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법과 땅

아빠와 함께 2024. 1. 22. 09:55

법과 땅

2024년 1월 2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0-13

(16:10)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고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광포하심은 어찜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뇨 하거든
(16:11)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6:12)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16:13)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 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인간은 죄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알고 싶지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발전을 도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추진하는 일에 외부인이 제발 안 건드렸으면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천국의 계단’같은 것을 그리게 마련입니다. 천국으로 통할 것 같은 계단 끝에서 빛이 눈 부시기 비치는 목표점 같은 것을 상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기 포부를 위해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법을 지키는 것이 왜 나쁜 일인지, 왜 해서는 안 되는 짓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인간들이 우상을 섬기는 의도와 반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상을 전제로 해서 주어진 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은 이렇게 됩니다. “발전하려는 너를 네가 밟고 지나가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진해서 자기 파멸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법을 어겼다고 해서 그 약속의 땅에 살면서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땅에서 나가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은 법을 온전하게 지켜내지 못하는 자에게 허락되지 않는 땅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오해하기를, “하나님이여, 땅이 우선입니까 사람이 우선입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땅!” 땅이 땅답게 되기 위해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불법적인 인간들을 내어쫓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법을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즉 법을 지키는 자에 의해서 땅이 새롭게 되게 되면 바로 그 땅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드리자’고 나서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법보다 본인이 더 우선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지자를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항시 자기 가치가 최우선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타인을 경계하게 됩니다. 남들에 신앙인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이 건전한 신자로 여겨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법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 말고 자기 보다 더 우선적인 말씀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압도해야 가능합니다. 자신이 죽든 말든, 자신이 남에게 이기든 지든 말든 구애받지 않고 말씀이 자신을 이끌고 인도하는 겁니다. ‘천국의 계단’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이끈다는 것은 더는 내가 내 꿈과 소망을 달성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늘 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예가 그러합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는 근거를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정작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꿈의 내용에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손 댈 수 없는 말씀의 사태가 나를 지배하는 겁니다. 나의 뜻과 알 수 없는 주님의 온전한 법의 수준이 어느 정도로 벌어져 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꿈은 요셉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성취로 달려갑니다. 이 성경 구절이 시편 105:17-19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말씀이 응할 때까지’의 수준은 어떤 수준일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밟은 상태로 말씀을 성취한다는 상황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로마서 8:10에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즉 인간의 몸은 죄로 인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됩니다.

따라서 죽은 몸으로 더는 남들과 싸울 수도 없을뿐더러 이기고 지고를 논할 수 없는 겁니다. 또 다른 예가 누가복음에서는 나옵니다. 누가복음 12:17-20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농부는 갑자기 그 해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자립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을 내심 기뻐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포부에 합당하게 된 것을 자신의 승리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즉 하나님께서 그 부자에게 곡식을 많이 주신 것은 인간이 꼬깃꼬깃 숨기고 있는 것을 들통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지키는 방법은 인간의 불법을 들추어 내는 식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아니하시고 그 하나님 믿는 이유와 원천을 노출시킵니다. 그러한 예가 마태복음 13장에서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4-29)

이 말씀을 대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종에 불과합니다. 가라지가 되든지 알곡이 되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인님의 성과요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 점을 안다면 이런 사람은 가라지 뽑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자가 알곡입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서 말씀의 완성에 전적으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즉 내가 내 인생을 완성시키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것은 주의 영으로 인해서 우리 자신은 늘 ‘죄로 인하여 죽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불법을 아는 것이 진정한 복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7강-예레미야 16장 10~13절(법과 땅)24012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0~13절입니다. 구약성경 1077페이지입니다.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고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광포하심은 어찜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의 말씀을 듣는 백성들 사이에 의견소통이 전혀 되질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너희가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걸 듣는 백성들은 말합니다. ‘뭐? 뭐?! 뭔데? 뭔가 문젠데? 우리가 뭘 어쨌다고? 뭘 우리가 죄를 지었어?’라고 그렇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너희가 죄를 지었는데, 너희 조상들이 지은 죄가 있고 너희도 지은 죄가 있는데, 그 죄가 뭐냐 하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여”서 그게 죄라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보기보다 어려운 이야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내가 지킬 규칙은 내가 만들어요.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주인이에요. 자기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해가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가 꾸미고, 내가 다듬고,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상 숙지하고 적응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내가 애쓰고 있단 말이죠.

그게 뭐? 그게 뭐 어째서?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인간은 이미 자기 규칙이나 법을 자기가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외부에서 지적질하게 되면요, 그걸 타인이라고 하죠, 남이니까 ‘너나 잘하세요. 남 간섭질 하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라고 하죠. 부모? 나 이제 다 컸어. 내 인생, 내 규칙 내가 만드는 거야. 부모가 도와준 거 고맙죠. 하지만 나도 컸단 말이죠.

이건 뭐 잘못이고, 이건 죄고, 그거는 아빠 엄마 관점이고 나는 나의 관점 따로 있는데, 왜 내 관점 개무시하냐는 말이죠. 내 관점을. 뭐, 엄마가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거야? 아니죠. 그러면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간섭을 좀 줄이고 나에게 맡겨놓으면 안 돼? 상당히 설득력 있는 태도입니다. 그게 백성들이거든요. 그러면 예레미야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네가 다른 신을 섬겼잖아” 이건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럴 때 백성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여호와 섬기는 것은 내 규칙대로 내가 편하게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야. 네가 잘했다, 잘못했다고 간섭할 입장이 안 돼’ 문제는 이겁니다. 이게 어려운 점이, 그들이 다른 신을 섬겼는데 다른 신을 섬긴 것에 대한 벌칙이 이 땅에서 나가라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 땅에서 나가라. 이 땅에서 교도소 가라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고생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나가라는 겁니다.

이걸 두 자로 ‘나가!!’ 그따위 소리 하려면 나가. 여기서 나가!! 이게 벌칙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예레미야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땅이 먼저야, 우리가 먼저야? 땅이 중요해, 우리가 중요해? 어느 것이 중요해?’ 예레미야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땅이 중요해’ 네가 바로 그 점을 오해한 거예요. 우리 인간의 자리라는 것이 우리가 시공간 속에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출생했다는 생각은 못 하고, 내가 있고 환경이 있어야 한다고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 자체가 뭐냐면, 내가 있고 나 하나 잘 되기 위해서 신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다른 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호와가 되었든 예수가 되었든 그 명칭은 중요하지 않고, 다른 신의 특징은 뭐냐.

신이 있다면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나를 지켜줘야 하고, 나를 보호해 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조건부로, 하나님이 잘해줬으니까 나도 잘해주겠다는 것이 바로 다른 신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른 신의 출생자들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단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이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그러면 진짜 신은 뭐냐? 우리가 진짜 신의 법을 지키면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네가 신의 법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뭐냐?” 신의 법이 좋아서, 하나님이 좋아서 그걸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성경에 나오고, 성경을 보고 하는 거예요. 이건 절대로 우리는 나를 위한 신을 벗어난 적이 없고, 그걸 포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나에게 좋다면 성경 말씀도 지킬 용의가 되어있어요. 뭐 좀 지키지. 매 맞는 것보다, 지옥 가는 것보다 나으니까. 딴에 천국 가주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주의 법이 아닙니다. 또 내 중심으로 주의 법을 곡해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법은 뭐냐. 이겁니다. “너를 밟고 지나가라” 전우(戰友)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가듯이, 너 자신을 밟을 용의가 되어있느냐.

자기 자신을 밟았던 사람들이 구약성경에 등장합니다. 두 사람만 이야기할게요. 모세이고 또 하나는 요셉입니다. 요셉이 먼저니까 요셉부터 이야기하면 요셉은 꿈이 자기를 밟아요. 이건 꿈을 잘못 꿨어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꿈이 나를 꼼짝 마라 하면서 나를 밟고 강제로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꿈을 꾸지 않는 형제들은 이걸 납득을 못해요.

‘너는 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잖아’라고 이렇게 시기하는 거예요. 요셉은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것은 안중에도 없어요. 지금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어떻게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에요. 꿈이 사랑보다 우선되는 거예요.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말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는 것이 나를 압도하고 압제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통제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 같으면 상대방과 좋게좋게 지내면 됩니다. 내 인생을 누구와 의논하면 돼요. 그런데 이건 누구와 의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강압적으로 나를 마구잡이로 이끌겠다는데, 요셉은 어쩔 수가 없어요. 시편 105편에 보면 요셉을 이끄시는 것이 말씀이라고 되어있어요. 상당히 추상적 표현을 했는데, 시편 105편에 보면 17~19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그리고 19절에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꼼짝 마라는 말이죠. 너는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말씀이 말씀대로 너는 그것을 표현해야 하고, 너를 통해서 말씀이 드러나는 그런 운명으로 매였다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우리는 감을 못 잡지요.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감을 못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오늘 본문 16절에 다시 보게 되면 “너희가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라고 나오죠.

그러면 조금 더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못난이가 되어서 여호와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방법은 법을 못 지키는 사람들을 드러내면서, 법이 스스로 법을 지키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법을 지키는 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못 지키는 자에 충실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나자신을 쉽게 밟을 수가 있어요.

이건 예를 들어 설명하면 아주 쉽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부터 보면요,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평안히 쉬고 먹고, 다시 말해서 여기 곡식이 잘 된 것이 그 용도, 목적이 뭐냐 하면 내 영혼이 이 곡식 때문에 걱정할 것이 없는 편안한 영혼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이렇게 곡식이 잘 될 때나, 못 될 때나, 자기 본심이 잘 정리가 안 되었었는데, 갑자기 곡식이 잘 되다 보니까 자기 본심이 톡 튀어나온 거예요. ‘이거지. 이거야. 내 사는 재미가 바로 여기 있는 거지. 나는 달성했어. 드디어 내 목적을 달성했어. 내 영혼은 이제 편안하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20절부터 반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곡식을 준 것이 그 준 사람의 본심을 축출하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곡식을 많이 준 거예요. 네 평소의 마음가짐과 사는 목표가 어디인지를 네가 꼬깃꼬깃 감춰놓았는데, 이래도 네가 계속 숨길 거야? 이거였잖아. 네 영혼 잘 되는 거였잖아. 그런데 네 영혼이 네 것이냐. 정말 너는 너밖에 모르지?

가난한 나를 자살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부자인 나를 자살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은 가난할 때도 자기밖에 몰랐다는 거예요. 가난한 것이 덕이 아니에요. 미덕이 아니에요. 가난한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가난하나 부자나 인간들의 흑심이 뭐냐. 자기가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지기 싫다면 나를 항상 견고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저절로 피곤이 몰려와요. 왜 피곤한지 알아요? 지기 싫어서 피곤한 겁니다. 버티려고 피곤한 거예요. 누구에게 안 지려고? 나에게 안 지려고. 내가 생각한 이상형에 내가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가장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라면 저는 천국의 계단을 듭니다. 천국의 계단 모습을 한 번 보세요.

문 열고 들어가니까 천국까지 계단이 쫙 나 있는데, 계단들의 층이 평평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계단들이 한층 한층 점점 더 높아갑니다. 마치 그 천국의 계단 끝에는 큰 불빛이 막 새 나오는 것 같아요. 이런 거 하나씩 설정되어야 사는 보람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미래가 있고, 희망이 보이고, ‘좀 기다려봐. 내가 거기로 달려갈 테니까’ 갑자기 노래 가사가 생각나네요. ‘존재의 이유’라는 노래에 나옵니다.

내가 달려가서 성공한 면모를 너에게 보여줄게. 이렇게 내가 대단한 존재인 것을 내가 보여줄게. 결국, 인간에게 타인이라고 하는 것은 경쟁대상이었어요. 꼭 싸워서 경쟁이 아니고, ‘두고 보세요. 내가 잘 되는 거 보여줄 테니’ 자기랑 자기가 싸운다고 누가 진이 빠지느냐 하면, 본인이 진을 빼요. 이 문제를 신약성경에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너는 져버리고, 네 안에 계신 분이 너를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게 하라’ 너는 져버리고 네 안에 계신 분이 골칫거리 너를 내가, 이 예수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하시란 말이죠. 왜냐 하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바울 서신을 보게 되면 너무나 함축적이어서 하나하나 곱씹기도 참 힘든데, 그중에 한 예가 로마서 8장 9~10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라는 바로 이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그냥 건너뛰어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다음에 나는 산다고 이렇게 가고 싶은데, 그렇게 안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너의 안에 계시면 너는 죽은 것이에요. 그것도 이유가 뭐냐. 불법으로 죄로 죽은 것이에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우리를 뭐냐, 이미 패배자로 간주하시고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 거예요.

네가 나서서 굳이 승리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남들 앞에서 너의 자존심 세울 그럴 피곤할 일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남들 앞에서 내세우기 위해서, 성과 보이기 위해서, ‘나 이 정도 성과 얻었어’라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죠. 한 번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야 너의 영혼 오늘 밤에 빼앗아 가버린다”라고 하셔야 하는데. 왜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으냐 하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 돌아와서, 이게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풍성하게 나오는 이 결론 부분에 대해서 그러면 구약시대에 예레미야는 무엇으로 이것을 표현하느냐. “땅에서 나가!”가 되거든요. “땅에서 나가! 이 땅은 다른 신을 섬기는 자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가!” 그렇다면 그 땅에 법은 지켜야 하고 백성들은 쫓겨났으니까, 그러면 그 땅에 누가 오시는데? 메시아가 옵니다.

그러면 메시아 본인은 뭐 대수인가? 메시아 당신은 뭘 할 수 있는가. 막 따질 거예요. 우리도 못 했는데 메시아가 뭘 할 수 있느냐.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거였습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일을 다 이루어버리는 일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땅에서 나간 인간들, 인간들은 이미 실패자로 나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고집하시고, 따라서 여기 땅에서 일어난 하나님 일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아들로 인하여 이미 성사되고 성공한 거예요. 법에 대해서는 더이상 손 털었습니다. 내 아들이 다 이루었으니까 끝난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쫓겨났으니까 지옥 가고, 예수님 혼자 천국 가고, 그게 다냐.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 알곡과 가라지 이야기가 예수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뭐냐 하면,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게 열매입니다. 알곡도 열매이고 가라지도 열매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시작을 네가 안 했다는 겁니다. 네가 애써서 뭐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백날 시작해봐야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의 법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땅에서, 어렵게 이야기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부활하면서, 그 땅이 천국 땅으로 승천하게 되어있어요.

지상의 땅은 이제 폐기 처분하고 주님이 함께 이루었던 땅을 가지고, 천국이라고 하죠, 그 천국을 이루면서 알곡만 데리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 지상에는 뭐냐, 알곡도 만들어져야 하고, 가라지도 만들어져야 하는 겁니다. 이 말씀 또한 예수님 혼자 이루는 거예요. ‘저는 가라지 될래요’라고 할 필요도 없고, ‘저는 알곡 될래요’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가만히 있어봐. 내가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 대로 내가 해줄 테니까. 왜냐 하면 열매니까 그런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알곡과 가라지 할 때, 방금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하십니다. 29절에 보면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거예요. 왜 가라지 뽑지 말라고 하느냐면, 흰머리는 뽑아도 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가라지를 뽑을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에서 어떤 사람에게 ‘저 사람은 가라지다’라고 할 입장에 아무도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뽑지 말라고 이런 말을 굳이 하느냐. 어떤 말씀도, 그리고 이 말씀도 못 이뤄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게 소환되어서 본인만이 이루십니다. 그러면 알곡과 가라지는 어떤 자로 이해되느냐. 자기가 자기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종인 것을 아는 사람 같으면 ‘가만두어라’에 해당하는 것이 본인 자신인 것을 알아요. 가만두어라.

인생을 네가 손대지 말고 내가 너를 부릴 때, 그냥 부림을 당하고 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열매 맺을 수 없고 내가 주인이 아닌 이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애쓸 하등에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선물이고 열매거든요. ‘가만두어라’가 되면 알곡이고 ‘가만두어라’가 되지 못하면 이건 가라지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은.

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가만두지 못하는가. 알곡 되고 싶어서. 그러니까 가라지인 거예요. 참 쉽지요. 굉장히 쉬운 문제예요. 이게. 제가 오랜만에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여러분이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스스로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수능에 국어시험이라 생각하고 문장을 하나 내겠습니다. 이건 실제 응용문제이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 같으면 한 사람 한 사람 묻고 싶어요. 자 문제 나갑니다.

‘김천시는 자금난을 겪는 지역기업에 대해서 대출보증지원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여러분은 대처하시겠어요? 교회가 실제 세상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몰라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 유사성을 찾아서 뭐 잘 해보려고 헌금은 얼마 하면 되고, 기도는 몇 시간 하면 되고, 이런 거만 하지, 실제로 세상에서, 가라지 같은 세상에서 나온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에 대해서는 이게 옳은지 그른지 분간할 수 있는 판단 자체가 날아가고 없어요.

방금 제가 설교했잖아요. 내가 지면 된다고. 그런데 이 문장, 이 뉴스 듣는 순간, 김천시에서 작은 중소기업을 하는 이 순간, 이 사람은 뭘 자극받겠습니까? ‘야, 이거 잘하면 대출 더 받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있겠죠. 내가 아니더라도 친척이, 사촌이 김천지역에서 중소기업을 한다고 자금난 때문에 힘들다면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겠느냐는 말이죠.

이 모든 것이 방금 ‘손대지 마세요. 나를 밟고 지나가세요. 나는 지면 됩니다’라는 모든 소리가 순식간에 헛소리로 다 날아갑니다. 방금 읽었던 ‘김천시는 자금난을 겪는 지역기업에 대해서 대출보증지원에 나서기로 했습니다’가 굉장히 중성적으로 보이죠. 중립적 입장에 있는 듯 보이잖아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으로 보이죠. 이게 바로 불법을 야기하는 하나의 이 지상, 하나님이 버린 이 땅의 형편입니다.

다시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치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지적했습니다. ‘네가 법을 지키지 않았다’라고 하니, 듣는 백성들은 ‘뭐? 우리는 작은 기업을 했어. 우리는 김천시에서 조그만 기업 한다고 애를 먹었는데 그게 뭐? 그게 뭐가 불법인데? 너무한 거 아냐? 나는 나름대로 산다고 애를 썼다고. 농사 짓는다고 애를 썼다고. 그런데 뭐? 뭐가 나쁜데?’

‘여기서 법을 지키라고? 주일날 교회 가줬잖아? 여기서 더 뭐를 어떻게 해? 나름대로 지키려고 애를 썼어. 힘들어 죽겠어. 예레미야 너는 말만 하지. 너도 어디 농사짓고 직장 다니고 좀 해보지그래? 피곤해서 설교할 때 잠만 오고 그러는데 너도 한 번 해볼래? 그게 말처럼 되는가. 우리야 지키고 싶지.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나는 오늘 대출받으러 갈 거야’

주께서 문제 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기냐, 지냐는 이 문제예요. 이기나 지나 우리 소관이 아닌 거예요. 왜? 우리 육신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죽었다는 말은 이미 저버린 자의 자유함입니다. 이제는 뭐든 말을 다 할 수 있고, 어떤 행동도 다 할 수 있고, 대출도 받을 수 있고 안 받을 수도 있고, 어떤 행동을 해도 복음으로 통하거든 뭐든지 다 하세요.

이것마저도 선물로 감사하거든 뭐든지 하시고, 어떤 걸 해도 나와 통하거든 하지 마세요. 그건 감사가 안 나오고 나의 승리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성령 없는 내가 마치 ‘봐, 나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자기과시 하는 쪽으로 나온다고요. 예레미야의 이 말씀, 약속의 땅 천국에,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의 말씀대로 요셉처럼, 또는 모세처럼 자기보다 더 큰 뭔가 다른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있어서 말씀완성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그러한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주께서 자꾸 일을 시키십니다. 그냥 놀고 싶더라도 주께서 움직이게 하십니다. 하지만 전에는 내가 나섰지만, 이제는 주께서 나서서 하시는 일, 이미 주께서 승리했다는 기쁨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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