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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직신학 10강 (중생과 칭의)

아빠와 함께 2013. 1. 12. 13:25

10강. 조직신학

 

중생과 칭의1-1

 

 

05. 10. 10 강의 이근호목사

 

서울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하고 칭의, 의로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겠습니다.

 

중생에 대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식으로 중생을 생각하신다면 혼란에 빠집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에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이 있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고 거듭나고 싶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은 욕망은 기독교라는 것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결혼생활에 파탄이 오면 다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떤 부인들의 통계에 보니 지금 살고 있는 남편과 다시 살고 싶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하여 80%가 다른 사람과 살고 싶다는 그런 고백, 당연한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 또 살겠습니까? 남자들은 반 이상이 지금 살고 있는 아내와 살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그만큼 남자들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와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분들은 인생을 팔자를 다시 고치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인생의 지우개가 있다면 지우고 다시 살고 또 지우고 다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자분 들이 옷 살 때에 잘 샀다고 집에 와보니 마음에 안 들어 다시 바꾸러 가고 바꾸고 와보니 또 마음에 안 들어 바꾸러 가고 하는 것처럼 사람은 자꾸만 바꾸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 바꾸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 한번 다시 살고 싶다. 한번 바꾸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욕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온 우주를 다 가진다고 할지라도 이 욕망은 흡족함이 없습니다. 계속 목마른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다섯 명을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하여튼 능력이 있어요! 미모가 되니까 그렇겠지요! 보통 사람이야 엄두가 나겠습니까? 다섯 명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산다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삶의 모습을 어디에다가 결부를 시키는가 하면 마치 사람들이 목마를 때 우물에 와서 물을 퍼서 마시고 또 목마르면 우물에 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그런 갈증과 이 여인의 인생살이와 같이 본 것입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다시는 갈증이 없는 그런 인생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욕망입니다. 따라서 내가 거듭 태어나고 싶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입니다. 누구든지 갖고 있는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이며 사람의 뜻입니다.

 

이런 자신의 불타는 야망이 있는 것을 가지고 요한복음 3:8절을 들이대면서 예수 믿으면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고 우기는 것은 성경전체의 흐름과 전혀 맞지 않고 자기 환상에 빠진 격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거듭남의 비결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박옥수 목사입니까? 거듭나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거듭나봐야 목마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한 그런 수는 없겠습니까? 왜 없겠어요? 있지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죽으면 되지요! 목마르다고 느끼는 그 주체가 아예 사라져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목사님께서 오렌지 주스를 주셨는데 마셔보니 시원하고 맛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렌지 주스가 하나도 없다고 하고 제가 목마르다고 목사님 오렌지 주스가 더 있습니까? 할 때에 목사님이 권총으로 저를 쏘아 죽이면 됩니다. 아 조용하다. 오렌지 주스 마시고 맛있다고 더 달라고 하는 그 인간을 권총으로 쏘아 죽여 버리면 조용하게 됩니다. 누가 또 목마른 사람 없어요? 하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지 못하여 헉헉거릴 때에 하나님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런 인간을 제거해버리면 됩니다. 죽여 버리면 됩니다. 다시 태어나서 영생 얻고 싶다고 하면, 영생 얻고 싶다고 하는 그 인간을 죽여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고상하게 성경적으로 말하면 육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육도 죽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든 세례요한이든 이 세상을 거쳐 간 것은 다 죽습니다. 이 세상을 한번 경험했다면 다 죽습니다. 이 세상의 맛을 보았다면 다 죽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수상합니다. 재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작자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하냐? 직업이 무엇이냐? 와 상관없이 그들 속에는 이미 이 세상에서 형성되고 조성된 사람의 뜻 자기 뜻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자기 뜻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않습니다.

 

오래 살고 싶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영생을 얻고 싶다고 하는 이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욕심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생명의 열매를 못 따먹도록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막아놓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따 먹어도 됩니다. 하고서 나온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한번 개기는 것이며 대드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못 따먹게 했으면 그것이 주의 뜻이라고 하면서 수용을 해 주어야지!

 

그러므로 사람의 뜻을 거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사람의 뜻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 공식을 평생토록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잊으면 크게 오해합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하면서 반항하게 됩니다.

 

사람의 뜻을 제거하고 억압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잘 아는 주기도문의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의 뜻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 해주옵소서! 우리는 죄가 이미 있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뜻을 뭉개버리고 우리는 하나의 죄로서 죄만 터뜨리는 환자로 간주되는 것이 주기도문의 내용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뜻을 갖게 되면, 사람이 뜻을 품게 되는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또 오해하기를 이제부터는 사람의 뜻을 품지 않아야지!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이 제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지요!

 

사람이 뜻을 품고 있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 두려움은 자기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 대한 두려움, 세상의 모든 변화와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의 뜻과 연결되면서 계속하여 알 수 없는 공포가 인간에게 밀려옵니다.

 

종교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의 뜻이 있는데 자신의 뜻을 노리면서 자신과 사람과 세상 전체가 이 뜻과 결부 하여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자꾸 유발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 믿고 성경말씀 보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찾아왔기에 알 수 없는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자기 뜻이 망가지고 훼손될 것을 걱정하여 사전을 그것을 극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로서 열심히 신의 뜻에 순종하고 순종하려는 경향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 발생되는 것을 자신의 뜻을 사수하기 위하여 자기 방법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 있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좀 크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자의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린 애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공부시간에 멋대로 고함지르고 기차간에서 멋대로 울고 목욕탕에 가서 때 씻는데 막 몸부림치면서 앵앵거리고 울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라지 말자는 말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어린아이의 시절은 자꾸만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는가 하면, 이미 자기 뜻이 생기게 되면 여기는 반드시 공포심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굴속에서 40일 금식 기도한다고 해서 이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제일 된 고민거리가 무언가 하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하면 사람과 세상의 변화에서 오지만 특히 자기 자신의 욕망에서 이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내부에는 두개의 인간이 있는데 하나는 자아라는 것과 그 자아에게 무서움을 주는 또 다른 자아가 있어가지고 이 사이에 균열이 있는 것입니다. 한 쪽이 다른 한쪽으로 인하여 무서움과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무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되면 안돼!

 

얼마 전에 상주에서 mbc 가요 콘서트 들으려고 모였다가 네 살 일곱 살 어린애 죽고 할머니들이 죽었지요! 또 어제는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3만 명 가까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런 세상의 움직임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상주야 여기서 머니까! 상주에 혹시 아는 사람이나 친척이 있습니까? 거의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안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지진이 저 멀리 파키스탄이 아니라 양천구에서 터졌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두려움이 가까운 두려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미 누가 살고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두려움에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인 제공자가 나입니다. 나 때문에 나가 힘든 것입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말이지요! 어려운 말이지만!

 

그래서 노인들이 하는 말이 있지요! 칵 죽었으면 좋겠다. 그냥 자는 잠에 조용히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사는 것도 지겹다. 소원이 있다면 죽는 것이 제일 팔자 편하다. 자식들 애 안 먹이고 똥오줌 안 싸고 자는 잠에 갔으면 좋겠다. 옛날에서는 연탄가스가 있어서 편리하였는데 요새는 연탄가스가 없어서,,,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제일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치곤란입니다. 내버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무슨 희망을 거는가 하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현재 사는 이런 식으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열 번 다시 태어나도 열 번 다 고생할 것 무엇 하려고 태어납니까? 이런 식으로 태어나지 않고 제발 두렵지 않고 고생스럽지 않고 행복이 넘쳐나는 그러한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 모든 인류의 사는 희망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데 고생 안하는 나로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희망입니다.

 

어린애들은 아직 그것을 모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어려움을 모르기에 조금 더 살아보고 결정하겠다고 나오지만 그것이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면 그때부터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런 희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희망이 생길 때에 종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게 해드릴까요? 하면서 다시 태어나는 비법과 방법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 주의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드립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그러한 의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해석한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기초부터 자리를 잘 못 잡았습니다.

 

성경 말씀에 그런 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없습니다. 단호히 없습니다. 우리가 고생스럽습니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반드시 공히 가야할 고생길입니다. 이러한 법칙을 스스로 위배하려고 하지 마세요!

 

우리는 어차피 고생하고 그 마지막은 흙이니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일단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땅의 맛을 본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원칙을 위배하려고 머리 써가면서 착각을 일으켜 아니야 그것이 아니야 다시 살수 있어! 이러한 망상은 여러분들이 아예 생각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고 여러분이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우니 여러분의 욕망이 또 다른 자아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 순간부터 다시 못 태어나면 안 된다는 어떤 공포심이 또 밀려옵니다. 내가 이렇게 어설프게 교회 다녀 가지고 거듭난 신자가 맞느냐는 이런 공포가 또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 듣고 다시 태어나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어떤 방식과 공식이 나에게 유효하게 작용하는지 아니 하는지가 의심스러울 때 내가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두려움이 또 생깁니다.

 

지옥가면 안돼! 하는 그런 공포심이죠!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것이 어떤 방식이든 성경말씀을 오해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듭남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란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여러분의 그 혼란을 말끔히 해소를 해 드리고 싶어요! 제 능력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성경 말씀에 보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그러한 욕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딴 데 있다는 것을 제가 좀 알리고 싶습니다.

 

성경구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 상 9:8-9절입니다. 8 이 전이 높을찌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 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이 말씀이 거듭난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지만 나중에 성전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립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성전을 지어놓았는데 성전이 왜 이 모양이냐 하면서 비웃으면서 이야기 할 때 대답하기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겨서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예언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중생에 대하여 거듭남에 대하여 죽 이야기 하면서 거듭남이란 개인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 거듭나고 싶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인간 중심적이기에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거듭남에 대하여 없는가? 있지요! 있습니다. 디도서에도 있고 요한복음 3장에도 있고 다시 태어남에 대하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것은 없지만 성경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열왕기 상 9장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9:9절의 말씀에 의하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 낸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모조리 작살내는 것입니다. 큰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여호와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십니다. 그렇다면 거듭 태어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거듭나는 것이지, 여기 거듭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서 우리에게 의사를 물어보고 거듭나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듭남은 우리가 거듭나고 싶다는 것과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냐?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섬기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면서 인생사는 것이 힘드니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하고 외칠 때에 하나님은 이 사람들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애굽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 끄집어 낼 때에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끄집어 내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어린 양의 피로서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외침과 함성은 전혀 하나님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며 본능인 것입니다. 이런 것에서 종교가 나오겠지요! 인생 팔자한번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애굽에 있던 일단의 무리들을 끄집어내셔서 자기 아들 혹은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아들 된 사람 백성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살기 싫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싫든 좋든 간에 강제로 애굽에서 나와 이스라엘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인생이 괴롭다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요구하는 조건과 아무른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저는 성경을 이렇게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하는 요구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한다면, 그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 하면 지금 사는 것이 자기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지금 인생이 자기 욕망에 부합되지 않기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좀 나은 생활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노림수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되려고 흉내 내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도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열왕기 상 9:9절을 다시 읽습니다.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이 얼마나 고생스러우냐! 죽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우냐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나서 3만 명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3만 명이 죽든 상주에서 어린애가 깔려 죽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애굽에서 너희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취지와 사랑을 이 세상에서 누가 알아 모시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사정 알아달라고 외치지만 하나님은 엉뚱하게 내가 한 작업을 너희들이 왜 훼손하느냐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성경구절을 뽑는가 하면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의 의도가 내가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나를 만드셨나 하는 하나님의 기초적인 그 의중에는 전혀 관심이 없더라는 말입니다. 그래 놓고서는 하는 말이 거듭났다고 자꾸 우기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데 동의 안합니다. 동의는 안 하는데 그것이 거듭남에 대하여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 하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합니다. 거듭남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자기 백성 자기 마음대로 뽑아서 세우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왔을 때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니고데모가 이해 못할 만합니다. 니고데모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왜 찾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찾아온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찾아온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할 때에 주님께서는 니고데모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미 의도자체가 나 살려주세요! 하면서 왔기에 그런 식의 거듭남은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 강의에서 오랜만에 고함을 지르는데 중생에 대해서 너무너무 오해하고 있기에 살짝 기분 나빠지는데,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것이 거듭남이지 무슨 이 땅에서 고생된다고 살려달라고 니고데모처럼 다가오니 주님께서 너는 천 날 만날 해도 천당 못 간다는 이런 말씀밖에 더 하겠어요!

 

이미 의도를 가지고 예수를 찾아 왔는데, 거듭남에 대하여 처음부터 상관없는 대화가 오고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왜 다른 신을 섬기느냐? 이것뿐입니다. 하나님 배고픕니다.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너 왜 다른 신을 섬겼느냐? 하나님 제 아이가 아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믿느냐? 하나님의 관심사는 애가 아프고 배고프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는 나를 아느냐? 너는 나를 믿느냐? 나는 너를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이다. 그것을 아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갈 때에 물도 없고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물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믿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동문서답입니다. 너는 나만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겠느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은 신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나를 알겠느냐고 하시는데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아쉬운 것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털어놓는 일에 우리는 아주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읽었던 열왕기 상 9장 9절 이후의 말씀에 그 이전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나 신약성경에 죽 오면서, 제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깊어졌기에 한번 정리해봅시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중생,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나부터 생각하지 말로 구약에서 신약까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서 무엇이냐를 물어야 할 텐데, 성경의 흐름을 모르고 신약에서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니 우리는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성령을 들먹이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성경전체는 네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말고 나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이것을 온 우주에 크게 드러내는데 관심이 있지! 내가 거듭나서 영생 얻는 데는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태어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애굽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이 말만 구약에서 자꾸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신약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참 이스라엘이고 거듭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 같이 천국가고 싶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서 한 수 배우고자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의 관심사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살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기에 기초가 잘 못된 것입니다. 출발점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거듭난 사람들이 있어요! -바라기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다 거듭난 사람들이기를 원합니다. 표정들 보니 표정이 아니라 여러분은 다 거듭난 사람들 일거예요! 저는 아니더라도- 많아요! 많은데 거듭나고 싶은 사람은 더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안 거듭나게 해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되십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팔자 한번 고쳐보겠다고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사람들 지옥 갑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이 참 주시며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이야기만 하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만 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제가 고함지른다고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쉽습니까!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라고 어떤 공식처럼 말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여 거듭나게 됩니까? 하는데 관심을 둔다면 그 사람은 탈락이죠! 그 사람은 지금 제 말을 전혀 이해 못한 것입니다.

 

방금 제 말을 이해 못한 것을 가지고 일반 교인들을 나무란 것 같지만 사실은 목회자들이 거듭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목회를 하면서 어디에 관심을 두는가 하면, 예수님은 나의 주입니다. 굶어죽어도 예수님은 나의 주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는데 왜 목회가 안 되지? 교회가 안 되지?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예수 다른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아까 본 열왕기 상 9:9절의 말씀처럼 다른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신은 무엇입니까? 그 당시 구약에서는 애굽에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건져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일방적으로!

 

요즈음 같으면 일방적으로 저희들을 죄에서 자기 피로 건져낸 분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일방적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천당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으로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내가 오래 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육입니다. 만약에 육적으로 거듭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공포가 밀려옵니다. 무슨 공포? 내가 거듭났는데 이렇게 교회 소홀히 하고 형식적으로 하다가는 거듭난 것도 취소되면 어떻게 하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만약 내가 몇 년 뒤에 내 속에 어떤 일이 발생해서 내가 죽기 전에 예수를 부인하여 버리면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지느냐하는 이런 문제, 이것을 아까 무어라고 했습니까? 두 글자로 공포라고 하였지요! 이런 것이 호기심이 아니라 하나의 공포로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공포가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기에 이런 공포를 자기의 노력으로 지워버리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교회 충성하고 성경 열심히 보고 전도하고 헌금도 하면서 알 수 없는 공포를 자기 스스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시도로서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공포가 자신의 믿음보다 계속하여 능가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가 묻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다 이루었는데 왜 무서워합니까? 그러면 대답하기를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마는 그러나 내가 만약 그것을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써볼까요? 써보고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답변한번 해보세요! 글자 쓰는 것이 시간이 아까 와서 함부로 쓰는데 용서해주세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내가 구원되었습니다. 라는 것을 내가 안 믿으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변을 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묻는다면 여러분이 답변을 한번 해 보세요!

 

우리교회 어떤 분은 설교시간이 재미없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고 해야지 왜 목사님이 일방적으로 이야기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그런 권유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가끔 질문하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본인이 아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보세요! 삼다수 물이잖아요! 누가 보아도 물임을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 파워입니다. 누구나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타 파워라고 내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하는 것은 비타 파워가 사물이기 때문에 다 눈에 보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마음은 아는데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심은 따로 챙겨두고 남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까 아닐까를 시험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본인이 아십니다. 라고 답변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십니까? 하실지 모르지만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라 바로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하여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나게 됩니까? 의 질문을 니고데모가 예수님께서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네가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 대목이 기억나십니까? 그러니 네가 알잖아! 네가 믿고 안 믿고는 사실 본인이 아는데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이렇게 찾아와서 예수님께 묻는 것은 다른 사람은 지옥가도 저는 천당 가는 것 맡지요! 하면서 예수님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 첫 시간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질문을 던져도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 자신의 작업에만 관심 있지 그 사람 편에 서있지 않습니다.

 

나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한다. 어떻게? 영으로 태어난 사람만 구원된다. 라는 하나님의 자기 작업만 이야기 할 뿐이지 그 사람에 대하여 옹호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지금 제가 강의한 전부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싶어서 어떻게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구원받는 것은 그 사람의 요구조건에 부응하여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그냥 거듭나게 해서 백성 만들 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결과적으로 어떻게 드러납니까? 그냥 그것뿐입니다. 오직 우리 주님은 예수님입니다. 나는 다른 주는 싫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옛날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일방적이었던 것처럼 나를 죄에서 십자가로 구원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고 외칩니다.

 

다른 사람이 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묻는 게 아니야! 다 알게 되어 있어!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 믿음 있다.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나 너 어떻게 그런 믿음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너 몰라도 돼! 내 마음 내가 알아! 그리고 네 마음도 네가 알아!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구세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다만 만약에 교회 다니는데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가 전도해서 절에 갔다. 절에 가서 불자가 되고부터 돈도 잘 벌고 아이들 공부도 잘하게 되었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역시 부처가 최고야! 할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신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전에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찾을 때부터 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고 자기 아쉬운 것을 매꾸어 주는 일용직 예수였던 것입니다. 일용직 예수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형편과 사정에 따라서 주님이 바뀝니다. 이렇다면 그 사람은 거듭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내가 거듭난 것은 이러이러한 축복을 주었기에 거듭난 것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주신 그냥 구주십니다. 그 사람이 외국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상관없이 하여튼 예수님은 나의 구주시야! 라는 고백, 참으로 이 고백이 있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어떤 공포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첫 시간 끝으로 이 말씀을 드립니다. 만약 욥기를 보면서 공포를 느낀다. 자식이 열 명이 죽었다. 아이고 나는 자식이 둘 있는데 죽으면 안 되지! 재산이 다 날아갔다. 아이고, 이 재산 날아가면 안 되지! 하나님께서 욥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게 하였다. 아 그러면 나는 미치지! 이런 식의 공포심이 성경 보면서도 찾아옵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욥기를 보면서, 물론 그런 공포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끔은 특이하게도 주여! 저에게도 이런 욥과 같은 고난을 주신다고 하실지라도 저는 주님이 저의 구주이심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여러분들이 매일 아침마다 하신다면 하루가 아마 가볍고 행복하실 것입니다. 왜? 하루 중에 어떤 공포와 두려움도 여러분의 곁에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생, 칭의 1-2

 

05. 10. 10 강의 이근호목사

 

첫째 시간이 어려웠기에 다시 요약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다시 태어난다. 거듭난다는 말씀의 취지는 그것이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서 천국가고 싶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껏해야 니고데모 밖에 안 되고,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본성에 불과하지 예수님이 그것에 호응하여 그래 내가 다시 태어나게 해줄게! 라는 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에 그들이 원하지도 않는 나라를 일방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하나님이 다시 태어나게 해주면 이유 없이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 된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나의 구세주는 예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입니다. 그 고백을 어디라도 뛰어다니면서 나의 구세주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한테 얼마나 얻어먹었느냐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복 주든 안 주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먹든지 마시든지 나는 주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해 주신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렇지 않고 가짜로 거듭난 사람은 무엇이 남아 있느냐 하면 큰 글자로 씁니다. 공포 이 공포, 혹시 내가 실패하면 어쩌나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이 공포심이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내가 예수를 잘 못 믿은 양 또는 내가 예수를 잘못 선택한 양, 혹은 내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하는데 잘 못 믿었구나! 하는 이런 자책이 있다면 그 공포를 메꾸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믿었든 잘 못 믿었든 상관없이 나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소관이지 내가 잘 믿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짜 거듭난 사람은 왜 공포심이 없는가 하면 내 행동에 따라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그냥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듯이, 지옥을 향한 넓은 길로 가고 있는 나를 좁을 길로 데리고 왔기에, 이것은 내 속에 예수님의 작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믿어지기에 내 잘잘못과 관계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내 잘잘못과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공포심이 있고 없고 와 상관없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내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선택하여 세웠나니! 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 15장에 나오지요! 그러므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의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어제 오전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우리 인생의 밑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결부가 되는데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하수구에서 벌레가 기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하수구를 덮어놓았는데 그 구멍사이로 지네 같은 벌레들이 바깥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사는 이 동네의 밑바닥에 또 다른 동네가 있었구나! 이 밑에 벌레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구나! 하면서 그 벌레가 기어 나오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디스 이즈 벌레! 내가 청소하였는데 이 벌레가 어디서 나왔을까? 이 밑에서 나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땅위에서 살아가는데 가끔 하수구처럼 밑에서 무엇이 올라오는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이 나옵니다.

 

성도는 자기가 잘 믿어서 복 받은 줄 알았는데 자기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내가 딛고 있는 밑바닥의 세계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위에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가끔 십자가의 공로와 고난과 아픔이 하수구에서 기어 올라오듯이 기어 올라와서 성도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아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지! 내가 잘난 것과 상관없이 인도받는구나 하는 것을 가끔씩 압니다. 하루에 한 2.5초씩, 가끔은 압니다. 생각 안 나는 것 같은데 가끔 생각이 나고, 나머지기 23시간은 두려움으로 떨면서 있다가 요 순간이 올라오면 갑자기 속이 시원하지요!

 

바보같이 내 잘잘못이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내가 지난번에 교회에서 저 집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 때문에 밤잠을 못 자며 고민을 하고 다음주 저 집사를 만나면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네!

 

반대로 내가 저 집사와 안수를 하는데 손을 털어버리니 내가 밉다는 말인데 내가 그 교회 갈까 말까! 한번 해볼까 말까?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밑에서 십자가가 올라오면 세상에 저런 집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것도 모르고 내 자존심을 생각했구나!

 

전에 서울에 오신 정판옥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밥 시키면 반찬도 같이 나옵니다. 너무나 제가 은혜를 받아 가지고 제가 써 먹었습니다. 예수 믿었을 때에는 혼자 예수 믿는 줄 알았는데 교회 와보니 반찬 같은 사람이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밥만 시켰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나만 구원받는 줄 알고 교회 왔는데 와보니 내가 시키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반찬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다 하수구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요 생각이 하루에 몇 초? 2초, 주일날은 몇 초? 6초, 주일날은 설교 듣느라고 조금 늘었다가 예배 마치고 일어서면서 한바탕 싸우고 일어나고, 이런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하심이 우리 인생의 전부를 이미 결정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여기서 공포가 오더라도, 지금 이 지상에서 우리가 공포에 질리더라도 어떤 실수와 실패, 자식 10명이 다 죽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욕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는다 할지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욥은 믿었습니다.

 

무엇을 믿었습니까? 밑바닥의 주님의 은혜로 이 고난이 왔음을 욥이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나한테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도 예수님은 나의 주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 집안에 어떤 파탄이 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십자가 지신 분은 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지셨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어떤 짓을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지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해가 좀 되셨습니까? 거듭나서 팔자한번 고쳐볼라고 아예 그런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와서 팔자 한번 고쳐 보겠다는 생각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번 시간에서는 칭의, 의롭다 함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거듭남에 대하여 잘 모르면 나중에 다시 하면 되고, (녹음기 꺼질까봐 두렵네! 이 알 수 없는 공포!)

 

칭의라는 말이 성경에서는 없는 잘못된 말입니다. 성경에서 칭의란 말이 없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칭의의 칭이란 말은 칭해준다. 죄인인데 의롭다 해줄게! 그런 뜻입니다. 북한을 참칭한다고 할 때 가짜로 칭하여 준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참칭이지요! 사실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일단 의롭다고 해준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로마서의 칭의라고 하는 것은 재판정의 법정적 용어인데 그 사람의 죄를 다 끄집어 내어놓으면 죄인임을 인정하고 이제 나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갑자가 판사가 너를 의인이라고 법적으로 칭하노라고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명목상 의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있어서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또는 법정적 칭의라고 합니다. 이런 법정적 칭의를 말하게 될 때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실제적으로 의인은 아니고 다만 명목상 이름뿐인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제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옛날 50년대 60년대의 우리 부모님들은 딸은 순해야 시집을 잘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모의 이름도 순하라고 순자라고 지었습니다. 봄꽃처럼 활짝 피어라고 춘자, 똑똑하라고 영자, 이렇게 이름을 지으며 순자로 지은 것은 순하게 살다가 순하게 시집가서 그냥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안 굶고 살면 된다고 보았습니다. 옛날에 하도 식구도 많고 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순자라고 이름을 하였는데 그런데 그 순자가 순하지 않습니다. 사납고 표독스럽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 분을 계속 순자라고 불러야 됩니까? 정말 순자라고 부르기 싫지요!

 

그러면 이름과 내용을 실제 같이 하기 위해서 맹렬하다고 맹자라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순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름이 실제 내용과 다르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붙여진 이름이 실제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은 명칭을 붙여주게 된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죄인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와 의는 서로 반대개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우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났지요! 우리는 죄인인 것이 분명한데, 완벽하지 않으니 죄인인 것이 분명한데,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하셨으니 이 죄인이라는 내용이 그 이름과 결부할 것인가 이대로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부하려면 비록 죄인이지만 의인을 지향하며 의인되고자 애쓰는 방법이 하나 있고, 다른 하나는 어차피 죄인인거 죄를 막 짓자는 식으로, 어차피 죄인이 의인되느냐? 죄인이 의인이 되었으니 즐거운 죄짓기 행복한 죄짓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짓은 것이 행복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사람에게 죄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한지, 이것은 남이 하지 말라고 하니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일 괴로운 것은 무관심이지 하라 하지마라가 아닙니다. 관심안 주면 괴롭지만 무엇을 하지마라고 하면 반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청개구리처럼!

 

그러니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든지, 죄인이 의인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겠지요! 죄인이 의인되려고 노력한다면 이제는 점차 의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본인은 죄인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날이 갈수록 나는 아마 의인 쪽에 가까울 거야! 하는 의인 의식이 강렬해지고 이것이 자기 의를 유발하면 이것이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왕 죄인 된 것, 벌써 주님께서 의인으로 인도하여 그 이름으로 구원받지 내 실 내용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에 어떻게 굴러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굴리자! 라는 쪽으로 나서는 사람은 이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죄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께서 너는 죄인이야! 할 때에 막산다고 죄 되고 막살지 않는다고 죄가 안 되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막살면 죄 되고 반듯하게 살면 죄 안 되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과 실제내용이 다르다고 하여도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이 전체의 문제점이 무어냐 하면 바로 나밖에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밖에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구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성경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나는 어떻게 구원될 것인가? 나의 존재가 하나님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구원과 은혜와 소명 믿음 칭의 중생 양자됨 성화 영화 그 어떤 이야기를 구원론에 동원하여도 그 개념이 성경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 출발점이 나에서 시작하여 내가 인식이 되고 내가 이해되는 나의 구원론을 따로 챙기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칭의, 하나님이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제대로 성경적으로 알려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하는가 하면 칭의나 은혜나 구원에 손대지 말고 나부터 손대야 하는 것입니다. 나부터 손을 대어서 왜 이런 칭의라는 것이 잘못되었는가를 해명해 나가야 합니다.

 

칭의 문제가 나라는 의식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나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해야 하는데 어려운 것을 할수록 쉽게 하겠습니다. 나부터 손을 대야하는데 나라고 하는 이것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가 나를 생각안하면 무엇을 생각하느냐? 아침부터 나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본성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부터 생각하게 되면 무엇이 나오게 되는가 하면 나의 이름이 나오게 나의 이름이 나오게 되면 나의 영광과 나의 영원함 같은 것들이 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바벨탑 아시지요? 어린이 여러분 바벨탑 아시지요? 탑을 높게 쌓아서 하늘나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동화책에 비슷한 것이 나옵니다. 콩을 심었더니 너무나 높게 자라서 하늘까지 닿은 나무가 있어요! 잭과 콩 나무라는 동화가 있지요!

 

그것을 타고 하늘까지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라는 것이 그냥 나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아가 하늘까지 가고자 하는 그 의식이 포함된 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그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나는 하늘까지 높아지리라! 하는 그런 본성이 들어있는 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이야기 했는가 하면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죽 나오는데 그 중에 피히테가 연구한 것을 제가 지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까 콩을 심었는데 그 콩 나무가 자라가 그것을 타고 하늘나라까지 가겠다는 것이 바벨탑에 나오지요! 탑을 쌓고 쌓아서 하늘나라까지 가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타고 달나라를 가고 은하계를 생각하고 우주전체의 별들이 몇 개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내가 언젠가는 우주선을 타고 상대성 논리를 뛰어넘어 광속도로 가서 며칠 만에 오리온 좌나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가서 엄마 나 여기 왔어 망원경으로 나 보여 하면서 손 흔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히테라는 철학자는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무한으로 봅니다. 끝이 없는 것입니다. 끝이 없는 것을 생각하는 나이기에 끝없는 것까지를 다 아는 나라는 것입니다. 이 나 속에 무한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키가 몇 센티이고 몸무게가 얼마며, 헐크처럼 커지지도 않고, 배고프고, 아프면 누워야하고 그러므로 무한과 이런 한계가 있는 만남을 피히테는 나라고 한 것입니다.

 

안 어렵지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로또 복권을 샀는데 나는 십 만원만 당첨이 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10억이 당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국민은행에 가서 돈을 찾는데 아저씨 십억이 당첨이 되었네요! 하는데 저는 10억이 필요 없어요! 십 만원만 주세요라고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로또 복권얼마입니까? 사보지를 않아서, 천원입니까? 사보신 모양이지요! 천원주고 산 이유가 천원이라는 유한이 십 만원이라는 무한을 보고 복권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는 복권 최고 당첨 액이 천원이라고 하면 아무도 사지 않습니다.

 

천원만 투자하시면 더 큰 금액이 나옵니다. 하면서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 만원만 바랐는데 십억이 되면 십 만원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억을 원하는 것입니다. 무한의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로 몰랐던 나입니다. 예전에 미처 몰랐네! 노래 가사 같습니다. 예전에 내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줄 미처 몰랐네! 여자 분들은 지나가다가 쇼윈도 우에 밍크코트가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저 밍크코트 너무 예쁘다 내가 사 입어면 좋겠다! 그런데 곧장 포기합니다.

 

내가 그것을 입고 나갈 데가 어디에 있다고 그것을 원하나 접자하면서 유한으로 돌아옵니다. 천 원짜리 샀는데 그 사람이 당첨이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살합니까? 천만의 말씀!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행운이 찾아오겠나! 하면서 다시 유한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이 유한은 무한이 있다면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태세가 되어있는 채로 엎드려있는 임시적 유한인 것입니다. 항상 무한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피히테는 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피히테는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유한한 키도 작고 천리를 가는 것도 아니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죽고 이러한 유한이 어찌하여 무한을 생각하게 되었는가? 여기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식, 하나님의 무한한 속성이 인간 속에 들어있기에 인간들만이 무한을 생각한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좀 어렵지요! 사람들이 유한에서 무한을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인 원숭이나 코끼리 같은 이런 동물과 달리 -원숭이나 코끼리가 나는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이런 것이 없이 원숭이는 그냥 원숭이대로 살아가는데- 유독 인간들만큼은 무한을 추구하며 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을 보니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이랄까 또는 어떤 속성이 들어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유한한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간은 무한한 신의 일부이지요! 그러니 인간에게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들어있지요! 그러니까 이 피히테라는 사람은 나라는 것이 만약 나 혼자라면 실컷 나쁜 짓하고 성질난다고 사람을 찔러죽이고 자기 성질대로 하겠지만 인간 속에 무한이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고 싶더라도 무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의 소리인데 양심의 소리를 듣고 보다 착하고 바르고 튼튼하게 무슨 학급교훈 같습니다만 진선미를 추구하는 나는 밥만 먹고 잠이나 자는 그런 짐승처럼 살면 안 되고 착하고 바르고 식식하게 신의 모습을 천사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참된 인간답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 사람? 이 피히테라는 철학자의 말에 여러분이 동의를 하십니까? 할렐루야? 아멘? 지금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나를 그대로 장소를 이동하여 교회로 오게 되면,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여도 부족한 나가 목사님의 말씀을 보다 많이 들어서 바르고 착하고 올바르게 내 속에 있는 신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게 되면 나는 유한에서 무한으로 추구하여 의인에 반열에 속한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피히테의 이론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하지 않고 절에 가서 하거나 향교에서 유교 하는 곳에 가거나 윤리도덕을 하는 곳에 가보세요! 전부다 이 공식을 이야기 합니다. 다른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집단에 가도 다 이 소리입니다. 인간이 먼저 되어야지 그런 소리하는 것입니다. 가수 협회 가도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합니다. 목사모임이 가도 목사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기 때문에 칭의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내가 이렇게 할 가능성, 이렇게 할 실력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하지 않더라도 내가 점차 점차 의인이 되어서 의인답게 살아가야할 책임과 의무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하는 이야기를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런 피히테의 이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시작하고자 합니다. 피히테가 나라고 한 것은 유한한 나속에 무한이 들어있다고 하였지요! 그것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만들었습니다. 이 울타리가 에덴동산이라고 봅시다. 이 에덴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서로 각기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이 두개의 나무로부터 네 개의 강이 흘러나와서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소생케 합니다.

 

첫 번째 나무가 선악을 아는 선악과나무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생명나무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왜 제가 에덴동산을 그림으로 그렸는가 하면, 피히테라는 사람이 무엇을 빼먹었는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과 생명나무 사이의 인간이라는 것을 빼먹고 인간이 무엇이냐 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냐에 대하여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만 달랑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놓고 그 앞에 인간을 두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이냐 하면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처음부터 그것을 인간이라고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훌륭한 무엇이 될 거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며 생명나무에 담긴 내용이 무어냐를 알려주고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으면 뭐가 됩니까? 죽지요! 생명나무를 따 먹으면 영생이지요! 맞지요! 그러니까 사람이란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훌륭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만들어진 취지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시청각 교재를 사용하겠습니다. 여기에 하얀 떡이 있고 녹색 떡 쑥떡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떡을 접시에 담아주면 이것을 맛있게 먹으라고 준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미 범죄 한 이후, 타락한 이후, 죄 짓고 난 이후에 내가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으면 내가 마시라고 주었구나! 떡이 있으면 내가 맛있게 먹으라고 있는 것이구나! 무엇이든지 눈앞에 있으면 전부다 날 위해서, 날~ 위하여 날~ 위하여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런 현상은 갓난아이들에게도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이 어머니가 왜 있으며 아버지와 왜 있는지 모릅니다. 거저 엄마 아빠는 날 위하여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것이 교정이 됩니다. 4~5잘 되면 엄마가 아이를 잘못했다고 때립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면서 네 친구를 왜 때렸느냐며 혼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왜 다른 아이를 때리면 안돼? 너는 말이야 아빠 엄마의 얼굴이야! 너는 위대한 이씨 집안의 영광을 위하여 태어났어! 그런데 네가 너보다 약하다고 때려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엄마 아빠를 어떻게 보겠니? 그러므로 너는 때리고 싶더라도 참아야 돼! 우리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참아야 한다면서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입니다.

 

회사에 들어갑니다. 어느 직원이 몸이 아픕니다. 사장에게 오늘 하루 쉬겠습니다. 그러면 사장이 당신이 몸이 아프다고 쉬어버리면 이 회사의 영광을 누가 돌보고 지킵니까? 그러니 나오세요! 그러면 저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이 회사를 위한 로봇입니다. 당신이 아프다고 집에 있고 편하다고 나온다면 어디 회사가 놀이터입니까? 그래가지고 회사 되겠어요! 빨리 나오세요! 하면서 나무라는 것입니다.

 

제가아침에 오다가 목동의 시티은행에서 번호표를 뽑았는데 바로 앞의 아주머니가 13번이고 제가 14번 이었습니다. 임금 투쟁 데모한다고 초자 행원이 맡아서 일을 하니 일을 제대로 처리 못하여 13번에서 14번에 되는데 무려 30분이 걸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다가 가버렸습니다. 2~3분에 해결할 것을 아무것도 모르니 20~30분이 걸리는 것입니다.

 

언니 비밀번호가 뭐야? 신입사원 명찰을 달고서 기계의 비밀번호를 몰라서 묻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데모하러 갔는지 붉은 풍선에 투쟁이라고 써놓고 가버렸습니다. 직원이란 회사를 위하여 있는 것인데 자기 돈벌이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내 속에 있는 무한을 추구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회사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돈 챙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사 돈 다 떨어지면 사표내고 나오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 못된 버릇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여기에 떡이 있으면 하얀 떡은 생명나무 검은 떡은 선악과라면 한쪽은 선악과 한쪽은 생명나무라고 어떤 이름을 붙였던 간에 이것은 나보고 먹으라고 준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부르는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기 전에는 죽음을 몰랐습니다.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죽음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지금 제가하는 말이 너무 어려워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름이 뭐예요? 이국희! 국희 앞에 떡이 있는데 그 떡을 먹으면 삐비빅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를 알겠어요! 외계인이 내려와 디비디비빅 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를 알겠어요!

 

이 떡을 먹으면 그 뒤의 말이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삐비빅 이나 디비디비딕 같은 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국희라는 어린이가 떡을 먹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 뒤의 삐비빅 이나 디비디비딕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서 말씀하시기를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이것 까지는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을 압니까? 모릅니까? 그 말은 삐비빅이나 디비디비딕이과 같은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주체, 자아가 있다면 행동을 하고 안하고는 그 사람의 판단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약간은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어린 사촌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에 일곱 살의 사촌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숙모의 아들이고 제가 숙모 집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조카가 고추장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어린 애가 고추장을 먹으면 얼마나 울겠어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어떠했느냐 하면 고추장을 먹고 맵다는 것을 알면 먹지 않겠지! 물론 많이 먹으면 안 되겠지만 제가 지켜만 보았어요!

 

이걸 숙모님이 알고서 달려드는 것입니다. 근호 조카는 사촌 동생이 고추장을 찍어먹으려고 하면 말리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자가 다른 것은 용납이 되어도 자기 자식 해롭게 하는 것은 물불을 안 가립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없는 것입니다.

 

애가 그것을 먹으면 매울 것인데 왜 그것을 방치 하였느냐며 나자빠질 정도로 달려들었습니다. 그 숙모님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내가 치웠으면 좋았겠다. 그런데 내 말도 약간은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자기가 몸소 체험해 보고 맵다 싶으면 두 번 다시 그런 행위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게 원초적인 해결책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지요! 아예 그것을 치워버려야 되지요! 자 보세요! 선악과 따 먹으면 해롭습니까? 안 해롭습니까? 해롭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따먹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의 해석은 한번 따먹어보고 죽으면 두 번 다시 안 따먹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나온 해석입니다. 엉터리입니다(탁자를 쾅하고 치는 소리가 들림). 그것은 이근호 조카의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고추장을 찍어 먹어보고 매우면 다시는 안 찍어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정답이라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안 보이는 곳에 치우든지 그렇지 않으면 선악과가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도록 보기에 흉측하고 기피하고 싶도록 만드시든지 하면 되실 텐데, 오히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만드셔서, 지금 아담이 아니라 어떤 누가 왔더라도 결국은 하루 이틀은 참았을 거예요! 그러나 결국은 따 먹고 말 그런 선악과를 하나님이 그곳에 두게 하셨느냐?

 

그것은 바로 죽음이 인간 속에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는 선악과 따 먹고 난 뒤에, 여기 쑥떡을 선악과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하얀 떡은 생명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이 쑥떡을 먹고 난 뒤에 하얀 떡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왜 먹으라고 준 떡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먹으라고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쑥떡 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얀 떡 생명의 떡을 못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 두 과실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 네가 잘되라고 준 것이 아니고, 반대로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도 따 먹을까 하는 이 과정을 통하여 생명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가를 사람을 통하여 전 우주에 하나님의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하여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결국 무엇입니까? 들러리였습니다. 죽음과 생명사이에서 그것을 증거 하는 들러리입니다. 여기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골로새서 1:15-18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모든 피조물들은 주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창조될 때부터 이미 거기에는 벌써 무엇이 비치되어 있습니까? 선악과의 죽음의 세력과 생명나무의 생명의 세력이 있어서 그 죽음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람이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이 약간 어려운 생각인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이 선악과가 고추장이라면 고추장을 먹고 난 그런 상태에서라도 생명나무를 따 먹게 해서 생명이 무엇입니까? 안 죽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선악과는 죽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선악과를 따 먹고 죽는 자에게 생명나무를 따 먹게 해서 해독이 되어 안 죽도록 될 때에라야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창조하셨구나 하게 될 텐데 성경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반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헉헉거리며 해독제를 찾는 식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으려하니 이 놈아 네가 선악과를 따 먹었으니 나가라하면서 쫓아내는 식의 인간이 아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요? 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은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식의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 네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흙에서 사람이 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제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왜? 인간다움, 인간답다는 것은 네가 선악을 아는 것으로 이미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은 더 이상 선악과나 생명나무와 아무 상관없는 동네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도 상관없고 생명나무와도 상관없는 뚝 떨어진 동네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미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이미 선악과와 상관없는 동네에 살고 있으면서도 선악과는 우리 속에 살아있어 가지고 지금도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면 무엇이든지 따먹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다 세상으로부터 왔느니라. 요한일서 2:16절 말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는 것이 이미 우리 자체가 움직이는 선악 나무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에 무슨 나무가 없는가 하면 놀랍게도 거기에서는 선악과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었는데 하늘나라에는 선악과가 없어요! 무엇밖에 없습니까? 12과실을 맺히는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이제는 마음껏 따 먹으라! 왜? 천국에서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도구가 우리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에덴동산에서는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이란 저주죠! 생명이 무엇이며, 생명은 영생이죠! 저주와 영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천국에 가서는 이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는 영원히 살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사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의 면류관을 도로 반납하면서, 이것이 다 주님의 덕이지 제 덕이 아닙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생명의 면류관까지 반납하면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은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천국에 살든 지상에 살든 어디에 살든, 나를 위한 인간, 내가 잘되기 위한 인간이라는 사고방식은 사람이 범죄 하고 난 뒤에 발생한 악마가 씌워 준 사고방식이지 성경에서는 나를 위한 나,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란 아예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10분간 휴식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녹취 060118

 

 

 

중생, 칭의1-3

05. 10. 10 강의 이근호목사

 

자 마지막 시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상당히 엉뚱한 이야기를 하였지요!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과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뜻을 담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써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인간이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과실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는데 결국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이고,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그리고 그 추방된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고 갑자기 무언가 복잡한 덤터기가 인간 주변에 막 깔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좀 어려운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고 할 때는 마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다니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내 속에 있으며, 나는 내 마음대로 독립적으로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면서, 마음대로 선택하고 무엇을 따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홀로 자립하는 그런 인간으로 된 줄 알았는데, 선악과를 따 먹었고 따 먹고 싶은 생명나무는 원하여도 따 먹지 못하게 되는 무언가 복잡한 거미줄 같은 것이 인간에게 덮쳐온 것입니다.

 

거기에다 하나님의 약속까지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선악과를 따 먹었을 뿐인데, 마치 수류탄 핀을 뽑은 것처럼, 하나의 쇠 덩어리인데 핀을 뽑고 한 7초 있으면 꽝하고 터지는 것처럼,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온갖 영적인 일들이 인간들의 예상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핀을 뽑으면서 등장한 것이 약속인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것을 드러내는 도구가 인간의 핏줄 인간의 혈육 인간의 신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우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 있지도 않았고 혼자일수도 없었는데, 아까 철학자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

 

피히테, 피히테에 의하면 나는 나고 내 속에 무한한 신적인 요소가 있고 내가 알아서 그것을 양심대로 개발하여 신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자기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이라는 이런 영적인 것들을 깡그리 생각하지 않고 나는 나다 예수를 믿어? 내 영혼을 믿는다.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나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이렇게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홀로 설치고 다니는 것이 진리인줄 아는 그런 인간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언급하면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오기 전에 집에서 살림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애들 공부시키면서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의 싸움이 생각이 나든가요? 잘 안 나지요! 그때는 무엇이 생각나는가 하면 수도세 전기세 카드 값 이런 것이 생각나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하여는 생각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도세 전기세 애들의 성적표 이런데 관심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피히테처럼 우리 가정은 지금보다 애들의 성적이 뛰어나야 하고 우리 가정은 지금보다 돈이 더 많아야 되는데 왜 이렇게 수도세와 전기세가 많이 나오느냐며 나 중심의 생각을 하게 되어있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구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생각이 안 들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모이기를 자주하라는 것입니다. 말세가 될 수록, 사람이 아무리 이렇게 공부를 하여도 집에 가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앉아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앉아있는 사람은 목사님과 사모님인데 교회 앉아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나 홀로의 세계에 빠져듭니다.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생명나무 선악과나무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무엇이 생각나는가 하면 나는 내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달라진다. 거듭나고 싶다. 그러면 내가 믿으면 거듭난다. 뭐든지 항상 행위의 주체가 내가 되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의 여파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그런 생각이 잘 들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두 번째 시간 끝 부분을 다시 해봅시다. 사람이란 선악과에 담겨있는 죽음과 생명나무에 담겨 있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구와 피조물로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 증거가 골로새서 1:15-16절에 보면,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생겨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으로 귀결되지 않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골인 되어야 그것이 바른 해석이고 바른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구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피히테가 이야기하는 내 속에 무한이 들어있고 이 무한을 신이라고 합니다. 내가 신을 추구하는 것은 죄 짓고 난 뒤에, 모든 인간들은 종교를 만들었고 그 종교의 마지막은 신이지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를 지향하는 것은 아주 특이한 현상입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여호와를 추앙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중심임을 알았습니다. 그동안 알았던 것을 배설물로 버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통일시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체적인 인물 예수님입니다.

 

신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인물, 그 청년의 이름이 예수 중심으로 세상과 우주가 통일 된다는 사실을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전 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마땅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되어야 한다면 선악과와 생명나무도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피조물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인간도 들어있습니다. 선악과는 죽음이 무엇인가를 생명나무는 영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문제를 던집니다. 만약의 여러분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예수님을 아셨습니까? 교회는 한번도 안 나갔는데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을 고백하든가요? 고백 안하지요! 그 할머니가 죽는다는 것을 압니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예수님에 대하여는 알든가요? 모르지요!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홀로 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을 몰라요.

 

언제 아느냐? 히브리서에 보면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이후에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서 모든 인간은 믿든 아니 믿든 불교신자든 천주교 신자든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예수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됩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죽어가면서도 죽음을 모릅니다. 야! 오늘 내가 이야기 하여도 참 멋진 말 하였다! 죽어가면서도 무엇을 모른다? 죽어가면서도 죽음의 실체 진정한 죽음, 진정한 죽음은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심판과 저주를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피히테처럼 사람은 영생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모릅니까? 예수님을 모릅니다. 지금 오늘날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죽어서 천당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영생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자기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은 사나 죽으나 내 것입니다.

 

피히테의 내 것입니다. 나는 내 것입니다. 나의 모든 돈도 내가 일해서 번 것이고, 나의 자식들도 내가 배 아파서 낳은 내 자식이고, 주님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고, 모든 것은 내가 있기에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에, 에베소서 1:10절의 말씀을 고치지요!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범죄 한 인간, 반 예수적인 인간의 본성입니다.

 

선악과 따 먹고 죽어가면서도 무얼 추구하는가 하면 생명을 추구합니다. 인간은 선악과과 생명나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선악과 따먹고 죽어가면서도 영원히 살기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그모스 밀곰 몰록 등의 이방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이방신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영원불사입니다. 죽지 않고 영원을 추구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압니까? 영원히 죽지 않는 나를 신봉합니다. 이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나, 선악과를 따 먹어도 죽음이 무언지를 모르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생명나무가 누구인지 몰랐어요!

 

누가 알았는가 하면 12년 동안 피 흘린 여자가 알았고, 이방인 백부장이 영생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내가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합니다. 나에게도 부하가 있어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나무입니다. 생명이 가라고 하는데 안 갈 수가 있습니까?

 

아담도 못 따먹은 생명나무를, 주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것이 생명인데, 생명의 말을 안 듣고 자기의 말을 들으면 죽게요! 상당히 말이 어려워졌는데 쉽게 해 봅시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잘 섬겼습니다. 잡채 짜장면 만들어 대접하면서 잘 섬겼습니다. 특히 마르다가 잘 섬겼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얌체처럼 꼼짝 않고 예수님의 설교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마리아 좀 나무라 주세요! 나는 지금 예수님 섬기느라고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마리아는 얌체처럼 예수님의 설교만 듣고 있으니 나를 좀 도와주라고 해 주세요!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이 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봉사 하였는데 막상 오빠 나사라고 죽으니까 마르다 마리아는 그 오빠의 죽음이 끝인 줄 알았습니다. 오빠가 죽으니 그것이 죽음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빠 죽고 나서 늦게 오시자 삐진 것입니다. 여자가 잘 삐지지요!

 

예수님께서 달랩니다. 마르다야! 내가 이야기 하였잖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마르다가 자기도 배워서 안다고 한마디 합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살줄을 믿는다고 합니다. 마르다가 알고 있는 다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죽음과 유사한 삶의 개념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 어렵다!

 

지금 마르다가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아는 얇은 수준의 죽음과 다시 사는 그런 사는 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 사는 것이냐 하면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그것이 생명인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 말씀을 해석하겠습니까?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이해가 안 되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원된 것이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이미 제대하고 편하게 쉬고 있는데 나사로를 다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죽은 지 나흘 되었습니다.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이 코를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를 나오라고 하시자 나사로가 살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나사로가 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사로가 알고 있었던 생명은 무엇입니까? 오래 사는 것이 생명입니까? 아니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이제 제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생명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생명을 알고 나서는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내가 지금 주와 함께 거하고 있다. 내가 주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

 

인간은 아무리 인생경험을 많이 하고 도를 닦아도 죽음이 무엇이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선악과과 생명나무가 무엇을 지향한다고 했습니까? 피조물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선악과도 생명나무도 피조물이기에 예수님을 지향하는데 예수님 안에 그 선악과도 생명나무도 다 들어있어요!

 

선악과가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의 버림 받음입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것이 죽음입니다. 영원한 죽음입니다. 영원한 저주입니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그러고 나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이 아담도 모르고 하와도 몰랐던, 그 놀라운 우주를 우주 되게 하였던 십자가에 감추어 두었던 예정된 비밀, 그 예정된 비밀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말씀이며 빛이며 생명 그 자체임을, 33살의 청년이 아니라 만물이 그분에 의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그분의 생명이 된다는 것이 우리가 곧 생명이 사람이 된다는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인데, 어떻게 이 복음을 가지고 자기 사업 잘되고, 땅값 오르고, 아이 성적 올라서, 서울 대 가는 것 하고 이 복음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세상 적인 축복 축복하는 것이 이런 복음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것이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범죄하고 나서 자기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아까 피히테 이야기 하였지요!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은 것,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생명나무, 선악과,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하나님의 약속 그런 것은 아무것도 상관이 없고 오직 나는 나다 그것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작태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어요! 없다면 거짓말이니 여기 있는데 죄송합니다. 거의 없습니다. 생명이기에 생명의 원천을 예수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나의 원천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다가 어떤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 부인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습니다. 삼수를 하여도 시험에 또 떨어지고, 저 운전시험 여섯 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예수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홉 번 떨어진 사람이 예수 부인하지 않았다면 저의 뺨을 때릴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가 일찍 죽었다고 죽기 전에 예수 안 믿었겠습니까? 갑자기 돌연사 하더라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관계없이 예수님은 생명이고 부활입니다. 처음부터 생명이고 처음부터 부활이었고 처음부터 선악과였고 처음부처 생명나무였습니다.

 

아직 칭의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에 대하여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아마 다음달에 더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나로부터 나의 구원, 나의 의로움, 나의 믿음 이런 것을 말하였는데 이런 것에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가 하면 이 나가 문제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엉터리 나를 피히테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나라는 유한 속에 무한이 들어있다는 그런 의식은 마귀가 범죄 한 인간들에게 심어준 자기의식입니다. 이러한 나 밖에 모르는데서 구원을 생각한다는 것은 떡이나 엿을 죽 잡아 늘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나의 구원이란 것도 나를 죽 잡아 늘여서 평평하게 한 그런 것 밖에는 안 됩니다. 밀가루 반죽을 죽 잡아당긴 것과 같이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나를 죽 잡아 당겨 늘여서 그 속에서 나의 의로움을 찾는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 자체가 무엇을 모독하는 것인가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 하나밖에 없는 전쟁이고 마지막 전쟁인 이 하나님의 약속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약속을 줄때에 인간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인간은 흙이 되었습니다. 흙이 된 상태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설쳤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여자의 후손이니까 이것은 모호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손에 만져진다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 뱀의 후손은 무엇입니까? 뱀이 알을 놓은데 그러면 뱀의 알이 뱀의 후손입니까? 이 부분이 오늘 강의에서 어려운 부분인데 잘 들어보세요! 인간이 흙이 되었지요? 맞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요! 맞지요? 맞으면 맞는다고 이야기 해 주세요! 인간은 흙 되는 것이 맞지요!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 실제로 나옵니까? 인간이 흙이라는 실제라면 여자의 후손도 실제가 맞습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과 싸우려는 뱀의 후손도 실제입니까?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 뜯으려면 뱀의 후손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뱀의 후손도 실제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 뱀의 후손의 실제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까? 안 찾지요! 왜 우리가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뱀의 후손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사는가 하면, 신약에서 이런 것을 영적이라고 합니다. 영적이기 때문에 찾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흙이라는 이 사실도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방식이 육적인 것입니다. 육적인 안목에서 이런 영적인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늘 나올 수가 없지요! 믿는 사람에게 가끔 나옵니다마는 우리가 이런 영적인 생각을 늘 못하지요! 은행에 돈 찾으러가서는 아가씨 혹시 뱀의 후손에 대하여 아십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지요!

 

두산하고 한화하고 지금 플레이오프전하고 있는데 두산 이겨라! 한화 이겨라! 하고 하는데 여자의 후손 이겨라! 하면 그 사람은 바보이겠지요! 그곳에서 여자의 후손이 왜 나옵니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이것은 한화가 이기든 두산이 이기든 그것은 이 우주를 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쉽게 해봅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하늘이 껌껌해 졌습니다. 여러분의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에 하늘이 껌껌해 졌습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에 무덤이 열리면서 죽었던 시체들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여러분의 아저씨가 돌아가셨을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불교는 자기도를 닦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도를 닦으면 하늘이 까매집니까? 베드로가 도를 닦으면 물위를 걸을 수 있어요? 우리가 몸이 아플 때에 도를 닦아도 왜 하늘이 까매지지 않는지 아십니까? 이 자연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고 영적인 세계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상관하는 것이지 이 이근호 하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다고 까치가 울지 않습니다.

 

이근호가 아프다고 누가 울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같은 육적인 아내가 울지만, 영적인 천사는 꿈쩍도 안합니다. 거지 나사로 죽었다고 우는 것은 저쪽이지만 오히려 천자는 받들어 모시고 올라갑니다. 거지 나사로야 너는 육적인 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다. 오히려 기뻐서 VIP대접해서 천국 올라가기 바쁘지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울고 통곡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교회 다니면서도 육적인 세계에 푹 빠져가지고 있는지 우리가 도를 닦으면 이 자연세계가 감동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걸은 것은 육적인 자기 바라보지 못하고 예수님바라보고 가니까 그곳이 육지인지 바다인지 구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기를 바라보지 말도 안 되게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 베드로가 물위로 걸었다는 순간에 물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무엇을 본 것입니까? 피히테가 말한 나를 생각하는 순간 물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나를 바라보다가 물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한 칭의 론으로는 지옥 갑니다. 왜? 그것은 처음부터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이라는 영적인 세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자기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라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옥보내기 위한 하나의 전략입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 그들은 바라보기만 하였습니다. 요단강 건널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리고 무너질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로보암 전쟁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기 위하여 참고서보고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명심하여야 할 것은 영적인 분이 지금 우리를 다루고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내가 영적인 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걸음도 내가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양이고 목자는 따로 있습니다.

 

현재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가 모두 자기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피히테의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는 목자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양이 아니라 목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목자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목자는 따로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전부다 자신을 양이라고 간주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피히테처럼 내가 다 알아서 잘하는데 무슨 목자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육적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까지 이해되었다고 보고 진도 또 나가봅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약속이 있는데 그 약속을 위하여, 그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물과 수단으로서 인간이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을 이야기 하면서 계속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었더라, 죽었더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와 연관짓지 말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어떤 전쟁을 벌였기에 그 전쟁에 대한 전리품으로 우리에게 의가 주어졌는가를 그 관계를 규명하면 그것이 성경적인 진짜배기 하나님의 칭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의롭게 되고 싶다고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여호와의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서 그 혜택이 꼭 나에게 도달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악마가 싸워서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드시 나 나에게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물에 빠진 베드로가 되어버립니다. 지금 조금 더 해야 하는데 이래가지고 헤어지면 곤란한데,,,

 

자 지금 그림을 그립니다. 잘못된 그림인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후손 그 다음에 뱀의 후손 여기에 우리는 제 삼의 관점, 이것이 틀린 것입니다. 엉터리입니다. 저는 여자의 후손이니 뱀의 후손은 망해야 돼! 그러니 여자의 후손의 혜택을 우리에게 주세요! 이런 것은 아까 말한 피히테의 자의식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있느냐 성경적으로 그림을 그려보세요! 우리는 어디에 속하였는가 하면 뱀의 후손에 속하였습니다. 뱀의 후손에 속하여 있었는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뱀의 후손에 속하여있는 우리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서 뱀의 후손이 우리를 여기에서 끄집어내어서 여자의 후손 쪽으로 데려가는 식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강의에서 성경말씀이 열왕기 상 9장 9절이었습니다. 애굽에 있던 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만 끄집어 낼 수가 있지요!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셨기 때문에 의인 되었지, 내가 의인 되어야 구원받는 다는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거기에 성령께서 뒤 맞추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명심을 해야 합니다.

 

내가 구원되어야 하는데 율법에 의하여 보니 내가 죄인이구나! 율법에 의하여 내가 죄인 인줄 알았으니 나는 이제 필요한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 이런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귀 안에 들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였다면 의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건져내신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를 확보한 것이 아니고,

 

아까 피히테식의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는 죄인인데 명목상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가 있지요! 죄인이지만 끝까지 의인 되도록 따라가야 돼, 또 하나는 이왕 죄인인데 막살지 뭐! 이 두 가지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나를 위한 칭의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한 나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의, 나의 구원을 위한 의가 되면, 이것은 성경적인 의가 아니고 일반 종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뱀의 후손이었는데,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데, 어떤 강도가 집에 들어가서는 그 집 주인을 꽁꽁 묶어 놓고 그 집의 세간을 훔쳐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미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덮쳐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나는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는 구원받아야 돼! 나는 거듭나야 해! 나는 의로워야 해! 하는 그런 발상자체가 마귀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무엇을 알아서 구원받지, 무엇을 해야 의로워지지? 율법을 보니 탐내지 말라 하였는데 탐을 내었으니 죄인인데 그러면 그 다음순서는 무어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의인이 되지? 하는 발상자체가 제 삼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기에 나온 것입니다. 자신이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다는 고백 속에 나오는 고백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마귀에 속하여 있었던 자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여자의 후손이 오셔서 자기 백성으로 끄집어내었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무엇이 의로우냐? 나에게는 일체 의로움이 없고 끄집어내어주신 그것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끄집어내어주신 것이 의가 된다면 내가 의로워질 필요가 없잖아요? 왜? 나를 끄집어낸 손이 나에게는 없으니까!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느냐? 끄집어 낸 것을 증거 하면 되지요! 그것을 로마서 1장에서 의의 종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 하는 종, 이보다 더 위대한 의의 종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강도요? 강도가 나쁜 사람이라고요? 마지막에 그는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강도도 나쁘고 그 옆의 강도도 나쁘고 강도를 잡아넣은 경찰도 나쁘고 다 나쁩니다. 다 나쁘지만 하늘나라 간 사람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강도 두 사람 다 갔습니까? 그 중에 한 사람만 갔지요!

 

왜 갔습니까? 강도가 믿음이 좋아서요? 아니요! 끄집어내시는 분이 그 한쪽 강도만 끄집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어렵습니까? 안 어렵잖아요! 물위로 걸은 사람이 12제자 중에 베드로뿐이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을 연습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오라고 하여 갔더니 그냥 물위로 걷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베드로는 물위로 못 걸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른 것을 시키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입니다. 물위로 걷는 것은 그만하고 이제 세 번 부인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천국 갔으면 자기 자랑하겠습니까? 내가 내 된 것은 누구 공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럴 때 그 관계를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만 하겠습니다. 의란 내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얻은 그 의 밖에는 다른 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의란 오직 하나의 의만 인정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의, 같은 말로 그리스도의 의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건져내시고 지금도 계속하여 건져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2.5초 동안, 3초 동안, 주일 낮에는 한 6초 정도, 우리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다? 십자가 피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내가 육으로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가끔 알게 됩니다. 가끔 알게 된다는 것은 대부분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까?

 

대부분 피히테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신학자 한 사람 배웠습니다. 무슨 테? 나이테? 피히테지요! 내 속에 착한 것 내가 개발한다. 이것이지요! 내 속에 착한 것을 내가 개발하여 내가 복을 받는다는 식입니다. 그것은 피히테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들어보니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피 때문에, 유월절 어린 양의 문설주에 발랐던 그 피 때문에, 십자가의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산다는 것을 우리가 가끔은 알지요! 그러므로 여호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우리의 영원한 참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칭의에 대하여 조금 더 하고 싶은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칭의에 대하여 인간은 의가 없습니다. 악마 속에 들어있는 인간이 착하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의란 하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밖에 없습니다.

 

그 의가 무엇이냐 하면 악마의 손에 있던 우리를 끄집어 내어주시는 능력, 관계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되느냐? 그 의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의 종, 의가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생명이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이 피조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인간이 허세를 부리지요! 나는 피조물이 아니야! 나는 내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 대로 하는 거야! 이미 죄 짓고 난 뒤에 술에 취한 모습입니다. 술에 취하여 알딸딸하여 막가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의지로 선악과를 따 먹었어! 나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따먹었단 말이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따 먹으면 생명나무도 따 먹지 왜 못 따 먹었느냐고 하면, 따 먹으려고 하였는데 못 따먹게 하려고 나가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가지 않고 버티지 왜?

 

인간은 생명과 죽음을 증거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모든 것을 오직 나를 목적으로 삼아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번영을 위하여 나의 신 됨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것이 뱀의 후손의 버릇임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있는 우리를 예수님의 의가 능력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였사오니 이제 우리가 어디를 가나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증거 할 수 있는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녹취 060229 이장우

 

 

중생, 칭의 1-4

 

05. 11. 14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 이 시간은 칭의에 대하여 하겠습니다.

 

칭의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아무나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롭다고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여 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 한다는 것은,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증거 할 때는 반드시 성경 전체를 증거 하여야 합니다. 성경에는 나를 의롭다 하는 것이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이근호를 의롭게 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중에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에 보면 있습니다. 그러나 나 이근호를 의롭다고 해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증거 하려면 성경 전체를 증거 하여야 하는데 성경 중에서 자기가 얻은 것만 챙겨서 증거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큰일 납니다. 그것은 반칙입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렇게 나와야 됩니다. 마귀가 증거 하기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따로 있더라고 마귀도 증거 해야 됩니다. 결국 증거 하게 되지만, 본인은 구원받지도 못하지만 성경 내용은 성경내용대로 이 우주에 증거 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하여 실수란 게 없습니다. 전혀 실수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이 성경대로 증거 되어야 할 텐데 항상 나라는 것을 집어넣어서 나라는 것을 통해서 나의 경험 나의 체험 나의 얻은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성경을 증거 하게 되면 이것은 자칫하면 이단 되고 교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할 때에, 전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대방이 공격할 때에 너는 뭐 잘났는데? 하는 소리가 나오도록 전도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래 너 믿음은 최고고 내 믿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하면서 직접 반발이 나오도록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상대방이 오해해서 그런 것은 어쩔 수가 없겠지만, 성경이 그러하더냐? 이런 식으로 반박이 되어야지, 그래 너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다 못났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직접 반발이 나오게 하는 빌미를 주면 곤란합니다.

 

이 칭의 문제 구원론문제 할 때에 제일 주의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다시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어떤 사람은 의롭다고 해 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고 해 주는 나머지 사람은 무어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의 권한으로 해 주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서 해 준다는 이런 것도 성경에 없는 것입니다.

 

방금 한 이야기를 성경에 들어가서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의롭다고 해 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은 이 사람이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하였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럴 때에 반드시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나중에 강의 끝날 때에 물어볼 것입니다. 안 물어볼 수도 있고 그것은 내 마음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는 그 사람의 착함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 예수님과 인간하고 대비가 되면서 인간이 의롭다고 되는 것은 이 사람의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약간 복잡하지요!

 

그런데 현재 교회에서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성경에서 자기로 바뀌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해주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니까 의롭다고 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만 믿느냐 나도 믿는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을 의롭다 하는데 실지로는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지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는 자신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믿음은 최고이고 나의 믿음은 믿음도 아니냐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들처럼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측정을 해야 하고 믿음이 무엇인지 탐색에 나서야 하고 수색하고 점검해서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따져야 되고,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따지는 그 자는 누가 아는 것입니까?

 

칭의라는 것이 성경 말씀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이 따로 존재 한다는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이 의롭다 함을 가지고 이야기 할 때는 실제로 이 세상의 교회에서는 문제점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부디 이번 강의에서 그 혼잡함이 싹 가셔지기를 바랍니다.

 

싹 가시는 방법은 제가 차근차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려야 속이 시원하겠기에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이나 믿음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때문이라는 단어를 고상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예수 안, 예수님 안이라는 이 박사학위 논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바울서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확 다가오는 것은 너의 마음가짐이나 행동이나 태도에 관계없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나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 말고 예수님과 거래해서 그 결과의 열매를 우리 것으로 주신다는 이 말입니다. 시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고 한다면, 그 믿음이 어제의 믿음이 오늘의 믿음까지 이어지려면 여러분들이 분투노력을 해야 하고, 분투노력을 한다고 해도 잠시 자기애가 떠들고 그러면 그것이 또 신경질 나고 화를 내면 그 순간만은 또 하나님의 의를 스스로 잊어버렸다고 착각 할 수가 있습니다.

 

애가 공부를 못해서 내가 성질이 나서 내가 잠시 10초 동안 잠시 혼동 속에 있었구나! 그 10초 동안 믿음이 정전이 되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 행동할 그때에 예수님이 재림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런 괴상한 의문이 들기로 할 텐데 이 의존교회 성도들은 지금 몇 달이 되었죠?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서 어렴풋이 라도 믿음이 그런 쪽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면 성경을 증거 할 때에 절대로 나를 집어넣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나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이근호는 없습니다. 인터넷에 이근호는 뜨지만 성경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그대로 증거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있었던 그 약속과 맹세가 이렇게 성취되었다는 것을 통보해줍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이 임재 해야 믿어지고 그렇게 안 믿어지는 것 조차도 이것이 성경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일가친척 중에 안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약속의 성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믿는다고 할 때에 자기 좋은 것만 믿지 말고, 저러면 안돼! 저러면 안돼! 하는 것도 성경에 있거들랑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기에 내가 거기에 가타부타 건방지게 우리의 영향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머리에서 정리가 안 되시는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마땅히 당연하게 순종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방금 이야기한 이런 것이 잘 정리가 됩니다. 그런데 방금 이렇게 한 이야기를 가지고,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 한 것으로 나에게 오는 이익이 무엇입니까? 라면서 자기의 이익을 묻는다면 그 분은 순종하는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이든 누구든 내 중심으로 살려고 하니 정리가 잘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비록 한국인 4천 8백만이 다 안 믿는다고 하여도 인간이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해서 무슨 상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슨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서 말씀을 공부하는 것,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 해도 되는데 오늘 목사님 보고 참석해 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곤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강의, 하나님의 의를 강의 하면서 여러 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강의할 때에 무엇이 마음에 가장 강하게 반발이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이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그냥 순하게 받아들이면 될 텐데, 하나님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내가 세상에 나가서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계산하면서 따진다고 하신다면 그것을 강의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 속에 항상 착한 마음 악한 마음의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착한 마음임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펼치는데 그렇게 되면 성경말씀이 순하게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에게 들어와 어떻게 멋진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그냥 피조물이라면,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그냥 주님을 향하는 곳에 눈길을 보내는 것으로 대 만족을 해야 합니다. 다른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그것으로만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강의하는 것이 순하게 넘어올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가 무엇인가?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서로 다르기에 충돌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물어봅니다. 속으로 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의롭다 하면 기분이 상쾌하여 집니까? 그것이 희한한 일이지요!

 

돈을 주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 천박한 기분이 들지만 그러나 당신은 참 의롭습니다. 정의롭습니다. 훌륭합니다. 어떤 힘을 쓴다는 것보다 참 착합니다. 이런 말이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야구선수 이승엽 선수에게 홈런을 잘 칩니다하면 그것이 기분이 좋겠지만 더 기분이 좋은 것은 정말 착하십니다. 하면 정말 기분이 상쾌하여 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착하다는 말에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갑자기 반응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소리 들으면 기분이 좋으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그 인간이면서 우리 자신이 왜 의롭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스스로 연구하고 탐색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나의 이야기이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인데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왜 의롭다 하고, 정직하고 훌륭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지를 흔히들 성경에서 내리는 결론을 보면,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사람도 드뭅니다마는,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선과 지식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성경 창세기 3장에 나오니까 우리는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데, 선과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하면 기분이 별로인데 왜 갑자기 대단히 선하십니다. 하면 기분이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누구를 만났는가 하면 아담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기에서 선악을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부끄러움, 수치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피하여 숨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의 지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선악과가 우리 몸에 무슨 약물처럼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데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면, 왠지 오늘은 무언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이것이 우리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피하여 가리고 숨는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 당당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 동네가 어느 동네인가 하면 가인의 후예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가인이 하나님이 계시는 그 땅을 떠나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로 가서 누가 힘이 센가 하면서 힘을 겨루는 가인의 도시를 건설합니다.

 

그러나 그 앞의 이야기 가인도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튕겨버리시니 안색이 변하여 동생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껍데기가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으로 보지 말고 보지 말고 그 껍데기 안에 어떤 알맹이가 들어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런 알맹이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부끄러워하고 피하여 숨는 그러한 본심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이 죄인 된 인간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본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해서 방금 이야기한 이 전체를 한마디로 하면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어 보아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시면 무서워서 다 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타고 재림하실 때에 그들은 바위틈에 숨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그들은 대처할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자기를 숨길 수 있는 방주는 이미 문이 닫히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달랑 여덟 사람, 한 가정만 태우고 방주는 떠나버리고 나머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자기를 가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마지막 때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않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의 방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간은 어린애나 어른이나 정상이 아닙니다. 정상이란 나쁜 것만 매일 생각한다는 뜻에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것을 피하여 도망치는 그러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보면 등록했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삼분의 일이 넘습니다. 장로님이 주소록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끝 페이지에 따로 모아두었는데 교회에 등록을 했다가 안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우리교회가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 아닌 다른 것을 전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 그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 복음 있다고 해서 간 것도 아니고, 그냥 안 나오는 것입니다.

 

피하자는 것입니다. 대다수가 가는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앞에 서면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닌 것이 발각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남이 짐승이라고 하든 무어라고 하든,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 나가고 월급타고 아이들 피아노 시키고 공부시키고 TV좀 보다가 밤 되면 자고, 노는 날은 가족들 깨워서 가족들 위로한다고 낚시도 가고 등산도 가고 먼 여행도 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못 만난 친구들 만나서 잡답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의미가 무엇인지 그런 소리도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직장 나가서 월급타서 토끼 같은 애들 키우고 자기 아내 있고, 집안의 경조사 있으면 도와주고 너 없으면 일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벌초도 하면서 집안 어른들에게 눈도장 받아 칭찬을 듣고, 며느리 같으면 노는 날마다 잡채 같은 것 해가서 효부소리 듣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아들이나 딸보다 낫다는 그런 소박한 행복을 누리며 살다가, 교회 와서 들어보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것인 줄을 안 들었으면 몰랐을 텐데 듣게 되니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창세기 1장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앞서서 일하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분명히 있고 지금 있는 것들은 날아가 버리는데, 중요한 것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만한 새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인데,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교회도 안 가고 성경도 덮어버리면 그런 일은 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게 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 들었는데요! 그러는 것입니다.

 

이 앞의 길에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많이 있습니다. 길을 건너다가 사고가 많이 나기에 동에서 육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육교로 다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는 귀가 어두워서 못 들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육교로 건너지 않고 길로 건너면 차가 스톱해 줍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차라리 기존교회 가서 신은 계시는데 바치면 복주고 정성 바치면 복주는 그런 하나님, 기도하면 다 주신다고 하는 그런 것은 나에게 직접 간섭을 안 하니 내가 아쉬울 때만 가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가면 내가 아쉬운지 아니 아쉬운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근본과 뿌리와 사람의 목적과 어디서 출생했으며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쏘아 붙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니까! 그것은 엑스레이 찍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이런 뜻입니다. 말기 위암환자라면 그 위암을 안고 장렬하게 폭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위암 고칠 생각 안하고 의사 필요 없다면서 나 그냥 죽을게 하는 것입니다. 내 하나 죽으면 그만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마음 편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자꾸만 거부하고 토해내고 무언가 안 듣고 싶어 하는 그러한 세력이 있습니다. 무슨 복음적으로 보면 악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마귀인줄 모르고 어쨌든 간에 이 하나님의 소식에 대하여서는 나에게 좀 안 들려오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 없는데 예수님이 눈에 안 뛰는 곳에 절만 수두룩하게 있는 데, 만나는 사람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 자기보다 더 천박하게 사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서도 놀라운 것은 남이 나를 보고 착합니다. 하면 기분이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방금 길게 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하나님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그 자체의 상태에서도 내 자신이 의롭게 되고 싶은 그러한 충동, 이왕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된 이상, 이 인간으로서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그 처음의 품성이 녹록하게 살아있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방금 불신자 이야기를 쭉 이야기 하였지만 소위 교회 다니는 신자라는 사람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도 다 그런 품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방법상 세상 사람들이 나를 훌륭하다는 그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는 것처럼, 소위 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여주는 것이 기분 좋게 될 때에 그것이 성경적이냐고 따지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버리지요!

 

방금 불신자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는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관계를 끊어놓고서 그 상태에서 나는 의롭고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불신자에게 있다고 하였지요!

 

그러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 불신자들보다 낫습니까?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여주는 것이 기분이 좋은 것처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소리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고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그 소리가 썩 기분이 좋게 신나게 들리는 그런 어떤 욕구가 있다면 성경적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 말은! 제가 너무 기를 죽이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왜 사람은 죽는 주제에 의롭다 하는 것은 왜 그렇게 고대하고 기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제와 분수도 모르는 체 자꾸 의롭다 하는 그것을 좋아하느냐는 것입니다.

 

쉽게 해 봅시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예수님에게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예수님께 아부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 옆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약속을 그 사람은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 하나 의롭게 되고자 하는 탐욕이 발생하여 잠시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 의롭게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냉정하게, 단출하게, 딴 생각하지 말고 나를 거기에 집어넣어 의롭게 되고 싶다는 그런 욕망을 집어넣지 말고 성경 그대로 증거 하라고 했지요! 성경 그대로 증거 하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해줄 인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성경의 말씀을 나의 욕망과 결부시키지 말고 그대로 믿고 증거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경 읽고 그것에서 나에게 무슨 이득이 올까 그것을 챙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보면 성경의 본 뜻이 훼손이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통로 파이프에 불과한 것입니다. 파이프가 물을 잡아두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흘러가게 두어야 합니다. 성경이라는 뜻이 나라는 파이프를 통하여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요것이 내 것이라고 잡지 마시고!

 

아 누가 나를 의롭다 해주면 좋겠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용하려고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를 통하여 그냥 흘려보내시면, 그것이 바로 하나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소리다. 무슨 소리? 예수님의 말씀을 통과시키는 소리다! 하나의 메가폰이라는 것입니다. 영화 찍을 때 레디고 하는 그런 메가폰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런 메가폰 알지요! 소리 크게 하는 메가폰!

 

우리는 예수님의 메가폰으로서 성경에 있는 예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확산되고 증거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중간에 잡아채서 자기 의로움으로 고착시키려고 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위주로 왜곡되어서 증거 됩니다. 이것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상태 자기를 부인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만 누구 편을 들면 함께 그 사람의 영광을 같이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나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나에게 무엇을 줄 것입니까? 나를 의롭다고 해 주시겠습니까? 신난다. 이런 것을 자꾸 계산에 넣으시면 하나님의 의가 순수하게 증거 되지 못합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내용이 과연 그러한지를 창세기 15장을 봅니다. 제가 신신당부하는 이것도 힘들어요! 신신당부하면서 우리의 본성은 너무나 자기 절대화를 추구한다고 당부에 당부를 하지만 나중에 질문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꼭 자기를 개입시켜서 하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창세기 15:6-7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게 이끌어낸 여호와 로라고 되어 있지요! 갈라디아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인용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는가 하면 창세기 15:1절을 보면,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약속이 먼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단정 지을 때에 아브람이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앞으로 아브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할지라도 의인됨에 있어서 변경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그 의가 수정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어떤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비록 자기 행위가 엉망진창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있어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수납하고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차를 몰고 가는데 오른쪽으로 가야하는데 잠시 착각하여 왼쪽 길로 가서 먼 길을 돌아가게 되었다면 운전하는 사람은 상당히 기분이 나쁘지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운전 처음 할 때 기도했는데 왜 오늘 쪽 길로 안 가게하고 착각하게 해서 왼쪽 길로 가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식식거리면서 제가 이래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시간낭비 기름낭비하면서도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너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너를 향한 뜻은 변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고 요구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아니면 못 믿습니다. 진짜 신자가 아니면 못 믿습니다. 그런 중에서 아하! 하나님께서 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시험하시려고 오른 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 쪽 길로 가게 해서 나로 짜증이 나게 해서 틱틱거리며 가다가 이것을 깨닫고서 아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지 내가 잠시 그것을 잊었구나! 하면서 웃으면서 기쁨으로 할렐루야 하고 오다가 차를 박아 버린 것입니다.

 

안전거리 유지하지 않아서 사고를 내었습니다. 보험료 올리지, 미안하다 해야지, 한 30만원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휘파람 불면서 할렐루야 하다가 차를 박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손해와 돈 손해까지 났습니다. 거기서 한 오 분 간 씩씩대다가 아하 이것도 시험이었구나! 내가 이런 것도 이길 수 있어야지 하면서 가다가 전봇대 받아서 옆의 아내가 죽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식이 죽지요! 사람은 자신의 극한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의 뿌리를 자기가 모릅니다. 자기의 뿌리를 모르기에 많은 사람과 어울려 대충 살려고 합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더라도 남에게 훌륭합니다. 착합니다. 그런 칭찬소리 들어가면서 직장 생활 충실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피아노 학원 잘 보내고 과외 잘 시키고, 살림 잘 살고 시가집에 잘하고 친정에 잘하고 그것이 자기 속성에 맞는 것입니다.

 

그게 왠지 편한 것입니다. 교회 와서 목사 설교 듣는 것보다 집에서 연속극이나 보면서 친구나 동창생들과 보내는 것이 편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뿌리를 모릅니다. 그냥 세월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쇼핑몰 보면서 쇼핑하고 신문에 쿠폰 나오면 그것 오려서 살림에 보태고, 양말을 꿰매어 신고 콩나물 값 한 푼이라고 깎고 그래서 애 키우는 재미 남편 승진하는 재미, 이것은 인간이 왜 죽느냐? 예수님이 왜 구름타고 오시느냐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몸이 당기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편한 것입니다. 왜 라고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욕망이 가는대로 편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오게 되고 죽음의 위기가 오게 되면 다 남 탓이고 국가 탓이지 자기 탓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 탓으로 돌리자면 자기의 죄를 발견해야 하는데 그 동안 너무나 착실하게 살아왔기에 자기 죄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발견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은 국가를 탓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걸핏하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거는 것입니다. 자기 돈 한 푼 안 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그 아들이 연세대 본과 의대생인데 친구와 싸우다가 맞아서 즉사하였습니다. 연세대 의대생이면 얼마나 장래가 촉망이 됩니까? 그런데 그 가해자도 같은 연세대 학생인데 이미 죽은 자식인데 그 아이 고발해서 그 아이 장래를 망치기보다는 자기 아들이 목욕탕에서 넘어져서 사고로 죽은 것으로 해서 돈 한 푼 안받고 쉬쉬하면서 끝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연세대를 상대로 보상받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상주에서 밟혀죽은 자들에 대하여서도 보상 문제 나오겠지요! 요즈음은 돈벌이가 안 되니 보상으로 돈벌이 하려고 합니다. 여기 오다가 보니 재개발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던데 그럴 때에는 끝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면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여기 개발됩니까? 예, 좋겠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ᄒᄒ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지 이 땅에서 나 중심으로 옳고 그름과 축복과 저주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큰 나라가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엄청나게 커서 다윗 때보다 더 큰 나라가 되었지만 가장 부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웃시야 시대나 아하시야 시대에 나라가 컸지만 엉망진창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솔로몬 때 나라가 그렇게 부강하였지요! 백성들을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부하시기를 너희가 가나안에 가서 잘 먹고 잘살아 배부르게 될 때에 나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릴까봐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면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여기 길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붙들고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이 옆집에 한번 물어볼까요? 하나님의 새 언약에서 아십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삽니까? 하고서 물어보면 그저 아침에 직장가고 저녁에 와서 밥 먹고 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인생의 뿌리를 모릅니다. 자기 자신 편한 것 밖에 모릅니다. 그러다가 일 터지면 다 하나님 탓이고 이웃 탓이고 남 탓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나 여러분도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희한하게도 하나님의 맹세와 언약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모든 능력을 초월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아브라함에게 뒤집어 씌워지니까 아브라함이 그 맹세 안에서 끝까지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의가 되었다는 그 통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혀지는 것임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메가폰이라고 하였지요!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달되면서 결국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이 예수님의 의가 되고 그 예수님의 의가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의 의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오직 한 사람만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모든 맹세를 그분이 홀로 독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모든 자가 의인이 된다는 것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아까 차를 모는 예를 들었지만 그런 예가 무언가 섬뜩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예가 실제상황으로 나에게 일어난다면, 내가 운전하는데 나의 운전과실로 내 아내가 죽게 되었을 때에, 내가 과연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은 제가 첫 시간부터 누누이 강조한 성경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변개시키지 말아달라는 그 부탁에 또 저촉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나도 모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가 그 시점에 그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 부닥칠 때 이렇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는 그런 방법의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쉬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고 아내 죽는 것도 하나님이고 거기서 아내가 죽더라고 예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기에 제가 그것을 어떻게 가타부타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 당해봐야 아는데, 그렇다면 내가 그런 일을 당하여 다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배신한다면 성경에서 의롭다고 한 이야기가 헛소리가 되겠네요! 그다음부터 교회도 나오지 않고 아까 이야기한 세상 사람들처럼 직장 나가고 편안하게 살면서 남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나 들어가면서 살면서 끝났다면 나는 천당은 다 갔네요! 하면서 걱정을 하시는데, 아마 그런 걱정을 아브라함도 했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위로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걱정까지 아브라함이 했는데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만약에 나에게 개입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개입을 안 하면 할 수 없지요 뭐! 제가 개입하라고 압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약간 재미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지옥 보내시겠다고 하시면 목사가 나서서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기분으로 목회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듣기 싫다고 안 나오는 것에 대하여서는 목사가 어떻게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답답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기뻐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렇게 저주하시는데 내가 같이 동조나 해 주어야지, 하나님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데 하면서 제가 관여하고 싶지를 않습니다. 왜? 그것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한 오 분 쉬면서 정신 가다듬어 봅시다. 녹취 060323 이장우

 

 

 

중생, 칭의 1-5

 

05. 11. 14 강의 이근호목사

 

지난 첫 번 시간에 성경에 보니 하나님이 인간 중에 의롭다고 할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롭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한다고 제가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고 있기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자기 자신이 자꾸만 바뀌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같은 경우에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도 자기의 뜻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믿고자 하는 것이 자꾸만 비껴나가는 것입니다.

 

아까 이 목사님과 잠깐 이야기를 하였는데 대구 실로암 교회에 이광호 목사님이라고 계시거든요! 그분은 교단에서 면직이 되었습니다. 억울하지요! 왜냐하면 바르게 성경대로 했는데 면직되었으니 억울하겠는데,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분명히 본인이 예수님만 믿는다고 했는데, 예수님 말고 예수님과 걸쳐 있는 여러 가지 인연의 끝을-불교용어인데-안 놓고 있는 것들이 많겠지요! 목사라는 직책, 교단이라는 것, 자기를 따르는 추종세력, 목사님 훌륭하십니다. 대단한 일 하셨습니다. 하는 칭찬, 그리고 목사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 소위 예수님만 믿어야 할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걸치고 여러 가지 믿고 싶은 것들이 있지요! 예수님이 주신 자녀, 예수님이 주신 집, 예수님이 주신 참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목사님, 무언가 예수 이름으로 믿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것이니 마음 놓고 믿자고 하는 것조차도 그게 믿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이 무엇이냐 하면, 내 목숨, 나의 의, 나의 착실함과 훌륭함과 남으로부터 칭찬받고자 하며 상상한 위대한 나의 자아상, 그것조차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무엇을 보셨습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망한 분입니다. 집안 다 망한 분입니다. 마리아 생각해보세요! 마리아는 자기 자식이 죽었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차마 땅에 못 묻고 자기 가슴에 묻어서 가는 곳 마다 자식 생각한다고 하잖아요!

 

저의 어머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도 남편을 못 잊어서 대전 국립묘지에 화요일 마다 가시는 것입니다. 가지마라고 말려도 한 주일에 한번씩 가시는 것입니다. 너무 허전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여도 가시는 것입니다. 왜? 가시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결국 편한 것만 믿기 쉽다. 이것입니다. 내 몸이 편한 것만 믿으면서 그것을 자꾸만 믿음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편하게 만드시는 예수님,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엉터리가 된 이유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엉터리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위험한 분입니다. 예수님 같이 따라다니는 열두제자들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닌다는 것은 무지무지하게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시절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습니다만 초대교회 시절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자 굴에서 자기 목숨과 맞바꾸어야 될 정도로 위험스러운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지금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이런 믿음은 엉터리 믿음이거든요! 엉터리 믿음이기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 믿음의 내용을 수정하는 쪽으로 인생을 몰고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맨 날 부정적인 것,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는 이런 말씀, 누가 더 높으냐고 따지지 말라하시면서 어린 아이 하나 세워놓고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너희를 보내는 것은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너희들의 말을 믿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라. 그곳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웃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다. 부한 자들아 너희는 통곡할지어다. 왜? 너희들이 받을 행복은 다 받아 챙겼다. 끝났다 너희들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가 현재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철저하게 파괴시키고 변하게 만드시는 그런 쪽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남들에게는 좋게 하여주었지만 본인은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으니 의롭게 된다고 할 때에 도대체 무엇을 믿을 것인가는 평생에 걸쳐서 우리에게 계속 주어질 것입니다.

 

마치 강도처럼 예수님만 계시면 황송무지로소이다. 예수님만 계시면 제가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만 계시면 더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제 인생은 다 완성된 것입니다. 하면서 기뻐할 그날까지 우리가 그동안 믿을 필요도 없는 것들을 예수님 믿는 것으로 대체한 우리를 아브라함 이끌 듯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거나 기분 나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우리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기에 순하게 순종하면 그만이지,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면서 따질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런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처음에는 창세기 15장으로 하였는데 이 둘째 시간에는 시편 71편을 봅니다. 보시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이 너무나 악하기에 의롭다 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완악하던 패역하던 하나님이 의롭다 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주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서 통과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냥 외치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할 일입니다.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고 내뱉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시편 71:2절입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면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15-16절입니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18절에 늙어 백수가 될 때 까지라도 주의 의만 전하겠다는 것이며 24절에서는 내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만 말씀하겠다고 합니다.

 

보셨지요! 약간 어려운 이야기 합니다. 잘 들으세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의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의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아직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여러 가지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왜 기적인가 하면, 우리 인간의 일로 나타날 수 없는 그런 기적, 의로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때 그때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만한 복을 받을 자격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웬 은혠지, 내 행동과 관계없이 복을 받게 될 때에 이것은 아 하나님의 행동 때문에 나에게 그냥 공짜로 주어졌구나 하고서 믿은 것이 시편 71편입니다. 그 뜻은 이해되겠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복을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하나님께서 웬 은혜인지 놀랍게도 이런 큰 축복을 주셨을 때에 그런 축복은 나의 선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의로움 때문에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구약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평소에 생활하시면서 언제 이러한 시편 71편의 진술처럼 내가 종일토록 하나님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할 정도로 고맙고 감사하던가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나는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오감하다. 어떻게 이런 고마운 일이 다 있는가 하는 경우가 하루 종일 언제 입니까?

 

제가 객관식 문제를 냅니다. 1) 아침 10시에 택배가 왔는데, 아는 집사님이 내 목 아프다고 약을 공짜로 택배로 보내왔을 때, 2) 12시에 우리교회 어떤 장로님이 생활비 적으니까 애들 공부하는데 아쉽지요! 이것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모님께 드려서 애들 공부하는데 쓰시라고 왔을 때, 3) 오후 세시에 가만히 있었는데 옆의 교회 문제가 있었는데 그 교회의 대표가 20여면 데리고 와서 이번 주부터 이교회에 오겠습니다. 4) 오후 6시에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저녁 공짜로 사줄 때, 몇 번입니까?

 

이런 것 가지고 내가 종일 주의 의를 자랑하겠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시편 72편의 성도는 자기가 낮아졌습니다. 자기가 높아져서 한껏 교만할 때는 자기가 지금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런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여도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의와 의 아닌 것을 하였는데, 마음을 낮추어 버리면 시편 전체가 그렇습니다만 종일토록 모든 것이 들풀이나 공중에 나는 새처럼 모든 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축복 덩어리로 그 속에 내가 놓여있고 헤엄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에 종일토록 주님의 행사를 진술하는 것입니다. 시편 71편에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일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약속에 땅에 거한다는 그것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나라는 인간이 아직도 21세기에 11월 14일 지금 이 땅에 살아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라는 것을 은혜를 받아보면 이것을 압니다.

 

잘 모르는 모양이네요! 그러면 방법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죄인임을 느낄 때, 24시간 종일 주의 의만 진술합니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라고 하니 어폐가 있습니다만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낄 때에 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거가 다 축복입니다.

 

죄인인 주제에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삼층 천에 올라갔다 온 후에 고난 받는다는 그 자체를 기꺼이 환영하였습니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고난이라는 고난을 다 받아도 나는 아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 고난 받는다고 짜증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사치인 것입니다. 아직도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입니까? 하면서 따지는 것도 교만한 증거입니다. 바울사도가 삼층 천에 올라가서 천국을 보고 난 뒤에 얼마나 좋았든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세계를 보고 왔는데 그 까짓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마음 상하고 마음 조려하면서 조마조마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나는 고난 받으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겠습니까? 고난이여 다 오라! 내가 맛보지 못한 고난 다 맛보마! 이미 천국을 본 사람에게 그것은 문제 거리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의만 종일토록 진술 할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 보내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시편의주제가 무언가 하면 어린아이라도 주님의 의를 진술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장성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주셨는데도 세상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더 좋으니 마음이 높아질 때로 높아져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동안 은혜를 베풀러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그것은 은혜로 기적으로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맨 날 짜증만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로 둘러싸여도 하나님의 의 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언제 아브라함이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을 바쳤습니다. 그 보통 믿음이 아니지요! 대다한 믿음이지요!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아들을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은 불가능하였지만 하나님의 맹세가 역사하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이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가지고 계속 사용하시고 계속 계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을 듣고 여러분들이 이제부터 내가 마음을 낮추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알 수 있도록 마음을 낮추려고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신약시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줄 알면 그만입니다. 마음을 낮추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줄 알면 그것은 저절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대구의 105번 104번 좌석 버스를 타면 앞에 광고가 붙어 있는데 어떤 절에서 광고를 붙인 것입니다. 고부간에 갈등이 있는 것, 애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 이사 갈 때, 몸이 시름시름 아플 때에 오세요! 하면서 10가지 정도 되는데 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름 지을 때, 사업할 때 등의 문제들을 절에서 부처님의 힘과 영력으로 점쟁이처럼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야 이것이 이단이구나!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있는데, 만약에 바울사도가 이 광고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애가 시름시름 아플 때 바울사도 같으면 그게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삼층 천을 보고 왔는데, 고부간에 문제가 있다. 이유 없이 자녀의 성적이 내려간다, 그런 문제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왜 그렇게 마음을 쓸 수 있는가 하면, 바울사도 자신은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총각입니다. 결혼? 그게 뭐 중요한 문제입니까?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재산? 그게 무슨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 인데, 죄인이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기가 올라가본 삼층 천에서 영생토록 느긋하게 살 것인데 이 땅에서 힘들게 사는 것이 힘든 것도 아닌 것입니다. 힘 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힘 드는 것이지,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힘 드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게 무슨 힘 드는 것이며 고민거리가 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심거리를 가지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믿음은 깨어져야 할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것은 박살 날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라면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칭의 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여 주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자신이 복 받은 것과 결부시키지 마세요! 왜? 우리는 복 받을 자격이 없는 원래부터 죄인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 인데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칭의입니다.

 

막상 들어보니 너무나 간단한데 우리가 일상생활에 들어오게 되면 꼬이기 시작합니다. 나의 욕심과 결합이 되어 가지고 자꾸 꼬이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십자가를 그어놓고 마음속에 그으라고 하니 무슨 마술 같습니다만 마음속에 십자가와 그 피를 생각하면서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면, 아하! 이 목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무슨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십자가를 잊어버렸기에 나오는 현상이라고 하였으니 십자가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약간의 심리적인 기술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약간 위험하기도 합니다만 안 떠오르면 할 수 없고, 떠오르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그 생각을 하면 그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찬송가 365장 가사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1절에 보시면, 내 주이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이렇게 결합되는 것이 바로 믿음이며 칭의 이며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소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은 하늘에 있는 의를 우리가 빼 내는 것에 관심이 있는데 주님의 의라는 것은 덮쳐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의가 폭포처럼 우리에게 덮쳐버리는 것입니다. 덮쳐버리면 나의 의는 찌그러져야 합니다.

 

그동안 왜 우리가 죄인 인가하면, 나의 의를 근거로 복을 따내려고 하였으니 이 나의 의가 안 찌그려졌으니 그것이 예수님의 이를 모욕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의를 주셨지만 늘 짜증을 내면서 나는 이렇게 착한데 왜 복을 안 주십니까? 왜 남들처럼 저렇게 안 해주시는 것입니까?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라는 것을 통해서 나의 의는 찌그러져 버리고, 자기가 의롭게 되려는 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버리고 그 자리에 진짜 주님의 의만 덮칠 때에 그것을 가지고 칭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으로만 확보하려고 하는데 지식이 아니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신학으로 넘어오니 어렵게 됩니다.

 

아까 구약을 이야기 하였는데 구약은 어떻다고 했습니까? 마음을 낮추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낮추니 하루 종일 주의 은혜와 기적만 보게 되고 그러니 내가 종일토록 주의 의만 진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정도이지만 신약에서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구약에서는 아직도 자기가 죄인 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낮추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마음을 낮추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이 죄인 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라는 것이 자신의 의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나온 김에 한곳을 더 봅시다. 147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 찬송 부를 때 한 20여초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종일토록 합니까? 24시간? 찬송가는 이렇게 되어있고 성경책 시편 71편에 보니 어떤 신앙인도 종일토록 주님의 의만 진술하는데 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종일토록 주의 의만 진술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니 제보고 욕하지 마세요! 찬송가도 그렇게 되어 있고 성경책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이 성경에 근거해서 진짜 주의 의를 설명해 드립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든지 말든지 성경의 의를 설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데 그 자기 잘난 맛이 찌그러져야 합니다. 그것이 안 찌그러지면 주님께 종일토록 주의 의만 진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항합니다. 내가 남보다 무엇이 못하다고 이렇게 고생합니까? 분명히 반발심이 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에 어긋나는 의입니다.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의만을 믿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서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마음과 결부되어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들이닥쳤으니 이제부터 여러분의 자기 의는 찌그러지고 욕을 얻어먹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에 간다는 원리가 이런 것입니다.

 

아마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 같으면 이쯤하면 뛰쳐나갈 것입니다. 내가 교회 나가서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익이 될 줄을 알았는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내가 찌그러져야 되니까, 내가 옛날처럼 살 수 없으니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네! 그러면 기분 나빠서 못 듣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은 나의 이익과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과 결부시키지 말고 그대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그 사람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냥, 그냥 의롭다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의인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지 않아도 의롭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서 의를 따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나의 의로움, 내가 죄인 임을 아는 나의 의로움에 대한 증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가 아직도 안 찌그러진 것입니다. 내가 죄인 임을 안다는 이 의로움에 대하여 포기 못하겠다는 고집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마저 찌그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칭의가 됩니까? 하나님께서 그냥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누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그의 행위를 근거로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는 죄인 이라는 고백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앞서게 됩니다. 뭐 어떤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 막는지 아십니까? 바리새인들의 겸손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치면서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그냥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순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그 분이 구원받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어떤 행위와 결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그런 행위와 결부시키지 말아야지 왜 마음을 낮추어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보라는 그따위 말들로 혼란스럽게 하십니까? 하신다면 인간이 그냥 순하게 받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찾아봅니다. 구약에서의 의가 무어라고요? 마음을 낮출 때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종일토록 주의 의만 진술하겠습니다. 그 의로 내가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부터 시작해 봅시다.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다는 로마서 3장의 말씀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결부시키지 마시고 성경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는 것은 기뻐할 문제도 아니고 슬퍼할 문제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입니다. 짜증날 필요도 없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중세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의인은 없고 전부 죄인이라면 이 죄인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면 그러면 하나님 당신이 책임지시오!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교회에서 교회사를 하는데 10시간 반을 했습니다. 저는 토요일 마다 꼭 시험치는 기분입니다. 왜냐하면 몇 사람이 오든 교회사 강의를 해야 하니까 토요일 마다 교인들 앞에서 면접시험 보는 것입니다.

 

매주 토요일 시험스트레스입니다. 그 시험을 보기 위해서 월요일부터 각종 책을 보면서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안 되고, 동영상으로 찍으니까 거의 외워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하소연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구원받지 교회사로 구원받는 것도 아닌데 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면서 제가 무엇을 느꼈는가 하면 이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들은 것입니다. 놀고 있는 자에게 포도원에 보내시듯이 사실은 놀고 있는 자에게 일을 시킨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나만 이런 힘든 일을 해야 합니까 하면서 나를 생각하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바로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다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평가받는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십자가 이후부터, 십자가 이후부터 하나님 대 인간이지 인간 대 인간으로 대결하는 그런 시대는 이제 두 번 다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배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너보다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 빼 놓고서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하면 이런 것이 나옵니다. 훌륭한 사람이 이야기 하면서 성모마리아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는지 아닌지 그 논쟁이 나옵니다. 천주교에서는 물려받다가 예수님 놓을 때쯤에 정지되었다가 예수님 놓고 나서는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천주교는 완전히 이단입니다. 이단인 이유가 있는데 그 교회사 이야기 하려면 몇 시간 걸리니까 혹시 나중에 그런 기회가 있으면 왜 교회사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될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의인 되고자 하는 그 사고방식도 걸러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조직신학의 고속도로에 보면 그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의인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의사이지 본인이 요청하여서 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동사무소에 호적등본 떼는 데 가만히 있으면 떼 줍니까? 아니면 신청해야 떼 줍니까? 신청해야 떼 줍니다. 저 인감증명 필요한데요? 어디에 쓰실 것입니까? 예 집 계약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신청하여야 떼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천국에 가려는데 천국은 완전한 의인만 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어려서부터 죄를 지은 것입니다. 몰라서 죄를 짓고, 실수해서 죄를 짓고. 지식이 모자라서 죄를 짓고, 마음은 아닌데 육신이 약해서 죄를 지었는데,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니까 옳다구나! 예수 믿어서 의인되자! 이런 식으로 의인 되겠다는 사람, 죄송합니다. 그래서 천당 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착각하시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부터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바로 십자가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오시고부터는 십자가만이 말을 하고, 십자가만이 잣대이고, 십자가만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시대입니다.

 

무엇이든지 알고자 하면 십자가 앞에 가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세요! 거기서 의인 되게 해달라고 고함질러 보세요! 용서가 안 되지요! 거기서 나 의인되게 해 달라고 예수를 나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십자가 앞에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앞에서는 우리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십자가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죽은 자 인데 예수 안에서만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것을 어린이들이 알아들을지 걱정이 되는데. 지금 인간들은 목숨이 발딱 발딱 뛰면서 살아있습니다. 팔딱 팔딱 뛰는 것이 끊어지면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어도 살았고 살아도 살았지만 예수 바깥에는 살아도 죽은 자입니다. 시대가 그런 시대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그런 시대입니다. 이것을 요한 일서에서 보면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살았고 성령 바깥에 있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요한 일이삼서와 요한계시록까지 더 나아가 요한복음 까지 합하여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살았고 죽어도 살았고 살아도 산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었고 살아도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봉사라도 눈 뜬 자이고 저쪽은 눈떠도 봉사이며 장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모든 규정과 개념과 규칙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정한다고 선언한 이후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라는 개념이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무지무지 하게 어려운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다시 이야기 해봅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시편 71편에서 보니 자기의 눈으로 관찰해보고 생각해보니 마음을 낮추면 해가 뜨고 해가 지고 꽃이 피고 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며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코로 숨쉬는 것도 은혜입니다. 주여! 내가 종일토록 주의 의를 감사하겠습니다, 요정도 의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우리는 그런 소리 할 자격도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것도 은혜요 저것도 은혜요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으면 주여 종일토록 죄인입니다. 종일토록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여기서 어려운 논리를 하나 끄집어내어 보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안에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라는 것을 벗겨 버리면 무엇이 되는가 하면 루터가 말한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하나 마나입니다. 아니 죄인입니까? 의인 입니까? 분명히 하라니까요! 아하 죄인이면서 의인이도 의인이면서 죄인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데요?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으로 간주하여 주었으니까 의인이지만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으니 그래서 죄인이라는 그런 뜻입니까? 그래요! 그러면 실제로 죄를 짓고 있으니 죄가 발생되어 나오고 있느니 죄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하 그러나 그것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의인이라고 쳐 주는 것입니까? 장차 쳐주는 것입니까? 이미 쳐 주었습니까? 이미 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죄인은 없어져 버렸네요! 그러니 의인됐네요! 그렇지요 의인 됐지요! 그런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합니까?

 

방금 이미 의인이 되었다는 말은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번 적어 볼게요! 이미 의인이다라는 말은 이미 죄인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미 죄인이 아닌데 어떻게 그래도 죄인이라는 것과 같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상적으로 죄가 나오니까 죄인이고 법정 적으로 의롭다고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에서 봅시다. 재판장이 피고는 의인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자 피고가 야 신난다. 의인이 되었구나! 마구 집어 던져서 유리창 깨면서 나 의인이야! 선풍기 깨면서 나 의인이야! 나쁜 짓 하면서 나 의인이야! 돈 훔치면서 의인이야! 의인이야! 의인이야! 그렇게 한다면, 옆에 있는 사람이 이 망나니 같은 인간아 죄인을 의인되게 해 주었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네가 잘나서 의인되었나!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 의인되게 하였으니 좀 절제해야지! 그러면 절제할게요! 절제하는데 술은 몇 잔으로 줄일까요? 그리고 봉사도 할까요? 그래야지! 그러면 그 다음부터 무엇이 됩니까? 죄를 절제하는 의인이 되겠지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죄를 절제하는 의인 되었다면 죄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죄가 나오지요! 그러면 이 죄를 절제해야겠지요!

 

그러면 절제의 정도가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100명이 있는데 90명은 절제를 하였는데 10명은 못하였다면 그 사람은 절제 못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10명 중에서 나머지 9명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은 다른 9명 보다 낫다고 보겠지요! 그런 사람은 평소에 절제 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근호가 예수 믿고서 목사 되었으니 절제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이 볼 때는 절제 된 것입니까? 그것이! 그러면 절제하는 의인은 언제 됩니까? 안되잖아요! 그리고 25살에 예수 믿고 40세까지 절제 하였는데 42세 때 절제되지 않으면 앞의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신분상은 의인인데 실제로는 죄인이다. 의인이면서 죄를 짓는다. 질문은 무엇입니까? 나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인데 대답은 의인인데 죄를 짓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게 누가 들어도, 100명이 다 들어도, 무엇을 들리게 되는가 하면, 예수를 믿으면 의인이기는 의인인데 아직 의인 값을 못하는 어설픈 의인이라는 쪽으로 이해가 되지 성경에서 말하는 이미 진짜 의인,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를 침범해서 나의 의를 찌그러지게 만드는 예수님의 의가 드러나는 그런 의가 아니고, 자기 절제하는 의로, 자기 절제 많이 하는 새로운 교만덩어리의 의로 가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보통 딜레마가 아닙니다. 목사는 말리는 것입니다. 술 좀 작작 잡수세요! 그러면 술 먹은 사람이, 목사님 예수 믿는데 의인 아닙니까? 법정 적으로 의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게 맞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해서 술 좀 적게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종 두병 먹는데 한 병으로 줄이겠습니다. 더 줄이세요! 그러면 올해는 반병으로 줄이고 내년에는 딱 끊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달래기 바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고백케 하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십자가를 증거 하는 하나의 메가폰입니다. 하나의 소리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 자체가 아브라함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낳았다고 지옥 갑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안 믿고 육신적으로 자식 낳았다고 지옥 갑니까? 아니 아브라함 전체가 하나님의 용서이고 계시이고 소리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하면서 의심한다고 해서 지옥 갑니까? 아니잖아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승리하고 못된 이세벨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칩니다. 그렇게 도망친다고 지옥 갑니까? 아니에요! 엘리야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영광성 있게 보여주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편 71편이 맞잖아요! 종일토록 주의 의만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리가 의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윤리적 도덕적 개념에서 자꾸만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들이 나오기 때문에, 윤리적 도덕적인 의로 구성된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십자가의 의와 자꾸 충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이것이 자꾸 혼동이 되어가지고 에라 모르겠다! 인간인 이상 할 수 있나! 돈벌다 보면 죄짓지 뭐! 죄 짓고 싶어서 짓나! 누가 죄 짓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나! 하다 보면 죄를 짓는 것이고, 하다 보면 교회도 못나오는 것이지 어쩌란 말입니까? 죄인이 의인되었는데 목사님 이제 내 보고 교회 나오라고 하지 마세요! 한달에 한번만 나오겠습니다. 이제 돈벌러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화, 목사님이 가르쳐 준 그 근거, 성경을 보면서 나온 그 근거를 통하여 자기 정당성이 또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세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오 분 쉬고 하겠습니다. 녹취 060418 이장우

 

 

 

중생, 칭의 1-6

 

05. 11. 14 강의 이근호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의논해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여하에 따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니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의 공로를 보고 의롭다고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이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만들은 의는 찌그려져야 하고, 박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의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든 의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착한 행동해서 만들어 낸 의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면, 이것이 세 번째 시간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우리가 나쁜 짓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마귀 들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화목제물이 따로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제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금덩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한 사람에게 줄 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왜 저에게는 안 주는 거예요? 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은 이 사람에게 주었기에 너에게 돌아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 사람보다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율법 지키면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구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구원받을 필요도 없는데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대신 보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의만이 의이고 우리의 의는 의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화목제물은 예수님만이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물의 중심에는 예수님 빼놓고 그 어떤 인간도 끼어들지를 못 합니다.

 

왜 이 사람한테는 주고 저 사람한테는 안 주는가? 하나 밖에 없는 것을 주었으니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도록 이미 창세전에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미 스케줄이 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화목제물만 받기 때문에 다른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또 무엇이냐 하면, 그 아들이 이루신 화목제물을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하시고 하나님도 의롭게 되시고, 하나님도 의롭고 그 인간도 의롭데 되는 것은 전부 다 화목제물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그러니 착하고 안 착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비정하고 냉철하고 싸늘하지만 좀 정신 차리고 너무 감격하려고 하지 말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이상한 사람이다.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우리에게서 의가 안 나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예수 믿고 설교하는 것이 나쁜 짓인가?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화목제물에 근거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구약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실력이 모자라서 못 이루었는데 이제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셨기에 이제 자신이 율법을 다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영현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빈정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을 다 이룬다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 받아서 율법 다 지킨다는 사람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 받고서 행동해도 죄가 나오던데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도사가 되었는데 성령 받고 행동하니 완벽하게 행할 수 있다고 하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 줄 알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염려도 하지 않고, 범죄 한 오른 손을 찍어버리고 하는 그런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자기가 한 평생 못 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거짓말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새 사람 되어서 율법을 다 지킨다고?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죄 개념은, 잘 들으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죄 개념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죄입니다. 구약에는 오징어 먹는 것이 죄였고, 돼지고기 먹으면 죄였고, 추어탕? 큰일 납니다. 사도시대에는 목 졸라 죽인 것 먹으면 안 되고 했는데 고린도 전서에 보면 사도바울이 한 말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냐 죄 아니냐 하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인데 그 심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한번 했지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십자가 모르면 지옥 갑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피의 화목제물을 믿는 자는 죄가 있어도 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죄를 그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고 고린도후서 5: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 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딴 데 계시지 않습니다. 이근호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지 제 안에 하나님이 바로 있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작전은 우리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제 한 테도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여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일토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계속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의인이냐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 누구 안에 있느냐로 물어야 합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너 예수님이라는 의인 안에 있어? 그래! 그렇다면 의인이네! 너 예수님 밖에 있나? 그렇다면 죄인이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에는 개인에게 너 의인이냐 죄인이냐고 묻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루터도 오해하고 칼빈도 오해한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그런 질문 자체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왜? 십자가 이후에는 모든 인간이 죽었는데 죽은 인간 붙들고 네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죽은 인간인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버렸는데, 죽은 자에게 무슨 의인이고 죄인이고가 있습니까? 만약 죽은 자 가운데서 의인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살려 주셨기에 된 일이고, 죽은 가 가운데서 계속 죽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 살려 주려서 그런 것이고 그게 바로 십자가 이후에 달라진 인간의 위상이 이렇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꼭 귀신 신 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요! 이것이 성경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소리 말고 납득이 될만한 소리 해 드릴까요? 그것은 이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가 많습니다. 살인죄 간음죄 부모공경하지 않은 죄, 안식일을 안 지킨 죄, 그런데요 예수님이 우리의 그런 죄를 대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 전체를 다 뒤덮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출발점이 무엇이냐 하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나쁜 짓, 여러분들도 납득이 가는 나쁜 짓에서 출발하여 그런 나쁜 짓을 했으니 죄인 맞지요! 하는 것은 납득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간음을 하든지 안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안식일을 지키든 아니 지키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자체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자체가 죽은 자로 태어났으니 태어나고 나서 어떤 도둑질을 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나오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자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 성경보세요! 성경 보니 여러분이 죄인 맞지요! 맞아요! 보모 공경했습니까? 아니요! 그러니 죄인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죄가 무거워서 천당을 못 가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죄를 씻어주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인됩니다.

 

여기서 하자를 찾는다면 찾는 그 자체가 나쁜 놈처럼 여겨질 만큼 완벽한 복음 그 자체인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심판아래 있기 위함이고 그래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주셔서,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자고 율법 지켜서 구원 얻겠다고 매달리는 사람에게 율법 외에, 예를 들면, 우리 동네에 중국집이 하나뿐인데 음식 배달을 시켰는데 오지 않는 것입니다. 배고픈데 왜 빨리 안 오는 것입니까? 예 곧 갑니다. 이러고 있는데 남편이 있다가 여보 지금 음식이 왔소! 아니 중국집이 한 집 뿐인데 어디서 왔어요! 하늘에서 왔소! 이런 식의 예상 밖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배고파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주어진 것입니다. 만약 율법 외에가 아니라 그 율법이라면 나는 율법을 지켰다! 발광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못 지켰다면 내 대신에 예수님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되겠는데, 율법 외에 이기 때문에 지켰다 안 지켰다는 문제가 아니고 이미 의인되었다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쉽게 합시다. 귤을 눈앞에 보고도 이빨이 아파서 못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가지고 먹었다, 먹었다고 하는데 뒤통수를 치면서 이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못 먹으라고 준 것이고, 다른 것 사과를 줄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귤을 먹어서 좋아한다는 것은 구원 욕심에 매달려 있는 자기 욕심입니다.

 

귤은 내가 먹지만 율법 외에 주어진 사과는 사과가 나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습니다. 평생을 따라 다니면서 아브라함처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귤은 내가 살기 위하여 말씀을 지켜야 하지만 율법 외의 한 의는 그 의가 나보다 더 큽니다. 그 의가 나를 지배하고 인도합니다. 나는 그 의의 증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가 새삼스럽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미 하늘에 앉혀있다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에베소서에서 무더기로 나옵니다. 연달아서 계속 나옵니다. 이미 하늘에 앉힌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나오지요! 이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안달이 났는데 마침 주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지켰다! 이런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의가 그대로 존속되는 것입니다. 그대로 자기 의가 존속되면 자기 의가 있고 또 남의 의가 있겠지요! 김 집사 의가 있으면 최 집사 의가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누가 누가 더 나은 의인가 하는 경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경쟁 단체이지 그게 무슨 은사 공동체 입니까! 그곳에서 어떻게 한 분을 쳐다 볼 수 있는 교회이겠습니까? 모두 자기 열성, 자기 절제력, 지신의 훌륭한 자질을 쳐다보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기존의 세상과 똑 같은 곳이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부분만 오면 흥분을 해서 고함을 지르다가 목이 다 가버렸습니다. 휴~ 오늘 한국교회가 경쟁을 유발시켜서 교회를 성장시켰습니다. 경쟁을 유발시켜서 성장을 시켰는데 그 근거가 각자 각자의 의를 따로 따로 챙겨야 된다고 은연중에 그렇게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를 않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받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상급론까지 결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고 상을 듬뿍 받는 구원도 있다고 합니다.

 

원자폭탄 뭐하려고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있다면 공중투하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자신의 종교심을 미워해야 하고 자신의 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십자가의 의가 안 좋아집니다. 내 잘난 맛을 스스로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시큰둥하고 별로입니다. 화목제물? 에이 그것이야 벌써 다 뗐다. 이제 내 문제야 라고 나온다면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증인인지 주님의 증인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어떤 목사가 땅을 좀 내어놓은 모양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헌금을 하는데 목사인 제가 그냥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땅을 좀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헌금으로 교회를 유지하고 그 땅은 그대로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그 지역이 재개발 되면서 땅 값이 7배로 올랐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욕심이 나서 이교회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개척하러 갈 테니 내가 전에 낸 그 땅을 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목사가 헌금한 것을 어떻게 돌려달라고 하는가? 성도의 헌금은 돌려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목사는 헌금한 것을 돌려달라고 할 수가 있는가? 그러자 목사는 특수직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교회를 개척하지 못하기에 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면 그 당시의 땅 값 3천만 원을 돌려준다고 하자 일곱 배 올랐으니 오른 가격 2억 1천만 원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게 무어냐 하면, 교회 내에서 무언가 너 나가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었고, 모두가 다 동일하게 죄인이었는데, 동일하게 예수님의 의에 끌려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를, 율법 외의 다른 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놓고, 내 돈 돌려달라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은 이게 교회가 경쟁단체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한 몸에 붙어사는 한 지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회로 오실 때에는 내가 왜 그리 문제가 많아서 죄인인지를 아는 마음으로 오셔주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에 그처럼 행복한 순간이 없습니다. 그게 한 2,5초 4초 밖에 안 됩니다만 잠시 잠간 언뜻 나는 죄인이야! 하는 그 짧은 순간에 세상의 천하에 없는 행복이 다 들어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는 잘났거든 하면 그 순간에 그동안 있었던 행복과 평안과 기쁨도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자기 의는 찌그려 져야 합니다. 뭉개져야 합니다. 아예 없습니다.

 

예수 믿은 자가 행하는 행동은 의로운 것이냐 아니냐? 예수 믿기 전에 한 것은 모두 죄라고 하여도 믿고 나서의 행동은 의냐 아니야? 예수 믿는 상태에서 설교하고 예수 믿는 상태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의냐 의가 아니냐? 하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제가 글로 한번 써보면 성립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깊은 논리가 아닌데 이 짧은 논리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 다른 말로 예수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의입니까 의 아닌 즉 죄입니까?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성령 안에 있지요? 성령은 의지요! 그러니 이 말을 고치면 의로운 기도가 의롭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의로운 기도가 의로운 것은 당연하지 말하여 무엇 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사실은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핑계이고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하여 성령 받은 내가 기도하는데 성령 받은 내가 의롭습니까? 아닙니까? 하는 이런 질문인 것입니다. 성령 안에 있다면서 네가 왜 의로워야 하는가? 아니 성령 안에 있는데? 성령 안에 있다면 너는 죽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죽고,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의 사건을 되풀이 하는 것을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마지막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까지 일괄적으로 먹칠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박복남, 김철수 등의 이름이 있다면 매직으로 여러 가지 이름을 다 검게 한 것입니다. 어? 왜 내 이름을 검게 칠하느냐고 하면 너는 태어나기 전부터 원래 시커맸어! 그래서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죽은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 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죽은 어떤 자에게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의란 화목제물에 의하여 의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의는 무엇만 증거 하는가 하면,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다고, 그리스도의 의만 있다고 하는 것이 의의 증인입니다.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의의 증인이란 무엇이냐 하면, 나쁜 짓 하던 인간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오고 나서 착해 보이는 행동을 보일 때 그 사람을 의의 종이라고 그렇게 판단을 하겠지요! 우리나라에 이단으로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여럿 있는데 아까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무엇을 주는 것입니다. 축복 성회라고 하는 것을 나누어줍니다. 저는 안 받았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보고 버린 것을 보았는데 연세중앙교회 윤석전에 대한 광고였습니다. 그것은 노골적인 이단이잖아요! 조용기 노골적인 이단이잖아요!

 

이런 노골적인 이단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주장들을 보면, 주로 이북의 탈북한 사람들, 세상의 깡패도 그냥 깡패가 아니라 깡패 두목 그런 사람들이 놀아도 크게 노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가도 큰 교회로 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간증 일군으로 세워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포섭합니다. 그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지요! 목사부터 모든 교인들이 성경을 잘 모르지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목회 성공하려면 성경 접어놓고 간증거리 한 50개만 외워놓고 그것을 믹스해서 적당하게 알아서 하면 누구나 알아듣고 누구나 쉽다고 하고 누구나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전부다 복 받고 병 고침 받고 사업 잘되기 위하여, 아까 몇 가지요? 10가지 시름시름 앓는다, 아이 공부를 못한다, 부부 금실이 좋지 못하다, 사업이 잘 안된다, 이런 문제에 먼저 효과 본 사람을 앞장세워서 간증하게 하면, 성경 안 봐도 복 받고 기도하면 다 될 일을 교회걱정 할 필요 없고 거기다가 인색하면 복 못 받고 돈 바치면 복 받는다는 그런 간증거리 또 찾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 자들 줄서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나와서 간증을 하면, 아하 하나님이 인색한 자를 복주지 않는다는 것이 참 맞구나! 내가 너무 인색하게 바쳤구나! 이 교회도 해당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인색하게 바치면 저주받는구나! 하게 되면 돈은 돈대로 들어오지 교회는 교회대로 부흥하지 그러면 또 예배당 세우고 주차장 넓히고 큰 교회 지으면 큰 교회라는 인센티브 주어지지 이런 개척교회 누가 오겠습니까?

 

큰 교회 시설 좋지, 아주머니들 공짜로 꽃꽂이 배워주지, 애들을 공짜로 영어 배워주지, 수학도 봉사한다고 하면서 공짜로 과외 시켜주지, 또 치과 하는 집사님 병원에 가면 50만 원짜리 20만원 깎아 주지 모든 단골은 큰 교회 다 모이는 것입니다. 주보 뒤에 어느 내과 개업한다. 치과 개업한다고 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로 서로 이익보고 이 작은 교회에 치과의사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왜 우리로 하여금 의로워야 한다고 착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가 하면, 착해야 착한 것을 근거로 당연하게 하나님께 손을 내 밀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 착한일 한 만큼 왜 복을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착한 일 한만큼 내게 복을 주어야지 당신이 공의로운 하나님이, 착한 자에게 복을 저주 나쁜 자에게 저주하는 것이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착한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착한 바울사도 고생하고, 무슨 그런 정의가 있습니까? 다음 27일 날 부천 개혁교회 임직 식 할 때에 설교할 때에 스데반 집사 할 것인데 성령 충만하여 돌 맞아 죽고 무슨 일이 다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납득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윤리도덕 가지고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성경책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의 그 돌발적인 사태를 모르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돌입하여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때부터 내가 행복한 것이 나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이 행복하시면 그것을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을 꺼내 놓고 보아도 보통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나를 의롭게 만들어놓으시고 의롭게 만들어 놓으신 나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 분이 계시니까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받았어! 너 기쁘지? 안 기뻐요! 나는 기쁜데! 그러니 기뻐하라! 싫어요! 너 또 오른 쪽 갈 것을 왼쪽 가서 고생해볼래? 주여 맞습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합니다. 그게 한 3초갑니까? 한 3초지나면 또 엉뚱한 길로 가다가 얻어맞고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것을 꾸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고, 스데반 집사 빌립 집사 열두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게 성경이에요!

 

삼층 천에 올라간 사도바울은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다 땅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악마가 조작해 낸 것이기에 거기에 현혹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늘에서 온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화목제물, 그것이 사랑이라고 요한일서 4장에 나옵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예수님의 화목제물이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가 많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구원을 받았구나! 이렇게 오해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인하여 나는 그 증인으로 완전히 사로잡힌바 된 것입니다.

 

이제 내가 스스로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권리조차 박탈되었습니다. 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니까! 내 인생은 이제 내 것이 아닙니다. 몽땅 주님의 의가 차지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주의 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주의 의가 넘쳐나는 그런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 인생 따로 없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의 이야기이고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를 지배하고 추방하고 통치하는 것이 성경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우리가 하루 종일 간직하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기에 대한 답변을 정말 그렇고 싶습니까? 이것을 답변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주님의 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마음은 주님께서 주신 성령의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그런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고 진짜 하나님의 종이기에 가끔가다가 정말 예수님만으로 기뻐하는 그런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문득문득 듭니다. 그러므로 욕심내지 마세요. 그것이 24시간 다 차지하도록 욕심내지 마세요!

 

24시간 다 차지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주님 뜻대로 이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자신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내 놔! 나 이렇게 착한데 복 내 놔!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본심으로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경은 아직도 버릴 책이 아닙니다. 평생 동행해야 합니다. 평생 동행하면서 이 성경에서 나오는 잔소리와 질책을 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주시는 잔소리와 질책으로 받아주시면 여러분들은 성도 그 자체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십자가 지시고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우리를 점령해서 이미 우리 몸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주님의 의의 몸이 되어 버렸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의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의에 근거해서 남에게 안 지려고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잘난 맛에 살고 싶어 하는 옛 품성이 또한 남아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질책하여 주시고 십자가 지신 그 아픔과 고난과 그 고마움을 잊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산목양교회 정낙원 목사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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