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발휘하게 된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 본성은 곧 자기 행함의 결정체로서 다듬어 ‘자기 의’입니다. 평생 힘들게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그 행함을 부정한다는 것은 감히 인간으로서 해내지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약의 율법 안에 심어놓은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을 성취할 특정 인물을 따로 꽂아놓으셨던 겁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7-9)(시40:6,7)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기 수립되었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찾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취지였던 겁니다. 성도는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아들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갈 4:6)
생명, 곧 영생이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2차원적인 구약 역사를 거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몽땅 메시야에게 다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 19:30) 이제 남은 것은 이 ‘다 이루심’이 성도의 마음의 내부까지 찾아가서 그 마음을 구조화하는 데 있습니다. 그 구조화는 태초의 구조까지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는 갈라디아서 2:21부터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가 아닌 이스마엘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적인 시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언약 구조 안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육체로 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육체로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 나뉘어진 구조에 하나님께서 각기 언약을 붙여서 ‘두 언약’이라고 소개합니다.(갈 4:24)
2차원 현실에 3차원 이미지가 증강현실로 구현되듯이, 신약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현실이 주입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만 영생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등장은 그 주변에 영생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조를 형성합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은 여전히 자기 의로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 의로움 안에 자기를 두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선하고 의롭다 증거를 계속 수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 본다는 원리를 모릅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된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아들이 없는 자들을 참혹하게 다루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반면에 영생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두 언약의 구조를 알았기에 자기 속에서 계속해서 선악지식을 밖으로 내보이게 됩니다. 즉 “나는 이런 세력에 눌려 살았다”는 점을 내다보이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만을 받는 것을 알기에 더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식으로 ‘내가 죽는 것을 나에게 알릴 필요없음’을 압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 것’이 일체 없음도 압니다. 소위 ‘간이 배 밖에 나오는 것’처럼 날마다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마귀의 일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신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그들 속이 두 언약이 활동하는 장소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중심으로 활동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태초의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있었던 그 언약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번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완성된 것이 성도의 마음 안에서 구조화되어 활동합니다.
'네 속'에 있는 목숨은 생명이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생명이 있다.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스스로 자기를 펼쳐나가는데 그걸 약속이라고 이야기해요. 그걸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명 되시는 분이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나타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 약속입니다. 언약으로 나타나요.
그래서 로마서 10장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을 듣고 그걸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늘나라에는 언어가 없지만 이 땅에서는 언어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그 언어의 방식을 로마서 10장 8절에 보면 ‘믿음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가 체험한 것을 전부 다 잘라버리세요. 잘라내고 가려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냐 생명의 약속 그것만 주목해야되지 곁들이로 붙어 있는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약속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은 이미 하나님 쪽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약속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주어진다. 너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니라 언약 위주로 돌아간다.
세상은 분명히 내 중심이 아닌데 그러면 내가 왜 살아있어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서 그 내막을 소개합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러면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생명이 없는 겁니다. 간단해요. 교회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예수 안’까지 들어가야 돼요, ‘예수 안’까지. ‘예수 안’에 들어온다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위주로 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살아 있지?’ 그러니까 ‘살려주세요’가 아닙니다. ‘왜 살아 있지?’ 이렇게 되어야 돼요. 내가 왜 살아 있지?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도와요. 하나님이 보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보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인간에서 어느 누구도 몰랐던 그 아버지와 아들, 그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낯선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3D 프린팅 기술, 전기회로를 작은 렌즈에 심는 것, 이것은 2차원 표면에 3D, 3차원을 심는 거잖아요.
성경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2차원, 평면 역사로 만들었어요. 그들로 하여금 약속, 오늘날에는 생명의 약속인데 이 생명의 약속이 신약에는 3차원으로 되어 있지만 구약에서는 2차원이에요. 생명의 약속의 땅이라고 실제로 지도상에 나오는 가나안 땅, 그 땅을 주님께서 2차원, 그 평면에 기어 다니는 개미처럼 이스라엘을 몰고 온 거예요. 그게 구약에서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약속이에요. 구약에는 평면, 2차원적으로 표현을 하고 신약에 오면 3차원적으로 표현을 해버려요.
3차원적으로 표현을 하는 것을 일종의 ‘증강현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빛이 들어오는 우물 내에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2차원 평면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이미지가 떠올라버리는 거예요. 그 ‘예수 안’에 본인이 들어있는 겁니다. 이 3차원적인 ‘증강현실’은 구약이 없으면, 구약의 설명 없이는 이게 설명이 안 돼요. 어떻게 2차원에서 3차원이 될 수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려요. 지금도 이스라엘 정통 보수 유대교에서는 메시아 오기를 기다립니다.
유대교와 이 복음의 차이가 뭐냐 하면, 유대교는 아직도 우리가 지킬 게 남아 있다는 게 유대교에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복음 안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복음을 알면서도 뭔가 어떤 행함을 추구하는 것, 복음에서는 그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꼼지락거리면서 하겠다는 이 한국교회가 우상의 단체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해서 뭘 할 게 있다고 가르치는 것, 선교, 헌금, 예배, 찬양, 성경공부, 그 어떤 방식이든 더 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우상 단체입니다. 노선이 달라요. 가는 노선이 다릅니다. 지옥 갑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룸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생산된 것이 ‘하나님의 의’거든요.
내가 ‘하나님의 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탓하지 않는다니까요! 그걸 로마서 8장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이야기했고요. 1,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어떤 경우에 그렇습니까? 복음 안에 있을 때,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매일같이 ‘다 이루었다’를 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은 뭘 아느냐? 하나님이 나를 보는 게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있지 나를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 위주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아들 위주에요. 왜? 우리는 언약을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수평적으로, 평면적으로 그들이 살던 곳에서 그들이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과연 이를 수 있느냐, 없느냐를 인류를 대표해서 테스트해봤는데 그 테스트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어떤 말씀이 있느냐? 이미 실패할 줄 아시고, 그럴 줄 아시고 율법에 따라서 어떤 한 인물을 율법안에 등장하도록 예언을 한 게 있어요.
그 예언된 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못하는 것들을 미리 보내시고, 어떤 점에서 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들춰내는 거예요. 그렇게 들춰냈을 때 그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로소 어디에 가까우냐?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실의 바탕층, 제가 바탕층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그 바탕까지 그들을 눈 돌리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겁니다.
‘아, 이게 중간에 있는 인간들이 어떻게 행할 수준이 아니구나. 우리가 내 운명과 내 미래에 대해서, 확정된 내 장래에 대해서 내가 내게 손댈 게 아니’라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 운명은 다른 분 소관으로 넘어가 있지 내가 알아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내 운명은 약속에 달렸다고 하는 거예요.
그 바탕층까지 내려가게 하는 거예요. 바탕층까지 내려가는데 신약에 보면 증강현실이에요.
예를 들겠습니다. 이미 증강현실이 다니엘 5장 5절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말씀을 전한다고요. 언어방식을 사용한다고요, 언어방식을. 문제가 어디 있느냐 하면,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본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본인 내부에 어떤 구조가 있는데 본인 내부의 구조를 몰랐던 거예요. 인간은 자기 마음 내부가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자기 내부, 이게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인간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개의 결과를 낳아요. 하나는 언약을 못 지키면 저주를 받고 하나는 언약을 지키면 영생을 얻어요. 그 자체가 언약으로 주어져서 언약 자체가 균열이 생겨버립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찢어지지요.
열두 제자의 그룹과 12지파의 그룹 사이가 찢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부터 신약 초반까지 내용입니다. 그 역사에요. 그리고 신약 그 이후에 가면 육에 속한 요소와 성령에 속한 요소가 성도 내부에서 매일같이, 이게 지진이 일어나듯이 찢어지고 균열이 일어나는 거예요. 컨베이어 벨트가 순환되는 것처럼 우리 내부에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육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고 싸우고 있다는 것, 이게 갈라디아서 5장의 이야기입니다.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은 서로 다투고 있는데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을 못하게 하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대로 못하게 하고 서로 싸우고 있다. “너 내부에 십자가 사건 터졌어. 이것들아!” 이런 이야기다, 그 말이지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없어요. 구원은 예수님이 구원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구원받은 그 2천 년 전의 살인사건 현장으로 성령은 데려갑니다.
다니엘 5장 5절에 나오는 그 ‘증강현실’ (손가락 나와서 글씨 쓰는 그 현실), 그것과 누가복음 13장 4절에 나오는 말씀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사람이 치어 죽음) 두 개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사실은 똑같은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의미 이미지’를 증강현실로 뽑아낼 줄 알아야 돼요. 그걸 보고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 없다 그 말이야.”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거예요. 둘 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이게 구조거든요, 구조. 지진을 대비 못 한 것은 자기가 살고 있는 밑의 구조를 몰라서 그렇고, 사람이 회개치 못하는 것은 자기 내부의 구조를 몰라서 그래요.
갈라디아서 4장 21-24절에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두 언약이라. 인간의 바탕에는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 인간의 바탕, 지하철이라고 보면 우리 내부에 있는 이 구조, 깔려 있는 이 구조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아담이 있기 전에, 인간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조가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구조가. 그게 두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우리 좋으라고 우리 위주로, 우리 중심으로 일하지 않고 언약 위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언약구조를 알아야 복음을 알고 복음 안에만 영생이 있는 거예요. 언약구조를 모르면 그냥 겉도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이런 소리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지요. “십자가를 통과해서 부활에 이르자.”
십자가는 통과하는 데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들어가는 곳이고 그 안에 담기는 거예요. 담기는 것, 담기는 거예요. 십자가는 담아놓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이 끝나는 거예요. 부활은 십자가라는 다이아몬드 구슬을 떠받치기 위해서 밑에 보조적인 시공간적인 환경을 부활이라 해요. 이게 원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원리가 지금 바탕층이에요. 성령에 의해서 성도에게 안에 내부마음으로 이렇게 심어주는 거예요. 3D 프린팅처럼, ‘증강현실’처럼 그 원리가 뭐냐?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모든 원리입니다. 망대 무너졌다고 해서 그걸 아는 게 아니에요. 손가락이 글자 쓴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성도라는 것은 껍질에 불과해요. 사탕 포장 종이에 불과해요. 안의 사탕이 뭐냐? 주께서 일하는 게 들어 있어요. 언약이 들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 성령인데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다음에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콘택트렌즈입니다. 전기회로를 3D 프린팅한 그 회로가, 하나님의 언약구조를 우리 마음에 새긴 거예요. ‘증강현실’로 떠오르게 합니다.
‘증강현실’이라는 말을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보되 세상에서 복음적 의미를 뽑아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증강현실’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망대 무너졌다. 지진으로 무너졌다. ‘아이고, 우리는 살았어.’ ‘아니야, 그건 아니야.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망한다는 뜻이야.’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자기를 지켜나가는 거예요. 그 언약의 구조에서 딱 두 개가 주어집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언약의 구조에서 두 개가 주어지게 되면 인간의 뜻은 여기서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빠지는 이유를 제가 설명드릴게요. 갈라디아서 4장 22절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라고 했잖아요. 이것부터 따져봐야 돼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또 하나는 이삭인데 이삭은 하나님의 뜻으로 낸 거예요. 이스마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자기 의사에 의해서, 자기 결정에 의해서 그냥 하갈이라는 종과 관계해서 낳은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마저 어디에 흡수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네가 한 짓을 내가 딱 가져와서 이것은 천국으로 통하는 그러한 언약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언약 속에 한 언약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구원 안 받은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두 언약, 천국의 요소와 지옥의 요소가 둘 다 나오는 거예요. 그게 오늘날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 들입니다.
‘나 구원받았다.’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구조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없어져야 되지요.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해도 좋은데 그 하는 짓은 어디에, 어느 구조에 다 포함되느냐 하면, 그 두 구조, 두 언약구조의 에너지에 다 빨려들어서 그 안에 전부 다 흡수되어서 남아 있지를 않아요. 내가 하는 모든 짓은.
그 예가 마태복음 6장 3절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이렇게 되어 있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세상에 어느 인간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일을 하실 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너를 잊어버리는 쪽으로, 너를 도외시하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거예요. 내가 죽는 것도 언약의 일환입니다. 내가 아픈 것도 언약의 일환이에요. 하나님은 내 위주로 일하지 않고 언약 위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이스마엘은 자식이 아닌데’라고 후회를 하든 말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저주받은 자식을 낳게 만들고 그것을 두 언약 구조 안에다 집어넣어요. 아브라함이 하는 것은 지표면이거든요. 이걸 하나님께서는 바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구조 안에, 그걸 바탕으로 해서 이걸 창세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께 있었던 약속으로 전철로 통하도록 만들어 버려요.
그 안에 들어갔을 때 이것은 두 언약이 되어버려요. 언약이 되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뭐가 나왔느냐 하면, 저주받을 계집종, 하나님 앞에 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저주받은 계집종에서 났는데 23절에서 그 표현이 뭐냐? ‘그것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육체가 있는 것은, 반드시 인간은 지옥 가기 위해서 육체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에요. 왜? 육체를 통해서 자식이 태어나니까요. 그 자식은 절대로 천국을 갈 수 없는 거예요. 다른 노선이 필요한 거예요. 기존의 육체로 해서 육으로 가는 것은 지옥으로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게 저주받은 언약에 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육체로 태어난 겁니다.
아버지와 관계있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걸 우리 내부 구조를 통해서 비로소 아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2천 년 전 살인사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살인사건, 메시아가 죽는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데려가요. “봤지? 너희들이 죽였잖아, 예수님을! 이래놓고 너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수 있어? 너희 아버지는 악마야.”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방해하는 것들을 같이 불러모아요. 그 가운데서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진짜 죄가 무엇인지 드러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를 안 찾는다니까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찾아요. 나를 아예 찾지를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어디 있느냐? 나는 없지요. 둘로 깨졌지요. 두 구조로 깨졌다니까요. 두 언약으로.
그러면 다시 갈라디아서 4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이것은 육체를 따라 났기 때문에 억압되어 있다는 거예요. 율법 따라 났다, 또는 육체를 따라 났다. 율법이 육체를 누른다는 겁니다. 층층이, 지진이 일어나서 첩첩, 단단한 철근과 벽돌이 얽힌 것이 아파트 무너지니까 층층이 눌려버렸잖아요. 이 율법이 우리를 누르고 또 누르고 계속 눌러요, 율법이. 손가락으로 막 긁어 파서 율법 지켰다고 하는데 그다음 다른 율법이 또 기다리고 있어요. 선교 헌금 냈는데 교육관 짓는 헌금 또 내야 된다니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구원 속에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를 단독으로 구원하지 않고 생명 안으로 집어넣어요.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면서 생명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생명은 어떻게 나오는가? 두 언약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면서 찢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면서 생명이 중간에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아예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매일매일 우리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야 내 것이 없고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아는 겁니다.
세상의 아내들은 남편보고 일단 짜증을 내요. 일단 짜증스런 어투로 해서 아주 다부지게 말합니다. 불안이 체질화되었어요. 당신 만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마음속에 구조화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남편 탓이 아니고 본인 탓이에요. 본인 구조가 내진설계가 안 되어 있는 거예요. 늘 쪼개질까 불안불안한 거예요. 정말 주님의 생명이 그분한테는, ‘증강현실’이 마음속에, ‘하나님 아들이 다 이루었다’가 그 사람 속에, 빛의 우물 속에 떠 있는 이미지처럼 빛의 이미지로 떠 있는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웃으면서 남편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신이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발언을 하고 어떤 태도를 해도 저 괜찮아요.’ 그 안정감, 그 안정감이에요. 이게 또 잘못하면 율법 되니까 주의하세요. 남보고 또 강요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낳아주신 육체의 아버지는 있지만 그것은 구조적으로 돌아가면 가짜 아버지예요. 아버지 갇히고, 거기서 나온 나도 갇히고, 할아버지 갇혔고, 우리 조상 아담도 갇혔고, 죄에 갇혔고, 악마의 위력에 갇혔고, 율법에 갇혔고, 저주에 갇혀 있고, 아무도 빠져나온 사람 없습니다.
아버지가 없는데 아들이 와서 어디까지 오는가? 우리 내부까지 들어와요. 아들이, 우리 마음속까지 예수님이 들어와요. 예수님은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들어와서 다 이루었던 자기의 활동을 계속해서 활발하게 벌이면 그게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5장에서 아들이 없으면 아버지도 없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아버지 안다고 아버지가 아니고 아들이 들어와야 됩니다. 아들이 들어오게 되면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아들이 인간 손에 죽었고 육체로 난 육의 인간들에게 살해당했다’ 그 살인사건을 우리 내부에서 반복해서 계속 일으켜 버립니다.
일으켜 버리면 그 구조, 바로 선악과를 알았던 인간은 저주받고 생명 나무를 따먹을 수 없게 되었는데 친히 친절하게 생명 나무를 우리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간을 배밖에 내면 돼요. 그 간이 뭐냐? 선악과입니다. 내 안에, 내 안에 나 잘났다, 나는 내 의로 버틴다, 나는 나 잘난 맛에 산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났는지 변명하는 식으로, 그걸 수집하는 식으로 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라는 것을 여러분 배 밖에 내세요.
그게 바로 나를, 우리를 지옥 가게 만들었던, 나를 전에 갇히게 만들었던 악마의 술책입니다. 그 간을 배밖에 내면서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그 신나는 일, 내 안에서 악마를 캐내는 그 즐거운 일, 그 가벼운 일을 왜 우리는 안 하려고 해요? 그 재미있는, 내속에 있는 나를 지옥으로 이끌기 위해서 온갖 나의 의를 부추겼던 그런 작당을 내 바깥에 끄집어내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 작동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안에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기서부터 벗어났다는 것, 예수님의 영이, 내 안의 영이 내 콘택트렌즈 안에 3D, 3차원 3D, 성령으로, 십자가로 프리팅, 박아 넣어서 ‘다 이루었다’가 되었기 때문에 바깥으로 그런 악마가 튀어나오는 그런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 자기 일하는 현장으로 사용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나 잘났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까지 곧장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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