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신랑의 고백

아빠와 함께 2024. 3. 18. 07:28

신랑의 고백 

2024년 3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8:13-17

(18: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8: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 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8:15)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18:16)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18:17)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분명히 이스라엘이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나쁜 짓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스라엘은 말씀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줄기차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사태 추이를 생중계하듯이 환경을 만드십니다. 당연히 선지자 끊어지면 이스라엘도 끝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활용도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버틸 수 없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멸망이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파괴적 예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관성을 심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이 14절에 나옵니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 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레바논 산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눈 녹은 물은 지표면 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층면 아래로 스며들어가서 그 안에 들어있는 돌을 타고 지속으로 흘러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호칭하시면서 ‘처녀’라는 명칭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처녀는 혼인하므로서 끝이 납니다. 혼인한 자는 ‘처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이게 인간 세계의 한계성입니다. 그런데 인간들끼리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녀로 부름을 받을 수 있다면 여기서 이스라엘이 미처 모르고 있는 바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도리어 혼인하므로서 비로소 진정한 ‘처녀’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원리는 마치 레바논 산 정상에 쌓여 있는 눈이 이스라엘 평야 지하까지 마르지 않고 찬물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처녀’의 원래 의미는 어디에 나올까요? 창세기 2:22-25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없습니다.

아니, 아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몸으로 아담의 아내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아담 외에 다른 몸이 따로 있을 수 없음을 뜻합니다. 세상에서의 혼인은 각자 다른 식구들끼리 살면서 지내온 남자와 여자끼리 만나서 성사됩니다. 혼인할 남자의 몸이 아니라 기존의 자기 부모의 몸의 일부에서 떨어져 나온 겁니다.

여성을 처음 본 아담의 고백은 특이합니다. ‘나와 다른 몸이 멋있고 아름답구나!’가 아니라 ‘나의 몸과 살이 아름답구나’입니다. 이는 아담이 자기와 결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등장하는 그 아름다운 가치 앞에서 아담은 흔쾌히 자신을 포기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은 구약 보다 신약에 뚜렷하게 등장합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눅 7:37-41) 예수님께서 죄 있다는 여인을 대신해서 변호해 줍니다.

귀한 향수와 예수님 중에 어느 가치를 크냐를 바리새인에게 묻는 겁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십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즉 사랑이란 자신과의 작별하지 아니하면 발생될 수 없다는 겁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보다 더 중요한 바가 눈 앞에 등장했을 때, 사랑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호세아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 나올 때부터 이미 이스라엘과 혼인한 관계라고 하십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 2:15-16)

당연히 이와 같은 관계를 이스라엘은 알 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장자’ 정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혼인 대상자임을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고멜이라는 음녀와 혼인하게 하시고 굳이 자식을 세 명이나 낳게 하십니다.

첫째 자신은 ‘사방으로 흩어진다’는 이름의 자식입니다. 둘째 자식은 딸인데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자 못함’입니다. 셋째 자식의 이름 뜻은 ‘ 내 백성이 아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그 이스라엘에서 파괴시켜 벗어나기를 시도하시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저히 하나님의 신부가 되지를 못하는 자를 어떻게 신약에 와서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 혹은 처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음녀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음녀를 되는 조건이 신랑이 율법에 의해서 죽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음녀’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에 의하지 않고 죽은 신랑의 영을 받아서 율법으로 하자 없는 신부가 되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2:22-24에 나오는 원칙대로, 신랑의 몸에서 나와 신랑의 몸으로 되돌아가 하나가 되는 신부 탄생이 성사될 수 있는 겁니다. 신랑께서 먼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 영광된 나라로부터 이스라엘 평지에 찬물의 지하수처럼 숨겨놓은 신부의 영광이 비로소 혼인 잔치로 다 공개됩니다. 이 모든 사항은 음녀와 혼인해주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뭐든지 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곧 음녀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5강-예레미야 18장 13~17절(신랑의 고백)2403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80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포위되어서 못 빠져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너희들이 하나님의 품에서, 영향력에서 벗어나서 내 자율적으로, 내 식대로, My way처럼 내 방식대로 내 인생 한번 살아보자고 우긴다고 할지라도 말씀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습니다.

말씀이 안에 포함이 되어서 말씀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휘둘리고, 휘말리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상당히 고통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가 보면 세상에 이런 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스라엘 나라에게 계속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 말씀을 주고 계시는데, 이 말씀 하시는 것이 나중에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야 파악되는 내용이에요. 그래서 멸망하는 과정에서, 멸망하는 중에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해도 한마디, 한마디가 무슨 뜻인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 그 자세에 대해서는 신약에 있는 성도들 만한 자들이 없어요.

누가복음 7장에 죄 많은 여인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 죄 많은 여인이 자신이 모았던 비싼 향수를 예수님의 발 앞에 일시에, 한꺼번에 쏟았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허비한 거예요. 이런 낭비가 없습니다. 당연히 주위 사람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죠. 얼마나 비싼 향수냐고 주위에서 수군대면서 바리새인들이 공격할 때, 예수님이 이 여인을 대신해서 변호해 줍니다.

“향수가 비싸냐?” ‘비싸죠’ 그러면 그 비싼 향수를 소유하고 있는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그 가치는 이 향수값보다 더 월등하다는 겁니다. 비싼 향수를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발생하는 나의 가치보다, 나를 버림으로써 도리어 나는 나보다 더 가치 있는 분과 함께 있다는 그 가치, 그것을 너희들은 왜 모르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은 누가복음 7장 47절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정리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그대로 예레미야 본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예레미야가 이야기해 봐야 그 당시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그러나 신약의 성도이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예레미야를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율법에 포위되었다고 이야기했고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두 가지 개념에 포위되어 있어요. 하나는 처녀 이스라엘, ‘처녀’에 포위 되어있고,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의 물’에 포위되어 있어요. 본문 14절에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이 대목이죠.

처녀라는 개념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거고요. 레바논의 높은 산에 쌓인 눈은 자연에 해당하는 겁니다. 땅에 해당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는 처녀라는 개념으로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사로잡고, 레바논에 쌓인 눈(snow)에 의해서 너희들이 살고 있는 땅을 포위하고 장악하고 있습니다.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둘 다 안 보인다는 겁니다.

왜 안 보이느냐 하면 레바논의 눈이 어디로 흘러내리냐 하면, 지표면이 아니고 지하수로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14절에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라고 나와요. 흙으로 된 땅 밑에 돌이 있고, 그 돌에 무엇이 끼어있느냐 하면 레바논 산에서 흘러내리는 눈, 그 녹은 물이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물이 어떤 물이냐. 찬물이라고 되어있어요.

14절에 보면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지표면으로 흘러버리면 ‘어, 물이 말라버렸네. 우리는 이제 죽었다. 죽었어. 우리는 물이 없어 못 살겠어’라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물 없이 방치하고 힘들게 하면 되느냐고 한다면, 그 땅 밑에 한결같이 흘러내 보내주는 아주 찬 물, 귀한 물, 차가운 물이지만 깨끗한 물이 너희 위를 흘러가고 있다고 언급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은 뭐냐.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채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그 똑같은 방식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녀라고 불렀어요. 처녀 이스라엘. 그런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처녀라는 말을 전혀 이해 못 해요. 이해하는 사람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향수 다 뿌린 그 죄 많은 여인이나 이해하지, 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처녀 이스라엘의 처녀를 이해 못 하는가. 인간들은 이미 혼인했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가 처녀는 끝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숨어있는 처녀는 이 세상에 처녀가 아닐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숨겨놓은 처녀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결혼해라. 그래야 네 꼬라지를 안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결혼할 때 사람들은 전에는 처녀라고 생각하고, 후에는 처녀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결혼 하나 안 하나 처녀일 때가 없었다는 겁니다. 한 번도 처녀의 개념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제대로 된 남편과 혼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성경 본문이 상당히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그 어려운 중 하나가 창제기 2장 22~25절까지입니다.

제가 읽어볼 때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이게 어떤 뜻인지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담으로 하여금 아담의 아내가 만들어졌다는 뜻이에요. 내 몸에서 나온 것이 도로 내 몸에 붙어있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요,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도, 그 여자는 도로 아담에게 하나로 연결 되어있는, 떨어져 나가지 못하는 자로서의 여자입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 다른 가정에 남자가 있고, 다른 가정에 여자가 있어서, 둘이 혼인해서 결혼한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원했던 혼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도 아닌 것을, 네가 혼인을 해보고 알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한 번도 혼인해 본 적이 없는 사도바울이 혼인에 대해서 얼마나 큰소리치는 지요. 자기는 혼인해 본 적도 없으면서.

아내 된 자가 어떠니, 남편 된 자가 어떠니 하면서, 아주 깊이 관여해요. 본인은 혼인해 본 적도 없는데. 에베소서 5장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하는데, 이게 이 세상 혼인에 이런 일은 없어요. 25절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런 남편은 눈 안 닦아도 괜찮아요. 어차피 그런 남편은 없어요.

그러니까 기쁜 소식은 뭐냐. 우리의 모든 결혼은 무효라는 겁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입이 막 벌어지죠.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결혼은 무효이고, 그로 인한 자식도 모두 무효예요. 자식도 자식이 아닐뿐더러. 그러면 혼인을 왜 하게 하느냐. 내가, 이 남자가 남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진정한 남자가 있어서, 그 남자는 여자를 구할 때, 다른 데서 찾는 게 아니고, 본인에게서 뚝 떨어져서 나간 본인의 여자를 찾는 식으로 혼인이 성사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나 외에 어떤 다른 남자의 몸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라는 말을 붙여줍니다.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성사될 수 있는 말씀인가.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냥 가만히 있어”라는 식으로 하시죠. 그러면 어떤 식으로 나로 하여금 창세기 2장의 온전한 혼인을 하게 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일단 너를 음녀로 만들어 줄게. 여자는 음녀, 남자는 음탕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라는 이게 바로 호세아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는 이야기죠.

호세아 1장에서, 호세아 선지자가 의도적으로 고멜이라는 음란한 아내를 만나서 혼인했어야 했습니다. 음란한 아내가 취향이라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결과가 뭐냐. 그 결과가 오늘 예레미야에 나오는 18장 17절에 말씀에 결과가 나옵니다.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해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완전히 해체해서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하나를 이방 나라의 민족 속에 씨뿌리듯이 다 흩어버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없다’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부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언급한 게 이거예요. 호세아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에스겔도 그렇고.

뭐냐 하면, 네가 소시(少時)부터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나는 너와 혼인했다고 이야기했어요. 나는 여호와고 너는 나의 아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출애굽기 찾아봐도 그런 내용이 안 나와요. “너는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너는 내 신부였다’라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건 호세아에 처음 나오는 거예요. 이사야에는 예언이 되어있고. 호세아에서 처음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혼인 관계를 무효화시키는 작업에 나섰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창세기 2장 22절에서 먼저 아담이 있어 줘야 해요. 여자는 없어요. 남자가 먼저 있고, 계속 여자는 없는 거예요. 남자가 잠들 때 여자가 하나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 두 사람이라는 게 성립될 수 없다는 겁니다. 두 사람.

자기 몸이 나갔다가 도로 붙는데 이게 무슨 두 사람이냐는 겁니다. 다만,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담이라는 한 몸이면 되는데 여자를 왜 만들어 놨는가. 그것은 두 사람처럼 보이면서 한 사람이 되는 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했던 혼인 관계, 예수님의 신부, 예수님의 몸,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혼인 관계가 이 과정을 거쳐야 성사된다는 것을 처음 아담과 하와 만들 때부터 그 정보를 삽입시켜 놓은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다루기 나름이에요. 하나님이 원하는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철저하게 활용하고 사용하신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그냥 당한 거예요. 즐겁게 당했어요.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가, 하나님의 신부 된 자에게 뭐가 나오느냐. 음란과 음행이 나와줘야 해요. 창세기 아담과 하와로 이어졌던 그 취지에 있던 이스라엘. 호세아에 와서 “나는 너와 혼인했다”라고 해놓고, 호세아에서 나중에 이야기하면서, 초반에는 “너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해라”라고 나와요.

그리고 자식을 낳는데, 자식이 어떤 자식이냐 하면, 모두 다 내 자식이 아니라는 자식을 낳아버려요. 이게 우리 인간들 보기에 반칙이에요. 하나님께서 자식을 만들어 놓고, 만들어 놓고 하는 말이 내 자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처음부터 내 자식이 아니면 만들지를 말든지. 셋째 아들 ‘로암미’는 ‘내 자식 아니다’라는 뜻이고, 둘째 딸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첫째 ‘이스르엘’은 ‘하나님을 떠난 자식’이라는 뜻이에요. 부숴서 가루를 만들어서 그 가루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해골을 바닷가에 뿌리는 것처럼, 가루로 만들어 놓고 나무 밑에 수목장하듯이 뿌려놓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이 백성 이스라엘을 부숴놓고 뿌리는데, 뿌릴 때 그냥 부수는 것이 아니고, 진짜 내 아내 아니고, 내 색시 아니고, 처녀 아니고, 전혀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서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뿌리는 겁니다. 전 세계에 뿌리는 겁니다.

뿌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하나님에게 왜 이렇게 당했는지 물으면, ‘긍휼함을 얻지 못하기 위해서’ 그리고 ‘내 백성 아니기 때문에’라는 이 사실을 호세아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내 백성 아닌 것을 통해서 주께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내 백성은 이런 게 아니고, 처녀 이스라엘이어야 한다는 거, 처녀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처녀가 뭐냐 하면, 혼인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라는 뜻이죠. 바로 그거죠.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혼인하지 않고, 혼인한 적이 없는, 그런 처녀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부로 혼인하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방법을 멀쩡하게 이 세상 사람이고, 세상 좋다고 같이 부둥켜안고 이미 혼인한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의 신부로 전환하는지 그 방법이 궁금하죠. 보니까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을 통해서 분명히 음란하고 간음한 여인인데, 음란하고 간음했다고 규정짓는 율법을 던져주고, 그 율법이 저절로 물러가게 하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음란한 처녀예요. 남자나 여자나 인간들은 처녀인데, 우리는 음란한 처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제대로 된 하나님의 아들, 신랑과 맞닥뜨리면서 비로소 우리는 음란함을 깨닫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편이 죽었어요. 남편이 죽어버리면 이 아내에게 음란하다, 간음했다는 모든 혐의가 없어지는 겁니다. 없어지고 뭐가 되느냐. 자유부인이 됩니다.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7장 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7:1~3)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시켰느냐 하면 이게 혼인이 되려면 사랑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랑 표현을 주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창세기 2장 22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아담에게 오게 했습니다. 그때 아담이 해야할 역할(Role)이 있어요. 대사를 해야 한다는 거죠.

그 대사가 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대사를 해줘야 해요. 이게 사랑이에요. 이게 어떤 점이 어렵냐 하면, 거울에 비친 나를 상실해야 해요. 거울에 비친 나는 없어질 나고, 거울에 비친 나 말고 등장하는 그쪽을 나라고 하게 될 때, 그때 그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이 왜 내 뼈 중의 뼈고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느냐.

객관식으로 1번 – 예뻤다, 2번 – 생전 처음이었다, 몇 번입니까? 아담에게는 이쁘고 뭐고 그럴 게 없어요. 아담이 이전에 본 게 뭐냐 하면 고양이 암컷, 개 암컷, 이런 것들만 봤어요. 자기 암컷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담은 새로웠던 거예요. 새로웠어요. 출처는 하나님께 들었죠. “실은 너의 갈빗대였다”라고. 출처를 겸해서 그 새롭다는 환희의 외침, 그것이 뭐냐 하면 ‘나보다 더 나다운 나’입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네요.

사랑을 표현할 때, 나보다 더 나다운 나여서, 너 앞에서 나는 없어져도 되는 나, 그래서 향수를 당신에게 다 붓지요. 내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향수, 이 향수가 당신 앞에서는 빛을 잃어요. 나 잘난 거, 나 이쁜 거, 그거 다 주님 앞에서 빛을 잃어요. 이걸 가지고 ‘이별할 때 비로소 사랑이 등장한다’라고 합니다. 누구와 이별이냐. 성도는 자기와의 이별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자기와의 작별이에요. 나와 ‘바이바이~~잘 가거라’ 그동안 내 가치에 미쳐서 먹든지 마시든지 오로지 나 지키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의 분노는 왜 생기는데요? 나 지키는 것이 지장 생겨서 화가 나는 거예요. 정신병 왜 생깁니까? 마귀 때문에 생기죠. 마귀가 왜 정신병을 만들게 합니까? 자꾸 나에 대해서 집착하게 만든 거예요. ‘너 그러면 손해난다. 너 그러면 욕 얻어먹는다. 화나지? 그래그래. 화내~’라고 약을 살살 올리죠.

‘성경에 보니까 너는 음란한 여인이래. 성경에 보니까 너는 죄인이래. 성나지? 성나니까 말씀 공부 열심히 하라고’라는 식으로 자꾸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멋있는 우리로 만드는데 자꾸 독촉하고 촉구한 거예요. 아이를 키우고 손자를 키우면 여기에 마귀가 또 역사하죠. ‘제대로 키웠어? 학교 점수 안 나오면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쥐어패야지’라는 이런 거.

자꾸 우리에게 책임감과 나에게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 나의 가치성, 고귀함, 이런 것에 환장하게 만들어버렸어요.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혼인이라는 게 얼마나 큰 시험 거리인지. 혼자 살아도 마찬가지고요. 달라질 게 없습니다. 나와 헤어질 때 우리는 결혼을 세 번, 네 번 해도 우리는 처녀입니다. 나랑 헤어지니까.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음란이라는 죄를 지적하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우리는 음란이라는 소리를 주님에게 지적받고 난 뒤에는 그렇게 지적하는 남편이 없어요. 없는데 주님이 다시 부활했어요. 부활하셔서 하시는 말이 “너, 나랑 혼인하고 싶나?”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기름 준비하고 혼인하고 싶나?

그러면 우리가 살 땅은요? 레바논 산에서 눈 녹은 산 있지? 그 밑에 있어. 땅 한번 파봐. 차가운 물 나와.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주께서 준비한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을 눈에 보이는 리얼리티(Reality), 이 현실 세계와 같이 중첩되어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혼수부터 시작해서, 알아서 다~~~신랑이 마련해줬어요. 연지곤지 찍는 것부터 다 마련해줬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21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우리가 보는 것은 헌 하늘과 헌 땅이에요. “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내려온다는 겁니다. 보석같고,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답다고 표현했어요.

이것은 뭐냐. 남편과 격이 맞아야 해요. 우리 남편 예수님은 부활해서 해같이 빛나요. 그렇다면 우리 신부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처녀는 어디서 나와야 해요? 남편 되는 그 영광의 갈빗대가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그 영광스러운 갈빗대로, 주님 보시기에 내 살 중의 살이고 뼈라는 창세기 2장 22~25절을 주님 입에서 나오고 고백 되도록, 우리는 그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부귀영화, 주님의 피 앞에서는 정말 아무 가치 없습니다. 뭐 가치 없어도 일단은 챙기고 보자는 식으로 하겠지만, 아무 가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분은 지름길로 가시는 분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재산 40억쯤 되도록 빙빙 돌아서 ‘가치 없네’라고 가도록 하시기도 하는데 어느 길로 가든지 간에, 우리는 이미 땅 밑에 하나님의 천국에서 흐르는 생명수는 흐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잘난 내가 주의 말씀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모르게 방해하는 것은 세상과 더불어 짝하는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주여, 이제는 우리를 들어내 주셔서,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밟힌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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