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계시론 1-1
04. 10. 25 강의 이근호 목사
별고 없으시죠?
지난 시간에 서론 이야기 하였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강의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들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자꾸 발산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플라톤이라는 사람은 이것을 태양에 비유하였습니다.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태양에 비유하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되겠지요!
태양이라는 것이 너 거기에 있어! 우리 여기에 있어! 이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태양과 우리사이에 있는 그 중간을 누가 메워 주는가 하면, 태양이 메워 주는 것입니다. 여기 태양이 있고 우리가 지구 땅 여기에 있다면(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림을 상상하면서 읽으시기를-녹취자 주), 우리가 폴짝폴짝 뛴다고 해서 거리가 매워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너는 너고 나는 나고 하는 식으로 따로 분리되는 것도 아니고, 태양 쪽에서 무언가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플라톤이라는 사람은 신의 계시를 태양에 비유한 것입니다. 뭐 적절한 비유이지요! 이런 것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애굽이 나오는데 애굽이 중점적으로 핵심적으로 믿던 신이 무슨 신이냐 하면 바로 태양신입니다.
그리고 16세기에 멕시코의 원주민들이 믿던 신도 태양신이고 아마 태양신의 가장 원조가 이집트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서 해가 어두워지는 사흘 동안 깜깜한 그런 재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생각하면 해가 어두워지면 전깃불 켜면 되지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 하면 자기들의 신이 사라진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우리가 흔히 놓치기 쉬운 대목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과 그들의 신들을 치시리라는 것입니다. 신들을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들을 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신들을 친다는 것이 바로 열 가지 재앙들입니다. 태양을 어떻게 한다는 것도 그들의 신에 대한 공박입니다.
태양이 인간에게 무엇을 줍니까? 빛과 열기와 밝음을 줍니다. 그런데 이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이 태양의 자리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하면 신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신이 태양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계시를 비추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에게서 모든 것이 방출되기에 계시의 내용도 무엇이 되는가 하면, 신의 속성이 되겠지요! 신의 자기 발산이기에! 그런데 신의 속성이 인간에게 도달하기에, 인간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여러분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보면서 기본적으로 아셔야 할 것은 신은 그 스스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발산하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마구 마구 발산하기에 인간이 가만히 있어도 신에 대하여 알게 되어있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인 것입니다.
충분히 납득이 되지요! 태양이 아침에 따갑게 비취듯이 가만히 있어도 신은 자신이 신이라고 발산하게 되어있고 우리에게 도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가 하면, 신의 말을 흡수하여 해석해내는 장치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이성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을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신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플라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플라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에서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감을 잡겠지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신의 형상이 하는 기능이 무엇이라고요? 신은 자신의 계시를 발산하기 위하여 환장을 하는데 그 환장한 계시를 인간이 접수하는 창구가 무엇이라고요? 신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신의 형상에는 무엇이 소복이 담기겠습니까? 신이 내려주신 속성과 신의 뜻이 소복이 담기겠지요! 담기게 되면 이것이 자기의 소유화가 됩니다. 자기 것이 됩니다. 많이 담긴 사람은 그만큼 신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고 비록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조금밖에 모르면 격차가 생기겠지요! 그러니 이 세상에는 신의 속성, 신의 형상을 얼마나 많이 발현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계급적이 격차 및 인품이 차등난다. 라고 그 당시 인간의 차등성을 설명한 사람이 플라톤이었습니다.
왜 사람마다 인간성이 다른가?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누가 더 신의 속성을 많이 흡수하여 빨아 당기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의 목사들이 설교를 하면 교회 온 교인들이 은근히 화가 나지요! 어떤 점에서 화가 납니까? (자신이 신의 속성이 적다는 생각에서) 목사님! 그러면 제가 신의 속성을 많이 가지기 위하여 제 쪽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여야 합니까?
당연히 나오는 발언이지요! 내가 신의 속성을 많이 빨아 당기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면 됩니까? 여기에서 플라톤은 신의 속성에 대하여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상하다! 그것은 신학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인데 이럴 것입니다. 세 가지 인데 하나는 지, 두 번째는 정, 세 번째는 의입니다. 지정의라는 말입니다.
지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확보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적으로, 그 다음에 정이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기도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움직이는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다 있는데 누가 더 그 기능을 잘 발회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품과 인격, 사람 됨됨이가 차등이 나더라고 플라톤이 이야기 한거죠!
흔히 복음을 전하는 교회 좀 다녀가지고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을 좀 비판적으로 말하면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박을 합니다. 너는 어떻게 지식적으로만 알고, 그 복음, 복음 이야기 하는 그 교회에는 사람을 지식적으로만 가르치고 기도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기도도 안하고, 전도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전도도 안하고, 그러니 지만 있고 정도 없고 의도 없다고 되레 반박을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교회는 지정의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었기에 오히려 우리교회가 던 건전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하는 지식적인 교인이 되면 무엇을 하느냐? 가슴이 뜨거워야 하고 손과 발, 팔과 다리가 움직여서 한 시간이라도 전도하고 봉사하려는 그 의지력이 있을 때에 이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 것이라고 나는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잘 배웠다!
그래서 부흥회 할 때에도 부흥사가 이런 소리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치우친 설교는 하지 않습니다.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성도가 되기 위하여 부흥회 합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듣는 내용은 신학교 3년 듣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시작을 합니다.
치우치지 않는 것, 흔히 나오는 이야기가 수레바퀴가 어떠니, 동전에는 양면이 어떠니 하는데 그런 것들이 전부다 엉터리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지정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계시론의 문제점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까지만 도달되고 그 이후 인간에 대하여서는 그 나머지기에 대하여서는 하나님이 관여합니까? 안 합니까?
관여를 못합니다. 어지까지만 한다고요? 신이 자기의 뜻을 알려주는 여기까지만 하고 나머지기 자기 문제는 일단 자기 소유화된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니 얼마나 이것을 개발하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니 여기서는 신이 더 이상 개입하거나 관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이것을 발휘할 가능성만 남은 것입니다. 누구의 가능성입니까? 개인적인 개별적인 사적인 가능성만 발휘될 뿐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침례교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빠짐없이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지옥가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은, 그런 십자가를 본인이 자유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결정을 잘못 내린 결과로서 지옥에 가는 것이지 처음부터 지옥 가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시는 그런 냉혹하고 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십자가 지는 것 까지만 예수님이 하시고, 그 십자가 지신 것에 대하여서는 지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적으로 처리해서 그 다음에 신에게 영광 돌리고 봉사하는 이런 문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에 따른 것이라고 침례교회 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침례교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하여 책임을 묻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입니다. 자기애들을 나무라면서 야! 이리와! 제자리 앉아! 하면서 크게 나무라면서 하는 말이 왜 태양은 저녁이 되면 지는가? 너 책임져! 태양 지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아이가 엄마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지요! 내 책임도 아닌데 왜 나무라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 했을 경우에 이것은 내 책임 하에 불신을 하였다든지 잘못하였다면 그때야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이란 반드시 인간에게 책임을 묻고자 심판하는 것인데 인간이 책임도 없는 것에 대하여서는 심판이 안 되니 일단 인간에게는 무언가 책임져야 할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책임질 일이 있다 없다고 하려면 인간에게는 반드시 자유의사가 밑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자유의지가 허용이 되어야지 로봇처럼 강압적으로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에게 채임을 묻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T.V 안 나온다고 T.V를 발로 차는 사람이 있는데 T.V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T.V는 켜는 대로 나오고 노후 되면 안 나오게 되어 있는데 T.V보고 이 놈이 지옥가라는 말이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인간보고 자유의지도 안 주고 지옥가라면 말이 안 되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고 책임이 따라야 심판을 행사 할 수 있다는 이런 논조입니다. 그러면 자유의지가 있으려면 이 자유의지는 완전히 자유로워야지요! 자유의지가 무엇입니까? 자유+의지 아닙니까? 그러니 반드시 자유가 허용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하여 속박안함. 이런 조건이 허용될 때만 그것이 자유인 것입니다. 그러니 외부에서 터치안함, 외부에서 일체 그 사람에게 관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허용됨, 아니 허용 됐다는 말도 잘 못된 것입니다. 자유 앞에서는 법이 없어야하는 것입니다. 법을 만드는 자가 본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주장의 허점이 무엇입니까? 자유가 있다고 해 놓고서 법은 어디서 주어진다? 신으로부터 주어진다고 하니 이것이 자유입니까? 법을 만들어도 자기가 지킬 법을 자기가 만들면 좋아요! 그런데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법을 만들어 놓았을 때에 그리고 그것을 지키라고 할 때에 그것이 자유입니까? 그것은 자유가 아니잖아요! 이미 법이 만들어졌음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모든 행동의 범주를 확증 짓는 것입니다.
네가 이 선 밖으로 나가면 안돼! 나가면 어떤데? 나가면 법에 어긋난 거야! 그러니 이것은 이미 확정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려워서 어떤 신학교수는 이런 예를 듭니다. 오스카 쿨만 같은 교수는 그런 예를 들었는데 인간의 자유가 있는데 그 자유가 무엇인가 하면, 개를 말뚝에 묶는데 행동할 수 있는 반경 5미터의 줄로 묶어두는 것을 인간의 자유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입니까? 개한테 물어보세요! 자유란 이 말뚝이 뽑혀야합니다. 말뚝이 뽑혀서 자기 마음대로 해야 그것이 자유입니다. 말뚝에 묶여 있는데 그것이 무슨 자유입니까? 자유라는 것은 경계선이 없어야 합니다. 이런 개처럼 묶여 있다는 것, 범주가 있다는 것을 속박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미 자유에서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침례교에서는 법이란 하늘에서 오고 그 법에 의하여 심판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설명하기에 이 사람들은 무엇을 거부하는가 하면,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과 지옥 가기로 작정되었다는 예정론을 그들은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침례교도 그렇고 감리교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가 지적한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합니까?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문제까지 거론하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배후의 감추어진 뜻이기에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알바가 아니고 그것 까지는 우리가 몰라도 되고 다만 예수 믿고 천당 가면 그것으로 얻을 것을 다 얻은 것이 아니냐? 그러면 됐지 뭐! 그렇게 심오한 것 까지 알아 챙겨야 돼! 라는 식으로 어물쩍 도망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구원 받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며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까?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분을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 이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아는 그것이 구원입니다(요17:3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관심 없는 사람 그 사람 구원받았다고 말하기에 심히 곤란합니다. 관심사가 하늘나라에 없는데 무슨 하늘나라에 갑니까? 사람이 목욕에 관심이 있어야 목욕탕에 가는 법인데, 목욕탕에 가고 싶지 않은데 뒤에서 수레나 사람이 떠밀어서 들어가는 그런 목욕탕이 어디에 있어요! 말도 안 되잖아요!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런 것이 죄입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알려준 그런 계시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생각하고 납득한 것에만 얽매여 있는, 자기가 자기에게 얽매이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의하여 그것이 죄입니다. (요15: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계시가 무엇인데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화산활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담고 그것을 폭발시키시는 화산활동을 하시는 것입니다. 화산이 이렇게 활동을 하면 마그마가 나오지요! 이 세상의 인간들의 모든 것을 집어넣고 그것을 폭발시키는 것입니다.
심판부터 이야기 해 봅시다. 왜 심판하시는가 하면 개별적인 행동을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영역으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어느 영역에 속하였는가 하는 것을 가지고 따져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 아담 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많은 파생된 뿌리를 다 끊어버리고 소급하여 위로 위로 올라가면 한 사람만 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아담이라는 영역 속에 들어있습니다.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여도 아담의 형상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코가 두개였다면 우리도 두개였을 것입니다. 아담의 코가 하나였기에 우리는 아무리 기도하여도 현재 우리의 코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개를 때로는 갖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날개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조상 아담이 날개가 있었느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날개 있었습니까? 없다는데요! 그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실존의 범주요 한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틀입니다 우리의 틀은 그분처럼 다 짜여있습니다. 그렇게 짜여진 틀 외에 다른 틀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아담 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원죄라고 하는데 원죄라고 하는데 그게 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경 어디에 원죄가 있습니까? 성경에는 죄 밖에 없는데!
원죄라는 말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개별적인 행동에 의하여 심판받는다는 되지도 않은 사고방식입니다.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죄입니다. 개별적인 행동에 따라 벌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 속에 우리가 들어있기에 죄인 된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 엄마의 죄가 우리 아빠의 죄가 우리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자식입니다. 내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교회에서 안 가르칩니다.
왜? 그것을 이야기해버리면 그것이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담 자기 혼자 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에게 묻기를 목사님! 저는 선악과를 따 먹지 않았습니다. 저는 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보았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지도 않은 나에게 왜 정녕 죽으리라고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의 문제보다 네가 선악과 따먹고 싶은 속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선악과는 율법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안 따먹고는 못 배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성과 그 성질을 물려받았다면 오늘 우리는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 거리를 다니고 차를 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낮에 설교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였어요! 우리 자식들한테 좀 미안함 맘을 가져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식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특히 애가 아플 때에 아픈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것입니다. 자식이 대머리가 된다는 것은 내가 대머리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고생이 내 대에서 그치지 않고 애들이 내가 당한 고생을 또 반복해서 지독하게도 당하잖아요!
그 애가 내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미안하고, 두 번째로 늙어서 봉양 받을 생각을 하니 그것이 또 미안하고, 남들처럼 용돈 못 줘서 미안하고, 남들처럼 조기유학 못 보내서 그것도 미안하고, 한두 가지 미안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 하는 것이 뿌리차원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사람들은 뿌리 위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 몸뚱어리 위주로 생각하니까 자기 편한대로 자기 유리한대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그런 방안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든 예수든 전부다 자기를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원죄는 은혜로 처리해 주시고 나머지기 짓는 죄는 내가 알아서 내 착함으로 처리하겠습니다. 하는 차원에서 원죄와 자범죄라는 말을 골라 낸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곁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사님! 노아는 착하지 않습니까? 에녹은 착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모세는 다윗은 위대하지 않습니까? 위대한 소리하고 있네! 전부다 아담 안에 있습니다. 다 쳐내보세요! 다 쳐내면 우리도 결국 잘리겠지만 다 쳐내고 나면 아담과 그 맞은편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나님, 하나님과 아담 그 두 분만 남습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간결합니다. 현재 우리 인생의 문제가 그렇게 간결한 것입니다. 내 앞에 예수님, 예수님 앞에 내, 그것이 전부입니다. 로마서 8:10-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영역의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입니다. 성령이란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보면 성령은 처소개념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이유가 우리에게 처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그 처소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우리가 성령과 더불어 살수 있는 처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우리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게 된 것이 성령이 주어짐으로 된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성령에 의한 일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을 줄거리입니다. 그런 선에서 전개되는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이 예수님을 가지고 일하셨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기록한 것이 바로 누가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누가복음의 후속편이 뭐죠? 사도행전이지요!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차이점이 있어요! 그 차이점이 무언가 하면,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심으로 일하시는데 십자가를 지기 이전까지는 모든 영광을 성령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립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성령이 임하여 모든 행동을 할 때에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는가 하면 주라고 불리는 예수님께 돌립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아버지의 우편에 계시는 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계신 것이 확정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아직 십자가 지기 전이고 부활되기 전이기 때문에 누구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와 예수님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성령세례를 받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역개념이 마태복음에도 있는데 12:28절입니다. 즉 장소와 영역개념입니다. 구원받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는다고요? 장소와 영역에서 구원받는 다는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보시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장소적으로 임하지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된 자가 아까 침례교에서 주장한 것처럼 자기 속에 있는 지정의를 발휘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납득해서 그래서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자신은 어느 영역에 어느 창고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신세가 무슨 신세입니까? 세간신세, 가재도구신세입니다. 가재도구는 누가 외부에서 힘주어 이동시키지 아니하면 저절로 발이 달려서 움직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가재도구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내가 어느 집에 가재도구냐는 것입니다. 내가 마귀집의 가재도구냐 예수님의 집의 가재도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문제란 장소문제이고 영역에 관한 문제이지 개별적인 행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악령의 창고에 갇혀있었고 포로 된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12장의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교인들에게는 납득이 안 되고 먹혀들지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결심여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이 확고한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방금 제가 한 이야기보도 무슨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목사님! 우리의 원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해결되었지요!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가능성으로 날로, 날로 성화되어야 하지요!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날로, 날로 성화되어 갈 수가 있을까요? 그러니 처음에는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조금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 한 십년 믿고 나니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를 좀더 많이 알았으니 그 안만큼 발전되었으니 그만큼 성화된 것이 아니냐? 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왜 바보인가 하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떤 한 지점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전에는 상당히 멀리 있었는데 신앙생활 오래하니 좀더 가까워졌으니 그만큼 진보된 것이 맞잖아!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이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면 이정도면 주님의 사랑을 좀더 많이 알았다고 하는 그 수치에 와보면, 그때 주님의 사랑은 더 저 멀리 가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어느 세월에 주님의 저 많은 사랑을 다 알리! 그래서 좀더 나아갔다고 하는 지점에 가보면 또 저 멀리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한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게 제대로 신앙생활 안했기에 술과 담배만 끊으면 저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였는데 술 담배 끊고 이 정도 왔으니 나도 이제 얼추 성화되었다. 인간이 많이 진보하였다고 와보니, 세상에! 그 시점에서 나로 하여금 철저하게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할 정도로 더 엄청난 주님의 사랑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임이 그 지점에 가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첩된 산이 있는데 이 산의 거리와 뒷산의 거리가 멀리서 보면 약 2킬로쯤 되 보이는데 막상 이 산에 와보지 뒷산과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와 길이가 이정도 알면 얼추 나도 안다고 할 만큼 왔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당신정도면 주님의 사랑을 많이 알았다는 그런 소리를 나에게는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전혀 그럴 인간이 못됩니다. 나는 강도나 창녀보다 더한 인간이지 못한 인간이 아님을 나는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겠습니다. 처음에 교회 온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옵니다. 예수님 제가 학생 때에는 교회에 다녔는데 바쁘다보니 교회 못 왔습니다. 이제 40대가 되어서 왔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죄를 묻지 마시고 제발 복 주셔서 우리 가정 풍비박산 안 되게 하옵소서! 하는 두려움을 갖고 교회에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제대로 신앙생활 해보면 하나님 풍비박산 되어도 좋아요! 당연합니다. 하는 이야기가 스스럼없이 나오게 됩니다. 왜? 겸손 튀 낸다고, 남들에게 믿음 좋은 것 과시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행여나 하루를 더 살더라도 은혜이지 내가 잘나서 내가 하루를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님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왜? 성경 어느 말씀 하나 우리가 못 지키는 것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으로 족하라는 말씀 너 지키느냐? 못 지키지 않느냐? 그처럼 우리는 매일같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먼저 고려하고 일단 그것이 되면 그 나라와 그 의를 챙기는 걱정하는 이방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아직도 못 버리는 것입니다. 평생 못 버릴 것입니다.
주님 믿는다는 노인들 보면 그런 사람 많습니다. 오늘 어버이 날인데 집에 찾아갈까요? 아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나 생각 말고 교회나 잘 다녀라 나는 그것이 제일 좋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 교회가기에 찾아뵙지 못합니다. 미안합니다. 돈 5만원 보냈습니다. 그러면 몹쓸 것 내가 그 소리 한다고 안 오나! 나는 이렇게 외로운데 나는 그날만 기다렸는데! 이게 뭡니까? 이중 얼굴도 아니고!
그러나 제대로 신앙생활하면 전화 한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지! 전화할 수 있는 딸이 있다는 것도 나에게는 고맙지! 그렇다고 해서 더 성화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입장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너무나 소홀히 하였다는 죄가 드러나기에 그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 도무지 경쟁이라는 것이 발생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경쟁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부다 한 몸인데! 한 몸이란 것은 자기 몸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 몸이라는 것은 이제 내 몸을 위해 살 인생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제가 처음에 태양 이야기하면서 플라톤의 신 계시를 이야기 했습니다. 아직 깊은데 까지는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신이 자기의 속성을 들어낸다. 왜 드러내는가?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본성이기 때문에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게 어디서 나온 사고방식인가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아담 안에서 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공통점으로 나올 수 있는 죄악 된 신관입니다. 엉터리 신의 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언약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데 여러분 언약을 통해서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 사람 외에는 안 가르쳐! 하는 분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내가 지목한 사람 외에는 절대로 안 가르쳐 준다고 하시는 분이 진짜배기 진짜 하나님입니다. 이것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5-26절 보시면, 여러분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아까 이야기 했지요! 공관복음에서 아버지의 뜻이라고!
27절을 보세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햐~보세요!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자꾸 놓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언약의 중심에 있기에 절대로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본다? 못 알아본다?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왜? 인간들은 엉터리 계시를 이미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렵지요! 아까 이야기 했지요! 인간의 곁가지 다 쳐내면 아담만 남습니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판단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데 그 판단된 것에 의하여 예수님은 들키는 모습으로 왔겠습니까? 안 들키는 모습으로 왔겠습니까? 이것이 첫 시간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안 들켜야 됩니다. 안 들켜야 예수님 빼놓고 모조리 전부다 아담아래 죄인 이라는 것이 들통 날 것이 아닙니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안 들켜야 인간이 죄의 지배아래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술래잡기를 하는데 술래가 숨은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그 중에 예수님도 있다고 합시다. 다른 사람은 다 찾아내는데 예수님은 절대로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나 술래는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엉터리 술래라는 것을 숨은 사람이 지적해 낼 근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야! 너 이리와! 너 날 못 찾았지! 예! 그러니 네가 신의 계시니 뭐니 한 것이 다 엉터리이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능력으로 우리의 구세주 되신 주님이 들키지 않아야 됩니다. 오직 구원의 개시는 우리가 취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자에게만 구원이 오는 식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언약의 작용! 언약의 규칙! 언약은 배제입니다. 추방입니다. 배제(排除)의 뜻을 알겠지요! 잘라서 떼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런 주장을 해서 무엇을 얻습니까? 이제 이야기 한다면, 로또복권 당첨되어서 돈의 풀장에 헤엄치는 그런 기쁨은 기쁨도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돈을 벌어서 기쁘지만 그 돈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지 못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기쁜 순간은 자기가 죄인 됨을 아는 순간입니다. 그 기쁨은 이 세상의 억만금을 주어도 못 바꿉니다. 자기가 죄인 됨을 알 때에 온 천하를 얻은 사람입니다.
제갈 공명!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죄인 됨을 몰랐습니다. 석가모니! 아무리 자기가 도를 닦아도 죄인 됨을 몰랐습니다. 인간이 허무하고 부실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죄인 됨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철학박사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자기 죄인 됨을 모르면 이 세상에서 불행한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입니다. 왜? 자기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왜? 나는 죄인 이니까!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죄를 아는 능력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무슨 능력만 있는가 하면 자기를 변명할 능력만 있습니다. 이러니까 못했다. 이러니까 죄 지었다. 하는 변명만 있을 뿐이지 나는 변명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죄인 이라는 그런 능력은 인간에게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이 죄를 알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신이 계시를 내렸다! 이것 다 인간이 만든 환상입니다. 사람의 모든 걱정근심은 자기가 만든 환상 때문에 생깁니다. 자기 속에서 던져놓은 그 의미를 인간은 도로 회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상상해서 만든 환상을 세상에 던져놓고 그것이 도로 찾아지지 않는다고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애가 공부 잘해야 한다. 애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가 애니까 공부 잘해야 된다고 환상을 던져놓고는 어! 공부를 못해? 너 맞으라. 이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자기 꿈과 환상과 비전을 세상에서 찾고자 하다가 안 되니까 짜증내고 고민하고 자살하고 이 지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자기 환상에 속습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성장과정이 다 다릅니다. 부모가 다르고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은 각자의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다 다릅니다. 자기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웠다. 이것은 슬펐다. 이것은 자기가 경험 한 것에만 머뭅니다.
예를 들어서 남이 다리가 부러졌다. 부러져도 용감하게 살면 되지 뭐!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인이 체험을 안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사고가 나서 다리 두개가 날아갔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그래도 용기 있게 사세요! 그러면 에이 당신은 안 당해 봤으니 모르지! 그러니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에서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찾는 것 중에서 좋은 것은 따로 기억을 하게 됩니다.
기억이 무엇이냐 하면 기억창고입니다. 이 기억창고에 무엇을 저장합니까? 괜찮은 의미, 특히 중요한 것, 복수 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을 골라서 기억창고에 기억해 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줄로 쭉 쌓으면 그것이 그 사람의 역사요 인생관입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살았으며 오늘 이렇게 되었기에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 마땅해! 라고 하는 점선이 나오지요!
과거 현재 미래 한 줄로 세우는 이 역사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자기가 기억창고에 저장해 놓은 것을 골라 내세운 것입니다. 모든 경험이 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다가 바람 부는 것 이런 것은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을 일방적으로 골라서 자기 인생관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는 이러한 일방적인 인생관에 의해서 나의 미래는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해! 라고 아주 규정을 짓고 이것에 실패를 하니 여기서 근심이 생기고 울음이 나고 탄식하고 때로는 맞추었다고 좋아서 기뻐하고 이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 안? 이 모든 것이 아담 안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 짓지 말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되지요! 어떻게 인간의 경험이 다 다른데 죄 짓지 말라는 말이 됩니까? 너는 말이야! 방에 나갈 때에 엉덩이를 어른에게 보이고 나가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것은 안동 권씨 본인의 체험인 것입니다. 저는 이북 살다가 와서 엉덩이 보아도 괜찮은데요. 이것은 나의 체험입니다.
사람의 체험과 경험이 다른데 남의 체험과 경험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자꾸 윤리와 도덕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처럼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아까운 돈이지만 십일조를 하였다. 그 다음주에 두 배로 받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기억창고에 저장하여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하면 미래에 두 배 내지 세배의 소득이 올라가리라는 것입니다.
왜? 이미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일조 하고 난 그 다음날 소득이 있기는커녕 교통벌금 7만원을 내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신이시여! 왜 저를 배반합니까? 신이 언제 배반했습니까? 신이시여 왜 저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는데? 그러니 이런 죄는 풍비박산이 나도 괜찮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어도 수지맞은 장사입니다. 은혜입니다. 이런 짓들을 해 놓고서도 신이시여! 저를 괴롭게 하며죽어 버리겠습니다. 교회 안 나옵니다. 신이 뭘 어떻게 했는데? 십자가 지는 것도 죄 입니까? 이 모든 죄를 씻기 위하여 외부에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십자가 지신 것은 안 보이고 자기 역사 하나 만들어놓고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짜증내는 그것도 신앙생활 입니까?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자기 기억창고에서 계시를 만드는데 여기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하면 욕망을 집어넣습니다. 그 욕망과 결부한 것이 아까 이야기 한 계시론입니다. 내 욕망을 들어줄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취사선택해서 골라 골라잡아서 자기의 욕망에 부합되는 자기 계시를 따로 골라잡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대로 하면 안 들어요! 내 욕망을 달성할 수 있는 계시론을 찾습니다. 새벽기도 하면 복 받는다. 이것이 신의 계시이다. 옳다구나! 내가 집이 가까우니 새벽기도 나올 자신이 있다. 자기 욕망에 부합되는 계시를 따로 골라잡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복 받는다. 온유한 것은 어려서 한 가닥 했기에 이것은 자신 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합시켜서 역사를 만들어놓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기 미래를 만들어 내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해 내라는 것입니다. 이대로 해주지 않으면 좋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죄가 만든, 마귀가 만든 교회들입니다. 마귀의 멋진 작품들이지요! 이 모든 것이 죄 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아닌 계시가 어떤 계시인가?
5분 쉬다가 합시다.
지난 시간에는 죄에서 나온 계시론이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봤습니다. 죄에서 나오게 되면 인간속에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신의 계시를 납득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였고, 그 형상은 인간의 가능성 여부에 따라서 많은 신을 많이 알고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들은 결국에는 아담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아담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약속이 빠져있다. ‘아담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가 해 낼 수 있는 그러한 계시를 인간이 창의해냈다.’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죄라면 하나님의 진짜 계시는 무엇인가? 의(義)입니다.
아담안에는 모든 것이 죄다. 아담안이란 장소개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영역개념이죠. “아담의 형상안에서 인간은 죽으리라! 죽으리라!” 아담의죄 아래에서 인간은 결국 죽습니다. 그것을 로마서 5장에서 ‘죄가 왕노릇 했기 때문에 죄 짓고 꼭 죽어야 된다.’라고 합니다.
죄 짓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이 만든 계시론’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죄 아닌 계시를 내리죠. ‘죄 아닌 계시’는 어디서 내리느냐? 마지막 아담에서 시작됩니다. 마지막아담, 다른 말로 두 번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아닌 의의 계시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담은 잘 아시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따로 계시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비로소 의를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안에서 아담과 상관없는 계시를 하십니다.
아담안에는 인간의 가능성, 다른 말로 인간의 행함이 나옵니다.
“아담안에는 인간의 가능성이 나오지만, 예수님안에는 예수님의 필연성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필연성, 다른 말로 예수님의 행하심을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예수님의 행함이다. 예수님의 행함으로 내가 여기있다. 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행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의 행함은 죄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함은 죄가 되고, 반대로 예수님의 행함은 자기안에서 의가됩니다. 죄인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는 것도 예수님의 행함의 항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의인이 되는 것도 내 숙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숙제를 하시다보니까 내가 구원 된 것이다.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될 자만이 구원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일을 성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6:39)
이것은 어느 누구도 도와 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협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혼자 이루실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안에 있는 자는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된 자입니다.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면제된 자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믿는 사람은 기겁합니다. ‘모든 법을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을 안 지켜야 됩니다.’ 이 뚜꺼운 성경을 안 지켜도 됩니다. 그러면 이 성경이 왜 있느냐? 주님의 행하심 때문에 있습니다. 주님의 행하심이 우리를 가지고 성경의 기록에 따라 적용시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함만 있고, 예수님의 행하심은 없는 줄 알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남용하는데 예수님의 행하심이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다 이루시기에, 자신의 행동으로 우리를 가지고 다 이루어 내십니다. 단, 우리는 이 말씀을 벗어나서 율법을 지킬 의무는 없습니다. 만약에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자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라디아서 5:4)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느냐? 예수님의 행함의 열매만 주어집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자기 백성 사랑하기입니다. 이 숙제는 우리가 행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숙제입니다. 우리 사랑하기! 자기백성 사랑하기! 한 번 성도 된 사람은 내쫓지 않기! 이것은 예수님이 행해야 할 숙제입니다.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이 말씀에 우리가 개입하거나 협조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 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사로 오지 않았기에 주님의 손아귀에서 못 벗어납니다. ‘내쫓지 않는다’는 말은 주님이 내쫓을 경우에만 내쫓기는 처지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가!”라고 하는 경우에만 쫓겨날 수 있고, 인간이 스스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쫓아낼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쫓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온 자는 두 번 다시 내쫓겨남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을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다 이루십니다.
사람은 구원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을 하는데,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차도 없는 사람이 운전을 배우는 것과 같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을 연습을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소관이 아닌데, 자신의 소관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믿을까 고민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과거사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인간들이 상상을 합니다.
인간의 상상은 실제적인 천국이 아니고, 과거와 다른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상상합니다. 신은 언약을 통해서 나타난 아브라함의 하나님인데. 인간은 그렇게 보지 않고 전지전능한 신으로 자기마음대로 만들어 냅니다. 진짜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만 나타난다고 해도 믿지 않고 계속해서 인간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만들어 냅니다. 신을 만들어 내기에 천국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잔디가 깔리고 시냇물도 흐르고, 악한 마귀는 없는 천국을 만들어 냅니다. 이 천국을 자기의 미래상으로 첨가 시킵니다. 과거(교회생활)는 고생했지만, 참고 견디면 좋은 곳을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심사는 예수에게는 없고, 자기가 좋은 곳으로 가는 것에만 있습니다. 일반교인들이 교회가 엉망진창이라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죽은 후에 장래해줄 목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다 노림수가 있습니다. 죽은 후에 장례식을 불교식으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더럽지만 참자’ 하는 것입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의 다른 얼굴입니다. 그러면 진짜 천국이 무엇인가? 언약이 만들어낸 천국이 진짜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낸 신은 짚신이고, 고무신이고, 다 쓸데없는 신발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자신만만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대로 살기만 하면 복 받고 영생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시비를 겁니다.
“너희들이 모세의 말을 아느냐?”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아니까 우리에게 법을 주었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의 법을 해석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참 신기하죠? 모세의 십계명(살인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은 누구나 쉽게 이해가 되는 말이지요? 이해된다는 말은 감정이 따르고, 감정이 따르면 행함의 의지가 생기게 됩니다.
이런 규칙에 의해서, 탐내지말라!는 계명이 이해가 되고,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는 감정이 생기고, 하지 않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명을 지키면 복이 되고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하자가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모세가 화낼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장차 누가 와서 이 율법을 설명해줄 것이라는 것을 모세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내지말라!’는 무슨 의미일까요? ‘너는 탐 낼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모세가 온 것입니다. ’간음하지말라!‘라는 율법도 예수님께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함이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십계명을 주신 언약의 주인공과 연결시켜서 해석해야만 합니다. 십계명만 따로 해석하면 죽이는 해석이 됩니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린도 후서 3 :6)
‘그러므로 모세의 글을 모세의 글로 본 사람은 모세에 의해서 심판받을 것이다.’
얼마나 어려운 해석입니까? 예수님의 해석이 너무나 엉뚱해서 우리는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외면하고 다시 자신의 지적, 감정적, 그리고 의지적 가능성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영역개념은 다 박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언약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왜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느냐?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고, 언약이 아니고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언약에서만 의가 나오고, 나머지에서는 죄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의한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에 의한 계시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하나님의 자기맹세를 언약이라 합니다. 단순한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하신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끼어 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언약은 자신을 위한 언약이지 인간을 위한 언약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끼어들거나 관여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한 맹세란, 성부와 성자에게 한 맹세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왜 빠졌는가? 시편 110편1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라고 말씀 하면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다윗 언약이 맺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주께서 다윗언약을 다윗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윗에게 준 것이 아니라 성부께서 성자에게 준 언약을 다윗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세의 율법도 우리들에게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습니다. 지킬 수가 없는 것을 어떻게 지킵니까? 지키다가는 공연히 지켰다고 자기자랑만 하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미분, 적분이나 삼각함수를 풀라고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린아이 같은 다윗을 통해서 어려운 숙제를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언약의 내용은 오직 언약된 사람만 구원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계약된 내용이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예수안에서 택하심”뿐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베소서 1 :4)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따라 오는 것이 예수님은 희생이 되어야 되고,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된다. “죄인과 희생” 이 내용이 창세전에 맺어진 언약의 내용입니다.
창세전이란 의미는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머니, 왜 날 낳았습니까?’라는 하는 질문은 만들어진 입장에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질문을 하라고 하나님이 입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왜 태어났느냐 하면, ‘어머니, 왜 날 낳았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낳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예수님, 왜 저를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온 몸으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런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당신 잘못한 것 아닌가?’라며 따지며 복수하려고 합니다. 원래는 인간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마귀가 와서 심어 준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마귀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껍데기는 인간의 형상이고, 속에는 마귀의 형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하신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관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고, 지킬 수도 없습니다. 또 지켰다고 해도 지킨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에서 인간은 그러한 권한이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13-14)
혹시 주의 뜻이면 장사하기도 하고, 서울가기도 하고, 혹시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리니 너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안개는 오래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부의 힘에 의해서 놀아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면 하겠다고 해야지, 내가 스스로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겠다는 것은 다 악한 것입니다.
결국에는 말을 끄집어 낼 때,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나님의 은혜이냐 아니면 나의 자존심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할 때,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근거를 봅니다. 인간의 행함은 근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네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이 말을 하느냐?”
은혜에서 나왔다는 근거는 인간이 죄인이고 예수님이 희생하셨다는 내용과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셨다는 언약을 내용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의한 행동은 ‘죄와 희생’이라는 내용과 창세전에 택하심이라는 언약을 고백하는 근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요한복음 6:37에서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내쫓지 아니하심”의 은혜성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믿음의 고백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성과 인간의 자존심의 구별이 어렵기 때문에 기나긴 구약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 구별이 잘 안 된 예를 몇 가지 들겠습니다.
첫 번째로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언약의 사람, 선택받은 사람이였다는 사실을 결과적으로 알 수 있지만, 아브라함 자신은 죄를 뿜어내면서 알아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죄를 질 때마다 하나님은 용서하면서 기어이 맹세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이기에 자주 일을 만드십니다.
예를들면, 고3학생이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제가 찬양대에서 봉사하는데, 대학에 꼭 합격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타나게 하옵소서.” 들었던 풍월을 총 동원해서 미사여구를 구사합니다. 그러나, 대학에 불합격 했을 때, 그 학생은 대학에 왜 떨어졌는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교만할까봐’ 재수하면서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은 떨어져서 원망하지만,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나를 인정해주옵소서.’ 그런데, 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성질 낼 때까지 떨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너무 하십니다. 저보고 어찌하라 십니까?” 이고백은 오늘날 개척교회 하는 목사들의 기도제목입니다. 목사들은 하나님께 달려들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 책임지세요!”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너의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진작 그렇게 하지 공연히 감사하는 척 하지 말고 성질대로 살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질대로 살아야합니다. 성질대로 살아야 택하심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하심이 바로 희생입니다. 우리의 착한 가능성 때문에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는데, 네가 양심이 있으면 감동을 받겠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감동은 순간입니다. 우리는 다만 죄인으로 드러나야 되고, 주님의 희생과 우리의 죄가 짝이 되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닌 척 하면 안 됩니다. 고상한 척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죄가 있어야 속죄가 되는 것입니다. 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피흘림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에 의한 예수님의 자기숙제입니다. 우리가 관여 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숙제중의 하나가 ‘우리 죄 용서하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들의 죄 용서하기가 예수님의 행함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은 그 일을 차질 없이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차질 없이 죄를 잘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안 짓는 것보다 더 수월합니다. 예를 들어, 탐내지 말라면 바로 탐을 냅니다. 우리는 탐내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 그의 의는 보지도 않고 이 땅에서 보람을 갖고 잘 살아갑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사람을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주장하면서 말씀을 변명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사람입니다. 언약사람에게서 죄와 희생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희생해야 할 이삭이 있고, 내어 쫓김을 당해야 할 이스마엘이 있는데, 이 두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온 자식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기에 죄악 된 모습은 나타나지 않아야지’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언약의 사람 이였지만 언약의 내용- 죄가 무엇인가? 희생이 무엇인가?-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와야만 됩니다. 다시말해서 아브라함은 평생을 통해서 언약의 내용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는 목사는 자기자랑을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에게 교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목사가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돈을 밝히지 않고, 복음만 전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역시 이근호 목사님이랑 공부하더니 제대로 배웠구만.’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6개월도 못 가서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은 정신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수법이였습니다. 교인들이 참신한 목사로 받아들이기 위한 작업용 멘트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과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는 이근호고 삼근호고 다 버리고 노회를 등에 업고 세상법에 소송을 걸어서 2년반동안 싸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처음하고 다르게 나옵니까?”
“처음에는 복음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안 따라주더군요.”
“주님에게만 사랑받으면 되었지, 왜 교인들에게 사랑받을려고 합니까? 왜 교인들과 싸웁니까?”
“양이 먼저 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싸운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섬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양에게 먼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까?”
구속사, 언약, 그리고 복음을 외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인들이 말하기를, “그 목사 말뿐입니다.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목사는 말하기를, “ 내 말만 듣지. 내 행동까지 왜 본받으려고 하느냐?”
교인들이 이렇게 말해도 되지만, 목사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 목사가 지옥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희생은 그 목사의 행동까지도 속죄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 좀 했다고 목회하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교인 8명이 되는 교회에 있는 목사님은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경험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 명 밖에 없는데, 그 원인은 ‘나는 교인들을 위해서 희생하는데, 교인들은 왜 안 도와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는 주님만 바라 본 것이 아니고, 좋은 결과를 신의 섭리로 보며 신의 존재를 결정 하려고 합니다. 스데반처럼 돌에 맞더라도 주님 바라보며 가면 되는데, 결과를 바라보며 신의 존재를 측정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두 번째 한 경우와 같습니다. ‘높은 성에서 뛰어 내려서 안 다치면 맞고, 다치면 사기다.‘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증명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식으로 살아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스데반이 죽는 것으로 시험을 끝내는 것입니다. 우리야가 ‘저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 올 것인가?’라고 시험했습니까? 그대로 정통으로 와서 맞아 죽었습니다. 아벨이 ‘형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나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이 설마 나를 죽이시겠는가?’라고 시험했습니까? 하나님은 아벨을 죽임을 당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벨은 희생쪽입니다. 아벨을 통해서 가인의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노아같은 경우는 성질대로 술을 마시고, 성질대로 벌거벗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가리워주는 희생의 은혜와 얼레리 꼴레리 하는 저주스러움이 공개되는 것이 노아언약입니다. 현재 우리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약을 드려내면 되는데, 완전해 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실수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며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나 들어 쓰십니다. 조용히 죽음으로 들어 쓰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영웅심리에 의해서 다르게 쓰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언약의 사람은 실패가 없습니다. 기껏 실패하더라도 천당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쫓지 않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실패해도 다윗은 회개하면 받아들이고, 사울은 회개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언약안에 있는 사람이고, 사울은 언약바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짓는 것으로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뻔뻔스러운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5분간 쉬겠습니다.
마지막 시간을 하겠습니다.
제가 푸근한 마음으로 설교하라고 했는데, 속에는 불이 납니다. 아브라함, 다윗, 이사야를 보세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속에서 불이 났습니다. ‘나 이 일 안 하렵니다.’라며 때려 치울려고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같은 경우를 봅시다. 자기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잘못한 여파로 그 아픔이 파도처럼 덮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교인 한 사람의 잘못으로 옆에 다른 집사가 아픔을 겪고, 또 목사에게 그 아픔을 파도처럼 덮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막아 낼 재간이 없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이런 것은 어느 교회에서도 그러하고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언약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 :11-12)
선지자가 가는 길은 선지자가 원해서 간 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덤탱이로 덮어 세우는 경우입니다. 그 고난의 길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남한테 욕을 다 얻어먹고, 남에게 풍지박살 당하고, 자기는 그 일에 가담도 안했는데도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조금 더 어렵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언약의 사람입니다. 그 아담안에서 두 가지의 자식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는 뱀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은 반드시 여자의 후손을 공격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쳐야 되는 것은 이미 확정된 프로젝트입니다. (창세기 3:15)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면 안 됩니다.
‘내 인생 여기서 빼주세요!’ 해도 못 빼 줍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아담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여자의 후손 편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고난을 당해야 됩니다. ‘빼주세요!’ 하면 안 됩니다. 빼주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운명을 점 쳐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점을 쳐주어도 복채도 주지 않고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18-19)
이것이 우리들의 장래 앞길입니다. 숨어살래. 기도원에서 혼자 살래. 모두 소용없습니다.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 마세요. 도망 갈 생각마시고, ‘그냥 이렇게 되었으니까 구원받은 기쁨이 큽니다.’ 라고 생각하세요. 자꾸 도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미움 받아도 구원 받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당연한 공식처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요한복음 15:20-21)
여기서 강조할 것은, “ 알지 못함이라 ! “
이 대목을 가지고 마지막 시간을 장식하겠습니다.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알 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알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가 메시아인가를 몰랐는데, 성령이 그에게 내려오시지 않았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려고 환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와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 할 사람이고, 알지도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가 됨!,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와 상관있음!” 이라고 알게 된 것은 성령이 올 때, 곧 십자가의 영이 올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엇을 압니까? 십자가를 보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해서 나온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되풀이 됩니다. 어떻게 되풀이 될까요? 십자가에서 두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너희들은 십자가를 몰라!’ 라고 하는 언약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십자가를 몰랐다가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인 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함으로서 둘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잘 해주면 우리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반드시 예수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시간에 이런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한 청년이 버스를 타서 어떤 아저씨에게 좌석을 양보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고맙다고 하다가도 청년이 예수믿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되면, 돌변해서 청년을 미워하게 됩니다.
“아이고 이 청년아 무엇이 아쉬워서 예수 믿느냐? 나는 예수믿는 사람은 싫더라.” 라고 하면서 그 아저씨는 평소에 예수를 미워하는 감정이 토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도록 프로젝트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착각을 합니다.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타협을 시도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알 게 된 우리가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모르게 될 자에게는 반드시 모르게 하시고, 알게 될 자에게는 반드시 알게 하시는 언약안에서의 계시가 진짜 계시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대로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은 남기고, 나머지는 지옥가도록 분류시키는 그 작업을 하는 계시가 진짜 언약적인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여기에서 주의해야 됩니다. 앞자리에 예수님이 앉아서 나에게 설교를 시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설교 어떻게 할까요? 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수요예배 때 더욱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너무 적거나 아내에게만 하게 되면 대충 넘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사람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신심으로 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보통 사람이 많으면 설교하는 열정을 내 볼까 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입니다. 많거나 적거나 하나님이 언약을 증거하는 기회를 주셨으면 언약을 증거하는 기회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싫어하면서 좋은 척 하는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본색을 들추어내는 쪽으로 해 주어야 언약적으로 합당한 설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좋으면 다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목사 본인이 ‘교회에 불이 나도 예수님만 있으면 좋습니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언약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게 괴롭혀도 안 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안 나가는 것도 주의 은혜입니다. 아직도 때가 아닙니다. 목사를 더 괴롭히도록 주님에게 시간을 맡겨야 됩니다.”
그래서 요즘 제 설교는 ‘이래도 교회에서 안 나갈래? 이렇게 괴롭혀도 안 나갈래?’ 라는 심정으로 합니다. 자신의 걱정거리와는 상관없이 예수님만으로 즐거워하는 기적 같은 사람이 도대체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먹으면, 교인이 하나가 되든지 둘이 되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한명밖에 안 보내셨구나 하고, 하나도 없으면 오늘은 하지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택함 받은 예수님의 숙제로 내가 이 세상에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 세상에 등장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숙제를 하기 위해서 나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이야기 해봅시다.
“알 수 없음!” 이것이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성경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는 성경책을 볼수록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의 선입관이 “알 수 없음!”이 아니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계시가 미흡하기에 보충하라고 특별계시로 성경책이 주어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미 죄 가운데 있고, 죄 됨을 들추어내기 위해서는 알 수 있음 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서 그런 모습과 그런 양상으로 일을 해야만 된다.” 라고 하십니다.
소경이 아닌 자라고 하는 자에게 소경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소경을 불러다가 눈을 뜨게 하심으로 평소에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소경인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행동을 이런식으로 하십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일하십니다.’
이것은 인간편에서 생각하기를 ‘계시는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라는 사고방식을 모두 거짓이란 것을 공개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 손에 예수님이 죽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여준다는 것은 ‘너희들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매몰차게 십자가에 죽이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교인이 백 명인데 한명만 나와서 성질나서 대충 설교한다면, 그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에는 평소에 목사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 엉터리였다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달랑 한명만 보낸 것입니다.
목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평소에 관심사가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교인 백 명을 모았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한명만 보내 것입니다.
그것이 “알 수 없음! “의 원칙입니다. 목사는 알았다고 하지만, 몰랐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알 수 없음!”이라는 원칙으로 계속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은닉되어 있고. 비밀이고, 감추어져 있고, 은폐되어 있다고 에베소서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3;9)
못 알아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어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물으시기를, “누가 나를 만졌느냐?”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만졌는데요?”
예수님이 가라사대, “아니다. 믿음으로 만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예수님을 안 사람은 12년 동안 혈류병을 앓은 여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만지고 주물려도 몰랐습니다.
“알 수 없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혹시 여러분이 예수님을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고 예수님이 작업을 하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시라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있으면,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으면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관계없기 때문입니다. 비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셔서 알 수 있는 쪽으로 인도 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할 때 교인들이 본문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을 엎어버려야 합니다.
교인들이 예상하는 것을 엎어버려야 합니다. 예상이 된다는 것은 목사 본인이 설교할 때
자기가 내 뱉은 의미를 회수하는 식으로, 자기가 아는 범주내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목사는 자기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주여, 내가 여기까지 아는데 이것도 모르게 하옵시고, 내가 미쳐 몰랐던 것을 이 본문에서 이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런식으로 설교하면 설교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금방 지나갑니다.
“세상에 내가 이 본문이 이런 뜻인지 이전에는 몰랐습니다.”라며 설교자는 스스로 기쁘게 되고, 교인들은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도 기뻐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걱정근심이 사소한 것이 되고, 세상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설교자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몇 가지만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적 계시로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언약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의 내용을 보면,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자만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내용이 작정된 자가 누구인가? 쪽으로만 설교를 해야 합니다. 다 은혜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에서 영생 받을 자가 누구인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영생을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48)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믿고, 영생을 안 주기로 작정된 자는 절대로 안 믿어지도록 설교를 한 것입니다. 영생을 못 받기로 작정된 자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구원이란 것은 자기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임할 때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함이나 가치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함에 가치를 둔 사람은 화가 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만 구원 되면 손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계시다. 계시는 반드시 능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택함 받든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한 자의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지혜로 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린도전서 2:7)
베드로나 요한의 병을 낫게 한 것도 그들의 믿음이지 경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한다고 다 믿은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할 때 믿은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았습니다. 공연히 귀 죽지 마세요. 사도바울이 전했으니 많은 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많은 교인이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자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존교회를 닮아 가려고 하지 마세요. 그 자체는 절이요. 사기집단이요. 지옥입니다. 기존교회를 닮으면 큰일 납니다.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적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하늘나라를 너희에게 주었노라.’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게 됩니다. 주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임한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체적인 능력입니다.
계시에는 우리가 믿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기만 하세요.’가 계시가 아니라, 도망 가는 사람을 믿도록 하기까지 하는 능력이 계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도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설교자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설교자가 귀 죽지 않고, 좌절하지 않게 됩니다.
설교자는 말만하고 자기가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택한 백성은 안 버린답니다.’ 라면서도 자기가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교할 때 트릭을 서려고 하고, 자기가 개입하게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신경 쓰십니까? 주께서 알아서 우리를 활용합니다. 혼자 걱정을 한다는 것은 설교를 자기일이라고 착각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모든 일이 잘 되리라.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해라. 기도하라는 것은 헌신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염려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고,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을 기어이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자랑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흑인이 백인이 되겠느냐?” 안되잖아요.
“어떻게 표범에게서 반점을 지울 수가 있겠느냐?“ 안 됩니다.
인간은 아담안에 있고, 표범은 표범안에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정도로 불가능한 것이 “예수믿기!”입니다. 그것을 우리힘으로 설교해서 믿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을 주님은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바로 증거하고, 그 증거를 통해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서로 교류가 되고 융화가 되는데 도대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만 이야기 하니까 교류가 되지 않고 우리를 미워하게 되고, 영생을 얻을 자는 자기의 불가능을 이야기 하니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이 시간에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계시가 구원받는 능력까지 임할 줄을 이제 알았습니다. 우리가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우리의 몸을 주 앞에 맡기면서 주님이 이런 분이란 것을, 기적적인 분이란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알릴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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