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소녀 230813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예수님이 왜 오셨느냐하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직접 나중에 시범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자기가 부활로 영광스럽게 되었죠.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에 일어난 그 일이 너희에게도 내가 부르는 너희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이거는 부처도 못 해요. 마호메트도 못한 겁니다. 위대한 철학자나 지혜자도 어떤 선생도 못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거예요. 기침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는 길은 살아나는 그쪽으로 가기 때문에 그냥 갈 수가 없고 일단 죽고 그리고 살아나야 되겠죠.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예수를 믿으나 안 믿는 일단 죽습니다. 죽는데 일단 죽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도중에 예수님이 끼어들어야 돼요. 개입돼야 돼요. 장난감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우리를 간섭해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어떤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죽은 게 아니고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자 했는데 예수님께서 가자 했는데 그냥 갔으면 죽기 전에 갔을 수 있는 문제인데 가는데 누가 새치기를 해요. 어떤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옷을 이렇게 잡은 거예요. 예수님의 옷을.
그래서 예수님의 옷을 떡 잡을 때에 여러 사람이 밀고 당겼으니까 누구나 잡을 수 있을 건데 예수님께서는 뭔가 의미 있는 뭔가 뜻을 가지고 잡는 어떤 여인을 캐치를 했죠. 내 옷 왜 잡았느냐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휙 돌아보면서 “내 옷 왜 잡았어?” 하니깐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예수님의 손은 잡을 수 없고 몸은 잡을 수 없고 그래도 예수님한테 예수님을 터치는 하고 싶고 기껏 하는 게 예수님의 옷도 아니고 옷가, 옷가를 잡으면 내 병이 낫지 않겠나 싶어서 옷가를 제가 만졌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니가 나를 아는구나. 니가.” 왜냐하면 자기 옷을 자기가 만질 수 있잖아요. 자기가 할 수 있잖아요. 누구의 옷을 만진다는 것은 누구의 몸을 만진다는 것은 더 이상 내 몸은 내가 손댈 필요 없을 정도로 절망이라는 사실을 한껏 이미 받아들인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게 이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완전히 아는 거예요. 그래서 내 몸은 내가 포기하고 주님께서 내 몸을 책임질 분은 내가 아니고 다른 분이 책임질 거라고 믿어지고 그분의 옷을 만진 겁니다. 그분과의 관계를 이은 거예요. 이렇게 엮이도록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을 듬뿍 하시고 그것 때문에 또 가는 길이 좀 지체가 됐겠지요. 그렇게 하고 난 뒤니까 이제 원래 회당장 집에 난리 난 거예요. 오라고 내가 빨리 오라 오라고 내가 신신당부했는데 이제 왔어. 이제 소년이 죽어서 지금 장례 치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버스나 ktx가 없어가지고 빨리 갈 수가 없어요. 천천히 걸어서 가는 거예요. 세월아 네월아.
그러니까 그 소년이 이미 죽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당신은 굳이 여기에 올 필요가 뭐 있느냐라고 옆에서 전부 다 수근수근 대고 뭐 난리도 아니죠. 이미 갔어. 갔는데 좀 더 일찍 와서 솜씨를 보여주지. 이미 죽고 난 뒤에 사람은 죽으면 이제 아무것도 아니지.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뭘 생각했냐 하면은 사람은 이 멀쩡한 인간들은 아까 그 여인은 살아있으면서도 자기가 절망을 느꼈는데 인간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에게 희망을 갖는 거예요. 자기가 죽었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살아있을 동안은 내가 알아서 내가 알아서 한다. 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소용도 없이 왜 왔느냐 이렇게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 애를 보고 “소녀는 어딨어?” “죽었다니깐요.” “죽고 뭐고 간에 소녀는 어딨어? 비켜라! 너희들은 자는 애를 가지고 죽었다고 하면 되나?” 이러는 거예요. 잔다는 그 표현, 잔다는 표시를 한 거예요. 잔다고. 그러니까 이거는 인간의 관찰의 한계를 넘어선 거죠. 인간이 보는 것과 주님이 보는 것 완전히 다르죠. 인간은 이미 주님 보시기에 죽어 있는 거고 이 소녀만큼은 예수님이 본인이 관여하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고 자고 있는 소녀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셔야 될 할 일을 미리 이 소녀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소녀가 죽은 죽었다는 장소에 갑니다. 제자들하고 몇 명하고 데려가서 가요. 그 부모도 오라고 해요. 부모도 오라고 이야기해요. 오라고 해놓고 소녀보고 “이제 그만 자라. 일어나야지.”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달리다굼이라고 하는데 그냥 소녀여 살아나거라가 아니라 일어나라 소녀여 일어나라. 마치 산 사람이 산 사람에게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산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말씀을 주는 겁니다. ‘나사로야 걸어서 나오너라’ 이거는 무덤 속에 있는 나사로는 누가 봐도 죽은 건데 말씀이 초음속 미사일이 날아가요. 말씀이 미사일이 되어가지고 말씀이 그 사람 내부에 들어가요. 그 사람 내부에. 그 사람 내부에 들어가게 되면 말씀 안에 들어 있는 생명이 팍 하고 어떤 민트처럼 팍 하고 터지면서 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터져 나와서 그 사람을 생명의 능력으로 살게 만들어요.
일종의 비눗방울 안에 들어갔다가 터져버리면 그 안에 향기가 확 퍼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이 그냥 들어오면 지식이 되지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터져버리면 우리 안에 생명으로 확산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걔는 살아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를 찾는 게 아니에요. 말씀이 들어가면 자아를 깨뜨리고 그 자아가 있던 자리에 예수님의 자기의 예수님의 자기의 존재가 그 안에 들어와 버리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예수님과의 대화가 되는 상대로 이게 변형이 돼요.
그런 경우가 요한복음 9장에도 나오는데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눈이
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 진정 눈이 뜬 거예요. 마음의 눈이 뜬 거예요. 나는 소경되었다. 나는 뭐 헤헤 신난다. 이 문둥병자가 그런 실수를 한 거예요. 예수여 나를 낫게 해달라. 문둥병 낫게 해주니까 고맙습니다. 하고 자기 집에 가버린 거예요. 그런 성도는 없어요. 반드시 말씀에 의해서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낫게 했다는 사실을 잊지를 못해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자기 안에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운반하게 되죠. 내 안에 다른 분이 들어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내 안에 다른 분이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의 운반체가 되고 그분의 말씀에 종이 되는 거예요. 평소에는 우리가 이 육신이 강렬해가지고 그걸 잘 몰라요. 잘 모르는데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일이 터져버리면 이거는 내가 예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한테 쪼르르 물어요. 주님이 이 일을 저질러 놨죠? 주께서 일을 이렇게 했지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가 군에 가서 전방 빠질 생각으로 훈련했는데 주님 이게 뭐예요?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가족을 만나게 이게 뭡니까? 이거 다 주께서 하셨죠? 이게 주의 말씀이 더 많이 퍼지면 퍼질수록 이런 일이 연발 연발 일어나게 돼 있어요. 매사가 내 일은 없고 주의 일로 이끌림을 받음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 소녀가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이 소녀는 자기밖에 몰랐다가 이제는 주님의 종으로 살게 된 것, 이게 진정 살아남이에요. 그냥 목숨 연장은 소용없어요. 진짜 산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기쁘게 고백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소녀가 12살 먹은 소녀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남들은 죽었다 살아났다고 하지만 소녀는 몰랐던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도 몰랐던 예수님을 알아서 이미 영생과 함께 생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