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바로 법 플러스 혈통이라고 했죠. 혈통이라는 말은 존재를 이야기해요. 존재가 되기위해서 법을 만드는거에요. 에베소서 1장에 의해서 역사는 뭐냐하면 유한이 무한을 향하여 힘을 집대성하는 과정이다. 집대성하는 과정이 역사에요. 질이 좋은 것은 무한에 가깝고 선하고, 악한 것은 내침으로써 순결하고 진실된 것을 결집시켜서 계속해서 무한에 나아가면 저기에 뭐가있습니까? 혹시 신이 계시다면 우리의 선한 노력에 대해서 긍정적 반응을 나타내줄 것이다.
힘을 집결하잖아요. 그런데 이 시대가 뭐냐하면 이 역사가 어디 안에 들어오느냐하면 개인 속에 들어와요.
바깥에도 편평화. 수평적인 것 동일성의 함수. 그걸 강도. 그냥 강도에요. 질적인 것이 아니고 얼마나 강하냐에 문제가 그동안 국가 위주로 했다면 이 국가위주가 지금은 개인위주로 들어가는겁니다. “야야, 수련회 참석할래?” “아니요.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참석 안하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자, 공통점이 뭡니까? 이런 관리의 공통점. 허점은 뭡니까? 허점은 스스로 지옥에 안갈려고 하는거에요. 지옥 이야기는 그거는 무한에 관한 문제고 나는 내 안에 따로 내가 원하는 무한을 내가 만들어 내면 되잖아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요. 내 안에 원하는. 안에 있는 무한을, 체제나 안에 있는 무한을 진무한이라 하고, 바깥에 있는 무한을 가무한이라고 이렇게 수학에서 나눠요.
가도가도 끝이없는거. 끝이 없는거는 가무한이고, 진짜 무한은 내부적으로 점점더 세분화 되는 이 무한을, 박스안에 있는데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면 거기서 계속 무한히 쪼갤 수 있다는 진무한. 가우스란 수학자는 이걸 둘로 나눴어요.
우리 내부 정신이 벌써 내부 무한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하면 유한이 유한으로 멈추는게 아니고 유한이 진짜 무한을 담은 박스로서의 유한이 하나의 뭐로 되느냐하면 유한체이면서도 동일하게 이게 무한체가 되는거에요. 다시말해서 하나가 되는거에요. 하나를 지향하는거에요. 하나를 추구하는거에요. 이게 뭐냐? 악마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뭐가되리라? 니가 하나의 단독 신이 된다는거에요. 단독 신이되는거에요.
이걸 이미 무한의 세계, 하늘 나라에서는 아시고 예수그리스도를 통일체로 만들어요. 통일자로 만드는거에요.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미 이쪽에서 선점해서 확정시켜버렸어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었다는거에요. 이게 어느정도까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느냐하면, 이거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보면서 우리가 놀래야 될 것은 사도바울이 말하는게 거침이 없다는 거에요. 눈치도 안봐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게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라고 언급함으로써 사람안에 마귀 들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에요. 사람도 좋고 그리스도도 좋다는 내용이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 사람 속에 있는 내부성 때문에 좋은게 좋다 이런게 성립이 안돼요. 인간속에있는 것은 필히 그리스도를 공격하게되있는 요소가 있다는거에요, 인간속에.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결단코 나와 합류가 안된다는겁니다. 차라리 자기속에 아무것도 없는, 자아가 없는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아무도 천국에 못간다는 거에요.
주의 뜻은 “땅에서는 니 포기해라. 땅에서는 이왕 태어난 것 어쩔수 없이 포기하고 위에서 한번 더 나면 된다.”는 거에요. “그럼 땅에는 뭡니까?” “껍데기고, 위에는 창세전의 생각한 너고. 땅에서는 니 혈통, 역사속에서 니가 확인될 수 있는 가짜 너고. 가짜 너를 진짜 너가 대신해주면 되잖아.” “누가요?” “내가 아담이잖아.” “전에있는 아담은?” “그건 가짜지 썩어져야될 아담. 나는 마지막 아담.” 그래서 예수님 이 땅에 그 바쁘신 와중에 이 땅에 오신거죠.
■인간은 모든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기의 속에 있는 무한의 공백을 메꿀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게 아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분이 창조한 거에요. 창세기 1장 1절을 신약의 십자가로서 재해석 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쫓아버린 모든 인간이 싫어버린 바된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창조되었다. 바로 이것이 사도바울이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것들과 그다음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들과 연합을 시켜버렸습니다.
자아는 나지만 주체는 남이 필요로하는 존재를 주체라고 해요. 내가 필요한게 아니고 남이 필요로하는 존재가 돼요.
그러니까 주체와 자아 사이에는 일치됐습니까? 틈이 벌어졌습니까? 틈이 벌어져있죠? 틈이 벌어져있기 때문에 밥은 먹고 살아야 되고 그러니까 점점 더 내가 여유만 있으면 자꾸 취미 생활하는거에요. 셀프관리. 자기관리. 자기통치사회에 도래한거에요. 어릴때부터 힘모으는 작업. 부모힘 아빠힘. 힘을 땡길때까지 전력을 다해서 내 것을 만드는 전략에 나서게되죠.
나는 절대적인 신이 된거에요. 결국 그거는 인간은 결국 보이는 자기의 유한성을 무한성으로 키우려는 하나의 통일, 또는 통일체. 하나라는 거에요. 하나가되죠. 이 하나속에 자기의 역사가 담깁니다. 역사는 분해하면 시공간이 여기 다 담겨있어요. 시공간속에서 내가 분투 노력한것의 열매. 그게 자기만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자기만의 시공간이 뭐로 응축된다 했습니까? 인자의 날. 인자의 날은 몇일? 그날. 하루만에 모든 것이 시공간이 다 해체되버려요. 끝나버려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만에 다 끝나버려요.
여럿을 하루로 못 묶어내기 때문에 인간들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괴물있잖아요. 아무리 눌러도 눌려지지 않는 괴물이 자기 안에 피워오르는것에 대해서는 감당할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다그래요. 인간이 주님을 추방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렇게 예수님이 소모대상이 아니에요. 우리는 잘생긴 예수를 원하지 못생긴 예수를 원하지 않아요. 이거는 일단 예수님이 내가 판단하고 고르기 위해서는 나와 연속성, 같은 공통점을 유지한 조건 하에 우리는 그 신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근데 우리 인간은 이처럼 자기 관리하기 때문에 뭐냐? 철저하게 계산적입니다. 계산적이기 때문에 계산적이 아닌 신은 인간들에게는 배제대상이에요. 주면 좋다고 복 주고, 안주면 삐지고 그런 신을 원해요. “잡수세요.”하고 주면, “오냐, 니가 십일조를 다줬구나. 복줄게.” 우리가 이게 편해요. 막 은혜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도 진짜 나쁜말이다. 은혜를 왜 받아요. 본인이 없는데 은혜를 왜 받아요. 은혜를 받을려면 본인이 멀쩡해야 본인이 은혜를 받아요. 인간은 자기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내것 만들면 나는 하나가 되거든요. 점점더 하나로 경직화돼요. 그런데 이런 인간들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들은 천국을 갔느냐?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보이스 피싱을 하기 때문에.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은 먼저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에요. 보이스 피싱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는데 전화와요. 주님께서 몰래 오셔가지고 몰래 전합니다. 창세 전에 우리가 아예 개입할 필요가 없는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무슨 날이냐하면 그게 시간 넘어있는 시간, 인자의 날입니다.
인자의 날의 가장 쉬운 예가 뭐냐하면 커튼이라는 시공간 뒤에 숨어있다가 커튼을 열고오는게 아니라 커튼을 찢어버리고 파괴시키며 나타나는거에요. 시공간을 파괴시키고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휘장 찢어졌죠. 휘장 설계도 어디서 제작된거에요? 휘장 제작은 땅에서되고 설계도가 어디서 마련되었습니까? 시내산에서 마련되었거든요. 위에서 모세가 그걸 그대로 제작했고. 휘장이 있고 제사법이 있고 성막이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유한이 무한과 같이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 최초로 보여준 사례가 되는겁니다. “임마누엘이 되는구나 이게.”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인간은 감당 못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어떤 조건, 요건을 갖추고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구나. 감당하는 요건을 다른게 아니에요. 죄를 사해줘버리면, 여러분들 이걸 또 아셔야 돼요. 죄를 사하면 두가지 경우가 생겨요.
죄를 사하면 첫 번째는 뭐냐? 무죄 상태가 되고, 두 번째는 의인이 되는 거에요. 여러분 어느쪽이 났습니까? 무죄가 되면 골치아파요. 바들바들 떨고 살아야돼요. 가만히 있어 보자. 내가 물을 마실 때 여기에 바이러스란 생명이 몇 개 들었는가? 2억 5천 450개. 나 산다고 생명을 죽이면 안되지. 근데 이러한 발상 자체가 아담의 선악체계, 무죄상태에서 결합된 선악체계 때문에 계속 유전병이 내려와서 그런거에요. 헌팅턴 병. 점점 더 사체가 굳어지는 병. 무죄상태는 아담이 되는거에요. 주님 쪽에선 무죄가 아니고 의인이 되는거에요. 죄가 많을수록 뭐가 된다? 의가 많아지는 그 시스템에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것은 독자적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함께있다는 조건 하에 우리가 의인되는거에요. 그걸 가지고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을 합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어요. 죄를 짓는 것은 율법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해야 그 순간에 죄를 짓게 되는거에요. 말씀의 작용이 이미 죄인된 인간을 갖고 놀 때 거기서 죄가 발생되는거에요. 체험자로서 사도바울 본인을 내세웁니다. “나도 한 의 하는데, 내 속에 괴물 들었다. 나는 뭐 바르게 살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내 속의 악이 나를 사로잡아 온다. 그래서 나는 뭐냐? I am a 곤고한 사람. 난처한 사람.”
나라는 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 바로 나다. 그런데 이 나를 누가 유도했는가? 율법이 유도했잖아요. 그럼 율법이 악한가 선한가. 선해요. 선한 분이 율법 가지고 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 선한 분이 나의 일이 아니었고 주님의 일로 전가된다면, 내 대신 주님이 대신 산다면, 주님 안에서 이 죄가 어떤 식으로 완성을 보는가를 살펴보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어서 의가 발생되는거에요. 의가 발생되기 위해서 나를 사용한거에요. 이게 사도바울의 논조입니다.
그래서 죄에 죽은 자가 어떻게 죄를 더 짓겠느냐 했어요. 이거는 백날 설명해도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습니다. “가만히 있어보자, 죄에 죽은자가. 죄에 죽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죄가 너를 죽였다는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인데?” “너보다 죄가 더 세다는 뜻이야.” “그러면 나는 착하고 싶은데.” “그게 죄야.”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그게 바로 죄야.” “나 복음을 믿고싶은데.” “그게바로 죄야.” It is a 죄.
그게 바로 죄야. 그 죄가 없으면 로마서 14장 17절이 성립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 어디서 나옵니까? 뭐 잡아 당겨서 빙그레 이렇게 나오는거에요? 아니에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절망을 느낄때 그 경우에 나오는게 의와 평강과 희락이에요.
나의 의를 의지하고 싶을 때 나에게 어떤 기대와 목표 달성을 노릴 때 그게 여지 없이 허물어졌을 때 나오는 것이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내가 참, 내가생각해도 참, 내가 내보고 이야기 하지만 나 참 피곤하게 산다 정말.” 내가 내보고, “나 너 때문에 못살겠다.” 진짜 나가 가짜 나를 보고 늘 핍박을 받아요, 우리 내부에서.
예수님이 함께 동거하는 조건하에 이 고백이 가능한거에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는 것이 그때 뿐이 아니고 그이후에 계속 되풀이되고 반복되어야 됩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래요. 성령은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그게 되풀이되고 반복되는거에요.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하나다 아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고 누가 하나다?
하나인 예수그리스도의 통일이 하나고 나는 그 통일체 속에 부분으로서 지체로서 이 땅에 있는거에요. 그러면 진짜 보이지 않는분은 예수님이고 보이지 않는분의 연장선에서 보이는 존재는 누구다? 자기죠. 본인, 성도 본인이죠. 그래서 이게 종속관계가 되는거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를, 내가 의지로 그걸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사후적이에요. 일이 벌어지고 난뒤에 되돌아보면 주께서 내린 조치였음을 지나고 난 뒤에 계속 고백을 하는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제일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인터넷 시대에 내속에 뭐가있다고 했습니까? 내속에 역사가 있죠? 인생이 있잖아요. 인생을 어떻게 하느냐하면 최후의 인자의 날이 이것을 끊어주는거에요. 수시로. 엿가락처럼 토막을 내는겁니다. 토막을 내주면 내가 내 역사를 할 때 또는 결핍을 느끼고 내가어떤 의지, 기대, 초조감, 혹시 이 계획이 실패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이런게 있는데 이게 끊어질때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나오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여기 보태졌습니다. 그럼 의와 평강과 희락. “나는 참 성도지. 정신차려. 성도면서 왜 잊어버렸지? 성도로서 나는 어떻게 살면 되지?”라고 성도로서의 새로운 계획이 또 시작이 되는겁니다. 시작이 되면 또 끊어줘요. 그럴때마다 의와 평강이 지난번 의와 평강과 다른 수준의 새로운 의와 평강이 새록새록 나오게 되죠. 이게 바로 성도의 인생구조입니다. 인자의 날, 최후의 날, 마지막 날이 계속 우리를 끊어줌으로써 나의 역사가 토막난 역사로 만들어지는거에요. 이것을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광야에서 이것을 보여주는겁니다. 하루 하루치를 끊어줬어요. 그리고 주님도 주기도문 속에서 이걸 담았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일용할’ 하루치만 양식을 주시옵시고.
인자의 날이 계속 들어올 때, 이것이 삽입되는 것이 바로 보이스 피싱이에요. 주님께서 몰래 먼저 말씀을 걸어와요. 그래서 우리는 주께서 말씀을 걸어오기 위해서 우리는 뭘하느냐하면 말씀을 봐요. 안걸어줍니다. 그거는 내가하는 국어시간이지 성경책봤다고 은혜되고 이런거 없어요. 근데 사람은 성경보고 주께서 말을 안걸어주니까 지가 조작을 해요. 은혜스러움을.
“주여, 나는 너무 은혜스럽습니다.” 주께선, “놀고있네, 혼자서 진짜 놀고 있다.” 그거 은혜안됩니다. 성경봐도 은혜안돼요. 안되지만 뭐 허하니까 그짓밖에 할게 없어요. 오늘또 석장 읽었다. 주일날 다섯장 읽엇다. 일년에 한권 떼었다. 그것도 쓰기 한다. 쓰기 하면 늘어나는 것은 뭐냐? 글쓰는 솜씨가 늘어나요. 다른 것 늘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러한 일이 뭐냐? 자기 발전입니다. 자기 역사를 질적으로 더 발전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거에요.
그러면 성경읽기, 기도같은 것 안하면 어떠냐? 안하는 것은 뭐냐하면 게으른 방법으로 은혜를 노리는 거에요. 얍삽한거에요 그것도. 몸은 편하면서도 은혜 받는 것은 더 나빠. 성경 보는사람보다 더나빠. 완전히 요령꾼이에요 요령꾼. 헌금도 안했다, 기도도 안했다, 봉사도 안했다. “주여, 뭐 은혜 줄 것 있으면 은혜 줄거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내가 머리가 되는 단독자로 되는 이 육신의 습성이 죽을때까지 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거 에베소서 1장을 다시한번 봅시다.
1장에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무한이 유한속에 충만히 담겼다는 이 말을 우리가 언제 이해되느냐 하면 내가 시도하는 것, 요령부리는 방법으로 시도하든 열심히 성경보며 시도하든 일단 은혜를 받게되면 그걸 다 끝나고 난뒤에 보게되면 하나님의 무한의 작용은 내가 어떤 게으르든 부지런하든 상관 없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거에요.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사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확정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성경 해석은 실패를 딛고 보는 해석. 나의 절망을 나의 무능력에 절감하는 요소를 끄집어내면서 보게하는거에요. 나로 하여금 죄인이다라는 사실. 주님을 지독하게 싫어했다는 사실 까지 들추어내면서 보게한 것이 성경입니다. 그게 살아있는 말씀이에요. 우리의 골수를 쪼개는거에요. 우리를 완전히 분해시키는겁니다.
관절과 골수를 쪼개면서 니 뼈다구 하나 전부다 말씀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지 상상된 너 자신을 위해서 너의 뼈가 있는게 아니에요. 너의 힘줄이 있는게 아니에요. 다 소유권이 넘어갔어요. 주님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아플때는 꼭 보약을 드시고 가까운 한의원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침도 맞고 수련회 와서도 침 맞고 그래서 꼭 찾아가서 여러분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이 마음대로 “좀 하면 났겠지 내가 뭐 이 나이 됐지만 젊은사람이다.”
젊은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죽는 순간인 것 뿐이지 젊은 사람은 없어요. 그렇게 내것 아니니까 관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왜 보약을 먹는지 묻거들랑은 답변은 빨리 죽기위해서 병원에 갔다고 이야기 해주세요. 급사를 해도 폼나게 급사해야 시신이 윤기가 나는겁니다. 잘 먹고 난 뒤에 급사를 대기하면 됩니다.
에베소서 1장에 그 빠진부분이 있습니다. 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이런 해석할 때 이제는 여러분들이 수월해야돼요. 무한. 무한은 뭐라고요? 유한이 없을 때, 다시 말해 창세전에 하나님만이 아시는 정보, 비밀. 그 비밀이 계시의 정신, 정신은 영이죠, 영으로 되어있어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내 소망 탈락입니다. 그분의 소망이에요.
그분이 하시는 계획이 뭐며 그분이 일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며 그 노선에 합류되게 하는 사후적으로 합류되었음을 발견하는 것, 그게 마음눈을 밝히는 거에요. 그다음에 19절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자,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기서 이 이야기는 구약을 아신다면 간단합니다. 비교해보면 돼요. 딱 물어보면 돼요.
창조의 능력이 세냐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세냐 이걸 비교하면 됩니다. 천지를 만든 그 능력이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되잖아요. 그 창조의 능력이 셉니까? 구원의 능력이 셉니까? 어느쪽의 능력이 셉니까? 물론 정답은 같다고 할 수 있는데, 과정에서 보면 구원의 능력이 최종이에요. 창조의 능력은 성신의 능력이에요. 벌써 골치아프죠. 이거는 시편 104편에 나오는 이야기. 성신으로 창조를 해놓고 창조 관리를 성신에게 맡겼습니다.
근데 구원의 능력은 이거는 능력이 아니고 아들이 죽어야 돼요. 하나님 자신의 죽으심이 들어왔을때만 구원이 되는거에요. 이스라엘 구원하는 것은 양만 있으면 돼요. 어린양. 그러나, 신약의 예수님은요. 양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지고가는 예수님이 필요한 거에요. 창조의 능력은 없는데서 만들었잖아요. 근데 구원의 능력은 이미 창조된 것들이 있어요. 그 창조된 것들이 마귀의 힘에 의해서 창조자에게 대드는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낸다는 것, 이것은 인간에게 하소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눈물 흘리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의논해서 아들이 이 잔을 내게서 할수만 있거든 지나가게 해달라, 주님께서 안돼. 두 번 부탁해도 안돼. 세 번째는 “그렇다면 제가 이 잔을 마시겠나이다.” 하고 그렇게 얻은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까마득하게 몰랐죠. 나중에 구원 받고 난 뒤에 알게 된거에요.
아, 나는 그냥 아담처럼 잠자고 있는데 여자하나 태어나듯이 나는 그냥 어두운 세상에서 까불고 놀고 있는데 주께서 “너 합격” 이라는 통지서를 보냈을 때, 까분 것 밖에 몰랐는데 갑자기 의와 평강과 희락이 확 올라오죠. 그거 몇일분 양식? 하루치 양식. 또 내일되면 인자의 날이 언제든지 도적같이 오니까 또 인자의 날이 우리의 시간을 쪼개게 되는겁니다.
성령께서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 성령께서 하는 것은 그 뒤에 또 다른방식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성도가 성령이 와서 알게 된 것은 무한, 그걸 통달.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거에요. 세상의 하나님 깊은것 까지 다 아는거에요.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깊은것까지 알게된거에요. 이거는 뭐냐? 내가 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미 알게 해놓고 그다음에 니가 성령 때문에 알게 했다라고 우리에게 통보해주는거에요.
두 번째 시간의 제목을 제가 통보라고 지었습니다. 통보라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왜 하나님이 일을 벌려놓고 우리에게 왜 통보하는가. 그게 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에베소서 2장 봅시다. 2장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을 때 자,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의 많은 질문중에 하나가, “이미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를 알아서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됩니까?”라는 질문. 이 질문을 끄집어 낸 것도 내가 수백번 수천번이 되고요. 그때마다 답변한 것도 수천번인데 이상하게 이게 인자의 날이 되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그 질문이 새로운 버전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겁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했잖아요. 허물로 죽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그다음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무엇무엇 한다가 아니라, 주께서 죄와 허물의 내용을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는거에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삽니까?”가 아니라 “주께서 어디에 우리를 집어넣고 그걸 드러내게 합니까?”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계속 30, 40, 50. 어린 사람도 있기 때문에 열 살 열다섯살,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까지, 가면 갈수록 죄와 허물이 뭔가를 더 드러내게 하는거에요. 근데 뭐 초등학생이 아직 성령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그냥 지 공부하고 노는 책보기만 좋아하는데 어쩌면 좋습니까? 하면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그때 그 시절이 그때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이게 주님에게 꼭 필요한 일을 내 육신을가지고 사용했다는 것을 되돌아보면서 알게 만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