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와 부분
2023년 7월 5일 본문 말씀: 학개 2:15-19
(2:15)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2:16) 그 때에는 이십 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 석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뿐이었었느니라
(2:1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2:18)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2:19)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하나님과 접촉이 된 민족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드러냄에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원활한 사이로 이어지지를 못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성전 위주’가 무언지를 몰랐던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은 생계와 자기 생존 위주로 삽니다. 자기 목숨 유지가 늘 최우선 순위입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존 위주로 사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죽어서는 천국이라는 멋진 곳에서 살고자 시도한 겁니다.
따라서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 풀리는 바가 늘 최우선 관심사였습니다. 이점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그들은 성전 위주의 삶으로 바뀌어야 함을 나타내주십니다. 그 방식은 이러합니다. 성전 건립을 하기 전과 성전 건립을 하고 난 후에 그들의 삶의 형편을 달리 해주시는 겁니다.
즉 ‘나보다 성전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시다’를 알게 된 경우가 그 전의 경우와 차이나게 혜택을 해주시는 방식으로서 성전 건립을 독려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기 생존 우선의 의식이 당연히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전 우선’이라는 정신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성전은 생명나무 쪽에서 이 저주받을 세상 쪽으로 주어진 겁니다. 인간은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자체에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제거가 되는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제거대상으로서의 근본적으로 결핍을 느끼면서 ‘생존 행위’로 ‘생명’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존과 생명은 통역가능한 개념이 아닙니다. 연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부지런히 생존하면서 유지되는 목숨을 마치 생명이라고 곡해하게 됩니다. 그저 인간은 최선을 노력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은 성전은 인간들과 같이 하지를 못합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요?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살리기 위해 방주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방주의 취지를 위하여 노아가 방주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왜 그래야 하며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제거된 대상자는 생명나무의 취지를 실은 성전이나 언약과 우선순위가 뒤바뀌어져야 하는 겁니다.
하늘에게 주어진 언약은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힘없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노아는 ‘노아언약’과 자신이 바뀌어지는 조건 속으로 들어가서 구원된 겁니다. 이와 같은 원칙이 출애굽기 17장에서도 나옵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에게 아말렉 민족이 덮쳐서 전쟁을 벌어진 상황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출 17:9-12)
이 말씀에서,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는 대목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이나 이스라엘 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취지를 안다면 하나님보고 도와달라고 할 게 아니라 모두 지팡이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체입니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과의 교체요,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교체입니다. 필연적인 것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반면에 일시적으로 한시적인 존재는 결국에는 멈춰야 합니다. 그들의 모든 행함은 제거대상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부의 대상입니다. 인간들은 진리 전체를 추구하면서 자꾸만 일부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응원하는 자가 잘 될 때, 과연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껏 부분에 해당되는 겁니다. 전체는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제대상이 된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기껏 허위요 가짜들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전이 지닌 전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전을 통해서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신약에 와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12:6-7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자비’의 반대말이 ‘제사’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깨서는 제거 대상인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성전되시는 예수님이 행하심에서 나온 자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건물로서의 성전’의 한계를 보여주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포로잡혀서 본 땅으로 돌아와서는 성전을 지을 때에, 과거 솔로몬의 성전을 기억한 연로한 자들과 과거 성전의 화려함을 모르는 자들 사이에 극히 대조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 3:10-13)
즉 건물로서의 성전의 건립은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하는 쪽이 제대로 성전의 취지를 아는 쪽입니다. 생존을 원하는 인간이 생명의 종으로 바뀌는 기능이 바로 성전되시는 주님에서 나온 자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성전으로 인해 제거대상이 된 것을 아는 것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2장 15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이제 청컨대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 곧 여호와의 전에 돌이 돌 위에 첩놓이지 않았던 때를 추억하라,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포도즙 틀에 오십 그릇을 길으려 이른즉 이십 그릇 뿐이었었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 보라 구월 이십 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었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 9월 24일은 공사를 새롭게 재개했던 그날입니다. 16년 동안 성전공사가 중단되었었는데 9월 24일날 드디어 제단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시점으로 해서 “그 전과 후가 너의 삶에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보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그것을 문턱으로 여겨서, 경계선으로 여겨서 전과 후가 확실하게 차이가 나야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전에는 어땠었는가? 전에는 그 이스라엘, 포로 돌아왔던 유대민족이 자기의 생계와 생존이 우선이었습니다. 성전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급하고 시급한 일은 밥 먹고 사는 것, 이것이 최우선으로 그렇게 마음가짐을 그런 식으로 가지고 살아왔었습니다. 문턱에 이르기 그 전에는.
근데 그 후에는 너희가 이렇게 달라진다. 어떻게? ‘우선순위에 있어서 성전이 먼저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생존도 우리의 존재도 의미가 생긴다’라는 식으로 너희들이 바뀌게 해 줄게. 그렇게 하나님께서 학개를 통해서 말씀하신거에요. 성전이 뭐냐?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봐야 돼요. 사람들이 세상 생활 하면서 장래에 죽고 난 뒤의 문제도 이거는 자기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죽기전에 주위에 일가친척 교회 다니니깐 나도 한번 교회 나가서 보험 들어놓듯이 천국 보험 하나 들어놓는 식으로 교회 와서 등록하자 그렇게 오기 십상이죠. 그런식으로 교회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에서 그들은 교체될게 없어요. 교회 자기의 마음가짐을 세상에서 쓰던 마음가짐이 그대로 교회라는 장소에 앉아있을 뿐이지 마음 자체가 전혀 딴 마음으로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전에도 자기 생각만 했었고 교회 오고 난 뒤에도 내가 죽어서 이땅에서 고생만 실컷 했는데 죽고 난 뒤에는 천국 가서 보란 듯이 남한테 자랑질 해가면서 떵떵거리면서 이제는 영원토록 축복받는 그런 삶이 될 때 이거는 내 인생 성공이다. 이거는 내 인생 그런식으로 마감하는 것이 나의 승리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서 교회에 출석하는거죠.
그러면 성전은 뭐냐? 그렇게 출석했는데, 성전은 뭐냐? 하고 쑥 들어올 때 나만 생각했는데 갑자기 성전이 들어왔다 이 말이죠.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 본심이나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와서 하는 본심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교회 오기전에도 자기 위해서, 오고 난 뒤에도 자기 위해서. 전혀 달라질 바 없죠. 그러면 성전은 뭐냐 이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가 복 받는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면 일단은 자기부터 먼저 챙기고 여기에 자기가 복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전 주셨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선지자 주셨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는 성전에 대해서 전혀 무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알았던 그 이스라엘이 그런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지으라 해도 성전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자기의 그 약속의 땅에서의 자기의 생존이고 생계였습니다. 존재성이었습니다. 내가 사는게 우선이고 그다음에 성전 하나님께서 “성전 있으라” 하니까 아마 좋은거라고 생각해서 ‘있으면 좋지’ 라는 식으로 생각한 거에요.
우선순위에서 내가 성전보다 뒤쳐진 경우는 없어요 인간이. 내가 우선이고 내게 필요해서 성전이 있다. 이래 생각하는겁니다. 인간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성전이 내 목숨을 뺏아 간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죠. 성전이.
하나님이 성전을 주심으로써 니 우선으로 생각했던 생존과 존재, 생계 이것은 성전 앞에서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는 것. 성전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그런 뜻에서 성전을 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걸 몰랐습니다. 나부터 챙기는데 주께서 사랑의 하나님이 도움 돼라고 성전 주셨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복줄게. 그러면 그 성전이라는 것은 내 복 받기 위해서 하나의 수단이 되는거죠. 내 복받는 수단으로서 하나님께 만나서 제사 드리는 곳.
여전히 요지부동 자기가 최영순위라는 사실은 달라진게 없었습니다. 누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래서 이 성전을 생각할 때 성전을 줬지만 사라졌다는 점을 감안을 해야돼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줬는데 그 성전이 이방 민족에 의해서 불타든 어떻든 관계없이 성전이 무너진 그 이후에서는 성전이 있음으로써 성전의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전에 대해서 몰랐다고 여겨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함께 있는 성전을 부셨다 이래 보는게 좋아요. 우상을 섬겨서 성전이 불타버렸을 때.
교회 오면서 나만 있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했지 ‘교회 와서 나하고 성전하고 교체 해야 돼’ 그런 마음을 가지고 누가 교회 나옵니까? 처음도 내가 중요하고 끝도 내가 중요하지 성전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철썩같이 인간은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변함이 없죠. 이 비슷한 이야기를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에서 보게 되면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이렇게하고,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사람들은 모세가 지팡이를 든다 하니까 지금 ‘지팡이가 진짜 전쟁에 핵심이다’라는 사실을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모세는 지팡이와 함께 있으니까 늘 상 그 지팡이 들고 산에 가겠다. 그게 뭐 별 뜻을 몰랐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말렉과 전쟁에서 패배하면 안되니까, 패배하면 다 죽으니까, 몰살당하니까 승리해서 아말렉에 저항해서 물리치고 그들이 계속해서 생계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데 그런데 관심이 있었던 거에요. 지팡이에 눈여겨본 사람 없었습니다.
여기에 출애굽기 17장 10절에 보게 되면 여호수아가 모세 말대로 했습니다. 11절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긴다. 그거는 사람들이 예상을 할 수 있어요. 왜? 모세는 하나님의 중재자고 모세가 뭔가 한다는 것은 우리 전쟁의 승리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모세가 손을 내리면, 지팡이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굉장히 난해한 말이에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 아니었다’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은 지팡이 편이었지 이스라엘 편이 아니었던 거에요. 그러면 이게 전쟁의 의미는 이스라엘은 단체로 어디에 소속 돼야 되느냐 하면 모세가 든 지팡이 안에 들어가야돼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길 생각 하지 말고 지팡이 속에 들어갈 생각을 해야된다 이말이죠.
이해 잘 하셨지만 혹시나 좀 미흡할까 싶어서 성경에 나오는 예를 또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노아 홍수 일어났을 때 노아에게 하나님이 방주에 들어가라 했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노아를 살리기 위해서 방주 준비했다고 생각해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돼요. 방주가 중요합니까 노아가 중요합니까? 방주가 우선입니까 노아가 우선입니까? 그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상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노아 사랑하기 위해서 방주 줬다’ 이게 우리가 쉽게 나올 수 있는 오해입니다.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거든요. 나 교회 나왔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게 불쑥 나와요. 불쑥. 뭔가 교체, 바꿔치기 해야 된다는 사실은 모르고 내 교회 나오는 수고했으니까 하나님이 도와주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마땅한 것 아니야? 이렇게 불쑥 나온다고요.
노아는 자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방주에 타면 안돼요. 방주의 의미, 방주의 가치를 위해서 노아는 자기 목숨을 바친겁니다. 방주속으로.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아말렉 전쟁. 아말렉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따로 놀면 안 돼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팡이든 손이 내려가게 되면 아말렉이 이긴다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지는게 아니고 아말렉이 이기는 거에요. 그거나 그거나 뭐 똑같은(것 아니냐 할수있는데).
주어를 두 개 준거에요. 지팡이 올리면 이스라엘 이기고 지팡이 내려가면 아말렉 이긴다 해서 이스라엘과 아말렉을 동등되게 보는겁니다. 동등되게 보고 거기에 핵심 부분이 이스라엘에 있는게 아니고 아말렉에 있는게 아니고 아말렉과 이스라엘 그들의 상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이스라엘도 아니고 아말렉도 아니고 제 3의 다른데 있다. 지팡이에 있다는 것을 겨냥하는 전쟁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맞닥뜨리게 한겁니다.
참 이게 교회 와서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나 니 교체시켜줄게. 너는 니가 우선이지, 너밖에 모르지, 니 존재 생명, 니 밥먹고사는 것 그것밖에 모르지. 그거 생명 아니야. 그거 생존이야. 생존을 생명으로 바꿔주겠다. 생계를 생명으로 바꿔주겠다는 겁니다. “하루에 두끼를 먹든 세끼를 먹든 나는 생계를 위해서 밥 먹습니다”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생명에 속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밥을 먹습니다” 이래 돼야돼요. 생존을 위해서 밥 먹는게 아니고 생명을 위해서 밥을 먹는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밥 먹는것과 생명은 상관이 없어요. 밥 먹어서 생명이 유지 되는게 아니고 생명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밥을 줬기 때문에 밥을, 곡기를 끊어도 생명은 여전히 생명이에요. 그런 사람 돼라고 교회 온 거에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줬는데 그들은 성전과 함께 있으면서 이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런걱정은 이제 싹뚝 잘라야 되죠.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나님?” “누구세요. 너 누구야?” “저요.” “그래서?” “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왔는데요.” 너는 교체 돼야돼요. 교체된다는 말은 잘린다는 말이에요.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날마다 우리를 잘라내는 겁니다. 노아를 잘라내고 노아 언약 되는 방주를 드러내듯이요. 야곱을 잘라내고 이스라엘을 드러내듯이요. 아브람을 잘라내고 아브라함을 드러내듯이요.
구약의 이스라엘 잘라내고 진짜 이스라엘을 드러내듯이 그 이스라엘 그 하나님의 이스라엘, 그리고 아브람 말고 아브라함, 노아 말고 노아 언약. 다윗 말고 다윗 언약. 그런 식으로 주께서 자기 백성을 데려가시는 그 이유가 뭐냐하면, 여러분 이건 아시는 언약이에요, 생명 나무가 있었거든요 하나님께서 생명 나무를 차단시켰어요. ‘아담과 하와가 생명 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차단시켰다’라는 그 말을 달리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아담의 후손 아담과 그 모든 자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삭제 되었다. 또는 거세되었다’라는 말이 돼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이미 거세된 채, 삭제된 채 제거된 요소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결핍을 느끼죠. 뭔가 결함을 느끼는 겁니다. 뭔가 자꾸 추구를 해요. 생명이라는 것을, 영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닿는 것은 생명도 아니고 영생도 아니고 목숨이고 생존이었어요.
인간들로 그렇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나중에 설교도 길어지면 진짜 여러분들이 다 이해하기가, 좀 감당하기가 어렵다 싶어서 미리 어려운 걸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생명 나무는 진리의 전체에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부분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원하는 것은 전체가 아니고 일부인데 그 일부를 추구하는 인간이 과연 전체를 다 담아낼 수가 있느냐? 안 됩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는게 전부 다 일부에요. 젊은 여자들은 명품을 좋아하고 젊은 남자들은 차를 좋아한다는데 차나 명품 가지면 그 사람의 모든 욕망은 다 이룬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응원하는 어떤 야구 팀이나 스포츠 팀이나 어느 스포츠 선수를 내가 응원했다 합시다. 내가 응원한 스포츠 스타나 그 팀을 응원했는데 그 팀이 우승했다 칩시다. 그렇게 해서 그 팀을 응원한 내가 얻을 수 있는게 뭡니까? 이 우주 진리 전체입니까? 일부입니까? 일부에요. 일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고 자식이 잘되었을 때 잘 되어라고 응원했을 때 과연 자식이 부모의 성원에 힘입어서 잘 될 때 군에도 전방 안가고 후방으로 빠지고. 잘 될 때 부모는 뭘 얻었습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잘됐다 했을 때 부모가 얻은게 뭡니까? 생명 나무에요? 진리의 전체입니까? 일부지요. 한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얻는 거에요.
제가 어렵다고 이야기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성전에 담은 것은 전체입니다. 전체인데,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계속 “하나님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허락해 주옵소서. 저거 필요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저걸 원해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냐하면 바로 일부. 극히 일부. 쪼가리. 쪼가린데 그 쪼가리가 쓰레기가 돼요. 그 쪼가리 같은 그걸 달라고 하나님 하나님 부르짖는거에요. 그 쪼가리 중에 하나가 뭐냐면 날 천국 보내달라는 거에요. 그게 쪼가리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왕 어려운거 더 어렵게 표현하겠습니다. 제거 대상 인간이 뭐냐. 우연적 존재라 해요. 우연적 존재. 그리고 성전 같은 것을 이거를 필연적 대상이에요. 필연적 작업이에요. 하나님의 필연적인 거에요. 필연적이란 말은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고 우연적인 것은 결국 좀 하다가 이게 스탑되어요. 멈춰버려요. 왜? 인간은 제거 대상이니까. 살만큼 살다가 끽 하고 제거해버립니다.
제거될 내가 제거되기 전에 내가 원했던 것, 그거는 제거 대상이 원했기 때문에 그것마저 제거 대상이에요. 내가 만약에 프로야구팀을 응원한다. 경북 대구 사람들은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한다 합시다. 삼성 라이온즈 팀이 만약에 우승을 했다. 내가 원하는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했다. 그래서 내한테 떨어지는게 뭐에요? 생명입니까? 사람들은 착각을 하는거에요.
내가 응원한 쪽이 우승했기 때문에 나는 영원히 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착각을 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허위라 해요. 허위. 거짓. 가짜. 우린 자꾸 본인이 가짜, 하나님이 생명나무에서 차단한 거부당한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가짜가 아니고 우연적 존재, 안개 같은 존재, 일시적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치 전체를 다 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걸 알려 줄려고 주께서 성전을 보내신 거에요. 다행스럽게도 현재 10개 구단 중에 삼성이 꼴지입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그 지팡이 이야기를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하면 성전 가지고 지팡이 기능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니가 성전을 무시했을 때 성전이 시급한 것도 아니고 “내 생존과 생계가 더 중요하다.” 사람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오늘 본문 학개 2장 15절 보면 “그 때에는 이십석 곡식더미에 이른즉 십석 뿐이었고” 이걸 가지고 뭐냐. 반 토막 났다는 표현이에요. 성전을 16년 동안 안 지었어요. BC536년에 성전 지으려고 왔는데 3개월 후에 성전 짓기 시작합니다. 시작하는데 실제로 그다음에 달을 한번 세었던 것은 그다음에 5월 달에 달을 한번 세어봤어요. 그게 에스라 3장 10절에서 13절 나오는데 거기에 너무 기니까 11절부터 보면 첫 단을 세웠을 때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하나의 성전을 두고 첫 지대가 놓였을 때 이 성전에 대한 견해 차이가 둘이 혼합되고 말았어요. 이게 언제냐 하면 성전이 불타고 난 뒤에 50년 후거든요. 50년 후에 50년 전에 거대한 성전을 봤던 그 노인네들은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전을 보고 그때하고 비교가 되니까 너무나 가슴 아파서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50년 전에 몰랐던 젊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거대한 성전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떠나지 않겠지 하나님께서 복주겠지’ 이래가지고 좋아서 뭐 아주 기쁘고 찬송 소리를 하는겁니다. 그니까 동일한 성전을 두고서 한쪽은 울고 있고 한쪽은 웃고 있고 어느 쪽이 맞느냐 이말이죠. 어느 쪽이 성전에 대해서 제대로된 하나님의 새로 성전 지으라는 그 취지를 제대로 이해한 쪽은 어느 쪽이냐 이 말입니다.
실제로 기존 교회에서 예배당 지을 때 손들라 해가지고 수석 장로들은 큰 것 두 장씩 그냥 중간 장로들은 작은거 한 장이라든지 5천 정도. 그리고 이제 뭐 권사님이나 장로가 부부니까 남편 장로되면 따라서 권사 되잖아요. 나머지 집사님들은 십시일반 해가지고 그 성전 짓는다고 성전 짓는 전문 부흥사 불러 가지고 돈 끌어가지고 예배당 지어보세요. 얼마나 감격의 눈물이 날거에요. 감격의 눈물이.
우리 교인 500명 모아가지고 드디어 50억짜리 현찰 30에 빚은 20억 들여가지고 50억짜리 예배당 지어가지고 “이제는 구름 떼 같이 이 지역에 있는 뭇 영혼들이 와서 그들의 영혼을 천국의 영혼으로 살리는 이 하나님의 제단의 역할을 다하게 하옵소서” 해가지고 그렇게 하는데 1년도 안 가서 교인들 반 토막 나보세요. 앞에만 다 가고 앞에 수석은 다 돌아가시고 없고. 1년 만에 죽진 않습니다만 없어 버리면 그게 뭐에요? 완전히 유럽처럼 관광시설 되거나 나이트클럽으로 넘겨줄 수가 있습니다. 이대 삼대 내려가게 되면... 유럽의 교회가 그렇거든요.
자 여기서 성전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야돼요. 성전은 뭐냐하면 이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전은, 생명 나무는 제거 대상이에요. 우리는 생명 나무를 못 따먹어요. 못 따먹는데 생명 나무 쪽에서 누군가가 오셔야 돼요. 오셔가지고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 아시죠. 선녀와 나무꾼처럼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오듯이 하늘에서 일종의 방주, 이렇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놔두고 우리를 태우러 가는게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은 생명 나무로 갈 수 있으니까... 생명 나무 갈 수 있도록 그 차단된 곳을 뚫을 수 있도록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와서 지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그러한 장소가 성전입니다.
그러니깐 자기를 위해서 교회 온 사람 같으면 성전이야기 그 정도 들으면요, “아이고 이거 기분 좋은 이야기네” 하잖아요. 근데 제가 아까 누누이 말씀 드렸지만, 성전이라는 것은 그냥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교체되어야 돼요. 그 교체될려면, 나하고 교체된다는 말이 뭔 뜻이냐? 성전은 건물이고 나는 몸뚱아린데 이걸 교체한다는 말은 내가 뭐 성전에 가서 뭐 칼가지고 할복자살을 하란말인가? 교체를 시키는데 무엇과 무엇을 교체시키느냐 하는거죠.
그것은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자비의 교체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2장 7절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 6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7절에 보면 “나는 자비를 원하고” 그다음에 네모를 원치 아니한다.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성전의 기능입니다. 성전은 뭐냐? 성전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는 곳인데 성전에서 뿜어 나오는게 뭐냐하면 나는 자비를 너희에게 주고 그다음에 무엇을 받지 않느냐? 제사를 받지 않습니다. 제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에요. 인간의 행함.
그러니까 지금 학개 그 당시에 와서 학개가 추억해보라 이제 너희들은 이제 다시 16년 만에 성전을 지으니까 그때 짓기 전에 “성전을 재건하기 전과 후와 내 이렇게 차이 나게 해주겠다” 이렇게 지팡이 기능처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성전 이후에 우리가 뭐로 교체가 되느냐 하면 “나 이것 행했습니다. 이것 할 수 있습니다” 일체 안받습니다. 성전이. 이미 우리가 뭘 하고 뭔가 할 수 있고 해버리면 교체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우리가 무능해야되고 불가능해야 돼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이런 생각하고 있으면 그거는 노아를 위한 방주지 방주를 위한 노아가 아니거든요. “아 내가 모세가 드는 그 지팡이 다듬는다고 애먹었다” 이러면 안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든 지팡이는 나와 적을 동등되게 본다는 거에요. 왜냐? 둘 다 생명 나무 못 따먹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지금 성전이 등장했다는 말은 철저하게 “너는 너의 행한 식으로서는 생명 나무 따먹을 수 없다”에요. 그게 뭐냐 너는 우연적 존재, 일시적 존재, 임시적 존재, 너는 안개 같은 존재니까 제거 대상이에요. 처음이고 끝이고 제거 대상입니다.
잘 이해가 안되실 것 같아서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치매 부모님이 계신 분들은 좀 이해하실 거에요. 부모님 집이 저 앞에 있고 만약에 우리가 있다면, 치매 걸린 부모님이 치매가 심하기 때문에 늘 관심을 가져야 되거든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두 가지 차원이 뭐냐하면 그 부모님 살아있는지 돌아가시는지 확인하는 차원이 있어요. 그게 있고요. 또 하나는 이게 존재 차원인데 부모님이 살아있는지 돌아가시는지를 살펴보는 차원. 또 한 가지는 부모님이 치매가 현재 더 진행이 됐는지 아니면 멈췄는지 또 호전됐는지 보는 확인 차원이 있어요. 그거는 부모님이 할 수 있는 기능에 관한 문제입니다.
밤에 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있는지 보는 것은 이거는 살아 계신지 죽었는지 보는거에요. 밤중에. 그런데 화투를 칠 수 있는지 없는지 이거는 치매가 더 진전되었는지 안 그러면 더 악화 되었는지 안 그러면 멈췄는지를 확인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치매환자로 봅니다. 모든 인간을 정신병 환자로 보거든요. 그들은 생명을 추구하면서 생존을 가지고 생명을 추구하는 정신병자에요.
그들은 양식이 있어야 되고 곡식이 있어야 되고 오늘 본문에 학개 말씀대로 한다면 9절에 창고에는 곡식 종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 열매 이게 뭐냐하면 생명나무 아니거든요. 이거 생명나무 아닙니다. 은행 이용한 그 돈, 집에 있는 현찰. 생명 아닙니다. 돈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거에요. 나 우선. 나부터 우선 챙기는데 꼭 필요한 거에요. 나부터 챙기는데. 성전이고 뭐 모르겠고 내가 밥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게 그런 것들이에요.
인간은 거기에 의존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스스로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버는 기능으로 내가 생존과 존재에 유리하도록 활동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보내가지고 “니 지금 살고 싶지” “예” “성전부터 먼저 건립해” 이래 되거든요. “니 살고싶지, 포도농사 잘되고싶지” “예” “그러면 니가 우선순위가 있어. 성전부터 먼저 건립해” “여호수아야 니 아말렉한테 이기고 싶지 그렇다면 니는 아말렉 보지말고 모세가 든 지팡이 먼저 봐” 우선순위가 있어요. 우선순위가. 목숨이 아니고 생명이에요.
구약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이 필요한 과수 농사 이것가지고 그들을 쥐었다 놨다 쥐었다 놨다 하시는거에요. “성전을 안 지으니까 농사 반타작 났잖아. 성전 다시 재건하게 되면 너희들 농사는 그때부터는 너희에게 복을 주어서 농사가 잘된다” 이게 오늘 19절 말씀이거든요. 이게 어디까지나 성전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건물로서의 성전을 지을 때 그정도 레벨에서 그정도 스케일에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신약에 들어와서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다”라고 성전이 어떤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생명 나무 쪽으로 인도해내는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대신 죽으심으로 함께 하시는 성전으로 왔을 때는 그때는 그런 건물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그다음 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주고 제사를 니가 행한 제사를 율법의 해석을 나는 받지를 않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에 어떠한 통역이 되지 않는 거에요. 사람이 열심히 제가 농사지어서 밥먹고 살면서 “하나님이여 제가 농사지으면서 밥먹고 살면서도 제가 이게 목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제가 소원은 생명나무 따먹고 싶어요” 라고 하는 것. 그거는 성전의 취지와 어긋납니다. 그거는 아직도 교체가 안됐어요. 마치 열심히 일하는게 내 밥먹고 내 목숨 유지해야 되듯이 뭐 포도나무를 위해 살지는 않잖아요.
나를 위해서 포도 농사를 짓는 것이지 그렇게 되잖아요. 이 성전도 하나님 믿는 것도 예수님 믿는 것도 나를 위해서 믿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님의 성전 취지와 완전 달라요. 여기서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게 남아있겠죠. 인간이, 우연적인 존재가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 나무 과일을 따 먹을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따먹을 수 있는가? 그거는 바로 제거와 멈춤을 우리 대신 예수님 오셔서 제거와 멈춤을 다 온전하게 하나님이 원하는 레벨로 실현을 시키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내가 죽어야 될 내가 목숨 밖에 내 목숨만 챙기는 나, 이 못 고치는 정신병 하나님 믿든 예수님 믿든 내 천당 갈려고 믿는 이거는 마귀적인 이 고질병. 죽어도 우리가 죽어야 될 그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를 위한 천국 나를 위한 생명 나무 더는 삐- 없습니다. 우연적인 것들은 멈춰야 돼요. 멈추지 않는 것은 필연적이고 영원한 그 생명나무 뿐입니다. 멈춰야 되죠.
그렇게 멈춰놓고 주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내 성전에서는 내 일체 시체된 너에게 일체 아무것도 내가 받지 않는다. 다만 내 자비가 내가 다 이룬 그것이 너희에게 사랑과 자비로서 그냥 우리를 사랑이 찾아오는 거에요. 그러면 내가 밥 먹고 살려고 애썼던 이것보다 어느게 더 우세하냐 하면 생명이 주님의 사랑이 대신 용서해주심이 내가 몇 년더 살았다 보다 훨씬 더 우리보다 우선순위가 되는겁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선순위 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제부터 그 성도는 주님 속으로 들어가요. 노아가 방주 속으로 들어가고 이스라엘이 지팡이 안에 들어가서 지팡이가 올라갈 때 이스라엘 승리가 지팡이 때문인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아있는 이야기는 뭐냐. 우리가 생명 체계가 된거에요. 단독이 아니고 예수님과 더불어 생명책이 된 겁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그 생명의 취지가 소위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면서 받는 이스라엘은 그걸 그 이해관계 때문에 똑같지 않았어요. “하나님, 살려주면 잘 섬길게요”이런 식이에요. 그러나 이제 신약에 와서 성령 받은 성도는 주시는 분.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는 그 의, 그 거룩과 의에 이제는 마음 놓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주신 생명의 종, 의의 종, 거룩의 종, 주님의 종으로 이제는 감사한 마음으로 나설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성전과 영원한 성전에 거할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인간들의 무지와 욕심과 착각을 극복하시고 귀히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 나무 있는 쪽으로 이끌어주시는 이 큰 사랑, 그 사랑 앞에 우리의 소소한 생계나 생존 문제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