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경쟁 230910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깨달았으면 됐지. 이게 오늘 제목이에요. 깨달았으면 됐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많았어요. 많다 보니까 예수님이 누굴 사랑하는지 자기들끼리 상당히 여기서 견제가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있는데 주님이 나한테 사랑할까 아니면 저 사람을 더 사랑할까, 라는 그러한 시비가 들러붙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12명 제자들 12명 사이에서도 이런 알력과 갈등이 대단했어요.
예수님 중심이 돼야 하는데 예수님 중심인데 예수님이 중심 같으면 다른 것은 주변에 있어 동일한 거리를 유지를 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중심이 됐는데 예수님 앞에 한 발자국 더 앞에 나가가지고 예수님으로부터 주목을 스포트라이트를 한 번에 담으려는 경쟁심 같은 것이 12제자 속에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봐야 되는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 사람과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질문 있습니다.” “무슨 질문?” “우리 12명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가 가장 하늘나라에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야 이거 너 너 너 너가 너가 높은 자리야.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예” “그럼 앉혀줄게.”
너라는 답변을 제자들 가운데서 나한테 꽂히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거예요. 나는 너희들 중에 나는 너만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주님으로부터 확답 받고 싶은 거예요. 왜 그걸 확답 받고 싶지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과 진리를 내 것으로 받아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있고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그 귀한 것으로 내 것을 채우게 되면 나는 옆 사람보다 더 귀한 존재로 발전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은.
옆에 사람이 나의 라이벌 관계고 경쟁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냐 하면 이런 말씀하셨거든요. “너희들 너희들에게 죄 사한 자에게 너희에게 죄 지은 자에게 사해라. 사해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제자들 사이에 이게 라이벌 관계 경쟁 관계에 있으니까 용서를 누가 많이 했느냐로 예수님으로부터 누가 더 인정받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서게 되는 거예요. 누가 용서를 많이 받은 거. 우리 교회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마는 새벽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침에 새벽 기도하러 나오잖아요. 새벽 기도 해 가지고 쭉 하는데 목사 있고 옆에 새벽 기도 하는 사람이 자기 혼자밖에 없으면 그냥 목사 퇴장하고 난 뒤에 지도 대충 정리하고 예수 이름으로 하고 나오면 되는데 지가 나가려고 하는데 자기 옆에 다른 집사가 더 엎드려서 주여 하고 있으면 못 나가. 오 봐라 저거 저 끈질긴 거 봐 끈질긴 거 봐라. 저거. 한번 해보겠다는 거지 뭐. 니가 누가 더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하는지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오늘도 좋다. 오늘 아침 안 먹는다. 오늘 아침밥 없다.
뭔가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남들과의 차이를 느끼면서 행동이 유발되게 돼 있어요. 인간의 행동은. 그게 대표적인 것이 학교에서 시험 없애면 공부 안 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시험 안 치면 공부를 안 해요. 입시시험이 없으면 공부할 리가 있어요? 시험 없는데 공부를 미쳤다고 공부해요. 안 하죠. 서열화 돼야 돼. 서열화. 순서를 매겨줘야 돼요. 그렇게 해야 된다고.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 헌금하는 방법도 그냥 하면 안 되고 누구 헌금 한 것을 굉장히 강조를 해줘야 돼요. 김 집사님은 없는 가운데서도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걸 그 본인한테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 다 있는 데서 이야기해야 돼요. 그러면 인간은 여기서 자아가 두 개, 보여주는 자아와 숨기는 자아 두 개이기 때문에 두 개가 있어요. 왜 두 개 만드냐 하면 엄마 아빠가 그리 만들었어요. 엄마 아빠가. 엄마 아빠가 크면서 훈계를 하잖아요. 훈계를 하게 되면 엄마 아빠가 엄마 아빠의 마음에 드는 자아와 그리고 진짜 뭔가 있는데 자기가 잘 파악이 안 되는 진짜 자아를 분리시켜서 엄마 아빠가 좋은 쪽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게 이미 숙달되었어요. 엄마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얘는 내 말대로 잘 양육되었다. 양육되기는 뭘 양육돼. 갈라졌는데. 갈라져 있는데.
그 공동체가 원하는 자아 가정이라는 공동체가 원하는 자아가 따로 있고 내가 발목을 잡는 나의 발목을 잡는 자아가 또 따로 있어요. 이게 사회에 나가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점점 더 갈라지고 이게 균열이 일어나게 되면 이제 정신병으로 문제가 큰 거예요. 오은영 박사 찾든지 찾아가야 돼요. 그렇게 거짓된 세계에서 세상에 나와서 나는 저 사람보다 더 거짓되게 하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거짓된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본인도 거짓스러운데 저 사람보다는 그래도 정도가 약하다는 그걸로 그 양만큼은 내가 착하다고 자기를 그렇게 점수를 그렇게 줘요.
이게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라 하니까 그다음부터 나온 이야기는 뭐냐? 어떻게 용서하면 용서 대장 되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최고 용서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몇 번 하면 됩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럼 니 선에서는 얼마나 하면 되겠냐?” “제가 7번까지는 봐줄 용의가 돼 있습니다.” 용서 경매에 들어갔습니다. 7번 손 들어보세요. 7번 이렇게 나온 거예요. 베드로가 일곱 번에 손들고 저 옆에 있는 자들을 보면서 “안 되지?” “안 돼.” “안 돼. 손 내려. 내가 일곱 번이야.”
그러니까 주님께서 베드로가 한 행동을 그대로 행동합니다. “여기 일흔 번에 7번 있습니다.” 하고 490번을 내세웠네. 베드로는 어떻게 되겠어요? 음매 기죽어. 음매 기살어. 순악질 여사처럼 음매 기 살아 이렇게 되겠죠. 그리고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베드로야. 잘 들어라. 용서라 하는 것은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용서받는 자야.” 왜 용서받는 자가 용서를 왜 끄집어내냐 이 말이죠.
그동안 용서 몇 번 하면 됩니까? 이것도 죄인데 왜 그것이 용서받을 거리 된다는 생각을 왜 못하느냐? 나에서 나오는 것은 다 용서 받을 것밖에 없어요. 누굴 용서할 주제가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용서받은 것만 생각하게 되면 모든 범사에 감사하게 될 거예요. 근데 감사가 없다는 말은 이거는 내가 알아서 한 거고 이거는 이 잘못은 내가 용서받고 지가 지 마음대로 용서, 난 용서 안 받을 것과 용서할 것 지가 지 마음대로 이렇게 구분 해가지고 지가 해보고 이거는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 요거는 괜찮고요. 이래가지고 나서는 거예요. 그거 가지고 뭔가 다른 사람하고 경쟁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사람이 10억이 있는데 신하가 10억을 빚었을 때 임금이 “10억? 그거 껌값이지. 10억 안 갚아도 돼.” 그러니까 룰루랄라 신하가 10억 다 했다 하고 자기 집에 가니까 10원 10원을 안 갚은 사람이었어요. “10원 왜? 990원인데 980원 냈어? 이게 뭐 홈쇼핑이야? 뭐 깎아도 어디 깎는 거 없어. 10원 왜 안내? 저놈! 저놈! 나를 무시했다. 당장 옥에 가둬라!” 이렇게 되었어요. 자기는 10억을 탕감 받았는데 막상 탕감 받았고 좋다고 하면서 막상 남들한테는 10원 안 갚았다고 할 때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신하를 어떻게 하겠는가? “다 토해네. 용서 취소. 니 용서 취소. 없어. 없어. 없어. 없어. 다 토해내. 니는 맞아도 한참 맞아야 돼. 많이 맞아야 돼.” 하나님, 임금님은 그 신하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처럼 진짜 원하는 백성은 뭐냐? 용서받은 자가, 많은 자가 천국에 간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매사에 나 용서만, 용서받은 것만 내놓는 사람이 천국 가고 남한테 용서 안 해준 것만 기억하는 자는 지옥 가고 그렇죠. 나 니 봐줬다 이런 식은 안 돼요. 용서받은 것만 계속해서 기억할 때 모든 일이 하나님의 용서의 선물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우리하고 협작하고 협력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용서받는 처지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니 날마다 용서받은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