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헛 맹세

아빠와 함께 2023. 10. 20. 14:22

헛 맹세

2023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스가랴 5:1-4

(5: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5: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5:3)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5:4)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인류를 저주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릴 때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모르지만 하나님만이 아시는 인간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 뿌리는 인간이 저주받아 마땅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제시해주시는 겁니다.

그 제시하는 경우가 바로 성전 재건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불태워버리신 그 성전을 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서 새로 지어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세상 전부가 새로 등장될 성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성전의 취지에서 세상 멸망의 이유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10.5m×5.2m 짜리 나르는 율법 두루마리는 성전 현관 크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 평수가 온 지면을 다 커버합니다.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 세계에 대한 저주가 성전의 취지와 관련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원이 성전 취지에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전이 재건립하면서 인간들에게 필히 저주가 주어져야 하고 제거되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 제거되는 것이 즐겁지 않습니까? 그 지긋지긋한 나를 없애주는 것이 고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저주하신다는 계획은 그 어떤 악마나 인간의 권세로도 막아설 일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 난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늘 이러합니다. 그냥 통고하실 뿐입니다. 어떻게 대처한다고 해서 대처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도로 사울 행위를 안타깝게 충고하십니다. 즉 “네 때문에 내 일이 안 된다”가 아니라 도리어 “너만 쓸데없이 고생하게 된다”는 겁니다.(행 26:
14)
이 저주를 퍼붓는 ‘나르는 두루마리’의 내용을 천사는 둘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헛맹세하는 것과 도적질하는 겁니다. 전체 율법이 이 두 개의 죄로 요약이 가능한 것은 성전 유지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성전의 것, 곧 하나님의 것을 훼손해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훼손의 동기가 헛맹세로 야기된 상태라는 겁니다. 말라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는 견해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3:8,13)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거나 하나님을 소홀히 대한 적이 없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그들이 헛맹세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힘이 들 때 하늘을 봐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다시 햇살이 비취니까”

여기서 인간들은 ‘하늘’ 곧 ‘하나님’을 찾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이지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은 제거대상이요 저주대상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이 성경 말씀 전제를 거부하고 성경을 통해서 햇살이 비취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는 맹세가 헛맹세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 5:34-36)

즉 인간은 말씀에 입각해서 저주의 대상이지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점을 알지 못하게 되는 그 여파가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전일을 그만두고 생활에 나서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십일조 안한 것이 도적질이라면 ,십일조를 회복한다고 해서 도적질 아닌 것이 아닌 겁니다.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헛맹세를 계속할 뿐입니다. 다음 세가지 질문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누가 지옥 가지요? 둘째, 어떤 경우가 자기 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일까요? 셋째, 어떻게 그 자기 의가 없어지지요? 참으로 하나님께서 도적질 당했다는 게 무엇인지를 밝히므로서 이 문제가 현실화됩니다.

요한일서 4:10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이란 건축물 속에 확고하게 고정된 기둥 같은 겁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인간을 저주하십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예수님 속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죄된 몸’으로 오셔서 아버지의 저주를 스스로 먼저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기 되먹임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것이 ‘율법 완성’,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의 입각해서 모든 인간들을 저주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대신에 자기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자기 안에 온갖 성경 지식으로 꽉꽉 채워넣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했던 자기 의이며 이 의를 겨냥해서 하나님의 성전쪽에서 저주가 날아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한 저주 안으로 들어서는 작업을 통해서 근거가 마련입니다.

마치 형편없이 죽어가는 강도 만난 사람처럼 말입니다. 강도 만나 자의 신분자로서 오신 예수님께서 비로소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만족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작품이지요. 율법 완성에서 나오는 사랑과 하나님의 의는 이처럼 저주받은 존재 한 가운데 박혀버립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는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게 나옵니다. 마치 핫도그에서 소시지 삐져 나오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의가 없어지지요? 여기에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저주를 멈추지 마시고 제대로 완수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이미 천국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확정된 일을 누가 말릴겠습니까? 주님의 맹세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수요설교(20231018)요약 스가랴 5:1-4(헛맹세)

어제 수요일날 전체 요약해 드리면, 첫 번째 전제가 뭐냐 하면 주께서 온 지면에 저주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의를 걸 수가 없어요. 그것도 예외 없어요.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는 거죠. 그럼 다른 민족은 뭐냐? 다른 민족은 성전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저주를 안 받는 게 아니고, 저주를 하겠다는 소식조차 들을 대상이 안돼요.


그들은 이유도 없이 저주 받고, 이스라엘은 이유 알고 저주 받고.. 저주 받는 데 대해서는 예외가 없어요, 다 받습니다. 그러면 저주 받는데 어떤 죄목으로 저주 받습니까? 두 가지로 요약했어요. 도적질 하는 것과 망령되이 맹세했다는 두 가지를 언급했죠. 어떻게 그 많은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고 이렇게 요약하지 않고 어떻게 도적질 하는 것과 헛맹세 가지고 그렇게 요약이 가능하냐?


그게 두루마리 크기가 성전 현관의 크기와 동일하기 때문에 성전을 왜 부수냐 하는 거에 대해서 문제 삼겠다는 거예요. 모든 율법은 성전을 구성하기 위해서 성전에서 나온 겁니다. 성전 구성을 위해서 다시 소환되고, 응집돼야 돼요. 도적질이라는 것은 사람의 도적질 가지고 시비 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것이 도적질되어 버리면, 거기서 종사하는 레위인들이 수입이 없기 때문에 성전을 나와 버리고 도망치기 마련이에요.


그렇다면, 그들이 거기에 대해서 수요설교 중에 제일 어려운 대목 중에 하나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소홀히 했습니까?” 하는 그 대목이에요. “언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소홀히 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견해와 이스라엘의 견해가 격차가 나요. 하나님의 견해는 뭐냐 하면, 이 성전이 너희를 떠난 이유를 아직 모르겠어?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같이 이야기 하다가 시어머니가 갑자기 입을 닫고, 말 안하고 나갈 경우에 ‘어디 화장실에 가셨나?’하고 보니까 안돌아와요. 나중에 전화해보니까 “어머니, 어디 뭐 삐졌어요?” 하니깐, “니 아직도 모르겠나? 뭐 때문에 삐졌는지?” 차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생뚱맞은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려울 때 얼마나 찾았고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고 했습니까? 아이고, 그까짓 십일조 그거 드리면 그만이지. 그거 드리면 어머니 돌아오시겠습니까?” 이렇게 하겠죠.


신약에 오면, 의와 신과 인으로 하지 아니하면, 의로움으로 하지 아니 하면, 십일조 해도 소용이 없어요. 돈 받겠다고, 돈 챙긴다고 지금 주님이 도적질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이 다른 죄에 의해서 하나님 것을 빼앗아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아를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아버리면 이게 헛맹세가 되고 마는 겁니다. 헛맹세. 그게 마태복음에 보면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고, 예?


제가 그래서 또 노래 하나 얘기했잖아요. <혼자가 아닌 나> 가사 나왔잖아요. 힘겨울 때는 뭘 보라? 하늘을 보라. 하늘 왜 봅니까? 하나님이 나를 지켜달라고 보는 거죠. 자기에다가 모든 말씀을 가지고 완전히 쑤셔 넣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되면 무엇과 대치가 되냐 하면, ‘내가 온 지면을 다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정면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그런 노력을 하느냐? 자신의 뿌리를 몰라요. 내가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요.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refeed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되먹임을 해요. 내가 결과가 된 것을 다시 원인으로 집어넣어서 더 완벽하게 철저하게 완전하게 거룩하게 계속해서 자기를 가만두지 않고 계속 닦달 내고 노력하는 거예요. 더 심오한 말씀, 더 깊이 있는 해석, 계속 집어넣으면서 끝까지 뭐냐 하면 그런 방식으로 나 자신을 포기 못하겠다는 노골화를 드러내는 겁니다. 이게 헛맹세예요.


성전이 떠난 입장에서는 떠난 이유를 알아야할 텐데 모르는 겁니다. 열심히 자기 할 일을 다 하니까요. 이것은 그 중심을 모른다는 뜻이죠. 그래서 중심을 알기 위해서 예를 든 것이 뭐냐 하면, 건축이야기를 들었죠. 필로티 방식, 빌라 건축 방식. 철근 구조물 하고 콘크리트 하고 팽창계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이게 틀어지지 않는 거예요. 20세기 초에 발견된 거예요. 프랑스 건축가가 발견한 거예요.


그 때부터 기둥 세우고, 벽체는 자유롭게. 왜냐? 중심이 서 있으니까.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의 고정성. 주님의 사랑의 고정성이 있다면 어떤 짓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랑이 사랑되기 위해서 반드시 벽체가 뜯겨져나가야 돼요. 그동안 벽체 노릇 한 것이 뭐냐? 내가 나를 살리고 내가 나를 반듯하게 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한 게 벽체였어요. 어떻게 아느냐?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가 내 사랑으로 생긴 피거든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4장 10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피예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안하면 뭐 그만 아니냐 하는데, 그만 아니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면 피를 나의 가운데 두게 되면,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신경 쓸 하등의 권한이 나에게 없어요. 주께서 뜯겨나가라고 이 세상에 그냥 살게 한 겁니다.


뜯겨나가는 그 즐거움, 그 기쁨이 뭐냐? 핫도그 이야기 한 거죠. 핫도그 안에서 핫도그가 이게 다인 줄 알았는데 뜯어보니까 소세지 나오죠. 사랑이 나오는 거예요. 로마서 13장에서 간음하지말라, 살인하지말라, 뭐하지말라 하지만 사랑, 주님의 사랑이 중심에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사람들은 그럼 사랑하면 되지 하는데 사랑을 못해요. 왜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나 자신을 몰라요.


그게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론한 겁니다. 성경에 사랑이 나오는데 어떻게 하면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해라 왜? 이웃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웃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니가 사랑을 한다고? 너는 너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했냐 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되, 순서를 ‘강도 만났더니만 지나가는 사마리아인이 와가지고 고쳐줬다. 너희도 이같이 자비를 베풀어라.’ 이야기를 이렇게 엮어도 되는데, 주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제사장 먼저 지나가게 만들죠. 레위인 지나가게 만들죠. 제사장과 레위인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성전에서 일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방식으로 헛맹세를 쉬지 않고 해왔던 거예요. 그게 종교라는 걸 해왔던 겁니다. 그 종교가 헛되다는 것을 부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아는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을 뒤엎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사람들은 공격해서 피를 흘렸고, 그 피가 진정한 주님의 사랑이고..끝

 

수요 말씀 보충 추가 1)

세 가지 문제..그 답들을 이제는 다 알고 계시죠? 첫 번째 문제는 뭡니까? 누가 지옥 가는가? 답 얘기해보세요. (자기 의가 있는 자) 아, 네,,왜냐하면, ‘그 나라 의’거든요. 그 나라와 그의  의란 말이죠. 자기 의는 들어갈 수가 없죠. 2번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3번 문제부터 할게요. 그 의를 어떻게 제거하는가? 정답은?...안 들었습니까? 자기 의를 어떻게 제거하죠? 답 안하면 2번도 얘기 안해줘야지..

3번 답은 제거할 필요 없습니다. 내 의를 제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제거한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2번, 2번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요. 어떤 경우가 나의 의가 있다고 이해될 수가 있느냐..그 말은 뭐냐 하면, 질문 자체를 우리가 그 질문을 평소에 나한테 안했다는 거예요. 게을러빠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분명히 자기 의가 있는 자는 천국에 못 간다는 줄 알면서도 어떤 경우가 나의 의가 있는 경우냐는 그 질문을 자기한테 평소에 안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왜 안하죠?

안하는 이유가 뭐죠? 뭐긴 뭐 의로워지고 싶어서죠. 내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건질 건 ‘나 잘났다.’ 하는 그거 외에는 없죠. 내가 의로워지려고 하는 거. 그래서 그 질문 자체를 안 해요. 그 질문 자체를 하지를 않는다고요. 내 의로운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질문을 스스로 하겠습니까? 그건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는 건데...그러면 2번 문제의 정답은 나왔죠? 어떤 경우가 나의 의가 유지되는 경우입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경우. 이것이 내 의를 내가 포기 못하겠다고 하는 자기의 마음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천국은 자기 의가 있는 자는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 나라는 우리 의를 안받아줘요. 그 나라와 그분의 의, 하나님의 의..2번 어떤 경우가 내 의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이 나의 의를 챙기고 있는 모습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3번은 어떻게 하면 내 의가 제거됩니까? 그거는 2번 풀렸으니까 3번 되죠, 내 의를 안 없애도 됩니다. 없애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보충 추가 2)

헛맹세가 아닌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게 궁금하실 거예요. 기도는 코스가 있어요. 그 코스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대로 우리를 질질 끌고 갈 거예요. 우리가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기도 속에 이틀 치 양식을 원해요. 적어도 이틀 이상 양식을 원해요. 그런데 주기도문에 보면 며칠 치 양식입니까? 일용할 양식이죠.

벌써 기도 내용부터가 상방 간에 이미 서로 결정된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과 좋게 사귀고 싶어서 기도하죠. 그러나 주기도문에 보면 죄사함이 먼저입니다. 죄사함. 죄사함이 주께서 주신 최고의 사랑입니다. 그게 주기도문에 나오죠.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하는 내가 잘되기를 원하잖아요.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그런데 그 안맞는 그것을 주께서 강제로 맞추어 나가주시는 거예요.

그 기도 작업이 오늘날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서 우리가 거기서 “주께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고 감사가 나오는 그게 바로 우리의 해야 될 기도입니다. 주의 이름으로..어떤 분은 “그럼 목사님은 어떻게 기도합니까?”라고 묻는데, 저의 기도는 제가 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요. 하는데 기도 내용은 딱 한가지예요. 그들 속에서 주님 나오기를...그들 속에서 주님이 나올 수 있도록 그들을 사용해달라는...덤으로 좀 건강하게 해달라는..ㅋㅋ

 

14강-스가랴 5장 1-4절(헛맹세) 231018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5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 그 장이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니이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그 이편 글대로 끊쳐지고 무릇 맹세하는 자는 그 저편 글대로 끊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것을 발하였나니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 내 이름을 가리켜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그 집에 머무르며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이 세상 전부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교체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말씀으로 창조된 것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다 아시죠. 그런데 이 말씀으로 창조했다는 것. 이것은 곧 말씀으로 망하게 해 주신다는 뜻도 되는 겁니다. 오늘 스가랴가 받은 그 계시에 의하면 “두루마리가 보이더라” 돼 있어요. 두루마리는 둘둘 말려져 있는 거죠. 글이 양편으로 다 쓰여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계시가 오는데 하다 하다 이제는 나는 양탄자까지 계시가 주어졌을 때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런 나는 양탄자 같은 그런 계시까지 그런 묵시까지 꼭 필요한가? 그것은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범죄 해도 주님께서는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예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한 이야기가 있어요. “니가 내 믿는 사람을 자꾸 잡아 죽이고 체포하는데, 그것은 니가 맨발로 가시, 선인장 같은 가시를 니가 긁는게 된다”는 거에요.

니만 손해라는 거에요. 예수님의 믿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이게 이미 승패 자체가 성립이 되질 않습니다. 이미 인간은 결정되어있고 말씀도 이미 결정돼 있습니다. 따라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갈 때 주님께서 우리 사람, 내 사람들 내 아이들 그만 괴롭히라는 그런 뜻이 아니고 누굴 걱정하느냐 하면 사울을 걱정해요. 누가 공연한 짓, “너가 스스로 다치는 짓을 니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보다 자기가 생각한 괜찮은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잖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는 사울의 그 행동은 이거는 어떤 새로운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는 거에요. 본인만 혼나죠. 본인만 괴로운 거에요. 사울 본인만. 그처럼 오늘 스가랴 5장에 나오는 이 하나님의 나는 양탄자 같은 나는 두루마리, 이 두루마리가 왜 나냐 이 말이죠.

두루마리가 그냥 땅에서 사람에게 주고 보면 되는데 이게 왜 날아다니냐 이 말이죠. 그것은 이 두루마리에서 예외, 제외가 되는 이 지상의 어떤 것도 배제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다 덮어 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세상의 면적이 몇 평인데 이 두루마리가 어떻게 다 덮을 수 있느냐? 어쨌든 이 두루마리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 이것은 4절 끝에 보면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저주를 내리는 그런 기능을 나는 두루마리가 하고 있는데 전체 다를 덮어요.

의도적으로 크기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 3절에 보면 “이는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저주라” 온 지면. 그게 두루마리가 크기가 얼만데 온 지면 같으면 굉장히 평수가 넓잖아요. 그걸 어떻게 다 커버하느냐 이 말이죠. 크기를 의도적으로 스가랴가 이야기합니다. “그 크기가 이십 규빗이요 광이 십 규빗이다” 이거는 뭐 10.5m 곱하기 5.2m 정도쯤 돼요.

근데 그게 얼마 크지도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온 지면을 다 커버해서 저주를 내릴 수 있느냐? 이 크기가 성전 향단의 크기와 딱 맞아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온 세상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이 성전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돼 있다는 겁니다. 지금 이 스가랴 선지자가 외치는 그 주제는 성전을 포로 되었다가 돌아온 70년 만에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유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전을 지으라 이게 핵심 지시에요.

지으라 했으니까 성전이 뭔지를 알아야 되질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는지 그 집착하는 이유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 성전이 생겨나는 그것은 현재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그 일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성전이 새로 지어지는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어떤 현상도 거기서 빠지는 현상이 없어요. 모든 일어나는 일은 성전 재건과 관련되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은 평수가 얼마 되지 않지만 성전의 효력은 전 세계의 모든 것을 커버합니다. 어떻게 커버하느냐? 전 세계 모든 것을 저주합니다. 저주라 하는 것은 인간을 삭제하고 제거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을 삭제해버리면 그러면 인간을 삭제하는 하나님의 그 취지가 그 배후의 전제가 뭐냐? 인간을 굳이 삭제하고 제거하려는 이유가 뭐냐? 저주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저주를 퍼부어서 언약을 완성 시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방해했다고 이렇게 규정하시는 거에요. 온 지면에다가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붓는다고 되어있으니까 3절에, 온 지면에 두루 행하는 것을 저주를 퍼부으니까 온 지면에 모든 인간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제거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걸 기분 나빠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성도 같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저주 작업이 무사히 시도 될 수 있습니까?” 관심사를 거기에 둬야돼요. “내가 어떻게 천국 갑니까?” 관심사가 이러면, 천국 갑니까 하는 그 자세가 저주대상입니다. 나 구원 받고자 하는게 저주대상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성전에 있지 내 사적인 구원 받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적으로 저주를 퍼붓겠다는 것은 저주 퍼붓는 언약 그 자체에 포함되어있는 완성을 저주라는 방식으로 완성을 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에요. 주의 뜻만 잘되면 됐지 내 구원을 굳이 받아야 됩니까? 아무 상관 없는거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릴 땐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겠다. 그만한 이유가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 해석의 제일 시작점, 출발점, 기초는 하나님이 인간을 제거한다는 거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제거하신다.’ 여기에 둬야 됩니다. 그러면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 쪽에서 얻고자 하는게 뭐냐? 그것은 바로 질서입니다. 새로운 질서를 펼치려고 하는 거에요. 언약 중심의, 말씀 중심의 그 핵심은 성전에 있고 모든 것을 성전에서 담긴, 완성돼있는 그 언약적 체제를 완성시키는 것. 그게 성전이 이제 이스라엘에 의해 깨어졌을 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질서 회복을 위해서 성전이 수립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구조, 체제의 완성으로 그렇게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구조. 하나님의 이 질서를 성전 중심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질서에 의해서 인간이 생긴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침투해서 인간의 질서와 이탈된 엉뚱한 가짜 인간을 마귀가 다뤄서 문제지요. 그러니 이점을 어떻게 질서를 하느냐. 이점을 쉽게하기 위해서 건축에 대해서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서양의 건축이 건축재료가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지기 시작했어요. 철근과 콘크리트가 이게 재질이 다른데 만나도 되나? 라고 고민했지만 조사해보니까 철근과 콘크리트가 열에 대한 팽창계수가 동일하답니다. 이게 틀어지지 않는대요. 철근콘크리트를 하게 되면 이게 기둥 중심으로 건축이 이루어져요. 그전까지는 벽이 힘의 하중을 받아내는 벽채 위주였습니다.

기둥 위주가 되면서 나왔던 건축방식이 필로티 구조라는게 있어요. 필로티 구조라 하는 것은 요즘 빌라들 다 그렇게 하는데 밑에 주차장 입구고, 2층부터 있는 거에요. 그게 필로티 구조거든요. 필로티 구조가 되면, 기둥 중심이 돼 버리면 벽채는 그만큼 자유로워요. 벽채가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어요. 기둥만 튼튼하면 되니까. 그러면 그 벽채에다가 통유리 집어넣어도 괜찮아요.

주님께서 성전을 짓겠다 하는 것은 질서에, 고정된 질서를 성전을 통해서 완성을 딱 시켜버립니다. 완성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벽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만들어 버리는 거에요. 그 고정된 기둥,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해당 되는게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그러니까 이게 사랑이 되니까 인간들은 이 사랑에 대해서 그동안 사실은 방해해 왔던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 들려서 자기 사랑밖에 모르니까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고 사랑을 따로 제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있어요.

벽채 사랑부터 뜯어냅니다. 내가 겉모습에 남들 보기에 신자냐 하고 드러내는 그 가짜. 하나님이 나를 받쳐준다고 자꾸 사람들에게 속임수 쓰는 그 가짜 벽채에 해당되는 우리, 그걸 제거해 버리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 벽채 해당되는 것 버리고 주께서는 언약 완성을 위해서 제거될 것, 다시 말해 저주할 것은 저주해버리고 저주하는 그 언약적 방식이 뭘 낳느냐? 중앙에 고정적인 언약 완성, 사랑이라는 것으로 완성하는데 저주가 필수적인겁니다.

벽채는 나가 떨어져라 이 말이에요. 기둥이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너의 구원은 나가떨어져라. 주님이 주신 사랑만 있으면 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 아니잖아.” 그러니까 떨어져 나가야 돼요. 저주로.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 아들의 화목제물이 뭐냐. 한 자로 피에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사랑을 확정시켰습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주님의 사랑 확정시켜서 이것이 신약이거든요.

그럼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건 스가랴다 이 말이죠. 스가랴를 통해서 그동안 하나님 장차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셔서 할 일을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방해해 왔는가를 잘못되게 율법과 언약을 해석해 왔는가를 지금 노출 시키는 겁니다. 저주방식으로. 나는 율법 책으로. 앞뒤로 다 꽉 찬 율법으로. 그걸 제거하는 거에요. 방해 좀 하지마라는 뜻이에요.

제가 세 가지 질문을 한번 던질테니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질문은 어떤 사람이 지옥가지요? 두 번째 질문은 어떤 경우가 자기 의가 아직 남아 있는 경우일까요? 나의 의가 남아 있구나, 그걸 어떤 경우를 말하느냐? 세 번째가 어떻게 해야 자기 의가 없어지죠? 이 세 가지 질문이요. 특히 세 가지 질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질문이에요. 어떤 경우가 자기 의가 남아 있는 경우냐?

왜 갑자기 자기 의를 언급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율법을 가지고 전체를 스가랴에 나타난 선지자가 이걸 정리를 해줘요. 어떻게 정리하느냐, 그 많은 율법을 두 가지로 정리해줍니다. 하나는 맹세하는 죄, 또 하나는 도적질 하는 죄. 맹세하는 죄, 도적질 하는 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도적질하는 죄를 지었다는 건데 도대체 뭐를 도적질 했다는 것이냐?

무엇을? 남의 물건? 아니지요. 남의 명예? 아니죠. 나의 이름 도용? 아닙니다. 도대체 뭐를 도적질했다 하느냐? 이게 성전에 모든 율법에 핵심이 성전에 모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무엇을 도적질했는지가 느헤미야 13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10절부터 약간 길지만 제가 한번 읽어보게 되면 “내가 또 알아 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이렇게 돼 있어요.

레위 사람들에게 월급을 안 주니까 도망간거에요. 그래서 다시 십일조와 그의 곳간을 채우니깐 레위 사람들의 근무지가 활성화가 된 겁니다. 이게 말라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말라기 3장 8절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수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겁도 없이 어디 도적질 하겠느냐? 라고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도적질해도 어떤게 도적질이냐. 남의 물건이나 돈 훔칠 때 도적질이지 어떻게 하나님을 도적질한 것이 도적질한게 되느냐? 라고 하는 거에요. 근데 이런 생각은 인간대 인간의 생각이고 그들은 뭐를 고려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 사람에게 줬습니까? 아니거든요.

율법의 근원이 성전에서 나왔고 그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레위 사람들이에요. 레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는 말은 그것은 뭐냐 하면 직접적으로 나는 내 것을 챙기는데 있어서 레위 사람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내가 내 인생 살고 내 것 챙기면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들과 나는 별개라고 여겼던 겁니다.

근데 여기에 하나님이 도적질했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여기다 개입하게 되는 거에요.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하고 봐야 될 것은 하나님 쪽에서 너희가 십일조를 하지 않음으로써 레위인들이 자기의 생계가 급해서 제단 일 버리고 자기 살 궁리 찾을 때 결국은 무엇이 방해 받느냐 하면 성전 중심으로 나왔다가 돌아가야 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이게 무시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뭘 하느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도적질한 적 없습니다. 성전을 소홀히 한 적 없고 하나님을 함부로 한 적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 격차. 이 간격을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 돼요. 이 간격을. 하나님은 도적질 했다고 이야기하고 그 당시 백성들은 “무슨소립니까? 우리는 하나님 얼마나 잘 믿고 섬기는데요.”라고 한 거에요.

하나님께서, “여기서 십일조 안 했잖아.” 그러면 그들은, “그러면 십일조 해 드리면 되잖아요.” 이렇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럼 십일조 안 한게 도둑질이에요? 그럼 십일조 보다 더 많이 하면 도둑질 안 하는 것 맞죠?” 이렇게 나올 수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도적질이 어디에 나오는가? 바로 거짓된 맹세에서 비롯된 도적질입니다. 이 거짓된 맹세에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거짓된 맹세와 도적질을 결합시킨 거에요. 그러면 도적질이 ‘그들이 왜 평소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했는가?’라는 그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하면 왜 그들은 거짓된 맹세를 했는가를 찾아보면 되지요. 그것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나옵니다. 마태복음 5장 33절에 보면,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참 어렵죠?

‘헛맹세는 안 되지만 맹세한 것은 지키면 된다’라고 너희들이 생각했겠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도무지 맹세하지 마라. 쉽게 말해서 니는 맹세할 자격도 없다. 왜? 너는 이미 잘렸으니까. 니가 하나님의 성전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은 “하늘로도 말고 하나님의 보좌라 땅으로도 말고 이건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큰 성”, 메시아의 성이죠. “너의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너희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돼 있어요.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자, 이 말을 우리가 이 맹세 주님은 아예 맹세하지 말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니는 맹세하고 전혀 무관한 존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소홀히 했습니까?”하고 나온 거에요. 그 말은 인간이 평소에 하나님을 상대하되 헛맹세 대상으로 하나님을 상대해 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거에요.

노래에 이런 노래 있어요. 힘이 들 때 하늘을 봐 나는 혼자가 아니잖아. 비가 와도 바람이 와도 다시 햇살은 비치니까. 서영은씨가 불렀던 노래입니다. 힘들 때 하늘을 왜 봅니까? 힘들 때 하늘을 왜 보느냐? 이것은 자기가 자기 속에 삽입시키는 방법이 하늘을 쳐다보는 방법이에요. 나를 제거하는게, 언약과 말씀은 나를 제거하잖아요? 근데 인간은 말씀과 성경을 보게되면 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키우려고 하는거에요.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 자기 자신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하는 방법은 뭐냐? 자기 자신을 어떻든 키우든 유지하든 버티든 이렇게 지켜야 돼요. 그 지키는 방법은 뭐냐? 내 생각을 나에다가 계속해서 삽입을 시키는 겁니다. 일종의 셀프 치료? 자기가 자기를 고치는 거에요.

인간이 평소에 성경에서 그렇게 죄 이야기해도 인간은 평소에 죄를 못 느끼는 이유가 뭐죠? 이게 여러분 한번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성경에선 죄라고 하는데 나는 별로 죄라고 느끼지 않는데? 그거는 평소에 매일같이 반복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치료해 왔기 때문에 그런거에요. 치료하는 방법이 뭐냐? 자기 재귀. 이걸 재귀라고 하는데. 재귀라 하는 것은 문법적으로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개가 달아났다. 어떤 문장은 어떤 고양이가 어떤 개를 무서워한다. 그 두 문장을 재귀를 집어넣으면 이렇습니다. 고양이가 겁을 준 개가 고양이에게 겁을 준 개가 달아났다. 이렇게 되거든요. 두 개를 합체하는 거에요. 영어로하면, she loves her. 어떤 여자가 자기자신을 사랑했다는 영어가 she loves her가 아니에요. she loves herself에요. 이걸 refeed, 되먹임이라 하는거에요. 되먹임.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와서 나를 지키고 나를 구원받게 하려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거기다가 되먹임을 해버리면 되먹임하는 그 태도가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 체제를 가지고 자기에게 되먹임을 줬거든요. 그럼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자기 의를 위한 질서가, 체제가 만들어져요. 나를 지키기 위한 구조가 형성된다고요. 나만의 세계지요. 그 나만의 세계에 신학과 성경 지식이 가득 들어있어요.

신앙 생활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거기에 가득 들어있어요. 자, 아까 질문한 거 다시 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갑니까? 자기 재귀. 셀프 치료. 그 사람이 지옥 가지요. 그럼 어떤 경우가 자기 의가 남아 있는 경우입니까? 자기 관리하는 사람이 자기 의가 남아있는 거에요. 그 사람이 지옥가는겁니다. 그러면 세 번째, 그 자기 의가 어떻게 없어질까요?

이 세 번째 질문은 성도 아니면 이 질문 자체를 안 하지요. 성도 아니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거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만, 이런 생각만 나오는 거에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까?” 이런 생각만 나오는 거에요. 그 영광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 나에다가 하나님께 영광돌려라, 거룩하라는 그 베드로전서 말씀, 신명기 말씀 이런 말씀을 내가 있는데서 나를 꾸겨 넣는거에요.

refeed 되먹임하는거에요. 누가? 우리 선배들이. 누구? 바리세인 사두개인들이 그 짓 한거에요. 뭘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래서 망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한테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욕을 얻어 먹는 겁니다. 우리는 그 후배들이고.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이유는 단 한 가지, 나의 토대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아무도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처음으로 돌아 간다는게 그 처음이 뭔지, 나의 처음이 뭔지 우리는 막혀버렸어요.

막혀버려서 하는 것은 뭐냐? 기독교는 종교를 가지고 하는거에요. 교회 가서 하는 거에요. 진짜 나는 뭔지를 그냥 해보는 겁니다. 낮추고 마음 낮추고 겸손하고 자기를 비우고 비우고, 백날 비워봐야 이거는 절의 도사 밖에 안돼요. 뭐 됩니까 그게? 그게 뭐냐? 그게 어떤 경우가 자기 의가 남아 있는 경웁니까? 바로 그런 경우가 자기 의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에요. 그럼 세 번째, 어떻게 하면 내 의가 없어집니까?

그것은 제가 이 해답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인간 저주 무사히 잘 치르시기 바랍니다. 잘 처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왜? 스가랴의 예언이거든요. 말씀이거든요. 나하고 말씀하고 바꿔치기 하는거에요. 나하고 언약하고 바꿔치기 하는거에요. 저주하겠다는 것은 이거는 어떤 경우라도 그 진행에 차질 없다는 뜻이거든요. 이건 어떤 것도 마귀라도 이건 방해하지 못해요.

근데 주제넘게 우리가 왜 거기에 끼어듭니까? 나중에 죽어 천당갑니까? 그 입 다물라. 니가 왜 거기에 끼어. 주의 일에 끼어드냐 이 말이죠. 주의 일에. 그 주의 일에 끼어드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맹세하는 일인 거에요. 맹세하는 일. 그 맹세함으로 뭘 훔쳤는가? 하나님의 의를 훔친 거에요. 도둑질한 것. 하나님의 의를 도둑질해서 자기 의로 전환시킨 겁니다. 이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백프로 이런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의를 자기 소유로 만든 사람. 하나님의 의를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자기가 제거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없어지지 않기 위해서 아주 발악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도적질 했다 하면 그런줄 알면 돼요. 아무것도 어려운게 없어요 성경 말씀에. 성경 말씀의 기초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꼭집어 제거하실려고 한다. 고맙습니다 하면 끝날문제에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맹세 하지마. 다시 말해서 니 인생에 계획 하지마, 뭐 기대 하지마. 다 제거 할거야. 주께서 우리를 제거하는 작업의 일종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게 하시는거에요. 자 그렇다면 기둥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기둥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로마서 13장에 보면 나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것도 지지말라” 13장 8절.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지금 계명이 날아가는 두루마리...“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는것이다”라고 돼 있습니다.

자, 이제 이 말씀을 설명을 해야 될 건데요. 그 설명하기 전에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느냐 하면은요. 사랑은 아까 벽채를 다 뜯어 내는거에요. 벽채가 유리창이 되든 장식이 되든 상관없어요. 그거 보지도 않아요. 따라서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죄일걸. 이것은 죄 일 수 밖에 없어”라는 그것 조차도 사랑을 방해하는거에요.

관심사가 사랑에 있어야 되는데, 이게 내가 죄지었잖아 하는 그런 인식 조차도 사랑을 방해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죄지었다는 이야기는 왜 합니까? 그래서 뭐? 반성해서 새사람 되겠다는 뜻밖에 안 되잖아요. 그건 벽채에요. 뜯어 내야될 벽채라고요. 나는 뜯어내야될 사람인데 관심은 사랑에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미 사랑으로 기둥이 되었어요. 이건 철근 콘크리트에요. 고정된 겁니다.

사랑을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벌어졌어요. 우리가 죄짓는 모든 것도 사랑을 위해섭니다. 사랑에 관심 두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자 그러면 사랑이 뭐냐? 이 사랑이 뭐냐에 대해서 질문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서 어떤 율법사가 잘 보이려고 예수께 와서 하는 말이 “모든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습니까?”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라고 이야기했어요. 율법에 뭐가 되어있느냐?

그렇게 하니까 “율법에는 하나님께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축약을 했습니다. 중앙기둥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거는 뭐냐 하면율법은 완성이라 하는 것은 사랑만 완전 확정 돼 버리면 누가 뭐래도 그것은 완성된 사랑 안에 율법 완성된 율법안에 존재 하는 자가 되는 거에요. 누가 뭐래도.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여기에 3번, 어떤 사람이 그 의가 없어졌지요. 어떻게 하면 없어지지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이 그 의가 그 자기 의가 없어지고 천국가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핫도그 아시죠? 핫도그 보면 거기에 뭐가 삐죽하게 나오느냐 하면 먹다 보면 소세지가 삐죽하고 나와요. 그 사랑을 대화와 행동 속에 고정된 주님의 사랑이 삐져나오면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왜? 그게 율법의 완성이니까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니까요. 율법을 완성했다는 말은 두 가지 말이에요. 저주할 것 다 저주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저주할 것을 다 저주해버린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고 그 하나님의 의가 내용이 된 것을 그게 화목제물, 피라고 되어있는데, 아까 요한1서에,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 사랑했다는 말은 자기 의에 대해서 저주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완전하게 저주하기로 작심을 했다는 거에요. 저주하는게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결합이 되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셀프 되먹임을 해요. 아버지 앞에 자기 죄 있는 죄인의 몸으로 오심으로써 스스로 저주를 유발해서 그 저주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 사랑을 이룬 거에요. 셀프는 주님이 하는거지 우리가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야 나의 의가 아니고 주님의 의가 되고 나의 세계가 아니라 그 나라 의가 되는 거죠. 그 나라 의.

문제는 이게 율법사가 질문한 문제를 답이 내려져야 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라고 해서 그 눈먼 질문자로 하여금 본인을 떠나서 율법으로 가게 해요. 본인의 세계, 나의 세계에서 떠나서 말씀의 세계, 언약의 세계, 율법 완성의 세계로 딱 당기는데 그 율법사가 제대로 당겨가지를 못했어요. 자기 의가 남아 있었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 알겠는데요.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겠는데 그 이웃이 누군지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해요 이 질문을 한번 들어보세요.

이웃이 누구냐를 모른다는 말은 본인이 지금 이웃도 모르면서 지금 율법을 거론한 거에요. 율법을 거론했다는 것은 이웃도 모르고 율법 모르면서 그 이웃을 거론했다는 말은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걸 향한 모른다는 것을 지적해서 주께서 “니가 이대로 해라”고 이야기했어요. 누구 보고? 질문하는 그 율법사보고. 이 율법사는 실패에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웃도 누군지도 모르고 율법이 뭔지도 모르고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당연히 율법사는 해답에 대해서 이미 손 뗀 무관한 자가 되죠. 여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 율법사의 그 태도가 지금 오늘 스가랴 말씀대로 하면 모든 날아다니는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아 마땅한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주님께서 그다음 이야기가 뭐냐. 거꾸로 뒤집기를 하는 겁니다. 이 뒤집기가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 스스로 자기 셀프 자기가 저주받은 자를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이 뒤집기를, 제자들에게 말씀으로 이야기해줬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라고 이야기가 시작해요. 강도 만난사람이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첫 번째 온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 돼서 강도 잘 돌봤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뒤집기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완전히 뒤집기가 이루어지거든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강도 잘 돌봐줘서 끝.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그렇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사람을 먼저 거론해버려요. 첫 번째 사람 율법 전공자, 두 번째 사람은 그 율법 전공자의 지시를 따라서 율법대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 첫 번째 사람은 제사장,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이죠. 둘 다 율법에 대해서 지킨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본인도 모르고 율법도 모르고 이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 짓 합니까? 그것은 헛맹세를 하기위해서 헛맹세를 정당화해서 그 헛맹세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하나님께 하늘을 보면서 맹세하면서 맹세한 나 자신을 나에게 집어넣어서 집어넣은 나를 천당 보내려고 구원하려고 하는 그 짓한 자들이 바로 제사장 들이고 레위인들이에요.

이게 모든 인간의 보편성이에요. 그 작동하는 것은 선악 체계고. “나는 나쁜 사람 되기 싫어 선한 사람 되고 싶어.” “왜?” “그래야 죽으면 좋은데 가니까.” 그러면 여기서 세 번째 사람은, 그러면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면 되잖아요. 사마리아인처럼 살려면 강도 만난 사람이 있어 줘야돼요.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없으면 사마리아 사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강도 만난 사람 주님이 등장해줘야 비로소 그냥 맥없이 무너진 사람, 아버지의 저주를 받아서 맥없이 강도 만난 사람처럼 아무도 안 돌봐도 상관 없는 그냥 죽어가는 한 분으로서 예수님 자신을 거기다가 집어넣을 때 그때 이웃이라는 개념이 발생하는 거에요. 이웃이라는 개념이.

강도 만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요청한 겁니다. 왜? 강도 만남의 그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게 바로 부활을 믿는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나를 완전히 뒤집게 하는 거에요. “강도 만났다. 너도 강도 만나라.” 우리는 제거 되어야 될 마땅한. “내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와서 제거된다면 그게 니 모습이야. 너는 제거 되어야 될 대상이야. 같이 율법으로 안에 들어와서 같이 제거되고 같이 부활 되자.” 이게 바로 소세지입니다. 주님의 확정된 사랑. 나를 제거될 대상으로 알려주는 그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한게 아니잖아”라고 언급해주신 그 언급이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것이 우리를 뒤집기 위한 일어나게 한 일인 것을 우리는 왜 진작 몰랐습니까? 다 이루었는데 아직도 나만의 이룰게 남아있다면 그게 바로 자기 의의 모습인 것을 마귀의 모습인 것을 지옥가는 자의 모습인 것을 사랑으로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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