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예루살렘
2024년 3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19-22
(17:19)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17: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17:2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안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름대로 본인들이 쉬고 싶은 겁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충돌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고 싶은 방식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셨습니다. 반복해서 6일이 지나고 나타나는 제 7일날 쉬시는 시간으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시간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심을 향하여 무한히 돌아오는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그 중앙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곳은 비워있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시는 그 사건이 터질 때까지입니다. 신약에 들어서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결정적이고도 최종적 사건을 터트립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 사건이 바로 안식일의 완성이요 또한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 율법이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방식이 인간이 지키려는 방식과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들의 안식일 지킴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들의 안식일 준수는 제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지켰다’가 된다고 여깁니다. 줄곧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 방식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마 12:7-12)
요한복음 5장에서도 베데스다 못 가에는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십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그 날이 안식일임을 감안해서 베푸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비를 달성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일이 날짜를 기억에 그 날을 선한 일 한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라는 공간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한 장소입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그런데 그 예루살렘의 장소는 초월적 존재가 인간을 백성으로 삼고 왕국이 되어야 될 장소입니다.
곧 멜기세덱의 계열과 관련된 인물이 출현되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이상스럽게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섰어도 다른 영역은 다 접수했지만 예루살렘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사사기 시대 때도 이스라엘에 편입되지 못한 곳입니다. 사무엘하 5:6-7에 보면,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마저도 안식일이라는 시간과 예루살렘이라는 공간과 결합되는 방식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안식일을 성취하는 방식이 예루살렘의 공간과 관련있음을 인간으로서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인간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에게는 뭐든지 ‘본인의 있음’을 기반으로 하여 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결사적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도대체 가인과 아벨의 토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벨은 본인이 제사 드리고 사라집니다.
이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과 관련있으면서 그 기능을 드러냄을 말합니다. 반면에 가인의 경우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로마서 4:18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여기서 ‘바랄 수 없음’이 나옵니다. 믿음이란 인간이 바라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바랄 수 없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는 인간의 존재를 능가하는 다른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
인간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시공간적 환경은 인간에게 늘 판단과 관찰과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기존의 시공간을 관찰을 하면할수록 이 시공간의 차원은 자꾸만 증강되고 외연은 넓혀집니다.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같은 것은 우주 공간 안에 설치한 만원경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인간의 우주는 자꾸만 인간의 눈을 모독하듯 그 범위를 무한한 넓어지고 달아납니다. 평생을 탐구해도 인간은 우주도 모를뿐더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 판단과 평가를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치료’를 원하지 ‘건짐’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일상을 통해 벌리는 자기 선택에 늘 놀아나는 형국입니다. 끝까지 자신이 바랄 수 있만 바라기 위해 고집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치료란 자신의 가치가 멈추지 않고 보다 향상되는 상태를 고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건짐이란 38년된 병자처럼 아무리 애써고 노력해도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뿐인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즉 안식일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곧 ‘바랄 수 없는 것’을 은혜로 바라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자신에 기대를 건다면 안식일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준수하려고 합니다. 이는 자기 존재를 그 어떤 말씀이나 경우에 있었어도 제거되지 않으려는 시도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을 편히 쉬게 하는 안식일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늘 예수님의 십자가 꽂아질 빈 자리가 마련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3강-예레미야 17장 19~22절(안식일과 예루살렘)2403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찌어다”
안식일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있음으로써 인간의 시간 인식과는 대조적으로 일주일 주기로 뚝뚝 끊어지는 주기적 시간관을 하나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시간은 돌고 돈다는 거죠. 돌고 돈다면 반드시 중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주일 지나고 또 하루가 되고 하면 이거는 직선으로 쭉쭉 나가잖아요. 그런데 돌고 돈다는 것은 이미 시작점도 중심에서 나왔고, 안식일 되는 마감도 원래 자리로 회귀하는 방식의 시간론이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됩니다.
그 이유는 너희들이 아무리 설치고, 까불고, 찢고 해도, 창조원리의 손아귀에서 너희들은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창조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나, 이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무리 인간이 마귀와 한패가 되어서 달려들어도 내가 안식하고자 하는 안식에 대해서는 방해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전에는 그냥 창조하고 난 뒤에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그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는데, 마귀가 설치면서 온 세상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안식에 이르는 방법이 약간 복잡해졌습니다. 복잡해졌다뿐이지 결코 안식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복잡해졌느냐 하면 그 우회로 경로가 율법으로 안식일 지키는 경로 말고, 인간이 지키는 안식일 말고, 하나님이 안식일 지켰을 때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새로운 경로 하나가 더 추가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더 추가되고, 오늘 예레미야는 구약에 속한 거죠. 구약의 안식일은 노후화된 안식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간들 보기에 뻔한 안식일. 뻔할 뻔 자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이 뻔한 안식일에 대해 수정에 들어갑니다. “안식일 지켰냐?” 지켰습니다. “몇 년 동안 지켰냐?” 줄곧 지켰습니다.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만만할 때 그건 전혀 새롭지 않은 안식일이죠. 전혀 새롭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같은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하나님이 따로 구상해 놓은 하나님의 안식에 도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안식일은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고 지켜지는가를 예레미야를 통해서 조금씩 서서히 그 출발점을 계시합니다. 어떻게 계시하느냐 하면, 안식일과 예루살렘을 결합합니다. 안식일의 취지와 예루살렘 취지를 같이 연계시켜요.
그러면 안식일은 시간입니다. 예루살렘은 공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연계시키면, 안식일은 어떻게 지키느냐. ‘내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의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리라’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참 희한하게도 예루살렘은 원래 정복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정복이 모세도 안되고, 여호수아도 실패하고, 사사 시대에도 안 되고, 사울 왕 때도 예루살렘은 정복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권역으로 정복되기 위해서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느냐 하면 다윗 오기를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다윗 때에 와서 드디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편에 속합니다. 분명히 예루살렘은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의 고향이거든요. 그러면 그동안 제일 중심되는 자리가 비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누가 등장하기 전에? 다윗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그 앞에 어떤 자도, 모세라 할지라도 그 중심 자리에는 본래의 본질의 내용이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다른 것은 다 그리는데, 제일 중요한 부분은 색칠도 못 하고 그냥 빈공간으로 남겨두었다고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예루살렘이에요. 그러면 예루살렘은 누가 차지하느냐. 바로 멜기세덱의 계열 되시는 분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게 되어있습니다. 멜기세덱의 계열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다윗 때 나타나는가? 아닙니다. 모세 때 나타나는가? 아닙니다.
멜기세덱의 계열은 하나님의 최종 맹세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고 신약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이라는 시간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가는 식으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을 빈공간으로 남겨두고 시간을 얹어서 그냥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동했습니다.
초월적인 멜기세덱의 존재가 나타날 때까지 지상의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스라엘이, 어떤 수직적으로 위에서 오시는 분과 지상에서 오시는 안식일 주소가 한 자리에서 만날 때, 그 만남의 날이 안식일이 아니고, 그 만남의 날이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되는 거예요. 안식일은 시간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공간, 그것도 특수한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안식일이 완성되는 겁니다.
참 이게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죠. 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그렇게 하는가. 요한복음 5장 9~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하는데, 여기 요한복음 5장에서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몇 번이나 강조하는 것이 여기 나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날 이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뭔데 이렇게 주목받아야 하는가. 예수님의 안식일 견해에 의하면 안식일은 아무 대가도 없이 자격도 안 되는 자에게 그저 자비를 베푸는 날이 안식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면서, 그 안식일에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느냐 하면 7절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해서, 제사를 중심으로 안식일을 지켰던 옛날 노후화된 구닥다리 안식일 행사가 여기서 모든 시효가 마감되었어요.
제사 드려서, 예배드려서 안식일 지키는 것은 이제는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참 편하죠.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취지는 뭐냐. 이미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제일 힘든 것이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이 인간은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냐면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떤 일을 해버려요. 말장난 같아서 좀 미안스럽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해버려요. 대한 예수교, 장로교, 고신 측에서 그렇게 했잖아요.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일요일, 주일에는 우물 뚜껑도 잠가버리잖아요. 물 길어서 뭐를 못 하도록. 주님께서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나, 안식일 말고 다른 것을 지키나, 뭘 하든지 그것은 영~~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것을 확정 짓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너 말고 다른 분이 오셔서, 제사 말고 자비를 베풀면 그게 아버지께서 원했던 안식일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안식일에 손 마른 자와 안식일에 구덩이에 양이 빠졌을 때 붙잡아 내고, 건져내지 않겠느냐고 언급을 하는 것은(마12:10~11) 지키지 말고 건짐을 당하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날 교회나 세상 사람들 보기에 제가 아무리 큰소리로 이야기 하나, 작은 소리로 이야기 하나, 100번을 되풀이해도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치료받기를 원해요.
하나님은 치료해주는 분이 아니고 건지는 분이에요. 치료를 해주면 어떻게 되느냐. 자기가 그대로 있어요. 전에는 몸이 아팠는데 이제 괜찮은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거 사람들이 노리는 거 아닙니까? 어디 갓바위 가서 비는 것과 다른 점이 뭐예요? 세상에 있는 요새 파업하고 있는 병원과 차이점이 뭡니까? 병원에서 병 고친다고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갑니까?
아니잖아요. 인간이 치료받겠다고 하는 것은 아직도 건짐이 뭔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진짜 건짐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뭘 해도,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해도 죄예요. 왜? 안식일이 바로 죄에서 건지기 위한 날이 안식일이니까요. 안식일, 그 날에, 사람은 도저히 못 하는 것을, 사람이 하는 식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킨 그분을 한번 보라는 거예요. 그분이 어떻게 했는지.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한 번 보라는 겁니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선악체계에 바탕을 두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나오는데, 가인과 아벨에게서 가인의 기초는 뭐고 아벨의 기초는 뭐인지 유념하면서 해석할 필요가 있어요. 가인의 기초는 자기 존재입니다. ‘내가 동생을 죽였지만, 벌은 너무 심하게 내리지 마세요’라고 끝까지 자기 단도리, 자기방어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기초는 없음입니다. 없어요. 죽고 없어요. 분명히 제사 드리고 하나님의 응답받은 사람은 있는데, 아벨은 응답받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제거되어서 이 땅에 없습니다. 이 땅에 없다는 말은 이 땅에 없다고 여기는 분이 안식일도 지키고 제사도 완성하고, 소위 있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을 건지기까지 해요. 구원을 시켜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주님과의 접촉방법은 로마서 4장에 ‘믿음’이라고 나옵니다. 행함이 아니고 믿음. 그 믿음에 대한 정의 가운데서 로마서 4장 18절에서 확실하게 우리에게 말해주는 게 있어요. 믿음은 뭐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믿음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들이닥친 모든 여건이나 사태는 아브라함이 은근히 바라고 기대했던 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뭘 바라는가. 자기와 연계된 것을 바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발생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쪽에 사태가 일어나버립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약속이 없다는 거고, 약속이 나에게 있더라도 약속을 이룰 수있는 방법이 없다면 나는 약속과 무관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예요. 사무엘하 5장 6~8절에 대목을 보고 다시 로마서로 돌아오겠습니다.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 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그러니까 여부스 사람들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면 유다 땅에 있어요.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 한복판에 있는데 그게 빈 땅으로 정복되지 않는 미정복 땅으로 남아있어요. 여호수아 때, 땅의 정복이 세 단계로 정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고 모압 평지에 대해서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들어가는 그거, 자기들이 원해서 ‘목초지 좋으니 우리는 여기 하겠습니다’라고 해서 된 것이 땅 분배이고, 두 번째는 뭐냐면 길갈에서 땅 분배인데, 힘 있는 지파가 정복함으로써 땅 분배가 이루어지는 두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실로에서 이루어진 땅 분배인데, 나머지 일곱 지파에게 땅을 그려오라고 해놓고 그려진 대로 땅을 정복하는 그런 세 단계로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두 번째 단계는 힘이 있어서 제대로 되었는데, 세 번째 단계는 한다고 해놓고 나중에 차지하지 못하고, 단 지파는 위에까지 도망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간에 여호수아의 땅 분배가 계속해서 이상스럽게 미완성, 미완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안식하는데 아직도 적절하지 않다는 거예요. 신명기 12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할 자리가 따로 있어요.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신 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은 지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명기 12장 5절에서 예언하고 있는데, 그 예언대로라면 아직도 사무엘하 5장에서 마저 정복되지 않는 여부스 땅은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여부스 사람이 장담하기를, 여러분, 예루살렘은 산지로 되어서 사람 살 곳이 못 됩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서 들러붙어서 사람들이 많이 살지만, 현재 그 위로 가면 텔아비브 공항에서 내려서 산에 올라가면 뺑뺑이 돌 듯이 갈지자(之)로 차 타고 예루살렘까지 올라가야 해요. 높은 고지(高地)에 있어요. 농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그 자체가 요새(要塞)예요.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자신만만했거든요. 너희들 백날 쳐들어 와 봐라. 우리 집에 있는 절뚝발이 장애자나 소경이라도 너희들 정도는 얼마든지 내칠 수 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라고 되어있어요.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을 빼앗았어요. 그런데 이게 뭐냐. 지형적으로 빼앗는 거예요.
땅의 공간이 따로 있고 안식일 지키는 것은 또 따로입니다. 그 두 개가 결합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셔야, 예루살렘의 사건이 안식일 완성으로 같이 연결돼요. 이것에 대해서 제가 계속 말씀을 드려야 해요.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에게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바랄 수 있는 건 뭐고, 바랄 수 없는 건 뭐냐.
인간의 시공간은 인간이 선택함에 따라서 새로운 우주로 증강되게 되어있어요. 이게 엄청 어려운 말이에요. 천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천문학 망원경을 아예 우주에 띄워버렸어요. 땅에서 하면 먼지 때문에 방해된다고 우주에 띄웠다고요. 그래서 우주에 띄워서 망원경을 통해 신호를 받아서 조사를 해보니까 이 우주라는 것이 인간이 보려고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점점 더 증강해요. 우주가.
전에는 별들이 안드로메다까지 가 끝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증강하고 나중에는 이런 소리까지 합니다.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우주의 확장속도예요.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가졌다는 빛보다 더 빨리 우주가 도망치듯이 인간의 관찰 중심으로 도망쳐버리니까, 인간은 아무리 해도 내가 누구인지, 내 본질이 뭔지 갈수록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평생 살아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어요. 이게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선악 체계를 따져서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잖아요. 선악 체계가 뭐냐 하면 선과 악을 안다는 게 아니라, 선과 악을 평가할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초월적 위치와 자리를 따로 잡는 이것이 선악 체제에 대한 각 인생의 인식에 준한 삶의 태도입니다.
선과 악 중 한쪽이 아니라, 선과 악을 또다시 볼 수 있는 제3의 지역을 본인이 만듦으로써 본인은 신이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입니다. 그러면 선과 악에서 벗어나야 판단이 가능하거든요. 그 벗어나는 것을 중도적 성격, 중성적 성격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 교육법을 개정하려고 하는데, 그 교육법이 뭐냐 하면, 가정에 아들이나 딸에 대해서 아빠나 엄마가 ‘너는 아들이다. 너는 딸이다’라고 규정하는 것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처벌하는 법을 만들었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내가 남성이 될지, 여성이 될지는 본인이 선택해야 하지, 그것을 부모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격 모독이고,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남자고 여자고 없단 말인가. 아니죠. 남자, 여자는 중도적, 중성적 위치에 있고, 그걸 내가 남성으로 살지, 여성으로 살지는 내가 나중에 자의식이 생기면 그때 내가 판단해서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남자, 여자의 샤워실이나 화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고 같이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캘리포니아에 사는 교회를 다니는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서명운동하고 하죠. ‘살기는 뭐하러 거기 그런데 사는지. 빨리 한국으로 재이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재이민 해도 대책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좋다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여기에 대한 대책이 뭐냐.
인간들이 바라는 모든 것은 기존의 삶을 장악하는 시공간 안에 있다는 거예요. 선택하든, 결정하든, 우주를 개발하고 관찰하든, 모든 것이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인간들이 자기 삶을 도모하고자 판단의 대상으로써의 시간과 공간이에요. 안식일 지키면 복 줍니까? 예루살렘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이런 것들이 도대체 누구 좋아라고? 본인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바라는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준 믿음은 그게 아닙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믿음이라 할 때 그 믿음은 터전이 뭐냐. 은혜예요. 선물이고 우연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었으니, 선물이라는 성격으로 믿음을 주었다는 거예요. 믿음은 뭐냐. 기존에 내가 하는 것과 대비되겠지요. 내가 판단하는 것과 대비되겠지요.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개역한글)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개역개정)
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NIV)
18. Who against hope believed in hope, that he might beco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was spoken, So shall thy seed be.(KJV)
18. In hope against hope he believed,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had been spoken, "SO SHALL YOUR DESCENDANTS BE."(NASB)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공동번역)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표준새번역)
18.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믿었습니다.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15:5(우리말성경)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시공간을 판단하고, 나는 내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바랄 때,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나를 죽이고 다시 사는 거. 너 살면서 천국 갈래, 너 죽이고 난 뒤에 천국 보낼래? 사람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성령이 있는 쪽은 ‘제발 저를 죽여주옵소서. 내가 주의 천국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이제야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바랄 수 없는 것을 준비했는데, 우리는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시간과 공간을 자꾸 내가 사는데 유익하고 편하게 도모하고 있는 거예요. ‘오후 예배 참석 안 해도 되겠지. 수련회는 참석 안 해도 되겠지. 바쁜데 뭐. 얘나 키워야지. 헌금은 천 원만 하면 되겠지. 그래 헌금은 다 드리자. 헌금 한 푼도 안 하겠다’라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바라는 거예요.
바로 예루살렘의 사건은 비어있는 장소가 십자가 사건으로 완료가 되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 사이에서, 우리 위에서 주님의 점괘가 우리의 점괘를 완전히 억압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결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안식일 지킨 적 없고, 십자가 믿은 적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결정이, 십자가 결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게 바로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들이고 주께서 홀로 하셨다는 것이 우리가 바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에스겔 21장 19~22절을 보게 되면요, “인자야 너는 바벨론 왕의 칼이 올 두 길을 한 땅에서 나오도록 그리되 곧 성으로 들어가는 길 머리에다가 길이 나뉘는 지시표를 하여, 칼이 암몬 족속의 랍바에 이르는 길과 유다 견고한 성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그리라, 바벨론 왕이 갈랫길 곧 두 길 머리에 서서 점을 치되 살들을 흔들어 우상에게 묻고 희생의 간을 살펴서, 오른손에 예루살렘으로 갈 점괘를 얻었으므로”라고 되어있어요.
‘암몬 족속 칠래, 유다 나라 칠래?’라는 이것도 바벨론 왕이 어떤 식으로 우상적인 점을 치고 점괘를 내는 것까지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천국 갈지 지옥 갈지를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기 이전에 주님이 이미 알고 계신 거예요. 그 알고 계셨다는 사실이 우리가 미처 바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결정과 관계없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게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안식일 다 지키고 그것도 십자가 예루살렘 사건을 통해서 창세 전부터 확정된 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주니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 인생 속에서 내가 한 것과 주님이 이룬 것과 끊임없는 투쟁 그 자체를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