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진주 조개

아빠와 함께 2024. 1. 28. 20:28

진주 조개 

2024년 1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4-15

(16: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16: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일관성이 없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들이 ‘나를 위한 천국’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위한 천국’입니다. 인간을 위한 천국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서 변경을 시도하십니다. 즉 끊임없이 인간 쪽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천국’으로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으로 맹세를 꾸준히 해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모든 나라로부터 인도하신 하나님’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전에 살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최종적인 하나님의 맹세의 완성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곡해와 오해와 죄를 위하여 마치 주님께서 끊임없이 약속과 맹세에 변경을 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겁니다. 그러나 이미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맹세는 사람을 상대로 주시는 맹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히 6:13-14)

하나님께서 아무리 정확하고 상세하게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을 한다할지라도 인간들은 ‘자기를 위한 구원, 자기를 위한 천국’을 고려해서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출애굽기 12:13에서,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 ‘피’는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을 잡아 그 짐승의 피를 내어 그것을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하나님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문제는 그 피가 양의 피가 아니라 다른 피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이 피가 사람의 피라면요?

결국 양의 피가 사람의 피가 되는데 이 와중에 이스라엘의 오해와 곡해와 범죄가 추가적으로 도입되어야 할 절차가 필요합니다. 왜 그래야만 될까요? 그것은 참된 이스라엘은 ‘사건의 종합’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실은 사건의 중첩입니다. 이미 벌어지고 발생된 사건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제각기 반응을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건은 어디까지 우리 인간을 밀어붙이는가 하며는 우리가 우리 존재를 포기할 때까지입니다. 세상을 보던 안목이 자신이 던지신 맹세 따라서 오신 하나님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안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도 동일한 원칙이 있습니다. 처음 출애굽기 20:11에 나오는 안식일 지킴의 전제는 천지창조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반면에 신명기 5:15에 나오는 안식일 준수의 전제는 다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그만큼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시는 그 창조세계는 그냥 굴러가시도록 방치하시지 않고 따라서 같이 활동입니다. 죄악 중에서도 하나님의 자기 맹세 이루시는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분명 첫 번 유월절 날에서는 ‘양’이라는 짐승의 피 맞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보면, 이 피는 더는 양의 피가 아닙니다. 사람의 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하나님의 이러한 자기 작업 노선에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같이 편승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일의 사건 안에서 잘리고 잘리고, 토막나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모두 사건화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자꾸만 사건을 일으키고 토막내시는 취지는 오로지 ‘다윗의 등불의 존재’에 있습니다. 열왕기상 11:34-36에 보면,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또한 열왕기하 8:17-19에 봐도,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등불’의 부각됨이 유다의 존재가 위태로울 때만 가능한 겁니까? 다윗의 등불을 미리 작동해서 나라가 위태롭지 않도록 미리 대비하면 되지 않을 겁니까? 그것은 ‘다윗의 등불’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든든한 이 사건 앞에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도마 위의 횟감처럼 철저하게 토막나서 존재 그 자체의 의의가 헤체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흐름에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마저 참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꾸만 ‘자기를 위한 천국’이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극단까지 몰고 가십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난 선지자는 기존 존재자들이 ‘자기 존재를 위한 하나님과 천국을 내다보는 것’을 모두 부정하는 모습으로 활동합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요 1:20-22)

유대인들은 선지자 세례요한에게 잘못된 질문을 한 겁니다. “너는 ∼ 이냐?”고 물었던 겁니다. 인간에게 존재에 대해 묻는 것은 옳은 질문이 아닙니다. 질문자들이 평소에 남들 앞에서는 ‘나는 ∼이다’는 식으로 대외 관계를 가진 습관 때문에 이 사람들은 세례 요한에게 물었던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세례 요한 답변은 이러합니다. “나는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저 기능인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진주라면 우리 성도는 그 진주를 배양하는 진주조개에 해당됩니다. 즉 우리 성도는 주님을 드러내는 바깥 껍질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매 삶은 철저하게 가벼워야 합니다. 시킨대로만 살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순식간에 사라질 우리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행하지 않음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8강-예레미야 16장 14~15절(진주 조개)24012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4~15절입니다. 구약성경 1077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의 말씀의 형태를 바꾸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껏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이 살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희를 끄집어내었다”라고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마라”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반대로 너 자신을 애굽 땅에 살아야 마땅한 인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고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추방하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고 우리의 본성에 합당한 조치를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달리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

천국은 내가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고 고집부리면 하나님의 일관성이 다 깨져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랬다저랬다 해서 왜 헷갈리게 만듭니까. 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해준다고 해서 믿었는데, ‘이제 와서 변형시켜버리면 나는 또 하나님이 변형한 것을 믿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고민이 되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데,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생각을 바꾸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생할 때 우리가 고생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네가 고생한 현장에서 내가 먼저 고생을 받았다는 식으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우리 인간들의 영웅담에 보게 되면 인간들의 구원자는 인간들은 고생해도 구원자는 고생하는 곳에 있지 않고 바깥에서 우리를 건져주는 양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뭐냐 하면 ‘네가 아직 고생한다, 고생한다고 하지만 너는 아직 너의 자리 못 찾았다. 네가 나만큼 고생해야 그게 네 자리야’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요. ‘어디서 엄살이야. 어디서 엄살이야, 내 앞에서. 네가 고생을 알아?’라고 하시죠. 마치 네가 게 맛을 아느냐는 것처럼. 네가 고생이라는 것을 알아? 네가 인생을 알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속하지 않고 사건 안에 속하는 방식을 쓰십니다. 이게 지금부터 약간 어려운데요, 크게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어려울 수도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안식일에 대해서 계명이 바뀌어요. 출애굽기 20장에 모세가 계명 받을 때 안식일과 신명기에서 주신 안식일 계명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면, 출애굽기 20장에서 안식일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너에게 안식일 이야기할 때 11절에 보면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이 그날을 쉬었던 것처럼 너도 쉬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인데, 신명기 5장 14~15절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었는데 이끌었으니 안식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멈추고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자기 내부에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할 목표점을 향하여, 하나님 본인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6장에서는 굉장히 함축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맹세’라는 거예요. 13~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하나님은 이야기할 때 항상 일방적으로 이야기해요. 우리의 협조를 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해놓고 스스로 그것을 지켜나가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맹세했다”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맹세했구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내가 너에게 맹세한 것이 아니고 나는 나에게 맹세했다”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둘로 나뉘는 겁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그 맹세에 대해서 성취하는 하나님을 이 땅에 따로 보내서, 주고받고, 주고받고에 눈여겨보라는 거예요. 약속을 주신 하나님과 약속을 실천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오가는 그 편지, 고유한 사랑, 그것에 대한 신뢰, 그것을 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점을 보지 못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오면 그걸 전부라고 여겼던 겁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에 나올 때,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어요. 발랐더니 다른 집에는 맏이가 다 죽었는데 이쪽에는 맏이가 죽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상당히 기적으로 여기고 고맙게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왜냐 하면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맹세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안다고 할지라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을 쳤다는 겁니다. 너희들을 구원하려고 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너희들이 상대 못 하는 애굽과 상대해서 애굽의 모든 신과 그 땅을 친 거예요.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 자체를 하나님께서 이제는 어디까지 키우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까지 애굽땅화 시켜버리는 겁니다. 피의 정체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어요. 유월절 피, 짐승의 피만 드러났지, 짐승의 피는 모형이거든요. 이 모형이 실제로 하나님의 피, 이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오거든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피로 교회 삼았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인간의 피가 아니고 유월절에 짐승의 피가 하나님의 피가 될 때까지, 그 절차가 남아있었던 겁니다.

그 절차에서 하나님이 자기가 던진 맹세를 스스로 일궈나가고 전개해 나가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 이용하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것이 필요한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술을 먹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를 잊지 않기 위해서 술을 먹어요. 자기 자신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그런데 술을 왜 먹냐고 물으면 자기를 잊어버리려고 술을 먹는다고 해요. 인간들은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술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하는 일이 인간들은 끼어들지 못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사건의 종합입니다. 인간은 자기 육신을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그러면 주님이 주신 구약의 역사 이스라엘, 그러니까 누가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고 묻거든 도마에 횟감 놔두고 사건으로 하나하나 토막을 내는 거예요. 토막을 내버리면 이스라엘의 존재는 날아가고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개입한 사건의 종합, 사건의 중첩으로써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오늘 본문 이야기는 수요일에도 언급했지만, 제2의 출애굽이에요.

전에 첫 번째 출애굽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이야기합니다. 뭐, 당연하지요. 유월절 피를 발랐더니만 살았잖아요. 그런데 첫 번째 출애굽에서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어요. 애굽을 치던 그 사건이, 이제는 자기를 애굽으로 생각해서, 우리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생각해서 친다는 생각을 조금도 못 했던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한 아들은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피로 살려낸 그 아들은 피로 죽은 그 피가 묻힐 때 그의 아들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사건이 우리를 일단은 토막 내는 겁니다. 토막 내는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풀리지 않는 일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의문점이 새록새록 등장하는 맛을 성경이 주는 겁니다. 이건 어떻게 되지? 이건 어떻게 되지? 이렇게 점점 더 빠져들어 가죠. 그중 하나가 열왕기상 11장 34~35절에 나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여기서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전체 이스라엘을 위한 등불을 안 주셨느냐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이 열두지파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등불로 삼지 않고, 이 열두지파에서 두 지파, 사실상 두 지파가 한 지파지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합쳐져서 유다 지파가 됩니다. 왜 이렇게 쪼개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등불을 내 앞에 있게 하겠다고 왜 하셨는가.

이것은 뭔가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두고 솎아낸다는 뜻이 하나님께서 굉장히 강렬한 겁니다. 다가 아니고 뭔가 사건을 통해서 잘라내고, 잘라내고, 무를 자르듯이 잘라내고, 인간 속에 없는 것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진주조개잡이. 조개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개 안에 진주를 하나 키우기 위해서 진주조개잡이에 나서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외곽에 죄악 된 인간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짜 진주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죄 안에서 보석을 만드는 방식으로 천국을 만드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잘려야 할 외곽, 바깥에 외부 껍질로 우리가 동원된 겁니다. 껍데기는 버리고 알갱이는 취하는 방식. 그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 방식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등불에 관한 것인데, 열왕기하 8장 19절에 “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벌써 분위기가 싸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유다가 너무 범죄 해서 하나님께서 여호사밧 왕에게 징벌을 내려도 되는데, 여호람도 그렇고요.

하여튼 아합의 딸로 인하여 북쪽이고 남쪽이고 전부 다 멸망해도 되는데, 유다를 벌하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이 이야기를 우리가 딱 듣는 순간 뭘 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하시는구나. 우리가 벗겨낼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여러분이 땅콩을 먹을 때 껍질을 벗기고 먹잖아요.

그 땅콩껍질을 생각한다면 그 껍질이 인생이 얼마나 편하고 가볍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할 때, 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편히 쉬게 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을 집어넣고 그것이 하나의 보석처럼, 진주처럼 자랄 때, 우리 것은 시효가 만료되었으니까, 이제 쓸데 다 썼으니까 너를 가볍게 버릴 때, 그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준 맹세거든요.

이게 약속이란 말이죠.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사용하시고 우리를 버릴 때 버린다는 그 가뿐한 마음, 그것을 뜻하는 거예요. 두 번째 출애굽은 우리를 출애굽 시키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출애굽 하는 겁니다. 저는 신학교 때, 이 대목을 보고 제가 많이 놀랐어요. 아무도 이것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이건 크리스마스 설교에도 자주 나오는데, 마태복음 2장에서 요셉이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할 때, 15절에 “주께서 선지자(호세아)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라는 이 대목을 어느 주석 책에서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낸 거예요. 뭐가 애굽이냐? 현재 유대 나라가 애굽이에요. 그리고 애굽이, 예수님이 가 계신 그곳이 천국이고 그게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위치이동을 할 줄 몰라요? 왜 내 위치를 고수합니까? 껍데기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 그러면 여기서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요한복음 1장 20절에 나오는 말씀, 이 말씀도 참 생각할수록 애매하게 어려운 말씀입니다. 19절에 먼저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이거 질문이 잘못되었어요.

네가 누구냐. 우리도 이런 식으로 살아가지만 절대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안 돼요. 네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그 묻는 바리새인들과 레위인들이 평소에 타인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나를 정립하는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들이 볼 때 ‘나는 무엇이다’라는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너도 나와 똑같을 거 아냐’라고 하는 거죠.

‘나는 레위인이고, 나는 바리새인이고, 나는 유대인의 지도자인데, 나는 이러한데, 그다음은 네 차례야. 너는 누구냐?’라고 물은 거예요. 요한이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뭐라고 대답하느냐, ‘아니다’라고 답변해요.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나, 그리스도 아니야. 나, 선지자 아니야. 나, 엘리야 아니야’라고 했어요.

특히 이 대목, ‘나, 엘리야 아니야’라고 했는데, ‘너 엘리야야?’라고 하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세례요한이 엘리야가 아닙니까?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보고 “세례요한 봤지? 엘리야야”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엘리야라고 했는데 세례요한이 자기는 아니라고 했어요.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사전에 의견조율이 잘 안 된 겁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나는 누구라는 말을 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시몬이 베드로로 바뀌듯이, 우리는 ‘내가 누구다’라는 그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면 나는 저번에는 시몬 이지만 지금은 베드로로 바뀌면 되는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누구냐가 아니라 나는 어떤 일을 부여받았다가 되는 거예요.

‘나는 누구다’라는 것은 옛것으로 끝났어요. 이제는. 존재로는 끝났어요. 사건에 의해서 해체가 되어버리면 주님의 사건이 나에게 어떤 기능을 주는 겁니다. 이 사건 했다고 나는 누구라고 이야기하면 안 돼요. 나는 목사라고요? 언제까지? 지금까지 해서 목사? 다음 주는? 보장 없어요. 보장 없습니다. 존재는 주님밖에 없어요. 왜 건방지게 지가 ‘나는 누구다’라고 해요?

세례요한은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런 질문에 나는 답할 게 없다. 나는 엘리야도 아니야. 선지자도 아니야’ 주님은 세례요한에게 선지자라고 했는데 본인은 아니에요. 나는 그리스도 아니다. 그러면 너 뭐야? 소리라는 거예요. 소리. 여기서 물리학의 상전이(相轉移)라는 개념이 들어갑니다. 상전이 - 물질이 조건에 따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뀌는 현상《융해·고화·기화·응결 등등)

고체된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요, 물이 끓으면 기체가 돼요. 이걸 물리학에서는 상전이라고 합니다. 고체, 액체, 기체.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우리 성도와 똑같아요. 성도가 물세례, 주님의 피 세례를 받으면 액체가 되고, 성령을 받으면 성도는 ‘그대 이름은 바람~바람~바람~’ 존재가 해체되고 마는 겁니다. 바람은 기능이에요.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를 본인이 결정하면 안 돼요.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이걸 알았다는 겁니다. 나는 소리다. 나는 하나의 파동이다. 물리학에서는 파동.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흔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흔들어대면 나는 흔들리며 갈 뿐이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나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온 말씀이죠.

저에게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간단합니다.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내가 거기에 대해 평가하지 말고, 남들이 어떻다고 평가받지 말고, 여러분들이 정말 성도라면 주께서 여러분들에게 시키는 일이 있을 겁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사건의 조합이기 때문에. 사건의 종합이고, 조합이거든요. 존재는 주님입니다. 우리는 기능입니다.

주님의 이스라엘 됨을 드러내는 우리가 주님의 지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애굽 사람 되게 하시고 다시 우리에게 피를 집어넣어서 피의 기능, 온전한 어린양, 어린양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집어넣어서 피의 기능만 발산되게 하는 우리는 주님의 껍질에 불과한 것을 여러분이 편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이 뭐라고 하니까 우리도 뭐 된 줄 알았습니다. 남들에게 보일 만한 것을 우리가 미리 장만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야 기가 안 죽고, 그래야 사람답게 살고, 그래야 대우받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 이 모두가 마귀의 장난인 것을 알고, 우리는 아니라고만 이야기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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