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하나님의 움직임

아빠와 함께 2023. 11. 5. 18:31

하나님의 움직임

2023년 11월 5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2-14

(13: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3: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은 개성으로 삽니다. 자기만의 즐거움을 가져야 살 맛이 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갖고 있는 오해와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포도주’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나는 농업생산물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포도원의 포도’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수확되는 포도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덕분으로 살고 있으면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생산하려는 포도 자체인 것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이사야 5:1-2에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합니다. 이 무지성을 상호 대조시키기 위해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이 대꾸할 만한 발언을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 문장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즉 ‘축복된 열매로서 포도주병이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라’고 모든 이스라엘은 받아들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의식과 사고방식이 바로 ‘모든 포도주병이 저주로 가득하게 채워지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저주로 가득채우게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본성이 ‘하나님 따로, 나 따로’의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들추어내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그 누구의 ‘열매’가 되기를 애초부터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구약 욥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었을 때, 욥은 주저없이 자신의 형편에 대한 자기 감상을 드러냅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욥 6:6-7) 즉 자신의 인생이 참으로 전혀 재미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고난받기 전에는 분명히 사나 죽으나 하나님처럼 절대적 삶을 유지해 왔음을 말합니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저주하시는 신’은 원치 않습니다. 그 대신 ‘축복하시는 신’을 탐합니다. 그 어떤 인간이 되었던 인류는 신을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한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신의 주권사상’입니다. ‘신의 주권사상’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신의 일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그 신에 대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성스럽고 의로운 일이라고 여깁니다. 이슬람의 신학이나 소위 개혁주의 신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그들 신학이 십자가 중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신이시여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저주는 거두어 가소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특이성은 저 하늘 위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은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와 계신 민족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중심에는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무의미하게 만든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이 공간으로 개시되어 이스라엘은 움직입니다. 마치 로봇 청소기 같습니다.

인간이 손대지 않더라도 알아서 움직임을 보이는 겁니다. 반면에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지된 것들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을 이것저것을 하면서 나름 부지런하게 설쳐대어도 결국 그들은 제자리 뛰기에 해당됩니다. 그들의 모든 시도는 ‘하나님은 하나님 따로, 나는 나 따로’의 의식에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통해서 인간들의 근원적 한계와 문제점을 노골적으로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래 생산코자 한 것이 단순한 포도가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 백성다운 백성’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곧 ‘하나님의 것’이 주입된 존재로서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축복에 관한 결과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낳는 이야기도 같이 들어 있습니다. 즉 ‘복을 주시는 신이야말로 참 하나님답다’라는 인간들의 인식을 거부하고 ‘저주도 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친히 경험하는 백성을 만드시기에 나서십니다. 그 구체적 방식은 바로 이스라엘 속에 저주를 담아서 전 세계 속으로 흩어지게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4:17-20에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나라를 일단 포도 국가로 간주하시고 날카로운 낫으로 과연 이스라엘의 포도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극상품 포도인지 검토해서 처리하시는 방식을 신약 때는 전 세계로 확대해 나가시겠다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극상품 포도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개성과 자신의 즐거움을 살지 아니하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기에 모두가 다 ‘하나님 따로, 나 따로’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참된 포도나무가 나옵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1-2)

특정 개인 자격으로 구원되고 좋은 평가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자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포도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와 구원 모두를 다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존재를 알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아주기를 원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6강-예레미야 13장 12~14절(하나님의 움직임)23110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12~14절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그냥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지상에 어떤 생산한 나라가 있었어요. 이 땅에 직접 나라를 만드시고 친히 왕이 되셨습니다.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 성전이 있는 곳을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여타의 민족 가운데에 같이 있는 거,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바로 거기에 있다”라는 것을 너희들로 알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때, 모세에게 언급하신 겁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내는 것은 나 여호와라. 내가, 이 하나님이 이 땅을 친히 방문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통해서 멀리 추상적으로 있는 신이 아니라, 직접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 알게 하리라” 그래서 이스라엘 아니면 하나님 없는 겁니다.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들은 알라신에게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알라는 위대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알라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위대하겠죠. 그거 귀신입니다. 그야말로 이 땅에 귀신이 있고, 이 땅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바로 그 알라신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뭐 다른 종교 없다는 사람들도 다 귀신들린 건 마찬가지지만, 알라신은 굉장히 노골화되어서 고마워요. 그들의 사상, 무슬람의 사상을 압축하면 이겁니다. ‘신의 주권 사상’

어디서 많~~이 들어본 사상 아닙니까? 신의 주권 사상. 오늘날 한국의 교회를 교회 이게 한 사상이 신의 주권 사상입니다. 칼빈 사상. 둘 다 칼빈 개혁주의 사상이거든요. 칼빈 사상이나, 알라 사상이나, 둘 다 공통점이 있는데, 둘 다 십자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가 없어요. 나 여기 있음에, 하나님은 저기 있을 것이다. 그것을 존재의 비슷함이라고 이야기해요.

신학에서 안셀무스가 말한 게 ‘존재의 유비analogy’라고 하거든요. 비슷하다는 거죠. 내가 하나님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내가 여기 존재하니까 존재하게 하신 더 큰 분이 계실 거고,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고 이걸로 증명된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 안셀무스가 했던 증명방법인데, 그래서? 그래서 뭐? 그럼, 그런 나를 죽이기는 왜 죽여? 이게 지금 알라 이야기와 개혁주의 칼빈 신학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어요. 근원적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같이했던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는 반드시 인간은 신의 주권 사상을 신봉하는 종교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불신자는 없습니다. 전부 다 종교인인데, 종교인의 주권 사상으로 전부 다 무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 동양들, 중국, 한국, 고려 시대, 그때는 무슨 사상이냐. 그때는 운명 사상이죠. 운명, 숙명. ‘다 조물주의 뜻이야’라는 이런 거.

숙명 사상이에요. 그게 주권 사상이에요. 그게 이방 나라들의 신들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신과 신을 모아놓고 우상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여호와,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고 보지 않는 사람은 다 죽인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해 볼 때 그들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 소리 듣는 그들은 기분 나쁘겠지만. ‘너만 신 있나? 우리도 신 있다’

신과 신의 대결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신과 진짜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이 땅에 이미 방문하신 하나님, 주의 이름의 하나님. 그러니까 추상적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대자대비하고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신이 아니라, 구체적인 신, 그걸 저는 세 글자로 표현하겠습니다. ‘움직임’ 이 땅에 움직이시는 하나님. 주님이 움직인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움직임을 공백, 빈자리로 만듭니다.

정지한 것으로 간주해요. 이런 대목 나올 때마다 욕 얻어먹지만, 그래도 해야 하겠어요.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남진 장군님이 하신 이야기 아닙니까. 가만히 있어. 우리가 아무리 바쁜 것도 주님이 보기에는 제자리 뛰기예요. 그냥 소용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런 효과도 없어요. 이것저것 해요. 그냥 이것저것. 이것 하다가, 장사하다가, 저것 하다가 하는데, 아무 효력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태어난 대로 그냥 이 자리에 가만히 있습니다. 이것을 뭐냐, 바로 이스라엘 내에서, 성전 내에서는, 어떤 시공간 속에 시간이 멈추는 그 중심, 핵심 현장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걸 이스라엘 성전에서 시작되는 움직임, 바람이죠, 그 움직임이 이스라엘을 데리고 이방 나라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가지고 돌아다니시는 겁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일종의 진공청소기, 로봇 청소기라고 보면 됩니다. ‘어, 저것끼리 움직이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안에 배터리가 있지요. 건전지가 있어요. 그렇게 이스라엘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렇게 움직일 때, 하나님께서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그 구조를 알아야지 않습니까.

현재 어떤 사람들이 궁금한 것 중 하나가 UFO(Unidentified Flying Object)가 어떻게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안에 누가 들어있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UFO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UFD라고도 하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으니까 물체가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이 UFO(미확인 비행 물체)랑 비슷한 것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본인도 몰라요. 왜? 보면 자기와 같은 인간들 밖에 안 보이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이상하게 이스라엘이 움직여요. 아무도 없는데, 그냥 살아가는데, 여리고 성에는 기생라합은 알아서 기고, 알아서 굴복해요. 도대체 그 구조를 뜯어봤으면 좋겠어요.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민수기 18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깔끔하게 정리해봅시다. 약속의 땅에는 곡식과 포도주와 꿀이 나온다. 약속의 땅에만 나옵니다. 약속의 땅에 나오는 그것에 대해서 그들 가운데 보이지 않는, 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제일 어려운데, 보이지 않는 그분과 보이는 이스라엘 사이에 임대차 계약이 되어있습니다.

그 계약이 뭐냐 하면, 월세 계약이에요. 젖과 꿀이 나는 그 땅의 소산물,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보이지 않는 분에게 드려야 해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에게 뭘 건네줄 때는 저쪽에서 받았다가 됩니다. ‘받았지? 영수증 써줘’라는 이것이 되는데, 보이는 인간이 평소에 보이는 인간에게 줄 때는 쉽게 납득되는데, 보이지 않는 분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립되냐는 겁니다.

지금 이 십일조를 누구에게 소산물로 드리느냐 하면 제사장에게 주는 거예요. 성소의 제사장이 만약 자동차라면 엔진 부위에 해당합니다. 거기에 하게 되면 십일조는 어느 용도냐 하면 계속해서 제사하는 용도로, 거기에 필요한 제사장들의 먹을 것을 거기에 제물로써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성전에서 엔진이 가동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하냐.

제단 운영이 필요하고, 불쏘시개부터 해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체 제사 외에 다른 일은 못 하도록 금지를 시켰어요. 이것은 하나님과 제일 측근, 가까이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과 만난 그것을 이 땅 아래서, 산 아래서 재현시키는 겁니다. 모세가 산에 갔을 때,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물을 마시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배가 곯았습니까? 그래서 얼굴에 살이 쏙 빠졌습니까? 반대로, 너무 영광스러웠어요. 너무 영광스러워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할 정도로 너무 영광스러워서 모세가 오히려 얼굴에 송월타월, 수건을 가지고 얼굴을 덮을 정도예요. 이게 칸막이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대해서 네가 하나라도 끼어들 여지는 일체 없다는 겁니다.

로봇 청소기가 일하고 있는데 사람이라고 말리고 이러면, 아직은 로봇 청소기가 인공지능이 없겠지만 나중에 나오면 화낼 거예요. 주님에게 화나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이 홀로 하시는데 네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일생을 살아가는 재미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재미가 없다는 거예요. 잘 아셨죠?

그러면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자기는 재미지고 재미나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을 나섭니다. 누구도 그랬냐 하면 본의 아니게 무심코 자기 즐거움으로 살았던 사람이 구약에 나옵니다. 누구냐 하면 욥이에요. 욥이 나중에 강제로 고난을 받고 난 후에 한 이야기가 욥기 6장 6~7절에 나옵니다.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라고 나와요.

달걀흰자를 소금 없이 먹으려고 하니까 맛이 없는 거예요. 욥이 고난받고 난 후에 소감이 뭐냐 하면 ‘이게 인생이 뭐야. 너무 맛이 없다. 맛이 없어’ 누구 말대로 천국 가면 너무 심심해서 천국 안 간다는 말처럼. 그런 말 한 사람이 있어요. 니체(F. W. Nietzsche, 독일 철학자)라고. 맨날 찬양만 하고 재미 하나도 없다고.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평소에 쾌락으로, 재미로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니까, 욥이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죠. 이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 따로 살고 나는 내 인생 따로 챙기고, 내 인생 즐겁게 사는 것을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꼬박꼬박 십일조 한다고 합시다. 십일조 해도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게 되어있죠. 왜냐 하면 자기 인생, 자기 즐거움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조금 어려운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12절 대목이 어려워요. 마치 전에 했던 말씀에서 너희가 바알 섬긴 것처럼 나를 섬기라는(렘12:16) 그것과 똑같은 취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1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예레미야에게 말하게 시킨 거예요.

그리하면 그들이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그러니까 그거 우리도 잘~~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하나님의 계시냐고 이야기하는 거죠.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오해할 만한 것이 있어요. 내 인생을 따로 챙기다 보니까 하나님께 은근히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내 인생 즐겁게 살아갈 때, 하나님 좀 보태주세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저 하나님 존경하고, 인자하심 다 인정할 테니까 내 인생은 내 인생답게 살 수 있도록 좀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생각이에요. 그 생각을 가지고 오늘 예레미야 13장 12절을 보게 되면 왜 묻는 질문과 답변이 안 맞는가가 드러납니다.

포도주라 하는 것은 십일조에 포함되어 있고, 다 포함되어 있잖아요. 포도주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땅에서 나온 소산물이에요. 그렇다면 이사야 5장 2절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이 땅에 극상품의 좋은 포도를 심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너희들은 나쁜 포도를 맺었냐” 4절에 보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라고 나오죠.

다시 말해서, 너의 인생에 이 하나님의 뜻이 관여했다는 흔적이 있거든 내놔봐라. 너의 인생에 내가 관여한 흔적 있냐? 너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하나님, 훌륭합니다. 자비롭습니다. 대단합니다. 하나님 존경합니다. 하나님 정말 최고입니다’라는 그런 말을 날린다는 말은 ‘하나님은 하나님 것 챙겨주시고, 나는 내 인생 따로 살 수 있는 권한 있지 않습니까?’라고 우기는, 그야말로 악한 종이죠.

‘주인 것은 안 다치고 남겨두었으니까, 내 인생은 따로 살 수 있잖아요. 권리 있잖아요’라고 우기는 거죠. 오늘날뿐만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어요. 이 포도주가 어떤 포도주냐 하면,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뜻과 같이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포도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저주의 포도.

포도의 특징 뭐냐 하면 밟으면 붉고, 붉으면 뭐냐. 피 흘린 거죠. 요한계시록 14장 18절에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죄의 숙성입니다. 19~20절 보면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언약은 좋은 열매만 맺는 것이 아니고 악한 열매도 동시에 생산한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랐던 겁니다. 왜 모릅니까? 자기 생각만 하니까 모르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못 한 거예요. 하나님이 복과 저주, 그 둘 다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인간을 끌어당겨서 인간을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자꾸 인간과 거래하고, 상대하고, 좋은 게 좋다고 자꾸 자기 쪽에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 맺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네 속에 내 것이 있느냐고 물어요. 별이 빛나는 이유를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별이 빛나는 이유는 밤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저주를 생산한 이유는 반짝반짝 빛나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자기 백성이 이렇게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짙은 어두움과 짙은 저주의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경에, 또는 요한계시록에서, 예레미야에서 저주의 말을 퍼부으면 퍼부을수록, 우리에게는 감사만 나오면 됩니다. 저주하게 하신 그것에 대해서 ‘참,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까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아주 좋은 찬송가 중 하나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구찬송가 299장)인데 여기에 보면 ‘예수께서 오실 때에~그 귀중한 보배~하나라도 남김없이~다 찾으시리’ 언제? 밤에.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움직임을 멈춰야 해요. 멈출 때, 모든 것이 어두움이고,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든 것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자기 일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자기 일을 멈춰볼 때, 그것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샛별같은 그 보배~면류관에 달려, 반짝반짝 빛나게~비치리로다’ 얼마나 어두웠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겠어요. 이게 바로 기적 아닙니까?

망하면 다 망해야 하는데, 왜 저는 안 망하게 하십니까? 질문은 그렇게 해야죠. 망하게 하는 것이 주의 솜씨고, 저주하는 것이 주의 뜻인데, 왜 주께서 저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저주를 안 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할 때,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에요. 답을 알아요. 왜? 주의 일이 우리 속에 들어오거든요. 요한복음 15장에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더이상 우리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였던 적도 없어요. 되돌아보면,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혼자 사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소급해서, 옛날 지나간 것까지 전부 다 처음부터,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포도나무였던 겁니다. 포도나무에서 저주를 다 경험하게 하고요, 주님의 심판 경험하게 하고요, 그리고 이 세상은 인간들이 로켓을 올리고, 뭐하고, 싸우고 백날 해도, 그것은 정지된 상태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의미 없다는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자나, 패자나, 수학을 공동수석 하나, 공부 좀 잘하든지 못하든지, 법대 들어가나 의대 들어가나, 그것은 하나의 몸부림이에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움직임이 없는, 그냥 낙엽이 나무에 붙어있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아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떠나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없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 나는 그분의 열매니까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그분의 열매예요. 그분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 부러워하지 마시고, 제발(Please~~). 세상은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학이 있고 뭐가 있고 한데, 제가 본 바에 의하면 제일 짧은 소설을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년 7월 21일~1961년 7월 2일)가 썼다는 소설이 있어요. 노벨상 받은 유명한 소설가인데, 그 소설 제목이 여섯 자의 영어로 되어있어요.

“for sale: baby shoes, not worn” 한 번도 신지 않은 신발이라는 뜻이죠. 여기서 소설 광고 나옵니다. ‘왜 아이의 신발을 팔았을까? 아이를 키우다가 아이가 죽었나?’ 상당히 여기에서 존재와 슬픔이 얽혀있는 거. 문학가들은 세상을 이렇게 봅니다. 인간이 해볼 대로 해보다가,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너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라고. 일하신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도주 생산했다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좋아했지만, 사실은 저주를 생산한 것이고, 망할 수밖에 없는 민족인 그 자체도 하나님의 열심이 있는 움직임이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는데, 저희들은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한 것은 거짓이었고, 저주였고, 주님 하신 것이 생명인 것을 이제 증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오후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치 요소  (2) 2023.11.21
교만과 겸손  (1) 2023.11.12
선지자의 몸통  (0) 2023.10.29
뒤바뀐 질문  (1) 2023.10.23
약속이 떠난 땅  (2) 2023.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