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뿌리
2024년 2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9-11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7: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17: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인간의 마음은 인간이 모릅니다. 그 이유는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통제해 보겠다는 의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마음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 자체를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고파 하는 심정이 마음이 심히 부패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들을 오늘 본문에서는 ‘어리석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리석하다는 말은 죄의 본질은 모르고 환상을 쫓다가 결국은 그 환상이 떠나가버리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자고새의 경우라고 하나님께서는 언급하십니다.
남의 알을 열심히 끼워내었지만 결국은 그 남의 새은 부화하고 난 뒤에 자고새 둥지를 미련없이 떠나버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찾고 거두어들이고 지켜내려고 하는 것은 모조리 거짓된 것 뿐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토록 인간은 거짓, 곧 환상을 평생 쫓아다닐까요? 그것은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입니다. 그 후손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지만 후손은 죄도 모르는 채 죄의 결과인 거짓되게 살아갑니다. 거짓이란 인간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본성을 감추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이란 인간의 본성이 본인에게도 견디기 힘들기에 나오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는 인간은 모르고, 거짓은 인간들의 일상입니다. 거짓이란 환상을 말합니다. 그럴 삿한 환상으로 인간은 자신의 알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덮어버려고 합니다. 참으로 성도가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알게 되었다면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내 마음이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신을 달라지게 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해도 본인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죄가 아담의 왕이 되어 통치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즉 인간이 그 어떤 시도와 노력을 한다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에 불과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원인도 모르는 채 죽어가는 것도 되지만 평소의 모든 행동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따라서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온전한 마음으로 바꾸는 일은 우리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먼저 이스라엘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실시하는 방식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일을 벌리시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떤 반응과 대응을 보이느냐를 살핍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과 최종 결과물이 바로 성전의 등장입니다. 성전 안에서 인간들은 더는 자신의 행위나 의도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음이 폭로됩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두 가지 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사사기 10장에 나오는 입다의 전쟁입니다. 사사기 10:6-8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 이방민족이 섬기는 신의 핵심은 인신공양입니다. 즉 사람, 그 중에서 깨끗하다고 여겨지는 처녀나 어린아이를 산 채 신에서 제물로 바치는 행위입니다. 바로 이런 신들을 이스라엘이 꾸준히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심히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쳐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입다로 하여금 전쟁이 나가게 하는데 입다는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내기 위해 승리했을 때, 맨 먼저를 자기를 마중 나오는 그것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했습니다.
이럴 때 입다는 결코 자기 딸을 제물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 딸이 맨 처음으로 자기를 마중하자 입다는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진정 이스라엘의 구원자다운 것은 입다가 아니라 입다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주저함을 질타하면서 주저말고 자신을 인신공양하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의 제물 바침보다 더욱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방민족으로 가상과 허위를 들추어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처럼 인간이 감히 해내지 못하는 주저하는 더 극단적인 방식에 하나님 자신이 직접 개입하시는 식으로 인간의 존재에 뿌리가 죄로부터 시작함을 알리고 들추어냅니다.
또 다른 예는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 장면입니다. 제물을 단에 놓고 어느 신이 실제로 그 제물에 불이 일어나는지를 보자는 겁니다. 엘리야의 이러한 제안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제단 위에 놓고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거는 식으로 내기를 한 겁니다.
이는 엘리야 자신을 이미 죽은 몸으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모습을 보인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사실상 엘리야는 자기 인생을 살 이유도 없는 겁니다. 이처럼 타인을 보여주는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덮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를 하나님의 제물에 합류 시키시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고 로마서 15:16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일상을 통해서 부지런히 성도를 건드리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건드려주시는 새로움이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1강-예레미야 17장 9~11절(존재의 뿌리)24021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9~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이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로 어떤 자가 대표가 되느냐 하면,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부자 되고자 하는 자를 전형적인 어리석은 자의 대표로 보고 있습니다. 그 부자 되고자 하는 자를 새에 비유했는데, 자고새에 비유한 겁니다. 자고새가 어떤 새냐 하면, 다른 새가 둥지에 알을 낳고 가면, 바보등신같은 그 자고새는 자기 알이라고 여기며 부화시켜놓으면, 부화된 새는 더 못된 짓을 하는데, 부화된 새가 둥지 안에 있던 진짜 알을 아래로 밀어내요.
그러면 진짜 어미 새의 알은 아래로 떨어져서 터지고 가짜가 행세하다가 나중에 둥지를 재미없다고 떠나버려요. 이러한 자연현상 중의 하나를 하나님께서는 인간사회에다 집어넣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부자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필경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어리석다는 평가를 같은 인간들이 해낼 수가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들은 같은 편이 되어서, 부자를 어리석다고 보지 않고 본인들의 전형적인 희망 사항으로 그렇게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원인이 어디 있는가. 원인은 마음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썩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빨 썩은 것은 빼면 되죠. 그러나 인간의 마음 부패한 것은 어떻게 고칠 분야가 없어요. 치과도 안되고, 정신분석과도 안 되고, 정신과도 안됩니다. 그 이유는 의사 자체가 부패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의사가 없습니다. 의사는 인간세계에서 소비자, 고객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을 보정 해주고 역시 자기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죠. 어리석은 자를 등쳐먹고, 역시 자기는 더 세련된 어리석은 자로 전환되는 거, 이것이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특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평면화된 세상이라 합니다. 평면화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웃에서 이웃으로 자리바꿈하다가 평생을 다 보내는 거예요.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없어요.
거기서 거기입니다. 자리를 바꿨을 뿐이죠. 백수하다가 직업 얻었다가 백수 다시 하다가 직업 얻었다가, 맨 그 자리가 그 자리예요. 동일한 세상에서, 동일한 동굴 내에서, 자기 소리 내다가, 나중에 힘 빠지면 소리도 못 내고 그렇게 죽치고 있다가 세상 욕이나 하고 가죠. 그래서 이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서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했는데, 만물보다 더 심하다고 했는데, 어차피 고치지도 못하는데 왜 굳이 이 말씀을 하느냐. 이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와서, 드디어 치료를 시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 자신의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했는데, 이것을 가리고 있었던 세상 것들이 정확히 내 마음을 조작하고 위장하면서 그것들이 치장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부터 먼저 녹을 뜯어내는, 바깥에 있는 치장된 거짓됨을 뜯어내는 일들을 주께서는 말씀으로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저는 존재의 뿌리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존재의 뿌리는 인간은 내 존재가 어느 뿌리에서 나오는지 모르고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존재의 뿌리를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일관되게 일을 벌여가시는데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성전이라는 겁니다. 성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인간의 뿌리가 되는 겁니다.
성전에 대해서, 또는 성막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의무적이고 필연적으로 세 번을 가야 해요. 거기서 말씀을 배우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아예 성도 자체가 성도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성전으로 만들어버려요. 요한복음 4장에 수가성 여인이라는 여인이 하나 나옵니다. 그 여인은 우물을 바깥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 물을 길어야 하니까 우물로 간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우물물을 길어내기 위해 우물로 가는 게 아니고 그 사람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수가 나오는 우물을 만들어줬어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준 선물이 뭐냐 하면, 날마다 새로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인의 행동이 달라지느냐.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육신이 요구하는 대로 그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통제되지 않습니다. 누가 인간의 마음을 장악했고 육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육신은 그 습관을 못 버려요. 그런데 하나님이 오셔서 말씀을 줘버리면, 말씀이 마주치는 거예요. 그 속에 인간 내부에서 마주쳐서, 그 사람은 자기 성격을 못 고칩니다. 교인들 간에 문제가 있는 것은 상대방보고 고치라고 하는데, 이건 벌써 생각이 잘못되었어요.
나도 나를 못 고치는데 상대방에게 고치라, 마라 할 입장이 못됩니다. 안 고쳐집니다. ‘안 고쳐지니까 새로운 게 뭐냐? 내놔봐라’라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보니 너 인간성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뜯어고쳐야 해. 너나 뜯어고치세요. 너나. 인간을 어떻게 뜯어고칩니까. 못 고치죠. 그러나 새로움은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내 본성 아니거든. 이건 내 생각이 아닌데. 매일의 삶 속에서 이런 게 나오네’라고 되죠.
그래서 기존에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 할 수밖에 없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씀이 건드려버리면, 여기서 진동이 나오고요, 그 진동이 뿌리를 흔들어 대는 진동으로써 새롭게 나오기 때문에, 그 나온 성도의 고백은 뭐냐. 말씀이 나와요. 어떤 말씀이 나오느냐. 예레미야 17장 9절의 말씀이 나와요. ‘내 마음은 만물보다 더럽다’라는 고백이 나와요.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자기 존재 뿌리를 본인이 몰라요. 누가 시킨 대로만 했을 뿐이지, 시킨 대로 했는데 그게 선악 체계로 시킨 것을 했기 때문에, ‘그래 나는 나빠. 이건 나쁜 짓이지. 저건 좋은 짓이야’라고 선악 자식이 나오는데, 선악 지식은 절대 존재의 뿌리가 아닙니다. 존재의 뿌리는 생명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해서 그것을 계기로 해서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예수님을 통해서 통합시켜버렸습니다. 그 통합하는 과정이 성도 안에서 재현되어야 해요. 성도는 선악과 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 오셔서 선악과나무로 인한 지식을 아는 인간과 마주쳐서 거기서 사건이 일어나고, 사고가 일어나서, 그것을 통해서 결국 바깥에 이것이 생명이라는 생명의 새로움이 여인을 통해서 나타나듯이,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게 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심히 부패한 마음이라 할 때, ‘주님, 제가 고칠게요. 그렇지. 인생이 엉망인 것을 이제 알았네. 내 마음이 부패해서 인생살이가 이 모양, 이 꼴이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엄청난 오해입니다. 여기서 ‘거짓’과 ‘죄’를 약간 구분하는 게 좋은데, 구분 안 하셔도 되는데, 억지로 구분한다면 거짓은 환상에서 비롯되고요, 죄는 본질에 관한겁니다.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마찬가지 맞습니다. 맞지만, 억지로 구분한다면 인간은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거짓이 나와요. 환타지가 나와요. 환상이 나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일제시대에 1945년에 일본군 병사가 700만 명이에요. 1945년 8월에 일본 병사 700만. 엄청난 대군이죠. 거기서 독립투사가 몇 명이냐 하면 2300명이에요. 700만 대 2300.
그게 게임이 됩니까? 게임이 돼요?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게임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다고 했어요. 심히 부패하니까, 부패한 마음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지요? 환상이 나오죠. 환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가련한, 열두 척의 배밖에 없는 2300명의 독립투사를 가지고 우리 조선을 해방할 것이라는 환상을, 상해 임시정부부터 해서 나오는데, 그 결과로 나온 나라가 뭐냐 하면 조선 인민주의 공화국이에요. 아직도 있어요.
환상의 나라예요. 왜냐 하면 김일성이라는 자를 독립투사로 변경시켜서 진짜 진리는 독립투사의 희생과 애국심이 진정 이 나라를 살렸다고 생각하는 그 환상에 입각해서 만든 나라가 북한이라는 나라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 건국 전쟁을 통해서 압니다. 이 바닥에서 건국 전쟁 안 하면 이 동네에 못살아요.
그래서 ‘리승만’ 대통령께서는, 이승만도 아니고 리승만 대통령께서는 외세의 힘을 빌리자고 하고, 따라서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에 반대하는 독립투사는 배제할 수밖에 없어요. 그 이야기는 건국 전쟁에 안 나옵니다. 따로 공부해야 해요. 친미(親美)밖에 없어요. 700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원자폭탄밖에 없기 때문에. 이게 뭐냐. 이게 환상에 대해서 또 다른 환상으로, 합리적인 환상으로 마주치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 환상 때문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뭐냐. 환상을 경유해서 구원을 받으면 안 되고, 환상을 깨게 되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비로소 한 번도 내가 몰랐던 죄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는 뭐냐. 죄는 우리가 지은 것이 아니에요. 죄는 우리 조상이 지은 거예요.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 해봤어요.
억울해요. 억울해. 따먹어보지도 못한 선악과 가지고, 책임을 물으려고 하면 억울한 겁니다. 억울한 거 맞습니다. 우리는 아담이 죄를 범했고 그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악마가 우리를 건드리니까 아담의 속성에서 못 벗어난 채로 아담을 유혹했던 그 유혹을 우리가 감내하거나 이겨낼 수 없는 그러한 갇힌 처지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아시죠.
마태복음 23장 25~26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그 뒤에도 계속 나와요.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런데 너희들이 의도적으로 페인트칠해서 그걸 감추고 있다. 그걸 외식한다고 하고 위선 떤다고 하죠. 위선 떠는 그것을 드러내는 주님의 방식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그들 손에 죽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가 귀한 겁니다. 십자가는 사고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건입니다.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거나 다음에 안 그러면 되는데, 사건은 인간이 일으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앞에서 반성하거나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일어난 사건이에요. ‘인간은 지옥 간다’ 일어난 사건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 일어난 사건이에요. 내 인생이 내 손으로 변경이 안 됩니다. 그냥 주의 손에 맡기세요. 주께서 계속 십자가 가지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이야기해주면 우리는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교회 와서 착하게 사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도대체 일어난 사고가 뭐냐가 아니라, 도대체 일어난 사건이 뭐냐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도대체 나는 어떤 사건에 의해서 휘말려 있는가를.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를 대신한 다른 주체가 있어요. 그 주체가 일으킨 사건에 우리는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이걸 생각하시고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면 이제 성경이 눈에 보일 거예요. 이래도 안 보이면 어쩔 수 없고요. 열왕기상 18장 38절에 엘리야가 850대 1로 붙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제안했죠. 누가 어느 것이 진정한 하나님이냐?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다’라고 850명이 말하죠. 엘리야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말장난밖에 안 되니까 실제로 붙자. 내가 제안할 테니 너희들이 동의하는지 봐라. 제물을 제단에 놓고 기도해서 어느 기도가, 어느 하나님이 제단에 불을 실제로 태우는지, 한번 붙자. 이렇게 나왔어요. 이건 정말 무모한 게임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게임 하면 안 됩니다. 정말 이건 말도 안 되는 무모한 게임이에요. 이건 왜 우리가 이 게임을 하면 안 되느냐 하면, 이건 이스라엘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는데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아들을 살렸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전도사가 기도원에서 계시받고 자기 아들을 죽인 전도사가 있어요.
그건 완전히 오기죠. 이스라엘의 특수성이 어떤지 성경해석을 할 때, 그때그때 언약상황이 따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오류를 범해요. 사시기 10장에 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라고 이렇게 쭉 나오잖아요.
이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특수한 상황인데, 그때 암몬 자손의 신이 몰렉이고, 모압 자손의 신은 그모스라고 하는데, 이들이 다 바알신에서 파생된 거거든요. 신이 뭐냐 하면 인신(人身)이에요. 인신공양(人身供養). 신에게 깨끗한 처녀나 아기를 바치면 하나님이 우리의 뜻대로 이 나라를 지켜준다는 신이에요. 이스라엘에 있었던 그 당시 특수한 상황이라고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입다를 가지고 특수한 상항에 맞춰서 구원자 입다를 보냅니다. 입다도 자기 본의 아니게 하나님을 믿고 승리했는데, 본의 아니게 자기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하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케 하시면 제일 먼저 나오는 그 짐승을 잡아서 제물을 드리겠다고 한 거예요. 지금 입다가 싸울 적들이 어떤 적이냐 하면, 사람을 신에게 바쳐서 복을 따내고 자기 뜻대로 해내는 그런 신이 있어요.
그런 신이 바로 바알을 믿는 그들의 신입니다. 그런데 입다는 함부로 그럴 수는 없고 그냥 짐승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짐승이 입다 앞에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도 깨끗한 처녀 딸이 먼저 나왔죠. 입다는 못 바치죠. 바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진짜 훌륭한 신앙에는 사건이 터져요. 딸이 말합니다.
‘아버지, 저를 번제로 바쳐야 합니다. 지금 아버지의 자존심이나 아버지의 위대함이 문제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인신 공양하는 가짜 우상 신들에서 이스라엘은 그것보다 더 독하게 하나님 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처녀로 죽는 것이 억울하지만 제가 한 달만 친구들과 놀다가 장렬하게 그냥 죽겠습니다. 제 뜻대로 그냥 일을 치러주세요’
봐라. 너희들의 인신공양과 이스라엘의 인신공양이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요, 우리 주변에 있는 상황을 우리는 깨끗하다는 식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들의 더러운 제일 안쪽에 있는 존재의 뿌리에 예수님이 찾아가요. 하나님이 찾아가서, 그 더러운 방식, 환타지죠, 더러운 방식으로는 인간이 접근 못 한 죄가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죄의 근원, 존재의 뿌리가 인간은 죄에 박혀있음을 드러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무엘상 18장에 나오는 제단에 불이 오는 장면이에요. 여기서 제단의 고기에 열두 바구니의 물을 붓는다는 것은 제단에 올라간 그 제물이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를 대변하는 자가 엘리야 본인이에요. 이제 엘리야는 죽은 거예요. 이번 내기로 바알과 아세라 쪽 사람은 ‘우리 한번 살아보자’라는 식이라면 엘리야는 그냥 자기가 자신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물로 그 제단에 누운 거예요.
이것은 적들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과연 내가, 과연 하나님을 내가 믿는가를 자기를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를 불로 태워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상황과 동일합니다. 이걸 정리하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주께서 벌이신 일에 대한 대응으로 진리가 열린다. 인간이 공부하고 복음 안다고 진리가 열리는 것이 아니에요.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이, 내가 얼마나 나도 모르는 죄 속에 푹 빠져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내서 내가 그 죄와 함께 죽어 마땅하고 죽어 마땅한 그것이 내가 얻을 수 없는 최고의 새로움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거예요.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 맞아요. 그걸 달리 표현하면 살고자 하는 나로부터의 결별이 구원입니다.
남에게 멋있는 신앙인으로 보이겠다는 그 죄, 그 죄로부터 내가 빠져 나와야 하죠. 우리는 신앙 없어야 마땅하고, 신앙 있으면 안 되는 거고, 우리는 주님의 신앙, 십자가 지신 주님의 그 신앙에 우리는 소모품이 될 때, 우리는 최고의 영광을 얻습니다. 끝으로 그 대목이 나옵니다. 로마서 12장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미 예수님은 제사 제물로 드렸고 그다음은 네 차례다. 내가 네 인생에 사건을 일으킬게. 그 순간순간마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네가 알게 될 거야. 로마서 15장 16~18절에 보면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끝으로 과연 내가 하나님의 제물에 합세했는지 안 했는지를 내가 무슨 수로 아느냐. 아는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으시고, 존재의 뿌리에 들어가서 흔들기를 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꼭 우리가 엘리야 제단에 올라간 것 같아요. 뒤에 계속 읽어보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끊어 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을 위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사랑이 있는 사람 같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경우가 바로 나도 몰랐던 사랑의 새로움이 도출되는 계기와 기회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작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인생이었습니다. 삐진다는 것이, 분노한다는 것이, 마음 상했다는 것이 얼마나 시건방진 일인지를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아프다든지, 죽겠다든지, 힘들다는 것인 얼마나 엄청난 엄살인 것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노출되는 새로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