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부재와 임재

아빠와 함께 2024. 1. 18. 16:11

부재와 임재


2024년 1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4

(16: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6:2)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16:3)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16:4)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선지자가 독하게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백성들은 예레미야가 전하는 계시가 참된 하나님의 계시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오시는 뜻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 가운데 있는 선지자는 심한 학대를 받게 됩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충분히 이들의 불평이 이해됩니다. 사람이란 장래를 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희망이 자기 앞에서 펼쳐놓고 살 때에 살 의욕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말을 곧이 듣게 되면 희망보다 절망으로 막혀 있는 바가 됩니다. 그 어디에서 희망거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백성들은 더욱 더 자연스럽게 다른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하나님의 예언에 부합되는 대가를 그들이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야 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부드럽게 이끄시지 않느냐는 겁니다. 달래가면서 인도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기 중심의 부재’만 이해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창조했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로 인간들은 ‘무(無)’를 모릅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것은 자신, 혹은 자신의 것이 조금 전까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있음, 혹은 있었음’을 시시작해서 세상을 파악합니다.

그런데 장차 오실 메시야는 ‘있음’에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없음’에서 오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부재(不在) 의식’은 ‘하나님의 없음’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원래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막상 성전에 들어가 보세요. 거기에 하나님 없습니다.

성전 제일 깊숙한 구역까지 가도 거기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 계시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자체에 대해서 ‘환경 변화’를 조성하십니다. 즉 이 약속의 땅을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죽여버린 지역으로 변경시키십니다. “내가 여기 있기에 하나님은 내 판정을 피하는 식으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죽어버리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 자체는 살아도 죽은 존재요 부재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바로 그 분이 곧 ‘하나님의 계심’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만한 환경 조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미리 선지자에게 그 설계도면을 펼친 겁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그 계시의 효력은 인간으로서 근본이 되는 혈육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인 부부가 혼인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어린 자식은 부모가 저질러 죄의 대가를 태어난 삶의 환경을 통해서 고스란히 당하게 됩니다. 부모 입장이나 자식 입장이나 마음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환경의 성질은 신약에 되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4:15-19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은 미련없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버릴 수 없는 사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젖먹이 자식과 임신한 여인 안의 자식입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절망을 느끼고 대처하고자 해도 인간 육신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계시 안에 함유가 되면 부재의 고통을 살아 있으면서 그대로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건물로 표현하던 구약이 지나고 신약시대가 되면 고통받는 인간들의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2-23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의 방해자인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럴사한 교훈을 가지고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게 일들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속아넘어 갈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필요한 것은 주님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일의 방해자로 인식하는 자의 등장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일은 지정받은 ‘여호와의 종’에 의해서 홀로 완수하셨습니다. 이사야 53:7-8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여기에 보면, 참된 메시야 대해서 알게 되는 자는 일체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오해와 왜곡을 한 몸에 다 받는 분으로 등장하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배척해야 될 인물로 오십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가 가장 근본된 의식이기에 인생을 살면서 돈을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면 선방한 인생이라고 자부할 만 할 겁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기본은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들은 그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부재하지 않도록 만반의 노력을 기울리고 삽니다. 가장 근본적인 관심사는 이것으로 최종 남습니다. 따라서 메시야가 어디서 오시는지 어떤 분인지는 배부를 때나 나올 한가로운 생각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이 아닌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으로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메시야에 대해서 관심 두는 현상입니다. 사도행전 8:29-35에 보면, “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 세상이 이제는 성령으로만 메시야를 알아보는 환경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홀로 다 하셔서 백성이 천국가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임재를 저희의 존재가 방해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6강-예레미야 16장 1~4절(부재와 임재)2401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77페이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예레미야가 독하게 자기 백성에 대해서 계시하는데, 이거는 듣는 사람들이 비난할만한 정도의 심한 욕설에 가까운 계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레미야에게 계시를 들었던 사람은 예레미야에게 극한 반발을 자동으로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를 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에게 원망한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원망으로 통하게 되어있는 그 위치에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나 예레미야나,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자세로 이 땅에 나타나는지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퉁, 퉁, 퉁하고 보여주는 거죠. 보여주는데 모세와 예레미야의 차이점은 그 정도가 예레미야 쪽은 더 심화 되었다는 거예요. 더 짙어지는 겁니다. 그만큼 메시아가 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그런 뜻이죠. 메시아의 위치와 점점 더 가까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런 선지자, 모세나 엘리야 같은 여러 선지자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독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제발 독자적인 자기 인생을 구성하지 말라는 거예요. 독자적인 거. 나만 챙기면 된다는 그 독자적인 거. 이것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가 마태복음 7장에 나옵니다. 아무리 들어도 마태복음에 소개한 이 말씀은 지루하지가 않아요.

마태복음 7장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너희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독자적으로. 내가 시키지도 않은 행동 했잖아.

‘한국교회 썩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그것은 네가 독자적으로 생각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행동이란 말이죠. ‘교회 개혁해야 해. 바르게 살아야 해’라는 그것도 내가 시킨 일이 아니고 얼추 감 잡아서, 감 잡던지 귤 잡던지 아무튼 감 잡아서 한 해동이었잖아. 그래서 네가 다른 사람과 차이나는 개혁적이고 제대로 하는 주님의 종인 것처럼 과시하려고 너는 그런 수작을 부렸잖아.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느냐는 거죠. 시키지도 않았는데. 목사뿐만이 아니에요. 모든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옛날 선지자 되기 전에,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독자적으로 자기 민족은 해방되어야 하겠다는 정의감이 투철해서 과격한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거, 하나님이 일체 인정 안 했습니다. 왜? 독자적이기 때문에. 네가 시작한 일이잖아요.

선지자의 말은 왜 독자적인 것을 공격하느냐 하면 좀 비키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는 인식 자체를 좀 비켜줄래? 좀 꺼져줄래? 비켜라?’ 지금 누구를 밟고 있는지, 바로 메시아의 시체를 밟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다고 지금 알려주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 독한 말을 함으로써 메시아가 당할 고난을(물론 예레미야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유도했지요) 예레미야에게 쏟아지도록, 그리고 예레미야와 백성들 사이에서 바른 진리를 전한 사람과 진리를 듣는 사람들이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도록,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멀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유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인간의 혈통에 관한 내용이에요. 인간이 ‘고생했다, 힘들었다, 내 인생 욕 많이 얻어먹었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서로 탄식하고 과거 내가 고생한 것을 이야기하는데,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남에게 돈 안 빼앗겼거든 욕하지 마세요. 어차피 인간은 남는 것은 돈밖에 안 남습니다. 돈 그렇게 안 당했거든, 인생 선방한 겁니다. 그 인생에 고난이 있다고 할 수 없어요.

‘나는 남에게 이런 서러움 받았다’라고 해도 서러움만 받았지 돈 안 잃으면 됐잖아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돈으로 사는 거예요. 그걸 뭐 복음으로, 성경으로 자꾸 조작하고 위장하지 마세요. 여자분들에게, 특히 아가씨들에게 물어보죠. ‘어떤 남자를 원합니까?’ 그러면 여자들은 이런 남자를 원한다고 하죠.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인가요?’

여자들이 결혼한다고 하면 결혼 조건은 딱 한 가지예요.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이면 결혼할 용의가 되어있다는 겁니다. 누가? 내가. 내가 믿고 의지해요. 남자가 호구예요? 밥입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내가 내린 정답에 호응해줄 남자를 찾고 있는 거예요.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 만나서 나만 잘 되면 되니까.

그처럼 인간은 아무리 말씀을 듣고, 교회 나와도,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치울 용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치워지는 것을 본인이 용납할 수가 없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조치는 환경 자체를 덜렁 바꿔버립니다. 환경 자체를. 인간을 보고 호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호소해도 먹혀들 자들이 아니에요. 환경을 바꾸는데 그 환경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 2~3절에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라고 되어있어요. 남자와 여자가 먼저 있고, 그다음에 결혼해서 아기를 낳잖아요. 그러면 이런 관점이 어떤 관점이냐 하면 아기의 관점에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허점에 대해서 선지자의 계시가 여기서 도입됩니다.

‘아빠, 엄마, 왜 나를 낳았어? 나 이런 고생 하라고 이 땅에 낳았어? 아빠, 엄마가 되었으면 이 땅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어떻게 망가지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나를 낳았어야지요’라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항의를 부모에게 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괜히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4절에 보면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자식 입장에서는 이건 부모가 당할 죄를 괜히 나를 낳아서 부모가 당할 징벌에 나를 같이 집어넣어서 고생하게 했느냐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관심사는 자기 혈통밖에 관심이 없어요. 자기 자신밖에 관심이 없어요. 자,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없음과 부재의 차이를 알아야 해요. 없음과 부재.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죠.

무(無)라 하는 것은 아예 없는 거고요. 부재(不在)라 하는 것은 있었었는데 지금은 없는 거. 아예 없을 것 같으면 말할 것도 없는데, 뭔가 있었기 때문에 없어질 때의 그 고통을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계시를 통해서 일부러 그것을 이스라엘을 이끄는 에너지, 동력으로 만듭니다. 이 이스라엘을 그냥 메시아를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부재가 뭔지, 부재의 아픔이 뭔지, 이걸 알면서 메시아와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전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이란 것은 하나님의 임재(臨在)의 증거가 성전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건물 있지요, 그리고 눈에 보이죠. 이건 뭐 거짓말할 리가 없죠. 눈에 보이니까요. 솔로몬 성전 눈에 보이니까요. 건물이니까 보이잖아요. 보이는데 계시다는 거예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우리가 분명히 보면 건물만 있어요.

지성소 들어가 봐야 건물만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했다는 겁니다. 거기에 계시다는 거예요. 구라를 친다는 이 말이죠. 그게 말이 돼요? 이게 말이 안 돼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은, 임재(臨在)의 반대말이 부재(不在)거든요, 임재와 부재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옛날에 제가 교회에 왔을 때, 여자 전도사님이 청소를 강대상 바로 앞까지만 하고 이 강대상 청소를 못 했어요.

여자는 강대상 올라가지 말라고 해서 청소를 못 하고, 사찰 집사가 이 강대상 청소해요. 남자기 때문에. 사찰 집사 부인은 안 돼요. 여자기 때문에. 처음에 나는 그게 왜 그러한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댐이 구멍이 나면 네덜란드의 댐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에 손을 넣어서 막아야 해요. (네덜란드의 댐 붕괴를 막은 용감한 소년 이야기) ‘의심하는 내가 잘못이야’

그런데 이제 보니까 부재(不在) 하는 것과 무(無)를 내가 혼동했어요. 아예 없는 것과(사실 아예 없다는 말은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주께서는 있음에서 없음으로 바꾸고 그래서 옛날 있음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만듭니다. 지금 가장 있는 게 누구냐 하면 나예요.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걸 어떻게든 부재로 바뀌어야 해요. 이렇게 해서는 너무 딱딱하니까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가사에 기도에 관한 가사가 있어요. 제가 1절과 2절 가사를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래 제목은 ‘사랑의 기도’이고 김수정 씨가 불렀어요.

천상에 계신 이여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그 사람을 사랑하니

그이를 내게 주소서

이내 마음 진실하니

이내 사랑 믿으소서 (하나님에게 내 믿음을 믿어 달라는 거죠)

그이의 불행한 모든 허물을

목숨 다 바쳐 사랑하리니

도와주소서 아직은

그 사람이 어둠 속에 울고 있나이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굽어보소서

내 가슴엔 그 사람의

이름만 가득합니다 (어쩌라고)

사랑으로 생긴 슬픔

내 것으로 받으리니

사랑을 맹세한 내 입술로는

세상 누구도 허물치 않으리

간청하오니 소중한

인연으로 살게하옵소서

간절하지요. 간절한 기도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부재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차라리 그 사람을 몰랐었더라면, 지나치고 몰랐었더라면 ‘누구세요?’라고 끝났을 문제를, 내가 그 사람을 알았던 순간 내가 믿고 의지할 사람을 만났으니까, 나의 존재가 줄곧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부재를 무서워하는 거예요. 이미 그 남자를 안 순간, 그 남자를 잃을까 너무 무서워서 내 쪽에서 내놓을 카드를 다 내놓는 거예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그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허물을 내 목숨 바쳐서 내가 내 것으로 인수인계할 테니까, 그저 목숨 바쳐 사랑할 테니까, 그 사람을 살려달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서 울고 있다는 거예요. 참 열녀 났다~열녀 났어. 그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서 울고 있으니까 내가 아니면 그 사람을 구원할 자가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2절 가사에서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좀 살펴달라는 거예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내 가슴 속에 그 사람만 가득 찼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내가 사랑함으로 인해 또 슬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슬픔도 내 것으로 내가 받아주기로 작심했습니다. 사랑을 맹세한 내 입술로는 내가 사랑만 있다면 어떤 것도 허물치 않으리니, 간청하오니, 소중한 인연으로 살게 하옵소서. 이런 노래예요. 오늘 과제입니다. 아주 옛날 옛날 노래예요.

이게 이 부재를 통해서 이제 건물밖에 없는 성전에 어떻게 임재를 느끼는 것까지 이어지느냐가 우리에게 남은 오늘 설교의 과제가 되겠지요. 부재를 느끼면서 메시아를 만난다?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나는데? 그 고통 없이 만나면 안 되는가? 왜 그렇게 되는가? 쉬운 말로 정답부터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어느 나라에 임금이 있었는데, 그 임금이 자기 존재가 백성들에게 밀려서 쫓겨날까 싶어서 온 법들을 동원해서 감시체제를 하는 거예요.

행여나 나에게 군소리하고, 나에게 비난할까, 북한보다 더 심하죠, 온 점조직을 통해서 일체 임금에 대한 험담하면 쏙쏙 솎아내서 죽여버리고 사형시키고 하는데, 어느 날 그 나라에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임금은 소프라노 노래가 있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임금은 자기 자리와 뭘 바꾸었느냐 하면 그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천상의 소리를 바꾼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과 자신의 고통을 맞바꾼 겁니다. 주께서 어떤 식으로 오신다면 주께서 오시는 방식이 내가 깨지고 작살나는 경우가 온다 할지라도 저는 전혀 개의치 않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배후에 있는 내용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거리에 자꾸 눈이 오잖아요. 그러면 시 당국에서 치우려고 하면 너무 힘들고, 치우기 전에 벌써 사람들이 미끄러져서 다치고, ‘시에서 뭐 하냐? 우리 할아버지 다쳤다’라고 항의 들어오고, 비용도 많이 드는데, 방법은 이렇습니다.

눈은 많이 오는 데 치우기 어려운 고갯길, 도로에다 열선을 깔아버려요. 열선을 깔면 눈이 오는 족족 다 녹아버립니다. 지금 서울시에서 그렇게 시행을 했습니다. 어? 여기는 눈이 안 오네. 눈이 오긴 왔죠. 다 녹아서 없는 거지. 주님께서 부재의 상태, 그리고 있음의 상태를, 하나님이 환경 자체를 어디로 몰고 가느냐. 너는 있으나 마나 한 상태로 몰고 가면서 메시아와 컨택(contact), 만나게 해주는 상태를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모든 걸 버리고, 돈을 버리고, 명예를 버리고 해도, 버려도, 버려도 버리지 못한 게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9절에서 그걸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날에” 멸망하는 날이죠, 16절에서부터 보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라고 소유에 대해서 부재로 먼저 처리해놓고, 그다음에 19절에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아이 밴 자와 젖먹이는 자. 혈통입니다. 내 소유는 갖다 버릴 수 있지만, 내 속에서 태어난 내 몸과 부풀려서 나오는 나의 복제물은 내가 감히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 할지라도 내가 갖다 버릴 순 없잖아요. 이것이 뭐냐. 부재 상태를 가장 방해하는 것은 내 자식입니다. 딴 건 버려도 이건 버리질 못하는 거예요. 심지어 개를 키우는 사람도 키우던 개가 죽고 난 뒤에 그 상실감이 얼마나 심한지, 또 그것을 위한 회사들이 있어서 개를 복제합니다.

5천만 원 되겠습니다. 5천만 원 내게 되면 2%의 확률로써 복제견을 만들어줍니다. 하나 할 때 2%니까 50번을 시도해서 기어이 복제해서 5천만 원만 주면 죽은 개와 똑같이 생긴 개를 배아줄기세포로 만들어냅니다. 그거, 인간의 희망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개가 문제가 아닙니다. 개를 사랑한 자기 자신은 치워버리지 못했어요. 내가 치워버리지 못하니까, 눈에 관찰되고 보이는 건물 그리고 나, 이것만 붙듭니다.

건물인데 주께서 임재 한다. 이걸 못 느껴요. 느낄 수가 없어요. 내가 턱 하니, 내가 대표로 임재를 해버렸으니까.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이 건방짐과 허풍이 주님의 임재에, 실제로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게 만들었어요. 끝으로 이사야 53장 7~12절에 보면, 시간 관계상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여호와의 종이 나타나는데, 7~8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라고 했는데 이거는 나중 문제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왜 죽는지를 몰라요.

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아챈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임재 할 때 그게 가능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임재 한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에티오피아 내시. 에티오피아 내시가 바로 이 대목, 우리가 방금 읽었던 이사야의 이 대목을 가지고 이렇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누굽니까?” 그걸 왜 묻습니까? 빌립을 만났던 내시는 그게 소프라노의 소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껏 내가 힘들게 살았던 인생을 몽땅 다 바꿔치기해도 되는 분, 그때부터는 ‘이분이 누굽니까? 우리는 못 알아본다는 이분이 누구입니까?’ 못 알아본다고 오신 분을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을 성령께서 집어넣으신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인기 없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인기 없어요. 돈만 벌면 그만이에요.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분이 누굽니까. 그 인생 끝난 거예요.

그 사람 속에 주님이 임재 한 거예요. 그 사람이 성전이에요. 이게 바로 보이는데 임재 했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거예요. 성전 건물에, 벽돌에 들어가면 없어요. 없는 데 자꾸 있다는 거예요. 선지자가 자꾸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있어! 다른 이들은 없어! 선지자는 있어! 그들은 없어! 맨날 이 싸움이에요. 우리 일상의 싸움이.

정말 아무리 신앙생활 해도 결국 싸움은 이 싸움입니다.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있어요. “아니야. 너 있음이 뭘 방해하고 있다”라고 하시죠.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했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예수의 적이야. 네가 마귀야. 네 안에 주님이 너부터, 복음을 전하는 너부터, 네가 바로 방해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만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망가진 자이고 내가 주를 방해했다는 죄인인 것을 같이 세트로 덧붙여서, 증거 하는 거예요. ‘천상에 계신 이여, 내 기도 들어주소서’라고 참 많이도 이런 태도로 기도하셨지요. 지금은 우리 교회 교인들은 이런 기도 들으면 코웃음 지으며, 이제는 기도 안 하는 즐거움에 빠져있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이 기도를 더 해야 합니다.

기도 안 하고 편하게 살아가는 내가 혹시 복음의 방해자가 아닌지, 주께서 편리한 대로 언제든 쓰시라고 우리가 다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분이 일하는지. 이제는 알았습니다. 내가 보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내가 잘나고 싶었기 때문에 주님을 가린다는 사실을 이제는 합쳐서 복음만 전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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