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믿음
2023년 12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7
(15: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15: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15: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15: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15: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15: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15: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우리 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는 그저 매일 열심히 살아내는 일입니다.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조치는 단호합니다. 마치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일까지 요구하시고서는 그 요구에 미흡하다고 단호하게 벌내리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횡포처럼 느껴질 겁니다.
장사하는 사람, 들판에 양이나 염소 키우는 사람, 밭에서 채소 가꾸는 사람, 새벽 동트기 전부터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 모양 위험한 앞바다에 뛰어드는 어부들, 이 모든 이들에게 삶의 죄를 묻는 것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대들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몫을 늘 챙기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사는 형편을 더욱 악화시키겠다는 선지자를 통해서 통보해 버리면 인간들로서는 뭘 더 하라는 말씀인지 대처하기가 난감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므낫세’라는 인물입니다. 즉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에게 순종한다 할지라도 왕 하나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라에 속한 모든 자들은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국가 시스템이 참으로 불합리하게 보일 겁니다.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도록 독려하고 부추기는 식으로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너희들 끝났어!”라는 통고하십니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즉 이스라엘의 미래를 좋게 이어지게 하는데 있어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므낫세라는 왕이 저지른 잘못은 그 후대의 왕인 요시아 왕이 아무리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도 상쇄될 수 없습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왕하 23:25-26)
하나님께서는 므낫세를 통해서 유다지파에 대한 그 어떤 미련도 갖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점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모세와 사무엘이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시하고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기 이전에 이미 인간은 자신의 속해 있는 환경을 바꿀만한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모세는 일종의 ‘민족해방운동’을 생각한 사람입니다. 무지몽매한 히브리 민족에 대해서 계몽에 나설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이 애굽인들이 히브리인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모세가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모든 손을 놓고 애굽나라에서 수배인이 되어 도망쳤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영향력도 끝이 났습니다. 그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게 하신 일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이스라엘 전체 삶에 도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 율법에 의하면, 축복도 있지만 저주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로 인하여 나라를 살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모세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도하는 나라로 이스라엘이 본격화된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운명은 율법의 진척과 관련되었습니다. 인간은 빠지고 율법입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 당시에 같이 있었던 인물은 사울왕입니다.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존속에 대해서 관심이 컸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키면서 이스라엘은 유지하는 것이 왕으로서 해야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보기에 사울왕이 왕으로 있는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무엘 관점에서 볼 때, 다윗왕에 의한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과연 시편 78:67-6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따라서 유다지파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다. 북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것은 남쪽 유다나라만큼 필히 꼭 지켜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놀랍게도 유다지파이며 다윗의 혈통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마저 무너뜨리려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을 책임질 사람들은 일반 백성 차원이 아니라 왕의 차원에서도 사라지게 됩니다. 유다지파마저 무너질 때, 과연 최후로 남은 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유다의 혈통으로 내려운 ‘다윗의 자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이룰 단독자요 유일한 분입니다. 따라서 신약에 와서 최종 믿음은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이것을 잘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방인으로 믿은 백부장과 유대인을 예수님을 찾아 온 왕의 신하의 신앙의 차별성입니다.
마태복음 8:8-9에 보면,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인 왕의 신하가 믿는 믿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7-48)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싣고 오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신앙인은 그저 말씀을 가지고 자신에게 지시만 하셔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어느 신앙이 최종 신앙입니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판결내시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0-1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뜻으로 우리의 뜻을 다스리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2강-예레미야 15장 1~7절(최종 믿음)23121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계시 내용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다는 것으로 굉장히 긍정적으로 받아주는데, 막상 보내준 편지의 내용을 뜯어보니까 이런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이 뜻대로 할 테니까, 부디 나를, 하나님을 욕하고 너의 본색대로 그냥 가버리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네가 아무리 나에게 오려고 하더라도 내가 너를 네 가지의 벌로써 다룰 것이다.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너를 없애겠다는 겁니다. 없애겠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땅에 내 백성이 과연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과연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주님의 일관된 계획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은 없다. 이게 하나님의 변함없는 추진력이에요.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물론 이 말을 하나님에게 하지 않고 예레미야에게 할 거예요. ‘예레미야, 좀 봅시다’라는 식으로 불러내서 ‘당신은 우리에게 무슨 감정이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올 겁니다. ‘우리를 이렇게 저주하니까 당신은 재미있지? 그지? 당신 즐겁지? 그지?’라는 식으로 시비 걸 수도 있는 문제이고요.
예레미야에게 이런 시비를 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이겁니다. 옛날에 들었던 하나님의 계시와 지금의 계시가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의지할 만하고, 기댈만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약간은 다들 남아있는데, 당신의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결과를 다 아는 것처럼, 모든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 상황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께 가졌던 좋은 감정은 소용없다는 말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져야 우리답다는 그런 주장을 당신이 하는 것이냐고 이렇게 따질 수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대화 상대를 우리 인간 쪽에서 할 의도가 있는데, 왜 하나님 쪽에서 성급하게 인간의 대화를 차단하고 끊어버리느냐. 그 내용으로 인간은 받아 줄 수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모르는 것이 뭐냐면,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사랑하다,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냈다’라고 인간에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사랑이 많으시다고 하나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했던 그때나, 지금 우리의 마음이나 변함이 없다고 그들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진 것이 한결같고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내 마음은 한결같은데, 돌아가는 모든 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예레미야의 말씀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어디가 문제점이 있는가. 본문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라는 말이 있어요.
여기에 므낫세라는 말이 있어요. 므낫세 왕이거든요. 그 므낫세 왕이 하는 짓이 저울에 달면 비중이 어느 정도로 확실하게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거운가 하면, 오늘 본문 15장 1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되어있어요. 그럼 저울을 한 번 달아봅시다.
여기에 모세와 사무엘을 달아놓고, 그쪽은 모세와 사무엘의 착함과 순종함이고 반대쪽은 므낫세 왕 개인의 악행, 그것과 무게를 달면 어느 쪽이 무거우냐 하면 므낫세 쪽의 악행이 더 무거워요. 그래서 모세와 사무엘의 순종의 결과도, 그것은 므낫세의 악 앞에서는 하나 마나가 되는, 마치 없는 것같이 무효가 되는 겁니다.
이건 더 나아가서 예수님 하는 것 빼놓고, 나머지 다른 인간이 얼마나 순수함과 순결함과 충성과 봉사와 희생, 그것이 효과 없다는 이야기예요.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효과 없는 거예요. 3대째 장로 집안, 4대째 목사 집안, 이런 거 효과 없습니다. 아무짝도 쓸모없어요.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분명히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벌을 유보한다는 말씀도 있는데, 왜 그 효과가 없느냐.
후세에 와서 다 까먹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게 소용이 없어요. 그러면 우리의 초점이 자연적으로 어디에 초점이 모이느냐. ‘므낫세, 너 나와’라고 되는 겁니다. 구약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를 쭉 읽어보게 되면, 너무 화가 치밀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해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했건만, 결국 되어가는 꼴이 좋은 쪽이 아니라 점점 망해버려요. 화나지요.
이스라엘의 봄은 언제 오는가. 서울의 봄 말고요. 도대체 악이 이렇게 설치는데, 그걸 저지할 만한 그런 대단한 장군은, 군인같은 군인은 왜 없는가. 인간다운 인간은 왜 없는가. 구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때려치우는 핑계 중의 하나가 ‘왜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못났는가.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했건만 왜 그들은 우상만 섬기고 악행을 하느냐. 이스라엘 사람들 화딱지 나서 더는 못 보겠다’라고 한소리 하는데, 그러한 평가 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리 은혜를 줘도 우상을 섬겨서 안 된다’라는 그런 평가는 이미 뒤에 일이 다 벌어지고 난 뒤에 오는 평가예요.
인간 당사자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자기 딴에 열심히 인생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열심히 사는 거, 이것보다 진실하고 이것보다 더 옳은 일이 없어요. 내 목숨 하나로 태어나서 내 인생을 산다는 거, 그게 뭐가 나쁘냐? 후세에 하나님이 그게 우상숭배라고 하든 뭐라 하든 나는 모르겠고, 중요한 것은 내 인생 내가 살기 위해서 뭐든지 한다는 거, 그게 왜 나쁘냐는 식이죠.
그게 나쁘다면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다 나빠요. 왜? 그렇게 안 살아가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어느 것이 옳은 길이며, 어느 것이 나쁜 길이며, 어느 길을 가야 하고, 어느 길은 가서는 안 됩니까?’라는 말을 수시로 기도하면서, 말씀 보면서 응답을 받지만, 근본적으로 그게 먹히질 않아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래서 내가, 이 땅에 버티고 살고 있다. 그건 남는 장사잖아’라는 그것뿐이에요.
목적이 우리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살아남으면 남는 장사예요. 그 외에는 전부 다 구색이고 핑계에 불과합니다. 소용없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하면서 결론부터 먼저 내리면 좋을 것 같아요. 앞에 너무 이야기해버리면 복잡하니까, 결론은 이겁니다. ‘천국에는 문이 없다’ 문이 없어요. ‘계십니까? 똑똑똑’ 두드려도 소용없어요. 문 자체가 없어요.
반면에 지옥은 활짝 열렸어요. 그냥 가시던 길 고이 보내드리면 지옥입니다. 보람상조를 하든 뭘 하시든 그냥 하시고, 쭉 가시면 지옥이에요. 문이 활짝 열렸어요. 넓은 문이고 넓은 길이에요. 좁은 길은 없어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주의 뜻은 이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해도, 너 하는 일로 이 땅이 지옥 쪽이라는 것은 달라진 것이 없고,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 땅은 지옥임이 요지부동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괜히 지옥의 일 부를 살아가면서 내 인생은 지옥이 아닐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세요. 지옥의 일 부로 우리는 한 움큼 담당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 언제 하나님 찾는가. 어려울 때 찾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걸 우상숭배라고 하는 겁니다. 아예 안 찾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찾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세 사람을 우리가 비교해봅시다.
모세, 사무엘, 므낫세. 주께서는 저울을 달았기 때문에, 우리도 같이 저울을 달아보는 겁니다. 모세가 한 일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내가 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이게 모세가 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모세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어떤 세력을,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외부의 세력권을 이스라엘 내부로 들여온 자가, 그걸 수입한 수입업자가 모세예요.
그러니까 모세를 통해서 저주가 가속이 붙고, 본격화된 겁니다. 그냥 모세가 착하게 살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모세가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있을 때 그랬어요.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고, ‘나는 민족운동하고 민족투쟁 운동하면서 안중근 의사처럼 되자. 우리 히브리인들은 교육을 받아야 해. 교육을 받아야 우리가 힘을 합쳐서, 그 지혜로 우리가 이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어’라고 주장한 사람이 안창호(독립운동가) 선생님이잖아요. 학교 세워서 후학을 양성해서 우리도 선진국 만들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방식이 뭐냐. 애굽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지혜를 모아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있는 방안을 인간의 교육을 통해서 깨닫게 하자. 이게 안창호 선생님의 주장입니다. 기독교를 빌리든 말든 주장은 그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모세를, 민족해방 주의자를 수배자로 만드셔서 ‘에라,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도망치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모세는 손 털었습니다. ‘나, 이 일에서 빼주세요. 나는 안 합니다. 할 대로 다 해봤는데, 이제 안 합니다’ 모세는 이미 알았어요. 나의 영향력이 이 민족해방에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본인의 개인적 인생 경험을 통해서 이미 정리가 되었어요. 민족을 해방하든 뭘 하든, 이건 누구 소관이다? 내 소관이 아닌 겁니다. 인간의 힘으로써 하나님 쪽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차단되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없습니다. 그다음은 사무엘. 사무엘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에 사무엘이 같이했던 왕 이름이 뭐냐. 사울 왕이에요. 사무엘이 안 것이 뭐냐면, 사울이 왕이 된 이상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나 사울 왕은 사무엘과 대비해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내 조국, 내 사랑하는 조국, 아~대한민국, 이거 끌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사울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내서 고생고생하면서 약속의 땅에 왔으니까, 그러면 약속의 땅에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거냐. 우리가 힘을 모아서 이 약속의 땅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뭘 가지고? 모세가 준 말씀을 가지고 지키면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다. 이게 사울 왕의 주장이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이 사무엘의 주장이에요.
그때, 그때마다 주어진 사건, 사건이 율법을 못 지키는 너희를 대신해서 하나님이 율법의 내용대로 마지막 종착점까지 끌고 간다는 것이 사무엘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보고 ‘내 옷을 잡지 마라’라고 사무엘이 말했는데 그래도 잡으니까 옷이 찢어졌어요. 옷도 참 시원찮게 만들어져서, 사울 왕이 옷을 잡으니까 찢어졌어요.
딱 찢어진 것을 보고, ‘그래, 이거야. 옷이 찢어지듯이 찢어지게 되어있어’라고 사무엘이 말했어요. ‘네가 생각한 나라는 애초부터 하나님이 생각한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진짜 이스라엘은 너 대신 다른 왕이 등장할 거야’ 그 왕의 이름이 바로 다윗인데,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할 것은 사울은 베냐민 지파인 반면에, 다윗은 유다 지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해서,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지파를 다윗 지파로 노선을 바꿔놓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지파가 광주 갈 거냐, 부산 갈 거냐를 결정할 때, 이미 노선을 바꾸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단으로부터 지파로 노선을 바꾸고, 지파에서 하나의 개인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의 개인.
왜 개인이냐. 모든 인간에게 천국은 없는 거예요. 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 못 지키면 천국은 덩달아 없는 거예요. 율법이 원하는 의가 없으면 그 사람은 천국을 가더라도 못 삽니다. 천국을 가려면 천국에 맞는 개인으로 초기설정이 바뀌어야 해요. 현재 설정된, 이걸 영어로 ‘Default’라고 하는데요, ‘Default’라는 것은 지급 불이행이라는 뜻도 있지만, 원뜻은 초기설정을 의미합니다. 컴퓨터 설정할 때에.
이 땅에서 설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설정된 존재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일관돼요. 이 땅의 초기설정을 제거하는 겁니다. 없애버려요. 네 가지 벌로 다 없애버리고 흩어버리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신약에 와서 완전히 노선이 인간 손에서 벗어나는 노선이라는 것을 아직까지 모르기 때문에, 예레미야도 몰랐어요.
이스라엘에 장차 다윗이 올 거라는 이 정도만 알았지, 다윗마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어요. 다만 계속 기대와 희망을 건 것뿐이에요. 구약 사람들은.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맨날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어요. 유다 지파로 노선을 바꿨습니다. 노선 바꾸는 대목이 시편 78편 67~68절에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여기에 유다 지파를 택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주셨을 때 유다 지파 사람들이 얼마나 기가 살고 자부심을 느꼈겠어요. ‘그렇지. 저 북쪽, 북이스라엘 날아가 버려. 멸망하라고 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북쪽을 날아가게 하신 것을 무슨 뜻으로 이해했느냐 하면, 남쪽은 끝까지 보장하겠다는 뜻으로 남쪽 사람들이 받아들인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이 북쪽을 날려버리신다는 것은 남쪽만큼은 보장해준다고 오해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서니까, 한쪽 제거한다는 것은 한쪽은 남겨준다고 생각했죠. 만약 이것도 날라가면, 이스라엘은 공중 분해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자신이 모순되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 북쪽은 날려도 남쪽은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이해한 겁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자부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 자부심 있는 중에 누구냐 하면, 바로 므낫세가 나옵니다. 므낫세 왕은 유다 지파에 속해요. 다윗의 후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다 지파의 므낫세가 지은 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열왕기하 23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두 왕이 등장하는데, 그중에 요시야 왕은 너무너무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왕이 요시야 왕이에요.
요시야 왕만큼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르게 산 왕이 없다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구약 역사를 성경을 통해서 쭉 보게 되면, 그 뒤를 모르는 사람은 ‘야~, 드디어 요시야 왕 때 이스라엘 유다 나라가 명맥(命脈)을 유지하겠구먼. 역시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를 안 버렸어. 요시야 왕이 나왔으니 유다 나라는 절대로 안 망할 거야’ 아무리 앞에 악한 왕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뒤쪽에 있는 착함이 앞쪽에 있는 모든 악함을 용서해 주실 거라 생각하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에 보면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니까 ‘이것이 치킨이냐 갈비냐.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라는 영화 대사 기억나죠?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왕이 있느냐.
그다음 26절을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라고 나와요. 요시야 왕이 투입되었는데도 유다가 멸망하는 것에 대해서는 브레이크(제동기)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이 대목을 여러분들이 보실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 한 50년 정도는 했기 때문에 이 대목은 다들 한 번쯤 보셨을 거예요.
무슨 생각이 듭니까? 그러면 요시야 왕의 착함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면, 기왕에 멸망할 건데 요시야 왕은 왜 착하냐는 겁니다. 이게 의문점이 되는 거예요. 착해도 소용없으면 왜 착하냐. 둘째 아들은 착했더라. 큰아들은 망나니였더라. 그게 드라마가 되려면 망나니가 되더라도 둘째 아들이 너무 착해서 재벌 3세의 여자와 결혼해서 집안을 일으켰다고 해줘야 드라마 볼 마음이 나는데, 큰아들은 망나니였고 반대로 둘째 아들은 너무 착했더라. 그런데 소용없다. 그 집안 망했다. 드라마 끝.
이렇게 해서 그 드라마 시청률 오르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도대체 왜 이게 아무짝도 소용없이 된 것인가. 그 이유를 이제 설교를 마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8장 5~9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방인)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마소서’ ‘그럼 어쩌라고?’ ‘그냥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최종적으로 마감되는 시점에서 비로소 생산되는 믿음이 이 믿음이에요. 그런데 요한복음 4장 46~47절에 보면 왕의 신하가 나와요.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유대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기적을 실어나르는 식으로 이 땅에 메시아가 올 거라고 하는 겁니다. 기적을 실어나르는 식으로.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어떤 신앙이냐 하면 하나님이 오시면 기적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배달의 민족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토바이 타고 ‘삐리삐리삐리릭’ 하면서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방인은 뭐냐. ‘오실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갈까?”라고 해도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옵소서’ 어느 것이 최종적이냐는 겁니다. 어느 것이. 내가 원하는 기적을 들어주는 것이 하나님다운 것이냐, 아니면 ‘시켜만 주이소. 저에게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라는 것과 어느 것이 신앙이고, 어느 것이 최종적이냐. 최종적인 것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다 쫓겨나가고, 이방인의 믿음이 없는 천국에,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마8:11) 한쪽은 하나님과 협력하려고 하고, 이방인은 “저같은 경우는 협력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냥 시켜만 주시면 됩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이 우리 성경에 있잖아요. 뭘 꼭 기적을 만나야 하고 봐야 합니까?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데요. 그 말씀대로 보면 “너는 결국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해”라고 말씀하시면 그냥 ‘오케이’할 문제지 ‘그러면 제 인생이 너무 괴로운데요, 너무 꼬이는 데요’라고 궁지렁궁지렁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예 언약이 없는 자여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거예요.
주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기만 한다면 더는 소원 없습니다. 이게 바로 최종적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 지파가 구원받는다고? 아닙니다. 유다 지파는 잘려야 해요. 마지막에 남는 다윗의 자손은 유다 지파가 아니에요. 오직 다윗의 혈통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어느 문구에 보니까, 이런 문구가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임윤찬, 드디어 그가 한국에 오다’ 임윤찬이 누구냐 하면 열아홉 살 먹은 피아니스트예요.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인데 뭐라고 쓰였느냐 하면 ‘임윤찬, 드디어 그가 한국에 오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국인 아닌 사람처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났을 때, 성도는 알아요. 이방인 중에 믿는 자는 알아요. 유대인 중에 믿는 자는 물론 알고.
‘그분은 이 땅의 사람이 아니었다. 드디어 그분이 오신다’ 그렇다면 모든 주의 말씀은 딱 하나예요. ‘그분이 오신데’ 그게 캐롤송에 나오잖아요. 산타클로스가 우리 마을에 오신다는 노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거. 백부장의 믿음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자체가 천국의 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문이 우리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니, 우리 자신이 이제는 이 땅에 천국의 문으로써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