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3강-에베소서: 유한과 무한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비밀이란 이야기를 지난 시간 끝부분에 했습니다. 그 비밀 안에서는 창세전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창세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기기 전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을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예정 해놓고 이미 결정해놓고 그 결정을 우리 인간 쪽에선 변경이 안 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통보한다는 그 사실이에요. 우리 쪽에서 변경할 수 없게 만들어놓고 통보해버려요.
통보받은 우리 입장에서 내 쪽에서 수정이 불가해요. 주어진 운명이. 주어진 운명이 내 쪽에서 수정이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운명이 사도 바울의 운명이고, 사도 바울의 운명이 성도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에베소서 1장 8절에서 예수님을 비밀로 보거든요. 비밀의 확장, 확대가 사도 바울에게 전달되고 이게 운명이 돼요. 운명이란 것은 결정 났음, 다른 말로 하면 변경 안 됨. 변경이 안 돼요.
통보를 할 때는 ‘네가 너를 손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내가 다 손봤어. 끝냈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 운명에 손을 댈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게 우리가 없을 때 완성된 발생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우리가 없을 때 하나님 자기들끼리 결정한 내용이기 때문에 내 운명에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창세전의 비밀에 대해서 중간에 차단돼 있어요. 여러분들이 용어가 어렵더라도 감당하셔야 돼요.
창세전의 내용이 뭐라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8절에 의하면 비밀이죠. 이걸 뭐로 고치느냐 하면 이걸 제가 고치겠습니다. 이걸 ‘무한’이라고 고치겠어요. 무한이거든요. 무한의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논사항이에요. 그러면 멸망의 자식 가룟 유다 같은 경우에는 이 무한을 차단시키는데 뭣이 개입돼 있느냐 하면 유한이 개입돼 있어요.
유한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개입돼 있어요. 이 피조물에 누가 개입돼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룟 유다 보고 뭐라 했습니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중에 하나는 사탄이다.’ 악마의 요소가 가륫 유다 속에 들어간 겁니다. 악마는 천사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이 인간세계에서 보이지 않지요. 그래서 유한이라 할 수 있고 가룟 유다는 ‘유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통일입니다. 통일인데 교회는 뭐냐? ‘통일체’에요. 예수님은 완성된 통일이라면 교회는 통일체가 돼요. 예수님이 무한이라 했어요, 유한이라 했어요? 무한이죠. 교회는 무한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란 말은 유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무한이기 때문에 감당이 되고 무한 안에 계속 무한한 사태가 가득가득 계속해서 끝없이 채워질 수 있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 23절을 설명하려면 여기에 무한과 더불어서 유한을 짝으로 가져와야 돼요. 예수님이 창세전에 인간이 없을 때, 창세전에 인간이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계속 할 거예요. 창세전에 인간이 없을 때 하나님만이 계실 그 때 결정 난 사항이 무한입니다. 그 무한이 유한세계에 나타난 게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그리고 오늘날 이걸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라 할 때 에베소서 1장 22절,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 할 때 이것을 기존교회가 설명을 못해요.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왜 해석이 안 되느냐 하면 성경말씀은 도입을 했는데 교회 자체가 자꾸 더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여기 이 단체가 불교 단체에요. 여러분 방 서랍을 열어보면 불교 책 나오지요. 그런 것 조사 안 해봤습니까? 객실 조사. 불교 책이 나와요. 불교의 단점은 멸망하지 않으려는 데 있어요. 불교는 그거는 간파했어요. 이 세상이 인간에 고통을 준다는 건 간파했어요. 그 고통을 본인들이 감당을 못해요. 왜? 본인은 유한이기 때문에.
가룟 유다에게 악마가 사탄이 들어감으로서 가룟 유다가 뭘 차단하느냐 하면 감당할 수 있는 유한이고 싶어서 무한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창세전의 비밀을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가룟 유다가 그걸 받아들이질 못하는 거예요. ‘그럼 나는요,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갑자기 가룟 유다가 저가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너는 사탄이란 말은, 악마가 가룟 유다 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논사항에 대해서 감히 피조물인 악마가 여기를 수정하고 변경을 시도하는 그러한 낌새를 사탄이 계속해서 가룟 유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왜 변경해야 되지요? 수정해야 될 이유가 본인 안에 무한한 사태를 본인이 감당 못한다는 뜻이에요. 감당할 수가 없어요. 자기 속에 불안감과 공포가 자꾸 올라오는데 이 불안감과 아무리 죽이려 해도 안 죽어요, 이게. 아무리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안 죽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게 하나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거예요. 모든 은혜를 동원해서 채우고, 채우고 성경말씀으로 다 채워도 이것이 해소가 되질 않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무용발표회나 이런 데 가보셨지요. 우리가 춤추는 걸 볼 때 춤 자체가 아니라 춤을 만드는 궤적입니다. 춤이 만들어내는 선을 보는 거예요. 선을 본다는 것은 춤이 지나고 난 뒤에 그 사이, 그 가운데 공백, 빈자리가 남는 거예요. 어제 제가 정신병 약간 언급했지요. 정신병이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온갖 언어와, 언어가 구체화 되면 법이 돼요. 법은 다른 말로 규칙이 됩니다.
내가 언어를 동원해서 규칙을 만들어내요. 그 규칙과 언어를 동원해서 자신이 계속 살아 있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계속 메워야 되는데 이 순환, 메운데 또 메우고, 메운 데를 또 메우는 순환을 하다가 지쳐서 나 그만할래, 하고 멈추는 순간 그 사람은 우울증이 되고 강박증이 되는 거예요. 힘이 빠져서, 자기 자신의 빈자리를 메우는데 기력이 다해버린 거예요. 정신적으로 더는 버티지를 못해요. 그 끝은 자살이지 뭐. ‘이렇게 힘들어 살면 뭐하노?’
그런데 그 자살한 사람이 굶어요? 굶는 게 아니에요. 돈이 없어요?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주위에 일가친척 없습니까? 있습니다. 근데 왜 그래요? 자기 안에 있는 공백이 이거는 일가친척이나 가족이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 돈으로 해결 못하는 것이 자기 안의 허한 빈자리에요, 허망한 자리에요. 돈을 벌어서 이걸 해결한다고 아무리 돈 벌어봐야 자기 속의 허한 것을 다 메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 정신병인데 인간은 잠재적인 정신병 DNA를 아담으로부터 받았어요. 조상으로부터 받았는데 정신병이냐, 아니냐는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그것을 타인을 대할 때 아닌 척할 때 정신병 돼버려요. 마치 멀쩡한 것처럼 행세할 때 저 사람 정신병이구나. 오버한다든지 과도하게 행동한다든지 갑자기 뭔가 잘해준다든지 반대로 심하게 이야기할 때는 많이 허하구나. 흑염소 다려먹어야지. 정신병 그거는 흑염소로 안 되잖아요. 많이 허한 거예요.
애, 낳고 또 낳고, 또 낳고 일곱 명 낳아도 이게 내가 누군지를 몰라 도대체. ‘내가 이렇게 살아야 돼, 굳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 바쳤지만 그게 자기 공백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2선, 3선 계속 나오고 탈당해도 안 돼. 지 정신병을 못 고쳐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그러니까 마태복음 9장이 있지요. 나는 환자 찾으러 왔다. 나는 환자를 찾으러 왔지 멀쩡한 인간 찾으러 온 게 아니다. 내가 온 것은, 의사가 필요한 것은 환자이기 때문에 내가 의사로 온 거란 말이죠.
이 공백은 증상이 굉장히 심해요. 그래서 이게 아토포스atopos라 하는 거예요. 아토피, 이상하게 가려워요. 어떤 게? 아토피란 뜻은 장소가 없는데 가려운 증세만 나타나는 현상, 정신적인 아토피 현상, 그게 정신병입니다. 교회 갔다가 절에 갔다가 다시 교회 갔다가, 탈북 했다가 다시 월북 했다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 모든 원인은 딱 하납니다. 멸망하지 않으려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의 비밀을 USB에 담았어요. 외장하드에 담았습니다.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 사람들은 성경에서 종말이 나오니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이해할 때 그냥 기다보자는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자. 기다려보자.
그 대표적인 태도가 과학자의 태도에요. 화성 밟고 그다음 목성하고, 어디까지? 천왕성, 명왕성까지. 어디까지? 안드로메다까지. 그것 뭐하는 짓이고? 그냥 가보자는 거예요. 종말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보자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종말은 시간적 요소가 아니에요. 시간의 끝이 종말이 아니고 종말을 곁에서 발생시켜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차 두 대 나란히 가다가 둘이 생각해요. 저 차가 우리 차와 방향이 같으니까 일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이 가는 방향과 다른 이방민족이 가는 방향이 어느 시점에서 이게 갈라져요. 틀어져버려요. 이걸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Exodus라 하는 거예요, 출애굽.
창세전의 내용을 담은 USB 외장하드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옴으로써 이스라엘이 그다음부터 같은 인간, 누가 봐도 똑같은 인간인데 여기서 길이 엇갈리는 다른 쪽으로 갑니다. 갈 때 이스라엘은 어느 쪽으로 가느냐? 멸망하는 쪽으로 가요. 하나님께서 운전대 잡고 그렇게 멸망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이 말은 이스라엘 가는 쪽이 멸망하는 길이라면 이스라엘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창세전의 내용이 들어있어요. 창세전의 내용이 그 비밀이 모든 것이 실체화 될 때 그것을 종말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말은 시간의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종말이 담기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인간들입니다. 유한한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유한한 인간 속에 무한이 담기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인간들은 같은 인간인데 이스라엘이 자기와 멀어질 때 차가 멀어질 때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멀어질 때 이방인들은 자신이 뭐해야 되는가? 섬뜩해야 돼요. 시간 끝에서 종말이 아니라 벌써 그들은 헤어짐 자체가 그들에게 종말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존재가 나타나고, 그리고 이방민족과 함께 살다, 이스라엘 자체가 나라가 없어요. 이방민족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히브리인들이 결집해서 정치적 결단을 내려서 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되는 걸 누가 반대했어요?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지요.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지요.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 꽉 죽이소서.’ 그 모세와 아론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헤어지기 싫어요. 인간은 정 붙이면 그 자리를 헤어지기 싫습니다. 종말은 영원히 헤어지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이 나올 때 모세, 아론이 자기 민족한테 죽을 뻔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결별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이별’이지요. 헤어지는 겁니다. 한쪽은 유한으로 머물고, 또 한쪽은 유한 속에 무한이 담기는 거예요. 이걸 고급스런 용어로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유한 속에 무한이 담기는 그건 뭐냐 하면 ‘대통밥’ 잡곡을 꼭꼭 담아요. 대통밥 많이 먹었습니다. 해운대에서 공부할 때 끝나고 난 뒤 국수 먹을래, 대통밥 먹을래, 세 가지 중에서 골라요.
대나무 통이라는 그 유한에 오묘한 맛이 있는, 오묘한 맛이라고 과장되게 하는 거예요. 하여튼 형용할 수 없는 언어로, 언어가 터치할 수 없는 무한한 그것이 담기는 것, 대통밥. 그걸 두 자로 줄이면 교회.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특징이 뭐냐? 내 인생은 내가 수정이나 변경이 안 되는 즐거움이 있어요. 이걸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는 나는 내 인생에서 손 떼고 날개 없이 날아가는 거예요. ‘손 떼고 가실게요’ 이런 것. 손을 떼고 펼치면서 이 지옥을 날아다닐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묻기를 ‘네가 그렇게 해서 네 인생 네가 책임질 수 있겠어’ 라고 걱정스럽게 묻거들랑 하늘의 충만이 충만하게 넘쳐 나온다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유한이 유한을 담으면 골라서 담기 때문에 법적으로 법칙적으로 자기를 선하게 보는 것만 골라서 담기 때문에 늘 지 잘난 체하는 그것이 정신병이 돼버려요. 그걸 정신병, 강박증이라 하는데 남한테 실수하지 않기,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기, 나와 내 집안이 험담당하지 않기 이런 강박증세가 우리 정신을 아주 예민하게 건드립니다.
그걸 와우 수술을 해야 되는데 와우 수술은 달팽이관의 성모조직에 문제 있을 때 수술한다는 거예요. 귀가 잘 들리지 않을 때. 수술한다는 자체가 이 또한 새로운 공백을 확장시킨 셈이 돼요. 빈터를 확보시킵니다. 빈터란 말은 이렇게 생각하면 쉬워요.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뭔 뜻인지 알아보세요.
‘나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내가 먼저 사과해야 되니까.’ 이게 무슨 뜻일까요? 상대방이 나에게 사과를 안 하면 내 안에는 상대방에서 비난할 수 있는 권한이 아직도 유효해요. 타인에게 비난함으로서 내 공백의 원인과 이유를 타인 탓으로 돌림으로서 나는 숨을 쉴 수가 있습니다. ‘나는 너 때문에 내 인생 배렸어.’ 이러한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가 있어요. ‘다 네 탓이야.’ 이렇게 버틸 수 있는데 상대 쪽에서 사과를 해버려요. 그러면 나는 재조정에 나서는 부담을 느낍니다.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니가 뭔데 마지막 버틸 수 있는 나의 정당성을 깨버리느냐 말이죠.
주체가 탈주체가 되면 못 견딥니다. 탈주체가 재주체화 돼야 돼요(주체→탈주체→재주체화). 맨날 이러고 살아요. 네가 나보다 못하고 너는 나한테 나쁜 놈이 내가 숨을 쉰다고. 내가 이 땅에 살 의욕이 생긴다고요. 그런데 네가 내 사정도 모르고 네가 사과해버리면 나는 졸지에 내가 천사 될 수 있는 버전업version-up이 안 되는 거예요. 축구에서 빌드업build up을 해야 된다고 해요. 수비로부터 올라와야 되거든요.
김민재부터 해서 올라와서 공격을 마쳐야 되는데 상대가 내가 하는 계획을 사과하고 죄송하다고 나옴으로서 전부 다 망쳤어. 그동안 내 허함을 메워왔던 내 전략이 노출된 거예요. 국가에 내부적으로 뭔가 문제가 있다. 내부적으로 경제가 어렵다. 그럼 연평도를 향하여 곡사포 사백 발 날려야 돼. 바깥의 적을 공격함으로써 내부문제를 희석시키는 그런 식으로 내 공백이 노출되지 않는 것, 이거는 개인도 정신병이지만 국가 자체가 정신병이에요.
불교에서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 골칫거리 자아를 없애는 전략에 나섭니다. 자아를 조사를 해보니까 자아는 기억으로 돼 있고, 인간의 기억은 무엇의 수집이냐 하면 내가 좋아했고 내가 갖고 싶던 욕망의 집합체가 기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기억 자체를 법이죠. 법은 뭐로 된다 했습니까? 문자. 사바사바 염불하는 것 있잖아요. 천주교도 마찬가지고요. 묵주, 구슬 같은 것 만지지요. 법과 문제를 통해서 자아의식을 없애서 무의식으로 감으로서(불교에선 7단계까지 가요) 자아를 없앰으로서 마음의 고통을 얻는 걸 해탈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럼 이 전체의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유한이 무한을 대하는 태도, 자세에요. 유한이 무한에 대한 그 공격을 다 수용할 수 없으면 나라를 그릇을 깨뜨리면 되지 않겠느냐. 심지어 교회도 이 방법을 사용해요. 동안거라 해서 겨울에 혼자서 점 하나 찍어놓고 쳐다보는 그거나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새벽기도 이야기하면 이것 비슷한 것 훈련시키거든요. 참선이란 말은 못하지만 비슷한 용어를 써서 적을 피하자, 피정. 어디서 합니까? 평창이라든지 강원도 가면 천주교 기도원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교회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가정에 뭐 문제 있습니까, 고부간에 갈등이 있습니까? 마음의 병이 육체의 병으로 변합니다. 우선 마음부터 다스려야 됩니다. 해서 하는 게 뭐냐 하면 옴~, 이거는 궁예가 했던 거고. 옴진리교 있잖아요. 일본지하철 테러한. 그냥 망하면 되거든요. 그냥 지옥 가시면 되는 거예요. 그냥 망하면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미 가룟 유다처럼 자기가 유한이기 때문에 유한이 무한을 못 담으면 무한과 대결상태, 투쟁 상태에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복음에 반-복음이 되고, 반대하는 안티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을 받아줄 수가 없어요. 내 인생 개척은 내가 알아서 하고, 내 운명은 내가 손대고, 내가 책임지고.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내 의지에 결정한다. 하나님이 그 의지를 주셨다는 거예요. 특히 침례교 쪽에서. 십자가 지시는 것까지는 하고 십자가 믿고, 안 믿고는 이거는 내 결정에 달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할 때 어떤 심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이론이 침례교 쪽에 재세례파 쪽의 신앙입니다. 신학자 치고 신자 없지요. 이걸 통 털어서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이런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이 중요한 요소가 뭐냐? 사도 바울의 설교 내용이 나온다는 거예요. 그렇게 복음을 잘 알고 그냥 편지로만 핵심을 이야기한 그 사도 바울이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설교할까가 사도행전 17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트릭을 써요. 속임수를 씁니다. 어떤 속임수를 쓰느냐 하면 조각상 있잖아요.
조각상이 그들은 뭐냐 하면 ‘신들’이라고요. 일반관사. 정관사, 일반관사 있거든요. 일반(보통)관사, 영어로 하면 ‘a나 an’ 정관사 이건 ‘the’를 이야기합니다. 공무원 관사 그거 아니에요. 분명히 그리스인들은 이 땅에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마다 개성이 있기 때문에 골라잡아라 이 말이죠. 신은 뭐냐? 유한이 아니라 무한에 속한 거예요. 유한을 달래기 위해서 무한을 찾는 겁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의 차이는 뭐냐? 이 신들을 일반관사를 이걸 정관사로 바꿔버려요. 전부 다 하나의 신이라고 딱 정리해버립니다. 정관사가 되면 뭐냐? 그 모든 잡신들이 여호와 하나님 신 앞에서 그게 합체가 되고 예속이 되고 편입이 돼버려요. 거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저한테는 유명한데 다른 사람은 안 좋아하는데 여기 24절부터 보게 되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다는 뜻이지요.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신과 인간의 협력관계에 있는 신은 가짜란 뜻이에요. 통합된 그 신에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잡신에 해당된다 이 말이죠. “부족한 것처럼” 인간이 뭔가 더 손을 봐야 신이 신다운 그런 신이 아니고 친히,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 했어요.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물고기를 위해서 물이 필요한 게 아니고 물 자체가 뭔지 알리기 위해서 고기가 필요했다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이 땅에 만들었다 이 말이죠. 악마도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럼 하나님이 누구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은 비밀이 아니에요. 왜? 로마서 1장 21절에 모든 이들은 하나님을 알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무엇이 빠진 하나님이냐 하면 복음의 비밀이 빠진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 내부에서 하나님이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사실, 하나님 스스로 멸망의 자리에 가는 하나님을 인간들은 상상도 못하지요. 왜? 본인이 멸망하기 싫으니까, 본인이 지옥 가기 싫으니까요.
아파트 화장실을 만드는 건축업자가 본인은 화장실 갑니까, 안 갑니까? 그 화장실은 아니지만 자기 집 화장실에 가지요. 내게 필요하니까 그쪽에도 필요하잖아요. 지옥은 하나님께 꼭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옥을 다녀와 버린 거예요. 그 지옥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옥에 갇힌 자에게도 복음을 전파한다고요.
내가 다녀간 코스가 비밀의 노선이기 때문에 그 비밀의 노선은 창세전에 이미 확정된 비밀의 노선에 그것이 바로 어떤 유한도 무한은 유한을 당할 수가 있어요. 그게 무한의 능력입니다. 충만이에요. 주의 뜻의 비밀의 충만, 그 충만 노선에 같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확정된 운명입니다. 그게 예정론이에요. 그게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창세전에 무한 안에서 그 무한을 담기 위해서 유한 네가 무한의 작업에 편입하라고 내가 너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나라는 유한의 구원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있었다, 없었다? 갑자기 누가 강요한 느낌이 드는데. 나를 위한 구원이 애초부터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아들을 구원하되 인간은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아들 만들어놓고 구원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각자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구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각자 이름이 아들이 되면 하나의 이름으로 이게 전부 다 모아지게 돼 있어요. 그래서 사도생전 4장 12절인가,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강한 부정용어를 사용하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인간은 정신병입니다. 그 정신병의 이유는 자기 안에 죽여도, 죽여도, 죽이지 않고 계속 인간이 어떻게 손댈 수 없는 무한이 담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한의 계획 안에 이미 피조세계는 편입돼 있어요. 하나님의 예정론에 보면 ‘예수 안’은 하나님의 독생자지만 독생자는 주님이 아니에요. 이 땅에 와서 지옥을 다녀가야 그게 주님이 돼요.
심판한다는 것은 지옥에 대해서 심판하는 걸 말하거든요. 지옥을 친히 답습해서 심판할 만한 장소를 만들어놓고 난 뒤에 주가 되시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가는 표준이 성립돼야 되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옥 가기 싫어해요. 그러나 안 가도 가도록 하시는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이 나를(예수님을) 싫어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을 해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예수를 싫어하도록 주님 쪽에서 일을 벌여요. 어떤 인간도 주님을 사랑한 사람 없게 만들어버려요. 요한일서 4장에 나오지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했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인간 사랑과 비껴가면서 비로소 현장에 진짜 사랑이 등장합니다.
같이 사랑해버리면 이거는 샘샘이 돼버리지요. ‘주님도 사랑했지만 나도 주님 사랑했잖아요.’ 이렇게 되면 그냥 맞먹자는 거죠. 유한이 무한을 감히 맞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아야 비로소 구원받고, 믿지 않아야 천국 가는 거예요.
인간이 아주 망해버리면 뭐가 되느냐? 개가 되거든요. 자기를 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는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이만한 믿음은 처음 봤다.’ 다른 사람은 신이 못돼서 환장하고 인간 못돼서 지 잘난 척 못해서 환장하는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기는 개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의 진짜 속성은 내가 나를 감출, 나 앞에 타인이 있잖아요. 타인 보기에 내가 어떠냐를 보이는 것이 이게 내 모습이 아니고 자기 내부에 자기가 허한 데가 있어요. 그것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가 되면 남들이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그런데 수로보니게 이방여인은 고맙게도 내가 안 되는 일을 남들이 해줘요. 핍박을 해주니까요. 진짜 개 무시해주니까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서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왜 이방인을 구원에다가 하나님이 끌어당기는지. 어제 지난 시간에 잠깐만 언급했잖아요. 짧게만. 이방인과 유대인이 이스라엘이 옛날에는 멀어졌지만 가까워졌다 했지요. 뭐로 가까워졌다 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 만남의 장소를 예수님이 정해요. 카페가 아니에요. 하나님께 저주받아야만 생겨나는 거기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이런 문장을 했어요. 인간에게는 뭐가 없다? 죽음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죽음만이 죽음이고 다른 죽음은 죽음이 아니지요. 왜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이냐? 이 죽음의 의미 있으려면 예수님에게는 죽을 필요가 없어야 돼요. 예수님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죽었을 때에 그 찬스를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인간이 죽어봤자 새삼스러운 게 아니에요. 생명인데 죽었다. 그 자리를 사도 바울은 마지막까지 그걸 자랑해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했어요. 그리고 또 자랑하기를 ‘나는 아직도 십자가 안에 있다’ 이것 자랑해요. ‘우리 아버지 경찰이다’ 이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 검사다’ 이것 자랑하는 게 아니고, 자랑할 게 뭐냐 하면 ‘우리 집안은 몽땅 죽었어’ 이걸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 참여한 것, 여기서 유한은 무한을 만납니다. 십자가에서. 이스라엘의 장점은 망했다는 거고,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내놓은 자식이란 뜻이고 둘 다 십자가에 만날 때 똑같은 고백은,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고 십자가에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서 ‘너만 망했나. 나 예수도 망했다’고 망한 삼인조 밴드가 거기서 십자가 사건을 무한의 그것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은 대장하이소’ 해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된 거예요. 머리라 하는 것은 첫 번째, 나머지는 보조니까. 예수님이 대표자 됐어요.
인간세계에서 추구하는 것이 통일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돼요. 이 통일을 현재 뭐로 이루고 있느냐? 경제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 통일을 현재는 인터넷으로 이루고 있습니다. 인터넷을 고상한 용어로 ‘집단이성’이라 해요. 쉬운 용어로 하면 ‘여론’ 여론으로 정치하는 이 구조를 뭐라고 하느냐? 이걸 민주주의라 해요. 민주주의는 여론싸움이고, 이 여론싸움은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가 새로운 정치형태가 되는 겁니다. 이 시대에 와서.
따라서 투표는 선거 때만 하는 게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서 ‘좋아요’가 매일같이 투표하고 있는 거예요. 좋아요, 좋아요. 정우성이 삼성가 이혼녀와 결혼했다. 좋아요. 따라서 정치하려면 이 인터넷을 통계화 시켜서(수학이죠) 정치를 해야 되지요. 수학 통계학으로 정치를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함수가 뭐냐? ‘동일성의 함수’에요. 차원이 편평한 차원이에요. 균등한 차원에서 힘이 세력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를 보고 정치하는 겁니다. 그걸 역사라 했지요.
교재, 여러분 새롭게 받아봤지요. 여기에 연대표 쭉 나오지요. 이것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힘의 축이 편평한 무대 위해서 어느 쪽으로 힘이 쏠렸느냐? 힘이 쏠리는 대로 왔다 갔다 하는 그 과정이 계시가 떨어진 빈칸을 역사가 채운 거예요. 수많은 사람, B.C.340년부터 기원후 40년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에요. 소위 강대국 앞에 편승하고 매달리는 것.
이 모습이 사도 바울의 에베소서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돼 있어요. 이게 역사잖아요. 에베소서 5장이나 이런 데서는 간단합니다. 이게 뭐냐? 우리의 싸움은 우리의 씨름은 이 세상 신과 더불어…, 볼까요? 우리가 에베소서 하기 때문에 미리 보는 것도 좋지요. 에베소서 6장 10절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 표현하는 거예요. 역사, 오늘날 민주주의 세계.
잠시 보충해서 이야기하면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무슨 시대냐? 인터넷 시대 이전은 ‘비례소득세’ 시대가 돼요. 비례소득세 시대가 뭐로 바뀌느냐? ‘누진소득세’ 시대로 바뀝니다. 차이점은 뭐냐? 이거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비례로 해서, 재산이 열 개라면 십분의 일을 내거든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도 십분의 일을 내버리면 덩치가 작아요. 작은 것의 십분의 일이니까 남아 있는 것도 별로인데 부자는 하나 내도 남아 있는 것이 많아요. 이 부가 금융투기가 돼버리면 부가 부를 낳는 그 순환에서 안 벗어나요. 뭐 투기하려 해도 돈이 있어야 투기하지요. 반찬값도 없는데 무슨 투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누진소득세가 돼버리면 부에 따라서 비율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상속세가 우리나라에선 30억 되면 60%를 내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선 85% 내요. 그러나 우리나라 평균적으로 누진소득세는 14~15%의 상속세를 내게 돼 있습니다. 3억 밑은 상속세 한 푼도 안 내고요.
제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상식 시간이 아니라 편평하다. 통계학적으로 관리가 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 이전의 시대였어요. 인터넷은 스스로 알아서 세상에 복종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에요. 전에는 국가가 세금으로 법으로 지배를 했던 시대지만 이제는 국가권력체가 각자 인간 내부에 장착되는 시대가 인터넷 시대에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정신병이 더 많은 거예요.
2분 넘었네. 내가 관리가 안 되네.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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