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기 투쟁
2023년 12월 31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0-11
(15: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뀌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5: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간구하게 하리라
선지자는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끼여 있는 존재입니다. 이는 예레미야 속에는 인간들의 하나님을 보는 태도의 원형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 출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일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왜 자신이 굳이 힘들고 고생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정리가 제대로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돈 빌려주고 받는 것을 통해서 인간관계의 질서와 안정성이 어느 정도는 파악된다고 여깁니다. 그다지 악한 자가 아니라면 돈 관계가 깨끗하는 것을 증명이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들을 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사람들에게 평판이 나쁘지 않는다면 굳이 저주가 내릴 이유가 없다고 예레미야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레미야는 원인 모를 저주에 휩싸여 있다고 자기 형편을 진단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여전히 구약 사람입니다. 저주받는 것도 괴롭지만 그 원인이 파악 안된다는 것이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더 힘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레미야의 궁금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다른 말씀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간구하게 하리라”(렘 15:11) 즉 사적인 문제 해결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기도했건만 응답은 예레미야의 활용도에 관한 겁니다.
예레미야의 기도,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가 요구하는 선지자상을 치워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지자상을 그 자리에다 세우고 싶으신 겁니다. 완성적인 선지자상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신약에 가서 드러납니다. 곧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메시야가 아님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와 선지자 사이의 격차도 발견하게 됩니다. 선지자는 비록 메시야는 아니지만 이런 메시야 사이의 격차를 보여준다는 것이 선지자를 존재 이유입니다. 예레미야의 의심 속에서 인간 세계의 숨겨진 원형이 보입니다. 즉 “이왕에 태어나게 해놓고서는 왜 우리 자신들을 고생시키시느냐?”는 겁니다.
과연 이런 질문을 예레미야가 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불만과 반항은 이미 야곱에게도 있어 왔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과연 인간 입에서 거론될 내용인지를 문제삼아야 합니다. 시편 77:15에 보면,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속’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이 인간 세계에 등장한 것은 인간들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우리를 구원(구출)해 달라’는 기도는 분수를 모르는 외침입니다. 구원은 주님 자신의 업무입니다.
구원받은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 구원을 받지만 원래 ‘그들의 구원’이 될 수 없는 성격의 구원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구원과 실제 구원과의 차이남은 창세기 32장에서 드러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창 32:24-25)
과연 야곱이 하나님을 상대로 씨름할 자격이 됩니까? 안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씨름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야곱의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전환시키기 위함입니다. 싸름과 투쟁 없이는 이런 구원 전환이 아니됩니다. 애초부터 인간 구원이란 없습니다.
인간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구원이란 인간 세계에서 구원을 없애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생각한 세상이란 송장에다 치장하고 포장하고 메이크 엎을 해서 펼쳐진 세계입니다. 인간 세계에 구원이 없는 이유는 ‘자연’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해 놓으신 구원 작업은 인간 세계에서 구원을 지우고 원래대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창세기 1:2이 그 내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처음 창조 때,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계신 겁니다. 성신이 계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의 구원이 되려면 물 말고 다른 것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잠기게 하는 물의 위력을 능가하는 것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에서 나타났듯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죄를 무르익게 하시고 숙성되게 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가 찰랑찰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노가 잔에서 차고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창조를 무효로 돌릴 수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씨름하시므로서 인간 자체가 구원의 방해물이 됨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야곱과 씨름하시면서 결정적 한 방에 야곱에게 가격합니다.
야곱은 죽습니다. 더는 야곱이 자기를 붙들고 있지를 못합니다. 야곱은 자신울 놔주어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과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없는 그런 대상자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예레미야의 출생에 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렘 1:4-5)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에게 이미 예레미야가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
구원은 구원될 자격도 없는 자와의 투쟁의 결과로 새로 생겨나는 겁니다. 즉 다른 이는 빠지만 예수님께서는 유일하게 자신과 투쟁을 해서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죄있는 육신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없었던 그 시작의 시기와 끝의 시기를 모릅니다. 인간은 단지 주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우연적 존재일 뿐입니다.
즉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결정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주님에 의해서 이 땅을 살도록 허락받은 ‘완료형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날의 선지자인 우리 내부에 예수님의 투쟁이 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4강-예레미야 15장 10~11절(예수님의 자기투쟁)231231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0~11절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선지자가 갑자기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바짝 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전히 구약의 사람이에요. 구약의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러면 신약에 오는 예수님과 선지자 사이에 격차, 차이, 수준차, 이런 것들을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밝혀주십니다. 선지자 훌륭하죠. 대단하죠. 선지자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합니다.
그러나 그 월등함조차도 추락한다는 사실, 새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날개가 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거죠. 날개가 있어서 추락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를 통해서 바닥이 되는 인간 세상과 그리고 위의 세계, 하늘나라에 그사이가 인간의 활동으로써는 관여할 수 없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자기활동만 그 안을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그 활동 속에는 마귀도 함께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 격차가 난다는 사실 그 자체를 선지자의 일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것이 선지자의 존재의미예요. 이 격차가 오늘날 선지자뿐만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자신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계속 사는 이유가 되게 하십니다. 차이를 보여주라는 거예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 똑같은 말인데,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천국, 몸은 하나인데 두 세계에 동시에 담겨있는 이 희한한 상황.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들락날락하시면서 주의 말씀으로 우리를 도화지 삼아서, 하나님 자신의 그림을 우리 자신을 통해서 발표하고 있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지자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구약 예레미야 입장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 10절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고백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나를 차라리 태어나게 하지 말았으면 내가 이렇게 욕 얻어먹지도 않죠. 그러면 세상은 어떤 관계라서, 이 세상에서는 남과 좋은 관계를 해야 하느냐. 그 뒤에 절을 보면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과 인간관계는 대등한 관계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하는 그것이 살아있는 정의처럼 간주하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 타인을 평가할 때 한계가 이거예요. ‘당신, 할 도리 다했나?’, ‘다했다’, ‘나도 그런데. 그럼 됐네. 우리는 좋은 관계’라는 이것이 인간관계예요. 인간관계는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은 그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면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좋은 관계, 의리 있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고, 남의 돈 떼먹지 않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습니까? 도대체 구원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구원은? 천국 백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러한 단순한 질문을 우리 삶의 일상 속에서, 계속 우리로 하여금 물음이 나오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유도하십니다.
만나는 것은 전부 다 사람과 만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랑 만났느냐?”라고 묻고 있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밖에 안 만나서, 열심히 사람한테 좋은 인상 남기려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건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소용 있습니까? 내가 너를 어떤 식으로 다루었느냐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느냐를 묻습니다.
어떻게 다루었는데요? 너의 모든 출생 자체를 무효로 돌리겠다는 겁니다.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도로 들어가’라는 식으로 도로 네가 없던 곳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두 가지 반응이 있겠죠. 하나는 ‘섭섭합니다’라는 반응이 있을 거예요. 뭘 했다고 섭섭해요. 다시 원천으로, 네가 없는 존재로 내가 돌아가게 해줄게. ‘고맙습니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론상 있는 것을 없애주면 고맙죠. 하지만 예레미야의 고백 보세요. 고마운 것이 아니에요. ‘왜 이러십니까?’라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동안 무슨 녹(綠)이 우리 안에 껴있는가. 태어나서 열심히 살았다가 끝이 아니고, 태어나서 살면서 어떤 쇠 녹 같은 것이 끼었느냐 하면 ‘저를 도로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어떤 반항기?, 대듦?, ‘너무 저를 힘들게 하지 마세요’라는 어떤 요구사항?,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우리 내부에 녹처럼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회사 처음 입사할 때, 직원들은 말합니다. ‘목숨을 바쳐서 이 회사에 충성하겠습니다’ 인사담당자도 그런 것을 묻지요. ‘입사했다고 치고, 어떻게 살 겁니까?’라고 물으면 ‘지난날 청산하고, 회사가 살아야 내가 산다는, 회사 없이는 나는 못 산다는, 회사 없이는 내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이걸 매일같이 되풀이하면서,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해서 이 몸 바치겠습니다. 이런 식이죠.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그런 동일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뜻은 이겁니다. “그러지 마. 그런 소리 하지 마”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네가, 너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미안하도록 만들 것이다. ‘Hard to say I’m sorry’ 나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거죠. 팝송인데 시카고(Chicago)라는 가수가 불렀어요.
미안하다는 말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걸 무엇으로 바꾸느냐, 신약시대가 되면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만들어버려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쉽게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고, 남들에게도 마찬가지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만나는 사람마다. 그 노래 가사에도 나와요. ‘Everybody’라고. 미안하다는 말은 ‘고맙습니다’ 또는 다른 말로 ‘감사합니다’
주님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이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는 것은 뭔가 수상한 괴물로 내가 변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괴물로 변하면 변할수록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있어서 항상 요구하는 것이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라고 그런 질문할 수 없는 질문을 하나님 앞에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쉽게 이해하면, 예레미야 입장에서 ‘하나님, 저 예레미야 구원받았지요? 구원받았는데, 이 구원받은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 질문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이제 수정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 예레미야를 비참하게 만들어요. “너 태어났느냐?”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비참함이 뭔지를 내가 친히 보여줄게”라고 하시는 겁니다. 1948년도에 이태리(이탈리아)에서 만든 영화가 있어요. 한국에도 소개되었는데, ‘자전거 도둑’(이탈리아어: Ladri di biciclette, 영어: Bicycle Thieves)입니다.
패전국이 된 이탈리아가 너무 못살았어요. 일자리 구하기도 너무 힘들었고요. 결혼은 했고, 아이는 있는데, 일자리가 없어요. 아버지가 자기 자존심을 걸고, 그래도 사나이인데, 그냥 논다는 소리는 죽기보다 더 싫으니까, 2년 동안 부지런히 일자리 구하려고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다가 일자리 하나를 얻었어요. 그런데 조건이 있었어요. 자전거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없으면 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전거를 구하려고 했어요. ‘와~~, 드디어 나도 사람값 한다. 내가 이 집안에 가장 값을 하는, 내 자긍심이 높아지는 순간이 드디어 찾아왔다. 이제는 누구도 밥값도 못한다고 나를 욕할 수 없다. 이제는 가장으로, 내 손으로 내 가족을 먹여 살리리라’ 인간세계에서는 하나의 남성으로서 너무나 자랑스러운 순간이 오겠지요.
그런데 그 자전거를 잃어버렸어요. 그걸 누가 알았느냐. 아들이 알았어요.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몹시 고민하는 것도 알았어요. 자기는 아버지가 놀아도 아버지가 존경스러웠어요. 실망스러운 아버지가 아니었어요. 가족을 위해 세세히 노력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못된 도둑이 자전거를 가져갔어요. 그 당시에 이탈리아는 도둑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자기 아들이 나서서 아버지와 같이 자전거 찾으러 온 동네를 다 돌아다녀도 못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자전거 하나가 보관되어있는 것을 보고, 그 자전거를 아버지가 훔쳐요. 그 모습이 아들의 눈에 뜨인 겁니다. 그것도 아버지가 자전거를 훔치다가 실패했어요. 도둑질도 해 본 사람이나 하지. 들켜서 얻어맞았어요. 그걸 보며 아들이 우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아버지, 결국은 자전거 도둑이 되는데, 그 이유가 자식인 아들 하나 먹여 살리려고 자전거 도둑까지 감수하는 아버지의 모습, 있는 사회상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서 그것을 신사실주의적(네오 리얼리즘) 영화라고 해요. 그 당시 시대상을 꾸미지도 않고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요.
인간세계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세계 자체가 이게 종교 세계가 되어서, 인간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사실적인 거,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살아야 한다는 이것을, 이런 모든 시도를 곱게 포장하고 메이크업하고 치장하고, 이것을 하나의 세상이라고 그렇게 단정 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살이에 누구도 말려드느냐 하면 예레미야도 같이 말려들었어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모친을 통해서 태어나게 해서, 나를 이렇게 우사스럽게 만들고, 남에게 한 것도 없는데 욕은 바가지 바가지 얻어먹게 왜 이렇게 삽니까?’라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실적 기도죠. 사람들이 제게 묻죠. ‘목사님, 복음 알고 앞으로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제가 생각할 때는 ‘아직 많이 배가 불렀구나’라는 거죠. 많이 배가 불렀어요.
현재 자기 가진 것 가지고 얼추 살만하니까, 굳이 기도할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기도할 이유마저 없으면 교회 나오지도 않지요. 부끄러워서. 하나님의 방법은 그렇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하느냐고요? 거기에 대한 질문답변은 뭐냐 하면 ‘너를 다시 없애줄게’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 1장 1~2절에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렇게 보면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고민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뒤에 뭔가 태어났다면, 창세기 1장 2절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때는 물과 성신, 요새로 말하면 성령이죠. 성령과 물밖에 없어요.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위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한번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현재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환원시켜버리고, 네가 없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나도 예수님으로, 메시아로 이 땅에 왔지만, 나는 사라져야 하는 세상에 왔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것처럼 너도 좀 사라지면 안 되겠니? 원망하지 말고, 왜 나를 태어나게 했느냐고 하지 말고, 다시 없애버리는 작업,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그 작업이 구원작업입니다. 그게 구원작업이에요. 따라서 구원은 내가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예 구원 자체를 생각한다는 자체가 시건방진 생각이라는 것을 고발하시면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구원은 내 몫도 아니고, 내가 요구할 대상도 아니고, 우리 목표도 아니에요. 우리는 목표를 가질 하등에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려면 어떻게 하느냐. 일단 물로써 세상을 하나님이 진노로 모든 사람을 덮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가두게 하죠.
여기에 딱 적합한 노래가 있어요. 네 자인데, ‘찰랑찰랑’ 완전히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채워버려요. 그걸 가지고 고상하게 말해서 “죄가 관영 했다” 죄가 이 세상에 꽉 찼다는 겁니다. 꽉 찼을 때 예레미야 같은 그러한 화냄과 분노로 꽉 채워지는 거예요. 태어나게 했는데 왜 고생시키냐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도 찰랑찰랑 되기를 바랍니다. 항상 하루라도 살면 산 만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찰랑찰랑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대비해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못산다 못산다 하는 것이 자연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게 자연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주께서 지적해요. 인간 문제.
그럼 인간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독일의 물리학자, 1879~1955)의 상대성 원리에 이런 게 나와요. 속도를 빠르게 하면 시공간이 축소된다는 원리가 상대성 원리예요. 속도를 아주 빨리 가져가는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시간을 압축시키는 함축된 내용을 선지자 속에 그걸 담아버립니다.
담아버리면 남들은 40년, 50년은 살아야 깨닫는 그것을 선지자는 얼마 살지도 않았지만, 그 안에 함축되어 진리가 들어있게 만드는 거예요. 진리가 뭐냐. 진리라 하는 것은 시작과 끝을 압축해서 담아있는 것이 진리예요. 시작도 알고 끝도 아는 거예요. 시작은 사람이 없는 것이 시작이에요. 끝은 예수그리스도 세계 밖에 없는 게 끝입니다.
그 사이에 사람이 원래 없었는데, 마지막에는 주님의 나라가 있다. 그 안에, 주님의 나라에, 사람들도 같이 섞여 있고, 거기에 참석한 인원들이 있다. 그러면 그사이에 뭐냐. 뭔가 나타났다가 사라질 것들로 채워지겠지요. 그 시간을. 그 채워진 시간 중 하나가 우리의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왜 굳이 예레미야가 자기 출생 자체를 문제 삼는 질문을 굳이 해야 하는가.
이게 창세기 32장에 이미 야곱이 했던 거예요. 사실은. 거기 보기 전에 시편 77편 15절에 먼저 보면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 구원했다고 되어있어요. 자, 구원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구원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조치로 출현 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팔로 주의 백성 야곱을 구원한단 말이죠. 구원은 인간에게 없는데.
그러면 구원 자체를 위해서 이스라엘이 이 땅에 등장해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묘사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출현한 겁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그것까지 생각을 못 하고 있어요. 예레미야만 못 한 것이 아니고 야곱과 요셉의 자손도 몰라요. 그러니까 요셉은 야곱의 자손이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마주했는가를 창세기 32장을 보자는 거죠.
2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결정적 한 방이 들어왔단 말이거든요. 결정적 한 방은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이 존재하지 않을 때 주어졌던 그 힘이었어요. 야곱이 없을 때 있는 힘은 언약의 힘이고, 언약의 힘이 야곱이라는 인간을 출생시켰습니다.
그러면 야곱 안에 언약의 힘이 스며든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자기가 태어나서 자기를 치장하고, 메이크업하고, 포장해요. ‘하나님, 저 언제 구원할 겁니까?’라는 소리를 매일 하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오니까, 야곱이 오해하기를 내가 복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복을 받았으니까, 다시 말하면 야곱은 자기가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이 구원자거든요. 구원자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를 하나님이 쳐버리시는 사건이 바로 얍복강 사건이에요. “구원같은 소리 하고 있네. 왜 구원을 네가 갖고 있어? 내가 갖고 있어야지” 한마디로 말해서 너는 너를 상대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뭔데? 오늘 제목은 ‘네가 뭔데?’로 하고 싶네요. 네가 뭔데 왜 너를 상대해? 너를 왜 아껴.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반발이 왜 나와. 우연적 존재인데요.
무한이 아니고 유한이에요. 우연적 존재. 놀라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야곱이 진짜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그 씨름에 의미가 있어요. 싸움 대상도 안 되는데 싸운 거예요.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과 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하나님과 씨름한 겁니다. 야곱은 미리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과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분은 예수님의 자기 투쟁뿐이에요.
예수님의 자기 투쟁. 우리는 그냥 부스러기라니까요. 주님의 자기 투쟁은 악마와의 싸움이죠. 이번 수련회 제목이 영적 싸움이에요. 우리는 영적 싸움을 할 쨉도 못되고 그런 위치에도 있지 않아요. 영적 싸움은 주님이 도대체 뭘 이겼으며, 주님 자신에서 이김으로써 어떤 구원이라는 능력이 우리에게 나왔는가.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잖아요. 그 부활의 능력이 없으면 어떤 인간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것이(롬8:11),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우리 공로가 아니에요. 주님의 죽으심 자체로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뭐 하라고?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증거 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성도로 만든 거예요.
구원의 대상자는, 언약의 대상자는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야곱 아니에요. 예레미야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예레미야가 지금 뭘 잊었느냐 하면 예레미야 1장 4~5절을 잊어버렸어요. 잊지는 않았을 거예요. 다시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네가 만들어지기 전에 나는 너와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야곱과 에서가 이 땅에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 인간을 상대로 어떻게 그렇게 힘든 발언을 쏟아내십니까.(롬 9:11) 그건 우리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데. 주께서 알아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너는 말씀의 결과물이에요. 창세 전에 이미 너를 알아서, 너는 몰라도 되는 예수그리스도를 알도록 그렇게 한 것은 너의 구원이 아니고,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어떤 구원인지를 알리기 위해서 너를 부수적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것을 근거로 해서 ‘주님,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쉽지요. 이건 주님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너무 쉬운 거예요.
‘Hard to say I’m sorry’라고 하는데, 어려운 게 아니에요. 너무 심플하고 너무 간단해요.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물속에 잠겼고, 같은 성령 안에 있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살아생전에 원 없이 미안하다는 소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 미안하다는 소리 하나 없어서, 관계가 틀어지고, 싸우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평생 원수가 되는 그런 식의 모든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놔주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상대하지 말고, 주님이 홀로 상대하는 결과로써 오늘날 우리라는 그러한 성도가 되었음을,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