가서 만드는 것도 있어요. 안에 들어가서 얼음조각으로 짜 맞춘다고요. 우리의 평생은 우리의 죽음을 짜 맞추는 시간이 내 죽음 시간이에요. 내가 만든 무덤에 나로 하여금 늘 죽었음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합니까?

그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에 이미 나와요. 자기 무덤 만들기. 이 무덤 이름을 ‘막벨라 굴’이라 해요. 헤브론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 지금은 정확한 장소가 어딘지 몰라요. 막벨라 굴을 만듭니다. 처음에 막벨라 굴을, 그러니까 매장지죠. 아브라함 자손의 매장지가 약속의 땅에 있다는 것은 창세기를 봐서 굉장히 이게 하나님께서 마음먹고 심도 있게 주목하는 업적이에요.

왜냐하면 죽어야 사니까 죽을 장소를 특정한 거예요. 약속의 땅에 죽으면 약속의 땅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그 취지를 막벨라 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들게 합니다. 원래 매장지가 없었어요. 없었는데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족장과 돈 주고, 돈을 줬다는 말은 정식 부동산등기가 된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름으로 부동산등기가 되고 아브라함 자손들은 동일한 굴에 다 묻히게 돼 있어요.

창세기 23장 9절과 17절에 보면 드디어 돈 주고 아비멜렉 족장에게서 막벨라 굴을 얻습니다. 그쪽에선 그냥 하라 했는데 값을 주고 해요. 값을 치루지 않으면 정식 영원한 자기 소유가 될 수 없거든요. 주께서 뭘 주고 우리를 천국에 구원한다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슨 값 주고 한답니까? 피를 값 주고 하지요. 그러니까 내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것은 있다, 없다? 없지요. 왜? 내 값으로 내가 천국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나 착하게 살았네, 하고 내가 나서면 안 돼요.

여러분들은 이건 꼭 기억해야 돼요. 착하게 산 사람 어디 갑니까, 죽어서? 지옥 가지요. 악하게 산 사람 어디 갑니까? 지옥 가지요. 지 뭐 잘났다고 천국 가요. 내가 악한 자라고 아는 사람 어디 갑니까? 천국 가지요. 내가 착한 일도 악한 일이라고 아는 사람이 천국 가는 거예요. 악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착해서 천국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떤 일해도 이게 악한 자, 죄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천국 가는 겁니다.

천국 간다는 말은 내가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필히 뭐해야 된다?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착한 일해도 악하다 하는 걸 뭐로 아느냐 하면 언약을 통해서 알아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안다고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우리의 매장지에요.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겁니다.

창세기 23장 19절에 그 막벨라 굴에 최초로 입주한 사람이 있어요(“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그게 사라입니다. 부인 사라가 거기 묻힙니다. 창세기 25장 9절에서는 아브라함이 거기 묻혀요. 사이좋게. 그다음에 창세기 35장 27~29절에는 이삭인데 이삭이 헤브론에 죽었다 했는데 장소가 안 나왔지만 아마 막벨라 굴일 가능성이 있지요. 창세기 49장 29절에 보면 야곱이 내가 죽거든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 했어요. 그리고 창세기 50장 13절에 야곱이 죽고 난 뒤에 막벨라 굴에 묻힙니다.

요셉은 묻히지도 못해요. 해골 되어 여호수아가 요셉 해골 들고 나옵니다. 요셉은 야곱언약의 마지막 증거자기 때문에 요셉의 해골이 약속의 땅을 점령하게 해준다는 믿음 하에 해골 들고 나오는 거예요. 해골에 언약이 묻혀 있으니까. 언약대로 죽었으니까. 해골 들고 나오는 것은 언약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은 취지로 해서 들고 나와서 세겜 땅에 묻힙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야곱의 집안에서 막벨라 굴에 묻히는데 특이하게 막벨라 굴에 묻히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죽고 베들레헴에 묻힌 자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로 라헬입니다. 라헬의 매장지에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메시아가 나와요. 유다고을 베들레헴아 네가 적지 아니하다. 아주 보잘것없는 고을이지만 거기서 누가 탄생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실 분이 거기에 탄생하는 거예요. 그러면 에덴동산의 길이 몇 군데라 했습니까? 딱 한 군데지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습니다. 그런데 출생은 라헬이 매장된 베들레헴에서 출생해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시지만 출생지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로 시작해요. 왜냐하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그때 헤롯이 아기 예수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베들레헴에 있었으면 죽었어요. 천사가 와서 이집트로 빼돌렸기 때문에 안 죽은 거예요. 그 대신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 대신 누가 죽느냐 하면 라헬의 두 살 밑의 애들이 죽어요. 그 당시 아줌마의 애들이 죽는 걸 성경에서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이뤘다 해서 라헬의 자녀들이 아기 없음으로 통곡했다고 돼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가 교회라는 겁니다. 이 땅은 노림수가 있고 그 노림수는 하나님의 언약 자국과 흔적을 용납지 않고 죽음으로 죽여 버리는 그러한 세력이 이 땅을 지금 통치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악마의 세력의 한계가 뭐냐? 죽음 뒤까지는 못 쫓아온다는 게 한계에요. 예수님을 죽이는 데까지는 할 수 있는데 부활까지는 따라올 수 없는 거예요. 거기 갭이 있어요.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3일 간의 갭이 있어서 그 갭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인간도 못 뛰어넘어요.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그걸 뭐가 막는다? 성전이 막아버려요. 모든 인간은 성전의 불 가운데 통과 못합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 갭이 있어요. 성전에 오실 분이 그 갭을 통과하실 분이 성전 취지 유지하면서 따라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게 바로 다윗의 등불이에요. 사무엘하 21장 17절, 이것 찾아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좀 지루하더라도 성경 찾아봅시다. 사무엘하 21장 17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여기서 다윗을 이스라엘이 등불이라고 이야기해요.

이래서 등불이 취지를 잘 모르겠지요. 취지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열왕기상 12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의 등불이라 했는데 등불이 하는 일이 뭐고, 유독 등불을 다윗 쪽에 두는 이유가 뭐냐? 그걸 열왕기상 11장 36절에 보면,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이제부터 제가 설명을 복잡하게 할 수밖에 없으니까 잠깐만 정신을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등불이라는 게 여기 솔로몬이 지금 솔로몬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였습니까, 결국 무너졌습니까? 무너졌지요. 왜 무너지지요? 아버지가 성전 지으라고 재료 다 줬고 솔로몬도 그렇게 했거든요. 심지어 솔로몬 초반기를 괜찮았어요.

여기 오늘 본문 역대상 29장에 보게 되면 성전만 지으라고 한 게 아니고, 20절에 보면, “다윗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라 하매 회중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머리를 숙여 여호와와 왕에게 절하고 이튿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수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이요 또 그 전제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이 날에 무리가 크게 기뻐”했다 했어요.

지금 성전을 짓지도 않았어요. 성전 지으려고 만반의 준비한 그것도 좋아서 일천번제를 드린 겁니다. 번제 제물이 일천이란 뜻이에요. 일천번제는 바로 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이 산당에서 일천번제 드렸잖아요. 3장 4절에 솔로몬이 그 단에서 일천번제 드렸어요. 기브온에서 산당에 들어가죠. 성전 없었으니까.

그럴 때 누가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너한테 뭘 줄꼬, 이렇게 했어요. 그때 솔로몬이 아버지가 물려준 백성들에게 아버지에게 준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나한테도 허락해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네가 원수 멸하기를 원하지 않고 네가 잘 되고 부자 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 네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원하니까 하나님의 뜻만 주겠다고 해서, 이때는 솔로몬이 다윗이 처음 성전 지을 때 그 마음가짐 자세가 유지가 된다고요.

다시 첫째 시간 복습해봅시다. 성전이 뭐라 했습니까? 인간은 천국에 가지 못하고 막혀있다는 거예요. 왜?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죽어 마땅하다고 아는 게 바로 복이에요. ‘착한 사람이 천국 간다.’ 그건 복을 못 받은 거예요. ‘나쁜 사람이 천국 못 가고 지옥 간다.’ 그건 마땅한 거고. 그러나 아무리 착해도 그건 죄기 때문에 천국 못 간다는 것을 아는 자가 복 받은 자에요.

이것은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발견된 겁니다. 외부적인 것, 본래적인 것이 왔을 때 비로소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 착하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제부터 나쁜 짓하려고 애쓰지 말고 어떤 것도 죄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그 작용이 주님께서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매일같이 넣어주는 겁니다.

내가 뭘 해도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범사에 감사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지요. 어떤 일도 불평이 있을 수 없지요. 이만큼 살아온 것도 내 뜻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할 때 범사에 감사하지요. 범사에 감사한 마음을 주시기 위해서 계속 살게 해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러면 다윗의 등불이란 건 뭐냐?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 뭐가 꺼질 때도? 이스라엘 모든 불이 꺼졌을 때도. 심지어 성전의 불이 꺼졌을 때도 다윗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 거예요. 그럼 다윗의 불이 언제 유난히 빛날까요? 그것은 바로 유다나라 이스라엘이 간당간당 불이 꺼질 때 오히려 등불은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다윗의 등불 언급할 때 등장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15장 3절에 보면 아비얌이라는 유다나라 왕 때에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뭘 주셨다 했습니까. 등불을 줬지요. 예루살렘이 뭐하는 곳인지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걸 알기 위해서 히브리서 12장을 가봐야 됩니다. 12장 18절과 22절, 18절에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곳이죠. 아까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불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통과 못합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 통과 못해요. 천국 갈 수 없어요. 없는데 그게 무서운 산이죠.

그런데 22절에 보면, 그 무서운 산에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뭡니까? ‘예루살렘’이 나와요. 예루살렘이란 게 참 무시무시한 곳에 가 있는 겁니다.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에 예루살렘이 있어요. 거기에 많은 선배 신앙인들이,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23, 24절)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뭐냐 하면 성전인데 그 성전 기능은 뭐냐? 죽은 자를 성전에 뿌린 대신 죽었던 분의 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그 피가 뿌림을 당하면 죄로 죽은 자를 의인이 되어서 그 성전의 세계에 살 수가 있는 시스템, 그것이 가동되는 곳이 성전이에요. 그것이 바로 뭐냐?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다윗의 등불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다윗₁, 다윗₂ 그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다윗₁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살아 있다 할 때가 다윗₁이에요. 그런데 나는 죽고 우리야의 피가 내 안에 살아 있을 때 다윗₂가 되는 겁니다. 우리야의 피가 있어야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계속 각인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라는 그 사실을 내 마음에 품게 되면 나는 이미 죽었고 이제 더는 내가 내 안에 살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게 사시는 분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닌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 계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살아 계신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₂가 진짜가 뭐가 가짜냐 하면 다윗₁이 가짜가 되는 거예요. 인간이 출생했다. 진짜, 가짜? 가짜가 되지요. 인간이 출생한 게 가짜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며 하는 말이, 네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너는 하늘나라 못 간다 했거든요.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에서 태어난다는. ‘위에서’란 말은 외부적인 거예요. 외부적인 게 들어오지 않으면 너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거예요. 외부가 너를 장악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뭘 생각하는 하면 그 외부적인 요소, 성전의 요소, 내가 이미 죽었다는 요소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뭘 모릅니까? 내가 가짜란 사실을 알아요, 몰라요? 이것도 모르죠. 내가 가짜란 사실을 모르고, 내가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나를 뭐로 보느냐? 진짜 나로 보잖아요. 그럼 진짜 나를 가지고 평소에 우린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걸 한 번 생각해보자.

평소에 내가 나를 가지고 어떻게 삽니까? 그거는 우리가 말 안 해도 알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직장 가고, 나중에 퇴근해서 아는? 자나? 그러면 밥 줘. 밥 먹자. 왜 사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일요일에 교회 와서 살아 있으니까 천국이나 가자. 죽을 때 보험 하나 들어놔야지. 교회 출석했으니까 천국 보내주겠지. 왜? 나는 소중하니까.

가짜 나의 특징은 방금 뭐라 했습니까? 가짜 나의 특징은, 나는 소중하니까. 이 세상에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 대중가요 가사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한 마디로 다시 거꾸로 집약하면 뭡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쓰레기 같은 남편이 있고 쓰레기 같은 친구가 있으니까 그 두 쓰레기끼리 결혼해버려라. <내 남편과 결혼해줘> 통쾌하지요. 결국 그 결론이 뭡니까? 그 드라마의 결론은 뭐냐? 나는 소중하니까. 오늘밤에 호주와 한국대표팀이 축구한다. 호주 응원할 거예요? 대한민국 응원하지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요. 수련회 안 나오고 아 보러가는, 왜? 나는 소중하니까. 이게 뭐냐? 나는 진짜니까. 이게 모든 거죠.

그러니까 제가 왜 이런 말하느냐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는 것처럼 극히 정상적인 생활했다는 거예요. 그 정상적인 생활이 뭐냐? 그들로 하여금 망하게 한 거예요.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예루살렘이 있어요. 그 예루살렘이 가짜인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지런히 솔로몬이 남겨준 성전에서 제사 드렸어요. 그런데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 드린 그것이 가짜 성전인 줄을 몰랐어요.

아까 역대상 29장에서 다윗이 대표적으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뿐만 아니고 우리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성전 지으라고 귀한 것 드렸는데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것을 도로 드렸습니다. 왜? 나그네니까, 우리는 없어져야 하고 성전은 영원해야 되니까. 그때 그 마음이 그때뿐이었어요.

이 말은 뭐냐? 외부적인 것, 일천번제 드리고 수송아지 일천 마리 드리고 숫양 일천 마리 드리고 포도주 드리고 화목제 드렸는데, 역대상에서 그만큼 많이 드렸어요. 제사할 때 그 외부적인 게 항시 머무는 겁니까, 왔다가 떠나버린 거예요? 왔다가 떠나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구약이에요. 그게 구약시대의 특징이에요. 아직 다윗언약이 안착이 안 됐어, 다윗언약이 완성이 안 됐어요.

막벨라 굴에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리고 거기에 야곱이 있지요. 무덤이. 하지만 그게 가짜 무덤이에요. 결국은 구약이니까 이게 가짜가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선 그걸 모형이라 해요. 여러분들이 아파트 모델하우스 가면 아파트 모형 있잖아요. 조그마한 그 모형 안에 들어가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꾸역꾸역 내 몸을 모형인 줄 모르고 내 몸에다가 모든 재물과 예물을 다 바쳐요. 충성을 다 바치고. 왜? 나는 진짜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나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나그네 돼야 돼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가 망해도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열왕기하 8장 19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이게 누구냐 하면 아합의 딸 아달랴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어요. 우상을 섬겼단 말이죠. 여러분 구약을 보면 자꾸 이스라엘, 유다 망할 때 우상 섬겼다는 대목을 가지고 망했다 하잖아요.

우상 섬기는 게 뭐가 문제라서 그걸 왜 죄라고 하느냐? 우상은 나로 가짜라고 안 해요. 우리가 현재 있는 게 진짜라고 해주는 게 우상이에요. 말이 우상이지 사실 신이고, 하나님이라니까요. 사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사울에게 여호와는 뭐였습니까? 진짜 하나님이죠. 근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여호와가 뭐였어요? 우상이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여호와가 우상이었어요.

이거는 여호와가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 섬기는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십자가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내가 믿는 믿음이 가짜고 내가 소망하는 소망이 가짜고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모조리 가짜라는 사실을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자기는 진짜 순결한 순진한 마음으로 진짜 진심으로 자기가 믿는 줄 알았어요, 진심으로.

죽은 자의 믿음은 안 받아줍니다. 죽은 자의 소망과 사랑도 안 받아주고 헌금도 안 받아요. 하나님이 뭘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짜한테 받아서 뭐 할 건데. 하나님은 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죠. 받아 챙기는 분이 아니고. 하여튼 예배당에서 철야하고 가짜들 기도하는 것 보면 가관이에요. 가짜가 백날 쭈여, 쭈여, 쭈여 하고 있는데 쭈쭈바도 아니고.

가짜의 특징은 가짜로 시작해서 가짜로 말미암아 결국은 뭐로 돌아옵니까? 가짜로 돌아와요. 자기의 행함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거는 우상을 이용하는 거죠. 우상은 이용대상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이용대상이 아니에요. 인간에게 진짜는 내가 이미 죽었고, 또 죽어가고 있다는 것, 이것만이 인간에게 진실 되고 나머지는 다 가짜에요.

죽는다는 것이 백날 잘 먹고 잘 살고 부자 돼도 결국은 죽는 순간 부자고 뭐고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애를 세 명을 키우고 뭐 다 소용없어요. ‘내 인생 이래 조지는 것 네 탓이다.’ 백날해도 지 죽는 순간 그 불만도 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 피 흘려 죽는 순간 모든 것은 이미 종말입니다. 끝났어요. 인간이 애초부터 끝났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알려준 겁니다. 죽을 때.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거든요. 저 인간들 가짜라는 사실을 드디어 폭로할 수 있는 마지막 기준을 세우는데 하나님 완료했습니다, 란 뜻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가짜였던 거예요.

다윗의 등불이란 말은, 등불이 등불 되기 위해서 다윗의 혈통적인 자녀들이 유다의 왕입니다. 왕들이 전부 다 탈락을 해요. 그러면 다윗의 등불과 부합되는 다윗의 자식은 최후의 딱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올 때까지 왕들은 다 가짜에요. 다윗의 등불에 부합되지 않는 왕들이란 말이죠. 가짜를 양산해서 진짜는 따로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구약 역사에 담긴 취지였습니다.

이 문장을 쓸 테니까 여러분 유의해보시기 바랍니다. ‘언약이 죽음의 형태를 띠고 제자리로 찾아올 때 온 우주(피조세계)는 완성이 된다.’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으면서 누굴 찾아가느냐 하면 그 다윗언약의, 이제부터 어려워요. 어렵지만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이 문제에요.

성전이란 건물이 어떻게 인격이 되느냐? 성전이란 건물, 부동산이잖아요. 부동산이 어떻게 인격이 되느냐 이 말이죠. 물론 성경에서 간단하게 나와요. 요한복음 2장에서. 사십육 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이분은 예수님이다. 말로 하면 굉장히 간단한데요. 어떻게, 왜 성전이 건물로서 유지를 못하고 굳이 하나의 인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성경 들고 예배당에 가면 구원되는 것, 그게 가짜인 우리 보기에는 매우 간편해요. 법대로 지키면 되니까. 열한 시 예배에 참석하면 되니까 간단해요. 그런데 네가 성전이 되라 하면 성질난다니까. 내가 예배당 가는 것은 쉬운데 내가 예배당 돼야 된다는 말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예배당, 성전을 지었다 하는 것은 다윗언약 때 다윗이 받은 계시고요. 그걸 솔로몬에 완성되도록 다윗이 모든 건축자재를 준비 다했잖아요. 그때까지 성전은 건물이었잖아요. 솔로몬 성전. 그런데 그게 완성입니까, 완성 아닙니까? 그거는 성전의 완성 아니거든요. 건물, 건물 하다가 나중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니까 어떻게 돼요? 성전이 있는데 사람들의 마음가짐, 사람들 인격, 사람들의 인물 됨됨이는 어디로 가고 있더라?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자, 우상이라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우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성과, 업적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거예요. 왜? 나는 뭐하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내가 교회 가는 것도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고. 하나님 소중한 게 아니고 내가 소중하고. 내가 예수님 믿든 하나님 믿는 내가 소중하고. 우리 집안, 우리 가족이 소중하고, 남은 인생이 소중하고. 내 인생이 남 보기에 번듯한 인생, ‘거 봐. 이렇게 잘 살았잖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이기 때문에 나는 소중한 거예요.

이게 바로 내가 곧 뭐다? 내가 우상을 섬기는 게 아니고, 우상을 통해서 나에게로 오니까 내가 우상인 거예요. 신은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사울이 여호와 믿은 것은 여호와를 믿은 게 아니고 사울은 누굴 믿었어요? 본인을 믿은 거예요. 본인의 결정, 본인의 의지, 본인의 결심, 본인의 믿음을 믿은 거예요. 내가 예수 믿은 게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나를 믿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도가 아니고 일반 교인들은.

그러나 성도는 뭐냐? 성도는 지금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어요. 뭐냐 하면 외부적인 요소가 투입된 거예요. 외부적인 요소는 인격이 되려면 성전이 우리한테 되는 게 아니고 성전이 먼저 뭐가 되느냐?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등불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성전이. 예수님이 성전 되기 위해서 성전의 기능은 천국에 못 간다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서 막아버렸어요. 따라오려면 따라와라.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목숨 바친다 하니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그것 괜찮네. 따라와’ 이랬습니까, 못 온다 했습니까? 못 와요. 아까 했잖아요. 낙원과 천국의 차이점 말씀드렸지요. 천국은 못 가요. 우리는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갈 수 없어요. 처소가 마련되면 그때 오셔야 되는 겁니다. Understand? 이해해요? 그러면 더 이해하게 해드릴까요?

만약에 예수님이 안 오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오신다 해놓고 안 오면 어떻게 해요? 며칠이 못 되어 성령이 임한다 했는데 만약에 성령이 안 왔으면 백이십 명 예수님의 제자들은 뭐가 돼요? 기도만 냅다 했는데 전혀 성령의 불이 안 왔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인간이 그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안 한다면 누가 조져놨어요? 우리만 닭 쫓던 개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림도 가짜에요. 기다린다는 말은 항상 배후에 뭐가 있느냐? 주께서 응답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있는 이상은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두 주인을 섬기는 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게 있어요. 베드로가 고넬료 전도하려고 사전에 준비한 게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누가 활동해요? 천사가 와서 고넬료는 고넬료에게 갔고, 이쪽 천사는 베드로에게 갔잖아요. 둘이 머리 박듯이 만나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활동을 누가 해요? 천사들이 활동을 하지요. 성령님이 활동을 하지요. 주님이 활동을 하지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기다린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가 결과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기획하고 내가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는데 매순간 주님의 활동의 증거물로 우리를 삼아주시고 사용해주신 거예요. 오라 했는데 안 오네, 할 게 아니라 주께서 이미 내가 주께서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그거는 내가 사전에 준비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일을 일으킨 결과가 뭐냐? 주께서 하셨네요, 라는 고백이에요.

그렇게 되면 우린 뭐 됩니까?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나는 죽은 자가 된 거죠. 성전이 예수님이 되고, 그 성전 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와주시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 이미 들어온 거예요. 성전의 문지기를 얻든지 성전의 참새가 되든지 안 그러면 성전에 제비집을 짓든지 우리는 나타난 고백은 뭐냐? 세상의 천 날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는 것은 내가 말씀을 시편 84편을 지킨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뚫고 우리 안에 자리 잡았다는 증거에요. 역대상 29장이 여러분 마음속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나그네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주께로 온 것인데 이런 고백이 뭔가 노림수를 가진 고백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게 결과가 그렇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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