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전에 합류
2023년 12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0-12
(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14: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4: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성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떠안아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은 그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옛사람을 그들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고 그들은 율법이 자기네들에게만 있는 것을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실천에 옮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반응은 오늘 본문 대로입니다.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릴 카드로 사용하시겠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 중의 하나는, 자신들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차없는 좋든 싫든 자신들을 껴안고 가야한다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라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과감하게 이스라엘을 버릴 것이라는 점을 감히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에는 없는 생각입니다. 인간이 염려하는 바를 하나님도 같이 염려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관된 뜻은 신약 성경, 특히 사도 바울의 편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즉 인간 자체가 하나님께서 버릴 계획으로 만드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전체를 버리는 그 취지가 완성되기를 원하십니다. 전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새로운 집단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 곧 하늘에게 특별히 보내신 분을 준비해두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하여 전체 이스라엘이 마땅히 망해야함을 분명히 하십니다. 인간의 고민거리가 결코 주님의 고민거리가 되리라고 감히 짐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그 어떤 차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나 인식, 그 한계 밖으로 일하십니다.
이 ‘한계 밖’의 생각이 에베소서 1:3-5에 보면, ‘창세 전의 생각’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즉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이 출생해서 겪었던 일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억과 경험으로는 ‘모두가 병들어 있다’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실은 인간 세계 전부 다 병들었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겠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어서 우리를 버리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이 땅 위에 존재하고 나름대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은 우리의 병들었음과 문제점을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이러합니다. 사무엘상 28:6-8에 보면,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사울왕은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변장까지 하면서 신접한 여자 무당을 찾습니다. 왜 찾아갔지요?
그것은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책임자로 자처합니다. 따라서 오로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선하기에 하나님께서 이해해주리라고 여깁니다. 이스라엘을 적들에게 구원코자 하는 그 열성과 성의는 하나님께서도 갸륵하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사울왕이 모르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보시기에 멸망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은 안 찾아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왕에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은 ‘옛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다 멸망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왜 죽이십니까 왜 멸망시키십니까’라는 질의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겁니다.
사울왕이 제대로 했으면 이스라엘이 바로 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무너져야 마땅한 겁니다. 바로 이 이스라엘 역사를 오늘날 성도가 떠 안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그 과정에 율법이 있습니다.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두 말씀을 가지고 율법이 요약될 수 있음을 누가복음 10:27에서는 주님도 동의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이 백성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마저 망치려는 말씀으로 주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사가 궁금해 하는 것은 ‘영생얻기’입니다. 그리고 율법사는 이 ‘영생얻기’가 ‘이웃 사랑의 결과로서 주어진다고 이해했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는 이 율법을 본인이 지킬려는데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제대로 해서 이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으로 영생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 중에 나타난 ’이웃‘과 ’사랑‘ 개념은 병들 모든 인간들에게 감춰져 있는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따로 일을 하셔서 비로소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그 분이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왜 그래셔야 할까요? 그것은 옛 사람이 오로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에 미쳐서 하나님 사랑을 시도하고 이웃 사랑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자기 사랑을 일환입니다. 따라서 이 가짜 사랑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멸망시키십니다. 이 이스라엘 역사를 오늘날 성도가 즐겁게 떠 안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즐거운 일입니다. 창세 전의 존재로 합류되기 위해 친히 하나님께서 날 망하게 하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 복입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도 우리가 죄인된 기쁨만큼은 잃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0강-예레미야 14장 10~12절(창세전에 합류)23120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4장 10~12절입니다. 구약성경 1072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 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에게 짤린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들이 사랑했다”라는 표현을 해요. 어그러진 길을 그들이 사랑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충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데 이유를 묻는 게 아니죠. 그냥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했다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을 벌하고, 그들에 대해서 구원받기 위한 어떤 복을 구하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께 생색내며 하는 모든 것을 내가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그들을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제거하고 멸해버리겠다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제거하시려고 하는 것이 뭐냐? 이게 신약에 오면 이렇게 됩니다. 그걸 옛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사람을 멸하는 조건하에 새사람을 등장시킵니다. 새사람 되는 데 재료가 뭐냐 하면 우리 옛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 옛사람은 뭐냐. 우리가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는 그것이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 옛사랑. 옛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모든 것은 옛사랑에 속하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 표현을 옛사랑이라고 했느냐 하면, 새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우러나오게 되어있어요. 나의 옛사람을 작살 내주시는 이 사랑을 감사한다는 뜻이에요. 옛사람은 옛사랑이 대상이 되니까 나는 나의 사랑을 포기하거나 취소한 적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다 마찬가지예요. 인간은 생일 갖고 태어난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범죄를 저지르고 아무리 남에게 피해 입혔다고 할지라도, ‘남에게 사과해’라고 하면 사과하지요. ‘미안하다고 해’라고 하면 미안하지요. 하지만 정작, 인간에게는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 사과할 생각은 없어요. 그래서 옛날 한자 말에도 너무도 진정으로 사과가 안 되고 진정으로 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 ‘심(心)’자를 두 개를 집어넣어요.
‘심심하나 사의를 표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마음 ‘심’ 자가 두 개 들어가거든요. 마음에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사과하는데, 딱 듣는 사람은 뭐라고 들리냐면 ‘뭐 심심하고 할 일이 없나? 심심하니까 놀기 삼아 그냥 사과한다는 건가?’라는 감이 확 오죠. ‘진정 사과드립니다’ 이거랑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이거. 뭐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자기에 대한 사과를 못 버리는 이유가 본인이 좋고 나쁘고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런 거예요. 충동적으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사람이 못 하는 그거, 내가 나 사랑하는 그거를 주께서 잘라주십니다. 그걸 하나님이 해내십니다. 해내시는 방법이 뭐냐, 신명기 6장 5절에 나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 뒤에 보면 어느 정도로 하느냐, 마음에 새기고, 누웠을 때나, 일어설 때나, 앉고 설 때마다 그것을 하라고 쭉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십계명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축약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잘난체하면서 25절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거는 예수님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예수님 당신을 진짜 우리 편 삼아도 되겠어? 아니면 우리 적이야? 우리의 생각과 같을까?’라고 쪽지시험 치듯이 시험을 친 거예요.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 출제 낸 율법사가 자기가 문제 알고 답변 아는 것을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했어요.
여기서 율법사와 예수님이 동일한 답변을 냈는데, 그 처리 방법이 같지 않습니다. 율법사는 뭐냐. ‘내가 어떻게 그걸 지킵니까?’라고 나와요.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이 율법이 그 지키겠다는 너를 잘라낸다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왔다고 시도하는 그 자체를 주님께서는 옛사람으로 간주해서 잘라버리시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성취하겠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를 저주하기 위해 주어진 거예요. 누가복음에 이런 내용이 어디서 종합으로 다 해답이 나오느냐 하면 사도바울의 편지 속에서 전부 다 해답이 나와요. 사도바울은 본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바울이 그냥 전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뭐냐. 문제를 출제 하는 거고요, 해답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과 그 이후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거의 해답만 담겨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내용을 알려면 답만 달달 외워서는 안 돼요. 답을 외우면 그 답대로 또 지키려고 해요. 사도바울의 편지대로 살려고 하면 그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어디를 가야 하느냐. 다시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자기 본심을 어떻게 다시 드러냈는가 하는 그 지점으로 되돌아와야 해요.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도라는 것은 뭐냐.
이스라엘의 운명을 떠안은 사람이라고 성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할 일이 있는데 어떤 할 일이 있느냐.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떠안을 할 일이 있어요. 왜 그 이스라엘 역사를 떠안아야 하는가. 그래야 인간이 왜 망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망한 역사거든요. 그 망한 운명, 망한 역사를, 이제는 성도가 떠안게 되는 겁니다.
그걸 떠안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넉넉하게, 편하게 떠안을 수가 있어요. 그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요. 성공한 입장에서 실패한 것을 떠안는 것은 뭐, 그건 재밌죠. 재미있는 거예요. 주저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약국에서 잘 팔리는 약이 있었는데, 그 약 이름이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두통, 그러니까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이름이 뭐냐 하면 ‘명랑’입니다.
활기차다는 이런 말이거든요. 이름 참 잘 지었죠. 머리 아파서 지끈지끈할 때는 ‘명랑’. 지금 70세 이상은 다 압니다. 그 약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몰라요. 누런 포장지에 붉은색으로 되어있는 명랑. 실패한 내 인생, 옛사람 인생을 껴안는 것이 명랑 안 할 수가 없어요. 명랑하지요. 내 인생이 이미 내가 살기 전에 박살 나고 실패 나야 할 인생인 것을 미리 알아채는 것이 얼마나 신나고 명랑한 일입니까.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요. 인생은 살면서 모든 것이 지워진다는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몰라요. 여러분이 동전에 오백원짜리나 백 원짜리를 보면 거기에 그림들이 나와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사회에서 너무 낡아지면 하나의 쇠붙이, 금속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흙 조각에 지나지 않아요. 거기에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아래서 백날 봐도,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여기 예레미야에서 옛사람을 작살 내고, 옛사람을 없애는 과정이 말씀, 율법이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키겠다는 그 자체가 네가 너를 사랑하는 본능과 태도에서 나온 그런 한 수상한 자세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이요. 여기서 사도바울의 편지 가운데서, 이번 수련회도 에베소서 하는데요, 제일 어려운 대목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에베소서 1장 3~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여기서 ‘복’이 나옵니다. 복이 뭐냐, 구약에 의하면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껴안았잖아요. 그리고 율법도 껴안았잖아요. 그럼 복이 뭐냐. 모든 율법을 지킬 때나 주어지는 게 복이에요. 그 복이 뭐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절에 계속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뭐가 복이냐 하면 예정한 대로 우리가 아들들이 되는 게 복이에요. 예정한 대로.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 하느냐 하면, 창세 전에 상태로 합류되어야 해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기껏 아는 것은 생일밖에 몰라요. 주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어디로 데려가느냐 하면 네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리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애당초 없지요.
없는데 우리는 우리 행한 것을 사랑하니까, 그 옛사람, 옛사랑을 주께서 말씀으로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 역사를 우리가 떠안아야 해요. 예레미야에게 욕 얻어먹는 이스라엘 역사를 떠안아야 해요. 특히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이것이 뭐냐 하면 어떤 시간도 너를 위한 시간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모든 시간은 주의 말씀으로 선점되어서 꽉 차 있기 때문에. 내가 지킬 말씀의 시간은 없습니다. 주께서 소제, 번제, 헌금, 기도, 일체 다 제거합니다. 인간은 그런 행위 하나하나가 자기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자체적으로 태어나면서 뭘 형성하느냐 하면, 나를 위한 나의 구조로 체계를 만들어요.
나만의 소박한, 나만의 인생 설계를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미 그 인생 설계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 구조는 인정 안 하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걸 허락할 때는 그 중심이 있어요. 그 구조 중심이 인간의 구조 바깥에 나가버려요. 언제? 예수님 오시고 십자가 지시면서, 인간들이 꼼지락거리면서 자기만의 인생살이, 나만의 영토, 나만의 공간을 형성할 때, 하나님께서는 “너, 그거 중심 빠져있다. 중심이 빠져있어. 네가 너를 위해서 뭘 지키고, 하고 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인정한 적이 없어. 왜? 그건 네가 만든 구조를 네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면 그 중심은 구조 바깥에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의 역할은 뭐냐, 나라는 단단한, 나는 오직 나만을 사랑해서 만들어진 이 말씀이, 내 말 듣지 않고 나의 구조를 뚫고 나가서 십자가에 있는 바깥으로 연결되는 그 기능을 말씀이 해주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병들었지만, 아무도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어디가 아픈 줄을 몰라요. 인간은. 아주 가관입니다.
그렇게 어디가 아픈 줄을 모르니까, 자기 세계가 안 무너지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내부의 구조를 다듬어가는데 고민이 생기잖아요. 그 고민거리를 하나님에게 아룁니다. ‘하나님,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합니까’ 주님의 응답은 이미 중심이 밖에 있기 때문에, 응답은 딱 하나예요. “너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 아니다. 너의 고민을 주님의 고민거리라고 여기지 마라”
인간은 자기 체계가 안 무너지기 위해서 고민하면서 하는 행동이 뭐냐 하면 조심스럽게 행동해요. 이제부터 좀 더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데요. 인간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남에게 배려해주고 그렇거든요. 이거 교만입니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결코 주님을 사랑해서 배려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사랑해서 배려하는 거예요. 남에게 싫은 소리 들을까 봐.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예요?
내 괜찮은 세계가 안 무너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옛사람이고 옛사랑이에요. 주님께서 그걸 부숴버리는 거예요. 예레미야의 오늘 말씀은 뭐냐 하면 “나는 너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너의 한 짓에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구약의 한 구절을 보면서 신약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주님의 해결책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조심스럽게 하는가 하는 예가 나오는데 사무엘상 28장 8절에 나옵니다.
거기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이스라엘 왕이었던 사람이죠. 그리고 스스로 왕이라고 여기고.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뭐냐 하면, 내 세계가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많은 신학자들, 목사들, 주석가들이 이렇게 설명해요. ‘사울이 행동 똑똑하게 했으면 결코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해요.
해석을 완전히 반대로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무너뜨리기 위해서 사울을 왕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데 도대체 성경을 보는 그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울만 똑똑히 했으면 이스라엘이 안 망할 거라고 하는 거죠. 사울이 이스라엘을 망쳤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그런 발상이 나오는지요. 다시 말씀 들릴게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아프면서 어디가 아픈지를 몰라요. 자기가 아픈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 엉터리 발상 자체가 아픈 거예요. 완전히 반대로 되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가 뭐라 하느냐 하면 ‘구약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자’라고 하는 거예요. 뭘 배워요? ‘사울이 이런 짓을 해서 이스라엘 망했듯이, 여러분들이 교회 직분 자라면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서 여러분의 역할을 순종하고 복종하면서 여러분이 해줘야,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써 이 땅에 복음전파를 위한 전당으로 온전히 섭니다’라고 지금 그 이야기 하고 싶잖아요.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신 것은 그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운 거예요. 갑자기 왜 내가 흥분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교회 있어서 뭐 하는 데요? 교회가 구원해줍니까? 왜 교회를 필요로 하죠? 자기가 건전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교회 와서 성도라는 그거 받고 나는 안 무너져야 한다는 그 위선을 떨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무너뜨리라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는 다 무너졌어요.
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진리가 아니에요.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리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진작에 옛사람은 와장창 박살 나야 하고, 그걸 우리가 모르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떠안는 거예요. 너를 이스라엘 망한 역사처럼 되풀이해줄게. 즐겁게 되풀이해라.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 거기에 조찬 기도회 같은데, 또는 기존교회 장로님들 기도회 나오면 제일 먼저 나오는 기도가 뭐냐 하면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 회복과 발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제가 막 묻고 싶어요. 왜 대한민국은 안 무너져야 하죠. 대한민국 안 무너져야 하는 것이 성경에 어디 나옵니까? 성경에 분명히 이 세상은 불바다 되게 되어있어요. 무너지는 정도가 아니고, 불 질러 버려요. 너의 십일조, 헌금, 기도, 찬양, 일체 안 받아요. 그게 얼마나 즐겁고 고마운 일입니까. 내 것 안 받으신다는 말은 그냥 담백하게 주님의 공로 받으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쉬워요. 이게.
모든 걸 다 잃어도요, 내가 죄인 되었다는 기쁨만은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최고예요. 죄인 주제에 헌금? 죄인 주제에 예배? 죄인 주제에 찬양? 이런 거 받겠어요? 안 받죠. 그 안 받는 데서 기쁨을 가져야 해요. 그걸 받아버리면 자기 세계가 안 무너져요. 물론 누구 기도 칭찬했다고 그게 안 무너진다고 생각하시면 그것도 졸지에 내일 되면 다 무너질 거예요.
교회가 할 기도는 하나밖에 없어요. ‘주여, 진작에 우리교회 무너지게 하옵소서’ 방법은? 주님의 재림이죠. 교회 부흥될래요? 주께서 오시는 것이 좋습니까?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왜? 안 무너지기 위해서. 이스라엘 안 무너지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는지, 여기 보면 변장했어요. 사무엘상 28장 8절에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왜 변장합니까? 신접한 여인을 배려해주는 겁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이게 바로 이웃 사랑으로 비취는 게 아니겠어요? 타인을 의식하는 거, 이웃,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할 때, 그 이웃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 그 이웃을 만남으로써 그 이웃이 나를 망치는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절대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아요. 그러나 내가 만나는 이웃은, 최고의 이웃은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죠. 내가 스스로 손댈 수 없는 내 사랑을 주께서 무너뜨리게 해주시는 이웃,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이루었다. 네가 할 것은 없다.” 지금 그 계획 중에 하나가 오늘 예레미야 14장 오늘 본문이에요. “내가 너 무너뜨려 줄게. 너의 소제 안 받는다. 너의 번제 안받는다. 기도 안 받는다. 선지자에게 축복해달라고 하지 마. 내가 안 들을 거야”
여러분, 하나님 밉습니까? 하나님 싫어해요? 하나님에게 원망스럽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있는 한 내 사랑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주님의 사랑을 훼방하는 짓을 하고 있어요. 이 ‘안 받는다, 안 받는다’라는 역사를 우리가 껴안아야 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목사님, 그 정도는 우리가 합니다’라고 나오죠.
그러면서 ‘무조건 안 할 거야. 예배참석도 안 하고, 헌금도 안 하고, 무조건 안 할 거야. 목사님이 그렇게 하라며. 안 할 거야. 안 할 거야’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만, 그러나 그거 안 하면 그 남는 시간에 뭐 할까요? 그거 안 하고 있는 그 시간에 뭐 할까요? 나를 세우는 딴짓을 해요. 정치 이야기하든지, 문재인 이야기하든지, 골프 이야기하든지, 손흥민 축구 이야기하든지, 내 이름을 걸고 게임을 해요. 누구를 응원하면서.
가장 많이 응원하는 것은 뭐냐. 내 자식 잘되기. ‘어미는 복음 안다. 그래도 아들은 잘되어야지’ 이게 뭐예요. 이 이중성은? 영원히 창세 전에 합류가 되어버리면 택한 자는 일체 하나님께서 포기한 적도 없고, 그 택한 자가 나락으로 지옥 가는 법은 애초부터 없다는 그 안목에 우리가 합류되어야 해요. 그게 굳이 내 자식이고, 내 손자일 필요는 없어요. 왜? 나는 그게 내 사랑이기 때문에.
내 사랑이 잘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게 내 자식, 내 손자는 없었고, 주님의 존재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집니다. 내 아들이 아니고 주님의 아들이고, 내 손자가 주님의 손자라서 그 운명에 대해서 내가 관여할 게 못 되는구나. 마치 나처럼.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하면 주께서 ‘때찌’하는 것처럼. 그들의 인생에 내가 주제넘게 관여할 수는 없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성령의 체험을 그들에게 발설하는 거예요. 말해주는 겁니다. 내가 까불다가 십자가 보고 내가 얼마나 까불었는지를 알고, 아직도 내가 까불고 있다. 이 세상은 그 정도로 우리는 다 병든 존재인데, 그것을 병들었다는 사실이 우리 옛사람에게 해당되는 사실을 새사람 입장에서 다시 여러분들이 두루두루 체험해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속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교회만 나오지 말고, 직접 말씀 속에 들어오고, 말씀이 우리 속에 아예 들어와서, 창세 전부터 출발했던 그 계획이 어떻게 창세 전으로 합류시키는지 그 주님의 공로를 담백하게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