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레시피
2023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6
(14: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14: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14: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14: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14: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14:6)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가뭄이 들면 인간은 힘들어 합니다.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 동네에 비가 내리지 않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전에는 왜 비를 내리십니까” 라든지 “굳이 그동안 우리를 살려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로 바꿔야 합니다.
인간 세계를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은 인간들에게 형벌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인생은 사는 게 형벌입니다. 형벌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각자 독을 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독’이란 인간들이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저항하고 반항하는 겁니다. “왜 세상은 내 중심으로 사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거야?”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대듭니다. 이 대드는 방식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억지로 자기 인생을 감내하는 겁니다. 즉 “인간성 훌륭한 내가 참아야지 어쩌겠어”라는 것이 소극적 반발입니다.
■적극적 반발은 자신들을 신의 대항자로 자처하는 겁니다. 즉 주기도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뜻이 하늘에게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말씀을 근거로 신의 도움을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서로 돕는 식으로 이 세상의 난제들과 가난들을 해소하자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신을 믿다가 손해보지 않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깊이 숨겨진 본성입니다. 못난 신보다 우리 인간들이 다 거룩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증명하자는 겁니다. 인간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고장난 것을 모릅니다.
인간 세계에 저주가 주어지는 것은 바로 ‘저주’ 그 자체를 위함입니다. 이를 증명해주는 곳이 바로 가뭄과 가뭄의 연속에 최종 도달지점이 되고 곳입니다. 그곳은 예수님 십자가 달린 곳입니다. 그 현장에 두 사람의 강도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두 종류 나뉘어지는 겁니다.
한 강도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세상을 봅니다. “당신이 진정 메시야라면 나를 구원하라. 그러면 당신이 믿어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자연 현상도 무턱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지시하므로서 일어납니다. 시편 19:1-4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비 한 방울도 구름과 바람조차도 주님의 명령없이는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하나님의 레시피대로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들 내부의 독소로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답지 못하니 자신들이 하나님 노릇하겠다는 도발성은 인간의 마음에서 잠잠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뭄은 특정 방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약에 가서 그 최종 결론이 드러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5-36)
즉 기근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는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징벌의 장임을 한결같이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징벌을 당해도 쌉니다. 사람들은 징벌이라는 것을 받아도 도리어 반발심이 더 크게 냅니다. 하나님에게 도발해 버리는 겁니다. 이런 속성들이 다 갖고 있다면 어떻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비의 고향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만 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아브라함 앞길이 평탄케 하시리라고 짐작할 겁니다. 아브라함 본인이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대처는 간단합니다. 그냥 그곳을 떠나는 겁니다. 그리고 기근이 없는 애굽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바로 왕을 대상으로 하여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으로 속였습니다.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제공받게 됩니다. 밤에 하나님께서 직접 바로 왕에서 찾아와서 그녀가 실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바로왕은 사라가 자기 소유가 될 수없음에 분노하고 실망하면서 애굽 땅을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로소 아브라함은 졸지에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1:56에 보면, 애굽과 전역에 기근이 들어닥칩니다. 애굽 땅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국 사람들이 양식을 구하려 옵니다.
야곱이 살던 땅에서 예외없이 가뭄이 듭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잃어버린 아들과 감격스러운 재회를 하고 형들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자신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즉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은 차질을 진척을 보이게 됩니다. 예레미야 당사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들은 자기 시대의 그들의 살 궁리만 챙기면서 가뭄이 지속되는 것에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간단합니다. 이곳 약속의 땅에서 살지 말고 가뭄이 없는 바벨론 땅으로 다들 나가라는 겁니다. 나가는 자가 사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만약 약속의 땅에 계속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예레미야 29:18에 보면, 결국 이 약속의 땅에 가뭄이 일어나서 사는 것이 더욱 힘들게 하시겠답니다.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세상에서 버티고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중심에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으십니다. 그러다 보니 이 자연을 자기 고집대로 다스리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우리는 여기서 십자가 현장에서 또 다른 강도가 고백하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 기쁨을 나타냅니다. 자신의 신세 타령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끝에는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과 같이 ‘도살한 양’으로 보내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인도하는 언약의 완성 속에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9강-예레미야 14장 1~6절(주님의 레시피)23112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4장 1~6절절입니다. 구약성경 1072페이지입니다.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들 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가뭄이라는 것은, 기근이죠, 비가 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비가 왜 오지 않았는가? 이건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비가 굳이 와야 합니까? 비는 지시받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시편 19편 1~4절에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이 세상이 비가 오든, 비가 안 오든, 바람이 불든, 바람이 불지 않든, 그 비와 바람, 모든 것들, 생물조차도, 그 모든 것들이 누구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은 언어가 없고, 우리 인간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그들에게 통하는 소리가 따로 있습니다. 따라서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여전히 인간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중심,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고집스럽게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여부를 생각하지 않고, 그 행동은 반드시 나를 기쁘지 않기 위해서 나오는 행동들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이 내 중심이니까, 비가 오지 않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중심을 바꾸시겠다는 겁니다. “비가 오지 않으니 힘들지?” ‘힘듭니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니까”라고 되는 거죠.
내가 너를 기쁘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네가 기분 나빠? 솔직히 이야기해봐. 기분 나쁘지? 기분 나쁩니다. 그러니까 비가 마땅히 오지 않고 너같은 인간은 죽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은 문자로 되어서 처음 구약 때는 이스라엘에게만 주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에 가뭄이고 폭풍이고 간에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한 그 비밀은 어디를 가야 알 수 있느냐. 이스라엘에 가야 알 수 있어요.
이스라엘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율법 안에 그 해답이 있다고요. 과연 사람들이, 이방 민족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율법의 정신, 율법에 하나님의 해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느냐. 대부분 관심이 없어요. 사사기 시대에는 하나님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없다가 힘들 때, 잠시 관심 두는 척을 했던 겁니다. ‘하나님, 세상일이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라고 그때야 ‘어디 선지자 없나? 어디 제사장에게 물어볼까?’ 그렇게 돼요.
그럼 평소에는 누구에게 물어보았느냐. 평소에는 내 중심을 인정해주는 신에게 물었어요. 그걸 사사기 시대에 바알신이라고 부릅니다. 얼마면 됩니까? 얼마 바치면 내 뜻대로 됩니까? 이게 우상이란 말이죠. 내 중심은 포기할 생각이 없고, 신과 거래할 생각으로 나서는 겁니다. 신과 거래하는 것이 우리 본성에 자연스러운 겁니까? 아니면 내가 망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자연스러운 겁니까?
이거는 묻는 제가 잘못이죠. 왜 잘못이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고장 난 인생이었습니다. 이번 광주강의 제목이 ‘고장 난 인생’입니다. 강의 중에 이런 예를 들었어요. 새 차를 샀거든 그 차를 보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어요. ‘이 차가 새 차인데, 이걸 어떻게 고장 내지?’ 어떻게 하면 이걸 빨리 고장 내나 하는 마음으로 새 차를 받으란 말이죠.
왜냐 하면 우리의 생일이, 보통 생일은 몇월 며칠이 생일이잖아요. 성경에서는 보통 몇월 며칠은 의미 없고, 어떤 공간을 우리가 태어난 자리로 만듭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 자리를 우리의 출생지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출생지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 자리가 출생지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현장에 가면 딱 두 종류의 인간으로 갈라져요.
구원받은 강도와 구원받지 못한 강도, 딱 두 종류로 구분되는 장소가 구원받지 못한 자도 생일이 되고, 구원받은 자도 생일이 돼요. 그 현장이. 그 현장에서 남들은 볼 것 없어요. 예수님은 어떤 메시아로 이 땅에 우리와 만남이 이루어지는가. 십자가 죽는 모습이죠.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독을 품고 태어났다는 겁니다.
독소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어요. 이거 진단해야죠. 진단하는데 굳이 뭐 교회 가서 진단할 거 없이 평소에 다 진단 됩니다. 왜? 사는 것이 형벌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벌서고 있는 겁니다. 벌 받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벌은 다 받고 있는데, ‘나는 인간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라고 아는 사람은 십자가로 올 건데, 대부분은 벌서면서 버텨요.
‘벌주는 쪽이 센지, 벌 받는 내가 더 강한지, 한 번 해봐?’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벌 받으면서도 씩씩거리는 거예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내가 뭐가 그렇게 죄인이냐?’ 이런 식으로 씩씩대는 겁니다. 그 씩씩대는 모습이 뭐냐. 그게 울음이에요. 울음. 우는 모습으로 등장해요. 아프리카 우물 파기,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국경 없는 의사회, 그린피스(환경보호단체), 위안부돕기 기금,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입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마이클잭슨(1958. 8. 29~2009. 6. 25)이라는 미국 흑인 가수가 있거든요. 그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가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주기도문을 새롭게 해석해서 한 가사 내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 힘으로 도와주는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We are the world~We are the world~’ 이러면서 우리가 서로 돕는 것이 주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선한 우리가 서로 도와주면 이게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냐는 거죠. 반항하는 겁니다. 우리는 고침을 받을 대상 자체가 안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독은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망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 네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냐?’라고 외치는 것이 독소예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네가 왜 관여하냐?’라는 거죠. 사는 것 자체가 기근이고, 가뭄이고, 형벌이라는 여기 구약에 예레미야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어디까지 가지고 가시냐 하면 십자가까지 계속 가지고 가세요. 계속 가지고 가시면 십자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의 상반된 반응.
‘당신이 하나님이면 나를 구원해 봐라’ 십자가에서 한쪽 강도가 그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리고 다른 쪽 강도는 ‘마땅합니다’라고 ‘당신의 죽음은 사실은 내가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고요. 이런 상반된 두 반응이 나타나요. 그게 십자가 이후에 오늘날 이 시대도, 상반된 두 반응이 있습니다. 물론 상반되었다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내가 고생해도 마땅합니다’라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요.
그래도 찌꺼기 긁어모으면 꽤 됩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찌꺼기라고 모아놓고 보면 ‘우와~이렇게 많았어? 종려나무 들고 천국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어?’ 의외로 많아요. 찾으려고 하면 없고요. 인간의 이 세상 삶은 형벌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고 형벌이 뭘 유도하느냐 하면 버틸 때까지 계속 버텨나가는 무리와 집단을 계속해서 양산 시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힘들게 살면 ‘왜 우리룰 이렇게 저주하십니까?’라고 닦달하고 대들죠. 미리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인간은 저주받는가? 저주를 위해서입니다. 그것 말고는 달리 해답이 없어요. 저주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로써는 주께서 쓰시는 이유가 단지 그것밖에 없어요. 인간은 저주의 반발에서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한 그 신에 대해서 타도(打倒)를 외칩니다.
그 타도를 좀 더 고상한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Freedom! 우리에게 인간다움을 행사할 자유를 달라. 이게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이에요. 이념.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독소가 있었고요, 독소가 확장되어서 온 세상이 신에 대한 타도예요. 타도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리가 나와요. 그 자리를 두고 누가 더 높은 신의 자리를 누가 선점하고 차지하느냐 하는 그 투쟁입니다. ‘너 수능 몇 등급 나왔어?’라는 이런 거요.
그래서 이 세상은 주님의 말씀을 구현하는 레시피라고 하면 됩니다. 또는 설계 도면. 어느 현상 하나하나가 예수님이 어떻게 욕을 얻어먹고 인간들로부터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는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 경우는 없어요. 모든 경우가 오직 하나, 타도. 우리 인간을 힘들게 한 신에 대한 타도예요. 적극적 방법도 있고, 소극적 방법도 있어요. 소극적 방법은 교회 안 나오는 거고, 적극적 방법은 다른 종교, 아까 마이클잭슨처럼 ‘신의 말씀을 알고, 신의 말씀을 우리 힘으로 이루면 되잖아’라는 이것이 적극적으로 신에게 도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이나 신약에 나오는 성도들은 이러한 저주환경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걸 이제 보면 됩니다. 성경을 찾으면서. 성도들이 그 대처하는 방법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대처하는 방법과 그 차이점을 알면 되는 겁니다. 가뭄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거예요. 창세기 12장 10절에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왔는데, 거기서 살다 보니까 기근이 있단 말이죠. 가뭄이 있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얼마나 회의가 들고 의심이 들겠습니까. ‘살라는 거야, 여기서 살지 말라는 거야’ 결정하기가 굉장히 모호한 겁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는 자연 세계는 주의 지시를 안 받았습니까? 주의 지시를 받고 비가 오지 않은 거예요.
하늘은 비를 주고 싶어도 하나님의 지시가 “비 내리지 마!”라고 하면 못 주는 겁니다. 이 세상, 자연 세계는 지시하는 분이 따로 있어요. 어느 것 하나도 레시피 따라가야 해요. 맛있다고 설탕 넣고 그러면 안 되죠.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은 시래깃국에 소고기 집어넣어서 그 시래깃국은 아직도 아찔해요. 멸치다시를 넣어야지 소고기를 넣으면 안 되죠.
레시피 대로 해야 해요.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레시피 대로 안 해서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 비가 오고 안 오고, 날씨가 춥고 덥고, 이런 거는 구름도 바람도 자기 마음 대로 못 합니다. 지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느냐. 내려가야죠. 애굽으로. 가뭄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간 거예요. 여기서 우리 같으면 ‘참 결정하기 어렵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뭐가 어려워요. 어렵긴.
주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라면, 이 땅에 들어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요, 가뭄 들면 가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내려가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어떤 나만의 목적, 나만의 목표달성, 이런 게 자꾸 방해되는 거예요. 나만의 목표 달성해서 뭐 하늘의 별을 따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중풍병 고치겠다고 지붕 뚫은 그 사람들은 자기 딴에 중풍병을 낫게 하려고 한 거예요.
그러나 막상 오니까 중풍병은 없고 “너의 죄를 사하였느니라”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일어난 가뭄도 결국은 어디에 도달되느냐 하면 “네 죄를 사했느니라”라는 여기에 도달되는 겁니다. 네가 형벌을 통과하고, 네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야 할 이유는 주님이 너의 죄를 씻기 위해 지출한 희생이 너무 컸다는 겁니다. 꼴랑 너 하나 건지기 위해서 이 엄청난 큰일을 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결과가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뭄도 감사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서 뭐했는가. 그렇게 가서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거기서 살려고 했지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느냐.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바꿔치기하고, 바로 왕은 사기당해서 사라를 얻기 위해서 많은 재산을 아브라함에게 줘서, 아브라함은 갑자기 졸부가 되고, 나중에 꿈에, 실제는 그게 유부녀고 남편 있다고 알려줘서, 바로가 ‘나 너랑 같이 안 놀아. 가!’라고 해서 갔는데, 졸부 되어서 다시 내려온 거예요. 부자 되어서.
그러면 여기서 아브라함이 뭐 잘했다, 못했다, 이런 거 거론할 여지가 없죠. 창세기 41장 56~57절에 보면 요셉을 팔고 난 뒤에, 요셉이 없는 상태에서, 야곱의 동네에 갑자기 가뭄이 들었어요.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쌔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야곱이 살던 그 땅에도 기근이 있지요. 이건 뭐냐. 잃어버린 요셉과 다시 만남의 기회를 준 것이 기근입니다. 만남의 기회. 잃어버렸던 자식을 다시 해후하는 감격적인 만남은 기근이 없었으면 만날 수 없었고, 그 만나는 과정에서 형들이 요셉에 대해서 크게 잘못된 것을 비로소 그들은 깨닫고, 하나님의 더 넓은 범주의 하시는 일을 발견하는 그것을 야곱 언약이라고 합니다.
야곱 언약은 우리의 실수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추진되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계기가 바로 기근이었습니다. 똑같은 원칙이 오늘 예레미야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가뭄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이 시대에 내가, 이 비 없는 곳에서 내가,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생각을 하죠. 하나님은 네가 아니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위해서 가뭄을 준 겁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앞으로 이런 가뭄이나 기근이나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과 말씀이 계속 살아있기를 원하는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계획했던 겁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에 기근이 나와요.
우리의 삶의 환경이 핍박이고 기근이고 환난이고 곤고고 적신이고 생명의 위험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것을 사랑 아니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게, 그 안에서 비로소 우리가 느끼지 못한 큰 사랑, 영원한 사랑이 그 안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로마서 8장 36절에 보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예수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지는 겁니다. 한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독소를 가지고 있다. 독소를 가지고 있어서 인간은 속에서 하나님께 도발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독소를 가지고 있던 이 환경을 저주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힘든 인생을 살게 합니다. 그런데 그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걸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도살할 양이라는, 나중에 죄 사함을 받는 그런 계시가 이미 내 안에 도착 되어있다는 것을 밖으로 표출하는 계기로 삼는 거예요.
그래야 인간이 두 종류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는 세상적으로 따져보면 팔자 참 더럽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강도질 안 할 건데. 얼마든지 이런 생각을 하지요. 그런 강도질 하면서 얼마나 자기 인생을 원망했겠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십자가 만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내가 이 코스를 밟아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과 마주친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지요.
주님이 사랑을 주는 현장에 내가 같이 합류할지는 상상도 못 했지요. 십자가, 십자가, 말로 듣는 것이 아니고 첫 번째 십자가에 참여자가 된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 순간순간이 되겠지만, 그 첫 번째는 강도가 참여한 십자가. 거기에서 강도는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무엇이고, 저주가 무엇이고, 형벌이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용도로써 내가 꼭 강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현재 지금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지금의 내가 주님의 계획에, 레시피에 하자 없는 레시피라는 사실. 진라면 보면 스프가 두 개 들어가잖아요. 하나는 파가 들어가고 하나는 스프 들어가고. 맛 내는 것은 스프가 맛 낼 때, 파들이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겠습니까. ‘나는 저 벌건 것 아니고 왜 파란 파냐’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둘 다가 레시피 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게 오늘 낮에 이야기했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심는 자도, 물 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에서 약간 어려운 것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예레미야를 보게 되면 가뭄 들고, 어렵고, 못 살겠다고, 힘들다고 오늘 본문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의 대책은 뭐냐. 두 가지예요. 그냥 이 땅에, 약속의 땅에 힘들어도 버티자는 쪽, 그리고 다른 한쪽인 예레미야 쪽은 “이게 나가라는 뜻이야. 포로 잡히라는 뜻이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 말이 맞는가. 예레미야 29장 18절에 보면 만약에 너희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히지 않고 이 하나님 약속의 땅에 믿음 좋으니까 버티겠다고 한다면 기근이 와서 너희들을 다 죽여버린다고 되어있어요.
“내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따르게 하며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어 학대를 당하게 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낸 열방 중에서 저줏거리와 놀램과 치소와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러니까 사람들은 주께서 이끄는 대로 가면 되는데, 꼭 굳이 내가 살 수 있는 시공간을 내가 고집스럽게 붙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도 믿음이라고 우기면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면 됩니다.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까요. ‘그러면 목사님 보기에 내 인생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부채 도사님, 밀양 가서 살까요, 서울 가서 살까요?’
내가 사는 것이 형벌이며, 내 독소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 땅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감사로 이어지거든, 주께서 계속 머무르세요.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이야기하는데, 자기 아들을 탓하면서 하는 말이 아들이 회계사 준비한다는 거예요. 군대 갔다 와서. 아버지 보기에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요.
회계사 공부하면 죽으라고 공부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빠, 엔화 내려갔으니까 일본 여행 갔다 오자’라고 하는 거죠. 그런 아들 모리아산에서 받겠습니까? 왜 자기중심이에요. 틈만 나면 저주를 안 받을 짓, 틈만 나면 형벌 안 받을 짓만 고집하는 자녀. 주님의 방식은 우리 힘으로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서는 어떤 쪽이든 주께서 하신 일을 새삼 되풀이해서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4장 18절에 “주의 성령이 오신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인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돈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이 세상에 있는 자에게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귀신들린 자에게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세상에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윤리 도덕에도 구애받지 않는, 어떤 평가에도 구애받지 않는, 그리고 심지어 나에 대한 나의 평가도 구애받지 않는)”
이게 레피시 대로 합당한, 주님의 저주받아 합당하고, 주께서는 그 저주받은 자를 통해서 주께서는 십자가와 매치가 되는 그 레시피가 눈에 보인다면 바로 그곳이 여러분들이 영원한 약속의 땅을 통과하고 있고, 그쪽으로 가는 중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뭄 든 것이 진짜 가물어서 가뭄이 아니라, 말씀의 기근이 되어서 가뭄인 줄 압니다. 말씀의 가뭄 든 것은 모르고, 사는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하나님께 또 원망하고 대드는 우리의 이 본색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십자가에 있던 그 강도의 심정으로 주님의 십자가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