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2024년 2월 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6-18
(16: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암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6:17)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노리개감, 혹은 먹이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안 믿고 교만스러운 민족들에게 그렇게 당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랍니다. 우상 섬기는 게 무엇이 그렇게 악한 일이라고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뭇 민족들에게 놀림감으로 전락시키는 겁니까?
자연적으로 반발이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반발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과도하게 자신들을 몰아 세운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어느 정도 부족하고 모자라고 미흡한 면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하는 것이 자비로운 하나님의 태도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도리어 반대로 나가십니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징벌을 내리십니다. 냉혹하게 자기 백성들을 다루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고 있으면서도 믿는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실제로는 안 믿고 있는 자신들을 가리개용으로 써먹고 있는 겁니다.
에스겔 16:3에 보면,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들은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하지만 실은 이방민족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땅으로 이주를 시킴으로서 그들이 무엇을 누락했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냥 살기만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유지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바벨론 이방나라에 포로잡혀 가면서 발견해야 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인간들이 소지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인간이 갖는 게 아니라 반대로 율법이 인간을 갖게 되도록 이스라엘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허락해야 했습니다. 이런데 이런 시도를 어느 인간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아성 때문입니다.
악마에게는 죽음이라는 게 없습니다. 영원히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중에 악마가 소멸되어 저주가 가해지는 대상이 없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인간들을 향하여, “너 그렇게 살면 죽어! 망해!”라고 협박을 하는 가운데 인간은 평생을 힘겹게 살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태도와 생각은 ‘죽지 않으려는’ 시도에게 비롯됩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여깁니다. 실질적으로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에게 해당됩니다. 다른 이들은 죽음을 모릅니다. 진짜 죽음은 율법을 통해서 제시됩니다. 민수기 5:13-19에 보면, “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더러워짐을 인하여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든지 또는 아내가 더럽히지 아니하였어도 그 남편이 의심이 생겨서 그 아내를 의심하거든 그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에바 십분지 일을 예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생각하게 하는 소제니 곧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민 5:13-19)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이 단순한 엄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게 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음을 보이는 샘플로서 간음했다고 의심받는 여인이 등장됩니다. 제사장은 그 여인에게 죄를 생각하게 하는 제물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몸에서 쓴 물을 붓습니다. “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제사장이 저주의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그 글자를 그 쓴 물에 빨아 넣고 여인으로 그 저주가 되게 하는 쓴 물을 마시게 할지니 그 저주가 되게 하는 물이 그 속에 들어가서 쓰리라”( 민 5:22-24)
이 여인은 율법이 주는 현장성을 고스란히 받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더는 인간이 율법을 자기 마음을 감추는 치장용으로 써먹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본디 가나안 이방족속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자아는 자신이 벗어 던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범죄하고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어떤 경우이든 자신을 보호하고 변명합니다. 바로 이런 게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는 성질입니다. 간음한 자에게 제시되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본래부터 하나님 자신에게 적용시킬 용도로 주어진 겁니다.
마태복음 20: 22-24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끝까지 예수님 곁에 붙어있으면 주님 가시는 그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 제자들은 애초부터 쓴 잔을 먹겠다고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자아가 천국에 앉히기를 원했습니다. 결코 자아를 버릴 마음이 없습니다. 반대로 자아가 성공하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게 바로 이방민족들이 생각하는 우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은 자신의 몸과 피를 먹이십니다.(마 26:39-42) 그리고 그 피와 몸의 의미를 십자가에서 초최종 선언하십니다. “다 이루었다”고 말입니다.(요 19:30) 천국이란 더는 자아에 대해서 생각하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 우상숭배란 곧 인간의 육신이 내뿜는 탐욕입니다. “(골 3:5) 성도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새언약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는 하늘에 그 생명이 있습니다.(골 3:3) 자아가 생명을 얻은 게 아니라 생명 안에서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작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9강-예레미야 16장 16~18절(잔)24020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6~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암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나오는 어부라 하는 것은, 그리고 또 여기서 나오는 포수(사냥꾼)이라 하는 것은 이방 나라, 바벨론 군사들을 뜻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사냥감이 되고 낚시감이 되는 그 대상이 누구냐.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유다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그들을 노리갯감으로 삼아서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 극히 비관하도록 만들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가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 유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우리가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슨 그런 큰 죄를 지었습니까?’ 사람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비관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처참하고 비참한 지경은 남들 앞에서 우리가 노리갯감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공격하면 공격한 대로 다 받아야 하고, 거기에 대항하거나 피할 수 없이 그들이 시킨 대로 해야 하는 그러한 인생이 될 때, 더 살맛이 나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 나라는 존엄성, 나라는 가치가 이렇게 비참하게 치욕스러운 지경을 맞이했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치욕스러움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체험시키려고 이런 계시를 주신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토록 심한 벌을 받아야 하는가. 여기 18절에 보면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미운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신이 살아있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물건 자체가 우상의 시체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 우상들을 섬기면서 이 거룩한 약속의 땅,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것으로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그들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심하고 치욕스럽게 갚아주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또 반발할 거예요. 우상을 섬기면 섬기지 말라고 말을 하면 되지, 꼭 그렇게 굳이 고생을 시켜야 하나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후련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반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어요. 인간이 우상 섬기는 그것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그들이 그만둘 위인들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은 이미 하나님 섬길 때부터, 이미 우상을 섬겨왔었어요. 하나님이 우상 섬기는 것을 겉으로 덮으니까, 마치 우상 안 섬기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왜곡되게 이해했던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자기 속에는 이미 우상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섬김으로써, 교회 나옴으로써, 예수를 믿음으로써, 마치 우상과 나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위장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치욕스럽게 압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우상을 섬겼습니까? 우리는 하나님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상 섬겼다고 막 닦달 내고 밀어붙이시면, 더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도록 조치할 수 있는 여력은 우리에게 전혀 없습니다. 이대로 우리가 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약속의 땅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으로 포로 잡혀가고 이주하게 됩니다. 이주하면서 그들이 체험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게 에스겔 16장 3절에 나옵니다.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는 말이 “너희는 이방인이야. 너희는 이방인 출신이야”라고 언급을 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 혈통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겉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 잡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속에 있는 본색은 밖으로 끄집어내고, 바깥에 있던 여호와 섬긴다는 것은 구색에 불과하고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그들로 바벨론에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문을 이렇게 해야 해요. 그들은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여호와를 섬겼다는 이런 질문을 할 것이 아니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서 해야 해요. ‘왜 우리는 여호와를 섬겼느냐?’라고 질문을 해야 해요. ‘섬길 필요도 없는 여호와를 왜 섬겼느냐?’라는 그 질문은 언제 해답을 얻느냐 하면, 그들이 이방 민족보다 더 못한, 이방 민족에게 포로 잡혀갔을 때, 비로소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방인이다’라는 사실이죠. 우리는 특별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자꾸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방인이라면 굳이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찾을 필요조차 없는 존재였어요.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데 왜 예수를 믿느냐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반문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주님, 영생 안 주셔도 돼요. 저 같은 것은 영생 쓸데도 없고, 저 같은 것이 왜 구원받아야 합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왜 벌어졌습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이런 질문이 안 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뭐냐 하면 나는 세상에 살면서 남들이 하지 않는 예수를 믿으니까, 나는 이제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에게 누락되고, 상실되어있고, 빠져있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문제는 바벨론 사람과 바벨론에 포로 잡혀간 이방인이라고 지칭되는 이스라엘 사람과 차이는 없는가. 차이가 있어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둘 다 이방인인데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한쪽, 이스라엘은 포로 잡혀가면서 누락된 신비성이, 어떤 신비로움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감 잡는 데서 차이가 나요. 그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안 믿을뿐더러, 안 믿는 것이 당연하고, 그걸 정상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당했던 사람은 뭔가 빠져나간 그것이 본래 남들에게 주지 않는 신비로운 것이 왔다가 갔다는 사실을 감 잡게 되어요. ‘아하, 뭔가 미흡한 것이 있는데. 돈? 아니, 돈 아니야. 명예? 명예도 아니야’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게 나에게 도달하고 빠져나갔다는 사실. 이래서 에스겔의 모든 계시나, 예레미야의 계시가 유효한 겁니다. 효과를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어떻게 어려우냐 하면, 이게 신약과 연결되니까 굉장히 어려운데요, 누락된 거, 신비로운 것이 뭐냐. 그것은 이방인, 그것도 토종 이방인에게는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악마에게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이방인들은 몰라요. 악마는 알아요. 본인이 죽지 않는 거. 죽지 않기 때문에 이게 저주가 됩니다.
죽으면 저주도 끝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어떤 존재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이걸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이쪽은 그게 뭔지 감도 없어요. 그냥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악마가 알고, 악마가 인간들에게 ‘너 그러면 죽는다’라고 협박 공갈을 한 거예요. 아주 못 됐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뭡니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죽음이 주는 압박감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러면 죽겠네. 이러면 지옥 가겠네’라고. 여기서 인간의 행동은 자기가 자기를 조정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에 있어서 불신자들은 생각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니까 나는 사람이 죽는 것은 안다고 그렇게 생각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조차도 몰라요. 죽으면서도 죽음조차도 모릅니다. 죽음은 누가 아느냐.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 외에는 죽음이 아닙니다. 28절에도 보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NASB) 28. so Christ also, having been offered once to bear the sins of many, shall appear a second time for salvation without [reference to] sin, to those who eagerly await Him.
(KJV) 28. So Christ was once offered to bear the sins of many; and unto them that look for him shall he appear the second time without sin unto salvation.
(NIV) 28. so Christ was sacrificed once to take away the sins of many people; and he will appear a second time, not to bear sin, but to bring salvation to those who are waiting for him.
뒤에는 심판이 있어요. 심판이 있으려면 사람은 안 죽고 살아있어야 해요. 살아있어야 심판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가 지옥에 가고 거지는 낙원에 갔을 때, 제일 거기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물론 예수님의 비유이긴 하지만, 그 현상 중의 하나가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부자가 지옥 가서 말을 한다는 거예요. 의성 말로 씨부려쌌는 거죠. 이건 욕이 아니고 의성 사투리입니다.
계속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내 존재로 살아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거예요. 남들이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여기 있다는 표시로 말을 하는 거예요. 안 죽는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무서운 건 없어요. 정말 무서운 저주입니다. ‘너는 요새 왜 교회 안 나오고 하나님도 안 믿나?’ ‘내가 하는 일이 바빠서’ 이걸 달리 말하면 ‘나는 내가 살아있잖아’라는 뜻이에요.
나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내 나름의 스케줄이 있고, 나는 이런 쪽으로 계속 살아있을 거야. 죽음은 오직 예수님만 죽고요, 성도만 죽어요. 자기 자신을 없애는 것이 죽음입니다. 무슨 수로 자신을 없앱니까? 그 고집스러운 나. 지옥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못 없애서 지옥간 거예요. 이 몸 그대로 지옥가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팔자가 지옥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너 요새 교회 안 오고 어디가나? 절에 간다. 절에 가서 뭐 하노? 절에 가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도 닦는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이 살아있는 방식이에요. 그게 바로 저주라니까요. 그게. 그게 저주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나를 어떤 방식으로, 안 죽는 나를 어떻게 죽이느냐는 그 방식을 찾아내시면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테마하나를 여러분은 건지신 거예요.
그걸 한 글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게 잔입니다. 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겟세마네 기도할 때, 기도 내용에 나와요. “주여, 이 잔을 제가 꼭 마셔야 되겠습니까?” 죽음이란 언약적 죽음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은 못 죽어요. 하지만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진정 죽을 수가 있습니다. 죽는데 죽는 방법은 뭐냐. 잔을 마셔야 해요. 그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미 언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2~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방인이죠. 악마가 죽는다는 협박을 못 이겨서 사는 길을 찾다가 예수님에게 선택받아서, ‘야, 예수님이 사는 길이구나’라고 이렇게 조마조마하면서 예수님 따라다녔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뭐냐. ‘예수님, 제발 죽지는 말아주세요’라는 이거예요.
이 말이 뭔 뜻이냐면, ‘나 예수 믿는 거 살려고 예수 믿었어요’라는 그런 뜻이에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생명을 위해서 내가 예수님께 선택받은 그런 것은 모르고 내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간 거예요. 내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들이 도대체 구할 것이 뭔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지금 마귀가 협박하는 그 죽음에 쫓겨서, 살길을 찾아서 나(예수)를 따르고 나(예수)를 믿는다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그래, 저거야. 저게 나의 옳은 선택이야’라고 본인이 살기 위해서 선택을 한 거예요. ‘잔’같은 것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제자들이. 그런데 여기서 잔을 끄집어냅니다. 마태복음 계속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잔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제자들을 처음 뽑을 때 이런 이야기 안 했어요.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 듣고 무슨 생각했겠습니까? 진작 이야기했으면 안 따라오지. 진작 이야기했으면 안 따라오지, 왜 이제와서 빼도 박도 못하게 재산과 가족 다 버리게 해놓고 이제와서 잔 이야기를 하느냐는 말이죠. 이 잔 이야기를 민수기 5장 18~26절까지 한 번 보겠습니다. 거기에 잔이 나오는데 그 잔은 저주의 잔,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쓴잔이 나와요.
어떤 여자가 간음했다고 의심을 받아요. 의심받는 여자, 물증은 없는데 심증은 가는 여자, 그런 여자가 남편에게 고소당해서 제사장에게 불려 왔어요. 그럴 때 제사장이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전바닥에 티끌을 물에 넣고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이렇게 합니다.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그러나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더럽혀서 네 남편 아닌 사람과 동침하였으면, (제사장이 그 여인으로 저주의 맹세를 하게 하고 그 여인에게 말할찌니라) 여호와께서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고 네 배로 부어서 너로 네 백성 중에 저줏거리, 맹셋거리가 되게 하실찌라,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찌니라”
간음했다고 의심되는 그 여인의 몸체는 율법에서 언급하는 저주, 저주가 그렇게 실효성 있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현장성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불려 나오는 겁니다. 지금 이 여인이 간음했다는 뜻이 아니고, 간음했는지 안 했는지, 간음하면 저주받는다는 그 말씀과 연계시켜버리는 겁니다. 하나의 인간의 몸이 율법에 나오는 이 저주와 축복의 이야기가 인간의 몸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실제적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로써 간음했다고 의심받는 여인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너 간음했어?’ ‘아니요’ ‘안 했다네. 집에 가세요’라고 이렇게 되면 나도 간음하고 안 했다고 말만 하면 되겠다고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죄악을 생각하게 하는 소제, 죄악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소제물을 둡니다. 소제물이라 하는 것은 죄 있을 때 하나님이 가만히 두지 않고 아주 저주한다는 그런 짐승의 고기죠, 그걸 두고 ‘네가 이런 신세가 되어도 좋아? 네가 이런 처지가 되어도, 이 짐승처럼 저주받은 제물이 되어도 좋아?’라고 하면
그 여인이든 남자든 그들이 ‘뭐, 좋아요’라고 하고 집에 간다면 제사장은 또 ‘제 네들이 좋데’라고 이렇게 끝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토기에다가 쓴 물을 담아서 여자의 몸속에, 신체에 붓습니다. 붓게 되었을 때(마실 때) 여자가 만약 거짓말을 했다면, 진짜 간음했다면 창자가 퉁퉁 붓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그 여자는 죽지는 않아요. 몸이 퉁퉁 부어요.
그래서 역시 말씀대로 간음하면 저주받는 말이 진짜 맞다는 것을 그 여인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몸소 보여줘야 하는 거예요. 말씀은 그냥 빈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스라엘에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뭐냐 하면 ‘그래, 나는 간음하면 안 돼. 왜? 간음하면 웃음거리 되고 내 몸이 퉁퉁 부어서 티가 나니까 이건 너무 부끄러운 일이야’라고 되어버리면 그것은 뭐냐, 그게 바로 이방인이 됩니다.
왜냐 하면 그렇게 되면 아직도 자기 자신에서 끊어내지를 못했어요. 율법이 무섭다. 왜? 내 단도리하기 위해서. 이렇게 되면 그건 율법 정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바로 이스라엘이 이렇게 율법을 해석한 겁니다. 까불면 매 맞는다. 매 맞는 것이 싫어서 율법을 지키자는 것이 된 거예요. 속은 이방인이면서. 지 몸 하나 지키기 위해서. 몸 붓는 것이 그렇게 두렵다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 율법의 취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주께서는 이 잔을 예수님 자신이 마셔버리죠. 마시고 몸이 퉁퉁 붓는 정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어버리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쓴잔이에요. 예수님의 잔입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잔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이에요. 모든 율법은 예수님의 잔에 모두 모이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에 보면, 26절부터 봅니다. “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몸이라고 하셨어요. 내 몸. 민수기 5장을 보셨기 때문에 이제는 이 몸, 예수님의 몸이 어떤 몸이지요. ‘자, 봐라. 이게 죄악 된 몸이다. 간음한 몸이다’라고 하신 거죠. 그리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나의 피.
몸과 피. 그것을 예수님이 다 내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 세상 모든 것에 적용되는, 이 거룩한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징벌의 죽음인지, 심판인지를 알게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의 저주와 심판을 십자가를 통해서 체험케하십니다. 이건 내 몸을 천동가리를 내어도 내 죄를 갚을 길이 없어죠. 내가 맷돌에 눌려서 극한의 고통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에게서 떠나지를 못해요.
‘아야, 아야’라고 하지만 아픈 게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어요. 나를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십자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어요. 십자가 죽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다이루었다” 너 저주받아야 하는 거, 내가 십자가로 다 알려줬잖아. 너는 저주받을 몸으로 태어났고 평생 저주받을 몸으로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안 돼. 너는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드러난 이상은 너는 너를 버려야 해. 너를 폐기처분 해야 해. 폐기처분 하려면 신비로운 성령이 와야 해요. 주께서 마련한 새로운 몸이 와야 해요. 그래서 우리 몸은 이방인, 다가오는 몸은 주님의 진짜 준비된 이스라엘의 몸, 그 신비로움, 그 누락된 신비로움, 그게 골로새서에서 나옵니다. 3장 2~3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예수님과 함께 새언약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뭐가 우상인 줄 알아?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은 곧 네 몸에서 나오는 탐심이 우상 숭배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상 숭배자였던 겁니다. 이방인 아모리 족속이었고, 가나안민족이었습니다.
율법이 와서 그들과 떨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감을 잡았어야 해요.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와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율법이고, 율법의 완성은 아예 우리 속에 쑥 들어와 버려요. 우리 안에 자리 잡아요. 주님의 내 살과 내 피가 자리 잡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마신 하나님의 쓴 잔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뭘 해도, 간음해도, 살인해도,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저주받아야 할 진짜 십자가 죽음을 안, 그러한 지옥갈 몸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을 도리어 주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