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요소
2023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23-27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13: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이 흩으리로다
(13: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13: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인간이 수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미 자신을 보는 기준이 신처럼 절대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무결해야 하는데 이 세상이 자신이 절대자임을 증명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나옵니다. 우선 신체부터가 아프고 허약해지고 날마다 노쇄해갑니다. 아무리 생각하는 것이 대범하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자진해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을 용납될 수가 없는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약점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일체의 봐주는 것 없이 몰아세우십니다. 그렇게 해야 인간에게는 악마의 성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적으로 악마에 의해서 조정당하고 있습니다.
선악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온전함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보이면 하나님 앞에서는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즉 끝까지 자기를 놓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타인에게서 수치가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수치가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이 현실상을 본인만큼은 숨길 수 없는 없는 노릇입니다.
수치를 굳이 느끼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다고 대외적으로 장담하지만 더 철저함을 요구하는 본인의 집요함에 본인이 질려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는 일체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즉 수치를 노골화시키는 겁니다. 수치성을 노골화시킵니다. 수치를 역사적으로 전개합니다.
즉 스스로 자기 수치를 자신이 감당하거나 처리하도록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않으심에 우리 성도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에 나오는 말씀과 대비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일치시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1:18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변론을 실시하시려는 것은 인간들이 무엇에 장악당한 마음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 인간들의 일반적 생각에 정반대 의견을 제시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의 일반적 생각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오늘 예레미야의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즉 인간은 일체 변하지 않는 정신상태를 견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흑인이 아무리 애써도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흑인이 자신의 흑인됨을 온전한 것으로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인류 전체 상태가 일관된 사상으로 결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수치를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온전함은 수치성을 능가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무엇무엇을 능가한다고 할 때에는 기존의 것이 자체적으로 극복이 불가능함으로 굳어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함 중의 하나가 요한복음 14:9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씀에서 인간에게는 하나님마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인간들은 외부의 것에 대해서 보고서 점령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 대해서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본인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것을 잡고 살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의 한계는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으로 최종적으로 드러나버렸습니다. 인간들은 추상적인 신의 모습과 이 땅에서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과의 모습과 일치시키기가 참으로 어려워합니다. 그 둘을 하나로 모으는데 실패합니다. 그래서 둘 다를 믿고자 하고 둘 다를 따로 보고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봅니다. 육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추가적 요소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육신을 다룹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이 기억하는 자신의 아름다움보다 점차 초라하게 멀어져 가는 육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점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수치란, 본래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환상들을 끌어모으는 과정을 통해서 갈수록 진리와 멀어진다는 인식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권한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요소는 인간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도 주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육신을 보고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에게 여전히 찾아낼 수 없는 요소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의 형상’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악마의 형상과 여자의 형상 둘 다 같이 들어설 수가 있습니다. 여자의 형상이란 곧 메시야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수치를 드러나게 하셔서 인간 자신의 자기 변론의 한계를 아울려 드러내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인간의 악마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시는 겁니다.
인간은 흙의 요소가 다가 아니었던 겁니다. 그리고 악마의 요소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야의 요소도 있었던 겁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주님은 악마하고도 변론할 태세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시도하는 바, 즉 최선의 완전함의 추구를 철저하게 배격해버리고 그 대신 완벽하게 악한 자라고 할지라고 양털같이 희게해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쪽에서 완전함에 도달되는 모든 수완은 하나님에 의해 친히 거부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수치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겁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충분히 활용하시도록 주도권을 주님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그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수치를 통해서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도합시다.
『우리의 수치스러움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수치와 결합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8강-예레미야 13장 23~27절(수치 요소)231119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23~27절입니다. 구약성경 1072페이지입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찐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 주님이 딱 결정짓습니다. “너는 부끄러우면 못살잖아. 그치?” 부끄러움 때문에, 너의 부끄러움이 들킬까 봐 시도하는 모든 태도가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 젖어있다는 겁니다. 무심코 나오는 행동 속에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이 절대로 들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대체 부끄러워야 할,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요인이 우리의 어디에 박혀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왜 생겨났느냐는 거죠. 왜 인간은 부끄러워하는 자로 살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본래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이기느냐 하면, 모든 우리의 부끄러움을 이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그 외에 다른 모든 요소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어떠한 부끄러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형상을 누가 노렸느냐? 악마가 노렸던 거예요. 악마는 인간에게 거짓말해서 네가 신처럼 된다고 이야기만 했지, 네가 부끄러워진다는 언질을 악마는 인간에게 미리 해주질 않았습니다.
제품 팔아먹으면 그만이지, 사후 서비스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합니다. 하나님의 특징은 하나님 자체가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부끄러움이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본래의 자리에서 떠나버리면, 그 본래의 자리에 놓이지 않은 격차 때문에 결함을 본인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 결함 있는 존재야’ 그러면 그것이 본인이 생각해도 진짜 나는 따로 있는데, 지금 형편이 거기에 못 미치니까, 그 차이만큼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왜냐 하면 너는 원래부터 신이 아니었잖아. 지금 네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이유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신이어야 하는데 신이 못 되어서 부끄럽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래? 그럼 네가 신이 아니게 해줄게. 신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너에게 확인시켜 줄게. 그러면 너는 더 이상 부끄러울 필요가 없지 않냐”
이런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극히 수치스러움의 극한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이게 딱이야. 이게 네게 딱 맞는 위치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위치에 있을 때, 새삼스럽게 부끄러울 필요 없이 내가 올 자리에 왔다고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나 수능 망쳤어요’라고 하면 그게 너의 원래 자리야. 8등급이 원래 네 자리였어. 괜히 네가 신이 되고자 한 거지. 6등급, 5등급을 어디 넘봐. 5등급이 얼마나 어려운데.
어디 넘볼 것을 넘봐야지, 네 자리 말고 어디 허풍스럽게 살려고 하느냐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어떻게 이걸 수긍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23절에 나옵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나는 변할 존재가 아니구나. 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넘볼 자리가 아니구나. 이건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내가 사람답게 산다니,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사람답게 살아. 나는 인간도 아니야’
그렇게 맘 정리하게 되면 아주 깔끔합니다. 깔끔해요.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사람이 아니기에 사람대접 못 받는 것은 너무나 지당한 대접인 거예요. 허풍떨지 말란 말이죠. 어디 엉뚱한 환상을 꿈꾸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느냐” 구스인이라 하는 것은 지금의 수단, 에티오피아 남쪽이에요. 애굽, 이집트보다 더 남쪽에 있는 나라예요.
피부가 시커멓죠. 태어날 때부터 DNA가 시커먼 거예요. 그런데 그 구스인 아프리카 사람의 피부가 하얗게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요, 자기가 흑인이면서도 백인이기를 추구하는 데서 부끄러움이 새롭게 발생 된다는 겁니다. 주제 넘는다는 거예요. 흑인이면 흑인으로 살면 됩니다. 흑인이라고 무시하면 무시하는 데로 살면 되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마귀가 우리에게 시험해서, 자기 분수에 넘치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 않고, 허풍떨고 허세 떠는 그 자리를 자꾸 악마가 친절하게 추천을 해줘요. ‘이거 한 번 입어보세요. 이거 한 번 발라보세요. 쌍꺼풀 수술 한번 해보세요’ 자꾸 우리로 하여금 옛날 악마가 아담을 붕 뜨게 만든 것처럼 악마는 참 부지런도 해요. 매일같이, 매일 삶에서 우리를 붕 뜨게 만듭니다.
미리 해답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집사님이 명품 새 가방 들고 교회 올 때 있거든요. 우리 교회 교인들은 진짜 명품가방은 다 집에 놔두고, 동창회 할 때나 쓰고 교회 올 때는 굉장히 낮은 척, 마음을 낮추고 사는 것처럼 그런 것들을 안 들고 다니는데, 만약 어떤 집사님이 명품 들고 오거든, 대번에 마중 나가서, ‘주께서 주셨군요’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무슨 욕심을 부립니까?’ 이러지 말고. ‘주께서 주셨군요’라고 하면 되고, 그러면 듣는 사람도 ‘네, 주께서 주셨습니다’라고 하면 안 되고 ‘주께서 죽으라고 명품 사주셨습니다’라고 하면 될 문제예요. 네가 명품가방이 너의 생활 수준에 맞냐? 안 맞지? 안 맞으니까 주는 거예요. 네가 수치를 극복했는지 안 했는지 테스트하는 겁니다. ‘내 주제에 명품을 해야 해? 아니야, 이건 안 되지’라는 그런 태도로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태도로 살면 여전히 자기가 자기감정을 대외적으로 조정하는 것밖에 안 돼요. 속에서는 약간 부끄러우면서도 아닌 척, 쿨하게 사는 티 내지 마세요. 그냥 이거나 들고 다니면서 너의 마지막을 보내라는 식으로 ‘너같은 인간에게는 이 프라다 명품이 적당해. 왜? 너에게는 절대 맞지 않으니까’ 또 어떤 분이 성형하고 오거든요, ‘주께서 성형하게 하셨군요’라고 하면 되고, 받는 사람도 ‘이렇게 죽으라고 성형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미리 해답을 말씀드리면, 왜 이게 즐거운 이야기가 되느냐 하면 성경에서 “피부가 바뀌지 못한다. 너희들은 그런 수준이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악에 익숙한 너희는 선을 행할 수 없다”라고 내가 확정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수치를 즐기라는 겁니다. 너에게 올라오는 수치스러움을 네가 즐기면 된다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수치를 제거해서, 신처럼, 수치 아닌 것처럼,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더러운 행세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보기에, 하나님 보기에, 그게 더러운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욕만 실컷 얻어먹지 않느냐. 욕만 된통 얻어먹는데 그게 어떻게 이스라엘의 구원에 보탬이 되겠느냐는 이런 생각이 들겠죠. 그런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여, 우리에게 옳은 이야기, 바른 이야기, 진리 이야기하면 우리가 잘 알아들어서 그것을 반김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바, 새사람 되는데 우리가 보탬이 되겠습니다’라는 이게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실상은 끝에 드러나는 법이죠.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헤어질 순간이 왔습니다. 헤어질 순간이 오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약점, 도저히 이건 제자들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약점을 언급한 대목이 요한복음 14장 9절에 나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대목입니다. 교회 3대째 기독교 집안에다가, 50년 교회 다녀도, 풀리지 않는 난제, 킬러 문항, 도저히 이건 풀 수 없는 거, 어떻게 예수님을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 되느냐.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차이가 너무 나는 거예요. 예수님은 초라한 행세,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운 하나님, 어떻게 이걸 보고 우리에게 일치된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그걸 강요하느냔 말이죠. 이건 도저히 있을 수 없거든요.
주님께서 일부러 초라한 행세로 오셨어요. 그리고 구약에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이건, 하나님은 너무나 영광스럽고 빛나는 분이에요.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 초라함과 위대함을 양쪽에 다 알려주고 두 개를 네 선에서 합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네가 그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나를 믿을 능력도 없고, 나를 믿고 네가 착해질 능력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거예요.
분명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난제가 되는 겁니다. 해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겁니다. 우리는 흙입니다. 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요소가 있어요. 우리는 누가 봐도 거울 앞에서 보면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고 결국 늙으면 흙이 되는 그런 것을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속에는 내 육신만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 외에 다른 요소를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 속에 주의 이름과 악마의 이름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님만이 파악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육신을 가지고 뿜어내는 모든 주장은 뭐냐 하면 마귀의 주장이에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주의 말씀 지키겠습니다. 믿습니다’라는 이 모든 발언이 악마가 떡하니 앉아서 수치를 쏟아내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나는 신이라고 인식을 하는 상태에서 내가 보기에도 내가 미비하니까, 앞으로도 잘할게요 하는 식으로, ‘때리지 마세요. 앞으로 잘할게요. 열심히 내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되잖아요’라는 그 발언, 그게 바로 악마의 발언입니다.
인간은 내놓을게 그것 밖에 없어요. 열심히 최선을 다할 테니까 좀 더 시간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걸로 고만 퉁 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인간에게 악마의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여자의 후손인 주님의 요소를 가지고도 주께서 바라봅니다.
그러면 주님의 요소가 들어올 때는 어떤 말씀으로 들어오는가. 이사야 1장 1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우와~~ 이건 흑인이 피부 변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한 기적이죠. “너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죄가 많은 자는 항상 움츠리게 되어있고, 남은 모르지만, 본인이 아는 수치심을 갖게 되어있어요. 말할 때도 자신감이 없이 벌벌 떨 때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으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의로움과 착함에 주눅 들어있는 자세를 보일 때, ‘아, 저 뭐가 있네. 뭐가 있어’라고 알죠. 그런데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은 우리를 볼 때 제대로 너를 변신하라고 요구한 적도 없고, 제대로 최선을 다하라고 노력한 적도 없어요.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우리 한 번 제대로 토론해봐? 논쟁해봐? 네가 지금 많은 죄를 너의 힘으로 덮으려고 하지. 네가 수치를 느끼니까?” 본인도 알아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으니까. 내가 이런 것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그러나 인간은 기껏 논쟁할 때 나오는 것이 악마의 말밖에 나오는 것이 없어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그러나 주님은 “아니야. 아니야. 나에게 그런 말 하라고 너를 부른 것이 아니야”라고 하시죠. 주께서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하얗고 희게 해주는 여자의 후손, 메시아의 작업을 위해서 주님이 저를 불렀잖아요. 왜 이런 고백을 못 내놓느냔 말이죠. ‘주여, 맞습니다. 저 더럽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죄인 중의 괴수를 가지고 주님이 자신의 일, 주의 일을 시행하는 재료로 쓰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해야 해요.
물론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가 어디로 바뀌었다? 주님에게 주도권이 바뀌었습니다. 쓸데없는 주도권을 내가 왜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데 내가 왜 고집부립니까? 내가 바르게 하겠다는 고집을 부리면 안 되죠. 마귀의 생각, 마귀의 발언에 대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흔하게 드라마 같은 데서 우리가 들을 수 있어요.
이수일과 심순애(1965년도 영화)라는 우리 나이 때 유명한 창극이 있어요. 거기에 대사가 있는데 여러분에게 한번 알려드릴게요. 이름을 통해서 대강 짐작하시지만, 이수일이 남자고, 심순애가 여자입니다. 이수일이 말합니다. “김중배의 다이아(diamond)가 그렇게 좋단 말인가?” 벌써 감이 오죠. 심순애가 브루투스 같은 김중배에게 간 거죠. 브루투스는 뽀빠이에 나오는 올리브라는 여자를 노리는 자죠.
그다음에 이수일이 계속 대사를 이어가는데 “허영에 눈먼 너에게 한 줌의 양심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다음 대사가 악마적인 말이 나와요. “대동강이 모란봉 되고, 모란봉이 대동강 된다고 할지라도 너를 향한 내 마음은 변치 않아”라는 이게 바로 마귀의 마음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구스인은 흑인은 피부를 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악마의 마음이고, 변한다는 게, 그러니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변하게 해준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일,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가 하실 일이에요.
우리가 짐작하는 일을 메시아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짐작 못 한 일을 주께서 하세요. 이수일이 화가 나서 심순애를 떠납니다. 떠나면서 미련이 있었는지 뒤돌아서 다시 한번 봅니다. 대동강 모란봉 앞에서 돌아봐요. “너는 향락의 감옥에 갇혀서 천년만년 잘 살아.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은 이제 떠나간다”라고 하며 한 장면이 지나갑니다. 대사가 상당히 고전스럽죠. 보수적이고.
외로운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본인을 이야기해요. 요새는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보고 유세 떤다고 하죠. ‘아이고, 가난한 것이 장끼가? 그것도 재주냐? 무슨 자랑꺼리야?’ 외로운 사람도 남을 치는 무기가 됩니까? 누가 외로워하래? 이게 바로 오늘날, 제가 마귀의 발언이라고 했지만, 대부분 사람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자기의 의. 신 앞에서도 큰소리칠만한 무기 같은 것을 내가 장만하고 있어요.
주님 말씀대로 내가 가난하고 외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되었지 뭘 더 해야 합니까.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 지금 뭐 부끄럽지? 너 지금 오버하는 거 보니 상당히 부끄러운 것이 있네. 왜? 네가 자칭 신인데 신답지 못해서 뭐 부끄러운 거 있나? 켕기는 거 있어? 감추는 거 있어?” 그러면 성령을 받은 주님의 방식은 어떤 고백을 하는가. 사도행전 3장 11~12절에 나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낫게 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의 믿음 좋음과 나의 경건함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능력은 나에게 일체 없다. 저 사람이 나에게 온 거야. 내가 앉은뱅이를 찾아간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나에게, 주님께서 나에게 앉은뱅이를 준 거예요. 명품백 주듯이.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절대로 사도로서 자체적인 자기 힘으로 무슨 주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앉은뱅이를 사도에게 보낸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3장 16절에 “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우리는 목격자에 불과하고 그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믿으니 주께서 그 사람을 살린 것이다. 낫게 했다. 우리는 그냥 목격자일 뿐이다.
우리는 그냥 목격자일 뿐이에요. 이 말은 뭐냐. 나요? 나는 나에 대해서 목격자일 뿐이에요. 나의 주인은 내가 주도권이 아니고 주님이 난데, 내가 명품백을 하든지, 놀러 가든지, 골프를 치든지, 그건 주께서 나를 그렇게 하게 만든 거예요. 골프 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뭐 돈이 있어야 골프 치지. 필드 나가는데 100만 원, 200만 원 하는데, 그 돈을 거기에 왜 퍼붓습니까.
너는 너를 이기지 말라. 이게 주님의 당부예요. 네가 너의 힘으로 너에게 한다고 흑인이 백인 되는 거 아니고, 죄인이 용서받는 거 아니다. 표범의 반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교회 나와서 복음들은 풍월은 있어서 ‘나는 죄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라고 중얼중얼하면서 문 열고 나가서 집에 가면, 얼굴에 뾰루지 하나만 나도 ‘이게 왜 나에게 생겼지? 무슨 연고를 발라야지?’라고 갑자기 뾰루지 없던 전과 뾰루지 있는 나에 대한 슬픈 비교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뾰루지 났는데 콱 죽어버릴까?’ 물론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뾰루지의 크기에 따라서 사정이 달라지겠죠. 얼굴 반절만 하면 이건 암 종류에 해당하기 때문에 문제가 커지죠. 이처럼 인간은 아무리 이론상 지식으로 내가 뭐 죄인이고 주께서 뭘 하셔도 감사하다고 하지만, 주께서 이스라엘 상황을 항상 우리에게 부딪히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통과해서 이사야 1장 18절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수치 없이 당당하게 복음을 믿고 싶지만, 주께서는 그걸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귀 자식이 될 때 비로소 마귀가 들어있을 때 나오는 고백을 토하게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너의 그 더러운 죄? 하얗게 해줄게”라는 식으로 모든 공로를 오직 주께서 빼앗아 가는 듯이 앗아 갑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자랑이고 기쁨이에요.
주께서 항상 나에게서 구원받은 것을 우리 구원으로 머물지 않고, 자기 구원으로 빼앗아 가주는 그 고마움, 고마운 그 후 서비스, “가져와. 내가 형상이야. 너는 형상 갖출 자격도 안 돼”라고 형상을 도로 주님께 가져가실 때, 우리는 바로 스스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스스로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오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육신을 통해서 보여줬으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육신을 가지고 주님 자신의 이름을 지금 드러내는 현재진행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꼴에 자존심은 있어 가지고,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살아온, 스스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요소, 그 조차가 죄인 것을 이제야 주 앞에 들고나옵니다. 그동안 마귀 짓 했던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주께서 주도권을 쥐고 주께서 하실 일을 우리에게 퍼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