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과 전체
2024년 1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5-18
(15: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5: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5: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예레미야가 하소연하는 것은 구약의 욥과 유사합니다. 밤낮으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선지자가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배제되는 느낌을 받아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합니다. 우선 예레미야가 하나님에게 제시하는 정상적인 관계는 이런 겁니다.
주의 이름으로 받은 자가 바로 본인이라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먹게 된 것도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라는 뜻이고 되고 따라서 선지자가 곤란에 처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야 앞뒤 상황이 맞아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것은 선지자이 자꾸 난관에 처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무슨 해결되지 않는 게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의 한계는 곧 모든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의구심을 신약의 사도는 어떤 식으로 풀어내는가를 보세요. 고린도후서 4:10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즉 ‘나도 살고 메시야도 살고’가 신약시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이 나의 이름을 그냥 가만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레미야가 고백하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실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사적인 자격으로 주의 이름을 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은 남과는 진정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을 만날 때, 타인도 나를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대하는 나는 타인의 입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에서 만납니다. 타인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으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누적인 과거사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환상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그 누구를 만나든지 실은 자신의 환상과 만나는 경우가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사적인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는 이기성을 바깥으로 뒤집어 나와서 나의 순수함을 뎦어버리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우리 안의 나의 불결성과 불손함을 겉으로 노출시키게 됩니다. 늘 자기 자신만 상대해서 타인으로부터 이익을 뽑아내려는 불온성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의 기능을 작용시킬 때에는 인간 개인에게 결코 생략할 수 없는 활동을 이용해서 장착시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먹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과 행동의 바탕에는 먹는 행위가 놓여져 있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요. 먹을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따라서 사람들은 돈 버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를 위하여 먹는 이 행위의 습관에 따라서 하나님 말씀도 먹어서 내 것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먹으니 도리어 사적으로 자기 처신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신약에 와서 보면, 인간이 말씀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위하여 인간이 동원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항의 물고기를 살리기 위해 물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여전히 사적인 세상 관점이 됩니다. 정답은 전체를 위해 개인이 있습니다. 창세기 1:2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면 물 속 세상을 관장하고 있는 자세가 창조 직전의 상태입니다. 모든 부분과 개인적인 것은 전체 밑의 사적입니다. 이 취지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견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기 위해 결사적으로 예수님을 뒤쫓아 봅니다. 그것이 예수님들이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대해서 시비거십니다. 그런 마음자세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일서 4:12를 살펴봅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즉 모든 인간들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는데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자신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누가복음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여기에 보면, ‘너희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게 아닙니다. ‘너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사적인 판단과 견해를 그냥 지니고 있는 한 ‘너희’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의 과거 환상의 연장과 확장을 위한 타인일 뿐입니다.
즉 개인적인 감정에서 전체로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향한 마음이 자꾸만 식어지고 있고, 누구를 향한 기억을 자꾸만 지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름 타인에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인 진정으로 ‘너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기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이 세상을 광야로 설정하시고 수시로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오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말씀을 먹는 식에서 말씀이 자신을 먹어버린 상황과의 차이를 보게 하십니다. 밑에서 위로 올려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안에 들어오신 말씀의 위력인 것을 알고 주님께 감사케 하는 겁니다.
이로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이름이 끊임없이 지워지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전부가 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벌어진 일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5강-예레미야 15장 15~18절(개인과 전체)23010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지금 예레미야가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욥의 재탕 같습니다. 자기가 보기에 하자가 없는 자기 모습, 오직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만 생각하는데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나에게 고통만 주어지더라. ‘하나님만 생각하는데, 왜 저에게 고통이 주어집니까?’라고 욥이 하소연을 하듯이, 지금 예레미야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지자의 하소연과 고통은 이들 선지자가 메시야가 아니라는 점을 더욱 부각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데, 계속 알아가고 알아가도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내가 왜 메시야가 될 수 없는가. 왜 나는 내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 못 하는가. 왜 중보기도 해도 가족들이 교회 나올 생각을 안 하는가. 분명히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이 하나가 돼 있는데, 내가 예측하고 예상한 대로, 주변에 일어난 상황이 마치 내 뜻을 의도적으로 거슬려야 한다는 식으로 사태가 일어날 때, 여기서 인간의 궁극적인 회의는 내가 계속해서 하나님을 어디까지 믿음직하고, 어디까지 믿어야 하냐는 자기 회의에 빠지겠지요.
‘저는 할 도리를 다했는데, 주님 쪽에서 반응이 없으니까 내 쪽에서 하나님 믿는 것을 철회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라는 욥의 이야기나, 예레미야에 대한 사태나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예레미야의 문제점이 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문제점을 안다고 해서, 예레미야가 지옥 간다든지 성도가 아니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의심을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의심과 회의를 되풀이해야 할 그러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똑같이 경험하게 하는 거예요.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은 주님의 소관에 달렸는데, 우리로 하여금 저 땅, 지옥에 보냈다가 다시 건지고, 집어넣었다가 다시 건지고 하는 식으로 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라는 것의 증인이 아니라, 주께서 일방적으로 하신다는 것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가질만한 것들을 전부 다 포기시키게 만듭니다.
분명히 오늘 은혜받았는데 내일 가면 저쪽 지옥으로 가 있는, 천하에 낙심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던졌다가 끄집어내고, 지하 속에 갔다가 천국으로 올려내고, 우물에 갇히게 했다가 빼돌리는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나의 새로움이 아니고 말씀 자체의 새로움으로 우리를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와요. 16절에 보면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라는 이게 잘못이에요. 주의 이름은 나를 비켜 갑니다. 주의 이름은 나를 비켜 갈 뿐만 아니라, 주의 이름은 나의 이름을 살려두질 않습니다. 그리고 살려두지 않는 정당성이 주의 이름 안에 들어있어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뭘 오해하느냐 하면 주의 이름도 살고, 나의 이름도 살고, 같이 살면 되지 않느냐는 계산을 하는 거예요. 이게 욥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비로소 구약에서 몰랐던 정답을 고린도후서 4장에서 사도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요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상이 우리로 하여금 죽을 육체임을 계속 각인시켜주는 거예요.
마치 물고기가 물 없이는 못 살잖아요. 그런데 물고기가 어항 속에 오래 살다 보면 물이 살아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못 하고, 나에게 필요한 물이라고 주객을 바꿔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물고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물을 줬다는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물이 물 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겁니다.
물고기 이야기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창세기 1장 2절에도 마찬가지예요.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나오고 그다음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말을 더 정확히 하면 수면 위에 운행하는 거예요. 수면이라는 것은 아주 쉬운 예시가 일본 동해 쪽에 진도 7.6의 지진이 있었잖아요.
그 지진이 일어났을 때, 많은 집이 부서지고 사람이 죽었는데, 거기에 사람들의 직업과 성격, 인품같은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지진에는. 왜? 동일한 환경 안에 있기 때문에. 전체가 흔들리니까 그 사람이 어느 대학 나왔느냐가 전혀 상관없이 같이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이게 성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개인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만 인정해서 일을 일거에 처리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개인은 뭐 하느냐. 개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허락했는가. 전체를 말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허락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먹는 일이에요. 먹는 일. 인간은 개인이 살기 위해서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는 일을 합니다. 이게 먹는 일이에요. 고기를 잡던지, 채소를 키우던지, 이 마지막에 도착지점은 내 입에 들어가는 거예요.
창세기 9장 4절에도 주께서는 그걸 이미 아시고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인간에게 가장 주요 관심사는 먹는 거예요. 수련회 호텔에 음식 안 나오면 안 갑니다. 먹는 것이 시원찮다든지, 옛날 수련회처럼 본인이 직접 국에 미나리 몇 개 집어넣고 달걀 한 개 풀어서 열 명이 나눠서 묽은 국물만 먹고 그러면 안 갑니다. 항상 먹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은 이걸 아시면서, 인간이 가장 개인적이고 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이 먹는 것에 인간이 치중한다는 것을 이걸 염두에 두면서, 전체적으로 먹는 것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합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에서 예레미야는 뭐냐면, 말씀을 먹었다고 되어있어요. 여기 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예레미야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내 안에 내가 말씀을 장악했다고 여기는 거예요.
이게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전체 위주로 기능하는 말씀이 나의 사적으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을 먹는 것을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아요. 아주 어렵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남과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인과 만날 수 없습니다. 순서가 이렇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남과 만난다. 두 번째, 남은 나를 만난다. 세 번째, 인간은 남과 만나면서 환상을 만난다. 따라서 인간은 환상의 인간을 만난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인간을 만난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 나를 만나요.
타인의 인적사항은 관계없어요. 나는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과거로부터 형성한 이 환상을 얼마나 구체화시키는데 필요하냐를 따져서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판단해버려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남과 만날 수가 없어요. 환상과 만나기에 급급합니다. 그렇게 환상을 만나는 목적이 뭐냐. 맛있는 거 먹기 위해서. 더 맛있는 거 먹기 위해서 돈이 있어야 해요.
타인을 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나에게 떨어질까를 생각하죠. 옛날에 실제로 나도 본 이야기인데, 어릴 때 이야기예요. 괘종시계가 있잖아요. 크고 기다란 시계. 추도 길게 늘어져서 좌우로 흔들리는데. 괘종시계가 그렇게 있는데 집에 어른이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어요. ‘얘야, 시계 밥 줘라’라고 하니까 아이가 진짜로 밥을 가져와서 괘종시계 아래에 정성스럽게 놔두면서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볼 때, 시계에게 밥을 주라고 하니까, 아이는 추가 나오는 그 구멍을 입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밥을 집어넣으면 시계가 가는 줄 알았지요. 어디 아프리카도 아니고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모든 언어는, 그리고 항상 모든 행동은 어떻게 밥으로 흘러들어오느냐와 관련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는 그 사적인 것을 어떻게 하느냐.
전체로 확산을 시켜요. 사적인 것을 전체로 확산시킵니다. 신약에 그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46~47장에 짧게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설교하시는데, 바깥에 모친과 동생들이 와있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바깥에 모친과 동생들이 와있다고 말하는 순간 48절에 예수님이 다 들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동생들 뻔히 와있는데도, ‘누가 내 모친이래?’라고 하신 거죠.
제자들은 예수님과 사적인 관계, 혈육적인 관계를 논해서 모친과 동생이 왔다고 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그것을 철폐시켜버립니다. 5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내 아버지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죠. 예수님만 아시는 예수님 아버지의 말씀을 먹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오해를 수정해나가시는 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먹는 그 말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의 마음을 뒤집기를 해요. 속에 있는 마음이 바깥에 나오고, 바깥으로 나와서, 그 바깥에 남들 보란 듯이 사적으로 원하는 마음을 속에 있는 이 마음이 도배하는 그런 기능으로 말씀을 줘버립니다. “네가 내 떡을 먹었지? 오병이어 떡을 먹었지?” ‘먹었습니다’ “어땠어?” ‘배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잘못된 거야”
주실 때는 언제고, 또 주신 것을 먹었다고 그걸 가지고 닦달하시죠. ‘먹었으니까 우리는 주님께 정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도자로 삼고 싶은데, 차기 대선에 나가시면 어떻습니까?’라는 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할 때,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예요. 주께서 주시는 먹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속에 들어있는 죄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용도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만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만나의 정신, 뜻. 뜻을 하기 전에 신명기에 나오는 만나를 볼 텐데요. 거기를 보기 전에 한 군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12절에 어떤 점이 중요하냐 하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이 나와요. 이로써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간증 집회는 다 날아갑니다. 일거에 다 날아갔습니다. 꿈에 천사를 보니 예수님 키가 180이고, 미남이고, 턱수염 나고, 그런 거 전부 다 날아가요.
요한 1서 4장 12절에 말씀은 어느 때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만났다는 그 사실 만으로 결코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사적으로 은혜받은 것은 인정하지만, 이게 가족이 안 돼요. 사도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다. 참 좋지요. 좋겠네. 그런데 삼층천에 올라가 본 그 경험이 타인으로 넘어오질 않아요.
사도바울이 그걸 줄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메시야가 아니에요. 본인 이름으로 남에게 자기 이름을 걸고 줄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죽이고, 그 죽이는 능력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주의 이름으로 경험한 내가 죽고 난 뒤에, 동일하게 그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능력이 임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 가운데서는 “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의 패밀리(Family)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철저하게 개인 구원이 성립 안 되도록 주께서는 말씀 자체에 그것을 주시는 거예요. 만나를 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를 줄 때도 개인적으로 욕심내서 이틀 치를 가져가는 사람은 안됩니다. 다 썩어버립니다. 만나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내 사적인 구원 욕구를 이루기 위해서 만나를 주는 게 아니에요. 말씀도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개인들이 항상 자기 위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형편에 있고요.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기 하나 살기 위해서 계속 먹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중요시하는 먹음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개인이 전체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주께서 일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너를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식어가고 있어~ 하지만 잊지 않았지~ 수많은 겨울날 감싸왔던 너의 손을~ 너를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식어가고 있어~’ 이거 뭐 어쩔 수가 없죠. ‘하지만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오늘 같은 날에 갑자기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르네~’ 2절 가사를 보면 ‘너를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이상하죠. 지워지고 있는 그 기억은 안 지워지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잊지 않았어~힘겨운 어제들~나를 지켜주는 너의 가슴~’ 장필순이 불렀던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를 때’입니다.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수많은 겨울들
나를 감싸 안던 너의 손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엔 또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 줘
널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
하지만 잊진 않았지 힘겨운 어제들
나를 지켜주던 너의 가슴
이렇게 내 맘이 서글퍼질 때면 또다시 살아나
그늘진 너의 얼굴이 다시 내게 돌아올 수 없는걸
알고 있지만
가끔씩 오늘 같은 날 외로움이 널 부를 땐
내 마음속에 조용히 찾아와 줘
이처럼 인간들은 남을 못 만나요. 그저 너를 향한 나의 감정과 만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밥을 먹고 하는 짓이 이 짓이에요. 끝까지 자기 지키는 거 외에는 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을 벗어나지도 못해요. ‘그렇게 살면 되지. 그걸 뭐 시비를 거느냐’라고 하겠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누가복음 17장 21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네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요, ‘너희’ 안에 있어요. 너희. 그러니까 자기 구원에 미쳐서 교회 나왔던 사람에게는 이건 뭐 평생토록 교회 청소하고 지옥 가는 그런 사달 날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우리 인간에게는 ‘너희’가 없어요. ‘너희’가 있지만 그건 나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너희’가 필요했을 뿐이죠.
다시 말씀드릴까요? ‘너를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식어가고 있어~ 너를 위한 나의 기억이 이제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어~하지만 잊지 않았어~힘겨운 어제들~나를 지켜주는 너의 가슴~’ 이게 뭐예요? 나는 그렇게 싸가지 없는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하죠. 이건 보통 문제 아니죠. 나는 안 지워지고, 나의 감정에서는 탈출이 불가하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너희를 원하고.
각자의 이름 말고, 한 사람의 이름. 주님의 이름 안에 집합되기를 원하고. 나는 거기에서 방해자가 되고. 바로 그것을 수정하는 방법은 신명기 8장에 나옵니다. 내가 40년 동안 너희를 광야 길로 걷게 했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40년 동안 걷게 하면서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다른 사람) 너를(다른 사람) 먹여 살렸다든지, 너 때문에 내가 살았다든지, 네가 있어서 내가 용기를 내고 살 힘이 생겼다든지, 그런 것들을 일체 모조리 다 없애버립니다.
왜냐 하면 12명의 정탐꾼 가운데서, 다수가 아니라, 극히 적은 두 사람의 정탐꾼대로 하나님은 일을 밀어붙입니다. 소수자예요. 두 사람이에요. 갈렙과 여호수아. 대다수는 뭐냐. 자기감정에 미쳐버렸어요. 과거의 자기 판단에 의지했습니다. ‘하나님, 일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 지금 이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죠. 원망을 유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허락했고, 우리는 이 광야같이 원망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수 없게 만들어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에서 먹는 거, “내 살과 내 피” 주께서 먹으라고 하는 것과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과 차이점을 광야에서, 그 차이점을 부각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내 이름이 방해되는 이름으로써 하나님께 소환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수학에서 직선을 표현할 때는 반드시 두 지점에 점이 있어야 해요. 두 점의 최단 거리가 등장하지 않으면 직선이라는 말이 정의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시시한 거 딱 떼고, 일 대 일로 직선으로 보자. 주님은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이에요. 이래도 네가 천당 가려고 설치냐. 왜 내 이름에서 네 이름을 포기할 수 없느냐. ‘주의 은혜가 오게 되면 우리는 포기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포기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오게 되면 우리는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해요.
올라갔을 때 구원받았다고 하고 내려가면 나는 지옥 간다고 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맨날 이런 식이에요. 은혜받았다고 해도 내일 가면 다 내려갔어요. ‘주님이 나에게 해준 것이 뭡니까?’라는 식이에요. 우리 마음 같으면 이러고 싶어요. 깜깜한 밤중에 아무도 내 얼굴 못 볼 때 볏 짚단을 지고 가까운데 사는 동생에게 볏 짚단을 가지고 가요. 동생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살림살이가 별로 좋지 않으니까 냉장고도 사주고, 반찬 사라고 돈도 좀 주고, 그렇게 짊어지고 갑니다.
그런데 동생 입장에서는 형이 식구가 너무 많아요. 결혼한 지 오래되어서 흥부처럼 식구가 많아서 살림이 어렵다 싶어서, 또 짊어지고 갑니다. 둘 다 모르는 채 지나치려고 했는데,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치니까 둘이 알아버렸어요. 이게 농심의 마음입니다. 그게 농심라면이에요. 우리는 뻔해요. 우리는 그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성경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세요. 결국 사랑하고 나면 남는 것은 사랑했는데, 말씀을 먹었는데, 왜 세상은 조그만 내 뜻을 거부하십니까. 예레미야의 고백이 그저 튀어나올 겁니다. 내가 나에게 메시야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메시야는 따로 있는 겁니다. 끝으로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전체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내가 방해물이 된다는 인식이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사랑을 더욱더 크게 느껴지게 만드는 계기로써 작동하면서 우리가 거기에 끼어있다는 거. 내 고집과 원망과 내 죄성이 주님의 은혜를 높이는데, 감사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이 사실, 얼마나 이게 고마운지요. ‘주여, 더 못된 인간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것이 우리의 말씀에 의한 기도여야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본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이, 결국 기적 같은 형제들이 발생했다는 그 사실이, 주님이 주신 사랑을 공유함으로 벌써 천국 생활이 시작된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