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시간에서 구원

아빠와 함께 2024. 2. 11. 19:27

시간에서 구원

2024년 2월 1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5-8

(17: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17: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17: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믿음도 같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 믿음이란 바로 ‘나는 여기 있다’입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모든 진리는 항상 그 출발점이 자신의 존재입니다.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태어나면서 시간이 인간에게는 신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시간을 인간은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시간은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는 것도 시간 안이며 죽는 것도 시간 안에서 죽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일생이란 늘 찾아오는 시간을 대체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대한 고민과 거기에 따른 열정입니다. 자 이렇게 될 때,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곧 번듯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신(사람)을 믿으며 혈육을 믿습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한 철두철미한 믿음으로 무장된 처지에서 여기다 추가해서 ‘신을 믿는다’가 무슨 타당성이 있겠습니까? 자신에 대한 믿음은 요지부동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믿는 것=저주’라고 공식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저주’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공식을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인간에게서 나오는 대처방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한 신앙을 더욱 더 강화될 뿐입니다. 시편 1편을 보겠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대하는 순간, 인간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저주 안 받기 위해 어딴 대책을 내어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처방안으로 인해 인간은 애초부터 저주받아 마땅함이 드러납니다. 즉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데 있어 율법을 도입합니다.

율법은 인간들이 지킬 수 있기에 하나님이 준 것으로 여기고 행여 율법을 어겼을 때에 들이닥칠 저주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놓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고난을 미리 맛보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해도 모르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 속의 인간은 이래나 저래나 시간 끝에는 다 저주로 마감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4:24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죽는 것이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죽이지 않고서는 시간 속에 있는 모세를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런 겁니다. 시간 속에 언약을 집어넣어서 그 언약과 인간을 맞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언약은 시간 밖에서 주어집니다. 모세는 시간 안에 있습니다. 시간의 끝과 함께 모세의 인생도 끝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다 지켜내지도 못한 채 죽습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여하튼 인간은 자기를 안 믿는 방법에 대해서 그 어떤 수완도 부릴 수 없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예를 들면, 출애굽기 2:10에 보면,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더는 모세를 키울 수 없습니다. 아직 모세라는 이름조차 없고 모세의 육신만 있을 때, 부모는 모세를 포기합니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다 모세의 육신을 내어놓습니다. 그랬던 모세는 바로의 공주와 만나서 비로소 ‘모세’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모세에 있어 육신보다 이름이 나중입니다.

이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출애굽기 3:13에서는 모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묻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시간 밖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안에서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로 이름을 갖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존의 자기 백성의 이름과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은 운명입니다. 시간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의 운명을 시간 밖으로 끄집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름을 죽이십니다.

애굽에서 바로왕과 모세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는데, 애굽에게 있어 대자연은 실질 적인 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신을 하나씩 격파하시게 됩니다. 이는 인간은 자연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처지임을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인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품어야 합니다.

“어떻게 다같은 사람인데 왜 우리들에게 애굽인에게 내린 재앙이 내려오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름 갖게 되시는 하나님’을 이름의 세계인 이 인간 세계에 섞여 들어가게 하셔서 다같이 망하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육신이 있는 자는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다 저주받습니다.

그렇다면 율법 완성에 의해서 주어지는 열매는 어떻게 맺이게 될까요? 갈라디아서 6: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즉 어떤 인간도 복받을 육신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 그 복된 육신으로부터 최종적인 복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을 받은 자들은 ‘영생’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즉 성도 자체가 영생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당연히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신의 육신을 일생이라는 시간과 함께 내어놓았으니 자신의 ‘썩음’ 현장마저도 율법의 열매로 여겨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졌던 예수님의 운명과 살리심이 성도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0강-예레미야 17장 5~8절(시간에서 구원)24021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5~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난해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여기에 “사람을 믿지 말라 사람을 믿으면 네가 저주를 받는다”라고 했어요. 저주를 받는 이유는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어째서 저주와 관련된 이 말씀이 어려우냐면, ‘나쁜 짓을 하면 저주받는다’라고 하면 우리가 약간은 이해가 가는데, 사람을 믿는 것이 저주받는 기초가 된다고 한다면 결국 이것은 인간은 이 땅에서 애시당초 살 수도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를 믿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사실을 본인이 믿어요. 인간은 남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여기 있음을 믿습니다. 믿는데, 어떻게 믿느냐 하면 시간이 나를 만든 거예요. 태어난 시각이 있었고, 시간이 나를 만든 겁니다. 우리가 매해 나이를 따지는 것도 시간이 나를 만들기 때문에 나이를 따지거든요.

‘나이가 얼마 되십니까?’ 우리 장로님이 식당에서 이야기하신 것처럼. 아주 인상 깊었어요. ‘나도 나이 80 먹었어요’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나는 누구다’가 아니라, ‘나는 80이다’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내가 된 겁니다. 태어난 것도 시간이 만들었고, 살아온 것도 시간이고, 죽는 것도 시간이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겁니다. 시간이 우리에게는 친근한, 의심할 수 없는, 안 믿으려야 안 믿을 수 없는 시간이 바로 신입니다. 시간 자체가, 시간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마다 그 사람을 수사할 때도 그 사람의 인상착의나 나이부터 먼저 따지는 이유가, 그 시간대에 알리바이가 뭐냐, 그 시간대에 네가 뭘 했느냐를 믿는 거예요. 인간은 신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걸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이미 이것이 인간의 믿음에 내용이 되고 말았어요. ‘나는 교회 나온 지 몇 년 되었다’라는 이것도 시간이잖아요.

제일 인간에게,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난해한 이유는 분명히 우리가 알기로는 시간이 나를 만들고,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흐르는 시간 상황에 뭐로 채울 것인가가 우리의 일대기에 임무이고 할 일이에요. 하루하루를 뭐로 채울 것인가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뭐 하고, 9시에는 뭐하고, 10시에는 뭐하고, 12시에는 뭐하고, 시간 때우고 채우고,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삶의 열매라고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거는 아는 정도가 아니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라는 구조가 응축되어서, 시간은 오간 데 없고, 그것이 한 인물, 한 신으로, 인격체로 등장한다는 이게 가능합니까? 믿을 것을 믿어야지, 어떻게 시간이 한 분에게서 흘러나와서, 시간 따라가면 시간은 나중에 없어지고, 그 한 분 앞으로 간다는 그런 논리거든요. 천사 같으면 돼요. 영원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 있습니다.

영원 속에 있을 때는 천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이미 시간에 갇힌 우리가 시간 바깥에 있는 영원으로 나갈 때나 알 수 있는 ‘어, 하나님 여기 계시네요. 언제부터 계셨어요?’라고 할 수 있지만, 시간 안에 있을 때는 우리는 시간이 가깝지, 하나님이 가깝지 않아요. 논리적으로 시간이 응축되어서 하나의 인물이 된다는 거, 이게 너무 어려우면, 쉽게 표현해서 ‘도대체 이 시간은 누구의 입에서 누구의 혀에서 나왔는가’를 굳이 이런 질문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느끼는 거예요.

시간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질문을 굳이 안 해도 우리는 잘만 살아가고 있어요. 시간 안에서. 시간을 누가 만들었던, 여호와가 만들었던, 삼위일체가 만들었든 관계없이 나의 매일매일의 일상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채우는데 허겁지겁 하고 있는 거예요. 날로 피부는 안 좋지요, 마사지를 좀 받을까, 침으로 코를 좀 세울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우리를 허물어지게 만드니까, 나름대로 투쟁을 벌여야 하거든요.

결국은 시간 속에 내가 없어지고, 시간만 남고, 나는 없어지고, 나는 시간을 못 이기니까 시간은 나에게 신(神)이 되고,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나는 허약하고 나약한 시간의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먼저 생각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은 하나도 우리가 들어갈 어떤 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이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소위 신학 좀 한다는 사람은 이 대목을 가지고 성경에 난제 중 난제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은 시간을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신이 우상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우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을 죽여서 시간 밖으로 인간을 끄집어내는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그 사람들은, 소위 신학자란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학 해서, 시간 속에서 목회하려는 사람들이에요. 시간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 해요. 시간 속에서 그럴싸한 직업 가지고 사람답게 산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듣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출(出)’애굽이 안 돼요. 애굽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애굽의 신은 자연입니다. 그래서 모세와 바로의 대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앞장세워서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하나 도장 깨기를 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부숴요.

도장 깨기 아시죠? 무술 좀 하는 사람이 소위 소문난 센 도장들 다니면서 ‘여기 고수 나와’ 해서 이기고, 다음 도장 가서 ‘이 도장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사람 나와’ 해서 이기고, 이렇게 도장 깨기 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 자연 안에서 못 벗어나게 하는 그 자연의 위력을 자연 바깥에 계시는 여호와께서 그것을 한 꺼풀, 두 꺼풀 꺼풀을 벗기시는 거예요. 그게 10가지 재앙이었습니다.

10가지 재앙 가운데서 그 자연과 더불어서 같이 폭파되고 깨어져야 할 자들은 애굽 사람이고, 그 자연의 재앙 가운데서도 번듯하게 살아남은 자는 애굽에서 나와야 할 히브리족 사람들, 그 히브리인들이에요.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자신에게 다시 물어야 해요. ‘나는 누구냐’를 물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나를 왜 저들과 함께 죽이지 않고 살려둡니까?’라고 물어야 해요.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 내린 재앙은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재앙을 골라서 재앙을 때렸단 말이죠. 시간이라는 신(神) 속에서 어떻게 시간을 채우면서 내가 사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 주어진 수명 가운데서 나는 번듯하게 살고 싶은 거예요. 이게 애굽 사람이고, 이게 인간들이 타고난 겁니다. 이것은 사실 모세도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모세가 나중에는 알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려고 하셨는지. 하나님의 일을 하러 보낸 사람을 살려야지, 왜 죽이려고 하시는 거예요? 정답은 이겁니다. ‘바꾸자’ 하나님에서 시작해서 시간 속으로 거꾸로 들어오시는 분시간에서 태어나서 하나님을 모르는 시간에 갇힌 너와 맞바꾸기를 시도하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맞바꾸기. 처음에 모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기 때문에, 이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장 10절에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라는 사람은 있었지요. 그러나 모세에게 없었던 것이 있습니다. 장차 모세가 될 인간은 있었지만, 그 아기는 있었지만, 그 ‘모세’라는 이름을 유발하는 것은 모세의 소관도 아니고, 모세의 부모도 아니에요.

왜냐 하면 모세 부모는 아이를 이미 죽은 아들로 강물에 띄워 흘려보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부모가 모세를 자기 품에서 흘려보낼 때 모세 부모는 이 아이의 숙명과 운명은 시간 속에다가 그냥 던져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 강물 속에서 누가 개입했는가. 하나님께서 목욕하고 있는 바로의 딸과 마주치게 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모세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보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먼저 태어나고 이름을 나중에 짓지만, 이 시간 바깥에 세계에서는 이름부터 먼저 있고, 이름에 합한 인간을 시간 속에서 제조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3장 13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이게 히브리인들이지만 애굽에서 430년 동안 살다 보니까 그들은 애굽식의 사고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인간들 입장에서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거예요. 물론 여러분도 저도 이름이 있잖아요. 그건 제거될 이름이에요. 바꾸어야 할 이름입니다. 아담에 속한 이름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이름이든 그 속에는 우상 적인 요소가 들어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이다. 이 시간 속에, 시간을 통해 내가 획득하려는 것은 내 인생 시간 속에서 ‘이렇게 살았어’라는 나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데 우리는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을 믿지 말라고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면서 사람을 믿게 되면 뭐가 오느냐 하면 저주를 받는데, 저주를 받는 게 뭐냐 하면 ‘열매’가 없다는 거예요. 저주스러운 열매 외에는 다른 열매가 없다는 거예요. 만약 사람을 믿으면.

혈육을 믿으면,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을 경우에 저주를 받는데, 그 저주받는다는 것은 죽는 정도가 아니고 그 죽음보다 더 내려가서 혹독한 고통스러운 운명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정말 이런 신이 있다면, 그런 신을 인간들은 힘을 다해 밀어내고 싶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알아요. 내가 익혀온 것은 내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명령을 해도, 그 명령은 내가 살아온 것에 유리하면 내가 받아들이겠지만, 나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명령이라면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집이라는 것이 참 대단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매어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그러한 엄두가 안 나는 그런 존재를 우리는 이 혈육, 육체를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면서 안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인간의 이름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섞어서 집어넣어요. 그러면 인간들은 오해 가운데 자기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아, 하나님도 이름을 부르면 된단다’라는 오해를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겁니다. 누구를 위해? 자기가 얻고자 하는 자기 열매를, 괜찮은 나 자신이 잘 되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마구 불러댈 거예요.

그럴 줄 아시고 하나님은 그렇게 해놓고 그런 인간들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은 하나님의 열매가 아니니까, 열매 되도록 그 인간을 바꿉니다. 바꿀 때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래 있었던 그 세계에서 만들어진 창세 전 언약, 약속을, 주사기로 쏙 집어넣듯이 이스라엘 자기 백성 속에 쏙 집어넣어요.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치를 못 챕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인 줄 알았죠.

그러나 나중에 알아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은 내 평소에 소원, 소망을 얻기 위해 주신 언약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깨부수기 위해서 나 자신이 부서지지 않는 나를 부수기 위해서 집어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매와 관련해서 인간들이 육적으로 열매를 어떤 식으로 맺는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이야기가 딱 들어오게 되죠. 여기 신약의 입장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킨 분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신약 이야기고 구약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대목을 볼 때, 이건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사기로 이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인간들은 이 말씀을 통해서 거기 2~3절에 보면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예레미야 오늘 본문에도 똑같은 말씀이 나와 있지요. 여호와를 믿지 않으면 저주받지만, 여호와를 의뢰하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 여기 시편 1편의 내용 그대로 반복해서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 1편의 말씀, 또는 예레미야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들을 때, 기본적인 자세가 뭐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말씀을 줬지, 못 할 것 같으면 말씀을 아예 안 줬을 거라고 생각 하는 겁니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말씀을 어떤 식으로 지키는가. 인간은 시간 끌기를 시도합니다. 시간 속에서 이 말씀을 차츰 성취하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뺨 맞는 짓을 하기 위해서 먼저 뺨을 맞아요.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나쁜 짓 해서 그때 가서 뺨을 맞으면, 내 운명이 그것으로 끝장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면 항상 알아서 기는 겁니다. 그걸 선뺨 맞기라고 하는데, 미리 내가 나쁘다고 치고 미리 맞을 벌을 다 받아내면 더이상 주님이 나를 때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알아서 기고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게요. 방송에 이런 일이 있어서 멋진 예가 되는데, 장모가 동대구역에서 사위를 만나서 장모가 막 우는 거예요.

그래서 부산 가니까 헤어져서 슬픈가 했는데, 아무래도 그 울음이 그 울음이 아니어서 부산 가서 장모에게 전화해서 ‘장모님, 왜 동대구역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장모가 ‘드센 내 딸 만나서 고생할 것 생각하니까 네가 불쌍해서 운다. 드센 내 딸 만나서 얼마나 시달리겠나’라고 측은해서 울었다는 거예요. 이 장모의 수작을 한번 보세요.

가만히 그 심보를 따지면요, 내 딸이 너에게 어떤 짓을 하더라도 너는 입을 다물라는 뜻이에요. 왜냐 하면 엄마가 미리 뺨을 대신 맞았으니까. 정답은 인간과 상대를 안 해요. 하나님이 시간 속에 보낸 하나님을 시간 밖에 하나님이 때리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버립니다. 사람의 열매를 일체 찾지 않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열매가 아니라 열매 없음을 확정 짓기 위해서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인간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천국에 못 갑니다. 시편 1편 5절 말씀에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여기서 악인은, 말씀을 지키지 못한 자는 저주받고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는 전형적인 모델로써 이 말씀이 저주받는 말씀이 열매로써 인간을 선택했다는 거예요. 신약의 성도는 이걸 알아요.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온 것은 ‘바로 너같은 인간이 지옥 가는 거야’라는 말씀의 증거물로써, 말씀의 열매로써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신약 사람은 발견합니다.

예레미야는 아직 거기까지 몰라요. 그냥 전해준 말씀대로, 그러니까 예레미야도 이상할 거예요. 사람을 믿고 혈육을 믿는데 어떻게 그게 저주 거리가 되는지를, 그 앞뒤 논리가 납득이 안 갈 정도예요. 이게 너무 함축되어서 그런 것인지. 주님은 주님이 이 땅에 박힐 때, 인간은 신이고 모든 시간이 종결되었을 때의 상황을 이 시간 속에 오신 분은 미리 그것을 알려주러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원래부터 끝나게 되어있어요. 시간 속에 태어났냐? 저주받아라. 인간들아.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면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아시죠? 예레미야에 오면 여호와에 그 여호와가 누구를 치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기 민족을 여호와께서 치십니다. 멸망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어찌할꼬. 나는 여호와만 믿었는데’

아니야. 네가 여호와를 믿은 것이 아니야. 여호와를 오해한 거죠. 실은 자기 자신을 열매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끝으로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진짜배기 열매가 나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이 말씀으로 이미 끝났습니다. 아까 그 “사람을 믿으면”이라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이에요.

어느 인간치고 자기를 안 믿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 일단 자기 믿고 자기 방식대로 남을 믿고 이러기 때문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일단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포기 못 하는 거예요. 이런 영화가 있어요. 나를 위한 애국자. 2차대전 때의 이야기인데 제목이 이상하죠. 애국자라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한 사람이 애국자인데, 조국같은 분. 뭘 해도 나라를 위해 하는데 실은 다 자기를 위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해요. 없어요.

주님을 위해서? 아니겠지요. 본인을 위해서겠지요. 인간은 본인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제거하지 마세요. 인간은 뭐의 증거냐. 나를 위해 살아온 그 결과가 썩어질 것밖에 없다. 썩어져 무덤에서 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율법에 주어진 운명인 것을 흔쾌히 받아들여야 해요. 그다음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는 것은 부활이 될 겁니다.

성령은 부활의 영이에요. 일단 죽어야 부활이 되잖아요. 그때 우리는 시간에서 건져 내서 영원한 세계에서 천사와 같이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심보와 우리의 본색, 말씀 아니면 어떻게 들춰내겠습니까. 너무 과격한 말씀. 사람 믿는 것이 저주 거리가 된다는 것을 누가 지키겠습니까. 차라리 그것이 우리 속에 말씀으로 작용해서 주님 하시는 일만 증거 하고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유와 열매  (0) 2024.02.25
존재의 뿌리  (1) 2024.02.18
  (1) 2024.02.04
진주 조개  (1) 2024.01.28
법과 땅  (1)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