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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직신학 9강 (믿음)

아빠와 함께 2013. 1. 12. 13:22

9강. 조직신학

 

구원론 중 믿음 1-1

 

05. 9. 12 강의 이근호목사

 

오늘은 구원론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조직신학의 고속도로라는 교재의 믿음에 대한 초반에 보면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 외에 일체 다른 것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만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문장이 상당히 난해하게 들립니다. 믿음이란 것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나오는데 그 첫 계명에 참된 믿음에 대한 정의가 나와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입니다.

 

이것을 신약에 와서 그대로 적용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행동자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신뢰성속에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냥 믿는다고 되어 버리면 일상 상거래에서 믿는다는 것 하고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것,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이 진실로 얻고자 하는 그 믿음하고 섞여서 구분이 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사회 속에서 신뢰를 가지고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관계 예를 들어 가족간의 신뢰, 친구간의 의리에서 통용되는 믿음과 성경에서 나오는 구원될 수 있는 믿음과는 무언가 확실하게 달라야 하겠지요!

 

그 다르다는 말을,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르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해보자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반대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되고 진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안일한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인간의 사회에서나 인간의 개인적인 자질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의 믿음이라는 형식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세상의 것과 다른 독특한 내용을 가지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실 때에 그냥 믿음이 아니라 이것이 믿음이라고 어떤 내용을 주실 텐데 그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십계명 일 계명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그런 형식을 가지고 신약까지 이어질 때에 신약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긴긴 설명을 하였습니다만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믿는 것 외에 일체 믿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 이외에는 일체의 다른 것을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그런 마음가짐 하에서 유독 예수님의 말씀만 청종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습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제가 이렇게 약간 난해하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면 마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세상의 기존의 것도 믿고 거기에다 추가해서 예수도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으면서 그 끌어 모으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해서 다 집어넣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예수님을 믿지만 나는 아버지도 믿고 목사님도 믿고 세상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내용과는 그 믿음이 부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부합되는 그런 믿음이어야 하나님이 수긍하는 믿음인데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는 양다리 다 걸쳐서 믿게 되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수만 믿기를 원하는 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 내용이 포함되어있는 믿음이어야 참된 믿음이라고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에 인간적인 능력으로 믿는다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함을 여러분이 짐작하시겠습니까?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고 사람들은 좋은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대단히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 중에서 예수님 빼고서는 다 좋지 않다고 간주하고 예수님 앞에서 다 치워버리고 예수님만 붙든다면, 이것은 기존의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나온 믿음의 자질 자체를 부정합니다. 하는 선언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러니 세상에서 종교적인 바탕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신뢰성의 믿음하고는 너무너무 차원이 다른 흉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배태할 수 없다. 생산될 수 없고 나올 수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제 알아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님 외에는 절대로 다른 것을 믿지 말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이유와 내력에 대하여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중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가와 믿음을 꼭 결부시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이 누구 중심이냐는 것은 실제문제며 현실문제며 무엇이 진리냐 와 연관된 문제입니다. 무엇이 진리냐? 참된 현실이냐? 이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와 믿음의 문제를 연관시키는 이유는 사람이 주님을 믿든지 하나님을 믿든지 믿습니다고 하는 것은 항상 아쉬울 때 무조건 의지하고자 하는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무식하게 막 들이대면서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잘 들어보세요. 내가 스스로 믿는 주체자인 나, 내가 믿습니다하니 나라는 주체자가 믿는 것이기에 나라는 인간이 세상 살기에 힘겹다든지 괴롭다든지 외롭다든지 불편하다든지 고생스럽다는 것 때문에 이 고생과 슬픔과 아픔을 면제 받기 위하여 나보다 뛰어난 어떤 전능자에게 의존하는 형태로 믿습니다.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를 여러분이 눈치 채셔야 하는데, 바로 내가 고통스럽고 내가 외롭고 내가 못살겠고 내가 힘들어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것을 그대로 견지하고 유지하면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들러리용으로 도입하여 이용하는 그런 입장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이 그런 것입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은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예수님 중심이 성경이고 또 그 성경에서 믿으라.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면 여러분이 생각이 있다면 그 두 개를 한번 연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기 전에 여러분의 마음속으로 혼자서 한번 연결시켜보세요!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기를 믿으라고 할 때에 그 믿으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아쉬워서 믿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할 때에, 그 앞서서 예수님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때에 이 두개를 결합시켜서 믿어야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면, 지금까지는 내 중심으로 살아왔는데 지금부터는 내 중심이기를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내 좋아라고 세상을 살고, 내가 원하는 미래와 세상의 변화를 이제는 나는 싫어합니다. 거부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진실로 세상의 중심이지 예수님을 믿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우기기를 싫어합니다. 그렇게 우기고 싶지 않습니다하는 마음으로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님이 계신다고 합시다. 그런데 개척교회가 뜻대로 안 되었습니다. 그때는 본인이 생각하기를 내가 믿음이 없어서 개척교회가 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기도하기를 주여 제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주셔서 개척교회가 잘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다면 그 믿음이 과연 옳은 믿음입니까?

 

그 목사님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것을 일단 자기중심으로 터 잡아놓고, 자기중심에 대하여는 손대지 말고 이것은 하나님이라도 예수님이라고 내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에 대하여는 건드리지 말고 다만 내가 간절하게 비노니 내 간절함을 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를 따라오기를 바라는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을 여러분이 원하십니까?

 

되고 싶지 않지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아시지요? 아시면서 왜, 개척교회 목사 이야기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본인들은 일상생활하시면서 믿음 믿음 하면서 성경대로 믿음생활하지 않고 믿음 믿음 하면서 왜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포기할 줄 모릅니까?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을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성경대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웃고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맞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실제로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예수님 때문에 울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보다도, 내 뜻과 포부가 잘 되면 저절로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고,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되고 내 중심으로 안 될 때는 우리는 우울해지고 싶고 좌절해 지고 싶고 죽고 싶고 자살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은 주님 제가 믿음으로 하였는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됩니까? 이렇게 항의성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길게 한 이유는 지금 서론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믿음이 무어냐는 이런 강의를 듣고, 아무리 성경적인 믿음의 정답을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기본 감정은 여전히 우리 중심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내 중심으로 살면서 거기다가 기어이 진리 복음 하면서 성경적으로 예수님 중심의 진리를 얻고자, 내 중심은 엉터리인 것을 강의 들어보니 아시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중심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 감정상 우리 기본적인 느낌은 내 중심인데, 거기다가 왜 기어이 예수님 중심의 믿음을 갖고자 요구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이것을 신비라고 보고 싶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아주 놀라운 현상이고 놀라운 변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중심이면 끝까지 죽을 때까지 자기중심으로 삽니다. 그런데 성도는 희한하게도 물론 태반이 자기중심입니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대부분 자기중심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이것이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이지! 이것은 분명 틀린 이야기이지! 라고 그것이 짐작이 되고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 소원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는 이것이 잘 못 된 거이지 하는 자각이 본인스스로 느껴지고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제가 이번 서울 강의에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가 들어있습니다. 흔히 신앙생활 믿음생활 잘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믿음생활 신앙생활 잘하라고 하니 그것을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식으로 자꾸 왜곡되게 오해하는 경향이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죄라고 지적하니 그것을 윤리적 도덕적인 개념의 죄라고 시작을 해서 자기가 스스로 윤리적 도덕적 개념을 자기 입장에서 수정하려는 기준을 너무나 일방적으로 성경과 관계없이 자기가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내어서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죄라는 개념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우리 인간 자체가 예수님처럼 완전해야 한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말하기를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일체 믿지 않는다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땅인지 바다인지도 모르고 주님만 바라보고 배에서 뛰어내렸는데 바다를 땅처럼 베드로도 걸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바다인줄 알고 자신의 본연의 위치로 돌아왔을 때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믿음은 일단 우리 속에서는, 세상의 아담의 품성에서는 이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껏 만들어내는 것은 세상에서 예수님 하나님 핑계를 된다고 해도 나 중심, 형제자매도 아니고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정상적이라고 인간들은 믿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든 안 믿든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차이점이 무어냐 하면? 너는 너 중심, 나는 나 중심, 그렇게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보편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기가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닌데도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고 이것은 비 복음적이고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성도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란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다른 것을 믿지 말라는 것이 말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믿지만 나를 믿고 형제도 믿고 어려울 때는 돈 많은 친척을 믿고 이것이 제 마음대로입니다. 교인이 오면 교인을 믿고 교인 중에 돈 많은 분을 믿고 돈 없는 사람은 안 믿고 이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입니다. 이것은 숨길 수가 없이 타고난 것입니다.

 

그런데 타고난 것이 아닌데도 성령을 통하여 하늘에서 온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하면 바로 인간적인 본성에서 나온 전체가 절대로 구원받을 믿음은 아니올시다! 하는 것을 그 사람만은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이며 놀라운 것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역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강의하는 것은 이런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하루 24시간 주에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면서 묻는 차원에서 이런 믿음에 대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해서 강의하면서 내가 어떻게 믿을 것이냐가 아니라 내 속에 어떤 잊어진 것, 정말 예상치도 못한 진짜 예수님이 가질 만한 그런 믿음이 이미 내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첫 강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 분간 쉽시다.

 

 

 

구원론 중 믿음 1-2

 

05. 9. 12 강의 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성도 안에는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내가 나를 믿는 것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전적으로 죄인 만들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두개의 나를 설정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분열된 자아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율법에서는 율법이라고 하면 어려우니 그냥 법, 법칙이라고 합시다. 빨간불이면 서시오! 파란 불이면 가시오! 하는 것처럼 법칙이 주어지면 행동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법칙이 아니고 어떤 행동하는 아저씨,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저분의 행위, 예수님의 행위를 내가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 행위를 거부하고 내 행위를 계속 밀어붙이느냐하는 결정이 남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어떤 법칙에 대하여 우리가 행동을 보이는 것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의가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따져보려고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법을 하나님의 법인 율법이죠! 법을 행위로 나타낼 때 사람은 그냥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법을 제대로 지켰다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까짓 거 뭐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법이 오면, 그래 그 법 지키고야 말리라! 완수하고야 말리라!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모든 인간은 행동에 나서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얼 알아야 하는가 하면 도대체 인간들이 자기의 몸을 가지고 신체를 가지고 육체를 가지고 어떤 수준이 될 때에 그들은 무어라고 착각하는가 하면 이 정도 했으면 이 법을 지켰다고 하는 그 수준, 최고 수준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법을 행동으로 옮겨서 최고의 수준으로 지켰다는 그런 의도나 그런 수준을 알아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무어냐 하면 예수님의 행위를 믿습니다할 때에 예수님의 행위 즉 예수님이죠! 나는 내 행동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믿습니다할 때에 이 믿습니다. 이 믿음-오늘 믿음에 대한 강의이니까! 이 믿는다는 이것을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니 그것을 하나의 법으로 취급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 어렵지요! 법을 지키시오! 라고 어떤 명령을 하면 예 제가 지키겠나이다. 하면서 순종하는 것이 법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런 바탕이 있기에 예수님을 믿으세요! 받아들이고 영접하세요! 라고 하니 그것도 나의 신체에서 나오는 행위의 일부로서 언제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니고 이것은 결국 나의 행위의 일부에 가입되고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강사가 기침이 나옴, 요즈음 알레르기가 있어서 힘이 듭니다. 약을 먹고 왔는데도 이러하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주는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나를 믿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게 되면 아까 보았지요! 우리 속에 무엇이 있다고? 결국 나가 나를 믿는 불신자의 반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두 번째 시간에는 무얼 하는가 하면 1의 경우와 2의 경우를 전부다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마지막 시간에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성경에서 나오는 믿음은 따로 있구나! 하는 눈이 생길 것입니다.

 

1번입니다. 어떤 법이 주어졌으면 인간은 그 법을 나는 최고의 수준으로 다 지켰다하는 목표를 가지고 그 법을 지키려고 달려들게 됩니다. 그러면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숙제를 냅니다. 수학문제 5페이지의 연습문제를 풀어오세요! 교과서의 연습문제가 다섯 문제라면 그것만 풀면 숙제 끝난 것입니다. 숙제 끝.

 

출장 갔다 온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내가 벗어 놓은 빨래 다 해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법입니다. 빨래를 해 달라는 법으로 나왔습니다. 법이란 것은 상대방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서 법을 주기 때문에 그 법을 받고서 부인이 남편의 빨래를 낮에 다 합니다. 빨래를 다하고서는 빨래 끝!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남편이 여보 빨래 해놓았어? 빨래 다 했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그 빨래 다 한 것에 대해서는 그 아내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의인이 되는가 하면 남편이 요구한 것과 아내가 한 것이 딱 맞아 떨어지기에 남편이 아내에게 시비 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빨래 다 했느냐는 그 뉘앙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옷에 껌이 묻은 것, 주머니에 손수건이 들은 것, 실밥이 터진 것을 꿰매어 놓는 것 등을 빨래 끝으로 생각했는데 아내는 스스로 본인이 생각하기를 빨래 끝은 빨래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빨래 다 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보기에 아니 이것은 제대로 기워놓지 않았네! 단추가 떨어져 있는 그대로네! 지퍼 고장 난 이것을 세탁소 가서 왜 고쳐놓지 않았느냐?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은 빨래만 하라고 했지 언제 그런 것까지 하라고 했느냐?

 

어허~ 내가 빨래를 하라고 한 것은 샅샅이 살펴서 그 다음날 내가 입을 수 있도록 해 놓아야 빨래한 것이지 어떻게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빨래만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는 빨래는 왜 생각하지 않는가? 하면서 둘이 싸워서 일주일 만에 이혼하고, 그것으로 이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소위 성경해석학의 문제가 어떤 문제인가 하면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 에는 관심이 없고, 일반 교인들이 일반 시민들이 무엇을 지킬 수 있는가에만 맞추어서 목사들이 법을 제시하는데 분주한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는 그 말씀 가운데 어떤 내용들이 층층이 중첩되어있는 전체를 이야기 하였는데 듣는 사람은 골라서 자기가 스스로 의인으로 등장할 만한 요소만 골라서 듣는 것입니다.

 

남편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는 아내에게 밥상 좀 차려라고 합니다. 아내는 얼마나 정직한지 밥상을 차렸습니다. 상위에다 밥만 놓아 밥상을 차린 것입니다. 남편이 이게 밥상이냐? 밥에다 상이나 끝난 것이지 무엇인가? 밥만 있어야 되는가? 물도 있어야지! 그러면 밥상이라고 하지 말고 밥물상이라고 해야지! 그러면 잡채는? 그러면 밥 잡채 물 상하든지! 그냥 밥상 차리라고 하면 다 포함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포함 안 된다. 처녀 때 그렇게 안 배웠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남기신 다든지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을 남기실 때는 그 마지막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다 깔려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어떤 관점에서 법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그것이 곧 정의며 사랑이며 의로움이며 거룩함으로 본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여력, 내가 할 수 있는 여력이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인간, 예를 들면 테레사 수녀쯤 되겠지요!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다 바쳤으니까! 그래서 자선하라고 하면 테레사 수녀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테레사 수녀도 인간입니다-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도 그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나님답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더 나가 볼까요? 내가 몸이 아프면 이 몸을 낫게 해주어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 앞에 사랑을 붙여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몸이 아픈데, 이빨이 아픈데 기도해도 안 들어주면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에서 누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고 있고 꿈꾸고 있는 하나님의 상에 부합될 경우에만 비로소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벌주는 하나님이라면 불합리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내가 지옥을 봤습니까? 천국을 보았습니까? 지옥도 천국도 보지 않았는데 지옥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천국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지옥에 보낸다면 이것은 나에게 문제도 안 내고 틀렸다고 그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것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가룟 유다의 문제가 무어며 시비 거는 것이 무어냐 하면, 자기가 받아 본적도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탈락시키셨기 때문이라고 해서 할말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가 받아 본적도 없는 것을 주님께서는 뺏어 버린 것입니다. 성령도 믿음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믿음 없다고 추궁당한 것이 가룟 유다입니다.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하나님입니까? 믿음 줘놓고 안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해가 되는데, 성령을 받지도 않았는데, 받은 것은 있지요? 악령을 받았지요! 악령만 받았는데 성령을 안 내어놓는다고 탈락을 시킨다면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미 범죄 하여 주님의 생명나무에서 떨어진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인간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모든 말씀가운데서 생명나무적인 요소를, 그런 완벽한 사랑과 완벽한 거룩과 의를 요구하는데 지금 인간은 우리 조상 아담이 범죄 하여 기껏 생각하는 것이 나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나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그런 말씀을 지키라고 들이대는 하나님이 오히려 불합리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이에르 바흐라는 사람이 기독교의 본질에서 기독교란 것은 인간이 자기를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하늘에 태양이 둘이 아니고 하나 이듯이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분 여호와 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있었던 사고방식이 무어냐 하면, 옛날 구약의 유대인들이 왜 로마인들에게 압제당하고 고생하였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에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다시 한 번 왕 같은 제사장의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보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방해물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니 예수 믿는 도당들입니다. 예수라는 나사렛 이단을 믿는 이단집단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유대 나라가 구약의 말씀처럼 다시 축복받는 나라가 될 텐데 자기 나라의 한복판에 나사렛 예수라는 이단이 설치고 있으니 그것을 방치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위해서라도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이단들을 처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이 죽였어요! 그냥 잡아만 내는 것이 아니고 많이 죽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인자요 포행자라고 디모데전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우연히 차사고가 나서 사람을 죽이게 되더라도 평생에 한이 맺혀서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사울은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리고 가장을 죽이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라고? 가장 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청춘과 그들의 꿈들을 다 날려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나쁜 짓을 했던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그들의 입장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엄숙한 사명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을 옹호할 수 없었다는 그 점을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였다? 여기에 문제점이 있습니까? 아니지요! 사람들을 가두었다? 그것이 문제점이 아니지요! 무엇이 문제점입니까?

 

여호와의 말씀의 배경에 무엇이 깔렸는가를 사울 그 사람의 능력으로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알아 챌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알아 챌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잘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때 사람들이 너희를 잡아 가두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그렇게들 이야기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고 십자가 지기 이전에 이미 예언을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떡 먹는 것도 아시고 오늘은 조용하네! 돌아다니는 것도 다 아십니다.

 

따라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들이 법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그 점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지금 쉽게 나가는데 조금 있다가 어렵게 나갈 텐데 그때에는 골치가 좀 아플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이 법이란 하나님의 말씀이죠! 이 말씀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사소통이 되려면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개념과 내가 갖고 있는 개념이 똑 같은 개념일 때에는 그 같은 개념을 공통점으로 해서 서로 의사소통이 됩니다. 무슨 말인지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이 납득이 되는 요건이 우리 속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옛날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내부에 하나님을 말씀을 백퍼센트 이해가 되는 요건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주셨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우리 속에 들어있는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놀랍게도 영라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서에서 나옵니다. 에스겔에 보면 마지막 때에 영이 오게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성령의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법이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는 그들은 믿었습니다.

 

성령이 어떻게 오게 되는지 에스겔에서 보게 되니 먼저 성전이 있어야 되고 그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사방에 모든 죽어있는 것을 살리는 식으로 성령이 온다고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초막절 날 무엇을 했는가 하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문지방에서 물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성령의 시대임을 그들은 스스로 선포하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고서 무어라고 하셨는가 하면 너나 잘하세요!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거기에서 성령이 나오지 성전에 물 뿌린다고 성령이 나옵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유대인들은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납득이 되는 방식으로 주어졌기에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 중요합니다. 말씀은 지킬 수 있다? 없다? 무조건 지킬 수 있는데 우리가 게을러서 지킬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 가운데서도 성령을 받으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 못하는가 하면 모르는가 하면 첫째 시간에 한 그림을 몰라요! 그림 속에 무엇이 있다고요? 나가 나를 섬기는 나가 있고, 내가 죄인 되어서 절대로 말씀을 못 지키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의 행위와 공로만 바라보는 그런 나가 있다고 하였지요!

 

그 두 가지 나가 다 들어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내가 나를 섬긴다는 생각은 없고 나는 온전히 24시간 예수님만 생각하고 예수님만 쳐다보는 그런 나만 있는 줄을 알고, 나는 거듭났기에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약간 어렵다고 했지요! 내가 미리 어렵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포기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기에 지키면 되는데 여기에 무슨 신비한 것이나 난해한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대로 그냥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는데 어떻게 지키는가? 이것이 이번 의존교회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인간 속에는 두개의 창고가 있습니다. 한 쪽 창고는 선을 모아놓은 창고가 있습니다. 한 쪽 창고는 악을 모아놓은 창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떤 법을 들이대면, 이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의 창고가 점점 쌓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도 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도 솔직한 사람들이기에 악도 있음을 다 압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반성도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법이 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인, 다른 말로 의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결국 무어냐 하면, 내 속에 있는 두개 창고 중에 어느 쪽이 많다? 선한 창고에 쌓인 것이 악한 창고의 것보다 많을 때 종합적인 평가를 하여 내신 성적을 내면 선이 많이 쌓이면 선한 것으로 의인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 속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의 뜻과 우리 속에 공통적인 요소가 있기에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말씀을 주었다고 아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 속에 무엇이 있다? 악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내다보고서 하지 말라고 한 것이고, 그 다음 하라고 한 것은 우리 속에 얼마든지 선을 축적할 공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하셨기에 여기서 하라는 것만 하면 선이 쌓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서 점점 악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서면 되겠지요! 간단한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데 그 차이가 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우선적으로 법을 알아야 무얼 하라고 하는지 무얼 하지마라고 하는지 법을 알아야 악을 죽이고 선을 늘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시편 119편에 보면 말씀은 내 발에 등이잖아요!

 

말씀을 많이 듣는 다는 것은 법을 머릿속에 많이 집어넣은 것이고, 많이 알면 하라는 것도 많이 알고 하지 말라는 것도 많이 압니다. 그러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하라는 선은 쌓이고 하지 말라는 악은 줄어들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법을 누가 많이 압니까? 법의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베끼는 자들이 서기관들이며, 법을 생활에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이며, 법을 가지고 성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법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법에 살고 법에 죽습니다. 법이 없으면 그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구원을 못 받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은 용서해도 무엇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까? 법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들만 구원을 받으려고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법을 말하는 그들이 스스로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하면 리더가 되어서 지도자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지도자 위치에 있으려면 법을 가지고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은 제일 밑에 보내버리고 법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중간계층으로 올려서 그 나라 전체가 하나의 율법에 의해서 정돈된 나라가 되기를 위해서 그렇게 정치한 것입니다.

 

그 한복판에 불쑥 나타난 사나이!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나를 믿으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죽은 자를 살린다. 나를 믿는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들 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간음한 여인이 왔을 때에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여인아 내가 너를 용서해 줄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법입니다. 예수님의 선포가 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그것이 땅에 떨어지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지구 끝날 때까지 예수님과 인간의 법 지키기의 감정은 이 우주가 끝날 때 까지 아마겟돈 최후의 전쟁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좀더 들어봅시다. 법이 하라고 했을 때는 하고, 하지 말라고 했을 때는 안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어떤 혼선이 빚어집니다. 법을 지킬만한 요소가 우리 속에 들어있다고 한다면 만약에 이런 법을 지킬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 사람이라면 이 율법을 모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에 대하여 존중심이 있을 때는 비록 못 지켰을지라도 미안합니다. 바빠서 못 지켰습니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법에 대해서 아는 자를 사회의 중간계층으로 올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법을 알더라도 평소에 바빠서 못 지킨 사람이 있습니다.

 

목회하는 목사님은 다 아십니다만, 어떤 교인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잘 듣다가 러시아에 출장을 갔습니다. 한 이주 빠졌습니다. 이주 빠지고 나면 목사들은 반드시 관찰합니다. 이주 빠지고 나서 저 집사님의 사고방식이 혹시 러시아 갔다 와서 엉뚱한데 관심이 빠지지 않았는지 관찰을 합니다.

 

러시아 가기 전에 매주 나올 때에는 항상 말씀이 입에 맴돌고, 말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 말씀이 목사님 어디에 있습니까? 하면서 말씀을 관심을 가지더니, 한 이주 빠지더니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제품이 어떻고 하면서 딴 이야기를 하더니 한달쯤 가니 아예 입에서 말씀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안나오는가 하면, 본인이 들은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끄집어내다가는 무식이 탄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언가 들은 것이 있어야 행동할 때에, 지난주의 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이 행동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측정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하도 말씀을 듣지 않다가 보니 뭐든지 해도 괜찮을 줄 알고 뭐든지 하다가 보니 그 다음에는 전혀 말씀과 상관없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목사님들은 어쨌든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니 어떻든 말씀을 들어야 언젠가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나 낙심이 될 때에 그때 말씀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여러분에게 효과를 줄 수 있으니 자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큐티를 하면서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성서 유니온에서 퍼트려서 그렇게 하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 당시에도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을뿐더러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지킬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말씀을 못 지킵니다. 그것을 지키면 수입이 다 날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보를 해 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성직자도 마찬가지고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악이 항상 있고 선도 있는데 인간의 양심에 악이 자꾸 피어오르는 것입니다. 악이 무언가 하면 하라는 것은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기꺼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당기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이상하게 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이것이 로마서 자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게 되는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자기 마음대로 만들기에 엉터리입니다. 엉터리이지만 예를 들어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을 가지고 자신은 하루에 석장을 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묵상하라는 것은 하루에 적어도 열장은 읽어야지 묵상이지 겨우 석장 읽고 그것이 묵상이냐고 합니다. 어떻든 그 사람은 하루에 석장 읽는 것을 묵상이라고 하였는데 바쁘다 보니 성경을 석장 읽지 못하고 두장을 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악을 저질렀지요! 묵상을 66%만 하고 33%는 하지 못하였기에 죄를 지었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하루 석장을 읽어야 하는데 전화 받느라고 바빠서 두장만 읽고 출근하느라고 한 장을 못 읽은 것입니다.

 

한 장을 못 읽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한 장을 더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못하였기에 그기에 대하여 선한 행동을 추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가적인 선한 행동을 떼어가지고 아침에 성경을 다 못 읽은 것에다가 채워 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늦게 왔잖아요! 그러면 헌금을 천원 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만하면 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도 있고 그것이 아니고 진짜로 우발적이지만 나쁜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남아있던 재고 선에서 뚝 떼어내어 입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것을 뚝 떼어서 악의 아가리에 채워 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틀어 막아놓으면 악이 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하게 되지만 그러나 선의 창고는 텅 비어 있겠지요! 그러면서 다음부터는 잘해야지! 이것을 가지고 반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것을 가지고 회개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의 율법지킴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더 이상 이런 반성이 필요치 않도록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선과 악, 악과 선 왔다 갔다 하면서 서로 서로 내 내부에서 밀어붙이며 서로 떼어주고 도망치며 죄책감 때문에 밤잠을 못자고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인 줄 몰랐다.

 

또는 내가 이렇게 착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왜 복은 안 주냐? 날마다 이렇게 선과 악의 경계를 쉬지 않고 넘나드는 이것 자체를 완전히 일소해버리고 왔다리 갔다리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에서 해방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 의인이죠! 이제 의인으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의인으로서 살라는 말은 너 신분이 의인 되었으니 의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더라도 너의 의인된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이 율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은 법이 있고 법에 어떤 요소가 있는데 하나님의 요소가 있고 우리의 요소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은 하면 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법을 잘 못 이해하고 있고 곡해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범죄 한 인간이 생각하는 법이라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선을 얼마나 격려하고 내 속에 있는 악을 얼마나 죽이느냐 하는 것과 법이 연관되었다고 보는데, 그런 것이 법이 아니라 법의 진정한 뜻은 처음부터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치기 위하여 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이 있다는 그 자체를 죄로 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처럼 완전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에서 태어나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이래도 죄인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이래도 네가 의인이야? 너 죄인 맞잖아! 하면서 추궁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밀어붙이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것을 입을 막는다고 합니다. 로마서 3:19절에서 율법이 온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죄 아래 가두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알았던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도저히 몰랐습니다. 법속에는 우리가 지킬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여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인-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 너희가 말하는 그런 식의 의라면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이라면 누구든지 오른 눈이 범죄 하면 그 눈을 빼버리라고 합니다. 다 빼야합니다. 저부터 다 빼야 합니다. 누가 오른 손이 범죄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라고 합니다. 잘라볼까요? 왼손만 가진 장애인이 되면 범죄 하지 않습니까? 다 잘라야 합니다.

 

무엇을 지키겠다고 맹세하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할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합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자기 눈에 티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들보인지 아닌지 자기가 판단을 못합니다. 너도 너 자신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판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놀랍고 무서운 이야기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을 이방인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절정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 힘으로 네가 살아간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살고 죽고 구원받아야지 하는 것은 너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구원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 바든 것도 아니고 구원 안 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새를 보라 들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들풀의 나타남과 사라짐이 주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다면 염려 같은 것은 아예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나라에 기초하여 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무언가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천국에서 무언가 오는 것이 있기에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천국에서 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나라와 의입니다. 무언가 그 나라에서 오는 힘에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 오는 것이 없다면 내 쪽에서 덩치 큰 나를 그 쪽으로 떠밀려고 하니까 결국 나타난 것이 법대로 한 것이 결국 자기 임의로 자기 가능성 안에서 윤리적 도덕적 법을 지킨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은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을 무엇이냐? 이제 두 번째 끝에 무엇이 법이냐? 아까 법의 기능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법의 기능이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아래 둔다고 하였지요! 그러면 법이 무어냐? 율법이 무어냐 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법 제정자가 이 땅에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법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도 만들고 선인도 만들고 악인도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법을 만드셨습니다.

 

그 법을 만들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 됨을 천명하시고 오직 구원 될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나간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 천국에 갈 사람이지,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법에 묶여 있는 이런 신체를 가지고는 법을 지켜서 천국에 갈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심판 주 입장에서 말하는데 너는 지금 속고 있다.

 

지금 심판주가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하여 구원될 자는 한 명도 없어! 내가 심사위원이고 내가 마지막 최종 심판자인데 내가 분명히 이야기 한다 법 지켜서 구원될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 명도 없다. 아예 기대도 하지 말라고 예수님이 천명하려고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떠밀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 당신이 불합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였습니다. 그러니 법 지킬 수 있는 그런 여력으로 따지자는 것입니다. 당신에 대하여 애정도 없고 사랑도 없는데 사랑 없다고 일방적으로 지옥 보낸다면 이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척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을 법으로 만들어서 내 힘으로 예수 믿는 것 그것만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그런 것은 환경 바뀌면 예수 포기하고 다시 나로 돌아설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는 나는 잘났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내 창고에는 선한 것을 많이 쌓아놓았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 정당함을 이야기 할 사람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든 명예와 명성이 다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적이 왔다면 모든 것이 사라져도 괜찮습니다.

 

제가 어제 아침에 그런 설교를 하였습니다. 성도의 살아가는 힘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에서 손짓하는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빨리 오너라! 십자가 속으로, 십자가에서 나오는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어가는 힘에 실려서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하다가 결국은 죽는 그런 힘뿐입니다.

 

죽음에서 손짓하는 힘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죽음이란 것을 우리가 끝에 가봐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미 죽었던 사람에게서 뿜어 나오는 힘에 의하여 죽음으로 끌려가면서 산자라는 명칭을 얻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무엇이 있는가 하면,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 죽음마저 이긴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나온 힘은 죽음마저 이겨낸 죽음마저 극복한 부활의 힘이고 생명의 힘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죽음에서 뿜어 나오는 생명의 힘에 이끌려서 우리는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고 갈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안 죽은 자의 대비입니다. 이미 죽은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아직 안 죽어서 죽음이 무서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아직 안 죽은 사람에게 이미 죽었고 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생명으로 부활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아등바등 네 힘으로 살지 말고 나를 믿으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힘이 그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 믿었던 경험이 있거든 여러분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주님께서 예수 믿게 하신 그것을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고 여러분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때마다 시마다 생명의 힘으로 여러분들을 예수님의 사랑을 알도록, 깨닫게 하는 식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고생길이기에 좁은 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잊지 못하는 길이기에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영생의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수시로 종종 가끔 생각나시거든 내가 바로 기적을 된통 으로 받은 사람, 벼락 맞은 사람처럼, 진짜 하늘에서 벼락을 맞아 구원된 사람이 바로 나구나 하면서 주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십분 쉽시다.

 

녹취 051126 이장우

 

 

 

구원론 중 믿음 1-3

 

 

05. 9. 12 강의 이근호목사

 

 

세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을 때, 왜 육체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지 육체를 가진 우리는 모릅니다.

 

 

내 육체가 어떤데? 내 몸이 어떤데? 내 속이 어떤데? 아까 말한 대로 양심도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욕망도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도 충만하고, 순종하고 싶어 하는 그런 순수한 마음도 있고, 지고지순한 사랑도 있는데 왜 육체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느냐? 건방지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육체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우리와 똑 같은 육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실 우리 몸이 저주 받을 몸인 것을 오직 십자가로 통해서만 보여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것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저주 받을 대상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저주 받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저주 받는 다는 말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가졌기에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하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데 왜 우리보고 법을 못 지키고 너는 죄 밖에 못 짓는다고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독선적으로 밀어붙이느냐?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데, 테레사 수녀를 보아라! 누구누구를 한번 보아라! 그렇게 훌륭한데 그것도 죄냐?

 

 

세상에 그처럼 훌륭하면 천사지! 자꾸 이렇게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어디서 그것이 거짓말이 되었는가 하면 오직 십자가에서만 그것이 다 부질없는 자신의 꿈에 지나지 않았음을 허구임을 십자가에서 깨어지면서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5장에도 그럼 말씀이 나오는데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이 인식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른 데로는 안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언제 주님께 불평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 생각 안할 때는 꼭 주님께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생활하는 것에 불행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원망을 합니다.

 

 

주여! 왜 제 뜻대로 안 됩니까? 이번 일을 위하여제가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왜 간절한 기도를 무시하십니까? 이래가지고 제가 기도할 마음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이근호 목사 강의 듣고 나면 나중에 기도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엉터리 기도하였다는 증거입니다.

 

 

평소에 얼마나 엉터리 기도를 하였으면 예수님을 뜻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평소의 기도는 나에서 나로 되는 나 중심이고 나를 위한 예수님이라는 그런 정신으로 평소에 기도해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면, 미쳤나 내가 남의 일을 위하여 기도하게? 이런 식이 됩니다.

 

 

예수님이 남입니까? 예수님의 뜻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함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외우는 주 기도문에 보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다 해놓고 주여 왜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족한 줄을 아셔야지 왜 거기에 비집고 들어가서 내 뜻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 뜻이지 하늘의 뜻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면 죽은 채로 있어야지, 저쪽에는 이근호라는 인간을 쿵쿵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데 나는 지금 살아서 저 사람이 누군데요 하고 있으면 십자가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그냥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못을 박아 놓았습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쿵쿵 못을 박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런 십자가는 우리를 나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낙담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란 것은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비로소 적나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는 거울인 것입니다.

 

 

자크 라캉이라는 사람이 거울이라는 말을 가지고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여기서 거울이란 인간이 자기 통일성을 추구한다고 봅니다. 거울을 보면서 나 일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거울 없이 여러분 자신을 보시면 전체를 다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러분의 눈을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앞에 앉은 예쁘고 눈 큰 아이 분홍색 옷 입은 학생, 다 예쁩니다만 지금 자기가 자기 눈을 볼 수 있습니까? 없지요! 다른 것은 다 보이는데 보고 있는 내 눈은 아무것도 안 보이지요! 어디가면 보이죠? 거울 앞에 가면 아 내 눈이 이렇게 크고 예쁘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내 눈이 크다고 하면 어떻게 아는가 할 때 거울을 보니 안다고 합니다.

 

 

성경 전체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라는 거울로 우리를 비추게 합니다. 비추어보면 좌절케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실망케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내 진짜 모습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제대로 알게 해주는 좋은 거울입니다.

 

 

그래서 거울 이야기가 야고보서에서 나오지만 우리가 날마다 거울을 보듯이 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말씀을 안 보면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는가 하면, 거울을 안 보게 되지요! 거울을 안 보게 되면, 아까 거울 이야기처럼 손과 발은 보이지만 눈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가진 돈과 권세와 명예와 자기에 관한 인기도 지명도 이런 것은 부지런히 챙기면서, 돈과 명예를 챙기는 그 진짜 나는 저주 받을 인간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그런 대상임을 본인은 모르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고민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해보세요! 고민이 싹 가실 것입니다. 십자가 생각이 안 나시다고요! 찬송가에 있지요!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내가 생각할 때에 그런 것도 있고 또 찬송가 5백 몇 장에 보면 낙심하게 될 때에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 그런 내용도 있지요! 찬송가의 가사 같은 것을 통하여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세상이 있던 헛된 것들은 다 부질 없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야 될 분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 나로 인하여 구원받을 너희들이 사실은 저주 받아야 할 자리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네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잘나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저주 받아야 할 입장에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슨 기능을 하느냐? 율법은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예수님 여기에 있고 율법이 여기에 있고 우리 인간들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불신자들이죠! 하나님의 법이 성경에 있으니 그 법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그것을 지켜서 예수님을 기쁘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그런 것이 아니고 율법이 예수님에게로 갑니다. 왜 율법이 예수님에게로 가는가 하면, 율법이 예수님이 갖고 계신 죄 있는 모양과 만날 때, 우리 같은 죄 있는 모양과 율법이 만날 때 최종적으로 어떤 결말로 끝나는 가를 예수님이 미리 보여 주셨기에 율법이 일단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죽게 합니다. 그 율법이 예수님을 그쳐서 나오게 되면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 우리를 상실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기뻐하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생각하기를 내가 율법을 이루어서 예수님께 나아가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순서는 불신적이며 비 복음적입니다.

 

 

율법은 먼저 예수님께서 가서 죄 있는 신체, 아까 죄 있는 신체라는 말이 기억납니까? 어떤 육체라고 율법의 의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그 육체, 우리 죄 있는 육체가 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가를 미리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죄 있는 육체로 가서 율법과 만남으로 결국은 예수님의 죄 있는 육체는 율법에 의하여 저주 받습니다. 법은 거룩하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부터 나오는 율법이라는 것은 이제는 우리에게 복음적 기능을 가지고 성도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것이 좀 어렵지요! 이제는 율법이 율법이아니라 율법이 없고 레위기든 신명기든 우리에게 복음화 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되었다는 것과 율법이 복음화 되었다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하면, 그냥 법은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우리 속의 가능성을 보고 내 뱉는 이야기라면, 복음화 된 율법의 기능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뒤에 깔려있습니다.

 

 

카스텔라 빵을 보면 뒤에 얇은 종이가 있지요! 그 종이를 벗기고 빵을 먹지요! 그런데 그 종이에 붙어 있는 빵까지 뜯어먹어야 복을 받아요(출산드라)ᄒᄒᄒ.

 

 

복음화 된 율법이란 그 뒤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뒷받침된 채 우리에게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종이를 떼어버리면 율법이 됩니다. 종이를 떼어버리면 그래 내가 이제는 돈을 사랑 안해야지! 돈을 사랑 안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어버리면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첫째 시간에 녹음 안 되었을까 걱정이 되는데 그 핑계되고 다시 한번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그린 그림이, 흔히 말하기를 나는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있을 때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것이라고 한 것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생각이고 그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무엇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우리 속에 죄인인 내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있고 또 무엇이 평생 동안 있다고 하였습니까? 나는 때려 죽어도 나만 고집하면서 예수고 뭐고 나만 있으면 최고라고 하는 이것도 같이 들어있지요! 이 둘이 들어있는 것이 성도의 내부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은 잠시 생각하다고 바쁘면 다시 어디로 돌아갑니까? 예수고 뭐고 은혜고 뭐고 살고 보자는 식으로 돈이 최고야! 내 자식 최고야! 남의 자식이 무엇이 중요하냐! 자기 집안에 최고야!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에 의해서 또 주여 내가 죄인 맞습니다.

 

 

이런 기능,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디모데 전서에 나오는데 이 말씀을 누가 썼습니까? 말씀은 성령이 주체이지요! 성령께서 그 말씀을 주신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더 복음화 되게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 몸의 차원에서 책망하여 주님의 공로와 그 용서가 늘 튀어나오도록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방향으로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지 예수님을 제쳐두고 우리가 착한 일 해서 영광 돌리는 법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영광이 됩니다. 빌립보서 2:11절과 베드로전서 4장에 보면 나옵니다. 어떤 말을 할 때에 하나님이 주신 말을 하라 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왜 율법이 복음이 되느냐면 율법 뒤에 용서라는 복음이 붙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왔을 때에 우리에게 무엇을 겨냥하느냐 하면, 우리가 나 살기 위하여 돈만 사랑하는 것을 아시고 말씀으로, 이것이 복음이죠!

 

 

복음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등장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야~ 내가 죄인 맞구나! 나는 가끔씩 죄인 아닌 줄 알았는데 말씀 듣고 보니 죄인 맞구나! 나는 이 정도 하였으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고 내가 교회도 다니면서 돈 번다는데 양천구 이 동네에서 이렇게 돈도 잘 벌고 교회도 열심히 잘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바라고 내 같이 착한 사람이 나와 보라고 으스대다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는 그 말씀이 나오니 내가 남과 비교해 잘난 체 할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을 나의 명예 높이는 이용물로 사용하다가 이것이 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카스텔라 뒤에 무엇이 붙어 있다고 하였지요? 종이가 붙어 있지요! 그 종이를 떼어보니 비타 오백 따면 병뚜껑에 한 병 더 하고 있듯이,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용서 이미 창세전에 구원될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다는 그 피의 용서를 인하여 너는 죄인이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는 것은 주님의 공로로서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절에 보면 유명함 말씀이 나오지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입니까? 지금 눈앞에 빵만 보이는데,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게 만들더냐?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율법의 행함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공로를 믿음이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가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숱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인 사람입니다.

 

 

잡아 가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많이 죽였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유영철 비슷하게 간주할 만한 그런 사람이지만 그러나 이런 죄인중의 괴수라도 살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작정하시고 작정한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를 흘리셨고 그 피가 나에게 날아와서 사지를 적셔 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아 내가 의인 된 것이지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시간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주님께 가서 율법과 예수님이 만남으로 예수님은 저주 받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저주에서 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아야 할 그 저주에서 풀려난 용서의 영으로서 자비와 긍휼의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 곧 복음으로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볼 때마다 다시 한번 주님의 그 용서와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한 없이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이 성경공부 하다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데 이제는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이제는 복음 외에는 더 나올게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으로만 안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제부터는 현실 문제입니다.

 

 

바닷가에 가서 바다 보았다. 어디서 보았는데 지나 번에 울산 해변 가에 가서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보았어! 무얼 보았느냐?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을 보았어! 너는? 나는 헤엄 안쳤어! 다른 사람이 헤엄치는 것을 보고 자기는 바다에 들어가지고 않고서 바다 보았다고 집에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자기 죄가 주님한테 퐁당 빠져야 할 정도로 죄인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반쯤은 자신의 의에 기대를 걸고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반쯤은 살짝 주님의 십자가에 담가 발만 씻고 나오고 나머지기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데 그것을 성령께서 확 집어 당겨버립니다.

 

 

그럴 때에 나는 발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온 몸이 문제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아직 어린 애들을 그것을 모릅니다. 애들은 아직도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모른다는 말은 자기 죄의 깊이에 대하여 아직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린애 같은 데서 벗어나서 제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 가를 그기에 헤엄치기를,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 그 끝을 찾아도 찾아 볼 길이 없을 것입니다. 너무 넓어서,,,,,,,

 

 

강의를 조금 더 나가겠습니다. 방금 이야기 한 것은 사실 복음인데 복음이 뒤에 깔려있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깔려 있는 법을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새 계명을 다른 말로 바꾸는데 계명이 아니라 계명이 없는 표현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제가 이 세 번째 마지막은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사랑을 새 계명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새 계명은 계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이 아닌 것처럼 사랑은 계명이 아닙니다. 법으로서 따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법 때문에 그곳에서 결정이 됩니다. 법을 지키면 옳고 법을 안 지키면 나쁜 것인데, 사랑 안에는 옳고 그름이 이미 해소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가서 같습니다. 구약에 있는데 그 아가서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왕이 어떤 여인을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사랑하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야~ 못났지요! 그런데 그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입니다. 그런데 왕한테는 그 여인이 그렇게 사랑스럽습니다.

 

 

흑인 여인인데 흑인이라고 무시하는 것은 아닌데 흑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가서 마지막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찐하다고 합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어떤 특징인가 하면 피할 수 없는 것 필연적인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도 죽음을 막을 수 없듯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 죽음도 내 사랑을 가로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것이 어느 드라마의 대사에 나오지요! 사랑은 어떤 것도 말릴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드라마에 이런 것이 있지요! 엄마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네가 그 여자를 왜 좋아하느냐?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어머니 이것은 하나 알아주세요! 제가 이유 없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그때 엄마가 말하기를

 

나도 젊을 때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랑은 하나의 감정이었고 허풍이었고 순간적인 충동이었다. 너는 엄마의 심정을 좀 알아다오. 지금은 네가 완전한 사랑인줄 알지만 세월 지나가면 그것은 순간적인 충동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라! 이렇게 말하니 아들이 하는 말이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어머니의 자식이 있는데서 후회하십니까? 그러자 어머니가 너 정말 이렇게 나올래? 하는 것이 지금 mbc에서 하는 굳세어라 금순아! 입니까? 거기에서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하니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후회한다고 하면 자식도 아니고, 후회 안한다고 하면 어떻든 사랑 때문에 자식을 낳았다면 그것은 후회 없는 사랑인데 왜 엄마는 지금 나의 후회 없는 사랑을 왜 말리느냐는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때에 인간의 사랑과의 차이점이 무언가 하면,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기주의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내가 이렇게 정성을 퍼붓는데 너는 왜 내 정성을 모르느냐는 조건부입니다. 너는 나에게 사랑받아놓고 딴 데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없는데서 만들어낸 사랑입니다. 없다는 말은 저주 받았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너와 나의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서 사랑하는 건데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경건치 못한 자, 거기다가 하나님께 원수 된 자, 죄인 된 자, 저주 받을 놈이죠! 저주 받을 놈, 즉 원수를 사랑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원수를 사랑했기에 사랑받은 너는 사랑받고 난 뒤에 사랑해준 하나님에 대하여 일말의 어떤 원망이나 불평을 할 자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원수였기 때문에! 원수란 적입니다. 하나님께 대드는 적을 사랑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아까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였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저를 시인할 터이요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그 원칙에 의하면 베드로는 잘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왜 안 통하는 것입니까? 사랑은 법으로 안 따지기에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마귀가 다닙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저 여호수아는 더러운 놈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이 천사 저 여호수아가 더럽다고 마귀가 말하는데 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입혀라

 

 

악마가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더러운데 옷을 갈아입힌 분이 누구십니까?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고소하는 마귀 앞에서 새 옷으로 갈아입히시니 마귀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저런 수가 다 있는가? 뻔하게 죄인 인줄 아는데 옷을 갈아입혀 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우리가 예수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런 복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내 잘만 맛으로 사는 그 보람으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잘나고 훌륭한 점을 뽑아내어서 창고에 무슨 창고? 선의 창고 의로움의 창고에 모든 것을 법으로 환원시켜 다 집어넣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시간으로 마지막 하니 아쉬워 죽겠다. 더 하고 싶은데 혼자 아쉽고 혼자 더하고 싶어서야 되겠습니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법이란 내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이 욕망이 무엇을 목표로 올라오는가 하면 타인의 욕망입니다.

 

 

타인이란 남이지요! 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 남이 나를 보는 평가, 평판, 남이 나에게 요구하는 따가운 시선, 나에 대한 기대감들입니다. 거기에 부응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 만나서 타협하면서 생기는 것이 법입니다.

 

 

남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 이번에 반에서 몇 등 했어?

5등 했습니다.

야 2등으로 올려!

 

5등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2등이나 하겠는가? 2등까지는 안 되겠고 한 3등까지는 해보자라고 할 때에 타인의 요구는 2등 내 능력은 5등 그 사이에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것이 3등이지요! 이것이 그 순간의 법입니다.

 

 

그러니 법은 누가 만듭니까? 내 욕망이 만듭니다. 법은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고 내가 위반하였다고 스스로 자기가 죄인이라고 자책하고, 스스로 지켰다고 의인이라며 교만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는 법이 없고 복음밖에 없습니다.

 

 

법이 없고 복음밖에 없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자꾸만 법을 만들어 놓습니다. 주님이시여! 엄마가 이번에 2등을 요구하였는데 이번에 내가 법으로 3등을 하겠다고 하여 3등이 되었으니 나 착하지요! 자기가 3등 하겠다고 법을 만들어 놓고 3등 하여 지켜 의인 되었다는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3등 되었다고 기뻐하고 있는데 엄마가 1등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법을 또 바꾸는 것입니다. 1등과 3등 사이에 자기가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2등으로 법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11시 예배인데 남들이 오지 않는 10시 50분에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이 교회는 10시 30분에 다 올 사람들이지만, 우리교회는 11시 10분에 다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목사님이 교독문 몇 번 하는지도 몰라요! 다 지나가서 오기에, 그러다가 무언가 성령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다음주에는 일찍 가야지 하고서 일찍 온 것입니다.

 

 

그래서 10시 50분까지 가야지 하고서 딱 와보니 10시 49분입니다. 주님이시여! 나 왜 이렇게 착합니까? 내가 10시 50분에 법 지켜왔으니 나 같은 의인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서 문 열고 보니 벌써 몇 사람이 와 있는 것입니다. 주여 다음에 법 조정하겠습니다. 40분까지 오겠습니다.

 

 

매일같이 자기가 스스로 잣대와 기준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만든 법을 지킴으로서 스스로 만족감을 얻고 그것을 못 지켰을 때에는 신에게 살살 용서를 빌고 헌금 몇 푼 더하면서 자기 악의 창고에서 악을 들어내는 그러한 모습, 스스로 욕망을 조절하고 정치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나온 것이 법의 의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내가 나를 존경하고 나를 숭상하고 나를 숭배하고 우상시하는 내 속에 있는 내가 나를 절대시 하는 이런 나라면, 이런 나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서 드러내실 때에 내가 스스로 법을 만들어내는 이 모든 사고방식 자체가 죄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또다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마저 용서하시는 구나!

 

 

다윗처럼 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그 남편을 죽이는 그런 자 조차 사랑 앞에서 다 녹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녹아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에게 녹아들듯이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밀랍처럼 초처럼 위에서 아래까지 푹 적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쪽에서 짜내도 주님의 피가 나오고, 머리카락을 뽑아도 그기에 예수님의 피가 묻혀 나오고, 발톱을 잘라도 잘린 자국에서 예수님의 피가 펑펑 쏟아져 나오고, 전체가 주님의 용서덩어리 은혜덩어리로 그렇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이 아닙니다. 완전해서 용서 받은 것이 아니고 못난 인간이기에 끊임없이 지금도 용서가 여러분 속에서 작렬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잊지 마세요!

 

 

내가 주님의 용서를 알기에 완전한 자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여러분들이 워낙 못 낫기에 워낙 잘나신 우리 주님께서 잘난 그 피를 못난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어떤 죄라고 감당할 수 있는 피를 퍼부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에는 뭐가 없습니까? 사랑에는 법이 없습니다. 법이 없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이 있는 자는 마지막에 심판을 받지만 사랑 안에 있어 두려움이 없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이미 주님의 사랑을 믿기에 다시는 여러분들이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벌벌 떠는 그런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고 승리하는 주님의 증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복음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실제로 어떤 분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건이 실제로 있는데 왜 그런 사건에 우리가 눈여겨 두지 아니하고 남북통일이나 폭풍이나 물가나 추석이나 이런 쓸데없는데 그렇게 신경을 쓰는지 진짜로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사건 그것뿐인 것을 그것이 사랑인 것을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십자가를 외면하지 말고 정말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처럼 되지 말고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 한번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그 고마움을 알고 잊지 않는 참된 주님의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 만날 때 까지 주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산목양교회 정낙원 목사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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