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1a 울산강의-역대기상(26강) 28장 6절 : 성전의 불연속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28장, 다윗이 성전을 짓게 된 취지, 그 내력을 백성들에게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겠다고 자기가 제시했지만 자기로서는 짓지 못하고 자기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성전이 지어지는 이유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28장에 4절부터 나와 있습니다. 28장 3절에 보면, 다윗은 성전을 짓지 못한다. 근데 솔로몬을 통해서는 성전을 짓는다. 6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죠. 다윗이 성전, 안 된다. 그런데 솔로몬의 성전은 된다. 이게 뭐냐 하면 솔로몬 성전에는 무엇이 들어가 있느냐 하면, 다윗의 아들이라는 요소가 솔로몬의 성전을 짓게 됩니다. 아버지는 성전을 못 짓고 아들이 성전을 짓는데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솔로몬 성전을 짓게 된 것은 여기 어떤 요소가 추가적으로 들어갔느냐 하면, ‘너의 아들이 성전을 짓는다’라고 돼 있으면서 여기서 어떤 교체가 일어나요.
다윗의 아들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솔로몬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로서의 솔로몬은 여기서 탈락이 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탈락이 된다는 말은, 다윗의 탈락이 되고 그 탈락된 자리에 하나님이 들어감으로써 성전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상당히 어렵지요.
그냥 집 지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성전 안에는, 성전은 뭐냐 하면 ‘건물 짓다’도 포함되지만 ‘내 아들이어야 한다’라는 것도 같이 두 개가 겸하여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의 아들은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돼요. 그것이 역대상 28장 6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저를 택하여 내 아들을 삼”았다. 네 아들이 내 아들이 된다. 하나님이 이야기하신 거예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바뀐다는 것, 바뀌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오늘 살펴봐야 돼요. 다윗은 왜 성전을 못 짓는가? 다윗은 설명하기를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군인이라 피를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라고 돼 있어요. 하나님의 성전의 조건은, ‘내 이름이 내 이름다워야 한다’에요.
그러면 내 이름이 내 이름다울 때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 이름이 내 이름다워야 한다는 것은 어떤 요소가 빠지느냐 하면, 다윗 네가 땅에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이 땅에 피를 흘린 요소가 내 이름을 내 이름답지 못한 요소가 된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전 짓는 것도 재료 있고 설계도면 있으면 되는 것 아니에요? 이건 뭐 조건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 많은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막과 성전이 달라요.
성막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설계대로 이 땅에 이스라엘 속에 함께 한 겁니다. 그러면 성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게 맞지 않느냐? 그런 점에서 둘 다 성막이나 성전이나 하나님이 인간세계 속에 들어온다는 점에 동일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성막은 기존의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온 방법이에요. 그런데 성전은 기존의 이스라엘을 제거를 해버려요. 기존의 이스라엘은 없고 새로 만든 이스라엘 속에 성전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성막에 있는 언약궤가 성전에 그대로 들어오게 되면 이게 성막과 성전 사이의 연속성이 유지가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거예요. 성막은 한 데 별로 좋지 않은 천막 속에 생활한다면 성전은 그럴싸한 인간의 건물, 왕궁보다 화려한 성전에 거한다는 점에서 어떤 연속성이 있을 게 아니냐고 생각할 건데, 지금 제일 우리가 봐야 될 것은 땅에 피 흘렸다고 왜 성전을 못 짓는지 그 점을 여러분들이 파악을 해내야 돼요.
이 성전에 대해서 논리를 따져 가면 굉장히 복잡하지만 이때는 결론부터 먼저 보는 것이 요령이 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성전 완성의 요건이 나옵니다. 2장 6절, 7절에 보면,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렇게 돼 있어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지 아니하면 성전이 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을 초빙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살겠다는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은 이름이어야 성전이 갖추어지는 겁니다. 인간에게 배척받는 하나님만이 성전의 모퉁이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막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막과 언약궤와 함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다, 라고 생각한게 성막이에요. 그런데 성전은 뭐냐? 그렇게 생각한 너희들 기존의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을 때 비로소 내가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비로소 성전이 돼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사람들이 버렸다고 흔적이 남아 있는 그 돌만이 성전을 이룰 수 있는 모퉁이 돌, 아주 시작점, 기초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땅에 피를 흘린 것이 왜, 이것은 신약 때 완전히 다 드러난 사실이고요. 그럼 구약 다윗 시대 때 다윗이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땅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언질을 주셨다. 이게 무슨 뜻이냐 말이죠. 다윗은 군인이라서 땅에 피를 흘렸다. 왜 피를 흘렸지요? 각혈했어요? 폐병 걸렸습니까, 왜 땅에 피를 흘렸지요?
다윗에게 어떤 기대가 있었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왕이기 때문에 뭘 건사해야 되고 뭘 지켜줘야 돼요? 이스라엘을 지켜줘야 돼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왕으로서 이방나라와 싸웠던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하나님 나랍니까, 다윗이 나랍니까? 다윗의 나라 되지요. 모든 백성들은 다윗의 전쟁의 성과에 완전히 속박이 되는 겁니다. 얽매이는 겁니다. 다윗이 승리하면 자기는 살고, 다윗이 패배하면 이스라엘은 망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성들은 다윗의 나라에 집합돼 있는 겁니다. 전부 다 거기에 예속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다윗의 나라에요. 그러니까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다는 말은 거기에 예속된 모든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다윗이 대표니까 다윗과 더불어서 박탈당하는 겁니다. 성전 지을 수 있는 그러한 자격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솔로몬의 경우에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는 건물이 있다.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내 아들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은, 다윗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 집에 모셔서 하나님과 잘해보겠다는 것과 이거는 전혀 연속성이 없어요. 딴 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아들이 없는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고 그 아들 속에 하나님이 들어온다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우리 집에 하나님 왔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와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온다’ 이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에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줬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서울에 사는 시댁이 재벌이라고 합시다. ‘너희들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도록 매달 조금씩 보내줄게. 한 이천 만원씩’ 이 시어머니가 좋습니까, ‘나 너희 집에 살래’ 어느 쪽이 좋습니까? 재벌이고 뭐고 간에 우리 집에 사는 건 싫어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우릴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그거는 내 것이 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다윗이 생각했던 다윗의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쪽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전쟁할 때마다 승리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이 약속의 땅에서 정착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전쟁을 벌인 거예요, 다윗이. 그리고 다윗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여기서 다윗 자체에 큰 교체가 일어나요. 내가 나를 버려야 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밧세바를 보냈고요.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뭐냐 하면 왜 다윗이 밧세바와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문제 삼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냐고 문제 삼아요.
다윗은 부하의 아내와 부하를 죽이는 것이 왜 왕의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지 몰랐어요. 몰랐는데 다윗에게 다윗 자신을 잃어버리는 그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여러분,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부모가 살아 있는데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자식은 부모의 미래에요. 나의 미래가 자식한테 대물림 되고 자식한테 기대를 거는 거예요.
그러면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곧 누가 죽었다는 말이에요? 나의 미래가 잘렸다는 겁니다. ‘나의 미래는 없다’가 돼요. 나의 미래는 스톱이 돼요. 자식이 죽으면 미래가 스톱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자식이 죽어요. 그 죽은 자식의 엄마가 누구냐? 임신한 자가 밧세바에요.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해서 임신이 됐는데 그 임신한 자식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은 나를 이스라엘 왕에서 잘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내가 이스라엘 왕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면 기존의 이스라엘은 뭐냐? 지금 다윗이 내가 왕이에요. 백성들도 다 인정합니다. 왜? 전쟁에서 본인이 승리해서 건사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지켜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밧세바와 다윗 사이의 아이를 난지 칠일 만에 죽였거든요. 여기서 다윗은 자기가 자기와 결별해야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금식도 중단하고 굉장히 기뻐하는 데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밧세바와 나 사이에 생긴 아이를 하나님이 죽였다는 말은 보통 사람 같으면 이렇게 생각해요. 저 여자가 계속 안에 있으면 재수 없는 여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너도 남편 가는 길에 죽이든지 안 그러면 쫓아내든지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왔을 때 시편 51편에 나단 선지자가 한 이야기를 다윗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는데 집에 많은 양이 있어요. 이 부자한테 손님이 온 거예요. 그럴 때 자기 많은 양을 손님 위해서 잡지 않고 한 마리 양이 있는 하인의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다고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어서 지적을 해요. 여기서 생각해보세요. 왜 부자는 많은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안 잡습니까? 왜 한 마리밖에 없는 종의 양을 왜 잡아요?
그것은 다윗은 자기가 왕이잖아요. 어차피 나라는 왕을 위해서 있는 거고요. 왕이 살아야 나라가 살아요. 종은 있으나 마나에요. 종의 양 한 마리는 있으나 마나라고요. 왕의 재산에 흠집나면 안 돼요. 왕이 재산이 손실나면 안 돼요. 왜냐? 하인은 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왕이기 때문에 밑의 직원들, 종의 양을 잡는다는 그것이 흠이 되질 않아요. 다윗은 이스라엘 자체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왕이기 때문에.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기를 부자라고 이야기하니까 다윗이 화가 나서 내가 속해 있는 이 나라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러한 부자가 있었어? 누구야?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야 되고, 네 배가 아니라 그 사람 잡아 죽여도 상관없어. 적어도 내가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에는 율법으로 철저해야 돼, 라고 강조하면서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었던 그 사람에 대해서 ‘누구야, 그 사람? 내가 왕으로 있는 한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하니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사람 누구라고 밝혔지요. 누굽니까?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왕이라는 걸 왜 잊어버렸느냔 말이죠.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지 당신이 아니다 이 말이죠. 당신은 율법에 종속돼야 돼, 예속돼야 된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야와 밧세바를 나단 선지자를 통해 뭐로 비유했느냐 하면 건방진 당신 때문에 잃어버린 양으로 당신 나라에서 왕이라는 입장에서 범죄를 유발시켰다는 거예요. 근데 다윗은 그걸 기뻐한 이유가, 내가 밧세바나 우리야를, 다른 데는 그런 게 흔해요. 그 점을 꼭 집어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이스라엘 나라는 내가 통치하는 게 아니고 율법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연속성을 견지한다는 뜻에서 기뻤던 거예요.
내가 잘나고 모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이 언약대로, 율법대로 이 나라를 제대로 이어가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반겼던 겁니다. 그러면 그 우리야와 밧세바, 밧세바는 자기 남편을 잃었고 자식 잃었잖아요. 그렇다면 이거는 뭘 뜻하느냐? 아까 성전의 조건이 돼요. 뭐냐? 사람들에게 배척당한 잃어버린 것이 새로운 성전의 기초 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거기에 대해서 가해자로 등장했고.
그러면 다윗은 뭐냐? 가해자인 나와 하나님의 혜택을 입은 나 사이에서 내가 나와 빠이빠이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나와 분리돼야 되고, 내가 나와 결별돼야 돼요. 내가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그 쪼개지면서 그 안에 뭐가 들어간다? 하나님의 억울하게 죽었던 우리야의 피가 개입되면서 내가 나를 버릴 수가 없었던 나를 이제는 과감하게 차버릴 수가 있었던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께서 밧세바 아이를 죽임으로써 다윗은 그 아이의 죽음은 자기 자식이 죽었으니까 이건 다윗의 미래가 죽은 거예요. 다윗 본인 자신이 미래가 없이 끊어진 거예요. 끊어지고 그 뒤에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에 속한 밧세바와 동침을 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은 위반했지만 사랑은 이어진다는 뜻에서 이름이 ‘여디디아’라 해서 누가 태어납니까? 솔로몬이 태어나지요.
그러니까 성막에서 성전으로 바뀔 때는 어떤 조건이 있어야 된다? 바로 인간의 모든 하나님은 내 편이 돼야 된다는 그것이 뭐로 바뀌어야 돼요? 연속성이 아니고 뭐로 바뀌어야 돼요? ‘불’연속성, 다시 말해서 나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나에게 끊어져야 구원받는 사람 돼요. 끊어진 나와 새롭게 성립된 나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자로 끼어들어가는 겁니다.
성막은 이방민족 앞에서 ‘우리는 성막 있다, 언약궤 있다. 언약궤 앞장세우면 너희들 작살나는 것 다 알지’ 하고 언약궤로 기존의 자기 것을 지켜내고 견지해내고 버티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예요. 다윗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언약궤를 너무 한 데 추운데 초라하게 놔두면 안 되겠다. 근사하게 모시겠다. 그동안 우리에게 전쟁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을 좋게 모시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은 말하지요. 그게 누굴 위함이냐? 네 눈에 보기에 네가 이스라엘 왕으로 보이냐? 너는 지금 행동하는 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동하지? 그렇다면 저 백성은 네 백성이야, 하나님 백성이야? 이렇게 다그치고 묻는 거예요.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안 죽였으면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아무 해답이 없었을 거예요. 밧세바와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그것도 그냥 죽였으면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을 하면서 나단 선지자가 직접 이야기하지요. 그 사람이 기분 나쁘든지 상관없이 직접 이야기해요. ‘당신이야.’ 당신이 바로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 내 백성을 네가 죽였어. 왕이라는 작자가 내 백성 죽였잖아. 이래도 네가 왕이야? 너 하나 살겠다고, 네가 왕 행세 하겠다고 네가 우리야와 밧세바 그들은 망쳐버렸다는 거예요.
다윗은 그런 밧세바와 헤어질 수가 없지요. 왜? 헤어지면 안 되지요. 나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으로 주어진 사건 자체를 자기가 왜 피해버립니까? 나를 죄라고 고발한 십자가를 우리가 왜 피해요? 십자가 아니면 어디서 내가 지옥 갈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겠어요? 십자가 아니면. 다 지 잘난 맛에 사는데요.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면, 더 난해해집니다만 할 수 없지요. 해야 될 것은 해야 되니까.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제가 질문을 적어볼 테니까요.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답변해도 내가 할 테니까.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허락하셨는가? 애굽이란 땅에 살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왜 살게 하셨는가? 주관식으로 하면 답변하기 곤란하니까 객관식으로 골라잡기 하겠습니다.
①정착시키기 위해서, ③번도 골치 아프다. ②정착시키지 않기 위해서. 몇 번입니까? 이유도 모르지만 ②번이 정답 같이 보이지요. 이미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정착했어요. 정착을 십년, 이십년 한 게 아닙니다. 사백년 동안 정착했어요.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데 그걸 강제로 끌고 왔어요. 애굽에서 강제로 끌고 간다고요. 그러면 그들은 땅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모든 땅은 주인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애굽의 땅 나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주인 없는 땅에 가는 줄 알았어요. 이 세상에 주인 없는 땅이 어디 있어요? 주인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가나안 땅도 토착민이 있어요. 토착민은 그 땅을 자기가 주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애굽에 살던 자가 거기서 강제로 이주했어요. 강제로 이주해서 땅이 없었다 이 말이죠. 땅 없는 곳에 가는 줄 알았더니만 가나안 땅에는 토착민들이 있었고, 토착민들이 얼마나 강대한지 이거는 뭐 빼앗을 수가 없어요. 전쟁하나마나 이스라엘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자들이 가나안 땅에 있다 이 말이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애굽에서는 그냥 애굽 땅에 살았는데 나올 때는 땅은 없는데 그 대신 하나님이 동행합니다. 땅은 없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그러면 계속 동행하고 나그네 생활하지 약속의 땅은 왜 주시는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이게 문제에요. 정착하는데 ‘땅에 정착할 것인가, 주의 이름 안에 정착할 것인가?’ 이걸 이스라엘에게 묻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아니라면 나는 땅에 정착하지 않겠다는 신앙심을 갖고 있는가를 확인해보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에 여호수아로 정복해서 했지요. 땅을 정복하자마자 뭘 날려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날려버린 거예요. 애굽에서 땅 위에 살았잖아요. 그러면 그 토착민들, 이스라엘 아닌 그들도 땅 위에 살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이 땅이 위에 정착하는 것이 왜 나쁘냐’는 거예요. 이걸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지요. 빌립보서 3장 20절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제가 분명히 넌지시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 울산에서 사는 게 왜 나쁩니까?’ 하여튼 눈치도 없어. ‘울산에서 사는 게 왜 죕니까?’ 주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래요. 지금 주의 이름이 하늘에 있다. 그건 틀린 말이에요. 그럼 주의 이름이 어떤 분이냐? 땅에 오셔서 하늘에 가 계신 분이에요. 땅을 흩어보시고 올라가신 분이거든요. 인자는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는 이유가 우리의 신앙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인지 확인 차 성령께서 성경을 보게 해요. 마태복음 15장 27절에 보면 여기에 수로보니게 또는 가나안 여자로 돼 있는데 이방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이 와서 자기 딸이 흉악한 귀신 들렸다고 예수님 뒤에서 소리 질렀어요. 2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돼 있지요.
참 예수님의 그 말씀이 정말 깊이가 있지요. ‘잃어버린 양 외에는 나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분명히 언급했어요. 문제는 잃어버린 양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인간 치고 스스로 자기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윗 같아서 정착하려고 해요. 정착하는 의지가 뭡니까?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내 힘으로 내가 내 인생 건사하려고,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버티려고 하는 거예요. 안 잃어버리려고.
사람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버림받기 위해서 살아가버리면 버림받은 집에 성전에 합세하지 못해요. 하나님께서는 다윗 이후, 솔로몬 이후에는 이스라엘 속에 건물로 성전이 아니고 새로운 이스라엘 자체를 성전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규명하면서 솔로몬 시대를 엽니다. 다윗은 건물을 지어드리려고 했잖아요. 솔로몬은 건물 말고, ‘나는 사람 자체가 내 집이다’ 이래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에베소서에 들어가면 뭐냐?(이번 수련회는 에베소서 합니다) ‘인간이 곧 성전이다.’ 성령으로 지어진 집이 성전이에요. 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다윗의 나라에, 다윗이란 한 인물에 예속돼 있다면 완전한 성전은 예수님이란 인물에 완전히 예속돼 있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버림받은 돌이 된다면 같이 버림받아서 모퉁이의 돌에 합세한 자만이 하늘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집엔 안 간다 하니까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28)
잃어버린 양 외에는 찾아오지 않는다 하는데 잃어버린 양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나타나고, 생산되느냐? 그 여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개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라고 운을 떼요. 개인은 독자적으로 자기가 주인이 아니에요. 개에게는 뭐가 있다? 주인이 있다. 그러면 개에게 떨어지는 혜택은 어디에서 주어진 혜택입니까? 개 본인이 원한 게 아니고 주인 상에서 떨어진 게 있으면 그제야 주어먹을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개의 신세에요. 철저하게 주인에게 예속돼 있는 개란 말이죠.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잃어버린 양의 태도, 자세란 겁니다. 왜? 개는 자기 운명이 개 자기에게 너무나 알기 때문에. 주인이 주면 먹고 안 주면 자기는 끝나는 거죠. 주인의 운명에 자기가 따라가는 거예요. 이게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것과 여러분 비교해보세요. 같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사람과 비교해봅니다.
어떤 청년이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 16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쭉 나오지요. 22절에,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이 청년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재물에 손상이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돈에 축 났습니까? 아니지요.
재물은 그대로 있는데 뭐가 날아갔어요? 영생 날아갔지요. 장사 참 자알 했다. 돈은 그대로인데, 이 청년이 앞으로 돈 더 잘 벌 수도 있어요. IT사업해서. 돈은 벌었는데 뭐가 없어요? 영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5장의 이 여인은 돈은 없는데 뭐는 있어요? 영생이 있는 거예요.
돈이라 하는 것은 내 세계를 지탱하고 연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꼭 필요한 게 돈입니다. 나를 이 땅에서 정착시키는데 꼭 힘이 되고 에너지 되는 게 돈이에요. 돈은 자존심이에요. 돈 있으면 나 있고, 돈 없으면 나 없는 거예요. 이걸 마다해요? 부자 청년 보세요.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주께서 뭘 건드렸지요? 자존심을 건드렸지요. ‘네 많은 재산 팔고 빈털터리 되어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그 청년 계산했을 거예요. 돈이 없으면 어디서 못 산다? 땅에서 못 살지요. ‘그래 땅에서 못 살면 나를 얻을 것이다. 땅에서 네가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으면 그제야 너는 나를 이해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요.
이 이야기 듣고 청년만 놀란 게 아니에요. 누가 놀랐겠어요? 같이 있던 제자들이 놀랐어요. 그다음부터 벌벌 떨어요. ‘주여,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바람에 이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주여,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봤지? 부자가 천국 못 가는 것 봤지? 부자가 천국을 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해라.” 있을 수 없어요.
제자들이, ‘누가 구원받습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누가 구원받겠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구원받을 사람 단 하나도 없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해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겠습니다.’ 뭔 뜻이겠어요? 자기들은 예수님 붙어 다니는 이유가 있었어요.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따라다닌 거예요.
제자들의 잘못은 뭐냐? 자기와 자기를 못 떼어놓았다. 떼어놓지를 못했어요.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날 지키랴.’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가 현재 A, 그리고 미래의 나, 그걸 B라면 이 속에 연속성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기서 은혜로 도와주셔야 지금의 내가 나중의 내가 됩니다. 지금은 세상에 있지만 나중엔 천국 가는 내가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고 주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고 개입해서 도와 달라. 이것 때문에 교회 나오잖아요. 이게 부자 청년이라고, 이게 부자 청년이에요. 미래의 나와 끊어질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자꾸 나 있는 곳에 하나님 좀 찾아와 달라는 거예요. 나도 멀쩡하고 멀쩡한 하나님 찾아오시고. 그런데 주님께선 멀쩡하지 않은 주님이 멀쩡한 내 속에 아예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나는 내가 멀쩡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멀쩡하지 않게 여긴 그 예수님이 진짜로 멀쩡한 예수님이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동안 왜 그걸 발견 못했어요? 자기 멀쩡한 데 온 정신을 거기다 팔고 있었기 때문에, 나 잘 되기 위한 조건 하에 예수 믿었기 때문에 진짜 예수를 못 알아보고 가짜 예수, 가짜 주님만 믿습니다, 하고 닦달내면서 열심을 냈던 겁니다. 나 버리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여러분, 다들 구약성경 백독은 했지요. 그 구약성경에 나오는 성도들 보세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위해서 결별됐지요. 맞지요? 이스라엘 위해서 야곱이 결별됐지요. 맞지요? 잘 나가는 이삭이 나중에 그 잘 나갔던 아버지 이삭이 거짓말에 당하는 또 당해야만 마땅한 거짓 아버지, 엉뚱한 데 축복을 준 아버지라는 것이 들통 났지요. 그리고 야곱의 형제들이 자기한테 하자가 있고,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발견하지요.
이게 구약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가 꿍치고 우리가 못 놓는 나 자신을 놓아버리게 하는 그런 권능, 그런 능력이 우리를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주님의 능력의 효과입니다.
그래서 지난 번 디도 3장에 나왔지만 사람이 자기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구원을 받지 못한다 했어요. 이건 행함으로 말미암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5장 4절, 제가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뭐하고? “끊어지고” 그러면 보세요.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으려고 하는 작자가 있던가요? 없지요.
그러니까 뭡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나에요. 끊어진 나는 끊어져야 돼요. 시작을 내가 나를 건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니까요, 모든 인간들은. 이거는 우리 선배가 되는 유대인들이 다 그런 짓한 사람들이에요. 율법 주니까 우린 선택됐다, 율법까지 주셨네. 하나님이 왜 주셨겠는가? 말씀 지키면 구원받고 복 받기 때문에 지킨다. 그러니 교회 가서 열심히 말씀 지키자. 이 생각 안 한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이 생각 안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인간 치고 이 생각 안 하겠어요? 율법은 무엇을 자극시키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어떤 심보를 갖고 있는가를 들춰내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율법 주니까 아까 부자 청년 처음에 뭐라 했어요? ‘영생 어떻게 얻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안 그러면 영생 얻는 자기 어릴 때부터 노하우를 이야기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영생 얻기 위해서 뭘 했습니까? 십계명대로 다 지켰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본인이 본인을 안 잃어버리겠다는 하나의 몸부림이에요.
그냥 성막 있으면 좋겠다, 해서 다윗이 성막 있는 건 좋은데 너무 바깥에 비바람 다 맞고 천막으로 해서 안 되겠다. 안쓰럽다. ‘ 가 거창한 안정된 집을 지어드려야지’이게 뭐냐? 성전 짓겠다는 취지의 다윗의 시작이었어요. 너 잘렸어. 너 아들이야 할 때, 내 아들? 아들이 있어야지. 네 아들 죽었어. 뭔 뜻입니까? 아들 죽이고 그 죽은 자리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아들은 이건 다윗 자기와의 연속성이 아니고 불연속성이에요. 성전은 성막과 불연속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버림받은 그 돌이 모퉁이 돌로서 성전이 이뤄지기 때문에.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다음에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실제로 은혜 받은 적도 없고요,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적도 없어요. 그냥 흉내 내기로 그리스도 믿습니다, 하는 자는 실제론 다 끊어졌어. ‘너는 들어온 적도 없고 끊어졌어.’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다음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이렇게 돼요. 율법은, 시간이 약간 지났습니다만 이것마저 해야 내가 안 간지러워요.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율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라 해요. 그러면 그전에 율법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율법이 사백삼십 년 후에 새로 생겼다는 말은 율법의 끝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로마서 10장 4절에서는 율법의 마침이라 한 거예요. 율법은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기 위해서 준 거예요. 탐색전이죠. 뭘 탐색합니까? 내가 모르는 나의 옛사람이 꿍꿍이가 얼마나 악마적인지, 마귀적인지 탐색하려 들어왔다 빠져나와요. ‘주제파악도 안 되면서 네가 구원을 받겠다는 그 심보, 그게 십자가 지신 주님이 가신 길과 네가 같게 보이느냐?’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의 마침과 율법의 완성은 달라요. 율법을 마쳐버리면 율법은 자기 경험(기능?) 다하고,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한 게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한 겁니다. 이것 아시고 10분 쉽시다.
20231201b 울산강의-역대기상(26강) 28장 6절 : 성전의 불연속성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하겠습니다.
아까 가나안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맞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개라고 한 수로보니게 여인이에요. 이렇게 우리 자신은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뜻과 너무 달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을 하느냐 하면은 나로 인하여 나를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나를 구원해요. 나로 인하여. 구원의 방해자가 주님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옛 사람이 새 사람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환경으로 우리를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알아요. 나는 내가 버티고 이 땅에서 계속 살아남기 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도 주님의 경험에 동참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걸 발견하게 돼요. 내가 살기 위해서 악바리처럼 설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방식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네가 너를 위해서 열심히 사는 방식으로 네가 쫄딱 망해봐라, 네 자신에 대해서. 돈은 안 망했는데 영생은 없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버리는 게 아니고 다윗으로 하여금 장차오실 구원자가 내 인생 설계에 이미 들어왔다고 했을 때 나의 인생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다윗으로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율법을 따졌던 본인이 바로 내가 율법의 위반자란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주지요.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이 성신이 찾아오는 기쁨을 나에게서 사라지지 말게 하옵소서.” 율법으로 버티는 내가 그게 바로 주님께서 대들었던 모습인 것을 성신이 올 때 비로소 나는 애초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죠.
그전에 다윗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의 목표점이 있었어요. 다윗의 목표점은 이스라엘을 건사하고 정착시키고 이방나라로부터 지켜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켜내기 위해서는 본인이 전쟁이 승리해야 되고 승리한 나는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과 내 자리를 굳건히 지켜준다는 생각을 안 생길 수가 없었어요. 반드시 생겼어요. 나를 지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선 유지한다는 그래서 나는 왕 자리에 있다는 생각이 이게 어떤 문제 있다고 전혀 몰랐습니다. 그 자리를 자기가 버텨있는 거예요, 왕으로서.
그런데 그 목표, 그 기대가 바뀌어요. 어떻게 바뀌느냐?
㉮다윗의 목표와 기대가 다윗의 죄로 말미암아 무의미하게 돼요. ‘아아, 날 위해서 산다는 게 하나님 앞에 안 통하는구나. 이게 의미 없는 거구나.’ 그런데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여기선 멈추면 다윗은 구원 못 받지요. 이 무의미를 통해서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밖에 있었던 언약궤가 어디로 들어오느냐? 무의미한 아무 쓸모없는 내 안에 들어와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내 안에 들어와요.
그동안 다윗은 목표, 기대 때문에 땅에서 뭘 흘렸습니까? 피를 흘렸잖아요. 그런데 밖에 있는 언약궤 피는 뭐냐 하면 인간의 피가 묻히면 안 돼요. 여기는 희생제물의 피가 묻혀야 돼요. 내 피 말고 내 피와 땀과 노력으로 버티려는 인생 속에 내 노력과 내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가 들어오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밖에 있는 언약궤가 내 안에 들어와요. 그러면 지킬 법이 남아있습니까? 더 이상 내가 지킬 법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성막 같은 경우에 이렇게 돼 있거든요. 여기 25미터, 50미터 잡고 대충 그래요. 이건 동쪽이고, 서쪽이고, 남쪽이고, 북쪽이고. 여기에 텐트 쳐있고 천막 제일 안쪽에 언약궤가 있잖아요. 이 앞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제단이 있어요. 이 자체적으로 회로가 흐릅니다. 바깥에서 희생양이 들어와요. 속죄제든 서원제든 양이 들어와요.
이 양이 바로 언약궤 있는 하나님 이름이 계신 곳에 들어오질 못해요. 여기서 변형이 일어나야 됩니다. 어디를 방문해야 되느냐 하면 제단을 찾아가야 돼요. 제단에 가면 양이 홀라당 여기서 뭘 만나는가? 불을 만납니다. 그 불은 춥다고 손 쬐는 보온용 불이 아니에요. 아예 자체를 다 태워버려요. 그럼 양 자체가 태워지고 나면 드디어 ㉮양 실체가 연기가 되어 날아가요. 남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다 태웠다는 확실한 사태를 증명해 줄 그게 양의 핍니다.
진주에 가면 진주문화관이 있어요. 진주 남강에 몸 던진 유명한 기생 있지요. 논개. <논개>(이동기, 1982) 노래 가사에 보면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있지요. 같이 껴안고 같이 죽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일본장수 이름은 기억 못해도 논개는 기억해요. 그 논개가 술 따라주고 돈 받고 집에 갔으면 논개는 유명무실하지요.
어린양이 여기서 피와 함께 산화되고 없어지고 피는 남겨요. 그 남겨진 피, 이 피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나님, 주의 이름이 있는 언약궤까지 가요. 7월 10일 날. 그때는 양보다 소, 레벨이 높은 제물이 들어가요. 염소나 소가 들어가요. 소를 잡고 소의 피가 언약궤에 피 뿌림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회로가 돼요.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데 여기서 인간이 드린 양을 하나님이 받는다는 말은, 인간의 것을 하나님은 안 받아요. 안 받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을 받도록 하나님 자체가 인간세계 속에 인위적인 행함 속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 접수가 돼요.
접수가 된다는 말은 완전히 죽어서 피가 남긴 그 인간 속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셨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분은 누구죠? 다른 인간은 안 되고 오직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 예수님을 일찍 경험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경험, 방금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의 경험이죠. 예수님의 경험을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니까 왕이 예수님의 경험을 하는 거예요. 왕이 예수님의 경험을 했고, 왕이 경험한 것을 또 누가 경험하게 된다? 그 당시 다윗이 왕이 되었던 백성들이 함께 경험하는 것으로 주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지만 하나님의, 방금 이야기한 이 회로를 ‘다윗언약’이라 해요. 다윗언약의 회로가 가동이 돼버리면 다윗도 바뀌고 다윗과 같이 있는 백성들도 다윗언약의 회로에 감김으로서 같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이라든지 사무엘하도 나오지만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지요. 인구 조사할 때 백성들이 많이 죽어나가지요.
하지만 백성들이 다시 죽어나갈 심판이 멈춰지고 사는 것은 아나우라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뭐가 됩니까? 제사장 되어 하니까 그게 멈춰지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백성들은 무슨 경험을 합니까?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다는 그 경험밖에 없던 백성들이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 다윗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통해서 어떤 경험이 회로가 들어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 바쳐지는 그 회로가 주님의 경험으로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불로 시작해서 피로 들어가는 거예요. 불, 피. 심판에서 시작해서 심판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 밖에 없지요. ■이게 성경적으로만 팩트가 아니고 이 현실세계에서 유일한 팩트에요.유일한 사실입니다. 이건 종교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었다, 다시 살았다.
이건 종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거예요. 기독교는 종교를 가지면 안 돼요. 복음이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전후, 이 세상의 창조부터 마지막까지 그 중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현실감각이 있어줘야 돼요. 이건 내가 믿고 말고 할 그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왜 일을 복잡하게 하시는가? 처음부터 하늘나라를 인간이 갈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어요. 하늘나라는 땅에서 일부러 인간에게 찾아오신 주의 이름이 땅에서 일을 일으켜야 하늘나라의 구성조건에 맞아집니다. 이제부터 좀 난해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한 것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어렵게 한다 해도 여러분들은 꿈쩍도 안 해요. 해봐야 들으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보세요. 성경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과감합니까? 누구의 자존심을 봐주고 이런 것 없어요. 아주 과감하고 과단해요. 성경은 인간의 눈치코치 보지 않고 그대로 너희들은 흑암의 권세에 살고 있다, 끝. 나는 지금 윤석열 대통령 권세? 아니야. 흑암의 권세야. 그냥 흑암의 권세에요. 시커먼 권세에요.
흑암의 권세에서 어딥니까, 무슨 나라? ‘아들의 나라’지요. 그러니까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는 거예요. 다윗의 아들인데 다윗의 아들이 안 되고 누구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는 아까 본문 있지요. 역대상 28장 6절 본문, 하나님의 아들 돼야 돼요. 그럼 아들인데 아버지가 더는 아버지가 아니고 잘려버린 거예요. 이것은 다윗에 의해서 다윗이 제거되는 겁니다. 내가 나로 인하여 제거되듯이.
우리는 나에 대해서 내가 제거될 이유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내 경험이에요. 내가 한 경험이잖아요. 주님의 경험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 경험한 나는 잘리고, 잘리면서 새로운 내 속에는 무엇이 들어가느냐? 주께서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주님의 경험이 성령을 통해서 들어오면 우리는 거기서 새 사람 되는 겁니다.
‘아하, 내가 어느 유치원 나왔고, 어느 고등학교, 초등학교 나온 것이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셨구나’란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악바리처럼 공부했다가 되는데 이제는 주께서 그렇게 공부하게 하셨다로 바뀌지요. 왜? 나의 연속성을 잘라내기 위해서. 아담 출신을 잘라내고 주님 출신으로 새로운 회로가 들어오기 위해서 주께서 어느 시점에서 성령이 와버리면 뒤돌아본 모든 과거가 주의 솜씨가 되고 그걸 전체를 무슨 나라? 사랑이 되는 거예요.
한 순간만 사랑이 아니라 출생 전부터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나타나서 지금껏 사랑 아닌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아닌 적이 없을 거예요. 여러분이 두 개의 자아를 생각하는 이상은 이건 잘린 거고, 이거는 새로운 것이라는 두 개의 자아상 둘 다를 갖고 있어야 돼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령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오는 게 성령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율법을 다 이뤄버린 거예요. 율법 이뤄야지, 하면 ‘손 떼. 내가 이룰 거야’ 하고 율법 빼앗아가서 본인을 율법 다 이뤄버린 거예요. 이로서 율법이 우리한테 끝이 돼요. 마감이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율법, 말씀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율법을 가진 분의 의가 우리 안에 언약궤로 들어와 버려요. 물론 피를 동반해서 들어와요. 그 피라 하는 것은 그냥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사람에게 버림받은 것까지지요.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새로운 나는 옛날 나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교회 그냥 다니면 되지 뭐. 굳이 신앙 생활해야 되나. 자칫하면 광신도가 될 가능성이 있고, 집안에서 남들 욕할 건데.’ 하다가 성령 받아버리니까 광신도 안 됐으면 어쩔 뻔 했어요.
그때는 종교 하나 갖는다고 했는데 종교 자체가 나를 지옥으로 보냈구나. 교회가 나를 지옥으로 보냈구나. 교회 다녀야 될 이유가 교회에서 구원받으라고 교회 다닌 거예요. 교회에서 탈출하라고. 왜? 교회가 우리 옛 사람의 모습이거든요. 지 잘남을 자기의 의로움을 뽐낼 수 있는 공간이 교회 아닙니까.
아들의 나라로 오기 때문에 아들의 나라거든요. 이거는 일단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국은 내 나라는 아니에요. 아드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왜 아드님의 나라가 돼야 되는가? 다윗언약을 따라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첫째 시간 한 것 요약하면, 다윗언약이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아들의 언약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아들의 언약이 솔로몬 중심으로 되면서 기존의 이스라엘 있잖아요.
이스라엘은 솔로몬 때부터 둘로 쪼개집니다. 나라가 열 지파와 두 지파로 쪼개졌다는 말은 이거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는 거예요. 중심부가 깨져버렸어요. 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아니에요. 솔로몬 이후에 다윗언약을 위해서 다윗이 경험한 것, ‘나 구원받은 자 아니에요. 나 구원받은 자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았어요’라는 이 경험을 이스라엘 경험화, 이스라엘 전체로 역사적으로 퍼지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시기로 접어듭니다.
남아있는 것은 다윗언약 뿐이고 기존에 있던 약속의 땅 건사하고 지키려는 것은 모조리 다 불로 태워져서 이방나라로 다 흩어져버리죠.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구약 이렇게 보면 간단해요. 그 땅에 거하고자 하는 나는 하나님께서 원하는 백성 아니라는 거예요. ‘땅에 거할래, 언약에 거할래?’라고 묻는 거예요. 땅에 거할래, 약속에 거할래?
그 작용은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도 꼭 마찬가지에요. 누가복음 11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24절부터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율법을 지켜서 내가 깨끗하게 되면 더 이상 귀신이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어요. 이게 청교도 하는 거예요. 개혁주의신학, 청교도가 그런 거예요. 도 닦듯이 말씀을 지키면 내가 깨끗하게 되면 더러운 귀신이, ‘네가 말씀을 지키는구나. 같이 못 있겠다. 내가 나가줄게. 말씀 지키는 너하고 더러운 내가 어떻게 같이 있겠어. 나가줄게.’ 나갔다 칩시다. 갈 데가 없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일곱 친구 데려와서 전보다 더 악하다 했어요.
이 말씀이 뭔 뜻입니까? 율법으로 말씀으로 아무리 씻어내고, 씻어내고, 닦아내고, 닦아내도 그거는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자리를 뭐로 채워야 돼요? 성령이 와서 채워야 되죠. 주님이 와서 채워야 돼요. 수고스럽지만 이능우 집사님, 한 부씩 나눠드리세요. 요 근래 제가 안 하던 짓을 해요. 강의시간에 음악을 틀어주고 그런 짓을 하는데…….
사람이 도 닦는다고 해서 깨끗하게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무서운 제단 불에 다 태워져야 돼요. 깨끗하고 자시고 할 것이 아예 없어져야 돼요. 그것도 불의 심판 속에 없어져야 돼요. 그걸 어린양이 인간 대표로 해서 보여주는 회로가 언약궤 내의 회로에요. 성막 안의 회로에요. 그게 성전에 그대로 유지되고요. 심판을 인간이 지켜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귀신이 허락도 없이 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해요. 내 안에 일곱 귀신이 마구 들어와요.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귀신이 점점 더 증가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음악을 하나 들려드릴게요. 또 안 하던 짓한다고 욕해주시면 감사하고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짧게만 하겠어요. 한 2분 동안. 너무 오래하면 잠잘 때 귀신 나오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요.
어떻습니까? 여기 가사가 라틴어로 나와 있는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따라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성가라는 거예요. 일체 반주 없지요. 악기 반주 안 들어가지요. 요새는 여자도 들어가지만 남성 4부 합창으로 하지요. 왜 이런 노래를 통해서 주께 영광 돌렸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껏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여러분들은 이걸 아셔야 돼요.
이게 왜 귀신 노래냐? 이것 때문에 그래요. ‘정착’ 내 안에 정착하는 거예요. 연속성, 점점 더 고귀해가는 나의 연속성에 정착하려는 거예요. 이게 유대교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 짓을 한 거예요. 청교도가 그 짓한 거예요. 기존 교회가 그 짓한 거예요. 전부 다. 불연속성이 없고 연속성으로 계속 이어져가려 하는 거예요. 전보다 나아진 성화된 내 모습이, 음악도 보세요. 한 번 더 틀어야 되나? 지금 일곱 귀신 들어간 겁니다. 귀신 일곱이 더 되는 것 같아. 한 사십 귀신 되는 같은. 그만해야 되겠다. 귀신 나오겠다.
인간의 예술 가운데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성스러운 것을 다 추려서 가장 근사하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할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시와 신령한 노래로 찬미하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그대로 하는데 문제는 성령께서는 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입니까? 불연속성이죠, 불연속성이죠. 다윗이 이스라엘을 피 흘려가면서 싸우겠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예요. 인위적으로 기대하고 목표를 가지고 예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성령은 나의 존재는 제거될 대상자로 이 땅에 출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성령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제거됐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양이잖아요. 내게 누적된 모든 경험은 나를 지켜줄 경험이에요. 아까 부자 청년은 돈이 자기 자존심인 줄 생각도 못했어요. 자기는 율법이 자기 자존심이라 생각했어요. 어릴 때부터 지켰으니까. 그런데 본인이 귀신과 더불어 살았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어요.
자, 물어봅시다. 율법의 마침이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율법의 완성이 돼요. 율법은 자기소임 다하고 은퇴하면 끝나는 거예요. 완성은 어디로 이어져야 돼요? 예수님이 완성이에요. 율법과 그 완성 사이의 연속성은 예수님만 해요. 다른 인간은 저와 여러분들은 못해냅니다. 못한다는 사실이 여러분 속에 언약궤로 들어와 있어야 돼요. ‘나는 안 되었습니다. 나는 못했습니다. 나는 무의미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살고자하는 회로 외에는 다른 회로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이런 것.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 종착은, 죄인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의인 되겠다는 심보에요. 이 심보 자체가 문제에요. 현재 한국의 모든 신학체계는 뭡니까? 이거잖아요. 죄인이 뭐된다? 의인 된다. 뭘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의인 된다. 출발을 죄인인 내가 의인 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죄인 되겠다는 게 본인은 뭐로 봅니까? 의인 되겠다는 가능성으로 보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뭐로 보여요? 내가 졸지에 뭐가 돼요? 의인 되는 거예요.
아까 프린트 가사 봅시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를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 시편 51편을 보고 가사 지었다는데 이것을 부르고 이걸 믿는 순간 본인은 뭐예요? 천주교의 약점은 그거에요. 이걸 안다는 것은, 우리가 아주 죄인인 적은 없고 주의 말씀을 알아먹는 그런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천주교의 신학입니다.
여러분들이 천주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아야 돼요. 개신교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의 종교가 어떤 종교냐?
■아무리 범죄 해도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의인은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음을 못 놓는 것이 천주교에요. 그게 연옥이고요.
■아예 처음부터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내 모든 죄는 내가 알고 있으니까 이 정도하면 의인 아니냐? 하는 것이 불교고요.
자승 스님? 자성이나 해라. 자살 해놓고 뭐 공양했다고? 여러분 왜 자살했겠습니까? 돈 때문에 자살했지 뭐. 부자 청년 봤지요. 인간은 돈을 못 떠나요. 돈이 없으면 내가 없는데, 돈이 있어야 내가 있는데요. 내가 아는 모든 경험은 돈 버는 경험이 마지막 바닥의 경험이에요. 지금 이 자리에 돈 번다고 참석 안 했어요.
주님의 방법은 나로 인하여 내가 제거되게 해요. 그러한 돈 밖에 모르고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께서 버리지 않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들어오느냐? 죄인이 의인 되는 게 아니고 유일하신 의인이 어디서 나타난다? 죄인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죄인 속에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가 없던 죄가 점점 늘어나면서 왜 우리는 이 죄를 내 선에서 해결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점점 더 알게 해요.
주님이 의인이거든요. 언약궤잖아요. 주님은 피를 앞장세워서 오지요. ‘용서했다, 용서했다, 용서했다’로 와요. 여기 가사에 뭡니까?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탁 안 해도 돼요. ‘당신의 크신 자비를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 그 부탁 안 해도 돼요. 이거는 구약이에요. 신약은 그게 아닙니다. 신약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너의 죄를 더욱더 알리리라’ 몰랐던 죄를 더욱더 알게 만들어요. 죄를 지워주는 게 아니고 죄를 더 실체화시키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병든 자라야 의사가 의사답지 건강한 자에게 무슨 의사겠는가? 나는 의사로 왔다. 마스크 쓰시고 환자인 척하세요. 몰랐던 자기의 죄를 찾아내는 그 취미가 아주 쏠쏠한 취미입니다. 골프 치면서 죄 알고, 크루즈여행 다니면서 죄 알고, 여수에 놀러가면서 죄 알고,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오늘도 죄를 아는 여행……. 도대체 이 사실을 이 복음의 기쁨을 누가 알겠습니까? 여기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아까 아들의 나라라 했지요.
그러니까 그레고리오의 성가를 부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제 말은 그럼 이것 하지 말고 트롯으로 바꿀까요? 바꿔도 마찬가지에요.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이걸 잠 안 올 때 듣게 되면 잠 올 수가 있어요. 좋은데 이게 바로 죄라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죄 아닌 게 어디 있어요, 다 죄인데. 문제는 이래서 이건 죄가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헌금 하게 되면 헌금 하세요. 헌금 하는 것도 죄가 돼요. ‘헌금 하는 것은 성령이 시키는 거니까 선한 일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아들의 나라에서 무슨 언약이라 했습니까? 다윗언약에서 아들이 나와요. 다른 언약은 아들이 안 나옵니다. 모세언약은 율법이 나오지 아들이 안 나와요. 아들이 나온다는 말은, 이건 어려운데요, 그냥 받아두세요. 너무 어려워서. 뭐냐 하면 여자, 남자, 개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비유’가 돼요.
그러니까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나는 이스라엘이다 해도 전부 다 아들 하나를 묘사하기 위한 연관된 비유에요.
■비유의 특성은 뭐냐?
㉮ 단독적으로 아무 의미 없어요. 무의미해요.
㉯그러나 아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로서, 또는 여자로서, 남자로서 연결이 되면 비로소 여기에 회로에 전깃불이 들어옵니다. 여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남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죄인인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돼요. 강돈데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단독적으론 의미가 없고, 성령에 의해서 회로가 연결되니까 주님에 의해서 주입된 새로운 고백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우연적인 비유에 지나지 않아요. 우연적이란 말을 하는 이유가, 저 집은 왜 팔자가 부잣집인가? 이건 남의 팔자를 부러워하지 말라고요. 그쪽도 부자도 비유에요. 더 안타깝지만 가난한 것도 비유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맡은 역할이 가난한 역할로 한 구십오 세 살라고 한 거예요.
더 섭섭한 이야기지만 저 사람은 건강한 것이 그 사람이 맡은 비유에요.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골골해서 DNA에 잘못 돼서 날 때부터 하루라도 안 아픈 적이 없는 것. 안 됐다? ‘안 됐다’ 아닙니다. 그건 그 역할이에요. 어릴 때부터 아토피 벌겋게, 맡은 역할이 그건데요.
중요한 것은 역할에 차등이 없고 거기서 자기가 죄인 됨을 발견하고 피에 대한 복음, 다윗언약의 복음, 아들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아들의 나라에요. 천국은 이 땅에서 아들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천국은 구성돼야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구성돼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다윗언약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게 되면 이 다윗언약이 UFO처럼 비행기처럼 땅에서 떠나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게 뭐냐? 승천이고, 부활 승천해서 올라간 거예요. 주의 이름이 올라간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는? 없지요. 주님의 이름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민권은 주 안에 있다. 같은 말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같은 말이 주 안에 있다, 성령 안에 있다 같은 말이에요.
수요일에 [질투 안에서]란 설교했는데 시간 관계상 설명 못한 게 있어서 빠진 부분을 제가 약간 더 보충해드리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7절에 보면,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12x12)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이 대목.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 이게 뭐냐? 방금 이야기한 인간은 뭐라? 비유지요, 비유입니다. 실제로, 어려운 말이지만 그냥 들으세요. 하늘나라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천사들만 존재하게 돼요.
그래서 ’선악을 아는데 우리와 함께‘ 할 때 ’우리‘라는 게 하나님과 천사도 포함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천사만 존재해요. 있음이 돼요. 나머지는 하늘나라에 없다가 돼요. 측량을 누가 합니까? 천사가 측량한다는 말은 하늘나라의 계산법에 누굴 넣어준다는 말이죠? 이 지상에 있는 성도를 넣어주는 거예요. 성도를 사람인데 왜 넣어줍니까? 사람은 하늘나라에 존재할 수 없는데. 하늘나라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어요.
존재할 수 없는데 왜 사람이 측량하느냐? 이게 비유로 들어가기 때문에, 비유 역할을 하늘에서 하기 때문에 인간이 거기서 들어가는 거예요. 단 조건이 있어요. 뭐냐? 내 이름은 날아가 버리고 무슨 이름으로? 주님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 주님의 이름으로 각각 역할을 맡는 겁니다. 열두 지파가, 언약의 사람이. 참 이것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그냥 수요일 날 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만드는데 사람의 이름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뭐로 있습니까? 열두 지파가 열두 개의 문으로 돼 있다고요. 뭐냐 하면 주께서 문지기로 허락했다는 거예요. 역할을 맡겨줬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이 안에 들어오기를 탐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했잖아요. 이게 뭔 뜻입니까? 아예 천국 가는 것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가시고 다시 들어오시는 그 통로 역할을 해주셨으니까 나는 개 같은 인간이라도 좋습니다. 주인에게 예속되었으니까. 그래서 성도는 천국을 위해서 밤낮으로 천사와 같이, 천사도 밤낮으로 뭐합니까? 부끄럽다고 지 몸 가리면서 날개로 찬양을 하듯이, 아까 찬양 더 들려줄까요?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거예요.
천국 가면 심심해서, 탁구장 있나? 그런 것 탁구장 없어요. ‘심심해서 어찌 사느냐, 권태로워서’ 이런 사람이 있는데…. 맞아요. 사람은 자기 할 일이 없으면 권태로워요. 자기에게 의미 되지 않는 일은 하기 싫어요. 그래서 뭐가 있느냐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 2장, 3장이 있는 겁니다. 여기 일곱 교회 나오지요. 일곱 교회의 특징이 뭐냐? 다 하나님에 의해서 잘렸다는 거예요.
일곱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하나님 믿고 시작했는데 결국 그 안에 교회 내에 인간의 활동은 뭐로 꽉 채워져요? 자기 의미로 꽉 채워지지요. 전부 다 자를 교회에요. 교회를 잘라냄으로써 어린양의 교회를 드러내는 게 4장, 5장, 6장, 7장, 8장. 2장부터 3장까지 지상교회 날라가고, 4~6장 종려나무 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장하지요. 차이점이 뭐냐는 거예요.
일곱 교회 자체가 지명이 있지요. 일곱 교회, 에베소 교회에게 말하고 나오잖아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게 뭡니까? 지상에 지명이 있지요. 정착된 교회지요. 정착된 교회 잘라낸다 이 말이죠. 정착된 교회이기에 지적할 게 생겨버린 거예요.
그런데 4장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어디 가 있어요? 지상에 있어요, 하늘나라에 있어요? 5장, 어디 있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에 가 있지요. 어떻게 가 있습니까? 죽어서 가 있는 거예요. 인간은 이 땅에 있을 땐 존재가 아니에요. 성도가 죽을 때 뭐가 됩니까? 비로소 자기 자리, 자기 존재를 확답 받게 됩니다. 내 자리와 내 존재를 확답 받게 돼요.
이 땅에서는 뭐기 때문에? 비유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버리면 진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이 땅에서는 우리의 옛 육신이 육신 값을 한다고 그냥 이것저것 죄 짓지요. 그러나 죽게 되면 죄 질 거리가 없기 때문에 온전히 주님의 존재와 합세가 돼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방향성이 있는데 성도가 뭘 해도 사는 쪽이고, 불신자 인생은 뭘 해도 죽는 쪽이에요. 불신자는 살려고, 살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자기를 더욱더 죽게 만들고, 성도는 죽으려고, 죽으려고 하는 그것이 더욱더 생명에 가까이 가게 만들지요. 그래서 어떤 분에게 제가 문자를 보냈습니다만
‘예배 참석을 언제까지 하면 됩니까?’ 예배 참석 마지막 참석이라 여기고, 이건 예배 참석뿐만 아니고 여러분 하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라 하는 것은, 주의 일이 주님의 생각이 덮칠 때 드디어 가는구나, 하는 그 기쁨으로 하게 되는 주께서 마지막 떠났다는 사실을 품고 하루하루를 사시면 그게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몇 년 참석하고 몇 번 참석하고 그런 것 기억하지 말고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마음의 결심으로 되는가? 그런 결심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자동적으로 결심이 아니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자다보면 벌써 우리가 의식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아침 되면, ‘아아 잘 잤다. 여기가 어디지? 집이구나’ 그러면 또 새로운 날을 목숨을 허락하심을 밤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목숨 주고 천사가 떠났어요. 또 하루치 살라고.
그럼 우리는 오늘도 어디 가서 무슨 죄를 발견할꼬? 그런 즐거움을 가지고 주께서 부르시면 후딱 가면 되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쓸데없이 남과 콩나물 갖고 싸우지 말고, 옆집과 말다툼하지 말고. 마지막인데 뭐. ‘너야 지옥이나 가라.’ 세상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냥 하루치 하시면 됩니다. 내일 염려는 주께 맡기고요. 오늘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의 변화가 우리한데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자기가 자기와 결별되고 분리되게 하신 것에 감사하는 다윗, 저희들 십자가를 통해서 주께서 우리를 받지 않고 주의 피가 묻은 새로운 사람만 받는다는 사실이, 이것이 종교가 아니라 엄연한 분명한 사실 그대로인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