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조직신학
구원론 중 (소명 1-1)
05. 6. 13일 강의 이근호
자! 지금부터 제 2회 의존교회 말씀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할 것은 지옥구덩이에서 건져내 주심 여기에 대하여 강의하겠습니다. 이 구덩이가 무슨 구덩이냐 하면 지옥 구덩이입니다. 이것을 아주 어려운 한자말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불러주심, 불러내심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우물이 있는데, 우물 밑에 보면 물이 있고 깊숙이 빠져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올라오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중간쯤 올라오고, 어떤 사람은 올라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라오다가 또 떨어지고, 올라오다가 또 떨어지고, 아무리 기어 올라오려고 해도 이 우물 밖으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빠져 나올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까? 좋은 수가 있지요! 여기 우물에서 한번 빠져 나왔던 어떤 분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팔이 길어서 죽죽 계속 늘어나서 마징가 제트처럼 움켜쥐고 쑥 꺼내면 되겠지요! 여기 한 아저씨가 있는데 팔아! 늘어져라! 죽죽 늘어나라 해서 우물 속에 있는 사람을 딱 낚아채서 끄집어 내어주면 그 사람은 지옥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면 빠져 나올 수 있을 까요? 없을 까요? 자기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팔을 내밀어서 빠져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팔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합니다. 구약 별嚥?보면 하나님의 오른팔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도들에게 어떻게 구원받느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의 오른팔로 구원받는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왼팔? 아니죠! 무슨 팔? 오른팔(어린 이들의 대답이 나옴, 지금 주일 학생들이 함께 강의 듣고 있는 중임), 하나님의 오른팔로 저를 구원하셨습니다. 또는 여호와의 오른팔이 저를 이 지옥 구덩이에서 구원하시니 감사합니다. 라고 구약 성도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될까요? 옛날 구약 사람들은 누구의 오른팔? 하나님의 오른팔로 구원받았다면, 오늘 날 사람들은, 예수님 이후의 신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을까요? 오늘날은 예수님의 오른 팔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대충 맞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오른팔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의 성령으로 구원받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오른 팔이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의 영께서 또는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께서 우리를 건져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몰라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라고 물으면, 내가 막 올라가서, 열심을 내어서 기어 올라가서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잘못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열심내고 전도에 열심 내었더니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쉽게 구원 되었습니다. 하는데 이것도 잘 못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의 오른 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오른 팔 같은 일을 해야 하는 성령님이 예수님의 오른 팔 역할을 해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구약 때는 누구의 오른 팔입니까? 여호와의 오른팔, 그러면 신약 때는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성령님에 의하여 구원받는데 그 성령님이 구약 때에 여호와의 오른팔과 똑 같은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자 그러면 불러내 주실 때는 하나님의 오른팔로 불러 내주시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오른팔로 불러내 주실 때에 어떤 식으로 불러내 주시는가? 이것이 또한 궁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팔로 내가 구원 받았다. 예수님의 성령님으로 구원받았다. 같은 말인데 하나님의 오른 팔이 어떻게 나를 낚아챘는가? 그것이 굉장히 궁금한 것입니다.
오른팔로 구원받았다고 하니, 주먹이 운다는 것처럼 오른팔로 한대 콱 쳐서 얻어맞아 구원받았을까? 아니면 오른팔에 낚시 바늘이 있어서 그것으로 이 지옥 우물에서 나왔을까? 그 오른팔을 가지신 분이 어떤 일을 하였기에 그 오른팔이 우리를 완전히 구원을 하였을까? 이것이 굉장히 궁금하실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강의에서 여러분에게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은 앞에 감지기가 있습니다. 삐삐삐 하는 감지기처럼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인지 지옥백성인지를 구별하는 감지기가 있는 것입니다. 삐삐삐 너는 아니냐! 삐삐삐 오! 네가 여기 있구나! 하나님의 오른팔은 닿는 아무나 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오른팔은 찾아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건물이 무너졌다고 합시다.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이 폭삭 무너져 여러분이 건물 깊숙이 갇혔을 때에 경찰이 와서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습니다. 개가 와서 멍멍 짖어대도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기에 갇혀진 사람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자! 그 사람이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그것은 누가 결정합니까? 아무도 못 들어가지만 예수님의 오른팔은 그 지하층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더라도, 혼자 갇혀서 위에는 50미터나 되는 콘크리트가 덮치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속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를 지금 죽이시려고 하시는 군요!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예수님의 나라에 가게 하옵소서!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이 죽어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 때에 보면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 이 사람은 목사님이신데 하나님의 뜻을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귀찮아서 내 마음대로 살 거라고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면 하나님은 모르실 거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도망쳤습니다.
요나 목사님이 도망을 치니까 누가 따라 옵니까? 삐삐삐 하는 감지기, 하나님의 오른팔이 뒤 따라 오는 것입니다. 뒤따라오는데 요나는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빠이빠이 하면서 하나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지시를 그만 받고 내 마음대로 살겠습니다. 하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기분이 좋아지면 잠이 와요!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아무도 안 보겠지 하면서 이제는 잠이나 좀 자야겠다고 하면서, 저 선장님! 잠 좀 자야겠는데 여기서 제일 조용한 선실이 어디지요? 저 배 밑이 제일 조용하지요! 그러면 그곳에서 잘 테니 아무도 깨우지 마세요! 하면서 푹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이 요나 선지자가 무엇을 몰랐는가 하면, 삐삐삐 하는 감지기,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먼 곳까지 죽죽 늘어나서 따라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오른팔이 배를 흔들었습니다. 그때 요나 선지자는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어서 몰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배가 이렇게 흔들리는 것은 신이 나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렇게 배를 흔든다고 생각하여, 오늘 동화시간 다 되었습니다.
당신이 신에게 잘못 하였어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이 잘못하였어요? 아니요! 저는 부처님을 섬기지만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러면 당신도 아니고, 그러면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누가 자기 신을 배반하였기에 이런 노여움을 받고 있는가? 과연 누구인가? (주일 학생이 요나! 하고 답변함) 알고 있네! 그런데 배 밑에 있는 요나는 그것도 모르고 기분이 좋아서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우는 것입니다.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 당신 누구십니까? 나는 사실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당신 신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럴 때 선장님이 당신이 책임이 있으니 그 책임을 지고 이 배에서 나가시오! 바다 한가운데서 배에서 나가면 어디로 갑니까? 바다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바다에 떠밀어라! 그러자 요나가 내가 뛰어내리겠다고 합니다.
요나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따라와서 죽이시는 군요! 그래 죽자! 하면서 깊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어요! 요나 죽었겠어요? 살았겠어요? (답변: 살았어요) 요나 죽었어요! 사라져 없어졌어요!
바로 이 우물 밑에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보이다가 들어 가버린 것입니다. 이곳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지옥입니다. 요나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요나가 나중에 깨어서 보니 자기가 큰 고기, 아마 고래였을 것입니다. 큰 고래 속에 자기가 있었습니다. 고래 배속에 보니 고등어도 두 마리 있고, 갈치도 서너 마리 있고, 새우도 있고 노량진 수산물시장처럼 얼마나 냄새가 나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나중에 보니 자기가 고기 배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기 배속에 들어가 있으면 삽니까? 죽습니까? 죽지요! 점점 조여 오니까! 죽겠지요! 그 때 요나가 하나님계신 쪽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아버지 끝까지 따라올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살려주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였더니 갑자기 고래가 토하고 싶어서 토하였는데 이 고래가 신사양반이 되어서 육지 가까이 와서 울컥 토하여 내니 요나가 마침 자기가 가야할 니느웨 성 가는 항구에 온 것입니다. 배 타고 온 것이 아니라 고래타고 온 것입니다. 도착하여 보니 자기가 복음을 전하여야 할 그 도성에 온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소명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불러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실 때에 이렇게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 재미나게 이야기 한 것을 한번 정리 해보겠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잘 알아들었는지 보겠어요!
처음에 지옥에서 불러내심, 둘째로 방법은 하나님의 무슨 팔? 오른 팔! 세 번째 끝까지 찾아내심! 요나가 도망가지 힘들어서 못 따라 가겠다고 그래 잘 가라면서 포기하십니까? 아니면 끝까지 따라오십니까? 끝까지 따라 옵니다. 지하실에 가도, 바다 속에 가도,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오른팔은 거기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하나님의 팔이 어디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끝까지 찾아내심입니다. 네 번째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사람이 도망침. 다섯 번째 이야기 한 것이 죽음, 여섯 번째가 다시 살림, 일곱 번째 사명을 주심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소명이라는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것은 다 알겠는데 무엇을 제일 모르겠는가 하면, 사람이 도망친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아이만 아니라 어른도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싶어서 교회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오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는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남들이 보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알지만, 생각해보세요! 진짜 하나님을 찾아 온 사람이라면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 온 것이나 집에 있는 것이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11시에 예배드리는데 갑자기 설사가 나서 11시 10분에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교회 화장실이 더러워서 밑에 있는 상가의 중국집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러면 교회 화장실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중국집 화장실에는 함께 하지 않습니까?
거리를 좀더 멀리 해볼까요? 중국집 화장실에 사람이 가득 차서 멀리 떨어진 공원화장실에 갔습니다. 교회와 멀리 떨어졌으니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십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교회라는 이 지점과 멀어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가 하는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지요! 집에 있어나 거실에 있으나 간에 하나님의 팔이 함께 하지요!
이 말이 맞지요! 가만히 따져 보면 맞는 말인데, 그런데 느낌상 그 시간에 교회오지 않고 집에 앉아서 축구중계 보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 작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그런 느낌을 제공하는 것입니까? 그게 마귀입니다.
그 시간에 교회 오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 시간에 독서실에 가면, 독서실에 가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이지요! 노래방가면, 아침부터 노래방 가는 사람은 없으니 미장원에 가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기분을 조장하는 것을 누가 합니까?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를 통하여 소명이야기를 하니, 여러분들이 쉽네요! 간단하네요! 하겠지만, 실제로 소명 속에 들어가 버리면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 요나는 도망쳤지만 나 이근호는 도망치지 않고 주일날 교회 나왔습니다. 라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착각을 가지고 옵니다.
그 한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에서, 애들은 그런 것 배우면 안 되지만, 싸움이 났습니다. 이층에는 전에 있던 목사와 예배드리고, 아래층에는 새로 자기들이 뽑아 놓은 목사와 주일날 예배를 드립니다. 서로서로 마귀라고 하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럴 때 어떤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고 너무나 가슴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참 더럽다. 교회가 돈 때문에 이렇게 치졸하게 교회 재산 누구 앞으로 하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싸워야 하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할 때는 언제고 막상 돈 문제가 나오니 이렇게 갈라설 줄 몰랐다고 하면서 낙담을 하고, 교회 안 나오겠다고 하면서 일층도 이층도 안 가고 자기 집에서 성경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첫 주는 명분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그들이 싸우고 있었으니 혼자 그렇게 예배를 드려도 기분이 좋았는데 이것이 첫 주 지나고, 두주 지나고, 세주 지나니, 싸우고 있는 교회도 문제이지만 교회 나가지 않는 나도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녀야지! 하면서 네 번째 주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교회 뭐 별난 교회 있나! 하나님 보고 가지 사람보고 가나! 많이 듣던 용어이지요!
하나님보고 가지 사람보고 가나! 나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되지 뭐! 사람들 싸우는 것 못 본척하지 하면서 교회로 가는데 문제는 일층이냐 이층이냐 인데 에어컨은 역시 이층본당이 잘 나오니 에라 둘 다 똑같은데 시원한데 가자고 해서 후다닥 예배만 드리고 싸우든 말든 나왔다. 아이고, 하나님 오늘도 내 할일 다 했네요! 하면서 돌아서면 그 행동이 하나님을 찾는 행동이라고 누가 가르치던가요? 그런 행동을 하나님을 가까이 찾는 행동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처럼 하나님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도망쳐도 그것도 도망치는 것이고, 사람이 자기의 본성을 감춘 채, 요나와 같은 본성이 있는 것을 감춘 채,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한다고 해서, 나는 장하구나! 나는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그것도 착각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점에 대하여, 소명을 하면서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그 근거를 아이들이 또 심심하니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지요! 제가 방금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고자하는 것임을 성경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목자와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리고 처녀와 동전이야기도 같이 나옵니다. 처녀와 동전이야기부터 먼저 해 드리겠습니다. 이 처녀는 동전을 모았는데, 여러분은 어디에 모으나요? 저금통에 모으지요! 그러면 집에 올 때마다 그 저금통을 흔들어 보지요! 가끔 뚜껑 열어서 얼마 있는지 확인해보고 또 집어넣고 그러지요!
이 아가씨가 어설퍼서 동전을 꺼내어 집어넣다가 아홉 개는 집어넣었는데 한개는 떼구르 굴러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가씨가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이 동전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후레쉬 들고 구석구석 동전아! 하면서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 모든 식구 다 도와서 다 찾았습니다. 새벽 두시 반까지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있다가 얘야! 그까짓 동전하나 가지고 그러느냐 이제 그만 자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가 그까짓 동전이라니요! 그 동전은 제 생명과 같습니다. 저는 밤새도록이라도 찾겠습니다. 그래서 저녁 10시부터 찾아서 새벽 4시 46분까지 찾았습니다. 6시간 46분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세상에! 자기스타킹 안에 있는 줄 모르고(하하하), 찾다가 포기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 발밑에 있었던 것입니다. 동전 10원을 찾아놓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 불러 모아서는 전화해서 자장면 시키고 탕수육 지키고 그때 계산서가 14만 6천원이 나왔어요! 동전하나 잃었다가 찾았는데 너무 좋아서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전을 누가 잃어버렸습니까? 동전 자체가 잃어버렸습니까? 아가씨 본인이 잘못해서 잃어버린 것입니까? 아가씨가 잘못해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동전과 아가씨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원래 자기 동전인데 잠시 저녁 10시부터 새벽 4시 46분까지 떠났다가 자기 주인 품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원래 누구 것입니까? 원래 아가씨 것인데, 원래 아가씨 것을 되찾는 것이 동전과 아가씨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자기 동전 자기가 되찾는 것입니다. 남의 동전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끼가 누구 도끼냐? 이 금도끼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이 은도끼가 네 것이냐? 아닙니다. 이 녹슨 쇠도끼가 네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너 착하구나! 이것 다 가지라는 그런 동화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사시다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가 잃어버린 자기 동전 찾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동전 잘못이 아닙니다. 동전은 떽데구르 구른 것뿐이지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되찾아오는 그 사랑이 이정도로 끈질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자비하심과 찾으심과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 동전은 잃어버린 채로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기 동전 되찾는 것이 누가복음의 동전과 아가씨의 비유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것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그것을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목자가 양 백 마리를 데리고 소풍을 나갔습니다. 나갈 때에 딱 백 마리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가서 도시락도 먹고, 수건돌리기도 하고, 장기 자랑도 하다가 오후두시 되어서 이제 집으로 가자하고 헤아려 보니 양 한 마리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99아홉 마리 양이 하는 말이 선생님 그냥 갑시다. 따라 오겠지요.
그런데 그 양 한 마리는 어디에 가 있는가 하면, 목자를 잃어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양 한 마리는 노래방에 가서 혼자 마이크 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생각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양이 오! 내 목자 어디 갔어! 이렇게 착한 양이 아니라, 요나처럼 드디어 예수님 없는 곳에 있다. 드디어 하나님 안 믿는 곳에 와있다. 신 난다. 드디어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조만간에 나올 저의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책에 이것이 있습니다. 소제목 중에 예수를 모르는 즐거움 이런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즐거움이 굉장히 큰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르게 되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요!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 것입니까? 커피를 내 마음대로 하는 광고가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하면 상케 유케 통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되면 간섭받잖아요! 잔소리 듣잖아요! 그런 간섭과 잔소리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이 이 선풍기나 에어컨 보다 더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것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즐거움으로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이 제목을 부친 것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교회에 오십니까? 하면서 제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의존교회 이 쇠문을 열고 오면서 목사님! 예수님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는 분이 지금 여기는 다입니다. 제가 좋게 해석하는데 전부 다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한 주간동안 예수님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서 미치겠습니다. 좀 더 알려주세요! 하면서 허겁지겁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회 대단한 의존교회이지요!
대부분, 특히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는데, 오늘 바쁜데 교회 왔다. 주여! 축복 주옵소서! 아주 바쁜 몸이거든요! 끝나고 빨리 예식장 가야 되고, 다른 볼일이 있는 대단히 바쁜 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교회 왔으니 이런 성의를 생각해서 한 일주일치 복을 오늘 예배 시간에 몽땅 내려주옵소서! 만약 주지 않으면 데모할 거야! 라는 식의 무엇을 더 얻고자 소유하고자 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예수님 소식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한주일 세상에 살다보니 예수님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서 가르쳐 주옵소서! 하면서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서로 앞자리에 와서 앉는 그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귀한교회입니다. 의존교회 이름 바꾸어야겠습니다. 귀한 교회, 그 앞에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특이한 교회 아주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매 맞지 싶어서, 얻어맞지 싶어서 교회를 나오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언가 하면, 결국 예수님이 찾아내어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씨가 좋아서, 내가 알아서 예수님 계신 교회로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덕분으로 그 행위로 구원받겠다는 잘못된 생각, 거짓된 소명감, 거짓된 구원관이 그 밑에 쫙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칩니까? 마귀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을 끝내고자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알아놓으세요! 콜버거 라는 독일의 심리학자요 교육학자요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무엇을 이야기 하였는가 하면 1950년도에 도덕발달 이론이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콜버그 Kohlberg. Lawrence (1927~1987) : 네이버 검색
인지 심리학의 기수. 그의 도덕교육이론은 인지 심리학의 기본명제들에 기초하고 있다. 콜버그는, 교육의 과업을 개인의 심리적 인지적 구조와 사회적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촉진되는 도덕 발달의 자연적 과정을 자극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콜버그에 의하면 그 상호작용의 결과로 도덕성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발전하며, 도덕적 성숙은 최종적인 여섯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성숙된 도덕성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려를 하며, 무엇보다도 '정의와 휴머니즘' 원리에 입각해 자신의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다. 도덕성의 이러한 단계들은 도덕성 진화의 일반적 방향을 반영한다. 콜버그는 도덕적 의식의 보편적 형식들(원리, 표준, 가치)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성숙성 정도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교육의 지상 목적은 정의로운 사회 구축에 공헌하는 인성의 형성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개인은 자기완성의 잠재력을 지녔기에 자신의 행동을 형성하고 계획한다. 도덕발달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인간의 심리적인 능력의 산물이다. 이에 반해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새로운 상황에서나 새로운 행동 계획을 모색하도록 유인하는 자극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콜버그는 개인과 사회 간의 조화의 획득이 사회 환경의 본질에 의존하는가의 여부, 또한 그 정도는 얼마만큼인가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 그의 이론에서 최대목표로의 도덕성의 이동은 추상적 가능성으로 남는다. 콜버그의 교육 개념을 밝히는 기본저서는 다음과 같다. {정의를 위한 교육 : 플라톤 견해에 따른 현대적 진술}(Educating for Justice : A Modern Statesment of the Platonic View, 1970), {인성의 도덕 발달 단계 : 도덕 학습의 기초}(Stages in the Moral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 The Basis of Moral Learning 1971), {도덕 발달의 의미와 측정}(Meaning and Measurement in Moral Development, 1979), {정의 사회를 위한 교육 : 최신의 수정된 진술}(Educating for Just Society : An Updated and Revised Statement, 1980), {도덕발달의 철학. 도덕성의 단계와 정의의 이념}(The Philosophy of Moral Development : Stages of Morality and the Idea of Justice, 1981).
도덕발달 이론이 무언가 하면, 어린 아이의 도덕은 일 단계, 그 다음에는 이 단계, 그 다음에는 삼 단계 해서 도덕중의 최고의 단계는 육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일단계가 무언가 하면, 이것은 애들보다 어른들이 들어야 하는데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얘야! 너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거든, 예를 들어서 고추장을 먹으면 예야, 고추장을 먹으면 혀의 미각세포가 발달해서 뇌에 어떤 자극을 주고 하는 이런 설명은 안 되는 것입니다. 때리면 아프지요! 동물적 감각을 통하여 아프니까 이런 행동은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면서 중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한 일에는 빵을 하나 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은 잘한 일이구나! 그러니 원숭이 수준입니다. 당근과 채찍입니다. 그러니 아픈 것을 원할 것이냐 단 것을 원할 것이냐는 순전히 자기의 느낌만 의존하는 것을 가지고 일 단계 도덕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체벌과 보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것이 일 단계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사업하다가 폭삭 망했다. 하나님이 나쁜 짓 했다고 벌주는 것이구나! 그러니 이 사업을 빨리 회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빨리 빌어야지 하면서 황급히 나온 사람이 바로 일단계입니다. 그렇게 해서 일이 잘 풀리면 그 사람은 두 번 다시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석 달 후에 또 잘 안되면 새벽기도 나와서 웁니다. 그러다가 잘 되면, 또 한 6개월 나오다가 또 아 나옵니다. 순전히 매 맞기 싫어서, 지옥 안 가려고 나오는 일 단계, 하나님을 그런 체벌과 보상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일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궁금하지요? 제가 일 단계를 이야기 하니 목사님 저는 그 정도의 일 단계는 벗어났습니다. 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는데 과연 그런지 두고 봅시다. 이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엄마가 애를 때릴 때, 아이가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무엇 때문에 나를 때리는가 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머니 저 때문에 마음이 상했지요! 이런 아이가 되어도 대단합니다만 어머니! 제가 일등 하다가 이번에 50등 하니 마음 아프지요! 알기는 아는 구나. 그렇지만 참으세요! 세상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습니다. 이게 아인지 어른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만 때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즉 권위자에 대한 종속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때리고 달래야 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나를 때리는 분이 무엇 때문에 때리는 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교회 오는 사람은 목사님에게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저주받는 다는 철저하게 목사에게 종속되어 있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 교회 다니기입니다. 두 번째 단계란 목사라는 권위에 전적으로 종속됨으로, 그것으로 신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큰 교회 같으면 주의 종에게 욕하면 안 되지! 하면서 무조건 적으로 복종하는 귀속감, 안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일 단계? 이 단계? 그러면 삼단계가 또 궁금하겠지요? 삼 단계는 목사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성경 보겠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목사님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스스로 서야 한다는 자립심, 세 번째 단계가 자립심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착한소년 착한소녀 되기입니다.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 하면 자의식입니다. 삐아제의 이론에 의하면 이 자의식이 있어야 하나의 시민으로서 독립할 수 있습니다. 자의식이 없으면 자폐증이 되어버립니다. 날마다 엄마만 찾고 엄마만 기대는 권위자에 기대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단계에서 하나님께 매 맞기 싫어서 교회 나왔다가, 이 단계에서는 목사님이 내보다 더 많이 아는구나! 그러면 목사님께 복종해야지! 목사님 잘 만나서 구원받는다고 여기고 있다가 세 번째 단계에 들어가면 목사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의 종이고 실제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자의식, 스스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자립의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착한소년, 소녀 되기입니다.
이 단계가 일반인 같으면 보통 몇 살인가 하면, 요즈음 조숙하니 아홉 살 때부터, 늦은 나이는 열두 살 정도부터 아빠말도 안 듣고 엄마말도 안 듣고 듣는 것은 자기 친구들 말만 들으며 말썽꾸러기가 됩니다. 그런데 이 자의식이 강하면 신앙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의, 자기 의로움을 너무 챙기다 보면 이기주의가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 젊은 애들이 자기 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말도 안 듣고, 목사님 말도 안 듣고, 나는 내 스스로 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입니다.
자! 여러분은 이 세 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입니까? 사람은 자의식이 있더라도 그때그때 마다 일 단계 이 단계로 되돌아갑니다. 살만하면 자의식이 생기다가 어려우면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면서 일 단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나라는 존재가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나오면서 내가 남을 위하여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서 존재해야 올바른 인간이 아니겠는가! 하는 남에 대한 배려가 나오는 것이 사 단계 도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사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삼 단계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르고 내밖에 모르지만 사 단계에 들어간 애들은 아버지 술 좀 끊으세요! 어머니 무언가 좀 배우세요! 집에서 친구들과 전화만 하고, 연속극만 보아 연속극 다 외우지 마시고, 좀 어머니도 무엇을 하세요! 무언가 가정을 생각하면서 어머니 아버지 제가 돈벌어서 효도 할 테니 걱정 마시고 나중에 사실 때 없으면 저희 집에 오세요! 저는 이제 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생각합니다. 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 들어가면 교회도 어떤 교회가 되는가 하면, 그동안은 교회에 헌금이 오든 말든, 목사 월급이 얼마나 나가든, 전기세가 얼마이든 나는 몰라 교회 나와서 구원이나 받으면 되었지 나는 돈 한 푼도 안 낼 거야 이러다가. 사 단계에 들어오면, 가만히 보니 교회가 이래가지고는 재정이 어려울 텐데 내가 얼마라도 보태어야 하지 않겠나! 이런 식으로 교회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여유, 이게 사 단계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이런 말하면, 저는 그냥 이 단계로 돌아가겠습니다. 목사에게 얻어먹기만 하겠습니다. 또는 삼 단계로 돌아가 목사에게서 복음만 챙겨서 천당이나 가겠다는 삼 단계 이기주의입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어려울 때만 교회 오겠다는 일 단계, 그러니 한국교회 전부다 일 단계에서 삼 단계사이에서 제자리 뛰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 단계까지 되는 것도 드물어요! 그것이 안 되니 교회에서 억지로 장로라는 직분을 만들어 줘버리는 것입니다. 이래도 안 할 거야? 장로회인데! 그래서 장로인데 돈 내라. 집사인데 돈 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당신 장립집사 안수 하는데 피아노 하나 기증해! 하도 안 내니 억지로 감투 씌워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목사 천만 원, 그러면 장로는 알아서 이 천만 원 해야지 목사가 천만 원 하는데 장로가 오 만원 이러면 안 되지! 직분 세워놓고 돈 받아서 굴러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왜? 알아서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자기 머리를 굴립니까?
일 단계에서 사 단계까지 하였는데, 날이 더워서 하면서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일 단계는 어린 애, 때려야 말을 듣는 것, 이 단계는 엄마를 사랑하는 것, 삼 단계는 엄마 아빠도 몰라 아제 나 혼자 살 거야 자립심, 사 단계는 나라는 존재가 안 중근이나 이 순신장군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드디어 자기 바깥의 사회와 가정을 생각하는 사 단계. 자 어떻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 사 단계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콜버거는 여기에 두 단계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오 단계가 무어냐 하면? 기존의 질서를 수용하는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 단계는 개혁입니다. 사 단계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 단계는 있는 질서에 순종하자는 것입니다. 질서가 안정되어야 내가 편하다. 그러니 있는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사 단계입니다.
삼 단계는 자기 밖에 모르는 것, 사 단계는 자기가 속하여 있는 사회를 생각하지만 기존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 오 단계는 이래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 나라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고 바꾸자는 것이 오 단계입니다. 이 오 단계에 들어가면 남에게 욕도 얻어먹고 희생도 해야 하는 것이 오 단계입니다.
자 첫째 시간 끝내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육 단계입니다. 육 단계가 양궁에서 만점입니다. 육 단계가 무언가 하면, 교회고 법이고 질서고 가정이고 무어고 간에, 내 몸 자체가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 현재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고 그것이 신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 어떻게 굴려도 그 모든 것에 감사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내가 여보! 이혼합시다. 여보! 감사 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당신 자녀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왜? 나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주님 것이라고 바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받고 안 받고 가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께 감사한일, 내가 여기 있다는 그것도 기적입니다. 하늘에서 물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것도 감사, 달을 주시는 것도 감사, 시편 136편에 보면, 달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별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남들 다 보는 별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 세상에 남들 다 보는 달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좋아서 흑흑 흐느끼면서 우는 사람, 그 사람이 육 단계입니다. 좀 미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정말 언어로서 표현이 안 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갔을 때에, 자기 본인을 그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알거든, 그가 삼층 천에 올라갔거든, 나이 아니고 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국의 빛 앞에서는, 빛이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해 버리니까, 광채가 오면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빛 앞에 서게 되면 걱정해야 할 나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걱정 하는 나, 두려워하는 나, 염려하는 나마저 날아가 버린 그런 상태! 오직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그 단계가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난 그 단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러내심입니다. 따라 합니다. 불러내심 드디어 불러내신 주인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전 까지는 내가 열심히 불러내도록 아부를 한 것입니다. 교회 열심히 와서 기도하면서 연기하고 아부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불러줄 거야? 자기가 불러내어질 만한 폼만 잡는 그런 행동을 해 왔는데 그것이 교회 다니기이고 헌금하고 전도하기인데,
진짜 불러내심을 받았다면, 주여 누구십니까? 이 빛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단계, 그 앞에는 적도 없고 원수도 없고 나도 없고, 찬송가 204장에 나오지요!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천지가 간 곳없고 오직 주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천지가 간 곳없고 오직 주님 앞에 내만 서 있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만 등장 되 있는, 이것이 바로 육 단계인데,
여러분들이, 성도는 육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일 단계 갔다가 육 단계 갔다가 불쑥불쑥 두더지 튀어나오듯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는 한 십분 쉬고 계속 하겠습니다.
녹취 050908 이장우
구원론 중 소명 1-2
05. 6. 13일 강의 이근호
자 둘째 시간이 시작 되었습니다. 둘째 시간되면 첫째 시간 다 까먹지요! 그래서 첫째 시간의 이야기를 요약할 텐데, 그러면 여러분이 아 목사님이 저런 이야기를 하셨지 하면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오른팔로 우리를 건지신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꾸만 도망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도망치고 하나님은 게 섰거라! 하는 식으로 계속 뒤 쫓아와서 우리는 데리고 가는 식으로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소명, 불러내 주심이라는 것입니다.
소명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찾아오심과 또 하나는 도망치는 것입니다. 도망침과 찾아오심이 우리 평생 동안 계속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찾으시고, 우리는 계속 도망치고 날 따라오지 말라는 식으로 계속 도망가서 결국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그 성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죽음입니다. 바로 세상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망치는데 성공하는 이상으로, 죽음과 세상인 이곳에 오셔서 건져내시는데 성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건져 내시는데 성공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이 세상이며 하나님이 찾아오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무슨 세계인가 하면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공동묘지입니다.
볼록 볼록 볼록(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이 볼록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동묘지, 귀신이 나온다는 공동묘지! 사람이 태어나도 결국 무덤이나 화장터로 끝이 납니다. 이 죽음의 세상에 누가 왔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같이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뚜껑을 열고 일번타자로 탈출한 분이 예수님이고, 그 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예수님이 탈출한 통로를 통하여 부활의 나라로 가는데 그 통로가 세 글자로 십자가라고 합니다. 그 통로를 십자가라고합니다.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소명이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끈질기게 찾아오심이 있고 또 하나는 도망치기입니다. 결국 우리가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아무리 따라 와 바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거야! 우리는 결국 우리 마음대로 삽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그것이 다 모이고 집결되는 곳이 무어냐? 바로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서 남들처럼 살고 보니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이냐? 공동묘지 결국 죽음뿐입니다. 죽음 외에는 없습니다.
죽은 자이기에 죽은 자가 찬송하고, 죽은 자가 기도하고, 죽은 자가 교회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을 못합니다. 왜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살아 있을 때에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한다고 하는 것이 마치 찬송이고 기도이고 예배인줄 알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곧 죽을 인간이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예배와 기도를 평소에 살아있으면서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예배 찬송 잘 드리는 그 인간이 죽는 다는 이 말은 진작부터 죽을 인간이 좀 살았다고 창송하고 기도하여 영광 돌린다고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찬송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기도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찬송 열심히 하여도 결국 죽습니다. 죽음이라는 본래의 자리에 도착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을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는 다는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니 오히려 홀가분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죽는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나가 사라지니 즐거운 일입니다.
결국 도망친 곳이 공동묘지 압니다. 그러므로 희망이 없지요? 찬송해보아도 기도해보아도 예배드려도 희망이 없었는데, 희망은 다른 게 아니라 이 희망의 자라에 누가 섞여 들어온 것입니다. 누가 섞여 들어왔는가? 예수님께서 산 사람보고 기도 열심히 해야지? 예! 전도 열심히 해야지? 예! 이렇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 죄 때문에 죽어! 너 죄 때문에 죽는단 말이야! 우리로 하여금 죽음 속으로 몰아넣고, 이제 죽었으니까, 이제 자력으로 구원받을 사람 손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죽은데 어떻게 손을 듭니까? 그 죽은 자를 주께서 합세하여 들어가서 자기가 첫 번째로 부활하심으로 구약의 그 유명한 구원의 오른팔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오른팔은 젓가락질만 하지만 예수님의 오른 팔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오른 팔입니다.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 오른팔이 오른 쪽에 계셨기에 쏟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의 오심, 하나님의 오른 쪽 자리는 무슨 자리인가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자리입니다.
구약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몰라요!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구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누가 구원을 해줍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오른 편에 계십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이시기에 그 오른 편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팔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는 그런 능력이 포함된 팔인 것입니다. 무쇠팔, 천하장사 그런 노래 있지요 그 무쇠팔 보다 더 강한 팔이 예수님의 팔입니다. 죽은 자라도 살려내는 능력이 예수님의 오른 팔입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자라는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로 갑니다. 그 골짜기는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전부 해골밖에 없습니다. 여기 산 사람이 있어요! 하니 모두 조용합니다. 왜요?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인자야 저 해골들이 살겠느냐? 에스겔이 아무 소리를 못하지요. 그저 하나님이 하시면 살겠지요! 그래 한번 보아라!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그 뼈들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찾아서 맞추어지고 힘들이 생기고 가죽이 입혀지면서 갑자기 살아나는데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해골이었는데 살아나니 이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군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이야기 하는가 하면, 장차 오실 인자가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 그때 그 인자로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에스겔이 보았던 그 인자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죽은 자도 살려내는 부활의 능력을 발휘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죽은 묘지와 같은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끈질기게 찾아오셔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백성들만큼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능력으로 이 죽음에서 건져내어서 예수님이 사시는 그 나라에 살게 하시는 그 이야기가 이 두꺼운 성경책 속에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된다는 이것이 저는 이 성경에 보이네요! 그리고 또 무엇이 보이는가 하면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힘으로는 천국갈 수 없다는 것도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은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믿음은 행위에 속하지 않는 다는 말은 예수님의 행위이기에 우리는 선물로 그냥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아보니 그 안에 영생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그 믿음으로 우리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이 성경책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데도 여러분이 아직도 긴가민가하면서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죽음에서 건져내신다는 이까지는 이해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끝까지 도망친다는 이 사실에 대하여는 무엇인지, 왜 교회 오는 것을 도망친다고 보느냐? 이 점에 대하여 아직 정리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제가 지금부터 정리를 해 드리고자 합니다.
로마서 8:26-27절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이 성령이 무엇이라 하였지요? 예수님의 오른 팔이라고 하였습니다-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하 간구하시니라․․․․․․․․․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이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뜻을 왜 모르는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하기 전에 슬픈 이야기하기 전에 기쁜 이야기부터 먼저 해야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 하나님을 뜻이 무언인가 하면 30절에 보시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다는 것이 소명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요 식대로 하실 것을 아시기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께서 다 행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자기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른 팔이기 때문에 다 해내십니다.
여기서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미리 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였다는 것을 모르지 부르심에 대하여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모르니 의롭다 함과 영화롭다 하시는 모든 것을 다 모르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였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모를 수밖에 없지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미리 정하신 것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하였기에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요.
이것이 현대신학에서 제일 어려운 점입니다. 현대신학에서 제일 어려운 점이 내가 미리 정한 사람일까를 본인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알고자 한다면 여기서 잘 못된 소명감이 나오는 것입니다. 방금 함축하여 이야기하여 좀 어려운데 좀 쉽게 나가봅시다.
구원 파에서 이런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5월 6일 날 구원받았습니다. 11월 3일 날 구원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들 합니다. 이것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10년 전 11월 3일보다 10년 후 5월 8일 날 그때보다 더 은혜로운 것을 받아 버리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하면 전에 10년 전 11월 3일 날 받은 그것은 소명이 아니었고 착각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분 뒤에 또 더 은혜로운 것을 받으면 바로 앞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또 16분 뒤에 그렇게 되면 또 앞의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된 것이구나! 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미리 정하신 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납득이 되도록 포장을 해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으로 가지고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착각입니다.
스스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라고 가지고 있으면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 내가 내 마음대로 위반할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고, 아까 말한 콜 베르게의 3단계 착한 소년 착한 소녀, 내 운명은 내 스스로 자의식이 챙긴다는, 내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넘어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라는 식의 내가 임으로 하나님의 뜻을 조정할 수 있는, 하나님보다 더 위에 설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1999년 11월 3일 내가 소명을 받았다면, 1998년 10월 달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1999년 11월 3일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기 때문에 그 전에 있었던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999년 11월 3일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책임이지 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소명 받은 날은 1999년 11월 3일이라고 정하여 놓으면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말기 암으로 진단 받았다가 2003년도 5월 6일 날 그날에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암이 나았다면, 그런데 같은 날 다른 병실에 있던 말기 암 환자가 2003년도 5월 6일 날 어떤 병실에 있던 사람은 기도를 했는데 암에서 나은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나니 그 암에 더 심하여져서 그 다음날 5월 7일 날 돌아가셨어요. 이렇게 되면 나의 기도는 응답이 되었고 저 사람은 기도를 잘 못한 것이라는 의식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런 의식이 들지 않고 암에서 나은 내 기도보다 암으로 죽은 그 사람의 기도가 더 나았다면 암에서 나았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말을 못합니다. 왜 기도를 잘못 하였기에 암에서 나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기도를 잘 한 사람은 죽었고 기도를 잘 못했기 때문에 암에서 나았다면 감히 교회 와서 부끄러워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저요 5월 6일 날 암에서 나았거든요! 부끄러워서 죽겠습니다. 빨리 은혜 받아서 죽어야 하는데, 그런데 아직도 제대하지 못하여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끄럽지 않고 그것이 당당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같이 기도하였는데도 그 다음날 죽은 사람의 기도는 엉터리였고 암에서 나은 자기 기도는 맞는 기도로 저 쪽은 안 맞는 기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이 진리라고 성경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5월 5일 날도 해는 떴습니다. 그 해를 누가 뜨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뜨게 되었습니다. 5월 6일 새벽에도 별을 떴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다만 그 사람이 챙기는 것은 5월 6일 날 기도해서 암 낳았다는 것만 챙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은혜입니까? 죄 용서 받고 일찍 쉬라고 천국 간 사람이 은혜 받은 것이지!
기준은 병에서 낫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이 정답이며 기준입니까?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고, 오른 팔, 성령이 임하심으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신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이야기 하다가 고함지르다가 목이 쉬어도 괜찮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무엇이 정답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기에 죽고 안 죽고 나의 암이 낫고 안 낫고 하는 것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5월 7일 죽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죽었는지 안 믿고 죽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5월 6일 날 기도하였더니 암에서 나았다. 암에서 낫고 그 사람이 한 50년 살다가 지옥가고, 5월 7일 날 기도하여 기도 응답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다음날 죽어서 지옥 갔다면 지옥 가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게 무슨 응답입니까? 이런 응답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들은 왜 자꾸만 도망을 치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이 분명히 있는데, 이 성경 말씀 놔두고서 자기 유리한 대로 신학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날 어떻게 하였고, 기도하여 병 나았고 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무엇을 가지고 옵니다. 저는 그것을 마일리지라고 합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 의로움의 마일리지, 그러니 누적된 점수 이것 없으면 하나님이 날 구원 안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나오는데, 믿음이 무엇이냐를 조용하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떠든다고 잘 믿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하게 이야기 할 테니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란, 성경 말씀 전부가 하나님의 홀로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믿어질 때에 그것이 믿음입니다. 무엇이 믿음이 아니냐하면, 성경 말씀의 일부를 내가 지켜야 내 믿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키시고자 자신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소명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소명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소명을 이루신 분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 그 소명을 이루셨다는 증거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소명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구원된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된 것이 바로 우리 이름의 소명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의 소명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어려운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말이 사도 바울의 말인데, 예수 안에서라는 그 영역 안에서는 무엇이 지워지는가 하면 나라는 것이 지워집니다. 나라는 것이 끊임없이 지우개로 지우듯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10월 6일 날 은혜 받았다. 그런 나가 지워집니다. 왜 지워지는가 하면,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기에,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고 예수님만 살리는 능력이 계속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것을 지워버립니다. 내가 축복받았다고 하면 그것도 지워버립니다. 모든 축복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복이 오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기에 그 복을 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창세전에 이미 주어 졌기에 이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실분이 지킬 것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 지켜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아침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우리교인들이 얼마나 이해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차를 타고 오는데 중앙선 침범을 했습니다. 그러니 경찰이 와서 안전 운행하라고 하면서 벌금 3만원을 내라고 하였습니다. 3만원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고래 밥이 몇 개이고 새우깡이 몇 개입니까? 3만원이 보통 큰 돈이 아닌데 날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옆에 다가와서는 벌금이 얼마 나왔습니까? 지금 벌금 나와서 기분 나빠 죽겠는데 누구 약 올립니까? 3만원 나왔어요! 제가 대신 대납하겠습니다. 벌금은 나에게 나왔는데 벌금을 그분이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사람 다 있구나 하면서 가다가 이번에는 과속을 해버린 것입니다. 다시 잡혔습니다. 20키로 이상 과속하여 7만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이 또 와서는 얼마 나왔습니까? 7만원입니다. 제가 대납하겠습니다. 그 참신기하다.
이번에는 또 차선 위반하여 2만원, 안전띠 안 매어서 4만원, 이래가지고 합께 46만 8천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치 나온 벌금 전부를 그 사람이 다 갚아준 것입니다. 왜 갚아주는 것인지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가 당신차가 아니라 내 차이고 당신 몸이 내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아담의 죄에 물들어 태어난 사람은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 대신 말씀 지키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성령을 받지 않고서야 어떤 사람이라도 눈치 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내 대신 갚을 치른다는 시실을 안 믿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대학 교수를 많습니다. 황우석교수도 있고 철학박사 김용옥교수도 있고 똑똑한 사람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안 믿는가 하면, 첫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 지었다고 해도 내가 책임지지 남이 책임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른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자기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메시아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들이 예수님처럼 착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는 그런 예수를 믿지, 나는 개떡같이 잘못되게 살아도 그분이 모든 죄 값을 내 대신 다 치르는 메시아임을 그들을 성령을 안 받았기에 눈치 챈 적도 없고 알아들은 적도 없고 누가 옆에서 그런 소리해도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기독교 사람들이 사람을 꾀려고 만들어 낸 것으로 알고 있지 실제로 그렇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것이 대신 죽음입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이제 46만 8천원까지 갚아 주었으니 좀 미안하지요 고맙기도 하지만, 그래서 자기는 반듯하게 운전하는 것입니다. 70킬로로 가라면 70으로 가고, 안전띠 메고, 중앙선 침범 안 하고, 차선 지키면서 곱게 운전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통순경이 와서 벌금 내어야 하겠습니다. 운전 바르게 하였는데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당신 뒤에 오는 사람이 잘못하였기에 당신이 벌금내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억울하지요! 왜 내가 잘못도 안 했는데 남이 잘못한 것을 내가 책임지느냐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너처럼 억울했다는 것을, 억울하지만 대신 갚아 주었다는 날이 갈수록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남이 저지른 잘못에 같이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못났고 나는 못났고 너희는 잘 났고, 나는 가난하고 너희는 잘 되고, 나는 죽고 너희는 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당해보니 억울한 것입니다. 나도 억울한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죄를 한다고 얼마나 억울하였겠는가를 그분은 죄도 짓지도 아니하신 분이신데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정을 더 많이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하다보면, 저도 개척교회 하다보면 어떤 것이 목사에게 제일 얄미운가 하면, 남들은 돈 많이 내는데 자기는 돈도 안내고 좋아서 점심만 먹고 가는 사람, 제가 너무 직선적인 말을 해서 여러분이 무언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아무 소리도 안하시는데, 교회 헌금을 하는데 한 사람이 다 해버리고 다른 사람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 덕에 헤헤 그리며 놀자는 것이지요!
그럴 때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당하는 시험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봉입니까? 남들은 뻔뻔스럽게 점심만 먹고 가도 양심의 가책이 없는데 저는 헌금을 많이 하여도 교회가 이렇게 어려운데 하는 마음을 주셔서 양심을 찔리게 하니 상당히 불공하다고 원망을 하겠지만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너 같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억울하게 모든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을 너의 삶 가운데서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느껴보면 주님이 나를 대신 한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에 이삭은 자기가 굉장히 좋아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아하는 아들에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녀를 죽이라고 하면 순종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주신 것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그 정말 좋아하는 아들이 내 대신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제 실감나는가 하면,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남이 잘못한 여파를 덤탱이로 뒤집어 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야~ 예수님이 나를 이런 식으로 구원하셨구나! 인간도 아닌 나를 이런 식으로 구원하셨구나!
이럴 때에 그 사람에게 이런 것이 나옵니다. 성경말씀은 제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이런 사람을 가지고 미리 정하신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지고 부르심은 입은 자, 의롭다 함을 입은 자, 영화롭게 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하는데 여러분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런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사람이 미리 정하신 사람이라고 규정을 해 놓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여야 미리 정하신 사람이 됩니까? 하는 것을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까 사건 하나 이야기 하였지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난데없이 남이 잘못한 책임을 본인이 질 때, 억울함을 느낄 그 때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참다 참다 못하여 터져 나오는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그것을 참습니다. 왜? 인내함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참는다고 참습니다. 그러나 그것 참는다고 참아보아야 정신병 걸립니다.
하나님은 연기하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솔직한 사람을 원합니다. 모를 때는 솔직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번에 교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무언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번 교회 일에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수군수군하면서 뒤에서 욕하고 이래서는 교회 다닐 마음이 안 납니다. 아마 다음주에 나오고 그 다음부터 안 나오겠습니다. 목사님께는 좀 미안하지만, 하나님께서 사건하나 만들어서 난데없이 나에게 덤텅이를 씌우니 저는 교회나오기 힘들겠습니다.
전에 6월 13일 날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 첫 시간에 교회 와야 하나님을 있나? 집에 와도 하나님이 있다는데, 그것 참 좋은 말로 들립니다. 나 집에 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강의할 때 가장 중요한 6단계를 빠뜨린 것입니다.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감사가 나오고 집에 가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불만이 입에 가득 차서 집에 가지 문제 아닙니까?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며 삐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잘 들어 보세요 지금부터 중요합니다. 그것이 자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동안 교회 다니기 기도하기 헌금하기로 삼 겹 사 겹으로 가렸던 것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껍데기를 벗긴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원래 그랬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장로 어머니 권사,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가 되어 가지고 들은 기술이 있어가지고 이럴 때는 참아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럴수록 감사헌금 더 내고, 온갖 종교기술을 다 동원하여 몰래 삼 겹 사 겹 가면으로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끝까지 따라오시는 것입니다. 끝까지 따라와서는 그 종교의 이름으로 감추어 두었던 그 껍데기를 휙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하여? 난데없는 사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통하여, 백사람 에게 물어보면 백사람 다 나에게는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그 여파가 나에게 미치는, 그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통하여 그동안 나의 종교적인 가면의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기면서 네가 원래 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잖아! 네가 바로 나의 원수야! 처음부터 원수였어! 아닌 척 했을 뿐이지! 그러실 때에 비로소 무엇이라고 하게 됩니까? 그렇다면 나의 이런 본성을 드러내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비로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전 까지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저는 이렇게 하였습니다. 저는 죄가 없습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저 나나 맨 날 자기 생각하다가 주님이 그렇게 찾아오시면 주여 누구십니까 하게 됩니다. 나는 그런 너의 죄를 위하여 대신 벌금을 대납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마지막 대목이 이렇습니다. 주여! 저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뿐입니다. 제가 끝까지 그 피만 의지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미리 정하신 자요 의롭다 하신자요 영화롭게 하신 자입니다.
단계를 너무 많이 펼쳐 놓으니 지금 나는 어는 단계인지 그것을 정한다고 바쁘십니까? 제가 이야기 하였지요! 천국이란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영화롭게 하는 곳입니다. 너무나 쉽습니다. 어린이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의 품위와 인격과 자기의 명예를 포기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라면 그냥 두겠지만 자기 백성이기에 따라와서 언젠가는 그 가면을 휙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벗기면서 그동안 숨어있던 독사의 모습이 튀어나오면서, 주님 이래도 됩니까? 그동안 제가 주님을 얼마나 섬겼는데 너무 심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작 그러지! 더 해봐 더! 더! 더! 너 마음창고가 숨겨져 있던 욕 있잖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죄인 된 것을 알고, 죄인 인 것을 알면 비로소 거기에서 나오는 고백이 내가 구원받은 것이 은혜이고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 인 것을 알 때에 정확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죄인 됨을 알려주기 위하여 집에 있지 말고 교회 나가세요! 교회 안 나와도 된다고 해 놓고서는 갑자기 결론이 이상하게 나옵니다만, 교회 나와서 그냥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지 마시고 밥도 하시고 봉사도 하시면서 덥다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네가 봉사 많이 했느냐 내가 봉사 많이 했느냐. 네가 목사의 사랑을 많이 받나 내가 많이 받느냐며 한번 다투어도 보시고, 그런 가운데 있는 성깔 없는 성깔 다 튀어나옵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아이고,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겠네! 나는 고상하니까! 하면서 가지 마시고 그들과 어울리고 부디 끼면서, 야~ 나도 참 만만치 않아! 그런 것을 몸소 느끼게 하기 위하여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는 어린애도 다 모였지만 더운데도, 자꾸만 모이기를 힘써서 우리의 실상이 이것 밖에 안 되니 주님께서 오른팔로 십자가로 구원을 거저 주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대신 벌금을 다 치러주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구원하였다는 은혜를 더욱 알기 위하여, 그 주님의 억울한 일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오 분 쉬겠습니다. 녹취 050829 이장우
구원론 중 소명 1-3
05. 6. 13일 강의 이근호
쉬는 시간에 어떤 똑똑하게 생긴 어린이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만들기 전에 지구는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질문하기에 제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사람 만들어 심어놓으려고 지구도 그때 같이 만들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이의 질문을 이번 시간 시작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신에게 나아갈 때에 있음에서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있음에서 나아가려고 하니 어떻게 있어요?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되고 우리가 있기 전에 누가 계셨습니까? 우리가 있는 것 말고 우리가 있기 전에 누가 계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결국은 그분이 우리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나도 없애고 지구도 없애는 것입니다. 나도 없애도 지구도 없애고 남는 것을 건져내심 불러주심 그것만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사라지고 지구도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마음준비를 좀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 하나님 무엇을 나에게 해주시겠습니까? 내가 있고 그런 나에게 해줄 것을 찾지 마시고 내가 사라지고 지구가 사라져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세계로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우물 이야기하였지요! 우리는 이 땅이라는 우물 속에서 눈에 보이는 세계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불러냄을 받아 끄집어내어지면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어 주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끄집어 낸 것만 아니고 더 기쁜 것은 미리 정한 사람만 끄집어낸다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구원하지 아니하고 저만 구원합니까? 왜 우리 어머니는 구원하지 않고 저만 구원합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구원하지 않고 저만 구원합니까? 정답은 무엇입니까? 너만 정하여 졌기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하여 진 사람만 건져내시는 것이지 정하지 않은 사람은 건져내지 않습니다.
그러니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맙습니다가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에서 고맙습니다. 할 때는 나에게 유리할 때에 고맙습니다. 하는데 성경에서 감사라는 것은 너 자신 때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나에게 접촉된 것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접촉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면 둘째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버리는 것입니다. し?하여금 그런 껍데기를 벗김으로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제 인생을 이렇게 망가지게 하시는 것입니까? 언제까지 망가지게 하시겠습니까? 이보다 더 처참한 지경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면서도 무언가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런 대상을 연결시켜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한 것이지요! 그러면 그런 감사는 어떤 감사입니까? 모든 일에 감사입니다. 애가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전부다 감사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분에 의하여 주어진 사태이기에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날씨가 더우니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불쾌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을 마련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신다면 이런 더운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감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리 정하신 사람에게만 나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번 세 번째 시간에는 제일 중요한 마지막 6단계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게 되는가를 이 세 번째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보고 지키라고 주신 것이기에 우리를 비켜 가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이 성경말씀을 눈 감고 아무 구절이라고 찾아보세요. 그러면 그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고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이 불신자에게는 자기에게 하는 것을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은 나보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보고 다 지키라고 주신 말씀임을 아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가 이렇게 있다면(그림을 그리고 있음) 우리 곁에 보이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밖에 보입니다.
그런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셔서, 너는 못 지켜, 못 지킨다는 말이야, 매일 때리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너 그 말씀 지켰나? 못 지켰잖아! 어제 오후 5시 15분에 보니 돈을 사랑했잖아! 그러니 못 지켰지! 만날 우리보고 말씀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못 지켰다는 것입니다. 너는 육체로 태어났기에 못 지켜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키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는 지킨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더운데 안 떨어지고 붙어 있느냐? 로마서 8장 30절에 보니 이것이 미리 정하여 졌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였기에 너는 내 때문에 의롭다 함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미리 정하셨기에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이지 미리 정하지 않은 자를 믿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미리 정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정하여 놓았는데 우리가 행동을 잘못해서 중간에 탈락한다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정하신 자를 나중에 미리 영화롭게 하기까지를 다 보장하고 미리 정하셨기에 미리 정하심안에는 마지막에 너는 구원받게 되어 있어! 하는 것 까지 미리 정하심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에 접는 부채 아시지요! 접혀 있으면 막대기모양입니다. 그런데 펼치면 그기에 동양화, 난도 나오고 공작도 나오고 산수화도 나오지요! 우리 인생은 태어날 때 접혀서 나왔습니다. 접혀서 나왔는데 이것이 펼쳐지면서 일곱 살 때 봐! 너는 이렇게 육신이니까 내가 대신 지켰어
아홉 살 때 이런 짓 할 줄 내가 알았어! 열 살 때 이런 짓을 하기에 내가 벌금을 대신 내었어! 마흔 다섯 살 때 그래서 내가 대신 해결한 거야! 구십 살 때도 인간 안 된다는 것을 알 때에 인간되는 것이죠! 이렇게 부채 펼쳐지듯이 점차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죄가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리 정하신 자이기에 그때그때 마다 펼쳐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고 우리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왜 감사가 나오느냐? 원래 불러주심이죠! 이것이 참 어려운데, 불러주심이 아까 제가 성경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까? 성경 말씀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도 누구보고 하신 말씀입니까? 우리보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보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한 사람은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대상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그 대상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정답은 예수님 쪽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성취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직접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 말고 따로 사람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셔서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 소명을 받고 어떤 식으로 천국을 성취하였는가를 그 과정을 추적하면 그 과정이 그대로 우리에게 대대로 주어집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염려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좀 곤란하다는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뽑혀 나왔다. 이러면 정답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골로새서 1:16절에 나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목적으로 하여 우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소명이라는 것조차,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조차, 내 소명 먼저 챙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동원시키지 말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소명 받고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서, 그것이 사실 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인데 그 예수님의 일이 나중에 전부다 나의 일로 반복되고 되풀이 되어서 내 인생에 염색되고 페인트칠하여 지는 것처럼 덮쳐진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야 그것이 신학적으로 옳습니다. 성경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어린 애를 위하여 이야기를 하나 하면 여러분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옛날에 모세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러니 동화하는 것 같지요. 말을 어렵게 하면서 동화처럼 한다고 동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세라는 할아버지가 소명도 없으면서 소명 받은 척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들었습니다. 너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과 봉사를 다해야 해! 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다른 동기들은 다 죽었지만 기적적으로 엄마 때문에 살아난 거야! 내가 옛날이야기 해줄까? 너는 물위에 떠있는 어린애였어!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동동 띄울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쁜 폭군이 있어서 명령을 내린 거야! 여기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다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려 주라고 한 것입니다. 공무원들이 나와서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죽이는데 모세 엄마는 거절하였습니다.
우리 애는 딸이에요! 거짓말 하면서 숨겼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울면 이불 덮어가면서 울지 마! 울지 마! 네가 울면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게 되어있어! 그러나 어린애가 우는 것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울지요! 자기 밖에 모르니까!
그러니 그 애를 남에 손에 죽이기보다 자기 손을 죽입니다. 자기 손으로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이여! 이제 제 손으로는 끝났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맡기니 강물에 두둥실 떠가는 것입니다. 마침 그때 애굽 바로의 공주한테 걸려서 다행이지 만약에 그 당시에 공주에 걸리지 않고 경찰대장에게 걸렸으면 또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이, 모세조차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하여 앞당겨 애굽으로 와야 한 것입니다. 모세 때문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사셨는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극복하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 전에 모세라는 분을 먼저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살아났는데도 모세는 자기 딴에 제 3단계, 3단계가 무엇이지요? 다 잊었나요? 착한 소년 착한 소녀 되기. 하나님이여 제가 착하게 살겠습니다. 거기서 한 단계 나가면 4단계, 4단계는 무슨 단계? 하나님이여! 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봉사하면서 살겠습니다. 6단계가 아니고 제 4단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 같은 위치 나 같은 신분의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이 나쁜 나라에서 건져낼 영웅은 나 밖에 없다. 용기를 내어라 모세야 힘내라 모세야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다.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스스로 나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평소에 자기의 동족과 민족을 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말린 것입니다. 그렇게 말리고 있으니 그 동족 중 한 사람이 모세 너 잘났냐? 예 저 잘났습니다. 저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4단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래 몸 바친다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볼 줄 알고 폭력을 써가지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이냐? 아니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미 소문이 다 퍼졌다
이때부터 모세는 1단계, 1단계가 무엇이라고요? 처벌과 보상,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워서 냅다 도망쳤습니다. 4단계에서 갑자기 어디로 미끄러진 것입니까? 1단계로 쭉 미끄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빠이빠이, 하나님이여 안녕을 처음에 누가 했다고요? 요나! 하나님이여 안녕, 제가 할만 큼 다 했습니다. 이제 저에게 간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명이고 무엇이고 필요 없습니다. 제 하나 편안하게 살도록 근처에도 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 근처에도 가지 않겠습니다. 아이고, 속이 시원해 양이나 치고,,,,
여기서 하나 적어두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공부한 것 소명, 첫 번째 하나님의 찾아오심, 두 번째 소명 인간의 도망침, 이것이 소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긴 오른팔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수백 명을 모아놓고, 분홍색 옷 입고 안경 낀 학생 이름이 뭐예요? 이화! 그렇다 치고 교장선생님이 수백 명의 아동들 가운데 이화하고 부르면서 엄마하고 잘 지내 하면, 아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지? 교장 선생님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잘 알고 있어! 그러면 놀라겠지요!
그처럼 모세가 놀랐던 것이 무언가 하면,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것, 하나님 버리고 도망치고 그저 조용히 살려고 도망쳤던 사실을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 도망칠 때 도망치게 하시고 사람 죽일 때 사람 죽이게 하고 까불 때 까불도록 방치하신 것입니다.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신 것은, 구원받는 것이 모세 너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는 도망치는 사람이고 원래부터 도망치는 사람이고, 구원은 하나님의 오른 팔로 구원한다는 것을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기 위하여 모세로 하여금 네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네 마음대로 해보라. 네가 너를 버리는가! 우리의 죄 보다 하나님의 의가 더 강합니다. 우리의 지은 죄 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티끌이라면 주님의 용서는 한 바케스입니다. 사랑은 한 바케스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기 잘못한 것이 더 낙심하는 사람이 불신자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자입니까? 자신이 죄 지은 것보다 주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교회란 곳은 죄 만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 마저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야기 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의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인간의 죄, 아담의 죄 보다 주님의 은혜가 더 큽니다. 그러니 너끈하게 구원합니다.
모세가 도망치고 사람 죽인 살인자고, 다윗도 마찬가지고, 사도 바울도 사도되기 전까지 사람 잡아 죽이고 예수 핍박했던 사람이고, 저렇게 시시하고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불러내시는 이유가 무언가 하면, 그 사람들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불러내셨는데 그것이 소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명이라고 하니 자기 구원만 챙기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소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께서 자진하여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너는 예전부터 정해진 사람이야 고맙습니다. 그게 감사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미리 정하신 사람이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감사입니다. 이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모세가 놀라서 하나님 웬일이십니까? 신발 벗어라! 웬 신발? 이제부터는 너는 네 마음대로 못 다닌다. 신발이라는 것은 신발 주인이 신고 가야 가는 것입니다. 신발 벗으라는 것은 이제 너는 신발 신을 자격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신발의 주인입니다. 주님께서 신발 가져오라 해서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고 이제 모세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너는 다시 애굽으로 가거라. 안 갈렵니다. 왜? 말을 못합니다. 그게 이유냐? 예. 그렇다면 너의 형을 붙여주마! 이제 애굽으로 가서 50만 되는 대군을 끌고 다시 돌아오너라.
모세가 했습니까? 모세를 찾아온 하나님의 오른 팔이 했습니까? 출애굽기 15장에 보니 하나님의 오른 팔이 애굽의 군대를 이겼습니다. 모세가 칼싸움 잘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 군대와 붙어서 싸운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의 오른 팔이 구름기둥으로 애굽 군대와 격리시키고 홍해도 갈라지게 하고 애굽 군대는 물에 빠뜨리고 전부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아처럼 그리스도처럼 인도하였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소명이라면 그러면 그 모세의 소명 속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다. 그 모세에게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을 준 것을 모세 속에 들어있는 예수님께서 다 지켜서, 마지막 때는 모세 같은 분으로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법을 다 지켜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부터 건져낸다는 것이 바로 모세와 예수님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옵니다. 마지막에 어린 양에 의해서 유리바다를 홍해처럼 건너간다는 대목이 요한 계시록 4장부터 죽 나와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 강의를 다 끝내겠습니다. 애들 때문에 너무 길게 하면, 핑계 같습니다만, 범사에 감사한다. 감사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가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람취급해서 일으킨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사람,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간주해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다고 자기 쪽에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한대 보답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고마운데 봉투에 돈 몇 만원 넣어서 다음주에 강대상에 올려야 되지 않겠는가? 뭐 돈 내겠다는데 억지로 내지 말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많이 있으면 많이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감사란 감사하는 것으로 되었지 내 행동으로 뒷받침한다고 해서 감사가 더 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감사가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흔히 교회에서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행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할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온유요. 화평이요. 자비요. 양선이요. 형제우애란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처럼 오늘날 이 의존교회 교인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기를 바랍니다. 아하! 예수 믿는 사람은 저딴 것 때문에 낙담하지 않구나! 이유를 알아보니까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하는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의 숙제로서 본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 신앙생활은 저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의존교회 여러분들이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님 되시는 분은 자녀들이 잘 못 할 때는 1단계이기에 야물락 지게 패시고 잘할 때는 초코파이라고 하나 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시면서 애를 때렸다고 영광이 아니라 애를 때리면서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귀한 아이를 때릴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그러면 그런 행동을 한 자기 행동이 정당화 되고 합리화 되고 그러니 나 잘났잖아! 이렇게 될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아이를 때리고 아이가 울면 부모 가슴이 아프지요!
아플 때는 두 번째 시간에 이야기 한 것, 얘야! 네가 나빠서 나쁜 것이 아니라 이 애비가 나쁜 사람이 되어서 너 같은 자식을 낳았다. 네가 이렇게 공부 못하는 것은 다 내 닮아서 내 탓이다. 이런 말을 속으로 해야 합니다. 애가 그 말 듣고 그 핑계로 공부 안할 수 있으니까! 지금 애들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거든요. 애가 공부 못하는 것이 다 내 탓이다. 너는 나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돼! 애라 한대 더 맞아라! 공부 할래 안할래? 예배당에 갈래 안 갈래? 이 모든 것이 감사와 자기반성이 되풀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더 이상 자기를 속이지 말고, 신앙 있는 채 하지 말고, 그저 솔직하게 주님 왜 이렇게 일하십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낙심하면 낙심한대로, 절망하면 절망한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 함으로 주님께서 이 부족한 자를 위하여 대신 희생하신 그 사랑을 저희들이 한 시도 놓치지 않는 그런 교인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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