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스룹바벨

아빠와 함께 2023. 7. 13. 06:34

스룹바벨

2023년 7월 12일                  본문 말씀: 학개 2:20-23

(2:20) 그 달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21)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2:22)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2: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룹바벨’이라는 말은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의 후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이스라엘의 마지막마저 삼켜버린 이방민족입니다. 바벨론의 현존은 곧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은 없다’라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을 찾고자 하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기대걸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영구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이방민족 속으로 들어가서 없어진 겁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기대하고 계산했던 모든 것들이 다 소멸되었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메시야는 더는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없애버리신 겁니다. 따라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들어야 될 말은, 왜 이스라엘이 망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새롭게 알려주시려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셨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이 알던 하나님과 하나님이 알고 계시던 이스라엘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오해한 겁니다. 출애굽기 23:14-17에는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의 가장들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현장에서는 제사장들이 있어 각 가정의 남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그 가장들이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자기 가족들에게 자신이 배웠던 율법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이 뭘 오해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율법이 주어진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망하지 않게 해줄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지목하는 병행해서 하늘과 땅을 ‘진동’ 시키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대규모 진동은 노아 홍수 때입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거기에 사는 모든 것들을 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이 어떻게하든 안 망하는 식으로 세상 안에 버티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마구 흔들어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왜요? 왜 그렇게 인간들을 못살게 구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진동치 않는 나라’를 마련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나라가 ‘영구히 진동치 않는 나라’일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의 문제는 자신들을 굳게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훼방한다는 점을 알지 못한 겁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7:6에 나오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경우는 인간이 알고 있는 체험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여줄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간은 자신이 굳게 믿어야 될 것과 안 믿어야 될 것을 정하고 살아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인간은 철석같이 자신을 믿습니다.

과연 이런 태도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앞에서 통할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인간이 자신과 헤어지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내용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낼 수가 없는 겁니다.

즉 율법 앞에서 인간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할 수가 없는 존재로 발각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은

마태복음 1:12에서 분명히 ‘다윗의 혈통적 후손’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난 뒤, 더는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에 그 어떤 기대를 가질 수가 없는 지경에서 출현된 메시야입니다. 역사적으로 덮혀있는 이스라엘이 벗겨지면서 비로소 등장된 이스라엘의 완성시킬 ‘약속의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입니다. 화투치기에서 ‘밑장 빼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있으니 하나님 입장에서 그 인간을 죽여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해 준비해둔 이스라엘이 등장하는 겁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헤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케 하십니다. 더는 자기를 지킬 가치나 의미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처럼 율법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 해내지 못하는 것을 ‘죽임을 통해 자유’를 얻는 방식에 도입된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신약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7:1-3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기가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율법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율법의 정수를 드러내기 위해 남녀가 혼인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남편에게 매이지 않는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남편의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을 율법에 의해서 ‘자유’가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보이는 겁니다. 로마서 7:4에 율법의 진수가 나옵니다. 즉 율법이 인간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무능력자인 겁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가 자유가 된 조건이 나옵니다. ‘나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남편 죽은 후 여자가 자유를 얻은 것처럼,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 경우에만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에 죽는 방식’은 인간의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몸이 되는 조건 하에 ‘그리스도께서 죽음’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즉 ‘그리스도 몸’이 되는 경우가 되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자에 해당됩니다. 평소 나에게 깔려있던 나를 위에 있는 나를 죽여서 빼내어주십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스룹바벨의 기능이 적용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켜보려고 하는 것은 이 진동하는 하늘과 땅에서 같이 진동해서 파괴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는 나를 믿도록 나를 지키려는 그 의도를 날마다 무산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하나님의 말씀은 학개 2장 20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그 달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 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그 시대에 선지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방 민족의 특징은 선지자가 없어요. 하나님 쪽에서 이야기하고 싶은게 없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인쳤다, 도장쳤다, 나는 너를 찍었다, 나는 너를 선택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 세상에서 인간들은 신기한 기적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도와줬을 때 그걸 사람들은 미라클, 기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기적은 그게 아니고 너희 가운데 하늘나라와 연락책이 있다. 이걸 기적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계속 유입되고 있는 거에요. 계속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니까 이 말은 이게 왜 기적이냐 하면 ‘우리 인간들끼리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들의 하는 그 모든 의도와 그 계산을 살피시고 그들의 인간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이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기적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21절에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다”라고 돼 있어요.

그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알려준 바에 의하면 하나님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흔들 수 밖에 없는 대상. 흔들어버리는, 해체 시켜버리는 대상입니다. 그냥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서 무너뜨리는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그 시대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그 흔들기 속에 우리 자신들이 포함돼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이 자기의 의도와 계산과 뜻대로 되지 않는 거와 똑 마찬가지로 사적인 우리 개인적인 우리 인생도 우리의 계산과 뜻과 포부대로 안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세상이 흔들리는데 우리가 뭐 별겁니까 같이 흔들려야죠. 버스 흔들리고 배 흔들리고 지하철 흔들리는데 함께 탔으면 같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죠. 같이 해체되는 것이 당연하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게 세상에 대해서 어떤 미련을 갖고 있다가 ‘이 세상이 우리에게 멀미를 주고 어지럽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진동한다’ 이렇게 돼버리면 마치 그 새우잡이 하는 어부들이 새우 잡는게 그렇게 힘든 이유가 이게 안정감이 없어서 그래요. 맨날 파도에 배가 흔들리니까요.

그래서 그 새우잡이가 그렇게 힘들다 하는데, 어느 정도 힘드냐 하면 염전노동보다 더 힘들답니다. 염전노동 그래도 땅 위에 튼튼하잖아요. 새우잡이는 흔들어서 뭐 사람이 살 수가 없을 지경이니까요. 기초가 흔들리는 거에요. 기초가 단단해야 다음에 계획을 세우는데 이 기초를 보장을 못해요. 지금 이 ‘기초가 단단할 것이다’, 그래서 그 기초 비슷한 이야기가 이 세상에서는 뭐냐하면 니하고 내하고 친구사이 아니가 하는 그 친구, 그것 흔들립니다. 돈 떨어지면 다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이는 탕자와 마찬가지죠. 돈 있을 때 와르륵 날파리처럼 모여들다가 돈 다 떨어지는 것 보고 남자든 여자든 다 떠나버리죠.

이게 진동하는, 흔들리는 거에요. 안정성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왜 이세상에 안정성이 없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따로 안정성을 보장해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안정성이 오늘 본문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23절에 “내 종 스룹바벨아”라고 돼 있어요. 자, 세상은 하늘과 땅을 안정적으로 보장한다고 생각해서 이 세상에서 사는 눈에 보이는 관찰의 대상들을 그걸 의지하고 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그 안정성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 내 종 스룹바벨로 바뀝니다.

스룹바벨로 바뀐다는 것, 설명이 좀 필요하겠죠? 스룹바벨은 누구냐 하면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그 사라진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은 없어진 겁니다. 바벨론에 포로잡혔어요.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유다 자손에서 나와요. 유다 자손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완전 없어지고 거기서 그 바닥에서 이스라엘 바닥에서 뭔가 돌출하는데 그 돌출한 인물이 스룹바벨이에요. 그 스룹바벨이 품고있는 뜻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갔다. 다 멸망했다. 없어졌다’를 그 스룹바벨 존재 안에 푹 담고 짙게 그 안에 갖고 있는거에요.

세상이 흔들립니다. 세상은 진동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믿을게 못 돼요. 그러면 학개 선지자한테 물어보죠. 이거 흔들리는 세상말고 뭘 믿으란 말인가? 바로 스룹바벨을 믿어야 돼요. 스룹바벨. 스룹바벨을 믿어야 되는데 스룹바벨의 뜻이 뭐냐 하면 바벨론의 자손, 바벨론의 자손이에요. 스룹바벨 이름 자체가. 스룹바벨 이름이 바벨론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망했어요. 이스라엘 망했다는 말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세상 천지는 흔들려도 우리나라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겁니다. 특히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는 그 사례가, 경우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 일어난 대규모 진동이 바로 노아 홍수였습니다. 노아 홍수 때 여러분 잘 알다시피 모든 천하가 다 물에 잠겼는데 노아 방주는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방주 안에 봉해져서 안정성을 갖고있었던 겁니다. 그 안정성이 모든 것이 무너지고 해체되고 난 뒤에 유일한 뿌리가 바로 하나님의 노아 언약이라는 겁니다. 노아 언약.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고 그걸 둘러싸는 이 세상과 하나님께선 계속해서 맞바꾸는 작업에 나서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에는 “아 그 이스라엘. 하나님의 언약의 민족 이스라엘 망했잖아.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안정적이고 언약이 있으니까 언약이 안정적이니까 이스라엘 안정적이고 그 외부에 모든 세력은 완전 무너져야, 진동해야되고 무너져야된다.” 옛날 노아 때는 물로서 진동했지만, 마지막에는 히브리서에 보면 불로서 진동해요. 베드로후서 3장에도 마찬가지로 불로서 다 태워버립니다. 천지가 진동한다 했으니까.

그 대목이 히브리서 12장에 나옵니다. 27절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이라고 되어있어요. 이것은 모든 세상이 결국은 다 진동한다는 말이에요. 땅이 진동하는데 히브리서 12장 “전에는 땅이 진동 했는데” 26절에보면 “이제는 약속한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한다”돼 있어요. 히브리서 12장 26절에.

그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굳이 이 이야기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굳이 이야기를 꼭 하셔야되는 이유가 뭐냐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진동하는게 있다. 다 무너진다. 다 흔들려서 다 없어진다.’ 이 말씀은 “흔들리지 않고 영존하고 영원한걸 내가 너한테 이미 줬잖아” 하는 뜻이에요. 근데 너희들은 너희들의 두 발을 자꾸 진동하고 무너질 수 있는 그 무너질 수 있는게 아니고 아주 무너지기로 확정된 거기다가 자꾸 발을 딛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옮기면 되는데, 두 뿌리를 옮기면 돼요. 옮기면 되는데 옮기지도 않고, 기존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한 사는 방법이 뭐 없겠습니까? 목사님. 뭐 내 삶이 회복될 방법이 없겠습니까?” 회복하지 마세요. 그냥 옮기세요, 두 발을. 언약 안으로 진동하지 않는 곳으로. 그러면 “그 진동하지 않는 것이 어딘 줄을 알고 우리가 옮기느냐?”라고 물어보신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이 진동하지 않는다고 했던 그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사라지고 멸망했어요.

그럼 이스라엘은 없는 겁니다. 근데 없는데 여기에서 뭔가 마징가 제트 하나가 나온 것처럼 밑에서부터 분명히 없어졌는데 뭐가 하나 돌출돼요. 나온다고요. 그럼 이스라엘이 멸망한 장소가 어디냐, 바벨론이에요. 근데 그 바벨론의 후손에서 하나님이 진동치 아니하는 어떤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그 스룹바벨. 바벨론의 후손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더 어렵게 나가야돼요. 분명히 반드시 나가야돼요. 왜 그러냐 하면 ‘스룹바벨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왜 무너져야 되는가’ 이유가 비로소 밝혀집니다. “나 이 세상 의지하지 않고 나 스룹바벨 의지해야지, 나 스룹바벨로 옮겨타야지”라는 생각부터 하지 마시고요. 스룹바벨이 누구이길래 내가 그토록 평생토록 일구어놓은 이 세상이 무너지는가를 따져 봐야됩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이 문제가 돼서 무너지는가?

결론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옥에서 못 빠져나와서 지옥 가는게 아니고 자아에서 못 빠져나와서 지옥 가요. 자기 자신을 포기할 줄 몰라서 지옥가는겁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스룹바벨은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에서 ‘없다, 이스라엘 없다. 하나님의 언약나라 날라갔다’하는 데서, 없는 데서 이 스룹바벨이 나온 겁니다.

그니까 출발점이, 시작점이 뭐냐 하면 스룹바벨은 멸망 가운데 심판 가운데 저주 가운데서 새로운 메시아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인쳤다고 돼있어요 23절에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았다” ‘확장 되었다. 너는 내 사람이라고 도장을 팍 찍었다’이 말입니다.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이스라엘이 망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영원히 진동하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는 계획에 전혀 차질이 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래 계획했던 영원한 진동하지 않는 나라 영원한 천국 만들기에 꼭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거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왜 어려운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은요 다른 나라는 망해도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나라는 진동하고 무너져도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던 나라였어요.

그런데 그 호언장담한 나라, 그게 이스라엘 본인들이 개선한 것이고 기대한 것이고 고대한 것이고 또 그러한 내용을 품어서 “나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여호와를 믿습니다. 여호와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렇게들 이야기를 해 왔던 거에요. 이것은 오늘날 교인들에게 “예수님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하는걸 내 좋아합니다. 하나님 절 기억해주세요. 지켜 주세요.”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는거에요. “왜 나를 믿지? 너 왜 나를 믿는거야?”

그 질문에 대해서 망했던 이스라엘 사람 같으면 이렇게 답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 지켜준다고 약속 했잖아요. 그 약속을 믿습니다. 이래 되는거에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키고 내 미래와 운명을 구원해주기로 이미 확정 지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좋아할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믿어야지 그런 좋은하나님 믿어야지 그럼 내가 부처를 믿겠습니까 공자를 믿겠습니까? 그렇게 답변 하는거에요.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대꾸하지요. “그거 너가 너 자신을 믿는다는 이야기 아니야? 니가 니 자신을 믿는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그렇게 할 때 여러분 뭐라고 하나님에 대해서 대꾸할 겁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쑤시고들어오면 어떻게할거에요? 너는 너를 불신해 본 적이 있는가? 너는 너를 안 믿어본 적이 있는가?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믿습니다.

그렇게 신앙적인 고백과 신앙적인 모습을 다 드러내는데, 그러면서도 결코 하나님 믿는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한번 믿어볼까? 하나님 한번 믿어볼까? 믿으면 내 한테 좋은 일 생기는데 그걸 내가 왜 놓쳐 나 안 놓칠거야.”라고 하면서 끝까지, 끝까지 의심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거였어요. 내가 믿는 예수님은 예수님을 붙든다고 하지만 예수님 붙드는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원칙적으로 양보 없이 전제를 깔고 믿는게 누구냐 하면 우리 자신이잖아요, 우리자신.

이스라엘 그래서 망한거에요. 이스라엘 망한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은요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가 망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한겁니다. 우리가 안 망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잘못 생각한 거에요. 어느 누가 교회 나오면서 저를 망하게 해달라고 교회 나온 사람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저 망하게 해주세요.” “어느정도?” “철저하게 내가 두 번 다시 내가 나를 믿으면 진짜 손에 장을 지진다. 나는 개다 사람도아니다. 이렇게 해 주시옵소서. 나를 믿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왜?” “주의 일이 내가 방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믿는 이것이 주의 일에 정면으로 충돌되고 주의 일을 저지하는 마귀의 힘이라는 사실을 제가 알게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나무가 산에서 뽑혀서 바다에 빠질수 있다는 그 능력을 여러분 실감하셔야돼요. “나무가 산에서 뽑혀? 그게 바다에 빠져? 하이고 말같은 소리를 해야지.” 자, 이것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고 할 때 그걸 누가 방해합니까? 철석같이 믿는 나의 인생 체험과 경험과 지식이 주의 말씀을 주의 믿음과 주의 모든 계획을 방해해 왔던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이 방해하지 마라고 만든 건물이 있어요. 건물. 건축구조물. 그걸 성전이라 합니다. 그러면 이 성전은 출애굽기 2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지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자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3번에 걸쳐서 일 년에 세 번씩 내 얼굴 좀 보자 나를 좀 보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7절.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나 좀 보자는 거에요. 나 만나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만나자고 불러내는 장소가 성전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세 번씩이나 유월절 그다음에 맥추절 수장절입니다. 유월절 1월 10일, 맥추절 3월 16일, 수장절 7월 10일. 이렇게 세 번씩 만나야 되는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싫어한다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만나게 되면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있느냐 하면 제사장들이 있어요. 그 제사장들이 그 일 년에 세 번씩 나오는 그 이스라엘 모든 남자에게 뭐를 가르치냐 하면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 잔소리가 듣기 싫은거에요. 그 잔소리가.

모든 가정에 남자들에게 일 년에 세 번씩와서 율법을 가르치면, 그 가르침은 남자가 듣고 그냥 있으면 안돼요. 집에 가서 자기 식솔에 있는 모든 부인과 가족들에게 자기가 배운 율법을 그대로 가르쳐야 되는거에요. 가르치게 되면 누가 싫어하느냐 하면 자식과 부인들이 싫어해요. 여러분 실감하는거에요. 일상의 삶이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믿기 때문에 누가 와서 참조로 하는 것은 용납이 되지만 강압적으로 누가 쑥 들어오게되면, 쑤시고 딱 들어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강력한 말씀에 대해서 반발하는 괴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율법을 줄 때 사실을 느끼게 되죠.

남편이 아내한테 이렇게 말씀 이야기하면 아내가 말하죠. 어느 가정도, 시대를막론하고. “고마해라, 밥 안 해주는 수가 있어. 니 내 이 차타고 오면서 한 시간 내내 두 시간 내내 잔소리할래? 분명히 고마해라 했다. 내 말 안할라다가 말하는데 니 내한테 뭐 율법을 가르친다고? 니 꼬라지부터 제대로 하고 가르쳐라. 니가 율법을 내한테 가르칠 쨉이되나? 어디 지도 율법 안 지키면서 어디 지가 가장이라고. 아이고, 꼴에 가장이라고 자식하고 마누라 당신 휘하에 휘잡을라고 그렇게 선생 노릇하고 있나? 치아라 고마” “예” 깨갱해가지고. 쑥들어가죠.

특히 밥 안 해준다 하는 거는 아침에 밥 안 해준다하면 거의 다 모두가 쑥 들어가 버리죠. 로마서 7장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 7장 1절에서 4절. 역시 신약에서는요 구약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어려워요. 나름대로 제가 느낀 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이래 돼 있어요. 이 말씀이 뭐냐 하면 “여인이여, 여자여, 당신은 남편과 결혼했습니까, 율법과 결혼했습니까?” 묻는 거에요. 이 말이.

여자는 남편과 결혼한게 아니에요. 모든 결혼한 여자는. 율법과 혼인 돼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가진게 아니에요. 남편은 율법을 가진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둘이가 결혼식장에서 딴딴따단 해가지고 둘이 결혼한다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이 결혼하기 전부터 율법의 혼인법이 모든 인류를 장악하고 있고 현재 그걸 덮쳐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식장에서 결혼하고 결혼식하고 기념사진 촬영하고 신혼여행가고 한거에요. 사도바울은 세상을 그렇게 보는거에요. 세상은 율법아래에 있다고 보는거에요.

이것은 “내한테 잔소리 그만해라. 나는 내 아래에 있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는거야. 내가 알아서 사는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이거는 100이면 100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자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은 율법 없는 다른 열방들에 있어서는 인간들은 내가 우선이고 그다음에 신을 믿든 뭘 믿든 그거는 내가 우선 있는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을 믿는거에요.

‘모든 것이 내 위주고 내 행복이고 내 즐거움이고 내 쾌감이고 내가 이 땅에서 내 원대로 욕망대로 잘 살면 그만이야’하는 그것을 이미 우리 안에 장착해놓고 너무 나쁘게 살면 벌 받고 이런게 있잖아요. 그래서 이미 나한테 이것이 이런 소망을 두고 그다음에 너무 나쁜짓하거나 나쁜짓해가 신에게 걸리면 또 내가 벌받기 때문에 나만 손해잖아. 그니까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신의 법을 지켜 보는거에요.

그리고 혼자 살면 외로우니까 결혼해 보는거에요. 여자는 남자하고 남자는 여자하고 솔로 프로에 나와가지고 “나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뭐 선택하겠습니다” 해가지고 해 보는거에요, 그냥. 다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4절부터 나옵니다.

이거는 1절부터 3절까지보다 더 어려워요. 일단 4절을 읽어보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앞에는 결혼 이야기를 했습니다. 앞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는데 남자가 죽었어요. 남자가 죽고 난 뒤에 그 여자는 이제는 남편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율법의 뜻이라는 거에요. 이 남편이 이미 사별해서 죽었는데 시가집에서 부르는거에요. “야야, 느그 시아버지 제산데 제사 안 차리고 뭐하노.” 남편 이미 죽었는데. “야, 너희 시누이 결혼한다는데 니가 돈좀 보태야지?” “저 남편 죽었어요.” 남편이 죽었다면 옛날 시가집 지시와 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는거에요.

그러면 그 여자는 남편은 죽었지만 그 남편 죽음을 통해서 무엇이 새롭게 느껴지냐 하면 ‘내가 율법과 혼인했다는 사실, 율법에 메였다는 사실’이 더 또렷하게 등장하는 겁니다. 왜? 남편 시가집 말만 들으면 안된다는 법이있기 때문에. 내가 이제는 남편 죽고 난 뒤에 어느 남자만나든 남편 가정, 시가집에서 이제 간섭하지 마소. 그럼 시가집에서 “니가 전부터 바람이 났었구나?” 뭐 이래 나올거죠. 그게 아니고 율법이 그래요, 율법이. “그러니깐 시아버지 시어머니, 나를 죽은자로 간주하라니까. 당신 집에서 이 며느리는, 남편만 죽은게 아니야.” 아내가 죽은 거에요. 남편 죽고 난 뒤에 같이 있던 여자도 같이 죽은거에요.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을 계속 담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4절은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이제 남편죽었으니까 나는 다른 남자하고 사귀어서 결혼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것을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그런 것을. 왜냐하면 4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몸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남편 죽었으니까 나는 이제 다른 남자 누굴 만나도 율법에 흠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정말 율법에 흠이 없다면 남편 죽었으니까 다른 남자 만나는게 율법의 흠이없는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흠이 없는거에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전에는 율법에 매여있는 몸인데, 이제는 남편이 죽음으로써

율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율법에 의해서 내가 과연 율법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가 어떤 남자를 사귀든 안 그러면 다시 시가집에 들어가든 상관없이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사실을 누가 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걸 확인 시켜 준 겁니다. 어렵죠?

너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나 이제 남편 죽고 난 뒤에 다른 남자 사귀어야지 할 때 주님께서 “이리와, 이리와, 이리와. 니 지금 다른 남자 사귀는 것도 니가 그렇게 되게 되면 그게 율법에 위반되는 거야.” “아닙니다. 저는 전남편 죽었기 때문에 새남자 만나는게 율법에 위반되지 않습니다.”라고 여자가 대들면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니가 다른남자를 만나도 그거는 니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뜻으로 십자가에 예수님의 몸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설명하는게 더 어렵다.

다윗의 그 담긴 언약의 뜻이 혈통으로 이루어집니다. 소위 밑장빼기죠. 화투 두 장 있는데 단풍 두장 있는데 아예 단풍 밑에 또 한번을 뺀 밑장 빼는거에요. 동일한 다윗인데

■한쪽 다윗은 망하는 다윗이고 다윗이 망해야 이게 벗겨져야

■진짜 다윗,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다윗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 진짜 천국백성이 그 뒤에서 밑장 빠지듯이 나오는거에요. 그게 스룹바벨이에요.

하나님이 인치신 그 사람이 메시아가 스룹바벨이에요. 근데 이스라엘은 뭐냐, 율법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한테 말씀을 줬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 했던 거에요. 그런데 그들이 율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잘못생각했죠. 율법이 우리를 지킨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니 밑장빼자는 거에요. 너라는 이스라엘 그게 날아가야 껍데기 위에있는 이스라엘 날아가야 아래쪽에 너에 의해서 숨어있는 진짜이스라엘이 나온다는거에요.

어떤 여자가 남자 만나서 결혼하게 되면 그 여자보고 “니 좀 죽어라” 지금 결혼해서 살려 하는데 우리보고 죽으래. “니가 죽어버려. 니가 죽어야 자유가 돼. 니가 남편이 죽을 때 여자가 이제는 다른 남자만나도 그게 율법에 위반되지 않는것처럼 니가 율법에서 죽을 때 비로서 너는 자유를 얻는거다”라는 거에요. 자유를. 그게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자는 자유하고 싶다고 그 남편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근데 언제 떠나느냐,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여자는 전에 살아있던 남편의 품을 떠나서 자유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예수님 몸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오셔가지고, 스룹바벨의 기능이죠, 몸으로 오셔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십자가에 죽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율법에 의해서 죽은자 되기 위해서, 율법 마저도 헤어지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 돌아가신거에요.

그게 바로 로마서 7장 4절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처음에 이야기한 데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안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한테 장래 기대 안 하겠습니까? 반드시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가는 것을 포기합니까? 절대로 포기 안 합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믿는 것은 나 좋기 위해서 장래에 내 잘되기 위해서 믿는 겁니다.

이런 나를 우리 자신이 어떤 경우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의 껍데기 있는 나 자신을 죽여버리는 거에요. 내가 죽이는게 아니고, 자살하는게 아니고 주께서 내 껍데기에는 어떤 경우도 나 믿는 것을 포기못하는 나를 없애 주는 거에요. 없애주게 되면 우리는 그 죽은 남편으로 인하여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것처럼 우리는 나로부터 자유함을 얻는겁니다. 나 자신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이스라엘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해서 그래요. 계속 이스라엘 이스라엘 하고 있었던 겁니다.

주께서 강제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버렸죠. 다 털어버린거에요. 이스라엘 없는거에요. 그래도 하나님의 약속에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서 약속하기를 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기를, 메시아가 오신다. 메시아가 오신다. 다윗의 자손이 오신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믿자. “믿지마” 그런 분 안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뭐냐?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바벨론의 자손인데요. 스룹바벨인데요. 스룹바벨. 망했다는 것을 확실히 품고 있는 분. 아, 우리는 망해야 되고 진동하는 세상에 같이 진동해서 완전히 폭삭 망해야 된다는 것을 내용을 품고 나타나신 분. 그 품은 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내가 이미 심판받았고 망해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의 흔적이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 건드리지마라 나 십자가 흔적 가졌다. 나 이미 죽었어.

주께서 죽었을 때 나 함께 죽었어.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이야기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야기.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는 없어요. 멀쩡히 살아있는데 내가 왜 죽어? 나 살아있잖아, 내가 왜 죽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육신이 있는 한 이걸 못 미더워합니다. 안 믿습니다. 예수님 죽은 건 인정하겠는데 나는 살아있어요. 우리는 이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구원받은 우리의 삶. 이걸 둘러싼 이 세상을 뭐로 만드는가? 바벨론 세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진동하는 세계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는 흔들리는 가운데서 뭐하나 붙잡을라고 그렇게 애를 씁니다. 자기가 안 붙잡으면 자식이라도 잘 되가지고 자식 의지하려고 자식 안되면 외손자한테 뭔가 낙이 있는가 싶어서 붙잡고 안 그러면 삼촌 조카 이모 올케 뭐하나 잘되면 진동 안 될라고 그 덕으로 내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뭘 자꾸 붙잡아요. 붙잡으면 붙잡는 족족 바벨론으로 바꿔버립니다.

“니가 지금 진동하는 것 불안정한 것을 붙잡고 있다.” “그럼 어떡하란 말입니까?” “붙잡는 너도 같이 흔들려서 너를 안 붙잡으면 되잖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면 되잖아. 너를 안 붙잡으면 되잖아. 그래도 너는 이만큼 살았잖아.” 그 은혜가 뭐냐. 그 은혜가 바로 예수님의 새롭게, 로마서 7장 4절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자체를 돌출된 스룹바벨로 만들어버리는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진동하지 않는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언약의 결과물로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낸거에요. 십자가의 열매가 되게 하는거에요. 끝으로 “그럼 목사님, 우리보고 어짜란 말입니까?” 멀미 나도록 멀미약 있잖아요. 붙이고 죽을 때까지 “이 세상을 흔들리는 가운데서 마땅하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기대하는 내가 잘못이지 내가 의도해 계산해 목적을 가져? 목표를 가져?” 주께서 다 흔들어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지자가 말씀한 바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다 이루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무엇이 진동하고 무엇이 진동하지 않고 완성된 것인지 이제 구분하는 눈을 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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