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조직신학
구원론 중 (회개 1-1)
05. 7. 11일 강의 이근호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말씀을 가지고 형제들이 모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의 모든 진리와 생명 되는 내용이 성경 속에 머물지 말게 하시고 우리의 삶 속으로 우리의 내부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회개에 대하여, 교제 219페이지가 되겠습니다. 회개라고 할 때에 선입감이 무언가 하면, 회개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선입감이 있는데 그게 잘못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하고 세상에서 말하는 반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반성에 대하여 깊이 연구를 하게 되면 연구할게 아주 많습니다.
왜 이 반성에 대하여 연구할게 많은가하면, 반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이성이 무언가하면 동물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이 있다고 하는 것, 이치를 따지는 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사람은 짐승하고는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에 키우는 개나 고양이 같은 것이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끼리가 큽니까? 사람이 큽니까? 코끼리가 커지요! 그렇다면 코끼리가 사람보다 더 위대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코끼리가 아무리 덩치가 커지만 코끼리한테 없는 게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짐승하고는 다른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을 이성이라고 합니다.
이성 따질 줄 아는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이치를 따질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이라는 것이 무언가? 그 알맹이를 캐어보니 사람이 반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뉘우치는 심성을 반성이라고 합니다.
옛날부터 자기 행동에 대하여 뉘우치거나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짐승 같은 놈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할 때에는 X새끼라고 하지요!
이게 무어냐 하면 너는 왜 반성할 줄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반성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사람이냐? 사람 같으면 네가 반성 할 줄 알아야 사람이지! 반성을 촉구하면서 반성할 수 있다고 간주될 때 그것을 사람에 넣어줍니다. 사람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회개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이성에서 나오는 반성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하면, 흔히 교회에서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도행전의 구절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반성을 촉발하여 그 반성한 것을 마치 회개한 것처럼 간주해 주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생산해 낼 수 있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들을 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19세기 말, 1880년도에 들어왔는데 에 들어왔는데, 1906년인가 1907년인가에 평양 산정현 교회라고 있었습니다. 그 산정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을 때 거기 모인 수백 명이 한꺼번에 회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회개하는 모습은 마치 사무엘상에 나오는 미스바의 회개 운동과 같은 맥락, 또는 오순절 날 성령이 내려와서 사람들의 입이 터지고 방언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주고받을 때와 같은 동일한 현상이 그 산정현 교회에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멀리 있던 하나님의 복음이 드디어 이 한반도에 처음으로 직수입이 되어서 그때부터 이 한반도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벌여질 요량으로, 마치 사도행전 2장부터 3장 4장 5장으로 성령의 불길이 계속 번져 지는 것처럼, 그때를 기초로 하여 한반도에 한민족의 역사에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다. 라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그것을 그럴 듯 하게 하고 싶어서 평양의 대 회개 운동을 오순절 성령운동으로 갖다 됩니다.
신학생이라면, 목사라면 그것을 정말 귀에 상처가 날 정도로 되풀이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세요! 과거에 그러한 반성운동, 저는 반성운동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따져보면 회개운동과 아무 관계없는 것이지만 그냥 회개운동이라고 합시다. 그런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하고, 지금 여기 서울 한복판에 교회가 있는 것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사고방식을 잠시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비행기가 공항에 내릴 때에 헬리콥터는 바로 내리지요! 그런데 큰 여객기는 위에서 바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서 몇 바퀴 돌다가 고도를 맞추어서 땅에 부닥치지 않게 잘 조정해서 부드럽게 살포시 내리도록 활주로가 무려 4키로 5키로가 되게 하여 속도를 줄이면서 공항 앞에까지 가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지금 2005년도 7월 달에 여기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싶으냐하면 바로 위에서 주님이 교회를 세웠다고 말하고 싶지 않고 1907년도 오순절부터 시작해서 많은 교회가 있었고 지금도 죽 교회가 있어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지금 여기 교회가 있다는 말은 주님이 계시기에 교회가 있다고 말하면 이런 교회가 사람들에게 잘 안 먹혀들고 시인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2005년도의 이 교회뿐 아니라 2004년도의 교회 2003년도의 교회 1986년도의 교회도 전부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와 동일한 진짜배기 교회라는 것을 이야기 해 줌으로 지금 2005년도의 이 교회도 여기에 묻혀서 한반도에 내려앉은 하나님의 부흥의 불길 속에 합세되어 있으니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교회 맞잖아!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영 감동이 안 되네요! 지금 목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교회가 무엇이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느 노회에서 안수 받았으면 나에게 안수한 그 노회역사가 얼마나 길고 깊으냐! 지금 우리 교단의 역사가 이렇게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충분하게 장자교단으로 역사적으로 보장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증인이 되셨기에 역사가 오래된 교단일수록 이단 되기에는 어렵고 하늘나라 진리에 가깝고 정통에 가깝다는 것은 무언중에 교인들에게 세뇌를 시키기 위하여 이런 논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에 그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세요! 전부다 반성에 관한 것이지 회개에 관한 부분은 내가 보기에 하나도 없어요! 전부다 반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마누라를 팼습니다. 다시는 안하겠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기존에 알고 있었던 조선시대, 삼국시대부터, 삼한시대부터, 고조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에 줄줄이 내려왔던 그 토속종교가 이야기 하는 그 신,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우리 할머니가 알려 줬고 우리 할아버지가 제사장이 되어서 날마다 제사 드리면서 전래대로 내려오는 풍습과 전통에 근거한 그런 신 관념에다가 성경에 나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조항들이 합쳐져서 자기 속에 있는 양심을 찌르니 이 판에 회개해야 죽어서 기독교가 말하는 그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여기고 반성을 하는데 이 반성을 여러 사람이 하다보니 거기서 반성을 안 하면 쪼다가 되고 왕따가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손자는 하나도 안 울고 싶은 것입니다. 평소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으셨기에 속으로는 잘 죽었다는 생각이 있는데 아버지가 울고 엄마가 우기 자기도 울어야 되는 줄 알고 우는 것입니다. 그게 집단 최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 민족이 얼마나 집단최면을 좋아하고 선호하는지 개콘이라고 개그 콘서트에 마지막 대목을 보면 출산드라가 나옵니다. 출산드라의 처음에 표정이 나오는데 그 표정이 완전히 부흥사의 표정입니다. 삐쩍 마른 것들은 가라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자연분만 모유수유, 먹습니까? 먹습니다. 이 코너를 처음에 할 때는 사람들이 점잔뺀다고 따라하지 않다가 이제는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누가 한 사람이 바람넣어주면 그 기회를 타서 자기도 박수를 치면서 부흥회 노래하면서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부흥회모습인지! 그 개그우먼의 멘트 하나하나가 옛날의 부흥사들의 말과 똑같이 들렸습니다. 저도 옛날에 많이 참석하여 내막을 아니 똑같이 들렸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돼지 선생께서 자기를 버리사 하면서 한 박자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는 조사를 하면서 한 박자 쉬는 것이 전부 다 부흥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울어버리고 그러면 사람들이 거기에 확 빠지는 것입니다.
조작된 은혜 충만의 분위기이죠! 그게 하나의 기법입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벽돌로 가로막힌 예배당 바깥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벽돌 안에 들어오고 밀폐된 공간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공간에서는 자신이 자진해서 딴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의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가 지도자에 의해서 유도 받을 때에 거기에 편승하여서 그동안 맺히고 맺힌 것들, 시어머니의 잔소리 남편 늦게 들어오는 것, 자식들 공부 안 해서 화딱지 나는 이런 것들, 사업하는 아저씨들은 사업이 안 되어 화가 나는 이러한 한들이 뭉쳐 있다가 남들이 거기서 그야말로 발광을 하니 함께 발광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서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입니다. 시원하게 됩니다. 박수를 치면서 신경이 모여 있는 이곳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다가 보면 그 리듬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게 됩니다. 퍼지게 되면 그 혈관이 어디까지 올라가는데 하면 두뇌까지 올라갑니다.
머리에는 뇌가 있는데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두뇌에 갑자기 활성화된 에너지가 충만한 그런 열기가 충만한 피가 뇌에 돌게 되면 사람들이 갑자가 돌아버립니다. 돌아버리게 되면 안보이든 예수가 보이는 것입니다. 박수를 치든지 판을 두드리든지 하면 열기가 나면서 머리부분으로 돌아버리면 전에 보고 싶었던 예수가 보이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시원하다고 해가지고 문밖에 나오면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낮에 설교할 때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설교하면서 제일 먼저 던진 멘트가 무엇인가 하면 팔공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교회와 집 앞에 팔공산이 있습니다. 1692미터의 대구에서 유명한 산인데 내가 팔공산에 올라가면 팔공산은 아무 변동이 없습니다. 안개와 구름만 자욱한 것입니다. 내가 산 정상에서 나 정상에 섰다고 고함을 질러도 산은 아무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메아리만 들릴 뿐입니다. 산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집에 내려가자고 내려오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하면 온 산천이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완전히 해체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설교하기를 왜 나라는 인간, 이근호라는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은 운행을 하는데 왜 나 말고 예수님이라는 분이 한번 잠갔다고 뺐다가 하면 세상은 완전히 흐물흐물해 져서 형체도 없이 불에 다 타버리듯이 세상 통째로 날아 가버리는 이유가 무언가?
예수님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60억의 인구가 살아도 끄떡없던 이 세상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왜 세상이 다 불에 타버리는 것입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이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시작했습니다.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물에 걸으면 빠지는데 왜 예수님은 호수위로 걸으시는데 빠지지 않는 것입니까? 물에 안 빠지는 신기한 것이 아니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예수님 당신에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를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아마 요즈음처럼 휴대폰 있었다면 사진 찍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찍어본들 나중에 뺨을 때리고 옷을 벗기고 발을 뻗게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회개라는 것과 우리의 이성, 늦게 오신 분을 위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성이란 무슨 기능이라고 하였습니까? 인간이 이성이 있다는 것은 반성을 할 능력이 있을 때에 이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짐승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개, 돼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반성할줄 아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칠 줄 알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는 스스로 반성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정기적으로 반성하였습니다. 늘 회개하고 금식하면서 자기 죄를 통회하였습니다. 그러한 반성 종교적인 반성 윤리도덕적인 반성을 철두철미하게 훈련받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대로 있는데 왜 예수님이 한번 다녀갔다 하면 다 무너지고 불바다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회개하고, 오늘 주제가 회개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반성하고 질이 다릅니다.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것도 모르고 교회에서는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해가지고 그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하게 해서 반성한 것을 마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회개인양 가짜배기 짝퉁으로 만들어 놓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흔히 사람들을 반성시키는 수법은 이것이죠!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고 고생하셨는데 여러분은 왜 돈 안 바칩니까? 예수님은 집도 없어서 고생하셨는데 여러분은 집 다 짓고 잘 먹고 잘 살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까? 주님은 고생하셨는데 왜 그렇게 호사스럽게 사십니까?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교회에 돈 좀 바치라는 것입니다.
초장에 너무 고함을 질러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예수님 말씀하시는 회개란 정말 어렵습니다.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회개하고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 예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려 드릴 테니 여러분들이 제 질문에 한번 답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들도 답변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눈뜨면 신기 합니까 신기 하지 않습니까? 참 신기하지요! 여러분 다 동의하십니까?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인가가 오심으로 소경이 눈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귀머거리가 듣는다고 합니다. 안 들리던 귀머거리가 듣게 되면 참 신기하지요! 소경이 눈뜨면 신기하지요!
이제 질문 합니다. 눈 잘 뜨고 잘 보던 사람이 소경이 되면 신기합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시력이 양쪽 다 2.0으로 잘 보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소경이 되면 신기합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신기하지 않다는 아이들의 답변) 그것도 신기해야 돼요!
기독교 신자들이 어느 정도로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가 하면, 소경이 눈 뜬 것만 신기하게 여기고 자기가 지금까지 눈뜨고 있다가 내일 아침에 소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멀쩡하든 눈이 내일 아침에 소경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기주의입니다. 그 만큼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리한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어느 정도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소경이 눈뜨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지 마시고 지금 눈뜬 자가 소경이 되더라도 주님을 찬미케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평소에 눈 떴을 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잘 안 되지요!
제가 한 예를 들면 어떤 소경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아버지 누가 안구를 기증한다고 하는데 이번에 수술이 잘 되어서 40평생에 눈 한번 뜨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잖아요! 드디어 기증받아 수술하여 눈을 떴습니다. 의사도 감격하고 가족들도 감격하여 부르고 있는데, 눈뜬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 이제 한번 보았으니 내일 아침에 결과가 나빠져서 다시 소경이 되더라도 그것은 주님의 은혜로 간주하겠습니다.
이런 기도가 눈뜬 상태에서 나오겠습니까? 는 뜬 것은 일단 챙겨두고 그 다음에 눈을 떴으니 이제 취직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취직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된다면 예수님이 생각했던 세계하고 본인이 생각했던 세계하고 접촉점이 날아 가버리고 접촉점이 없는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은 연약함으로 복음이 제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약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날마다 주님께서 죽음에 내팽개쳐 버리고 그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벌떡 일어나서 나를 가지고 논다고 고린도후서에서 보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반성을 하는 것은, 제가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저는 반성을 잘합니다. 저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잘 뉘우칩니다. 하는 이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결론 간단합니다. 이런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이 말을 무슨 뜻인가 하면, 반성해서 구원될 사람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사람은 구원이 안 되니 억지를 부리는데 뭐든지 억지가 제일 문제입니다. 구원이 안 되니 억지로 구원이 된 것인 양 폼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매일 같이 반성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할 수 있는 것은 반성밖에 없기에 매일같이 반성하면서도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의 근처에도 못간 것입니다. 오직 반성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80평생 90평생 반성만 되풀이 할 뿐입니다. 회개란 것을 할 줄도 모르고, 회개는 하고 나면 뿅 갑니다. 너무 좋아가지고 비가 오는데 춤이라고 추고 싶습니다. 회개 하였다면, 회개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까처럼 눈 떴다가 내일 아침에 소경이 되어도 겁이 안 납니다.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톱으로 너를 죽인다고 하니 톱으로 죽이든 돌을 던져 죽이든 회개상태에 놓인 사람은 천하게 무서울 게 없습니다. 그런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첫 시간에 도대체 하나님의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 결과가 전혀 무서울 게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성을 하게 되면 겁이 납니다. 왜 겁이 나느냐 하면, 반성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꼭 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곱빼기로 반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저번에 이런 짓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질끈 눈 감아서 봐 주었는데 이번에 또 이런 짓을 하여 하나님이 안 봐주면 나는 완전히 조져 버리잖아! 그러니 미리 조심해야지! 이 조심해야 하는 것이 늘 조마조마한 것입니다.
갑자기 성경 3장 읽다가 5장 읽고, 헌근 2천 원 하다가 3천원하고 전도 안하다가 갑자기 전도한다고 지하철에 가서전도하다가 경비한테 걸리고 과거에 내가 너무 나쁜 짓을 하였기에 이제 새 사람 되고 나서는 개과천선 한다는 의미에서 이제는 그야말로 주께서 원하시는 헌신적인 삶을 살아드리고자 설쳐 되는 것 그것 반성입니다. 회개 아닙니다. 그것 겁납니다.
그래서 디모데 서에 보면 처음 믿는 사람들에게 직분을 주지 못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시험하는 시험에 쉽게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교만입니다. 과거에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나 나쁜 일을 많이 하였기에 이제 새 사람 되었으니 짧은 시간 내에 그것은 선으로 다 바꾸려고 하니 얼마나 오버를 하는지 오버액션을 할 수 밖에 없지요! 과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 나온 지옥의 하나님을 보셨나요? 그 책에 봐도 이런 내용이 조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개가 무엇인지를 성경책을 통하여 함께 봅시다.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면 너무 진지하게 잘 들어주시니 제가 강의하는데 피곤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에서 하는 것은 피곤하다는 말이 되는데 아무튼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출애굽기 7:22절에 보면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여러분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믿어진다면 회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로 왕이 강퍅한 것이 바로 왕이 원래 자기 본성상 강퍅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강퍅하지도 않은 바로를 일부러 강퍅케 하셔서 강퍅한 것입니까? 첫 번째 입니까? 두 번 째 입니까? 두 번 째 이지요! 그렇다면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회개하고 싶어서 회개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회개케 하시니 회개한 것입니까? 두 번째 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회개를 한 상태 같으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제 말을 여러분이 잊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회개를 하게 된 사람은 천하게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 소경을 만들어도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더라는 것에 기쁨으로 동의를 할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감사할 사람입니다.
지금 일반 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인간인 이상 자체 내에 반성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성인데 이것을 교회에서는 무어라고 빙자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속성이고,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질이 들어왔다는 것은 내 속에 하나님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곧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네 속에 거룩한 뜻으로 있기 때문에 잘 발휘하면 너 구원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잘만 관리하면 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데 아마 토대가 될 걸! 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자기의 반성 행위를 하나님의 일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이 출애굽기 7:22절과 다릅니다. 출애굽기 9:6절을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성경이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똑똑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튿날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시니 애굽의 모든 생축은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한지라 이 말씀이 있지요! 여러분이 함께 보고 있으니 제가 사기 치는 말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가축을 밤새 붙들고 기도하였습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자기 집에 있는 가축들이 자기 것인 양 여기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자기들이 키우지만 그 가축들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가축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 것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고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을 쥐고 일생을 인도할 하나님의 소유이지 네가 너의 인생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죽은 저 애굽의 가축은 무엇입니까? 애굽의 가축이 무언가 하면 7절에 나옵니다. 바로가 보내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가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관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관리하셔서 애굽에 있는 가축들은 이스라엘의 가축에 비하여 다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가축 살기기 위하여 붙들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축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과 겸하여 있는 애굽 백성들의 가축도 역시 하나님의 관리 하에 있는 것입니다.
양쪽 다 관리하시는데 한 쪽은 무조건 죽이고 한 쪽은 무조건 살리는 것입니다. 이 무조건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한쪽만 살려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하시는 속성을 드러내는 증거물로 활용하기 위하여 극대 극의 대비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이것을 평소의 생활 가운데 몸서 체험하지 못하고 기껏 한다는 것이 교회 와서 반성, 뉘우치는 일만 실컷 하는 것입니까? 왜 이런 반성만 하는 것입니까? 반성한다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면 반성하는 나는 얼마나 착한가 하는 자기 착함을 챙기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착하지! 스스로 자기에게 감탄하고 싶은 것입니다.
평소에 기분 좋다가 교회 문만 들어서면 흑흑 우는 것입니다. 왜 우는데? 마음 약해서? 한이 맺혀서? 운다고 해서 천당 간다고 하면 저는 천날 만날 울겠습니다. 반성해서 천당 간다면 반성 할 것이 없을 정도로 반성하겠습니다. 그러니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들이 예를 드는데 여러분의 안경에 성에가 끼었지요! 안경을 닦으세요! 안경을 닦으면 잘 보입니다. 이런 예화가 교인들에게 굉장히 위험스러운 예화입니다. 아! 목사님이 그렇게 예를 든 것은 잘하고 못하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덮어씌우고 있는 마음의 눈을 밝히라는 것이구나! 성경 마태복음 5장의 말씀처럼 내 눈을 닦으면 침침한 것이 잘 보이니 교회 나오기 전보다는 교회 나오고 나서 전보다 더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면서 성화로운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성작업에 나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회개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반성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예수님이 벌리시는 회개는 집단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관한 문제이지 우리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가 개인이 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믿고 이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하는 것은 내 몫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면서부터 반성하려고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가축이 삽니까? 그런다고 죽은 내가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까? 내가 천국 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것이 될 경우에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것을 천국에 집어넣으려고 애를 써도 내 것이 주님의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천국은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 못 갑니다. 참 비정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들으면 섭섭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정답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습니까? 착해야 구원받고 나쁜 짓해야 지옥 가는데 그것이 상식이 아닙니까? 그 상식이 출애굽기 5장-9장에서 다 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있기 전에 박사교회에 있었습니다. 박사교회라는 이름이 하도 특이해서 교회 이름 때문에 유명해 졌습니다(박사는 마을이름입니다). 박사교회에 있을 때에 여름성경학교를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학교를 할 때에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치한 방법을 썼습니다.
달리기 하여 끝에 가서 잡을 수 있도록 무엇을 놓아두었습니다. 돌잔치하면 아이가 손에 잡을 것을 두지요! 돈, 실, 연필 등을 두는데 돈 잡으면 박수치고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그 수법 비슷하게 해 가지고 성경 책 놓고 새우깡 놓고 사탕 놓고 만화책 놓고 해가지고 어느 것을 집을래? 하면서 힌트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잘 줍기 바랍니다. 그것에 따라 상을 줍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면 1-2학년은 50미터를 달려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책이라고 들었지만 정신이 없어 가지고 빵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더 나쁜 애들이 6학년 애들입니다. 빵도 있고 성경책도 있지만 성경책을 잡으면 빵 잡은 것보다 점수를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성경책을 덥석 잡는 것입니다.
잘했어요! 그렇게 말하지만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성경책을 잡았지만 집에서 성경책을 보기나 하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그렇게 합니다만 그런 방법론이라도 있다면 사람이 무언가 잡을 수라고 있을 텐데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사람이 덥석 잡을 만한 것에는 결코 거기에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만약 성경책 놓고 하는데 성경책을 덥석 잡고서 주님 나 잘했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아니 내가 언제 성경책을 잡으면 구원 준다는 그런 말 했던가! 그러면 빵을 잡으면요?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빵을 잡든 성경책을 잡든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똑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뒤 나중에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이 되는 방식으로 구원해주시지! 우리가 아주 눈치가 빨라서 재치가 넘쳐서 재기 발랄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더라고 생각하여 그래서 붙잡았을 때에 구원시켜주는 그런 주님이 아니십니다. 아니십니다.
여러분들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그들이 애굽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을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똑 같은 방식을 그 뒤로 사용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창세기부터 공부를 하셨으니 다 아시겠지요! 어린 양의 피로서 애굽에서 탈출하였는데 그 뒤에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안 하십니다. 그
것이 무어냐 하면, 사람들은 한 번 했던 것을 되풀이 하여서 그것으로 공적을 쌓으려는 그러한 반성의 재주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미리 다 아시고 절대로 똑 같은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사 드리고도 망하도록 하십니다.
심지어 어린 양의 피로 속죄제를 삼아 뿌리는데도 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전에 한번 써 먹었던 것을 인간이 그대로 흉내 내어 가지고 그것을 유사 기독교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아시기에 똑 같이 하시지 않습니다.
더 쉬운 예로 감기 들었다. 그런데 바깥에 날씨가 너무 추워서 병원에 못가고 집에서 기도하였더니 주께서 응답하셔서 감기가 뚝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야! 기도하면 되는구나! 감기 들면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하지 않게 되면 주님의 능력을 무시한 것이 되어지기에 믿음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 감기 들면 기도해야지! 그런데 다음에 감기 들어서 기도하니 낳기는커녕 열을 내어 기도하였더니 더 심하여 진 것입니다.
또 예를 들면, 돈 십 만원이 있는데 교회가 어려운 소식을 듣고 옷을 사 입으려고 했던 것을 포기하고 교회에 헌금을 했더니만 세상에 며칠 뒤에 어디에서 이십 만원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더 채워주시는구나! 그 다음에 이십 만원이 생기게 되었을 때 교회내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사십 만원이 온다고 생각하고 이십 만원을 내었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신자입니다. 그런데 또 사십 만원이 생기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것 마귀가 들어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인간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 말미암아 현재 우리에게 놓여있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받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만 이야기 하고 첫째시간 좀 쉽시다. 어떤 분에 제 메일에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주 젊은 분인데 젊으니 단도직입적이죠! 제가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답변 부탁드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하늘의 별을 보라.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늘의 별이 그냥 반짝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반짝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까라고 생각하는 그런 힘, 구원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계시조차도 하나의 별빛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지라고 나오는 그 발상조차도 그 넓고 황량한 우주에게 외롭게 반짝반짝 거리는 별빛처럼 우리 속에서 예수님은 누구시지 하나님은 누구시지라는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별을 보고 좀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와서 날 건져가! 그런 건방진 소리하지 말고, 현재 그런 건방진 소리하는 나 자신조차 하나님께서 이 공간에 이 장소에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다는 하나의 별로서 하나의 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좀 눈을 크게 떠보고 그것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의한 회개입니다.
첫째 시간의 결론을 내린다면, 애굽의 바로왕은 하나님께서 강퍅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론이니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 강퍅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 족쇄가 풀리는 것입니다. 사실은 바로 왕 못지않게 우리도 강퍅합니다.
하지만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예수님의 집자가의 공로가 그대로 내 가슴에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은 주님의 활동하심이지 나의 애씀이 아니고 나의 노력도 아닌 것입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강퍅이 풀리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 하고 자기 마음대로 설쳐대는 이 못된 인간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그 은혜가 밀려들어왔다는 것, 따라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의 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인 회개 활동의 연속인 것입니다.
그 연속이 성경전체에서 어떻게 확실하게 진척되고 있는지 그것은 한 오 분 쉬고 둘째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녹취 051020 이장우
구원론 중 회개 1-2 05. 7. 11일 강의 이근호
자 두 번째 시간입니다.
두 번째 시간은 좀 어렵습니다.
먼저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해 드리면, 첫 번째 시간에 무엇을 이야기 해 드렸는가 하면 회개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반성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무엇과 상관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그것이 회개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셔서 강퍅케 하시면 그것이 강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가 말씀드렸지요!
그러면 두 번째 시간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왜 우리의 반성실력을 무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착하고 싶어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착하고 싶어 하는데, 나쁜 짓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잠시 실수로 나쁜 짓을 하지만 그러나 곧장 돌아서서 또 착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평소에 교회 다니지 않다가 왜 교회 들어오고 싶어 하는 그 본능이 무엇인가 하면 이왕이면 더 착해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을 때까지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나중에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나중에 신이 있다면, 애썼구나! 최선을 다했네! 너 자신처럼 부끄러움이 없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나오지요, 나는 아주 우스워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그런 시가 있지요.
제가 윤동주 태어나고 공부했던 그곳까지 가 보았습니다. 백두산 놀러가면서 그곳까지 가 보았는데 그곳이 어딘가 하면 잊어버렸는데 선구자 노래에 나오지 않습니까?(해란강) 윤동주 젊은 나이 27살에 얼마나 세상이 꼴 보기 싫었으면, 얼마나 세상이 실망스러웠으면, 나라도 때 묻지 말자. 나라도 한번 순수하게 살아보자.
한 평생 사는 것을 더럽게 살아서 되겠는가! 인간답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았듯이 교회도 자기 인격수양을 위해서, 자기 양심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교회 오면 신의 말씀이 있거든요! 신의 말씀이 있으면 이것은 하나의 목표가 됩니다. 신의 말씀을 목표로 두고 착한 나가 얼마나 착한지 높이뛰기 실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세계 신기록을 한번 세워보자는 것입니다. 4미터 50, 4미터 55, 다음주는 더 올려야지, 4미터 70, 드디어 5미터, 우리교회에서는 내 따라 올 사람 없지!
다음에는 다른 교회까지 붙어볼까? 이런 착함에 대한 보이지 않는 지독하고 치열한 경쟁심이 신의 말씀을 목표로 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예수님을 본받자 그러한 희망을 걸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점을 압니다. 인간들의 종교라는 것이 결국 자기의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는 자는 지옥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오른 눈이 범죄 하면 그것을 빼야한다. 범죄 한 오른 눈 빼지 아니하면 너는 천국은 텄다. 지옥 갈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 어떤 목표를 정하여 놓고서 달성하겠다는 저의를 와장창 꺾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시는데 40일을 밤낮으로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을 하셨습니다. 보통 금식을 하면 물은 마시는데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초월한 것입니다. 가끔 죽 먹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하였습니다. 착하지려고 애를 쓰는 우리가 60억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와도 세상은 눈 꿈쩍하지 않고 있다가 예수님이 왔다가 가버리시니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자연세계가 예수님과 다른 사람을 구별할 줄 압니다. 이근호 너하고 예수님하고 구별할 줄 압니다. 너 같은 인간은 백날을 살아보아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무언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회개케 하시면 어떻게 하는지 말라기를 보겠습니다. 구약 제일 마지막에 있습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좀 이상하다고 여겨집니다. 성경 말씀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그들을 돌이키는데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 자리에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상한지 그림을 그려보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이 어떤 땅인지를 모릅니다. 모르는데 하늘에서 오신 선지자가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면 저주가 없고 축복이 있고, 만약 선지자가 왔는데도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그냥 저주가 온다는 이 말은, 결국 선지자가 안 나타난 상태였다면 그냥 그대로 저주의 세계가 확정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선지자가 오게 되면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우리의 주제가 파악이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저주 속에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세상 속에서 그냥 죽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짧게 말씀을 드리면 누가 와서 날 데려가지 아니하면 나는 저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 안 받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하면 누가 외부에서 와서 나를 데려가면 비로소 그때는 저주를 안 받고 나머지기는 그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말에 동의를 하신다면 예수님이 없는 상태가 우리에게 어떻게 저주가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상태가 왜 저주받아야 될 상태가 되는지 그 내막을 알아야 합니다. 그 내막을 알아야 그기에 예수님의 공로가 붙여지면 예수님께 감사하고 이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는 무서울 게 없는 정말 자유를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상당히 어렵지요! 엄마한테 아빠한테 배워라! 할 수 없다(아이들이 함께 강의를 듣고 있음). 하나님의 저주 받는 상태가 어떤지를 몰랐는데 외부에서 누가 와서 일러주니까 비로소 아하! 우리가 저주 받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일어나는 현상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러면 반성이 무엇입니까? 반성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입니다. 아이고! 내가 잘못 되었어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지,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반성 차원이 아니잖아요! 반성이란 내가 행동을 잘못 했어! 세상에 저런 나쁜 짓을 하다니! 이런 것은 반성입니다.
그런 반성은 누가 잘했습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어떤 종교인보다 더 반성을 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이 반성한 것은 전혀 자기를 이 세상에서 스스로 건져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을 어린애들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해한다면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봉사가 눈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어려운가 하면, 반성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반성을 하는 나만큼은 여러 사람들이 아니라 반성을 하는 나만큼은 구원될 수 있다는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보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에서 오신 분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가 펄쩍 펄쩍 뛰어서 구원될 수 있다면 구태여 하늘에서 올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안 오셔도 나는 내 잘못 압니다.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저주 받은 세상이 그냥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저주 받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면, 이 세상이 나쁜 것도 알고 자기 자신이 나쁜 인간인 것도 알고 신의 존재 앞에서 자기 자신이 부족한 것도 알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전도도 하면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 그런 현상이 저주 받은 세상의 현상이고 한 단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제가 한 예를 들면 어린 애들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애들도 알 수 있도록 말하겠습니다. 사무엘이 있었어요.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면서 자꾸만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기도 중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린 사무엘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었던 어린아이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아 부르는 소리에 자다가 일어나서 엘리 제사장님 저를 불렀습니까? 아니다 나 안 불렀다. 이상하다 불러놓고서는 다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아 하면서 또 부르는 것입니다. 또다시 일어나서 제사장님 저를 불렀습니까? 아니다. 이상하다 누가 나를 불렀지? 또다시 잤습니다. 또다시 사무엘을 부르는 것입니다. 철이 없으니 또다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님 불렀습니까?
아하! 하나님이 너를 불렀구나! 하나님이 사무엘 너를 불렀구나! 바로 이것이 구원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누가 외부에서 불러주어야 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된다면 여러분의 이름을 마구 부르겠습니다. 제가 불러서는 되지 않습니다.
제가 불러서 구원되지 않는 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데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 어떤 사람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불러주신 예수님의 말만 듣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 말이 참 어려운 말이고 난해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어떤 목사들이 말하기를 이근호 목사는 영지주의자라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을 끊어버리고 일방적으로 위에서 부르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난번에 무얼 했습니까? 소명이지요! 소명, 불러주심은 사람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신 자를 불러내신다는 그 작업이 있어야 그 사람은 구원된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아서 구원되는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반드시 불러주심이 있어야 됩니다.
미리 아신다는 것은 역사 속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미리 아신다는 것은 창세전의 문제이기에 우리는 파악이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아는가 하면 미리 아신 자이기에 주께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주님께서, 주님께서 불러주셨기에 목사가 불러준 것이 아니기에 이 사람은 오직 예수님께만 못 박아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지시만 받고 예수님만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디를 가더라도 어린양만 따라가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그 대목을 한번 봅시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 여자는 기존의 세상을 말합니다. 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지조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이것은 반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시간은 어려운 것을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어려운 것을 위해서 사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가는 곳 어디든지 따라간다는 것은 이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파트 이사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일체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참고로 하고 도움을 받을 뿐이지 그 사람에게 목메고 그 사람 없으면 사족을 못 쓰고 그 사람에게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 사람 하는 대로 다 하는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고함을 질러야 합니다. 하여튼 교인들이 목사를 교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의존교회는 그럴 교인들이 한 사람도 없겠지만,,,,
십자가는 사도 바울도 십자가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공로가 우리 속에 있어야지 다른 사람의 공로, 심지어 이근호의 공로, 이근호 공로 할 것도 없지요! 만날 떡이나 먹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공로가 있으면 안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좋지요 그러나 주 안에서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이 양심이 고우면, 양심이 또 나오는데 사람의 양심이 고우면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만 우왕좌왕 할 때가 참 많이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많이 얻으면 그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이나 책임감 같은 것이 있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따라 가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의에 따라 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품고 있던 것을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내가 저 사람을 섭섭하게 하면 저 사람이 얼마나 나를 욕하겠느냐? 그러면 내 품위는 어떻게 되겠느냐? 나의 인격은 완전히 망가지겠지! 그러기는 싫어!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저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있어! 라는 자기 완벽, 자기 성실, 자기 착함에 스스로 노예가 되어가지고 이런 정 저런 정 못 끊고 살아가는 사람을 참 많이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냥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기 양을 인도하실 때는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통과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갈 수 있지 주님 아니면 못 가는 곳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탈락하거나 빠이빠이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생소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둘째시간을 들어보면 이런 궁금점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과 딱 들어붙어서 절대로 안 떨어지는 방법이 없습니까? 이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인간의 정도 많고 도움 주신분도 많은데 이런 사람 저런 사람보다 오직 주님의 공로 주님의 의만 사모하며 주님과 딱 붙어서 이 말씀대로 어린 양이 가는 곳으로만 따라가며 어떤 경우라도 어린 양만 섬기는 그런 비책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 비책이 없겠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있으니 지금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해 주려고 뜸을 뜨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사랑입니다. 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을 믿습니까하고 같은 말인데 성경에 나와 있는 사랑이란 흔히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을 믿을 필요가 없고 예수님의 사랑이란 충격입니다. 정말 충격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이 충격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참고 참다가 들은 예화가 지난 시간에 삼식이 삼순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삼순이가 언니 집 팔아서 오천만원을 들고 왔는데 세상에 이 철딱서니 없는 재벌 2세의 삼식이가 그것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쓰레기통 뒤져서 다시 찾아냅니다만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때 삼순이가 삐져서 한라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천만원 그 귀한 돈 자기 언니 집 팔아서 마련한 그 돈을 보는 앞에서 찢어버렸을 때 사실 가슴이 찢어지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주님은 매일같이 오천만원 이상의 은혜를 줍니다. 우리는 아주 얄밉게도 주님이 주신 햇빛과 공기와 이 심장 뜀, 이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는데 어제 밤에 멈추었으면 죽잖아요!
우리가 심장을 보고 뛰어라 뛰어 라고 하지 않아도 밤새도록 심장이 뛰게 하시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 은혜를 매일같이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은혜 같지도 않고 정말 좋지도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돈은 안 주고 엉뚱한 것을 주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매일 수표 찢듯이 은혜를 찢어버리는 그 인간에게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그 죄인에게 일억 짜리 은혜를 더 주시는 것입니다. 일억 짜리 찢으면 십억 주고 십억을 찢으면 백억을 주고 이것은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가 간에 나의 지극한 사랑은 너를 향하여 마구 쏘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가 간에 어떤 마음을 갔든지 간에 예수 없어! 천당 없어! 하면서 고함을 지르고 난리를 피워도 내가 어떤 행동과 마음가짐을 가진다고 하여도 그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끊임없이 찾아와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방금 감정적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어떤 추악한 인간이라도 그 사람을 구원할 정도로 효력 있게 사용하는 것이 예수님의 피 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소용없다는 소리를 예수님이 듣기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피가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안 되더라는 소리를 예수님이 듣기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어떤 죄도 다 용서가 되더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은 듣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레위기를 찾아봅시다. 레위기 8:14-15절입니다. 14 ○모세가 또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끌어오니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속죄제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매 15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그 피를 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단 밑에 쏟아 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8:24절입니다. 24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레위기에 하나님의 모세언약에 보면 피가 뿌려지지 아니하면 거룩은 없습니다. 피가 하늘의 피 입니다. 우리 인간 피가 아닙니다. 약속된 하나님이 스스로 본인에게 약속한 그 깨끗한 희생의 피가 안 묻으면 일체의 하늘나라에는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피가 발린즉 거룩하고 피가 없은즉 저주 받습니다. 피가 뿌려지면 어떤 죄도 없어지고 피가 안 뿌려지면 어떤 노력을 하여도 지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저에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 글자입니다. 피 입니다. 이 피의 대단함, 이 피의 용서하심과 거룩하심을 실감나게 이 땅에 펼치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지독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찾아와서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면 자신의 죄가 지독스럽게 다 노출되는 그러한 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도하셔서 이런 죄도 구경하고 저런 죄도 일으키면서 결국 이런 죄 저런 죄 이렇게 지독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자신이 흘리신 그 피가 모든 죄를 다 씻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태초에 있었던 언약이며 약속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상상도 못합니다. 심지어 이사야가 거룩한 주님을 만나 뵙고서는, 주여! 주님이 이렇게 거룩한 분이신줄 몰랐습니다.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자신을 스스로 더럽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라는 그 성직자가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는데, 아무리 자책할 것이 없고 완벽하다고 하여도 주님의 거룩 앞에 서게 되면 기절해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 밖에 모르던 베드로가 제가 초막 셋을 지어서 모셔드리겠습니다. 할 정도로 거룩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숨을 못 쉴 정도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서 모세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났을 때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았는데도 얼굴빛만 생생하게 빛이 난 것입니다. 그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우리머리위에 있습니다. 지금, 그것이 거룩한 세계입니다.
그 거룩한 세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데 그 거룩한 세계를 어떻게 뚫느냐? 어떻게 들어가느냐? 예수님의 흘리신 피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외에는 일체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을 증거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피 만을 증거 해야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야 약속된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것이 그럴싸한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이 가운데는 없지만 다른 곳에는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럴 듯 하다고 하지만 이 레위기가 출애굽기 신명기와 함께 있는가 하면 이게 그럴 듯 한 것이 아니고 그때 그 당시는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그때에 다른 향로 불을 갖다 바치면 불길이 자동적으로 살아서 거룩한 제사장을 옷만 태우는 것이 아니라 홀라당 온 몸을 다 태워서 바비큐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로, 십자가의 거룩한 피로 거룩한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는 이 말이 황당한 것이 아니라 실제상황인 것은 고라 자손들이 모세에게 대들 때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고라 자손의 가족들이 땅속으로 빠져들었고 분향하던 250명은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염병이 돌아서 14700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고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지금도 실제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실제 상황이었으면 죽었던 예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실제상황이 있습니까? 어느 인간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였습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부활하셨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통해서 얼마나 자기를 반성하고 도 닦고 자기 점검하고 자기를 훌륭하게 하고 자기의 인격을 쌓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이 오직 피 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믿습니다. 믿지를 않습니다. 왜 안 믿는가 하면 아직도 자기가 반성기능 이성적으로 자기가 착해질 수 있다는 반성 기능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습니다. 육적입니다.
여기 교재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가 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하여 물세례를 준 것입니다.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물세례 받았다고 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기껏 해보아야 물세례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것은 바람같이 오는 것이기에 바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관리대상도 아닙니다. 바람이 우리를 몰아치지 우리가 바람을 몰아치지 않습니다. 바람이 우리를 주장하는 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사람이 기껏 해보아야 물세례밖에 되지 않습니다. 요한의 세례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일단 물세례를 받고 성령세례를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세례 백날 받아도 그것이 성령세례를 받는 동기를 유발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세례를 받는 것은 너는 죽어도 사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물세례 받는 다고 성령세례가 세트로 따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간다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을 설명하려면 처음에 아담과 하와 사이를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을 만들어 놓고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한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한 몸이라는 것도 개념이 확립이 안 됩니다. 한 몸이기에 한 육체라고 오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을 만들어 놓고 이제는 한 몸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한 몸이 갖고 있는 그 능력은 그 몸이 둘이든 셋이든 한 몸 되게 하는 능력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논리가 어렵습니다. 몸을 한 몸 되게 하는 원리는 두 사람이든 몇 사람이든 인류의 수자와 관계없고 그들 관계를 이어주는 어떤 능력에 의하여 몇 명이 되든지 그것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에베소 3장에 나와 있지요! 교인을 그리스도의 한 지체요 한 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려면 로마서 6장을 설명해야 하지만 그 전에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라는 것이 먼저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한 몸이 되려면 같이 붙어 다녀야 합니다. 한 사람은 공부하고 있고 한 사람은 티브이 보고 있으면 몸이 따로따로입니다. 그러니 한 몸이 될 수 없잖아요! 박주영 슛 골인 하는데 부인은 드라마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입니다.
신혼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깨어나서 물어봅니다. 너 어제 밤에 무슨 꿈꾸었어?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딴 꿈꾸었다면 혼나는 것입니다. 그때는 거짓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밤에 너의 꿈을 꾸었어! 계속 네가 나의 꿈에 들어오더라고 알랑방귀를 뀌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그랬어! 그러지만 며칠 가지 않습니다. 꿈은 각자 꾸는 것입니다.
한 몸이기 위해서 굳이 노력을 하지만 나와 타인과는 한 몸이 안 됩니다. 그러나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노력하는가 하면 두 자로 말합니다. 규칙 부부 십계명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이런 법을 지키면 너와 내가 한 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법을 지켜보세요! 남편과 아내가 있을 때에 아내가 요구하는 법을 남편이 다 지켜보세요! 그러면 아내가 비로소 가까이 오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 지키면 또 멀리 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요구하는 것을 아내가 다 지켜본들 남편이 흡족해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데 왜냐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찾아서 목표로 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의 특징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8시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8시에 들어오면 아내는 그것을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8시까지 온 것은 일단 욕망이 만족되지만 그러나 새로운 욕망을 또 만드는 것입니다. 욕망이 없어지면 사람이 못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욕망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욕망거리가 생기게 되니 결핍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자라게 만들어서 그것을 또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새로운 나가 없으면 현재 내가 사는 보람이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나를 머리 속에서 상상해 주어야 지금의 나가 목표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그 목표에 맞추어나가기 위해서 살아갈 때 삶의 의욕이 생기고 보람을 느끼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맞추어도 소용이 없고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맞추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존교회에 앉아있는데 만약에 어떤 약간 미친 사람이 이곳에 교회가 없으니 교회를 지으라고 한 10억을 주었다면 교인들이 얼마나 환영을 하겠습니까? 아멘! 할렐루야! 난리가 날 것입니다. 드디어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구나 하면서 찬송을 부르며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10억짜리 예배당을 지었다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 만족도 한 6개월 가면 훌륭한 사람입니다. 보통 6개월을 안 갑니다. 한 1~2개월 가면 그 예배당도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또 새로운 욕망을 창출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또 한 20억 주는 사람이 없나? 혹시 누가 또 주어서 옆의 주차장 확보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족하십니까?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나를 포기한다. 인간으로서 가당치도 않은 발상입니다. 절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욕망을 벗어나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처음 인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처음 인간은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더불어 있는 속에서 나라는 것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내와 더불어 있음으로서 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이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이 남이 아니라 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떠냐 하면, 아내는 남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러므로 남인 아내와 나와 가까이 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지 어떤 문제로 아내가 삐져서 아내 속에서 엉뚱하게 다른 소리가 나오면서 갈라서자고 나오면 후딱 갈라서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됐다고 하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내와 남편이 하나가 되기가 힘든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안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되겠다는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따라 붙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가상합니다마는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는 말씀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예수님은 영원한 타인이고 나는 여전히 나인 것입니다. 그 갭은 영원히 갈라지는 것입니다.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내 쪽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겠다는 발상은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실망감만 더 많아질 뿐 아니라 잘 안되니까 주님에 대한 원망감과 복수심이 많아집니다. 어떤 인간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 둘째시간 여기까지 결론을 맺어보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제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면 할수록 속에 무엇만 증가 되는가 하면 반발심과 적개심만 증거 된다는 것이 육적인 인간들의 공통적인 본심입니다. 이것을 인정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디에 있는지 요한복음 7:19-20절을 봅시다.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마지막 20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습니다. 예수님이 자살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죽였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라 전 민중이 들고 일어나서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육적인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속의 품성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보려 애쓰는 마음이 우리 속에 넘치지 우리가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가 자기의 육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친절하시 게도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더 살게 하셔서 우리 속에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있음을 노출시키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비로소 우리 속에 주님을 싫어하는 반발심과 적개심과 미워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눈뜨게 됩니다. 내 속에 예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눈떠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마을에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눈 뜬 몇 사람이 있어요! 아이고! 무섭더라니까! 진작 노골적으로 그렇게 해야지 ᄒᄒᄒ
결국 그들이 내 뱉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을 믿고자 열심히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열심히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니 열심히 사랑하고자 했지만 도대체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안 믿고 싶은데 어쩌란 말이냐?
그런데 내가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지옥 보낼 거냐? 보내려면 보내라는 식의 담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신학공부하고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실컷 해놓고 해볼 테면 해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망가지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한 둘이 아닙니다. 분위기가 그렇게 가서 짐작이 가는데 며칠 뒤에 보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또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도 사이비다. 이근호도 사이비다. 그러므로 다 사이비다. 그러니 예수님만 믿자. 그러면 좀더 기다려 보자는 것입니다. 좀더 기다려 보면 예수님도 사이비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적개심을 안 일으키려고 해도 주님께서 일부러 적개심이 일어날 만한 사건을 조작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만들어 냄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이런 판국에서 주님을 원망하는 것은 주님도 아마 이해하실 걸! 주님도 아마 기대했을 걸! 라는 쪽으로 결론 맺을 정도로 우리는 정말 답답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이렇게 이야기 하니 아까 삼식이 삼순이 오천만원 찢는 것이 기억나십니까? 육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피를 흘렸습니다. 이 피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과 구원의 효력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 육으로 하여금 철저하게 교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예수님이 안 죽을 만큼 이 세상에서 건전하고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때 간음했든 간음하지 않았든 그 후대 태어난 사람조차도 나는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습니다하고 발을 뺄 수 있는 그런 자격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그 피는 레위기의 모세 언약에 의해서 피는 어떤 죄인도 용서가 가능한 피 인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 하십니다. 어떤 죄인도,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돌 던 지자는 자들에게 저들이 하는 짓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모르고 저렇게 합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스데반은 그동안 주님 섬기려고 애 많이 썼습니다.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쪽에서 다가서려고 하였는데 드디어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구나!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냥 자기 일을 하실 뿐입니다. 피를 흘리시고 그 피를 적용시키는 이 영적인 일을 할 뿐입니다.
이것은 바람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바람이 불겠다는데 바람을 막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께서 바람을 불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가 육인 것을 더욱더 절절하게 확인하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무슨 관계냐 하면 그런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 하겠습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사랑이 무어야 하면 사랑하시는 분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사랑 받은 대상의 것으로 넘겨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능력이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 것을 그 사람에게 주어서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연합된다.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의 것은 일체 남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이 준 것, 예수님이 준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잘못생각하고 오해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예수님이 바르게 사니까, 주님께서는 사랑의 은사를 가지고 예수님의 바르게 사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넘겨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바르게 사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다 된다고 여기는 것은 사랑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사랑은 기술이 아닙니다. 사랑은 용서 해주심입니다. 용서 해 주심과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과는 영 다릅니다. 공장에서 공장장이 직원에게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딴 이야기입니다.
치과의사가 아내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번 것을 아내에게 다 주면서 이것은 내가 번 것이지만 당신거야! 하면서 넘겨주면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보 이리와! 당신 전공이 무어냐? 무용입니다. 이제 그것 집어치우고 치과기술 배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기능과 기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 혼자 벌면 되지 내까지 해야 되느냐고 물으면, 남편이 지금까지 내 혼자서 많이 했고 이제는 힘이 들어서 못하겠으니 같이 벌자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사랑의 힘이 중간에 쇠약해지고 미약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다가 사랑하다가 이제는 힘이 빠져서 더 못하겠으니 너 스스로 자립하라는 소리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무어냐 하면 상대방의 능력을 아예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네가 할 수 있기는 무얼 할 수 있어 내가 다 할게!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 기술이나 능력을 가르쳐주어 자립하게 하는 주님이 아닙니다.
이게 성경에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세리와 창기 이야기도 나오지만 강도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강도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 함께 묶어지는 힘은 주님의 세례, 주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럴 때 강도가
예수님
왜
낙원에 어떻게 갑니까? 그 가는 길을 좀 가르쳐 주세요
너는 몰라도 돼!
아닙니다. 저도 스스로 한번 가보렵니다. 일단 죽고 나서 저승길이 나올 것인데 여러 가지 길 중에 어디로 갈까요? 몇 번 버스타고 갈까요? 오른쪽으로 갈까요? 왼쪽으로 갈까요?
이런 질문은 일체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도가 압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강도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천당 가느냐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왜 그것을 물으면 그것을 찾기 위해 성경을 들여다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수상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사랑을 과연 아는지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천당 가는 길을 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물으려면 길가다가 나무아미타불하는 도사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길을 목사에게 물으면 진짜 목사는 모른다고 하고 가짜 목사는 알려줍니다. 십일조 하고 금식기도 하시고 봉사하시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인데 그러나 남편이 없이 홀로된 여자는 물어도 됩니다.
왜? 남편이 없으니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홀로라도 이 세상에 버텨야 되는 것이기에 벌어야 되고 무언가 기술이라도 하나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정신을 지금 어디에 팔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 남편이 사랑 안 해주던가요? 안 해주던데요! 그러면 혼자 살든지 이혼해야지요! 남편이 사랑 해 주던가요? 사랑 해 주던데요! 그러면 본인은 집에서 남편의 사랑이나 받으세요!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이것이 바로 아담을 먼저 만들고 나서 여자를 만들어서 두 사람이 이미 한 몸 되게 해 버린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보고 우리가 한 몸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자는 것은 이미 영원한 타인이라는 말입니다.
노력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 당신 누구세요? 나는 남편, 나는 여자 와~ 한 몸이구나!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우리가 열심히 한번 살아봅시다.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무얼 열심히 살아봅니까? 무얼? 열심히 살아본다고 더 나아지거나 바뀝니까? 한 몸이!
지금 창세기 2장의 경우가 예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그대로 재현이 됩니다. 성령을 받는 사람의 특징, 강도 같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더 이상 천국 가는 길을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천 년 전에 먼저 오셔서 내가 당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그 남편 하나 잘 둔 덕분에 이 천년 후에 태어난 내가 하나의 신부로서 뽑혀서 그 덕분에 남편의 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서 지금 나는 그 나라에 가고 있는 중이다.
다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 힘으로 왜 안 되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추악함과 나의 육 됨과 내 속에 평소에 있는 육적인 요소로 인하여 주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이 이 정도로 우글 거리구나! 하는 것을 줄을 때 까지 확인하고 확인 하면서 이러니 남편이 최고지!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생애입니다.
한 십분 쉽시다.
녹취 051105 이장우
구원론 중 회개 1-3 05. 7. 11 강의 이근호목사
고린도후서 4:3-4절을 봅니다. 오늘 강의가 어려운 것이 많아서 먼저 정리 해드리고자 합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의아해 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빛이 번쩍 났습니까? 갑자기 눈이 훤하게 밝아졌습니까? 갑자기 형광들이 더 밝아지고 그랬습니까? 없잖아요!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굉장히 난해한 말인데 망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도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듣게 되면 무엇을 보는가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복음의 광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갑자가 환한 빛을 본 것처럼 세상이 훤하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망하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 그게 무어냐? 아이고 시시해라 잠만 온다. 나에게는 하나도 기쁘지 않네! 치워라! 치워라! 이런 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하면, 실제로 예수를 믿고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번쩍한 것입니다. 옛날에 사진 찍을 때에 펑하고 터지는 것입니다. 여기 어린이들을 몰라요! 여기 이천우 목사님은 그런 것 다 아시지요! 8월의 크리스마스 하는 영화에 보면 나오지요! 사진관에서...
그 영광의 광채가 여러분에게 실제로 비췄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나 어디에나 간에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지요! 아~ 나는 예수님의 복음 들어도 광채가 별로 안 비취던데 그러면 나는 망해야 되는 인간인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그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방금 보았던 고린도후서 4장과 처음에 보았던 출애굽기 7장 8장 9장 기억나십니까? 바로 왕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강퍅케 하심으로 바로 왕이 여호와를 모독하고 동시에 애굽에 있던 장자와 짐승들이 다 죽어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방금 읽은 말씀도 보시면 망하는 사람이 나오고 그 맞은편에 누가 나옵니까? 망하지 않고 복음의 광채가 비취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서 하시는 것처럼 기억나십니까?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애굽의 가축은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망하는 자들과 망하지 않는 자들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망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가 하면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도 별로 빛이 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시시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육적인 요소가 예수를 믿는 다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있습니다.
사람들이 목사님 왜 나는 복음을 들어도 눈이 번쩍 뜨이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묻는 이유가 그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 되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우리가 중립지역에 있었는데 망하는 쪽으로 가든지 망하지 않는 쪽으로 가든지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잘 못입니다. 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늘 회개라는 강의를 하였는데 회개라고 할 때에 우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망하는 사람에게 한 통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까 두 시간이나 강의를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에 애굽의 가축들은 다 죽는데 자기 가축들은 안 죽잖아요? 그것을 보고 굉장히 신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은 대단히 신기한 것입니다. 그 구원이 신기하고 놀랍다고 할 때에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에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제가 왜 이렇게 강조하는가 하면, 교회 다니고 복음 들으면 목사님이야 의례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나도 다 아는 것이고 들은풍월이 있는데 그게 뭐 신기한 것이냐 다 똑같은 것이지 다 안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하지 못하고 즐거움으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광채가 비치는 것을 망하는 쪽에서 보면 이것이 굉장히 신기하고 낯설고 예상 밖의 놀라운 일로 늘 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사람들의 부부사이가 안 좋은데 제 아내와 드라마를 보면서 왜 저렇게 부부 사이에 안 좋은가 하면서 제가 제안하기를 남편이 아내에게 매일 마다 프러포즈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생각이 아주 좋겠어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묻는 것입니다.
여보! 나와 결혼해줄래?
그러면 내 시키는 대로 다 해줄래?
그럼 나와 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해줄게
그 다음날 또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여보! 오늘도 나와 함께 살아줄래?
그러면 손에 물 안 묻히도록 해줄래?
그럼 나와 살아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게
매일 아침 이렇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꽃 한 송이 준다면 부부사이가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가상으로 한번 지어내어 보았습니다. 시답잖은 것을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만약 경상도 남자에게 이런 이야기 했다면 이것이 미쳤나 지금까지 살아준 은혜도 모르고 배 불러가지고,,,,,
주님께서는 영광의 광채를 매일같이 비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시답잖게 보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시답잖게, 제가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취지가 이것입니다.
교회에 주일날 와가지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교회 문만 열고 나가면 복음의 광채고 무엇이고 다 치워버리고 운전하면서 이게 어디서 끼어들고 하면서 욕하고 난리입니다. 갑자가 교회 안에서 있던 복음의 광채는 다 날아 가버리고 없는 것입니다.
시내산이고 뭐고 다 날아 가버리고 이 땅은 시내산 밑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전혀 복음과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또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 오게 하셔서 또다시 야~ 이런 놀라운 복음을, 세상에 이런 광채가, 내가 지금 하늘나라에 살고 있구나! 또다시 생소하고 신기한 빛을 비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어냐? 회개생활입니다. 이것이 회개생활입니다. 이 회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예수 안 믿는 보통사람의 사고방식에 익숙해 졌다는 것을 주께서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둘 다를 포함한 인생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지금 현 신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는가 하면, 고린도후서 4:3-4절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둘 다를 우리 내부에서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잘 들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착각하기를 목사님 저 예수 믿었습니다. 저 복음의 광채를 압니다. 이제 바리새인에게 해당되는 성경 귀 절을 저에게 해당시키지 마세요! 나는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새사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망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사람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천당 갑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보면 목회자에 당부라든가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술에 인 박이지 않는 자를 집사로 세워라 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에 나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나쁜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고 나는 이제 새 사람 되었으니 내 안에 성경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 사람 이단 됩니다. 자기 주제를 몰라요! 그들은 복음의 광채가 없어져 버립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복음의 광채가 없어지고 당연하고 다 아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 오면 김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 복음에 대하여 감탄을 하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감격하면서 세상에 저런 용서와 저런 사랑이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아야 하는데, 또 지식을 말해보세요! 또 지식을 하나 첨가해봐! 오늘 또 많은 지식을 얻었네! 이 지식 하나 써 먹을까! 이런 식으로 나가시면 나중에 목사님이 설교하기가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교인들에게 지식을 전하고 못 따라오도록 도망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설교시간에 신학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설교를 해야 할 시간에 신학 강의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빌립보서를 설교한다면 빌립보서 저자의 문제, 빌립보서 해석학의 문제, 고등비평, 저등비평, 이 문제는 F.F 부르스가 어떻고 하면서 신학강의를 해 버림으로 그 현장이 놀랍고 은혜로운 기쁨의 자리가 아니고 목사와 교인끼리 누가 신학을 많이 했는지 한번 붙어봐! 너 나 따라 올수 있어 그렇다면 한 번 해봐! 하는 식의 신학을 경쟁하는 전쟁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님 말하는 그것 F.F 부르스 하는 그 사람의 책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습니까? 단번에 가서 사서 공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목사님 지나 번에 이야기 한 F.F 부르스의 이야기 중에 요 부분은 좀 틀린 것인데요. 하면서 교회가 무슨 지식 경쟁 장으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런 강의하기를 잘했다 싶은데 그것은 목사 너만 거듭났냐? 나는 거듭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박옥수 구원파는 회개 한번으로 끝나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회개란 매일같이 되풀이되어야 할 회개인데 처음 믿을 때에 한번 회개하고 손 털어버린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너만 거듭났느냐? 나도 거듭났다! 너만 신학 하냐? 나도 아무추어지만 나도 프로처럼 신학 한다! 하면서 신학 따라 부치고 목사는 내빼기 바쁘고 둘이 달리기 하는 것입니까? 그런 설교를 하면서 어이구! 그런 곳에는 환희도 없고 행복도 없고 감탄도 없고 감사도 안 나오고 기쁨도 없고 자유함도 없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란 것은 다시 정리합니다. 내 몸속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데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어린이도 잘 들으세요! 성경에서 나오는 나쁜 사람과 나쁜 짓도 내 안에서 다 일으키게 하고, 성경 말씀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이 내 이야기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나쁜 것도 내 속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특징은 나쁜 것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예수님의 피의 사랑, 무조건 용서하심도 일으켜서,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두개를 대비하고 비교함으로써 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은 그 환희와 기쁨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시는 방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성경에 나오는 명령법들이 많지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먹는 것 입는 것인 줄 있다면 족한 줄 알라.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는 자들아 너희는 안개니라. 부한 자들은 울어라. 너는 이미 배불렀다. 가난한 자들아 웃으라. 너는 복 받은 자들이다.
어떤 사람이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어라. 넓을 길로 가지 말고 좁을 길로 가라. 남을 비판하기 전에 네 눈의 들보를 빼어라. 이런 명령들, 이런 숱한 말씀들이 나올 때에 여러분들이 그런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마세요! 또 안 지키려고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지키든 안지키든 간에 그 말씀 그대로를 누가 지키느냐? 주님께서 그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의 내부에 들어오셔서 실행시키십니다. 오늘 이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것이 믿어져야 신자입니다. 내가 내 앞에 있는 말씀을 지켜야하는 것이거나 지키기 싫다고 안 지키려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키기 싫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말씀을 폭발 시키고 있는 그러한 증거가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을 성취하는 주도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쥐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재수 좋게 주님의 수하에 말려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말씀으로 쥐시고는 물에도 집어넣고 불에도 집어넣으며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눈 감고 성경 아무 곳이나 찾아봅시다. 여러분도 매일 성경을 보시지 않습니까?
눈감고 펼쳐보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을 우리보고 지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키시는 것입니까? 믿음의 수고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수시로 우리에게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하고? 우리는 망하는 사람입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복음 같은 소리하네! 우리에게는 복음이 늘 시시한 것입니다.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방금 본 데살로니가전서 1:3절의 말씀이 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속에 침투하여 이 말씀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입니다.
술집에 갔다. 술을 마셨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아 술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며칠 전에 들은 설교말씀이 기억이 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에베소서의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그 말씀이 생각나는가?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가? 그럴 때에 술 취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구나! 술 취하면 비틀거리는데 그런 영광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런 광채는 없지요! 그러므로 술 마시는 이유는 내 마음풀기 위해서 무언가 막힌 것이 있어서 술로 한 벌 풀어보려고 했는데 그것이 합당하냐 아니냐를 따지게 하시는 그 능력자가 누구신가 하면 내 속에 계신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따질 때에 이것이 말씀대로 맞는지 아닌지를 따질 때에 첫 시간에 한 나의 이성과 반성의 기능으로 한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지요! 그런데 신자는 무엇이 믿어지는가 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을 집어넣으시고 나보고 회개하라고, 네가 맞는지 아닌지 검토하라고 주신 말씀임이 믿어질 때에 그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주님께서 내 속에서 활동시키고 있다는 것이 믿어짐으로 그것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배를 째보면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주님이 들어있지요! 그것이 연합이요! 세례요! 그것이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니 술집에 갈 때에 자기는 혼자 술집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말씀을 가지고 따라와 가지고 너는 너 함 몸이 아니고 나와 같이 붙어 있는 내 몸이야! 라고 확인 시킬 때에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부모가 아이를 팹니다. 공부 안한다고 막 팰 때에 갑자기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설교를 통하여 들었는데 그런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아이를 패다가 왜 내가 아이를 팰까? 왜 패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지? 내가 자녀를 훈육 한다는 그 핑계로 내가 성질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냥 반성으로 그치면 불신자이지만, 아하! 주님께서 나와 한 몸이 되어서 지금 주님의 몸으로서 사용하는구나 하는 것이 믿어질 때에, 그 사람이 때리고 아니 때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집에 갔다. 오늘 이근호 목사에게 들었다. 술집에 가서 술을 먹는데 이쯤 되면 반성할 기미가 와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에베소서 5장의 말씀이 생각이 나야하는데 5장은커녕 아무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마시세요! 쓸데없이 믿어지지 않는 것을 누가 믿음이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 하니까 그것을 폼 나게 흉내 내지 마시고 그냥 자연스럽게 사시면 신자는 자연스럽게 복음의 광채로서 환희와 기쁨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머! 신기하게도, 어머! 놀라워라! 이런 감탄사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 있고, 가짜 신자는 억지로 성경을 찾아가면서 에베소서 5장을 찾아서 믿음생활 잘해보려는 것은 본인 생각이고 이런 것은 억지가 되고 웃기는 이야기며 피곤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항상 우발적으로 예상치도 못하게 갑자기 그런 믿음이 생길까? 이렇게 우발적으로 생겨야 하는데, 또 한 가지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하면 주의 할 것이 많습니다. 방금 제가 술집에 간 이야기를 하였는데 술집에 안가고 고아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봉사활동을 할 때에 갑자기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봉사할 때에 주의해라 봉사하는 것이 착한 줄로 생각하느냐? 주님께서 하게 하신 것이지 네가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에,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지? 신기하고 놀라워라!
평소에 내가 힘들여 땀 흘려 봉사활동을 하면 하나님보시기에 착하게 보시겠지! 이런 생각이 들어야 정상인데
왜 내가 갑자기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구나!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지? 아! 주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달으라고 봉사하게 하시는 구나! 이렇게 되면 됩니다.
그런데 방금 이런 이야기 하였다고 고아원에 찾아가서 시계 봐가면서 이쯤 되면 네가 봉사하는 것이 네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전혀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봉사하세요!
그러므로 제가 하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중국소설 같은 이야기인데요. 신자는 그때그때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 술집에 가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술집에 가든 고아원에 가서 착한 일을 하든, 교회에 오던 교회 안가고 집에서 누워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애굽 짐승은 죽이시고 이스라엘의 짐승은 살리시는 그 모든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다? 주님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환희와 기쁨으로 놀랍게도 그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주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이 놀랍게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방금한 이야기가 얼마나 영적인 것입니까? 육적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을 맺고 마치겠습니다. 회개란 무엇인가? 반성은 아닙니다. 반성은 육적인 사람도 양심이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반성을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영적인 세계가 육적인 자기 백성을 끄집어 낼 때에 세상과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냥 홀로 있고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말씀대로 그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것이 왜 회개입니까?
그것이 회개가 되는 이유는,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작용하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육적인 사람이고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눈뜨고 성경 어느 부분을 보아도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히브리서 11장 같은 것을 보면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며 슬픔과 배고픔과 몸이 톱으로 켜이는 것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그런 말씀을 볼 때에 우리는 부끄럽습니다. 그런 말씀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지만 다시 성경을 보니 예수님의 피로서,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졌다는 그 환희, 그 안도감, 그 사랑과 용서 이것이 더불어서 우리 속에서 대비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어지고 그것이 느껴질 때에 그것이 바로 회개며 믿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스스로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이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면 기껏 해보았자 반성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성경말씀이 들어온다든지, 난데없이 내가 죽을죄인 이라든지, 난데없이 내 안에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 지신다면 그것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말씀이 우리 속에서 들리게 하려면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는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나가서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들어야 에베소서 5장의 술 취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을 들은풍월이 있어야 그때그때 마다 나올게 아닙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교회에 올 때에 내 힘으로 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신자는 교회 와서 생각하기를 내가 내 힘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구나! 하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나타날 때에 그 사람은 설교듣기 이전에 이미신자의 모습을 뛰면서 말씀을 듣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를 마치면서 제 마음의 답답한 것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답답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시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는 말씀을 못 드리게 된 것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은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데 건방지게 제 삼자인 제가 여러분의 영혼을 향하여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할 자격자가 못 됩니다. 그 점을 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떡이나 먹고 빵이나 먹겠는데 여러분이 어떻게 믿을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루실 그 문제이지 제가 협조 공문을 보낸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제가 당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지 어느 장소에 있던지 주님의 은혜를 하나의 반짝반짝 하는 별처럼 그 은혜를 보여줄 수 있는 의존교회 성도님과 저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부러 회개한다는 것이 큰 잘못임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회개케 하신다는 것이 이제 정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말씀이 우리 속에 역사하여 데려갈 자를 데려가시고 버려 둘 자를 버려두시는 예상 밖의 그 놀라운 작업에 대하여 우리가 환성과 환희와 감사와 기쁨을 주님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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