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분류작업

아빠와 함께 2023. 7. 27. 05:11

열조

2023년 7월 26일              본문 말씀: 스가랴 1:4-6

(1: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5)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1:6)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열조라는 것은 언약과 직접적으로 관련있으면서 역사적 생성된 집단을 말합니다. 창세기 15:4-5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주신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 등장되는 후손의 계열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들 열조들에게 지속적으로 후(後)-언약 조치가 계속 주어집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을 경우에는 확실하게 망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이점을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렘 25:7-9)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엄중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겁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인생 경험과 체험을 준해서 판단하고 측정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44:17-1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즉 그들은 선지자의 말씀을 그냥 흘려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신중하게 숙고하고 실천을 옮겨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늘 여신 섬기는 일을 철폐하고 난 뒤에 삶이 더 핍절하고 피폐해져 버린 겁니다. 즉 자기 삶이 불행하고 불편해진 겁니다. 전에 하늘의 여신 섬길 때는 살 맛이 났던 겁니다.

이는 곧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체험에 입각한 판단으로는 결코 자신의 악과 죄를 알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풍선 표면 위에 기어다니는 개미가 풍선 전체를 알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풍선 전체란 풍선 내부까지 다 아우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마치 이 세상을 개미 기어가는 것처럼 삽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언급하시는 죄와 악은 세상 전부를 다 아시는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봤자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세상에 대한 범주가 늘 편협하고 협소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신약의 복음에 대해서 대부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나 너무 나를 몰아 세우지는 마세요”라는 태도를 유지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내가 죄인이다’고 자백했으니 지금보다 더 나쁜 존재로 악화시키지는 말아 달라는 부탁 같은 것을 하나님에게 하게 마련입니다.

옛날 찬송가 211장 2절 가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여기서 과연 죄가 내용을 두고 말하는 걸까요? 강도짓 한 것을 죄라고 알았을까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까? 아닙니다. 강도는 자신의 강도짓 하나 아니하나 상관없이 태어나면서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유일하게 죄 없으신 분이라는 점과 자신이 대조되어야 ‘죄씻음’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강도짓 한 것을 가지고 죄라고 한다면 이는 여전히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이 강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16:15-17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오직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알려주셔야만 성립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언약 안에 들어온 인간에 대해서 언약이 발휘하는 주도권을 결코 인간에게 양도하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면 온전하게 자기 죄를 알까요? 하나님의 언약은 자기 사람들은 그들이 아는 과거말고, 그들이 전혀 몰랐던 과거로 뒤에서 끌어당겨버립니다. 그러다면 그들이 만나는 사실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시작되는 두 노선의 개시점입니다. 즉 언약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줄기차게 ‘분류작업’을 행하시는 겁니다.

분류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경우를 사용하십니다. 분류작업에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 알곡 가라지를 구분짓는 기준이 중요합니다. 이 기준을 정립하는데 있어 개입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모집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기준점에 준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망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망함을 통해서 인간의 세상 보는 범주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더는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 따로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류작업을 하신다면 성도는 철저히 망해야 마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분류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천국은 기준이란 예수님의 희생뿐입니다. 따라서 더는 자신을 실패 인생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극렬하게 반발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인간이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떤 점에서 이스라엘의 열조가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미흡했는가를 알고 자신이 죄인됨을 도리어 즐기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더는 자신의 가치를 찾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1장 4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아멘.

여기에 이 지상에 주인공은 열조라는 그러한 분들이 나오고 이 열조를 찾아오신 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찾아와서 말씀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 열조와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과연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말을 하시는가? 새삼스럽게 궁금해 해야 돼요, 새삼스럽게.

인간들이 상상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런 하나님 말고요, 직접 이 땅의 인간들에게 선지자 보내어서 그 속에 하나님께서 직접 이야기한 그 이야기한 내용이 뭐냐 이 말이에요. 이 무슨이야기를 하신,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오늘날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냥 하나님 계시다 이렇게 하지 마시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믿어야됩니다.

그 말. 그 말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4절에 열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열조라는 것은 창세기 15장에 보면 그게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그냥 자손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에 준해서 나타나는 자손. 그걸 열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달리 표현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약속에 의해서, 약속에 준해서 등장해야될 자들. 그 사람들이 바로 열조라는겁니다.

그니깐 하나님께서는 사람한테 이야기를 안 해요. 하나님이 뭐 사람하고 이야기할 것 어디있습니까 쫓아냈으면 끝나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의 대화 상대자로, 지시 상대자로 특별하게 분류시킨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약속에 들어온 사람, 약속의 대상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거에요. 이것은 약속 밖의 사람들한테는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지도 않을뿐더러 옆에사람한테 귀동냥해서 들었다 치더라도 무슨말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열조라는 이름의 언약공동체 또는 언약의 속해야되야될 사람들에 대한 생산, 또는 모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말씀을 선지자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자, 이 말은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 분류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언약에 속한자와 언약에 속하지 않는 자를 분류하는. 만약에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니가 믿는 하나님은 무슨일을 하시는 하나님이냐” 혹시 여러분에게, 물을 사람도 없겠지만, 혹시 묻는다면 “분류하시는 분이다.” “뭘 분류하는데?” “천국갈 사람과 지옥갈 사람을 분류하시는 하나님, 좋은 고기와 나쁜고기를 분류하시는 하나님, 알곡과 가라지를 분류하시는 하나님, 양과 양대로 염소는 염소대로 분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내가 분류하는 작업에 같이 합류될 수 있는 백성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사람은 일단 자기 일이 없어요. 일체 자기 일이 없습니다. 가정주부가 하는 일이 음식쓰레기 치우고,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화장실 고장나면 고치고 이게 가정주부가 하는 일이잖아요. 그 일, 그 일은 하나님께서 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니는 어떻게 쓰레기만 분류하고 사람은 분류 안 하느냐” 이렇게 치고 들어오시죠. 니가 하는 생각과 하는 모든 행동이 너로 하여금 세상에 내보내는 거에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죠. 성도는 예수님의 손전등이다. 이 캄캄하고 어두운 세상에 주께서 손전등 들고 세상을 비춥니다. 비춰버리면 손전등이 하는 일은 손전등을 쥐고 있는 주님에 의해서 이미 정해졌어요. 우리 성도의 하는 일은 분류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누구든지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를 그 구분점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구원못받은 사람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데 ‘있다’만 하면 안 되죠. 있다 하는게 무슨의미가 있어요? 이런 자는 천국 가고 이런 자는 지옥간다. 분명한 기준점을 가지고 뭐 가정주부를 하든 뭐 분리수거를 하든 쓰레기를 치우든, 그런 문제는요. 중요치않아요.

그렇게 일을 하는 것을 이거는 내 일이다. 그 쓰레기 분류하는 것은 내 일 아니에요. 내 일은 무엇이 천국 가는 일이고 무엇이 지옥 가는 일인지를 그 기준점, 그 기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주의 일인 동시에 우리 성도의 일입니다. 이 성도가 아무 일도 안 하는게 아니에요. 이제뭐 60 넘어서 63세 넘어서 퇴직했으니까 놀자. 아니에요. 무슨 성도가 노는 일이 있습니까? 분류하는 작업 해야지요. 그러면 “나는 그런 작업 안 한다” 하시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 일 뺏아 버립니다.

언약 사람이 언약말고 다른 일을 한다? 이거는 언약이 가만두지 않죠? 세상을 똑바로 보고, 뉴스 시간에 똑바로 보란 말이죠. 뭐 세상이 하여튼 눈에 보이는건 다 똑바로보시기 바랍니다. 뭐 길에가는 강아지 같은건 볼 필요 없지만 사람 같은건 똑바로 볼 필요가 있어요. 저 사람이 지옥갈 사람인지 저 사람이 천국갈 사람인지. 똑바로 봐야 될 이유는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똑바로 보는 그러한 환경으로서 아직도 우리의 육신이 이 세상에 존속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그 기준점을 놓치고 있는지 흐리멍텅하게 잊어버렸는지.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열조의 후손들, 그 당시에 나라, 땅 다 잃어버리고 백성들까지 잃어버린 이 포로 잡혀 돌아온 이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의 기준점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제시를 하면서 그 제시하는 방법이 굉장히 하나님의 언약적으로 언약적 내용을 담아서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천국 가고 어떤사람이 지옥가느냐?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천국 가고 언약 밖에 있으면 지옥갑니다.

이거 말로 하는것보다도 창세기 15장 5절 열조 나온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5장 5절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씀인데, 15장 4절부터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이 열조 초장부터 다메섹 엘리에셀이 내 상속자 됩니다. 라고 하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 사람 아니야 하나님께선 친히 분류하셔요.

하여튼 하나님의 일은 뭐냐, ‘분류한다. 사람 대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래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니 후사가 뭐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늘을 봤죠. “밤하늘입니다.” “누가 보이냐?” “뭇별이 보입니다.” “그래 네 자손도 이와 같으리라.” 여기서 바로 열조, 자손 이야기가 계시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대로 약속대로 생겨나야 될 자 그게 언약의 열조 언약안에 포함된 열조가 아브라함때부터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신경쓰시는 하나님의 고유의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열조에 해당되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님이 일하는 일을 그들도 해요.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 일이 없습니다. 성도는 자기 일이 없어요. 인간이 자기 일이 없으면 좋은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뭐 이 세상의 좋은점은 뭐냐? 하면 부자 되고 군에 안가고 뭐 자식 애 안 먹이고 그런건데,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자기 일이 없으면 첫째, 걱정이 없습니다. 내 일이 없으니까. 두 번째 실패가 없습니다. 자기 일이 없으니까 실패 성공하는 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세 번째가 뭐냐, 굳이 계획과 목적을, 목표를 세울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내게 나의 일이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에. 나의 일이 아예 없어요.

만약에 성도가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자기 반 애가 말썽을 부리고 땡깡 부리고 의자 던진다. 옆에 있는 선생님께서 그 반 너무 시끄럽다고 좀 관리하라고합니다. 그러면 복음아는 선생님은 말합니다. “내 일 아닌데. 나는 지금 제가 지금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 그것만 신경 쓰지 그게 내 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처럼 하나님의 열조에는 철저하게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는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자를 구분하는 그 작업에 나섭니다. 나서는데, 오늘 본문에 여러분들이 보다시피 이 열조부터 개판이었고 그 후손들도 못지않게 엉망이죠.

4절에 보면,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보면서 여러분 이상한 점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뭐가 이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고 자기 백성, 언약 백성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열조된 언약 백성에게 말만 그냥 툭 던지기만 해도 그들이 뭐 단박에 순종하고 단박에 복종하고 말씀대로 돌아오더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먹히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값을 한다고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가지고 그 말씀을 들은 자는 전부 다 고꾸라지고 회개하고 이래야 하나님 말씀이 지상에 제대로 먹혔다.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담임 교사가 애들 데리고 가는데 다른 사람이 “쟤들 누굽니까?” “내 애입니다.” “아이고, 반 애 같으면 선생님 한마디만 하면 잘 듣겠네요?” 한번 보세요. 한마디 해도 잘 듣는가 보세요. 엉망진창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내 반 아이냐 이 말이죠. 사람이야 인간이 인간 말 안 들으니 그럴 수 있다 치고, 하나님께서 언약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인데 자기 백성이 자기 열조가 말을 안 듣는다? 이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이상할 것도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뭐 이상할 것도 없는데, 뭔가 하나님쪽에서 실수했는가? 하나님께서 영이 안 서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약한가? 사람 하나 마음 붙잡고 똑바로 해 이렇게 못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무력한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알던 전지전능한 하나님 어디 갔지?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에 대해서 뭔가 수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여기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지요. 악한 길 악한 행실이라고 했을 때 그 사람들이 안 돌아왔어요. 전에 예레미야 이야기해도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왜 돌아오지를 않는가? 오늘 설교에서 이점이 중요한 거에요.

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하는 거에요. 참, 이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수련회하고 너무나도 깊게 연관돼있어요. 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지? 그걸 새삼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왜 안 듣는지? 말씀을 안 듣는 정도가 아니에요. 말씀 전한다 하면 천리먼길 왜 내빼기를 원하는지? 왜 자꾸 도망치는지. 돈줄게 하면 오는데 말씀 줄게 하면 천리먼길 내 빼는 그 이유가 뭔지. 사람들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예레미야 18장 12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를 정면으로 그들은 반항하고 반발합니다. 왜 인간들 속에 딴 것은 친하게 지내면서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그렇게 불친절하고 거부반응, 역겨운 반응 또는 발작 같은 것을 왜 느끼는가?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범주 세상을 생각하는 범주 자체가 인간들은 좁아요. 인간은 전체를 볼 줄을 모릅니다. 당장 코앞에 눈앞에 그것밖에 볼 줄을 몰라요. 근데 인간에게 전하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뭐냐 전체를 다 알고 전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감당이 안 되는거에요. “너희들이 악하다” 이러면 “나 안 악한데?” 이렇게 되는겁니다. 예를 들면 이 가사가 좀 문제 있는 가사인데, 제가 문제 느끼는 가사를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옛날 찬송가 211장 2절에,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이래 가사가 나와요. 그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이렇게 되있다 말이죠.

여기서 강도가 알았던 죄가 뭐냐? 강도가 알았던 죄. 지금 여기는 가사에 시비 거는 것은 흉악한 강도라 되있는데 이 흉악한 강도가 아니고 강도짓 하고는 거리가 먼 정말 보통사람, 평범하기 짝이없는 사람. 그냥 심하게 나쁜짓도 한 것 없고. 간혹 착한 일만 했던 그 사람이 죄를 깨달았으면 그 죄가 뭐냐는 거에요. 남한테 죄지을 짓을 한 기억도 없고 하지도 안 한 사람이, 자기 죄를 깨달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그 죄를 깨닫지 못하면, 죄 없으신 주 예수를 이해를 못하는거에요. 왜? 동일한 죄기 때문에. 예수님보고 죄없다 한다면, 그 죄없다의 죄 개념을 본인한테 적용을 시켜줘야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예수님의 죄라는 것은 인간 전체를 다 알아요. 인간이 태어난 것부터 죄에요. 그점에 대해서 예수님은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 태어난 것부터 죄 없으신 분이에요. ‘나는 태어난 것부터 죄다’는 죄를 죄다 인간이 어느인간이 그걸알겠느냐 이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흉악한 강도라서 죄를 안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거에요. 이 흉악한 강도가 구원받은 강도가 참으로 제 죄를 안다면 자기가 강도짓한 것은 자기가 아는 죄 항목에 그걸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내가 강도짓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해요. 그걸 ‘죄를 깨닫는다’가 됩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젭니까? 제가 쉬운 예를 들면 이렇게 쉽게 예를 들 수 있어요. 풍선에 표면을 아는 것과, 개미가 풍선을 기어 올라간다 하면 훅 불면 커다란 풍선에 개미가 표면을 기어가는 개미가 아는 풍선 표면과 풍선 전체 아는 것과 차이 나요. 왜? 풍선 내부를 모르니까. 표면만 기어가니까, 스페이스만 기어가니까. 인간이 개미와 같아요. 나는 뭐 20년 살았다 30년 살았다 뭐 어떻다 어떻다, 어떤 사람은 30년 살고 점점 30년 넘어 31, 32 되는게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슬프고 진짜 죽을 만큼 슬펐던 모양이죠. 점점 더 멀어져간다. 30으로부터. 서른즈음에. 점점 더 멀어져간다. 이게 서글퍼서 그만, 어떻게 자살했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에요. 이게 스페이스, 표면만 아는거에요. 껍데기만 아는 거에요.

인간이 자신의 범주를 본인이 범주를 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악하다 하면 “뭐가 악한데?” “죄지었다.” “뭐가 죄인데?” “선지자가 와가지고 니 악에서 돌아가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라 했다.” “그래? 그러면 니말을 참조로 진지하게 듣고 한번 조사해볼게.” 그 조사한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예레미야 44장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44장 17절 18절에 보면,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하늘 여신을 섬길 때는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우상을 섬길 때는 그때 우리가 음식물이 풍부했고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하늘 여신을 분향하는 그 앞에서 전제, 제사드린 것을 폐한 후에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으로 멸망을 당함이라. 이 핍절하니까 갑자기 또 생각이나네요. 십자가 복음 전하니까 십자가 복음은 듣기만 들어도 피폐해지고 핍절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말은 뭐냐하면 선지자가 니가 악하고 죄지었다 하니까 내가 진지하게 그걸 허투루 듣지 않고 내가 생각해볼게. 자 생각을 하는거에요. 생각을 하면서 내가 복음을 들었을 때 수입이 많은지, 복음을 몰랐을때가 수입이 많은지 그때가 더 행복했는지 아무리 비교하고 계산해봐도 복음 모를 때가 훨씬 더 해피 했어요. 행복했어요.

그땐 하하하 가정에 웃음이 넘쳐나고요. 일가친척끼리 정도 따뜻했고, 이웃끼리도 다정하게 교류했는데, 복음알고부터는 매사가 바짝말라서 핍절했어요. 뭐 아는 친구들 다 떠나 버리고, 사는 재미가 없어. 전에 복음 모를 때는 영화도 재밌고 드라마도 재미있고 티비도 재미있고 꺄르르 재미 있어가지고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이거 복음 알고 부터는 하나도 재미없어요. 따라서 인간은 주위에서 잔소리를 하게되면, 악하다 나쁘다하면 그냥 곱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판단해요. 그 판단하는게 뭐냐? 이때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형성된 나의 범위가 있어요. 범주, 내 인생 범위. 내가 현실이라고 느꼈던 그 범위에 말씀을 집어넣고 말씀이 맞는지 안맞는지 비교를 해보는거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 듣고, “아 저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다 하는 말은 성경을 찾아보니까 맞는 것 같아. 맞는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죄인으로 인정하겠으나 더 죄인 되는 것은 내가 용납 못 합니다.”라는 식으로 자기의 생활 정리에 나서요. 마음 정리 정리 정돈을 해버려요. 예 내 죄인이라고 내 인정할게요.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한 요거는 죄라고 단정짓지말고 요고 의라고 쳐주신다면 내가 죄인이라고 내 인정 하겠습니다. 요런식으로 이게 흥정에 나서네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죄인하면 “내 죄인맞습니다. 내가 천삽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는일이 어설프고 인간이니까 유한한 인간이니까 하는 일이 모든게 실수고 무지한 가운데 있겠지요. 하지만 아주 터무니없는 죄인까지라고 더는 몰아세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게 툭 나온다고요. 죄인이라고 아주 죄인은 아니라는 거에요.

주께서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게 천국과 지옥을 가늠하는 분류 기준이냐?” 이래 물어요. 그게 기준이냐? 그래서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는데 옛날에 그런 이야기 했죠.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무엇이 이단인 줄을 확실하게 기준을 정한 사람이 그게 복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확실하게 기준을 정한 사람. 복음 안다 복음 안다 하는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복음 아십니까 묻지마세요. 무엇이 이단입니까 라고 물어보세요. 무엇이 이단인가. 이단치고 복음 안 믿는사람 없어요. 다 복음 믿어요.

그니까 기준이 뭐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기준이 뭐냐하면 너희 열조에게 분명히 악하다 했지 나쁘다 했지 아무도 그 말을 그 말의 뜻을 안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악하다 죄지었다 이걸 현재 그들이 살아온 범주 안에서 그걸 해석한게 이게 죄였어요. 하나님께선 “악하다, 니가 죄지었다 이 말은 니가 내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한 자여, 이 범죄한 자여. 너희들 망한다.”라고 언급하시는 거에요.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망했습니다.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감을 잡아야되요. 하나님 말씀은 인간을 설득하는 용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성취는 반드시 인간이 그 언약안에서 본인도 모르는 죄인이 되어야 되고 본인도 모르는 악한 자로 등장해야돼요. 그리고 그 악한 자 죄인에 대해서 본인이 몰라야 돼요. 그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밀어버리면 인간은 반드시 필히 망해버려야 됩니다. 망하고 난 뒤에 뒤에 선지자가 와가지고 니가 망한 것은 니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같이 덤으로 덤으로 받아야돼요. 이게 천국과 지옥 가는 기준입니다. 자기 죄를 아는 자가 천국 가고 자기 죄를 모르는 자가 지옥갑니다.

이것 모르면 이단이에요. 이것 모르면 성도 아니고 구원받은 자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죠. “니가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죄인이냐.” 그거는 우리 소관이 아니죠. 왜냐하면 나로 하여금 너는 죄인이고 너는 하나님의 벌을 받는게 마땅하다 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일 자체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거 머리 나쁜사람 모른다 지금.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끼어들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우리 죄인이고요, 무조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거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자기일이 없고 하나님 일이 이미 들어온 사람의 특징은 자기가 이유도 따지지않고 묻지도 않고 죄인된 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됐죠? 사실은 이건 머리 좋고 나쁘고 관계없어요. 이건 성령이 왔느냐 안 왔느냐의 관계에요. 아까 말씀 다시 해야겠습니다. 강도가 자기가 강도짓 한걸 죄라고 느낀다면 그건 구원 못 받은 사람이에요. 강도 하나 안하나 관계없이 주의 일은 그냥 인간에게 들이닥쳐 버리는 거에요. 그게 전도서 1장 6절에 나옵니다. 얼른보면 이 말씀과 상관없이 보이지만 상관있어요. 전도서 1장6절에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돌며 저리돌며 불던곳으로 돌아가고.”

바람만 그런게 아니고 강물도. “강물은 저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고” 이래 되어있죠. 이리저리 흐른다 이 말이죠. 이 뭡니까 이리저리 흐른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관여하지 못한다.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지 못한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바람따라 날리는 바람이여요! 바람이여요. 인간은 바람이에요. 굳이 김범룡 이야기안해도되겠죠. 그대이름은 바담바담바담. 그냥 바람이어요. 바람 따라 사는게 그게 즐겁지 않습니까?

바람 따라 갈 수 밖에없는 이 하나님의 일에 이단들은 그걸 반항해요. 반항하니까 거기서 염려 걱정 다 불안 다 생기는거에요. 갑자기 자기일이 생겨버린거에요. 주께서는 분류하는일을 하는데, 그 분류하는 일에 인간이 반기를 드는거에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분류하는게 아니고 내 기준은 내가 아는 지식의 범위를 총동원해서 “그래 이런자가 천국 가는 거야, 그 기준을 내가 내 기준에 맞도록 확고히 세우겠습니다.” 이게 반항 아니고 뭡니까? 그게 반발이죠.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 해야 할 것은 그러면 인간은 생각하는 범주가 좁고 인생 뭐 살아봐야 몇 년 되지도 않고 어떻게 하나님처럼 전체를 다를 아는 그 기준을 어디서 확보하는가?

그 기준을 하나님께서 확보하시는 방법이 인간들로 하여금 오늘 본문 그대롭니다. 너희 열조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열조와 연관되어 있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 성전 지어야 될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들을 과거로 잡아당겨요. 과거로. 봉하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기차에 보면 그걸 제가 한번 타봤거든요 타보니까 오호, 높은데 가는데 기차가 힘이없으니까 그 구간만큼은 거꾸로 잡아당겨요. 위에서 잡아당겨서 고개를 넘어가는 그런 기차 그 코스가 있어요.

인간은 과거를 자기 과거를 자기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주님께서 언약적인 언약으로 당겨버리면 미쳐 우리가 기억 속에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주께서 준비된 과거로 잡아당겨 버려요. 그러면 과거에 가면 과거가 우리는 내 인생은 내가 살아온 그것이 과거라고 여겼는데 그 과거만, 내가 아는 과거 말고 다른 갈래에 두 노선의 과거가 따로 구분되어 나옵니다. 이런 말 하면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 아니고요. 하나님의 언약이 딱 꽂혀버리면 언약은 처음 언약이 왔던 곳으로 거꾸로 우리를 돌려 버려요.

거기에 뭐가 있느냐?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두 갈래에 우리의 지난 과거가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 이미 인간은 버린 몸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버린 몸이기 때문에 인간한테는 일체 뭔가 새삼스럽게 요구할게없어요. 이미 선악과 따먹었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원칙에 합당해야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어떤 경우도 허락된게 없습니다. 주께서 뒤에서 등짝을 딱 잡고 “가자” “어디로?” “과거로.” “과거 나 아는데요.” “과거 내 어릴 때 유치원 어떻게 초등학교 아는데 그 과거 말고 생판 니가 니 범위를 고집하기 때문에 내 범위 안에서 나는 착실하게 살았고 그다지 나쁜짓 한 적 없다” 라고 우기는 그 과거 말고 근원적으로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그 과거 지점으로 강제로 잡아당깁니다.

그 과거 지점이 많이 있는데. 그 과거 지점 몇 가지만 말씀 드릴게요. 첫째는 이겁니다. 그 약속의 땅은 너의 땅이 아니었단다. 과거. 이게 약속의 땅이 하나님 땅이에요. 인간의 땅은 없습니다, 이땅에. 하늘나라에도 내땅없고 땅에서도 내땅없고. 주님의 땅 뿐이에요. 레위기에 나옵니다. 약속의 땅에서 그들은 임대차 계약한 일꾼으로서의 농부였어요. 자기 땅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자기 땅이 없습니다. 임대차 계약했는데 그 계약 액수가 십일조였어요. 십분의 일 주는 조건 하에 주님의 땅을 그냥 빌어먹고 개간해서 사는거에요. 십일조가 율법에 속하거든요. 그게 율법대로 살면 땅에서 살고 아니면 죽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법을 했느냐? 어차피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차피 죽은 인간이에요, 인간은. 어차피 죄인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이것들아 이래 되는거에요. 참 그 말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신약을 한 번 봐야 돼요. 신약성경에서 마태복음 16장 16절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15절부터 보면, 뭐 인자가 누구냐 하는 그대목인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뭐 예레미야고 선지자 중에 한사람이라고해서 엘리야라했습니다.” “그래 제자들아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할 때, “가라사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인자가 누구냐에 대해서 니가 답변할 자격이 없다”고 이야기하는거에요. 인간은 인자가 누구냐? 예수님이 누구냐를 답변할 자격이 없어요. 예수님이 누구냐를 모르게 돼 있어요, 인간은. 인간의 범주도 좁고 생각하는 것도 좁고 죄도 모르고, 몰라요. 베드로야 니가 이야기한 것 아니라는 이야기가 그 뒤에 나옵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 아버지가 내가 누구냐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너는 그걸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베드로 너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자격이 없는 자를 어떻게 그 천국에 넣어주는가? 그 벌어진 간격을 누가 채우는가? 주님 자신이 채우는 거에요. 이게 바로 분류작업의 기준입니다. 주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인간은. 모르는 자를 천국에 넣기 위해서 그 벌어진 간격,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죄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을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그 벌어진 간격을 누가 채우는가? 예수님 자신의 희생으로 채우는 거에요. 그게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고요. 그 기준 모르면 그건 이단입니다. 그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아까 그 말씀한거 다시 한번 연관시켜봅시다. 사람들은 복음 전하면 “예 복음은 내 인정합니다. 십자가 믿고요 나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있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 했으니까 너무 심하게 나를 몰아세우지는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죄인이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내가 죄인이라고요. 했으니까 앞으로 더 이상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말로 때울려고 하는거에요. 나 죄인이라고.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왜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사는지. “주여 이럴 순 없습니다. 제가 간암 말기가 뭡니까 제가 교회 열심히 봉사하고 복음까지 믿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이게 무슨뜻이에요? 지금 주님의 희생이 다 빠져버린거에요.

주님의 희생이 빠진 채 뭘 외우느냐? 십자가 피로 구원받고 나는 그 앞에 죄인이고 이걸 빠삭하게 외우는 거에요. 그걸로 자기 방패막을 삼아서 자기가 자기 그거 안다고 그걸로 구원 받을려고 넓적대고 설치고 있는거에요. 지금 오늘 이 스가랴 본문은 추방되어야 됩니다. “너희 못 돌아온다.” 추방되어야 되는거에요. 추방, 박탈 그거는 바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이야기했듯이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을 주는 그 언약의 기준을 이스라엘 망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구현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착한 일 안 한다가 아니라, 더 안 망하는게 문제에요. 더 안 망하는게. 그러면 언제까지 망해야 합니까? 그거는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우리가 아주 망한다고 죄인인걸 아는 자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몰라요. 망해도 몰라요. 그런데 그 강도처럼 예수님이 십자가 피흘리고 죽을 때 주님께서 주께서 한 그 희생의 공로와 효과를 일방적으로 그 강도한테 주니까 비로소 강도는 그 십자가가 자기의 구원의 자리인 것을 환희를 느끼면서 감격하면서 고백합니다. “주님, 오늘 밤에 저를 생각해달라.”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의 과거는 바로 주께서 그 강도를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벌어진 간격. 벌어진 간격을 표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그 강도의 과거를 형성해 오신겁니다.

우리의 과거 우리 일 아닙니다. 주의 일이였어요. 우리의 미래? 우리의 미래 아닙니다. 주의 미래입니다. 그 어떤 과거가 그렇든 현재가 그렇든 미래가 그렇든 확정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뿐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오늘 스가랴의 말은 스가랴께서 이야기 하는 것은 “너희들이 완벽하게 더 망해야 돼.” 너희 열조 망한 것 처럼 너희들도 철저하게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망한 자리에 스가랴 1장. 그 망한 자리에, 계속 선지자 보내가지고 핑계를 대는 거에요.

그는 돌이켜 말하기를 “우리가 망해도 쌉니다.”라는 말을 유도하기 위해서 주께선 선지자를 주셨던 거에요. 그 고백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합니다. “주님, 저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그런 말을 할 때 그 말조차 주께서 허락한 주님의 일이지 우리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서 우리는 주와 함께 천국에 온 백성이라면 이보다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의 모든 일은 없고 오직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인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챙기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이 우리와 헤어지는 것을 당연한 걸로 여기게 하여주시옵소서. 되지도 않는 신학과 성경 지식으로 자기를 지켜내어서 그 지켜진 몸을 구원받고자 하는 이런 모든 일이 바로 철없는 철딱서니 없는 시시한 일인 것을 이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정케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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