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1강-에베소서: 침투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셔서 하시는 모든 일의 진행이 우리가 예측할 수 없지만 미래의 것은 주께 맡기고 지금 말씀 앞에 모였사오니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저희들이 깨닫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에베소서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사도 바울이 모든 인간에게 충격이 되는 그것이,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이야기, 4절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돼 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를 창세전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언급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통보방식이에요. 통보해주는 거예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있었던 이야기를 그 뒤에 태어나게 만들어놓고 그걸 통보해주는 거예요. 알려주는 거예요. 이것을 알려주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알려준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세상에서의 내가 있고 내가 필요한 것을 내 쪽에서 찾아서 갖게 되는 그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 되는 거죠.
그러면 통보하는 방식에서 우리가 나중에 창세 이후에 우리가 인간이 태어났으니까 여기에 통보를 한다면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이런 것과는 여기서 충돌 또는 마찰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마찰을 유도하는 식으로 성경을 준 겁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 쪽으로 나올 때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 언어, 말 또는 문장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포섭하기 위해서 나아가게 돼 있어요.
그런데 충돌이고 마찰이니까 여기서 하나님 방식의 창세전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창세전에는 인간의 언어가 없었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없으니까. 사람이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뜻이에요. 사람이 옹알이할 때 말고 말을 하기 시작할 때는 벌써 자아가 무르익은 겁니다. ‘나 김 먹을래. 김치 안 먹을래.’ 벌써 자아가 형성된 거예요. 자기 판단이 시작된 겁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모든 언어는 만들어진 자아를 지켜내기 위해서 터져 나오는 언어들입니다. 나를 없앨 생각이 전혀 없고 나를 지킬 요량으로 말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의 언어가 시작이 있다는 거예요. ‘시작은 있다. 끝은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는 시작은 있는데 끝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겠다는 말은 뭔가 끝을 향해 가는데 일단은 시작해보자. ‘갈 데까지 한 번 가보지 뭐.’ 끝은 모르니까. 가기는 가는데 이 시작이 진짜 의미 있는 시작인지 제대로 된 방향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갈 데까지 시간 때우면서 인생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니까. 끝을 모르는데 끝을 누가 이야기해도 이게 아무 소용없어요. 지금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 보세요.
‘나는 말한다. 내가 죽을 것이라고.’ 이것과 ‘나는 죽는다.’ 이 두 개의 문장이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가 있지요 내가 여기 둘이 있지요. 나라는 게 두 개를 사용했어요(첫 번째 문장). 내가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는 것은, 이 죽는다는 말은 어디서 나온 죽는 것이냐 하면 지금 내가 말하기 때문에 죽은 상태에요, 산 상태에요? 이게 살아 있는 상태지요. 살아 있는 상태가 무엇을 언급했습니까?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본인의 끝을 모르는데, 죽음이란 모르잖아요.
남들이 죽는다 하니까 나도 죽겠구나,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남들 죽는 거고 본인이 죽을 때에 뭐 가려음증 이런 것 압니까? 어깨 쑤시고 그런 것 알아요? 천 명이 죽어도 내가 죽는 것과 경험이 달라요. 내가 직접 안 죽어봤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죽음에 대해서 몰라요. 죽는 사실을 모르는데 내가 죽는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르는 사실을 언급한 내가 이게 가짜라는 거예요. 내가 가짜에요. 개코도 모르는 걸 자기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그 나는 도대체 진짜가 아니고 가짜인 거예요.
‘나는 죽는다’라고 해서 이것은 나는 살아 있다는 게 아니라 죽음이 나를 함몰하고 있다. 죽음이 나를 덮치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뭔 뜻이냐 하면 살아 있음 자체가 곧 나의 죽음이라는 거예요. 남들은 나보고 살아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러나 나는 지금 죽음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두 문장이 같아요, 달라요? 두 문장이 같은 문장이 아니고 다른 문장이란 말이죠.
‘나는 말한다’ 할 때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내 앞에 타인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죽는다’ 이거는 독백으로 가능해요. ‘죽는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이거는 남이 없어도 괜찮아요. 혼자서 중얼거려도 문장이 되는데, ‘나는 말한다. 내가 죽는 것을.’ 이거는 누구 들으라는 이야기거든요. 타인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 교재 2페이지 보면, 뜻과 의미의 차이를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역할을 잘 소화하는 연극배우가, ‘너는 강감찬 해봐라.’ 최수종이 강감찬 잘해요. 이번엔 행복한 가정의 가장 역할, 잘해요. 그런데 최수종이란 탤런트가 제일 연기를 못하는 게 뭐냐? 본인이 본인의 역할을 못해요. 자기가 자기 역할하려고 하니까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 말은 인간은 숨 쉬는 것부터 모든 것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해서 꾸며서 살아온 것이 이 언어를 사용하는 자아의 주특기입니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남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그런데 그런 자아가 제일 난처한 경우는 뭐냐 하면 본인을 연기할 때에요. 내 자신을 연기할 때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내 연기하면서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헷갈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속임수란 이런 거예요. 서로 친하게 지내고 아는 사람들 어떤 모임이 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다른 사람들한테 확 퍼졌어요. 일곱 명 모이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암에 걸려서 곧 죽을 말기 암 환자입니다. 일곱 명이 카페에 모여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잡담하는데 그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어떤 사람은 새로 나온 책 이야기, 어떤 사람은 영화 본 이야기, 또 자기 직업에 대해서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또 가정 이야기, 정치 이야기하면서 한 두 시간 이야기하고 헤어졌어요.
정치 이야기, 가정 이야기, 영화 이야기, 책 읽은 이야기, 누구와 싸웠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진짜 중요한 암이라는 주제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된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지금 인간이 말을 하고 말을 사용하다는 것은 이건 정말 내가 누군지 몰라서 빙빙 도는 거예요. 뱅글뱅글 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이재명이 어떻고, 본인도 모르면서. 정치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 이야기하고. 만난본 적도 없는 김정은 이야기하고.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이유는 나는 내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모르겠다는데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니까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데요. 그러면 얼른 주워 담습니다. 왜? 모르는 자기를 달래는 용도로. 너무 허해서 자기를 달래야 되니까 후딱 주워서 자기를 커버하지요. 그것이 바로 뜻입니다. 뜻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동원된 것들이에요.
예를 들면 이 땅에서 살인과 기근과 지진(얼마 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각종 재앙들이 일어나지요. 그 모든 재앙들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으켰다. 하나님의 뜻 때문에 일으켰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다고 우깁니다. 그러면 제가 묻지요. 그 지진 일어난 것과 하나님이 어떤 관련성 있는지 이야기해보라. 말 못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일으켰데. 왜? 나는 모르지.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지, 나는 모르지.
왜? 몰라. 뭘 몰라? 의미를 몰라요. 그런데 의미 모르면서 지진이나 풍랑이나 아는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셨든지, 주의 뜻이다. 그 이야기를 왜 발설하고 왜 언급하는가? 의미는 모르지만 뜻이 있어야 허망함을 달래줄 수 있기 때문에. 내일 또 하루 살아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오늘 일은 마감 짓고 내일은 힘차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정리 되지 않았지만 일단 정리됐다 치고 그냥 넘어가자, 하는 식으로 또 시간을 하루 때우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뭐냐 하면 뜻은 뜻이 없는 장소에서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로서는 가장 골치 거리입니다. 아까 에베소서 1장 언급했지만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이거는 성립되지 않아요. 정답은 뭐냐? ‘나는 내가 없는 데서 나왔다’에요. 그러니까 내가 없는 데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을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뭐가 필요하냐?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언어가 필요했던 거예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건데 우리는 성경이 필요해요. 모르는 나를 덮기 위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덮기 위해서 에베소서가 필요한 거예요.
‘보자, 에베소서. 뭐가 있는지 보자.’ 봐서 뭐 할 건데요? 노림수가 있어요, 노림수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게 거짓말이에요. 나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해답보다 먼저 있어야 돼’ 라는 고집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에베소서는 내가 없던 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이 자아문제가 언어라는 것이 있음으로서 자아라는 나, 없는 데서 생긴 것을 인간들은 어떻게 커버하느냐 하면 내가 있다고 치고 현재 내가 있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이런 식으로 세상 일어나는 것을 나한테 끌어당깁니다. 내가 있다고 치고. 그러면 내가 먼저 있다하고 그다음에 ‘내가 여기서 왜 있습니까’ 답을 구하는 거예요. 답을 구하면서 하나님 계심에 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나를 얻기 위해서 나를 찾기 위해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 내 쪽으로 성경을 통해서 신에게 접근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이게 엉터리인 거예요.
속임수는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원하는 나를 알기 위해서 내가 해답은 모르고 있고 여긴 해답 아는 나, 이 사이에서 속임수가 필히 나오게 돼 있습니다. ‘틈’ 틈인데 이것이 뭐냐? 빈곳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해답을 제시 안 하고 있잖아요. 오늘 해답 제시 안 하면 잠 못 자지요. 그래서 해답을 벌써 내리겠습니다. 잠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해답은, 나의 자리는 내가 아닌 분의 자리를 원해서 맴도는 방식이 나의 자리가 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이란 그대 있음에 그대 있는 자리가 내 자리다. 내 자리 확보하고 나한테 오란 말이 아니고 그대 있음에 그대를 떠날 수가 없는 거예요. 호숫가에 있으면 호숫가에 막 따라가서 하고 호텔 방에 있으면 호텔 방에. 체험이 막…….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나보다 당신이 먼저 있는 그곳에 비로소 나는 shelter 쉼터를 얻는 거예요. 쉼을 얻는 거예요. 그럼 그전엔 뭐냐? 인간은 나로 인하여 절대로 쉬어서는 안 된다는 것, 해답을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여기서 충돌이 없는 거예요. 충돌이 성립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데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 사람이 확정돼 있기 때문에 들어올 틈이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는 나 자신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틈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강의의 흐름을 일단은 두 개로 나눠보겠어요. 여러분 이해하기 쉽게.
내가 내 의미를 알기 위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심지어 죽음까지 알고 죽음 이후 세계까지 안다는 신에게 찾아가면서 인간이 중간에 만나는 게 있습니다. 만나는 게 뭐냐? 자연을 만나요. 그러면 인간은 이 자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언어를 활용할까요?
이게 주기율표에 나오거든요. 제일 바깥에 전자가 한 개 있는 것, 두 개 있는 것. 일족, 이족이죠. 이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뭘 겨냥하는 언어냐 하면 자연의 흐름을 질서 잡아서 하나씩 쪼개고 극복해나가서 내가 누군지 아는데 보탬이 되고자 언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리튬(Li) 같은 경우를 보게 되면 암석이 시멘트 비슷한 색깔인데요. 리튬은 전자가 마지막에 하나밖에 없어서 반응을 잘해요. 이쪽이 알칼리성 금속이라 해서 굉장히 가벼운데 나트륨(Na)도 물에 뜨고 칼로 자르면 무른 금속이에요. 리튬은 리튬전지가 유명하고 나트륨 같은 것은 우리 몸 인체의 세포의 축색돌기에 나트륨 이온이 들어가서 전기현상을 일으킵니다. 마그네슘(Mg)은 자연에 엽록소에 있어서 엽록소 활동에 기본적이고, 칼륨(K)은 인(P), 황(S)과 더불어 3대 비료요소가 되고, 칼륨은 폐 안에 들어가서 폐 기공을 열어준다든지 또는 뼈 안의 성분으로 있다 이 말이죠.
이게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인데 이 전체를, 저는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중성’ 인간은 신을 찾아가든지 자연을 연구하든지 간에 인간이 쓰는 모든 언어는 나를 선이냐, 악이냐 규정하지 않는 중성적 위치에다 두는 거예요. 과학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과학에는 과학의 영적 싸움이 성립될까요? 과학에선 성립 안 돼요. 중성이니까. 악하다, 선하다가 과학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13장 27절에,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것이 과학적으로 성립됩니까? 중성적인 인간의 언어로 이게 증명이 될까요? 별이 왜 떨어지지요? 이것을 설명하려면 영적 전쟁이라는 전제를 먼저 해야 돼요. 인간이 배제된 전쟁, 영적 전쟁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메시아와 악마의 싸움이에요. 거기에 필요한 언어를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재우기 위해서 인간의 중성적 언어를 고집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선이고 악이고 하는 것은 내가 이런 헬륨(He)이라든지 수소(H)라든지 내가 바르게 쓰면 선이고, 그걸 악하게 쓰면 나쁘게 쓰면 악이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 판단에 있어서 나는 중성적 존재다, 지금 이걸 이야기하고 싶어 하잖아요, 인간들은.
여러분 산화수소가 뭡니까? 산화수소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뭔가 노리는 세계관이 있어요. 산화수소, 네 자잖아요. 한 자로 하면 뭐가 됩니까? 물이에요. 수소가 산화된 거예요. H₂O 물 하면 되는데 H₂O로 쓰는 이유가 뭡니까? 과학적 자체 내에 확장될 세계관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관을 왜 붙들고 왜 고집하는가? 그것은 이런 언어를 확산시킴으로서 누가 나를 죄인이라고 규정 못하게 위함이에요. 나는 그냥 순순하게 너무나 중립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보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지를 마라. 공부를 못한 것은 죄인이 아니잖아요. 머리가 나빠서.
여기 과학에 대한 해답은 누가복음 16장 16절에 나옵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좀 알았으면 좋겠어요. 이것 풀면 그 어려운 에베소서가 다 풀립니다. 종로학원 강사는 아니지만 이것 알게 되면 ‘아하, 그렇구나. 그거였네, 그거.’ 제가 너무 기대를 걸고 확 띄우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누가복음 16장 16절,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The Law and the Prophets [were proclaimed] until John; since then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is preached, and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 침입, 침투. 마태복음 11장 12절 같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천국이란 것은 고정적으로 ‘여기 있다. 믿어라’ 이렇게 돼버리면 왜 안 되느냐? 천국이 올 때는 우리가 결코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천국 자체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이 되려면 선한 쪽도 있어야 되지만 악한 쪽도 반드시 맞은편에 성립이 될 때 전쟁이란 게 있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은 무조건 선이고요, 뱀의 후손은 무조건 악해요. 그 선과 악 사이에서 이 선과 악 사이는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기 때문에 인간이 개입되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전쟁에 ‘저는 중성인데요. 저는 아무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 이 말이죠. 너는 그냥 떡이나 먹어라. 전쟁 여파의 떡이나 먹으면 돼요. 그 결과를 먹으면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 땅에 침투가 될 때 천국이 침투가 되면서 인간들이 형성한 천국이 침노를 당해요. 공격을 받아요. 받으면서 구약 때는 선지서, 율법이 공격했는데 신약 때는 성도들이 인간의 세계, 인간의 천국관을 완전히 파괴시켜버립니다. 근데 그럼 성도가 어디 있느냐? 성도는 없어요. 성도가 되려면 ‘나 성도 될래’ 이래서 성도 아니에요. 성도는 어디서 되는가? 인간이 쓰지 못하는 언어 속에서 비로소 성도가 발생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겁니다.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거예요. 인간의 쓰는 언어를 도입을 해도 그 의미가 두 가지 의미를 다 품어있어야 돼요. 이 의미는 ■하나님께 도달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의미는 ■인간세계를 파괴시키는 언어다.
동일한 천국, 영생, 율법, 인간, 선, 악마, 교회, 에베소서에 나오는 창세전, 특히 예정 이런 많은 용어들이 있더라도 그 용어에서는 반드시 두 개의 기능이 다 포함돼 있어요. 이 예정이란 용어로 인간은 어떻게 사용했으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마중 나와서 그걸 요격해서 박살내느냐? 그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내 쪽에서 그것을 얻을 생각은, 그것을 납득해서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를 해야 돼요.
그러면 아까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돼 있잖아요. 이 사실을 어떻게 풀어내는 것이 창세전의 언어, 창조된 언어를 활용한 사례가 될 수 있느냐? 성경은 그게 나와요. 해가 떨어지고 별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단 하루, 하루에 이뤄지는 거예요.
인자가 오는 것이 단 하루에 와요. 하루에 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긴긴 시간이 단 하루 안에 응축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단 하루에 일어난 일이 그동안 확장되었고 펼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응축이에요.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속도가 빨라지면 모든 무게라든지 질량이 축소가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제가 얼마 전에 한 기억이 나요.
하나님께선 한 날에 하나님이 준비한 모든 것을 승부를 다 내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하루, 그냥 one day죠. 그 하루가 언젠데? 사도행전 1장에 나오죠. 제자들이 예수님이 이야길 듣고 자기 나름대로 종합하면서 단출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할 날이 언젭니까?’ 라고 물었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오늘 강의한 것도 똑같아요. ‘너는 몰라도 돼.’ ‘너는 그 일에 끼어들 당사자가 아니야.’ 왜냐하면 너는 네가 이미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경 해석의 해당자가 아닌 거예요. 끼어들 자리가 아닌 거예요.
단 하루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는 단 하루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령이 나오는 곳,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나오는 자리니까 이거는 시간이 아니고 공간이 되겠지요. 공간과 더불어 뭐가 나온다? 공간이 생기면서 뭐가 된다? 거기서 덩달아서 시간이 나오는 거예요. 벌여놓은 시간을 하나의 공간으로 잡아당겨버리면 시간도 쭉 빨려오고 공간도 빨려서 한 날, 한 지점으로서 모든 것이 진리가 통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단 하루, 이 장소를 무슨 장소로 보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라. 예수님의 죽음이 되니까 아까 우리가 논했던 언어를 여기다 응용해버리면 인간에게 응용한 것을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이올시다. (내 이야기 안 할 줄 알았다.) 인간은 죽음이 없어요. 자기 죽음도 몰라요.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죽기 때문에 죽음이 인간의 자기 일이 아니에요.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모릅니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인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죽음이란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죽음은 단 하나의 죽음 밖에 없어요. 바로 예수님의 죽음 밖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여러분의 인생이 정리가 돼요.
GO, GO! 가자. 어디로 가면 돼요? 내 죽음으로 가면 안 돼요. 수목장 할 거예요? 매장, 화장할 거예요? 그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어디로 가느냐? 예수님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거기 바로 뭐가 기다리는가? 시공간을 넘어서 시공간에 저촉 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베드로후서의 이야기도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창세전의 언어 활용을 인간이 쓰고 있는 언어와 겹쳐서 우리에게 알려준 거예요. 그게 침투하는 말씀이에요.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말씀이에요. 이걸 여러분들이 모르게 되면 나 구원받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하면 됩니까, 라는 질문을 죽을 때까지 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마귀의 종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지요. 그걸 마귀의 종이라 할 수 있는데 저는 이번 시간에 그걸 정신병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정신병자에요. 다루지 말아야 할 대상을 자기가 다루려고 시작한 데서부터 이것은 비현실적인 겁니다. 한 예를 아까 말씀드렸어요. 연극배우가 다른 역할은 잘하는데 본인 역할을 못해요.
왜냐하면 다른 역할은 의식세계에 속하지만 본인역할은 본인의 담당이 아닌 자기 무의식세계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무의식을 다룰 수 없어요. 무의식이 본인을 다루는 거예요. 자기가 무의식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충동이 자기를 다루는 거예요. 내가 충동을 다루면 그건 충동이 아니지요. 기껏 본능 정도밖에 안 돼요.
충동적이란 말은, 내가 없던 자리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없던 자리가. 이게 ‘나다, 아니다’라는 경계선이 없던 자리에서 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사십을 살았습니까, 오십을 살았습니까? 평생토록 여러분들은 정신병자를 더욱더 공고히 하면서 살았어요. 이 정신병을. 정신병을 의식 차원에서 생각해서 나는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꾸 상정을 해요. 그거는 정신병 아니지요. 그건 내가 실수한 거지요.
정신병이란 나의 허망함을 또는 허무함을 내가 아는 언어를 총동원해도 메울 수 없다. 한쪽을 메우니까 한쪽이 터져 나와요. 이게 지금 정신병 증세가 어린아이부터 있어요. 여러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릴 때 제가 생각해보면 겨울 되면 두툼한 솜이불 속에 들어가서 그 안에서 몸집이 작으니까 손가락으로 쑤시면 이글루 같은 공간이 생기지요. 나의 세계가 만들어져요. 이불 안에. 그 안에 누워보면 이불 속임에도 별자리도 보이고 이래요. 거기서 나만의 세계 있어요. 그것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은 뭐냐 하면 어른들이 이불을 확 제쳐버려요. ‘뭐하노. 저녁 먹으라는 소리 못 들었어?’ 그러면 나의 소박한 세계가 다 깨져버립니다.
여러분들은 이게 어릴 때 이야기라고 생각되지요. 이집트의 피라미드이라는 게 바로 그겁니다. 피라미드가 왕의 무덤인데 여기 숨통을 하나 냈는데 숨통의 방향이 어디냐? 북극성이에요. 영원한 고정된 별, 영원한 고정성을 향하여 연결되도록 피라미드를 만들어놓고 여기서 이집트의 모든 왕들은 죽음 자체를 벗어나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 피라미드가 솜이불이에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 다가설 때에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게 뭐라고요, 둘러싼 뭐라고 했습니까? 자연이에요, 자연. 그게 오늘날 과학이에요. 자연 질서를 만나는 겁니다. 자연 질서를 만나도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내가 착하냐, 안 착하냐, 나쁘냐는 것은 내가 결정하도록 나한테 맡긴 나는 여전히 중성적인 존재인 것을 자연이 거기서 호응하고 있다고 내가 증거를 수집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연이 무슨 죄가 있어?’ 이 말이거든요. 이 말은 달리 하면,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연에서 계속해서 더욱더 완벽하게 모든 걸 해결한다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적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중성이란 건 뭐가 없는 거냐 하면, 영적 싸움이 없어요. 영적 싸움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이게 매개자가 아니에요. ‘매개자’란 어려운 말이 나왔는데요.
매개자란 이겁니다. 앞집이 있고 빌라 두 채 있다면 빌라 두 채 사이에 연결돼 있다면 이게 바로 매개가 돼요. 앞집에 누구 살고 이 집에 누구 살고 앞집, 뒷집 연결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떠냐 하면 윗집은 없어요. 내 쪽에서 계속해서 질문 던지고 답 얻고, 질문 던지고 답 얻고. 코로나는 왜 생겼을까, 바이러스냐, 계속 나오는.
인간은 매개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주체가 되는 거예요. 매개가 아니고. 매개의 반대는 주체고, 주체의 반대는 매개에요. 매개란 은혜성과 연결이 돼야 돼요. 이미. 끝을 알아야 돼요. 시작도 알아야 되고. 주님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매개로 제시한 게 뭐냐?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매개자가 되고 중보자가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 자신이 매개 대상이 되면서 중간에 매개자로 성립돼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노정, 그 경로가 설치가 돼요. 그러니까 이 경로가 설치되어 순환하고 있는데 여기에 인간이 끼어드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이건 바로 정신병자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도려낸 것은 이게 인간이 빠진 상태에요. 창세 ‘전’에 돼요. 그러니까 인간 보고 너는 아픈 사람이니까 빠져있고 내가 창세전에 다 이루면 너에게 뭘 해주겠다? 통보, 내가 알려줄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줄게. 이게 주님의 계획입니다. 우리 계획은 10분 쉬는 게 계획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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