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의 매
2023년 12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5-9
(15: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15: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15: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5: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였으며
(15:9) 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힘차게 자기 백성을 치십니다. 죽으라고 치십니다. 매맞는 이스라엘(유다) 족속은 이런 하나님을 이해 못합니다. 그들은 남의 멸망에 대해서 목격했으나 정작 자기 멸망에 대해서 막상 당해도 믿지 않습니다. 인간들이란 원래 이런 자들입니다. 타인의 멸망에 대해서 동정도하고 측은해 하지만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항상 좋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늘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자기 삶을 반복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 시작은 나쁘게 끝맺고자하는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게 오해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여기게 되면 항상 긍정적인 것으로 반복해서 판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복을 끊고 그 대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소환시킵니다. 끌어당기십니다. 그 끌어당시는 힘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방인을 바라보면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들 이방인들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짤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신들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으니 너무나도 긍정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긍정적이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리어 처절하게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 다같은 처지에 놓이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하나님께서는 망하는대로 방치하시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때리신다는 점이 복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매맞으면서 맞는 이유를 필히 알아야 하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말고 다른 기쁨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일반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으로 행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원래 애굽에서 나올 때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내실 때,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10가지의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내려질 때마다 애굽의 바로왕의 마음이 갈수록 강퍅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바로를 떠나 성에서 나가서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매 뇌성과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아니하니라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출 9:33-35) 바로왕의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그들 애굽왕과 백성들은 강퍅함으로 반대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만 합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자신의 미래가 다행스럽고 아름답기만 고대합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마음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방민족은 자신만 챙기는 되는 민족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체를 드러내는데 자신들이 철저하게 관여하는 식으로 버림받는 점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세상은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것은 기존의 ‘자기 긍정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는 막연함으로 끝까지 가보겠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자세가 모두 거짓된 것임을 드러내는 사건을 하나님께서 마련해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결코 십자가의 물리적 목격자가 아닙니다. 그 십자가 사건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고 고백합니까? 이는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소환되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이 지닌 문제와 정답의 힘이 사도 바울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불의한 교사와 돈 많은 학부모가 짜고서 자기 자식의 성적을 향상시킬 목적으로 시험지와 답지를 몰래 사전에 빼돌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학부모는 자신이 빼돌린 시험지와 답지를 가지고 시험 전에 자기 자식이 달달 외우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 당일에 제시된 시험지는 다른 내용이 있었습니다. 시험지가 바뀐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도저히 알지 못하는 시험지와 답지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알려주시고 그 답지대로 생의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자신의 친 백성을 이끄십니다. 십자가와 답지를 그들 내부에 수셔넣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하나님께서 친히 제시한 질문지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불신자든 신자든 모두 불량하고 강퍅합니다. 하지만 신자만이 압니다. 십자가 사건이 자신이 관련해서 일어난 일인 것을 말입니다. 결코 자신을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근거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사건으로 출발시키는 새로운 자신의 근거는 기존의 자아성이 뭘해도 강퍅할 수밖에 없었음을 압니다.
이 앎을 통해서 신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드러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인간이 완전하게 행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십자가 사건을 드러내는데 소환되어서 기쁜 겁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홀로 자기 의지로 긍정하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으로 드러나는 지옥길입니다. 강퍅한대로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강퍅성을 키워나가시는 겁니다. ‘반복’과 ‘소환’. 인간은 반복만 하며 살지만 주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소환시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정체를 십자가 현장으로 소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3강-예레미야 15장 5~9절(긍휼의 매)23122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였으며, 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너무 모질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과하다. 주께서 너무 심하게 자기 백성을 다루신다’라고 우리가 사람 편에 서서 원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우리 이방인보다 먼저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것은 철저한 자기 파괴, 철저히 자기 세계가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는 이 순서를 거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예요. 사도바울이 사도 되고 난 뒤에 별로 뭐 나쁜 짓을 했겠어요? 재미가 없어서 안 했을 거예요. 하지만 사도가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바르게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서 2장 10~11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죽은 자 가운데 합류하지 아니하면 부활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에 합류하는 것은 우리의 시도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고난이 덮쳐야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고난이 덮쳤는지 안 덮쳤는지 어떤 사례, 어떤 경우를 두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선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고 있는 유다, 이스라엘 족속이 장차 오실 하나님의 수난을 그들은 미리 겪었던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 땅의 삶을 허락을 안 해요. 이 땅에서 희망 품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놔두질 않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유다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칠 때, 그 시간에 이방인들은 뭐했느냐. 이방인들은 룰루랄라죠. 편안하게 자기의 노력한 만큼 대가 얻어서 충분하게 그들은 여유롭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경우가 히브리인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때 이미 확실하게 차이점을 주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8장 32절에 보면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나오거든요.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다는 겁니다. 마음이 완강한 이 경우를 우리가 한국 땅에 살면서, 아침에 눈만 뜨면 지하철 탈 때, 거리에서 모든 만나는 사람을 일단 완강한 애굽 사람 바로의 마음이라고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편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가 거래하는 모든 사람, 내가 좋든 싫든 같이 사는 모든 사람은 일단은 강퍅합니다. 강퍅함이 뭡니까? 내가 노력해서 대가 얻어서 내 노력으로 내가 살겠다는 그것이 강퍅함이에요. 인간이 지옥 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자기 포기가 안 된 사람들이 가는 길이 지옥 가는 길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은 천국 가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강제로 패줬잖아요. 그들을 때렸잖아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강제로 패주지 아니하면, 자기 잘난 맛에 당당하게 지옥 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나는 지옥으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비유,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는 지옥 가도 당당했습니다. 죽기 전에도 당당했고 죽고 난 뒤에도 당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당당했지만, 지옥 가서는 후회막심하죠. ‘아, 이럴 줄 몰랐는데...’
오늘 설교의 주제가 굉장히 힘듭니다. 굉장히 어려운데, 그게 뭐냐면 왜 망하는 것을 우리는 미리 못 보느냐는 겁니다. 내가 망하는 것을 왜 미리 못 보느냐가 주제가 됩니다. 남이 망하는 것은 우리는 벌써 주변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저 사람이 망했다. 이 사람이 망했다’라고 남이 망하는 것, ‘저 사람은 강퍅하다. 저 사람은 교만하다. 저 사람은 한참 지옥 가고 있다. 박수해주자’라고 그런 것은 되는데, 본인은~~~~, 왜 본인 망하는 것은 미리 못 보느냔 말이죠.
내가 망하는 것을 미리 봤으면 나는 미리 대처할 건데,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이건 잘못된 길이니까 옳은 길로 가야지’라고 할 텐데, 남 망하는 것은 그렇게 보면서 나 망하는 것은 도대체 감이 잡히질 않아요. 내가 망한다는 자체가 감이 잡히질 않아요. 어딜 봐서 망합니까? 그리고 뭘 모르느냐 하면, 진짜 내가 망한 것을 미리 안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천국 갑니다.
따라서 자기 망한 것을 미리 안 사람과, 그냥 열심히 애쓰면서 안 망하려고 애쓴 사람은 자기가 이미 망한 존재인 것을 못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자기에게 희망을 걸고 구원받고자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 사람과의 차이점이 뭐냐. 이미 망한 사람과 자기가 망한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악을 쓰고 애를 쓰면서 안 망하려고 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뭐냐.
그게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뭘 발견했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늘 이야기해도 어려운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예요. 다시 어려운 이야기를 해보면 십자가 사건은 뭐냐.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적으로 사도는 물리적인 목격자가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물리적인 목격자가 아닙니다.
그 현장에서 물리적인 목격자가 된 사람은 구원받은 강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건 십자가 의미를 빠뜨린 채, 그냥 일게, 범법자에 대한 사형집행 현장을 목격했을 뿐이죠. 나와 십자가를 연결시킨 사람은 구원받은 강도밖에 없어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한계죠. 못 박힌 사람이 있다. 그걸 구경하는 나는 못 안 박혔잖아요.
그럼 내가 못 박혔다면, 우리는 못 박히니까 아프다, 내가 죽는구나, 이런 것은 아는데, 내가 지옥 갈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천주교 수도사들이 혼자서 저 깊은 곳, 강원도 가면 산속 깊은 곳에 수도원들이 많아요. 평화 집이 어떻고, 세상을 피한다고 해서 피정(避靜)의 집들이 많아요. 기도원들도 많고요. 거기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은 뭘 하느냐.
‘나는 죽을 죄인입니다’라고 그거 하려고 간 거 아니에요. 구원받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려고 간 사람들이에요. 아직까지 십자가 사건과 십자가 사건이 노리는 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본인이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걸 커버(가리는데)하는데 급급했어요. ‘어떤 죄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열심히 할 테니까 그저 열심히 하는 그걸로 퉁 칩시다. 주님’
퉁 치려고 그들은 오직 노동과 때로는 금식, 때로는 청빈한 생활을 빙자해서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인간이 그 정도밖에 되질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물리적 목격자가 사도가 아니에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을 하느냔 말입니다. 자기는 십자가 근처도 안 갔는데.
그 사람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잖아요. 십자가 사건 있을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이게 말이 안 되죠. 십자가 현장에 강도 두 사람과 예수님과 세 사람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기가 왜 낍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경험에서는 인간은 반복하는 것밖에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소환입니다. 반복이 아니고 소환.
㉮우리 자신을 십자가 사건으로 데리고 갑니다.
㉯십자가 상황으로 데려가면서 쥐어팹니다. 십자가 사건의 현장성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방법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실망과 실망의 연속으로 우리 인생을 이끄십니다. 자기에 대해서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중에 예가 나오는데 이스라엘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유대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에요.
친히 때리니까 복 받은 건데, 그 때리는 작업중에 하나가, 아이를 일곱이나 가진 여인이 있는데 남편을 믿고 일곱을 낳은 거예요. 자신은 아이들 키우면 되고 밑에 뒷바라지와 재정적인 문제는 남편이 다 해주겠지 생각한 거죠. 이거 하나 믿고 아이를 계속 낳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편이 죽었어요. 누가 죽였는가. 하나님이 죽여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오늘 본문 예레미야 15장 9절에 그 여인은 해가 떠도 자기의 해가, 그러니까 영어로 ‘The sun’이죠, 그 Sun이 자기 Sun이 아니에요. 해가 떠도 밤이에요.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자식 일곱 키워야 하는데, 희망이 없다니까요. 절망케 한다는 말이죠. 누가 그렇게 했는데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주께서 손대기 전에는 거리마다 전부 다 다정하게 부부끼리 손잡고 다니면서 하하 호호 갔는데, 8절에 보면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여고 동창생 만났는데 그중에서 90 프로가 과부이고 혼자 살고 있는 거예요. 바다의 모래보다 흔하고 흔한 게 뭐냐 하면 홀로 사는 여인들, 그것도 처녀가 아니고 이미 결혼했는데 혼자 사는 여인들. 왜? 남편들을 다 죽여버려서. 누가? 하나님께서 다 죽여버렸어요.
여인의 희망은 남편 믿고 자식 키우는데 여인의 희망이 있어요. 그게 여인의 할 일이고 스스로 할 일이 그것이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다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그들은 주님이 출제하는 시험지를 다른 시험지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 제시하는 시험 말고 다른 시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불의한 교사와 학생 학부모와 짜고, 교사가 시험문제를 출제한 뒤에 문제지와 답지를 빼내서, 자기에게 잘해주고 뇌물 주는 유력한 학부모에게 그걸 넘겨주면, 학부모는 자기 아이가 그걸 달달 외워서 그 학교에서 1등이 되게 하고 싶은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그 불의한 교사에게 시험지 빼돌려서 자기 딸에게 시험지 주면서 ‘얘야, 이거 달달 외워라. 이게 그대로 나올 거야’라고 해서 아이가 달달 외워서 시험을 쳤는데 시험지가 바뀌었어요.
큰일 났어요. 시험지가 바뀌었어요. 인간은 내가 출제하고 내가 푸는 시험지를 고집했던 겁니다. 내가 보기에 바르게 살면, 하나님 보기에 바르게 산다고 출제를 본인이 내고 있어요. 본인이. 이 사회에 학교가 있다는 것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학교는 목적이 뚜렷해요. 어떤 집단보다 학교는 목적이 뚜렷한데, 학교에서는 하는 일이 뭐냐. 공부하는 겁니다.
인격도야? 아닙니다. 사람 만들기? 아닙니다. 교사에게 그런 거 요구하면 안 돼요. 교사에게 요구할 것은 학교는 사회로 가는 중간 과정으로써 사회에서 돈 버는데 필요한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쳐주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오직 하나만 생각해야 해요. 공부입니다. 딱 공부예요. 뭐 좋은 친구 사귀는 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딱 하나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매 맞아 가면서 배우는 곳이에요. 딱 그것만 생각하세요. 우리 인생에서 딱 그것만 생각하세요. ‘주님이여, 진리가 뭡니까? 아버지의 뜻이 뭡니까? 어차피 아버지와 만날 것인데 뜻이 뭡니까?’ 주의 뜻은 딱 그거예요. 네가 교만한 존재인 것을 알아라. 문제 딱 한 문제 나와요. 내가 장담합니다. 내가 장담하는 이유는 성경에 나오니까 장담하는 거예요.
문제는 딱 한 문제 나옵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건방지고 교만하고 완강하다는 사실을 네가 매일같이 경험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행할 것이 없어요. 사는 것 자체가 그러니까. 우리는 사는 것 자체가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요. 자존심 하나 믿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개뿔도 돈도 없으면서, 돈은 없어져도 자존심은 안 없어지네요.
꼭 집에서 키우는 개처럼 말이죠. 꼴랑 개 주제에 어디서 생겼는지 자존심이 생겨요. 개도.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느냐. 로마서 9장 18절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그다음에 한군데 더 보면 로마서 11장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입니다, Everybody.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게 정답입니다.
이스라엘 망했다는 말은 건방지고 교만했다는 말이고, 그러면 이방인은 뭐냐. 원래부터 건방지고 교만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뭐냐. 유대인은 건방질 때마다 얻어맞았다. 그러면 이방인은? 자기는 뭘 해도 건방지다는 것을 모르면서 얻어맞지도 않았다는 이 차이점이에요. 그 차이점에 뭐가 있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목격하라는 이 말입니다.
주님의 출제 문제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출애굽을 생각해 봅시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사람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나오게 하셨는데 나오게 하는 이유가 뭐냐. 나오게 하는 이유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에요. 훌륭함을 장려하고 상 주기 위함이 아니고 긍휼이라는 것이 뭐냐. ‘아휴...인간아...봐줄게’ 이게 긍휼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똑같은 인간인데, 한쪽은 봐줘서 구원해주고, 한쪽은 ‘그냥 완악하세요~~~’라고 보내버리는 그 차이점이 구원입니다. 인간은 인간성 안 달라져요. 백날 교회 나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교회 나온 부부들 보면 알죠? 둘 다 교회 나와서 복음 알아도 사람이 달라지던가요? 안 달라집니다. 타고났어요. 자존심 하나만 챙기는 존재들인데요.
그래서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뭘 목격하느냐 하면, 그 착한 바로 왕이 계속해서 그 강퍅의 강도가 점점 더 세진다는 것을 목격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열 가지 재앙입니다. 재앙을 보면서, 이쯤 하면 어느 정도 고집 세도 좀 놔줄 건데 안 놔줘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주께서 강퍅케 하셨다” 여기서는 완강케 하셨다고 나오죠. 둘 다를 씁니다.
출애굽기 9장 34~35절에 보면 “바로가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볼 때에 다시 범죄하여 마음을 완강케 하니 그와 그 신하가 일반이라,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라는 현상을 그렇게 가도록 이끄신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기밖에 모른다.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자기밖에 모른다. 똑같아요. 차이점은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른다.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은 그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십자가와 나와 관련 있음을 압니다. 십자가 사건이, 이건 내가 개과천선하라고 십자가 사건을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사도바울은 알았죠. 십자가 사건은 내가 어떤 꼬라지로 살든 간에, 내가 잘살던 못 살든 간에, 주께서는 이미 우리를 강퍅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로 간주해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나를 죽은 자로.
죽은 자는 죽을 만해서 죽잖아요. 죽을 만한 이유를 이제는 나이 70이고 80이고 살면서 그것을 속속들이 그때마다 경험하는 거죠. 경험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에요. 같은 취지로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방금 했던 출애굽기를 언급하고 요한복음을 봐야, 약간 이해가 되어요.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보면 마치 믿는 것이 본인의 의지로 믿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13절을 보면 그게 아니에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 하나님께서 새로 만드신 자. 뭘 집어넣어서? 십자가와 관련성. 새로운 시험지를 답안과 함께 다 같이, 십자가라는 문제와 해답을 같이 집어넣은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 자녀이냐, 왜 아들이냐. 예수님이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아들로서 갖춰야 할 그 속성을 이제는 자기 자녀에게도 그걸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가 사건으로 내 안에서 활짝 만개하도록, 꽃이 피도록 만들어버려요. 우리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외에는 내가 자랑할 게 없다’라고 했어요. ‘네가 고생했잖아’라고 주변에서 말하면 ‘그 교만?’이라고 대꾸하죠. ‘너 열심히 했잖아’라고 하면 ‘그 강퍅? 그것은 내 육신의 교만과 강퍅이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그런데 내가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긍휼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니까’라고 하죠.
그러면 왜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하느냐. 다른 사람은 소환이 안 됐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하던 대로 반복했을 뿐이에요. 그 반복이 이제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진짜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기쁨’이에요. 기뻐요. 자신의 일어나는 모든 일이 기쁨의 요소가 돼요. 빌립보서 2장 17~18절에 보면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오늘 기도하신 집사님의 기도내용대로 ‘너희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 목숨 가져가.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가져가. 가져가. 내가 이것도 기뻐하리라’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이것은 교만과 자존심과 자기 이기주의, 나밖에 모르는 거, 이게 쓸모 있다면 쓸모있는 데로 이렇게 못된 내 성깔도 쓸모 있다면 가져가. 이렇게 제시하고 기뻐하는 거예요.
내가 어디 있든지 항상 기뻐하듯이, 너희들도 어떤 환란을 당하든지 기뻐하라. 이것을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빌립보서는 사도가 옥에 갇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한 구절 더 보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왜? 십자가가 나오니까. 훌륭해서가 아니라 십자가가 나오니까. 강퍅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주께서 “아이고, 인간아...내가 건져 줄게”라는 긍휼이 나의 강퍅보다 더 세고 더 커요. 마치 핵우산처럼. 하나님께서 큰 우산을 덮어주신 거처럼. 우리의 교만하고 자잘한 일상을 주께서 긍휼로, 긍휼로 그냥 덮어주는 겁니다.
눈 떠보니까, 아침에 나가보니까, 모든 들판에 하얀 눈의 폭설이 온통 쌓인 것처럼, 모든 지저분한 것이 전부 다 하얗게 덮인 것처럼, 날마다 주께서는 십자가의 효과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거, 이게 어찌 매사에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을 위해서 선배격인 유다 민족은 심하게 맞았어요. 끝으로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생이 많겠습니까, 오늘날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고생이 많겠습니까? 답변은 제가 합니다. 우리가 더 힘들어요. 우리가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죄가 무르익을 때까지 무르익어서, 그들은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족했지만 이제는 안 돼요. 우리는 나이키 신어야 하고, 휴대폰도 폴더로 바꿔야 하고, 우리는 교만함과 건방짐이 세상 끝장을, 종말 때를 그대로 복사하고 있습니다.
언제 마지막 때가 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75억 인간이, 전부 다 건방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이 죄, 이 죄의 무게, 고생은 우리가 더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항상 매로 이스라엘을 때려줬는데, 지금은 십자가 사랑으로 저희를 때려주시니,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항상 주님 쪽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십자가 사랑으로 때려주시는 그것이 이 세상에 어떤 기쁨과도 바꾸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