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방

침투

아빠와 함께 2024. 1. 19. 12:44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주님은 창세전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있었던 이야기를 그 뒤에 태어나게 만들어놓고 그걸 통보 알려준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세상에서의 내가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내 쪽에서 찾아서 갖게 되는 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되는 거죠.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올 때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언어, 말 또는 문장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포섭하기 위해서 나아가게 돼 있어요. 하나님 방식은 창세전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사람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뜻이에요. 말을 하기 시작할 때는 벌써 자아가 무르익은 겁니다. 자기 판단이 시작된 겁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언어는 만들어진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터져 나오는 언어들입니다.

문제는 이 인간의 언어는 시작은 있는데 끝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끝은 모르니까. 가기는 가는데 이 시작이 진짜 의미 있는 시작인지 제대로 된 방향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갈 데까지 시간 때우면서 인생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니까. 끝을 모르는데   모르는 사실을 언급한 내가 이게 가짜라는 거예요. 내가 가짜에요.  

‘나는 죽는다’는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죽음이 나를 함몰하고 있다. 죽음이 나를 덮치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살아 있음 자체가 곧 나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남들은 나보고 살아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나는 지금 죽음 안에 있어요. ‘나는 죽는다’ 이거는 독백으로 가능해요. ‘죽는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거는 남이 없어도 괜찮아요. 혼자서 중얼거려도 문장이 되는데, ‘나는 말한다. 내가 죽는 것을.’ 이거는 누구 들으라는 이야기거든요. 타인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숨 쉬는 것부터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해서 꾸며서 살아온 것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자아의 주특기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남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런 자아가 제일 난처한 경우는 뭐냐 하면 본인을 연기할 때에요. 내 자신을 연기할 때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내 연기하면서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헷갈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속임수란 이런 거예요. 정치 이야기, 가정 이야기, 영화 이야기, 책 읽은 이야기, 누구와 싸웠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진짜 중요한 주제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된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지금 인간이 말을 하고 말을 사용하다는 것은 이건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서 빙빙 도는 거예요. 뱅글뱅글

그러면 내가 모르겠다는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니까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데요. 그러면 얼른 주워 담습니다. 왜? 모르는 자기를 달래는 용도로. 너무 허해서 자기를 달래야 되니까 후딱 주워서 자기를 커버하지요. 그것이 바로 뜻입니다. 뜻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동원된 것들이에요.

예를 들면 이 땅에서 살인과 기근과 지진이 왜 일어나는 지 몰라요. 그 지진 일어난 것과 하나님이 어떤 관련성 있는지 이야기해보라. 말 못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일으켰데. 왜? 나는 모르지.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지,  의미를 몰라요. 그런데 의미 모르면서 지진이나 풍랑이나 아는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셨든지, 주의 뜻이다. 그 이야기를 왜 발설하고 왜 언급하는가? 의미는 모르지만 뜻이 있어야 허망함을 달래줄 수 있기 때문에. 내일 또 하루 살아야 되거든요. 일단 정리됐다 치고 그냥 넘어가자, 하는 식으로 또 시간을 하루 때우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정답은 뭐냐? ‘나는 내가 없는 데서 나왔다’에요. 그러니까 내가 없는 데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필요하냐?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언어가 필요했던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건데 우리는 모르는 나를 덮기 위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덮기 위해서 에베소서가 필요한 거예요.

‘보자, 에베소서. 뭐가 있는지 보자.’ 봐서 뭐 할 건데요?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거짓말이에요. 나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해답보다 먼저 있어야 돼’ 라는 고집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에베소서는 내가 없던 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이런 식으로 세상 일어나는 것을 나한테 끌어당깁니다.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러면 내가 먼저 있다하고 그다음에 ‘내가 여기서 왜 있습니까’ 답을 구하는 거예요. 답을 구하면서 하나님 계심에 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도를 가지고 내 쪽으로 성경을 통해서 신에게 접근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다 이 말이죠. 내가 해답은 모르고 있고 여긴 해답 아는 나, 이 사이에서 속임수가 필히 나오게 돼 있습니다.

 

‘틈’ 틈인데 이것이 뭐냐? 빈곳이죠. 해답은, 나의 자리는 내가 아닌 분의 자리를 원해서 맴도는 방식이 나의 자리가 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이란 그대 있음에 그대 있는 자리가 내 자리다.

나보다 당신이 먼저 있는 그곳에 비로소 나는 shelter 쉼터를 얻는 거예요. 쉼을 얻는 거예요. 그럼 그전엔 뭐냐? 인간은 나로 인하여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해답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충돌이 없는 거예요. 충돌이 성립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데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 사람이 확정돼 있기 때문에 들어올 틈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는 나 자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심지어 죽음까지 알고 죽음 이후 세계까지 안다는 신에게 찾아가면서 인간이 중간에 만나는 게 있습니다. 만나는 게 뭐냐? 자연을 만나요. 그러면 인간은 이 자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언어를 활용할까요?

자연의 흐름을 질서 잡아서 하나씩 쪼개고 극복해나가서 내가 누군지 아는데 보탬이 되고자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찾아가든지 자연을 연구하든지 간에 인간이 쓰는 모든 언어는 나를 선이냐, 악이냐 규정하지 않는 중성적 위치에다 두는 거예요. 과학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에는 과학의 영적 싸움이 성립될까요? 과학에선 성립 안 돼요. 중성이니까. 악하다, 선하다가 과학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13장 27절에,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것이 과학적으로 성립됩니까? 중성적인 인간의 언어로 이게 증명이 될까요? 별이 왜 떨어지지요? 이것을 설명하려면 영적 전쟁이라는 전제를 먼저 해야 돼요. 인간이 배제된 전쟁, 영적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메시아와 악마의 싸움이에요. 거기에 필요한 언어로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재우기 위해서 인간의 중성적 언어를 고집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선이고 악이고 하는 것은 내가 이런 헬륨(He)이라든지 수소(H)라든지 내가 바르게 쓰면 선이고, 그걸 악하게 쓰면 나쁘게 쓰면 악이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세계관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을 왜 붙들고 왜 고집하는가? 그것은 이런 언어를 확산시킴으로서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규정 못하게 위함이에요. 나는 그냥 순순하게 너무나 중립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보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지를 마라. 공부를 못한 것은 죄인이 아니잖아요. 머리가 나빠서.

여기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16장 16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en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침입, 침투. 마태복음 11장 12절 같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천국이란 것은 고정적으로 ‘여기 있다. 믿어라’ 이렇게 돼버리면 왜 안 되느냐? 천국이 올 때는 우리가 결코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천국 자체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이 되려면 선한 쪽도 있어야 되지만 악한 쪽도 반드시 맞은편에 성립이 될 때 전쟁이란 게 있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무조건 선이고요, 뱀의 후손은 무조건 악해요. 그 선과 악 사이에서 이 선과 악 사이는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기 때문에 ‘저는 중성인데요. 저는 아무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 이 말이죠. 너는 그냥 떡이나 먹어라. 전쟁 여파의 떡이나 먹으면 돼요. 그 결과를 먹으면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 땅에 침투가 될 때 천국이 침투가 되면서 인간들이 형성한 천국이 침노를 당해요. 공격을 받아요. 받으면서 구약 때는 선지서, 율법이 공격했는데 신약 때는 성도들이 인간의 세계, 인간의 천국관을 완전히 파괴시켜버립니다. 근데 그럼 성도가 어디 있느냐? 성도는 없어요. 성도가 되려면 ‘나 성도 될래’ 이래서 성도 아니에요. 성도는 어디서 되는가? 인간이 쓰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비로소 성도가 발생됩니다. 새로운 언어  인간의 쓰는 언어를 도입을 해도 그 의미가 두 가지 의미를 다 품어있어야 돼요.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께 도달되지 못한다.

주님의 언어는 인간세계를 파괴시키는 언어다.

내 쪽에서 그것을 얻을 생각은, 그것을 납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돼요.

■인자가 오는 것이 단 하루에 와요. 하루에 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긴긴 시간이 단 하루 안에 응축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 그동안 확장되었고 펼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응축이에요.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속도가 빨라지면 모든 무게라든지 질량이 축소가 된다고,

하나님께선 한 날에 하나님이 준비한 모든 것을 승부를 다 내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하루, 그냥 one day죠. 그 하루가 언젠데? 사도행전 1장에 나오죠.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야길 듣고 자기 나름대로 종합하면서 단출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할 날이 언젭니까?’ 라고 물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오늘 강의한 것도 똑같아요. ‘너는 몰라도 돼.’ ‘너는 그 일에 끼어들 당사자가 아니야.’

단 하루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단 하루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령이 나오는 곳,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나오는 자리니까 이거는 시간이 아니고 공간이 되겠지요. 공간과 더불어 뭐가 나온다? 공간이 생기면서 뭐가 된다? 거기서 덩달아서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벌여놓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잡아당겨버리면 시간도 쭉 빨려오고 공간도 빨려서 한 날, 한 지점으로서 모든 것이 진리가 통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단 하루, 이 장소를 무슨 장소로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라.

 

인간은 죽음이 없어요. 자기 죽음도 몰라요.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죽음이 인간의 자기 일이 아니에요.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모릅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인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은 단 하나의 죽음 밖에 없어요. 바로 예수님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여러분의 인생이 정리가 돼요.

GO, GO! 가자. 어디로 가면 돼요?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 바로 뭐가 기다리는가? 시공간을 넘어서 시공간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베드로후서의 이야기도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창세전의 언어 활용을 인간이 쓰고 있는 언어와 겹쳐서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게 침투하는 말씀이에요.

마귀의 종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지요. 그걸 마귀의 종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이번 시간에 그걸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신병자에요. 다루지 말아야 할 대상을 자기가 다루려고 시작한 데서부터 이것은 비현실적인 겁니다. 한 예를 아까 말씀드렸어요. 연극배우가 다른 역할은 잘하는데 본인 역할을 못해요. 왜냐하면 다른 역할은 의식세계에 속하지만 본인역할은 본인의 담당이 아닌 자기 무의식세계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무의식을 다룰 수 없어요. 무의식이 본인을 다루는 거예요. 자기가 무의식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충동이 자기를 다루는 거예요.충동적이란 말은, 내가 없던 자리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없던 자리가. 이게 ‘나다, 아니다’라는 경계선이 없던 자리에서 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십을 살았습니까, 오십을 살았습니까? 평생토록 여러분들은 정신병자를 더욱더 공고히 하면서 살았어요. 이 정신병을. 정신병을 의식 차원에서 생각해서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꾸 상정을 해요. 그거는 정신병 아니지요. 그건 내가 실수한 거지요. 정신병이란 나의 허망함을 또는 허무함을 내가 아는 언어를 총동원해도 메울 수 없다. 한쪽을 메우니까 한쪽이 터져 나와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다가설 때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게 뭐라고요, 둘러싼 뭐라고 했습니까? 자연이에요, 자연. 그게 오늘날 과학이에요. 자연 질서를 만나는 겁니다.

자연 질서를 만나도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 나쁘냐는 것은 내가 결정하도록 나한테 맡긴 나는 여전히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자연이 거기서 호응하고 있다고 내가 증거를 수집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이 무슨 죄가 있어?’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달리 하면,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연에서 계속해서 더욱더 완벽하게 모든 걸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중성이란 건 뭐가 없는 거냐 하면, 영적 싸움이 없어요. 영적 싸움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이게 매개자가 아니에요.  

매개자란 이겁니다. 앞집이 있고 빌라 두 채 있다면 빌라 두 채 사이에 연결돼 있다면 이게 바로 매개가 돼요. 인간은 매개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주체가 되는 거예요. 매개가 아니고. 매개의 반대는 주체고, 주체의 반대는 매개에요. 매개란 은혜성과 연결이 돼야 돼요. 이미. 끝을 알아야 돼요. 시작도 알아야 되고. 주님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매개로 제시한 게 뭐냐?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매개자가 되고 중보자가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 자신이 매개 대상이 되면서 중간에 매개자로 성립돼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노정, 그 경로가 설치가 돼요. 그러니까 이 경로가 설치되어 순환하고 있는데 여기에 인간이 끼어드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이건 바로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너는 아픈 사람이니까 빠져있고 내가 창세전에 다 이루면 너에게 뭘 해주겠다? 통보, 내가 알려줄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줄게. 이게 주님의 계획입니다.

'비밀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말 현상  (0) 2024.01.19
  (1) 2024.01.19
무죄와 의  (0) 2024.01.19
유한과 무한  (1) 2024.01.19
통보  (0) 2024.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