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아는 데 하나'가 되었으면
같이 사이좋게 잘 지내겠네라는 것이 우리 인간 생각입니다. 이미 사단과 한통속이 된 사고방식입니다.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유로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시켜버리십니다.
그 이유는 사단을 배제한 선과 악을 새로이 펼치시기 위함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해석은 ‘하나님과 아들’이 새롭게 선과 악을 규정짓는다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9:16-17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본디 원하시는 바는,
절대로 인간들이 익히 아는 그런 윤리와 도덕에 복음이 결합되도록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새포도주를 담는 것은 도저히 이 인간 세계에서 가능치 않는 불가능한 내용과 결합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참음과 그리고 기적과 능력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사도가 경험한 것은 결코 사도는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들이닥친 일입니다. 곧 불가능성입니다.
그 능력의 내용이 정리된 것이 바로 삼층천에 올라간 일과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가 심겨져 있는 겁니다.
특히 ‘사단’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에 유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의 몸을 계시의 진행 방향을 보여주는 몸으로 사용하십니다.
도착지점은 삼층천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사도의 자아는 완전히 무시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를 모를 정도로 황홀합니다.
그 반면에 시작점이 되는 몸은 육신의 가시가 작용합니다. 이것은 바닥입니다.
즉 인생의 바닥에서 천상까지의 경로가 사도의 몸을 통해 발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몸에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요단강에서는 세례 요한에게 위탁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므로서 죄많은 인간 세계에 합류하십니다.
그리고 그 끝은 십자가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천국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새포도주를 위한 새부대를 병행해서 같이 만드신 겁니다.
그 방법은 바로 ‘과거를 바꾸기’입니다.
과거로 바꾸는 방식은, 과거를 악으로 물들게 한 그 인간들을 죽이는 겁니다.
즉 ‘아담을 아담의 자손’이 죽이는 겁니다.
손자가 이미 죽은 할아버지를 도로 살려내서라도 다시 죽여버리는 방식입니다.
죽이는 방법은 예수님 자신이 인류와 더불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므로서
모든 자가 다 죽은 자가 되게 하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고후 5:14)
예수님은 그냥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매맞아 죽는 하나님’으로서 죽는 겁니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마 21:44)
십자가라는 절구통 안에서 산산조각 난 우리의 모든 행위를
도로 쏟아놓고 보니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바뀐 겁니다. 복음이라는 새포도주를 담는 새부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구원받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어떤 사람이 개척교회를 했는데 교인 한 50명 되었어요. 어느 주일에 보니 자기 아내와 딸 달랑 셋 남고 다 가버렸어요. 그럴 때 그 속 시원함의 만족스런 함박웃음을 띄는 것. 그런 목사 봤습니까? “진작 가지 이제 다 갔구나. 주여, 이런 기쁨을 저에게 허락하시다니.” 이런 여유로움, 이런 당당함.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도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도가 고린도교회와 만났을 때 고린도교회는 전부 다 ‘for me’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이 티가 확 났어요. 그러니 다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천국은 벌써 시작해야 돼요. 미리 시작해야 돼요 미리.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벌써 천국은 시작해야 되는데 그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델케이스가 사도바울입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 그냥 양보해 버려라. 성도가 되었으면 선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희생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하나님을 위하여’에요. 평소에 하나님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그래, 너희들 잘 먹고 잘 살아라. 너 잘났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깊음에 지냈고, 여행의 위험과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그 다음 20절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고, 그리고 뒤에 나오는 광주리 탈출 사건.
본인이 예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본인이 이렇게 해야 된다고 기대했습니까? 아닙니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다가온 겁니다. 불가능성이 다가온 거예요. 이것을 사도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이 사도된 표시고 참음과 표적과 기사, 능력. 참음과 관련된 거예요. 참음 따로 있고 기사와 기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진짜 기적이라 하는 것은 내가 없는데서 풍족함이고 현재 네가 아픈데서 네 은혜가 족하다는 겁니다.
그것이 해결책이라는 거예요. 육체의 가시가 있는 것이 해결책이에요. 빼내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고. 왜? for god.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도도 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빼달라고 했어요. ‘아, 내가 미쳤지.’ 나를 위해서, 가 왜 그 바닥에서, 그 대목에서 튀어나와요? 그러면 안돼요.
‘나를 위해서’가 튀어나오면 안돼요. 기도 잘못 한 거예요. 질책성 응답이 온 겁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사도야, 똑바로 봐. 지금 너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야? 정신 차려 이 인간아. 분명히 해.”
사도는 지금 불가능성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가능성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의 권위가 연속되어서 반복해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사도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 살아 있어서 살아 있는 주님이 주님을 위하여, 아버지를 위하여 하는 그 모든 일들이 사도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바깥으로 방출이 되고 발산이 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했던 그 일이 계속 연장되는 거예요. 아직 안 끝났어요. 주께서 일을 계속해서 사도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신자 맞는가 보자. 아니네.’ 그 기준은 모두 다 불가능성으로 오고, 다르게 이야기하면 너는 지금부터 벌써 천국 생활을 시작했는가 하는 겁니다. 천국생활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나의 조치로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조치에 의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본인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주님부터 시작한 일이 나라는 결과를 낳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 17절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 새포도주는 절대로 옛날 부대에 담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복음은 기존에 알고 있는 윤리 도덕이라는 부대에 담을 수가 없나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의롭다는 그 부대에는 주님의 의는 담을 수가 없나니.16절에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찢어질 대로 다 찢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복음을 아십니까? 복음을 알면 여러분이 모든 일상은 터져버립니다. 나 잘났다는 것은 다 터져버리는 겁니다. 이 원리원칙이 지금까지, 세상이 천국으로 바뀔 때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교회 만들어서 다 바꿔놓았어요. “윤리 도덕으로 사세요.” 인과응보입니다. 이게 불교인지 기독교인지 분간도 안돼요. 옛 부대에 십자가를 결합시키니까 전부 다 찢어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이 아니에요. 벌써 천국생활 시작해야 됩니다. 벌써 우리는 새부대가 되어야 되고 새부대에 하나님의 의가, 새 포도주가 담겨야 됩니다.
이거 아니면 for me가 됩니다. 이것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가 아니에요. 다 나가도 괜찮아요. 나도 나갈게요.
<터미네이터> 그 영화는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겁니다. 불가능이지요. 이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이 내용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바꿀 수 없는 그 과거를 바꿔버립니다.
마지막 아담이 모든 아담을 다 죽여 버리거든요. 시간 여행을 해버려요.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바꿔버립니다.
누가 믿었어요? 누가 알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계획을.아담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역사가지고 진척이 되지요.
악마에 의해서 모든 것이 사로잡힌 세계는 주님께서 오직 한 가지 시간만 적용시켰어요.과거-현재-미래로만 흘러가는 것.
그래서 모든 종교는 미래에 잘 될 거라는 소망을, 상품을 걸고 사업을 벌여요. 앞으로 천국이 있을 거라고, 혹은 지옥이 있을 거라도 계속 미래를 쳐다보고 하는 거예요. 자기 몸은 그저 그대로 멀쩡한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계획을 사도바울의 몸에다 담아 버렸어요. 도착지점, 사도의 자아가 사라지는 지점을 도착지점으로 했습니다. 그걸 삼층천이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에 보면 그 몸 안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자기 이야기 하면서 남 이야기해요.인간이 도착지점, 그러니까 천국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 주님만 있으면 되는 세계, 그게 도착지점이고 시발지점은 내 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가시를 집어넣으니까 이 몸의 아픔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아프니까 사도바울은 빼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에요.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집어넣은 겁니다. 지금 새포도주를 새부대에 담는 그 작업을 하는데 새포도주는 있는데 새부대가 마련되지 않았어요. 그 새부대가 마련되는데 불가능성으로 사도바울에게 집어넣은 거예요.바닥에서 천국까지, 두 개의 사실을 사도의 몸에다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사도의 현재 몸은 육체의 고난이 있는 몸, 그리고 사도가 봤던 그 세계는 내가 어디 있지, 어디 있는 거야, 자기를 돌아본다든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없는 거예요.자기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한다는 말은 인과응보의 원칙이 적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나쁜 짓 한다고 벌벌 떨고 착한 짓 한다고 무슨 기대를 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 경우에나 그런 경우가 생겨요.그런데 지금 천국이 너무 좋아서, 삼층천이 너무 좋아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가 뭐 했지, 그런 것이 생각이 안나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몸을 통해서 바닥과 천국을 다 보여줬습니다.그 시작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사탄이지요.
사탄에서 시작해서 사탄이 없는 곳까지
주께서는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살아계신 주님께서 자신의 정보를 사도에게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어 버리면 사도는 이미 삼층천에 관한 그 모든 미래가 자기 속에 삽입이 되어 있어요.그리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사탄에 잡혀 있다는 그 과거까지 함께 자기 몸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미래와 현재가 지금 공존하고 있어요. 사도의 이러한 은사가 주어지기까지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 거기에 요한복음까지 합해서 4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그 일을 죽 계속 했습니다. 선과 악은 너희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내가 정한다.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해석의 결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어줌으로서 구원받는 거예요. 왜? 불가능성이 계속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불가능성이 계속 살아남아야 돼요. 그래야 은혜가 살아요. 우리는 내 죄지은 과거가 어떻게 졸지에 돌아보는 순간 하나님의 의로 바뀌었는지를 끝까지 몰라야 돼요.왜? 주님의 조치니까.
사람은 여행합니다. 여행할 때 시발점과 도착지점을 알고 있어요.그러나 그것은 마귀의 술책이고 그것은 옛부대입니다. 거기에는 복음이 안 담깁니다.주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올 때는 도착지점을 꽂아놔 버려요. 쉽게 말해서 그 머리를 쪼개서 십자가를 거기에 집어넣어 버려요. 그 십자가가 도착지점이에요.빌립보서 3장은 말합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간다. 십자가가 우리가 가야될 곳이에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요. 도대체 근원적인 문제로 가려면 여기에 사탄이 개입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해야 돼요. for me,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예요.이 창세기 3장 15절을 그대로 복사를 해서 사도바울의 몸에 집어넣어 버려요. 그리고 삼층천은 사도의 몸을 delete, 제거해 버려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그렇게 하셨어요.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니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왜 이러십니까? 제가 세례를 받아야 될 텐데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사람들만 받아야 되는 물세례를 왜 받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빨리 나에게 세례를 줘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 되어야 돼요. 의인이지만 죄인과 똑같은 경우를 당해야 돼요.똑같은 경우를 당해줘야 비로소 사람들은 모르지만 사탄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계속 알려줄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ctrl+V’에요. 아담이 죄지은 것을 예수님 자신이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사탄의 가시가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대체 주님께서 사도의 몸에 무슨 짓을 했는가 그 말이지요. 구속사가 거기에 다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 몸에다가 죄를 복사를 해서 복사기능을 하게 됩니다.복사기능을 하면서 재미있는 것은 평소에 안보이던 사탄, 조용하던 사탄이 어떤 식으로 현장에 작용하고 있는가를 노출시키고 있는 일을 하십니다.
그게 마태복음 16장 20절에 나옵니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대목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이야기 듣고 그 다음이야기 듣고 제자들이,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해 있습니다. 드디어 사탄이 나온 거예요. 사탄이 평소에 인간들을 어떤 식으로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이 어떤 말을 던질 때 비로소 확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이야기했다고요.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를 했잖아요. 베드로는 갑자기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사탄에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니까 사탄은, 터미네이터가 와서 존코너 엄마인 사라코너를 미리 죽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가자는 겁니다. 과거-현재-미래, 이대로 가자는 겁니다. 그래야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희망은 나중에 두고 출발했으니 도착지점을 보고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뭐냐?
죽기 위해서 골프 쳐야 돼요.해외 놀러가는 것 죽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요. 등산하잖아요. 죽기 위해서 건강을 챙겨야 돼요. 설거지하잖아요. 죽기 위해서 해야 돼요. 이거 옛부대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됩니다. 불가능입니다. 가능치 않아요.
베드로가 사탄으로 변한 것은 이유가 딱 한가지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이 믿게 되면 그 순간부터 불가능성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전방에서 새벽에 보초서고 있는 병사가 추석날 보름달을 볼 때 그 보름달이 엄마의 얼굴로 보이는 겁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 눈물을 죽 흘리지요. 이게 바로 가능성입니다.
세상에 내 몸이 있으면 내 몸에서 사도는 사탄의 가시와 삼층천이 나왔는데 우리의 평소의 몸은, for me, 나를 위해서 연결되어 있는 모든 배선들, 전자기기에 있는 복잡한 배선들, 나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으로 생각해요. 왜? 달덩이가 자기 엄마 얼굴로 보이거든요. 70, 80까지 살아가면서 내가 봤던 것은 전부 다 내 몸의 관련성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게 과거라는 겁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전부 다 현재 내 몸을 위하여, 나를 위해서 전부 다 엮은 거예요. 그 기억이 나의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모든 얽히고설킨 만남, 그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다 나를 위해서예요.그러니 그 마음가지고 교회 온 거예요. 교회 와서 내가 어려운 것 빨리 보상해달라고 기도들 하고 철야하고 난리도 아니에요.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두 자로 믿는다는 겁니다. for me. 예수 믿는 것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 믿는 것도 나를 위하여. 오직 나를 위하여.
옛부대 그대로 있으면서 나는 신자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놈의 문제가 뭐냐, 그놈의 믿음 때문에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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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믿을 수 없었고 내일도 믿으면 안돼요. 내일도 믿을 수 없어야 돼요. 모레도 믿을 수 없어야 돼요.
계속 믿을 수 없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불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신앙이 있으면 그것을 밟아버려야 돼요. 부숴버려야 돼요.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사람이나 백부장 같은 경우에 주님을 만나는데 뭐라고 하느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 외에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돼요.
예수를 안 믿으면 되는데 예수를 믿다 보니까 뭘 믿느냐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for me에요. 예수 믿는 나를 믿는 겁니다. 그렇게 세운 교회를 믿고. 그러니 기도 백날 하니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리 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옛부대에 새포도주를 담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내가 불신자로 달라져야 되는데 불신자 되면 지옥 가는 것이 겁나는 거예요.불신자 되는 것이 왜 그게 나빠야 됩니까? 불신자 되어서 지옥가게 되면 지옥 가야지요.그게 주님의 조치라면 그걸 받아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내가 뭔데, 여러분이 뭔데 천당 가야 돼요?
예수님의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어떤 경우에만 그리스도로 나타나느냐 하면,
네가 마귀에 속했다는 것을, 네가 바닥에 속했다는 사실을 들춰내는 현장에서만,
비로소 불가능성만 다가올 때만 예수님은 유일하게 그리스도가 되고 우리에게 새포도주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쫓아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이 하나님의 취지도 모르고 수십 년 우리가 예수 믿은 거예요. 이런 취지도 모른 채로.
마귀의 주장은 아니까 막가자는 이야기, 같이 맞먹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눈 감고 계속 넘어가자는 거예요. 선악을 알았으니 바르게 살면 되지 않느냐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뭐냐? 모든 인간은 다 죽여 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 죽이는 방법은 뭐냐?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20장 35절에서 37절인데 선지자를 침으로 말미암아 선지자 몸에 뭐가 남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때렸다는 흔적이 남아요. 도마에게 손가락을 가지고 창자국에 집어넣으라는 그 말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가에 난 자국은 인간들이 평소에 바닥, 악마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침 뱉고 욕하고 미워했다는 흔적을 주께서 남기는 거예요.
주님이 물세례 받았기 때문에 죄인의 모습으로 그걸 남겨서 이 몸 그대로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과거로 돌아가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죽여 버리는 전략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거예요.
예수님 자기 몸의 흔적은 이미 하나님을 팬 거예요. 팼기 때문에 맞아 죽은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새포도주에요. 하나님을 팼다는 말은 지옥 가더라도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 십자가 모습 보면서 더듬어 가는 거예요. “예수 급이 저 정도 급이야. 저렇게 무가치한 급이야. 저 인간 믿지 마.”라는 것을 다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죽는 순간 모든 아담의 분신들은 다 죽었어.” 이것이 로마서 5장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감히 옛부대에 하나님의 의를 담을 수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의 담으면 우리 부대 찢어집니다. 찢어져야 돼요. 그 찢어지는 장면이 마태복음 21장 44절,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주님께서는 절구에 옛부대인 우리를 넣습니다.절구에 넣고 찧습니다. “이놈아 가루가 되어라.” 가루는 불연속성입니다.
가루를 보고 우리 엄마 닮았다, 안됩니다. “엄마가 보고플 때……” 안됩니다. 그날은 그날이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모든 화투짝이 다 끊어지는 화투짝, 다 해놓고 열어보니까 반짝반짝 다 하나님의 다이아몬드, 하나님의 의가 나와요.
왜? 주께서 십자가로서 나를 부순 그 행함,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이지요. 그게 태장 맞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그리고 굶고.
“이놈의 사도야, 너는 연속이 없어.” 불연속. 매일같이 주께서는 우리의 옛부대를 유지하지 않도록 합니다.
내가 뭘 믿어서……, 믿는 것 좋아하네. 믿음, 소망, 사랑, 가루로 다 없애버려요. 그래놓고 그 절구의 내용을 부으니까 거기서 반짝반짝 하나님의 의가 나오는데요.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강한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내가 너희들 보기에 죽은 같지? 내가 영원히 살았고 나는 날마다 죽고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온다.”
이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의 의미는 이게 담겨 있습니다. 과거가 바뀌었다. 과거를 바꾼다. 죄 지어놓고, 이기주의, 나를 위해서만 교회 왔는데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의로 바뀌어져 있을 때 “주여, 제가 또 가루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뭘 생각했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뭘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뭐 때문에 교회 왔습니까?
다 사기고 사기였던 것을. 그러나 그 사기술, 돌아보니 이미 반짝반짝 피 흘린 하나님의 의로 바꾸어주시는 그 작업으로 인하여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그 그리스도를 전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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