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2023년 8월 9일 본문 말씀: 스가랴 1:12-17
(1:12)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1:15)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17)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성전을 파괴시키므로서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이 하나님의 진노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스가랴는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고 천사와 상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는 같은 인간과 협의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할 수가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닌 하늘 나라에 속하는 존재, 곧 천사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그 다음 계획과 진척된 작업상황을 통고받게 됩니다. 70년이 되면 다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시겠다는 그 약속은 어떤 식으로 구현되느냐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70년 기간이 어떻게 해소케 하느냐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 작업에 관한 내용입니다.
70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서 성전을 철거하셨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자기 백성과는 연락사무소 같은 곳입니다. 성전이 없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상실되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 바로 이 상태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막혀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인간에게 여전히 목숨이 붙어있어 살아 움직인다고 해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목숨으로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이란 성전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천국은 성전이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전이 이스라엘에게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이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여전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포로 기간 70년이 지나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 70년 기간 동한 하나님의 진노가 철회되고 하나님의 긍휼이 제공되는 정당함이 70년 기간 동안 마련되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인간은 배제되고 천사가 중간을 메우게 됩니다. 누가복음 1:26-27에 보면,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브리엘이라는 천사가 과연 70년 기간에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철회시키고 긍휼을 덧입게 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핵심은 마리아 몸에 임신된 아기에게 있습니다. 이 아기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말로만 전해졌던 예언이 역사 안에서 눈으로 보이는 형식이 됩니다.
이 진노를 안고 예수님은 70년의 내막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완료시키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70년이란 어떤 기간을 뜻할까요? 요한복음 8:57-58에 보면,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시간관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단선적 시간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 있기 전에 벌써 자신이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단선적 시간관을 예수님에 의해서 U턴 됩니다. 구부려집니다.이렇게 역사의 뒷면이 나옵니다. 역사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그 뒷면말입니다.
인류가 아직 가보지 못한 역사의 끝은 예수님께서 70년을 떠안으므로서 예수님 중심으로 구부려져 처음과 끝이 만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기술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교실 분위기 같습니다. 파장 분위기입니다. 취직하기 위해 설립된 고등학교에서 3학년 2학기 되면 많은 학생들은 벌써 취직어서 실습나가 있습니다.
70년의 기간을 담당하는 메시야에 의해서 은혜를 입은 자들은 벌써 천국에 취직한 자들입니다. 이들만은 예수님 덕분에 무사히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이 70년 동안 무슨 일을 하신 걸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신 장소와 부활하신 장소가 다르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골고다 언덕입니다. 부활하신 곳은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즉 역사적 바탕에서 죽으시고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겁니다. 이 부활의 차원에서 보면, 역사적 시간관은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 수정 안이 요한복음 2:20-22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46년과 3일을 같은 차원에서 연결지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바는 단선적 역사관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70년을 이해해서는 아니됩니다. 다니엘 9장에서 이 70년 70이레로 변경해놓으셨습니다. 70이레는 두 개의 하나님의 사건으로 세 토막이 납니다. 하나는 7이레입니다. 다른 하나는 62이레입니다. 다른 하나는 1이레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페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단 9:24-27)
마지막 1이레가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 사건으로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 십자가의 능력과 위력과 효과로 역사판에서 천국판으로 옮겨질 수가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의 죄많은 육신에 부활의 위력을 덧입혀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전으로 만드신 겁니다. 이 모든 공로는 예수님 홀로 이루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뚫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뚫어내셔서 긍휼을 전해주시는 은혜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장 12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아멘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천사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 나옵니다. 그것은 천사가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노했다. 진노하셨다.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 인간으로서는 굉장히 낯선 하나님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나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을 하지 아니하면 그거는 전혀 엉뚱한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은 반드시 그 전제가 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셨다. 화를 내셨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다음에 생각은 하나님이 어떤 것 때문에 분노하고 어떤 것 때문에 화를 내셨는가? 그런 마음으로 다가 설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연락책은 끊어졌습니다. 인간이 기대해봐야 소용없고 인간이 하나님께 다가서 봐야 안 받아줍니다. 왜? 분노 중에 계시기 때문에. 그럼 전에는 어떻게 했는가? 전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연락책을 성전을 통해서 주고받았습니다. 근데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는 철거해버렸어요. 남북연락사무소를 철거하듯이, 하나님이 연락할 수 있는 루트, 통로를 하나님께서 제거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분노의 표시에요. 연락할 수 있는 어떠한 매개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점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 같으면 “하나님이여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이여 옛날 사랑을 회복하소서”라는 그 말 속에 필히 무엇이 담겨 있냐면 “하나님이여 저와 다시 연락을 회복시켜주옵소서.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성사되게 하옵소서. 연락선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대하고 기도해야 이게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하나님 뭐하시노 뭐 복안주고.” 이래가지고는 안돼요. 하나님과 연락이 돼야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우리의 뜻도 하나님께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의 소원은 하나님께 뭐 얻어 챙기는게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락이 된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 사람은 자기의 마음의 소원을 다 이룬거죠. “하나님, 하나님 쪽에서 우리 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과 어떻게 연락할 수 있는 어떤 조치가 없겠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 아들 보내겠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라고 하면 그걸로 연락할 수 있는 연락 분이 오셨다는 그걸로 더는 소원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는 것. 바로 그것을 이 마지막 때에 그걸 천국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달리 이야기하면 그걸 하나님의 성정이라고 이야기하는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모든 작업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하심으로 하나님이 화를 내심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화내는 하나님으로 새롭게 각인되고 인식이 되는 그 백성에게 하나님과 연락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연락이 끊어지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지옥이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연락이 끊어진 상태. 그게 지옥이고 이 땅에서 천국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연락체제 안에 있는걸 바로 천국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뭐 행복하게 잘 먹고 풍족하게 잘 사는거 그게 천국이다. 이런 것은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거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거는 거짓된 하나님이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보고 스가랴 구약이니까, 신약에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뭡니까 물으신다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연락책이 드디어 도달하는 이 땅에 친히 방문하는게 그게 바로 신약이고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이걸 이렇게 간추려 설명하면 좋아요. 하나님께 관심 있는 사람은 그거는 성도가 아니지만 일반인이지만, 하나님의 관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서 관심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로 바뀐 변동이 일어나면 그 사람은 인간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바뀌는 겁니다. 같은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로 바뀐다는 말은 구약 때에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이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내쳤잖아요, 하나님을 인정을 안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까 말씀대로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그 인간은 하나님을 배척했다. 하나님쪽에서 거기에대해서 화를내셨다. 배척했다 화냈다를 압축해서 보여주시는 분이 신약에 바로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보여준 활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뭘 발견했냐 하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분노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났는데 이 말씀이 예수님한테 그대로 다 녹아져 있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재발견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참 고생많다. 이래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왜 예수님이 고생하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억울하게 매달려 죽었다. 죄인도 아니면서. 참 안됐다. 훌쩍훌쩍. 이래가될 문제가 아니고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었는가? 우리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도대체 우리가 어떤 존재이기에, 어떤 대상이기에 연락책으로 오신 분이 그렇게 애매한 죽음을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가? 그것은 그 정답은 예수님 안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거기서 표출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를 낸 하나님. 분노하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하나님의 그 울분이 예수님한테 몽땅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대로 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거에요.
이렇게 보게 되면 이런 것은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말씀으로 행했던 것이 이제는 눈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신약에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스가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스가랴가 지금 누구하고 이야기 하느냐하면 천사와 이야기해요. 이 말은 지난시간에도 그런 이야기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은 드디어 선지자는 인간하고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망해버렸는데요. 나중에 포로잡혀 갔으니까. 나라자체가 해체되었으니까요. 뭐 해체된 인간하고 뭐 새롭게 의논할게 없어요. 그냥 해체된 거에요. 해체된 인간끼리 우리 다시한번 결집해서 뭐 해봅시다. 이거는 아직도 인간에게 어떤 여운, 미련, 인간에게 어떤 가능성 이런게 남아있을때나 하는 이야기에요.
인간하고 의논해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싹 다 끝난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뽑아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공식은 이렇습니다.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라. 별것이 안 나옵니다. 사람하고 상대할 필요없어요. 사람들은 사람하고 상대하는 이유가 있어요. 그거는 뭐냐하면, 살아남을려고, 살아볼려고 사람하고 상대하는거에요. 그런데 구약을 통해서 둘을 구분해야됩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생명이 있는 것과 우리가 구분해야돼요. 인간이 살아움직인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계속해서 사람과의 상대를 하겠다는 그것 자체가 지옥의 풍경이죠.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이 지옥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천국은 살은자가 들어오는게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새롭게 부여받은자만 천국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들이 자기가 더 살아볼려고 사람하고 만나거든요. 그들에게는 뭐가있다고 하냐면 자기가 아직 숨 쉬고 있고 목숨이 붙어 있다는 거에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습니다. 니 목숨 천국에서는 안 받아주는거에요. 우리의 목숨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안 받아주는 목숨에 연연하면서 그것을 계속 이어볼려고 아등바등 애를쓰고 있어요. 살아 남아야 돼 살아 남아야 돼. 늘 수시로 쌀독에 쌀이 있는가를 살피고 쌀독에 쌀이 없다하면 산 위에가서 나 죽어버릴란다 뭐 이렇게 치매걸린 부모처럼 늘 돈이 얼마있는가 살피는 것. 그거는 생명이아니고 그거는 목숨줄이죠. 그거는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할 수 있는 자만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살아있다고 목숨있다고 이 목숨 부지해야지 이런 것은 오직 하나님의 화를 더 돋울 뿐이에요. 왜? 일방적인 자기생각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방적인 자기 생각만 해요. “사는데 바빠서 말씀 못 봤습니다.” 이 무슨 뜻일까요? 사는데 바빠서 말씀 못 봤습니다. 이걸 달리 표현하면 “사는데 바빠서 생명에 신경 못 썼습니다.” 그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나는 생명 그까지것 관심 없고 나는 목숨 붙어있는게 관심있습니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왜 선지자가 사람하고 상대하지 않고 천사하고 상대하는지 이유를 제가 밝혀드린 겁니다.
사람하고는 이미 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그다음에 진노는 사람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하고 상대해야 돼요. 자, 천사가 하나님의 무슨 계획을 선지자에게 알려주었는가? 지금 분명히 오늘 본문에 천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있다는 것. 그럼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파괴 했다는 거에요. 누가복음 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 예가 하나 나옵니다. 1장 26절에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이래 돼있어요.
지금 마리아가 사람하고 상대합니까? 아니죠. 마리아가 약혼자 요셉하고만 상대합니까? 아니죠. 물론 마리아가 사람하고 상대하지요. 이 세상의 사람이니까. 근데 그 마리아가 요셉과 만나는 것은 아무런 특이사항이라든지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한 거에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내세울게 없어요. 마리아에게 누가 찾아오느냐하면 이 세상사람이 아닌 천사가 쑥하고 개입해 들어옵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만났다고할 때 이 말씀을 듣는 많은 사람들은 약간 불쾌감을 느낄 수 밖에 없어요. 뭐냐하면 마리아 지는 뭔데 천사를 만나고 왜 우리는 뭐 천사 왜 안오냐 이런 어떤 질투심 같은게 있는데. 이게 마리아에게 천사가 오는 것은 스가랴의 말씀의 지속성이에요. 스가랴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천사하고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와 그 연락책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마리아가 특별히 천사만난걸 부러워할게 아니고 천사보다 더한 분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천사는 그냥 연락책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천사와 달리 우리의 죄를 일거에 해소해주셨습니다. 오늘 이야기할게 한두가지가 아닌데 여기에 그중에 하나가 12절입니다. 여기 12절에 보면, 오늘본문 1장 12절에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칠십년이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천사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70년이라는 내용은 뭐냐하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70년 마치면 내가 다시 내 백성을 본토 땅으로 돌아와 줄게”라고 사전에 예보한 그 기간이 70년이에요. 그 70년에 대해서 지금 스가랴부터 해서 인간은 거기에 끼어 들 수가 없습니다. 그 70년에 돌아온다는 그 내용에 대해서 이거는 인간은 배제되고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하면 하나님과 그리고 천사와 의인이 되죠. 그런데 이 70년이 스가랴 만난 천사는 의논은 하는데 70년에 돌아온다는 그 예언에 성취성은 천사 몫이아닙니다. 천사가 하는게 아니에요. 가브리엘이 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천사보다 더 확실한 분이 담당자에요.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담당자입니다.
예수님이 담당해서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성전을 회복하는 거에요. 70년이 지나면 뭐가 해결되느냐. 성전을 회복하는겁니다. 성전을 다시 짓는 거에요. 짓는 정도가아니고 완성하는 거에요. 성전이 완성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락책이 완성되는거에요. 그 연락책이 완성된다는 말은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지금 인간은 완전히 배제하는거에요. 하나님과 천사끼리 지금 대화하는 그 대화를 지금 스가랴가 그걸 듣고 우리한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니까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왔다는 것은 스가랴의 이 천사이야기에 이 프로젝트의 연장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을 지금 진행시키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가브리엘이 와서 마리아에게 무슨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니 임신했다.” 마리아가 깜짝놀랬죠. “제가 애를 배야됩니까?” “그 애가 보통애가 아니거든, 그 애가 70년 만에 성전을 지어서 완성시킬 그래서 그 성전에서 하나님과 자기백성을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공간 마련을 위해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아기가 지금 니 뱃속에있다. 니 임신했다.” 이렇게 보는거에요. 우리가 마리아 안되길 천만다행입니다. 마리아가 임신했다고 구원 받는게 아니거든요. 임신한 마리아가 죽어야 구원받습니다. 내 속에 이질적인 요소. 육적인 요소말고 이질적인 요소가 천사가 오든지 성령이 오시든지 주님 오시든지 있어 버리면 그때부터 목숨은 사라지고 생명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없어지고 생명이 생겨나기 시작하는거에요, 우리안에. 목숨가지고 우왕좌왕하는 존재가 사라지고, 생명이 영원히 내주하는 인간으로 달라지는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죽은 장소와 예수님이 부활한 장소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죽었던 장소는 골고다 언덕이에요. 예수님이 살아난 장소는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성령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 그렇게 하셨는가. 백성들이 영생을 얻을 부활할 자리가 바로 죽어가는 성도 자신의 육신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성전을 짓는다 할 때 요한복음 2장 21절 22절에서 신약에 와서 성전을 어떤 성전을 짓는가가 밝혀집니다. 20절부터 보면,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거에요. 46년 동안 이 성전을 지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했느냐하면 이 성전을 헐어버리라 라고 이야기 했어요. 이 대화를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46년동안 지은 성전 뭐 대구같으면 대구 서현교회 또는 제일교회 또 바티칸에 바티칸 성전. 뭐 유럽에가면 46년이 아니고 200년 150년 지은 성전이 예배당에 한 두개가 아니니까요.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 이런 것. 대단하죠. 예수님은 그걸보고 이렇게합니다. “46년동안 지은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3일동안 짓는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현장에 우리들이 함께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 현장에 요한복음 2장에 말씀이 있다고 봅시다. 100이면 100명에게 다 물어봅니다. 예수님이여, 뜻이 뭐라고했느냐 라고 물으면, 46년 신전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짓겠대. 라고 했고 그 당시 유대인들도 벌컥 화가나가지고 대들었죠.
어떻게 사흘만에 짓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46년 지은 성전에 사흘만에 이렇게 지금 못한다 라는 그 생각에 미치지 못하고 그 생각을 46년과 삼일을 잇지못하는 너희들은 이미 살아있어도 너희들은 생명이 없는 인간이라고 지금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해서 표출하고 있는거에요. 그 말도 못알아 먹느냐 이 인간들아, 죽어버려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 말을 못알아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노의 대상이고 지옥가야 마땅하지 이런뜻이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말씀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들어도 터무니없는 억지를 주님쪽에서 하고있는거에요. 요한복음도 그렇고 갈라디아서도 그렇고. 성경을 보면 이게 어려운정도가 아니고 해석 불가능한 정도입니다. 해석자체가 불가능해요.
마태복음 24장 34절에 이런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절,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걸 바꿔서 이야기하면 내 말이 이루어지는 그때에 이세상의 모든 하늘과 땅은 다 없어진다 그 뜻이고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내 말이 성취되는 순서에 따라서 이 세상은 꺼져가고 소실된다는 뜻이에요. 세상 없어지는것과 내 말이 성취되는것과 맞바꾸어가는 그러한 진행과정을 보일 것이다는 거에요. 세상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주의 말씀은 드러나게 돼 있다는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이 성경말씀이 도달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들은 지워나가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은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없어지면서 뭐가 사는가. 여러분의 육신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구현되기 시작하는겁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재료로 사용해서 말씀이 말씀되게 실현되는 그 과정에 우리 자신들이 동원된 겁니다. 참여된 거에요. 그렇다면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70년만에 돌아온다는 것이 뭐냐. 70년은 주의 말씀에 보면 70년에 돌아와요. 70년에 보면 하나님과 인간의 연락책 다시 말하면 천국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이 이전의 70년안에 들어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긴긴 역사가 70년안에 축약돼있다는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인간의 역사의 뒷면에 70년이 밑에 깔려있는겁니다. 축약이라는 것은 응축이라는거에요.
응축이라는 말은 인간은 끝을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끝을 확정된 거에요. 확정. 주의 말씀 안에 인간의 역사는 이미 종결 되었습니다. 종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술계 고등학교에 3학년 2학기 분위기라 할 수 있어요. 기술직 고등학교에 3학년 2학기 교실 분위기는요, 벌써 여름방학지나고 이미 인턴으로 취직한 애들은 벌써 2학기 되면 학교 안나오고 실습하고있어요. 공장으로. 다 실습하고 있고 실습하러 갑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있는 이유가 기술직고등학교는 취직되기 위해서 고등학교가 있거든요. 근데 이미 걔들은 졸업하기 전에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다닐 목적이 완료가 되어 종결되고 만거에요. 선생님이 “니 거기서 실습하고있으면 학교 안나와도 그 실습 기간으로 다 포함 되가지고 나중에 졸업할 때 졸업장 타러 오기만 해라.”이렇게 할 뿐이죠. 물론 공장에서 졸업식 다 안가게하는 공장도 있어요. 이 바쁜데 어디가냐, 우리월급타먹고. 이런 야박한 사장님도 있었지만 어쨌든 간에 3학년 2학기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고등학교의 학창시절은 없었습니다. 근데 그런가운데서도 아직도 교복입고 책가방들고 학교나온 애들이 있어요. 탈락자입니다. 취직에 탈락한자에요. 서글프죠. 친구들 다 취직했는데 지는 이제 학교에서 선생님도 성의없고.
70년의 압축된 내용을 예수님이 이 역사를 자기 몸에다가 주입시켜요. 자기가 떠맡아버려요. 떠맡아버리면 어떤 하나님 백성이 생기느냐하면 주께서 완결시키고 종결시켜서 성전이 된 그 예수님이 이미 들어와버린사람들이 발생돼요. 신약시대에. 그 사람은 천국에 취직된 사람입니다. 취직해 가지고 이 땅의 삶은 뭐냐. 그냥 천국 실습 중이에요. 지옥 속에서 천국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에요. 46년간 지은 성전을 3일 만에 짓는다는 것을 그걸 비로소 알게된 사람이에요. 이거는 목숨을 연장하는사람은 몰라요. 그러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아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2장 22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고 난 뒤에. 다시 말해서 70년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종결되어 버렸어요. 완료가되고 완성이 됐어요. 완료가 된 그 부활의 영을 받은 제자들한테는, 46년 동안 그 벽돌 건물로 지은 이 성전은 인간의 역사에 해당되는 성전이에요. 그러니까 지옥에서나 통하는 성전. 하나님의 분노를 이길 수 없는 성전.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 못하는 성전. 그 성전이 46년 동안 지은 성전입니다. 거기에는 생명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스라엘 사이에 연락책이 이미 망해버렸어요. 성전이 떠나면 망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망한 인간하고는 상종을 안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냥 관계를 끊은게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기 때문에 상종을 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는 천사하고 상대했잖아요.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상대합니다. 천사 정도가 아니에요. 예수님과 상대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모든 70년에 돌아오리라 하는 그 말씀을 예수님께 맡겨버렸어요. 담당자가 예수님이에요. 70년만에 돌아온다는 그 말씀. 하나님의 긍휼이든 하나님의 사랑이든 그거는 예수님이 홀로 받아 내시는거에요. 다른 사람은 받을 자격 없어요. 예수님만이 이스라엘이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자격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얘기했잖아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서, 그거는 보통 인간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로 바뀌면 비로소 그 사람이 성전이라고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극단까지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가면 이렇습니다.
노아 홍수 여러분 아시죠.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처럼. 그럴 때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그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대체로, 무슨 사고는 있을순 있지만, 대체로 ‘나이순대로 차례차례로 늙어서 노쇠해서 죽는다.’라는 것이 그들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터득한 인생 지혜입니다. 그게 다들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노아 언약 하나님의 약속이 노아에게 개입한 순간 그들은 일거에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나이가 적든 말든 전혀 구애 없이 그날 그때 한꺼번에 다 죽었어요. 무슨뜻입니까? 인간의 시간 계산은 하나님의 천국에서 통하지 않는 시간의식이었던 겁니다.
같은 말로요. 요한복음 8장 5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이래 돼 있어요. 인간들의 생각은 직선적이에요. 아브라함때 먼저 있었고 그다음에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오는거에요. 직선적이죠. 근데 예수님은 시간을 구부려버렸습니다. 구부려버려요. 휘어져버려요. 시간이 예수님에게 와가지고 유턴해버렸습니다. 시간의 유턴장소가 있어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 인간의 지혜로서는 이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뭘 몰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모든게 잘못돼있어요. 인간은 자기가 지옥가는데 적합한 그런 지식 외에는 아는게 없습니다. 내가 아는 그 지식이 나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는 지식이고 생명이 없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도 하나님이 그게 아니라고 지혜를 줬지만 이미 그 이스라엘은 공중분해 날라가버렸어요. 이스라엘 날라가서 이방 민족 안에 섞였습니다. 뭐 이방 민족에는 아예 율법조차도 없어요.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니깐 그들의 생각은 애초부터 천국 바깥의 존재들이죠. 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란 존재를 몰라요. 하나님은 아는데 예수님의 존재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몸에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와 화내심과 저주가 품은 육신으로 왔다는것도 그들은 몰라요. 그저 사랑의 하나님이 복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자기 자신들이 마땅히 이땅에 목숨 계속 유지되고 살아야 마땅한것처럼 하나님이 그런 복을 줬다고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거에요. 이스라엘은 깨졌는데, 이스라엘은 모르겠고 나는 내하나님 믿겠다는 거에요. 이거는 말도안되는 고집이거든요. 막상 예수님하고 이야기해보니까 전혀 같이 통하는게 하나도 없어요.
예수님이 죽으니까 죽는이유도 모릅니다. “예수님 죽는건 모르겠고 나는 살아남으면 그만이지.” 악착해서 살고자 하는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안에 70년이 들어있어요. 이 70년이 들어있어 가지고 예수님을 역사 속에 갇혀있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냅니다. 끄집어내는 방법은 70년이 다니엘을 보면 70이레로 변해요. 70곱하기 7. 70이레로 변하면서 490년되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벌이시는 일. 하나님의 사건의 차이, 순서로서 70이레가 세토막나요. 7+62+1 요렇게 세토막나면서 토막 내는 그 묵시의 시간을 자르는 그 사건 사건이 있어요. 성전 짓고 지은 성전 깨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하나의 토막이 세 토막 난다 하는 것은 자르는 면이 두 개있었다는 거에요. 두 개의 사건이 있었다. 성전 짓고 짓는사건 성전 작살나는 이방민족에 작살나는 사건 하나. 그렇게해서 끄트머리에 한 이레가 됩니다. 그 한 이레도 두토막 나요. 한 이레가. 한이레가 7년을 말하거든요. 7년을 말하는데 역사가 말하는 7년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수님의 몸에 과정 속에 두분으로 쪼개진다는 뜻이에요. 이게 다니엘 9장에 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레가 반이레로 바뀐다는 그 대목만 시간 아껴서 보겠습니다.
다니엘 9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신약으로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 십자가 전과 이후가 반토막 나누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반토막 나누어지면서 나머지 3년 반이 다니엘 제일 끝에는 1235일로 돼있어요. 3년 반을 그런식으로 마지막에 1235일로 돼어있다 그 말이죠. 1290일 지나고 복이있는 사람은 1335일 지난다. 이게 뭐냐하면 역사에서 자기백성이 역사를 끝장내고 하나님의 천국에 역사가 완료된, 그걸 묵시라고 합시다. 역사의 저촉받지않는 완료된 그런 완성된 나라로 들어갈 때 십자가 환난 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하는 그 여정을 말하는거에요. 하나님의 진노를 통과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갑니다. 못가는데 주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이 땅에 예수님이 당했던 진노와 동일한 진노를 준비하시고 그 진노를 통과하도록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진노를 무사히 통과하도록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허락해 주신다 이 말이에요. 마태복음 24장 35절에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노아의 때라하는 말은 일거에 다 죽는 날이죠, 일거에.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따라서 시계 보지말고 시간 계산하지말고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무슨일을 하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친 그 지점이 뭐냐. 그 지점이 바로 갈보리 죽음의 지점이고, 그 지점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거에요. 그 부활의 육, 그 부활의 장소가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임하면 성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하나님과 함께있는 성전의 장소가 되는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차질 없고 빈틈없되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거들 것은 없고 우리가 혜택 받을 것만 있는 이러한 상황을 주께 감사할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