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개인의식과 성전

아빠와 함께 2023. 4. 9. 08:23

20230407a 울산강의-역대기상(19강) 17장 1절 : 개인의식과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7장하겠습니다. 17장 1절부터 15절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내용은 다윗이 자기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디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있는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밑에 있다, 그렇게 나와 있지요. 그러면 다윗의 생각에 자기가 백향목 궁 안에 있으면 오늘날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주시고 모든 일에 성사시켜주신 하나님은 그것보다 좋은 곳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다윗이 갖고 있었습니다. 초라하다 이 말이죠.

자기는 이스라엘 왕으로 자기로서는 그럴싸한 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 하나님 계신 곳은 처한 곳에 있다, 라고 다윗이 하나님께 미안해한 겁니다. 미안해했으면 미안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기 위해서 거창한 하나님만을 위한 하나님의 계실 집을 자기가 건축하겠다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나단 선지자와 다윗 두 사람이 이야기하죠. 역대상 17장 1절과 2절에 두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거기에 cctv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현장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3절에 보니까 “그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이렇게 나왔어요.

거기 두 사람 밖에 없는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하나님이 어떻게 아시지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습니까? 사람이 대화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아느냐 이 말이죠. 여러분은 이야기하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니까 다 알고 있지요, 라고 말씀하고 싶지요. 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흔한 오류, 잘못되게 섬기는 것을 다윗이 대표해서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 하나님이죠. 하나님 계신 곳을 다윗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계신 곳을 다윗이 생각하고 있어요. 왕관을 쓰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계신 곳은 이렇다. 이게 잘못이에요. 이게 사단의 시발입니다. 이게 잘못된 거예요. 다윗이 하나님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으로 다윗 자신이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이게 문제인 거예요.

내가 여기 집에 있는데 아버지는 촌에 계시다. “아하, 날씨가 추울 때 우리 집은 뜨뜻한 데 촌에 계신 아버지는 어떻게 계실까? 아버지 집에 보일러 놔드려야 되겠다. 그것도 귀뚜라미 보일러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와 아버지로가 따로 산다는 것을 티를 내게 돼요. 따로 살고 있는 거예요. 촌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내가 뭉개지고 무너지는 일은 없어요. 나 따로 촌에 있는 아버지 따로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 대 인간 사회에는 타인을 생각할 때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이게 반칙이에요.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 다윗은 자기가 거하는 백향목 궁을 이게 하나님이 계시는 궁으로 왜 보질 못했을까요? 내가 지금 백향목 궁전에 사는데 이걸 왜 내가 산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 궁에 산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그것은 개인의식 때문에 그래요.

역대상 17장 초반에서 다윗이 무엇이 잘못됐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언약궤 있는데 계시다고 나 있는 공간과 하나님 공간을 다윗은 분리시켰습니다. 이게 다윗이 저지른 잘못이고 모든 인간이 똑같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쉬운 예로 제가 하나님께 뭘 드리면 되겠습니까? 시골에 있는 아버지한테 자식이 전화해서 “아버지, 이번 여름에 에어컨 달아드릴까요,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할 때 말은 하는 본인은 아버지한테 효도한다고 생각하지요. 사람 대 사람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잘못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드린다는 자체가 인간에서는 나올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서는 그런 말을 할 권한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왜? 본인 게 없기 때문에. 마치 본인 게 있어서 이웃집 할아버지한테 어르신께 해주듯이 하나님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다윗 중심으로 시편 51편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근원적으로 몰랐던 것이 뭐냐 하면 본인들이 모든 생각이 개인의식부터 출발해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앞에 해당 안 되거든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개인의식은 비워버려야 돼요. 개인의식 지우고 뭐로 바뀌느냐? 동승자, 또는 동행자 의식을 갖고 있어야 돼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이러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 뭘 드려야지 하는데 시편 51편에 나오지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드릴까요? 이게 아모스에도 나와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드릴까요? 수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을 드릴까요? 이게 하나님이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이게 드린다는 게 어떤 경우냐 하면 내 것 따로 있고 하나님 것 따로 있는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 것으로 이동시킬 때 드린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독입니다.

2인용 김밥을 가지고 두 사람이 소풍을 간다고 생각해봅시다. 2인용이에요. 도시락 안에 김밥 네 줄 있어요. 2인용이니까. 네 줄 있는데 친구가, “내 김밥 너 줄까?” 하면 그 자체가 친구에 대한 모독이죠. “니 김밥? 니 김밥이 있었어?” 니 김밥이 있었느냐 말이죠. 김밥 도시락이 두 개가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 것입니다. 이스라엘 게 아니에요. 뭘 드리고 자시고 할 게 없어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자체가 이거는 불신앙적 요소를 본인도 모르게 티가 나 버렸어요. “티 나?” 확 나. 드린다는 게. 선교해 드릴까요, 전도해 드릴까요, 헌금해 드릴까요, 찬양해 드릴까요, 예배 참석해 드릴까요, 봉사해 드릴까요, 착한 일할까요? 주께서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나한테 줄 게 뭐가 있다고 뭘 드려.

사도행전 17장에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이 하나님은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친히 주시는 분이라 했어요. 들어나 봤습니까, 이 말씀. 사도행전 17장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아테네에 신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런데 그 신들이 이방신이죠.

여호와가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의 특징이 뭐냐? 인간으로부터 받아 챙겨서 개념이 유지되고 있는 전통적으로 인간 손에 보존되고 있는 그 신들은 인간에게 받아먹는 신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설교한 내용이 오늘날 이 설교를 어디 가서 해야 돼요? 교회 가서 해야지요. 교회 자체가 지금 다른 신을 섬기고 있어요. 인간 것을 받는 신을 섬기고 있다고요. 그런 신은 없어,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동승, 함께 있으면 이게 하나님의 뜻인데 만약에 개인주의의식으로 시작하면 이게 뭐냐 하면 공포입니다, 공포. 무서움이에요. 사람이 혼자 있으면 무서움이 따라오게 돼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주 큰 집에 밤중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잠을 잔다고 생각해봅시다. 잠을 자는데 창가에 뭔가 그림자가 비추는 것 같은데 화장실 쪽에서 삐익 문 여는 소리 들리고, 싱크대에 뭔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릴 때에 거기 누구요, 이렇게 하겠지요. 그럴 때 반가워서 그런 소리합니까, 무서워서 그런 소리합니까?

신약성경 찾아봅시다. 마가복음 6장 49절, 제가 읽어볼까요.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이렇게 돼 있지요. 그다음에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고 돼 있지요.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이렇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밤중에 물위를 파도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는 걸 보고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유령과 함께 살고 있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 유령은 나 있는 곳에 없어야 되고 유령은 배척해야 되고 우리 있는 곳에 유령은 없어야 되고 우리끼리 독자적인 그러한 집단으로서 폐쇄적 집단을 유지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유령을 얼마나 무서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밤중에 인기척 없이 <여고괴담> 복도에 귀신 나타나듯이 퉁퉁 올 때 유령인가 하여 제자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워 말라, 나다.

이 비슷한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보면 광야에서 목자들이 양을 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지요. 그때 목자들이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돼 있어요. 성경에. 그런데 천사의 말이 두려워 말라고 했어요. 두려운 경우는 어떠냐 하면 내가 확인하고 내 점검을 마친 내 아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나왔을 때 인간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겁니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나 혼자 뿐만 아니고 두 사람이 있든 세 사람이 있든 이 개인의식이란 것은 중심에 누가 자리 잡고 있다? 중심에 내가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사람만 뽑아서 꽃다발 만들듯이 나한테 공격 대상이 안 되는 나를 공격하지 않는 사람, 내가 편하게 맞이할 사람만 따로 부케 만들 듯이 그런 식으로 사니까 이거는 여러 사람 있다할지라도 개인의식 아니라 하지 마세요. 여러 사람 있어도 그건 개인중심이에요. 왜냐하면 중심에 본인이 있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이 오늘 본문 역대상 17장에서 누가 갖고 있는가 하면 다윗이 갖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지금 좋은 백향목 궁에 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허접한 그런 천막 위에 계시니까 맴이 아프다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아프다는 거예요. 그걸 나단 선지자 보고 이야기했다고요. 그 현장에 다른 사람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에 새벽 세 시인지 네 시인지 모르겠는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해서 집을 지어준다면서, 이렇게 나온 거예요.

왜 다윗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궁에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갖습니까? 개인의식 때문에 그렇지요. 자기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해서 그래요. 내 중심인데 나는 좋은 것 누리고 있구나. 내 바깥에 멀찍이 내가 있는 경계선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 좀 미안스러우니까 나보다 좋은 걸 드려야 이게 이스라엘 왕으로서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마땅한 도리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모든 교인들이. 특히 연세 많은 권사님들, 장로님들. 그럼 목사는? 아이고 목사는 신앙이 없으니까 빼고요. 자체가 신앙이라고 볼 것도 없으니까. 장로님들, 권사님들. 30년, 40년 이무기 있잖아요. 교회 이무기. 푹 절였잖아요. 맨날 매 주일마다 교회 가서 하는 일이 “하나님이여, 주님이여, 예수님이여 제가 무슨 좋은 걸 해드릴까요?” 맨날 해드릴까요 하면서 50년, 60년 다닌 사람이에요. 본인은 벌벌 떨면서. 본인은 쥐만 나와서 바퀴벌레 나와도 엄마야, 이러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하나님.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이 아주 어설픈 곳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은 죽으러 가심, 이걸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같이 껴안고 죽음의 길을 가시는 거예요. 진주의 논개가 임진왜란 때 적장 껴안고 화장실 갔습니까, 놀러갔습니까? 진주성 밑에 있는 남강에 자기 몸을 던져서 같이 죽자고 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껴안고 죽으러 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서 고맙습니데이, 지금 이러고 있단 말이죠. 자기는 살 궁리 챙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하나님 아무리 하나님이 이스라엘 도와주고 해도 하나님이 가는 방향조차 감 잡지 못하는 이스라엘, 오늘날 교인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자기가 멀쩡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게 구약의 사사기도 그런데 사사기는 뭔가 반복이 되는데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멀쩡할 때는 하나님 안 찾아요. 그런데 자기가 궁지에 몰릴 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 살려달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궁지에 몰릴 때 잘 들어보세요. 첫째는 누가 궁지에 몰아넣는가, 그 사람들 모르고요. 두 번째 뭘 모르느냐 하면,

사사기에서 궁지에 곤경에 궁지에 몰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뭘 모르느냐? 첫째는 누가 우리를 궁지 또는 곤경, 궁지로 몰아세우시는가? 이것 이스라엘 사람들 몰랐어요. 왜? 그들은 무슨 의식을 갖고 있다? 개인의식을 갖고 있어요.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개인의식에 충실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 오늘날 우리 모습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아쉬울 때 찾는 거예요. 아쉬울 때 쭈여, 하고 찾는 거예요.

그다음에 뭘 모르느냐? 누가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는가? 이건 여러분 아시지요. 이스라엘로 하여금 궁지로 몰아세우시는 쪽이 누굽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이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방사람들, 이방민족들을 주위에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방민족은 오늘날 같으면 뭐냐 하면 바디프랜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안마기, 250만 원짜리 안마기. 안마의자에 앉잖아요. 누가 안마기 앉아 있는 나의 몸을 압박합니까? 그 안마기 역할을 누가 하느냐? 주변에 하나님 안 믿는 우상 섬기는 자들이 압박을 하는 거예요.

두 번째 뭘 모르느냐 하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숨 돌릴만한 상황이 되었는가? 이걸 몰라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압박을 당하다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살만하다 할 상황이 되었는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오늘날 교인들이나 그 당시나 하나님이 도와줬다는 거예요. 땡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준 게 아니고요. 하나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희생했다고요. 대신 희생했다. 입다의 딸처럼, 삼손처럼. 삼손도 마지막 죽을 때 죽잖아요.

개인의식 하는 게 아무리 하나님이 도와줘도 이 개인의식이 찌부러지거나 무너질 생각을 안 해요. “하나님, 또 다음에 어려울 때 기도원에서 기도할게요. 다음에 어려울 때 십일조 안 빠뜨릴게요.” 맨날 이러고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개인의식이란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어디 있고? 저기 있다는 말은 나 있는 곳에는 누구만 있다? 나만 있고 하나님은 저 뒷간 방에 어르신네로 있다가 내가 아쉬울 때 조르르 와서 도와주는 그러한 하나님, 아아 대한민국 하나님, 아아 대한민국 교회 하나님. 그것도 교회라고 다니니 참, 가관이에요, 가관. 그렇게 다녀놓고 10년 다녔습니다, 20년 다녔습니다. 그게 무슨 교횝니까, 절간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미국에 B급 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주인공이 악당한테 쫓겨서 옆에 있는 지그재그로 돼 있는 사다리로 막 올라갑니다. 총은 있는데 밑에 악당이 총 들고 잡으려고 따라옵니다. 그런데 마침 주인공의 총에 총알이 다 떨어졌어요. 그런데 악당이 죽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악당본부에서 “걔 왜 죽었어?” 하니까 “총에 맞아 죽었어요.” 이러거든요. 여러분 아직도 감 안 잡히지요.

총에 맞아 죽는다가 우리들 생각에는 뭐냐? 총에서 총알 나와서 죽는 걸 생각하지요. 그게 보통 아닙니까. 두 종류가 있어요. 총알 맞아 죽는 것도 있지만 총 자체에 맞아 죽는 것도 있어요. 이것도 총에 맞아 죽는 거예요. B급 영화의 주인공이 총알이 없으니까 총 자체를 밑에 있는 사람에게 던지니까 그것 맞고 죽은 거예요.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우리의 죄의 몸 때문에 죽어요.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의 몸 자체 때문에 예수님 죽을 때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도 죄 있는 몸이고 우리의 몸도 죄 있는 몸이고.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죄가 나와서 죄가 나를 쏜다고 되는 거예요. 죄가 쏘는 게 아니고 죄의 몸이, 우리가 같이 악당인데 총알이 날아와야 되는데 총알이 안 날아오고 이만한 총신, 총 몸체가 떨어져서 예수님 몸이 떨어져서 함께 죽을 때 비로소 함께 삽니다. 부활되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사는데 있어서 우리 나름대로 어떤 요령을 부릴 여지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덮친 그분이 네가 이런 식으로 살라고 구원받으라고 준 게 없어요. 그냥 예수님 몸 자체가 우리에게 덮쳐버렸습니다. 예수님 몸 자체가 덮친 것을 색깔을 의미를 줘서 말씀드립니다. 그걸 ‘피’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의 피, 또는 예수님의 찢겨진 뭡니까? 살이죠. 이 떡을 먹어라 내 살이고, 이 잔을 마셔라 이거는 피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을 압축기 넣어 짜보잔 말이죠. 짜면 나온 게 뭐예요? 피와 터져 나오는 살점이죠. 그걸 내 찢겨진 살과 피를 마시란 말은 동참하라, 참여하라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총신 있잖아요. 몸체가 우리를 덮치는 거예요. 총알 맞아 죽는 게 아니고 총에 맞아 죽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총에 맞아 죽는 것 할까.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첫째 오해는 뭐냐? 하나님 주를 위해서 뭘 해드릴까요? 두 번째가 오해가 뭐냐 하면, “주님, 저한테 가르쳐주세요. 우리가 어떤 요령을 부리고 어떻게 행동하면 우리는 이 죄를 씻을 수 있고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이런 요령 부리는 방식만 배워가는 그 잘못, 이게 두 번째에요. 첫 번째는 뭐라 했던가요? (뭘 해드릴까요) 맞아요. 하여튼 현대인들은 너무 바빠서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잊어버리고, 첫 번째 하면 두 번째 잊어버리고.

첫 번째는 주여 제가 뭘 해드리면 됩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한 거죠. 두 번째는 내가 너무나 죄가 많아요. 이 죄 씻으려면 뭘 찍어 바르면 되고 뭘 어떻게 언약을 배울까요, 구속사 배울까요, 십자가 피를 믿을까요, 뭘 하면 될까요, 라는 방식만 매뉴얼, 전자제품 사면 두꺼운 설명서 있잖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잘 안 읽는다면서요. 그 설명서 알려달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온 오해다? 그게 개인의식에서 나온 오해에요.

다행스러운 것은 그 잘못을 오늘 역대상 17장에서 누가 저질렀어요? 다윗이 저지른 거예요. 다윗이 자기는 백향목 궁에 살면서도 미안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거예요. “나는 이렇게 호사스럽게 하는데 나를 왕으로 만드신 나는 여호와 덕분으로 잘 사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초라하게 비참하게 사시는구나. 세상에 저 천막이 뭐냐.”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어요? “다윗아, 내가 천막 하나 보내줘? 내가 천막에 산다고? 네가 백향목 궁에 산다고? 백향목 궁에 너만 사는 게 아니고 나도 살고 내가 언약궤가 천막에 산다고? 나만 천막에 사는 것이 아니고 너도 천막에 살아야 돼.”

천막 사는 하나님, 백향목 궁에 사는 다윗 이 둘을 합치는 것, 이게 동승자, 동행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그다음 작업입니다. 개인의식 때문에 나 따로 하나님 따로 있는 이 의식을 하나님께서 일을 벌여서 두 개를 합치는 일을 해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나는 좋은 집에 사는데 하나님은 초라한 데 사는구나. 내가 집을 지어드려야 되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인간의 오류가 나와야 주께서 그다음에 작업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의 오류에 대해서 본인이 처리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세요. 오류를 유발케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오류, 오류 아닌 게 없지요. 다 오류니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죄가 발굴되었는데 그걸 주제넘게 지가 그 죄를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 아이고, 그런 되도 않은 그것 겸손 아닙니다. 교만입니다.

내가 쏟아놓은 배설물 내가 치운다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배설물만 쏟아놓으세요. 그게 제대로 된 갓난아이의 모양새입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자꾸 어른스럽게 하지 마세요. 지혜롭게 슬기로우려 마세요. 잘립니다. 그런 사람 이미 벌써 잘렸지요.

다윗은 자기가 어른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이스라엘 왕이니까. 참으로 이스라엘 왕이라면 하나님이 계시는 그 초라한 천막, 그 천막 쪽으로 백향목 궁에서 내 인생은 천막이 적절함을 알아야 돼요. 백향목 궁은 나한테 과분해요. 뭐 했다고 백향목 궁에 삽니까. 다윗은 자기 궁을 천막으로 만들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자기대로 버티고 여호와 계시는 그곳을 백향목으로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 좋고 하나님 좋고.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자, 오늘 강의 처음부터 말씀드린 건 이겁니다. 다윗이 생각하기를 하나님 위치와 자기 위치가 따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생각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성전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결합시키는 그 작업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전의 완공, 성전의 완성입니다. 떨어져있는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겁니다.

처음에 휘장 있잖아요. 여호와의 언약궤는 휘장 안에 있다 할 때 이스라엘이 처음에 장막 생활했습니다. 텐트 생활했는데 그건 빨리, 빨리 이동하기 위한 텐트 생활이에요. 그러니까 텐트 생활은 현재 있는 그것이 완성형이 아니고 완성형은 따로 있고 거기로 이동하는 중이고 이동해야만 하는 일들이 남아 있어요.

쉽게 생각해서 고린도후서 5장에 우리 몸이 있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우리 몸을 장막이라 했어요. 여기서 장막이라 하는 것은 임시 천막이란 뜻이에요. 임시 거주지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임시 거주지라 하는 것은 내가 있는 임시 거주지가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있는 임시 거주지였던 겁니다.

쉽게 하면 우리 몸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천막이라 할지라도 이 천막을 하나님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의 열정으로 나는 내 백성과 함께 있으리라는 열정으로 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죄 있는 우리 몸이 거룩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돼버린 거예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그리고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우리 몸이 어떻게 나중에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는가? 그 경로, 그 절차, 그 과정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주도해서 인도해가는 거예요. 인도해간다는 것은 계속해서 이동해간다는 것, 머물지 말고 계속 변신해나가야 되는 거예요. 오늘 마이크 없으니까 마음껏 소리 질러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이크 고장 났답니다. 다시 마이크 될지 안 될지 그건 난 모르겠어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계시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어서 종의 형체로 왔을 때에 야 우리는 살았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안 돼요. 여기서 나는 살았다는 개인의식을 뭉개버리기 위해 오신 거예요.

주인공이 뉴욕의 낡은 빨간 벽돌집 옆에 있는 지그재그로 돼 있는 사다리로 올라갈 때에 그 밑에 있는 악당이 아무리 봐도 총알 다 떨어진 것 같아. 총알 다 떨어진 소용없는 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 악당은. 총 자체가 지 머리에 떨어질 걸 상상도 못했잖아. 우리는 주님한테 빼먹을 생각을 해요. 주님 어떻게 기도하면 주님 갖고 있는 전지전능한 능력을 빼먹어서 4기말 암이나 낫고, 아이들 시집장가나 가고, 우리 집 잘 되고 우리 집 옛날처럼 행복하고 아름답게 원상복귀 언제 됩니까? 지금 빼먹을 생각하는 거예요.

빼먹을 생각할 때 된 통으로 뭔가 묵직한 게 떨어지면서 아직도 너 혼자 살 생각하느냐. 혼자 사는 버르장머리는 마귀가 집어넣어준 거거든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특징은 같이 살 생각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특징이에요. 내가 강남강의 할 때 인간은 고독을 지향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오직 자기 홀로만이 혼자이고 싶어 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한계는 수요일 설교에서 스바냐 2장 15절에 나옵니다. 최고의 자리는 나밖에 없다. 그게 말하나 말하지 않으나 우리 속에는 이것이 이 괴물이 가득 꿈틀거리고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 중심에.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가 되리라? 하나님이 되리라.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하나님의 계시가 율법이죠. 하나님의 계시, 법이죠. 여기에서 인간을 걸치고 내려옵니다. 인간을 걸치고 오게 되면 여기 인간의 물질적 안목이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와 접합해요. 물질적 안목이 뭐냐? 이제 여러분 감 잡았지요. 다윗이 백향목 궁, 이게 물질입니까,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죠.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휘장 안에 있다. 휘장, 물질이죠.

물질적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마중을 나가는 게 인간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을 물질적 이스라엘로 간주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끼리의 공동체, 물질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에요. 언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과 일대일 대응이 돼야 유의미한 언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성경에서도 과연 통하느냐? 민수기 22장 26절 보겠습니다. 민수기 22장 24절부터 보고요 제가 질문을 하나 던질 테니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비비어 상하게 하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민22:24~30)

지금 누구와 누가 이야기하고 있지요?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사람과 나귀가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발람 선지가가 자기가 타고 있는 나귀가 담벼락에 붙어서 가니까 좁은 길에서 발람은 자기 나귀니까 때린 거예요. 발람이 때릴 때 나귀는 보고 있는데 발람은 못 본 게 뭐가 있지요? 천사지요. 하나님의 사자를 못 본 거예요. 공간에 대한 의식에도 발람은 자기 개인적 의식에서 공간을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물질성이에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여기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할 때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한계에 도달하는 이유는, 내가 구성하는 내 중심의 세계에서는 내 눈에 마음에 드는 것들만 소복이 모아서 이게 내 세계라고 굳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은 구성하고 주님은 해체한다고 했어요. 인간은 자꾸 구성을 해요. 자기 세계를. 구성하면서 이것도 하나님 은혜고, 하나님 주신 거고 들었던 풍월은 있어서 좋은 말은 다해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분의 말씀이 들어오기를 원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내가 원하는 눈에 보이는 괜찮은 것들이 내 주변에 수북하기를 원해요. 그러니까 그게 내 덕으로 만든 내 신앙 덕으로 모아놓은 내 축복이기를 원하고 내 가정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한 번 짝대기로 맞아보시렵니까. 도대체 그동안 신앙생활 한 거예요, 안 그러면 누가누가 잘 먹고 잘 사나 시합하려 교회 온 거예요? 누가 더 행복한지 노닥거리고 배틀할 일 있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죽자고 오신 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거울 앞에 비친 살아 있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기 한량없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안 늙고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에 가까이 안 하기를 원해요. 이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인데 이 개인주의의 결정적 단점은 뭐라 했습니까? 무섭다 했지요. 앗 유령이다. 공포를 느껴요. 유령과 같이 살면 안 됩니까? 집에 유령이 나타났다. 반갑다, 친구야 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무서움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런데 이 집에 나만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바람 조금 불고 창문이 흔들려도 무서워서 잠을 못 이뤄요. 나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 이야기가 유별난 이야기가 아니고 마가복음 16장 8절에 보게 되면 예수님 무덤가에 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니까 돌이 굴러져 있고,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한 청년이 있는데 그 청년이 천사에요. 놀라지 말라, 했어요. 그리고 16장 8절에,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계시로 얼마나 이야기했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얼마나,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습니까. 다 어디 날아갔어요?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물질 요소가 차게 되면 계시는 모든 것이 소거되고, 소거되지요. 제거되고 뭐만 남는가? 목소리만 남는 거예요. 법은 날아가 버리고 목소리만 남는 거예요. 도로 떨어지지요. 인간은 자기 개인의식으로 도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이스라엘을 안 떠난다 했지요. 안 떠나면 추가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줘요. 예언이나 율법을 줍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계시가 점차점차 최고의 최후의 완성형으로 다가가는 그 시대가 바로 신약시대입니다. 두 번째 시간에서는 그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를 생각해봅시다. 10분 쉽시다.

 

20230407b 울산강의-역대기상(19강) 17장 1절 : 개인의식과 성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을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니까 법 또는 문자라 해도 되고요. 하나님의 목소리가 이렇게 와서 이렇게 갈 때에 다윗을 대표로 한 인간들은 자신의 물질성으로 여기서 마중을 나오고 그걸 포착해내려 해요, 하나님의 계시를. 이게 개인주의 의식인데 개인주의 의식이 없는 게 아니고 생생하게 유지하면서 다시 자기에게 내려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윗도 물질성으로 더 좋은 집을 지어드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을까. 좋은 집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는 좋은 집이 인간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잖아요. 그걸 고대로 하나님한테 적용된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고자하는 취지도 몰라요, 그냥. 내가 있는 급수만큼 같이 오르면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서 물질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려오면서 나타나는 게 다윗의 주체성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개인, 개인의식에서 플러스 하나님의 계시를 품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추가적인 하나님의 계시까지 덧붙여서 거기서 뭐냐? 하나님의 계시가 품어있는 새로운 다윗의 주체성을 목표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은 자기의 개인의식을 포기한 게 아니고 뭉개지고 부셔지기 위해서 교회 가는 게 아니고 지금껏 나도 사회에 나가서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고 훌륭한 인격자란 소릴 들었는데 여기에다가 교회 나옴으로서 뭐가 추가된다?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정보, 천국 가는 방법까지 터득해서 이게 결합이 되니까 더 온전해진 나의 주체성을 목표로 교회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시작을 여기서부터 화살표로 하면 이렇게 자기 개인의식으로 하던 나중에 다윗의 주체성에 하나님의 계시가 포함된 주체가 되던 간에 이건 어디까지나 홀로 서기에요. 홀로 살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좀 박살내고 내 자리에 주님 계시면 얼마나 좋아.” 그런 생각이 없어요. 자기가 온전해지길 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생각하는 계시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전개념이 들어있습니다. 성전개념의 기본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살기, 함께 하기입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민수기 25장 5절, 10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에 바알을 섬기는 우상이 왔을 때 제거해버리죠. 함께 있는 장막을 정화하는 작업을 실시한 거예요.

민수기 7장 1절,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장막 세워지지요. 그러면 장막이 세워진다는 말은 이스라엘 중심에서 인간들이 중심을 차지하는 식입니까, 중심을 차지 못하는 식으로 동행하는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쑥 중심을 차지하지요.

장막을 세운다. 원래 장막은 출애굽기 19장 2절에서 그 장막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하기 좋다고 한 게 장막이에요. 그런데 그 장막에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막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지치지 않는다면 성경말씀을 찾고 싶은 데요. 이왕 공부하러 왔으니까 찾아봅시다.

아모스 9장 8절에서 11절, 구약성경 1284페이지에요. 아모스 9장 11절이에요.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게 그렇게 보시고 사도행전 15장 16절에 보면 시므온이란 사람이 이런 말해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함께 하는 거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마련, 이것이 바로 성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는 걸 알지요. 임마누엘. 너희들과 함께 있으리라. 함께 있는 걸 어떻게 압니까, 저한테 물으신다면 함께 있으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요. 두려워할 일이 있을 수가 없어요. 혼자 있으면 두려워하세요. 그리고 내가 내 중심이 되면 두려워하세요. 그리고 내 인생이란 것,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여기거든 두려워하세요.

그러나 우리는 사나죽으나 주의 몸이고 주의 것이지 중심에 내 것이 없어요.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차지하는 개인주의가 차지하는 중심부분을 빈 공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든 공간에다가 예수님이 주님이 자신의 모든 것으로 그 중앙을 채워버렸습니다. 채워 넣어버렸어요.

요한계시록 7장 15절, 일단 성경 몇 개 찾고 설명은 그다음에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장막을 친다. 결정적인 것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와요. 21장 3절에 보면 이건 유명한 구절이지만 제가 찾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이게 누구 소원입니까? 우리 소원입니까, 하나님 자신의 소원이에요? 하나님 자신의 소원이란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 안에 하나님의 성전개념이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전개념은 내 백성과 함께 있는 개념으로서의 성전개념, 다윗의 성전개념은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는데 하나님 좋게 모시고 섬기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떠나지 마시고 늘 도와주세요. 이게 다윗이 생각한 자기의 개인주의를 유지하면서 그게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전개념, 이게 인간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생각이죠.

자, 잘못된 개념을 성경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탓하지 않아요. 인간들은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 자기중심주의라서 할 때 그래 잘못됐다, 이렇게 탓하는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유라고 이야기해요. 어디서? 히브리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8장 5절, 오늘 성경 안 찾다 보니 과부하 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이것이 뭐냐? 모형과 그림자에요.

9장 2절은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이런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비유에요. 그러니까 비유란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물질성은 모조리 가라다. 가짜다, 이런 뜻이에요. 심지어 그 가짜 안에 우리의 육신도 포함되겠지요. 제가 무슨 말씀하시는지 이해되시겠습니까? 몸 있잖아요. 이게 가짜다 이 말입니다.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가짜 아니에요. 이거는 진지하고 제일 중요한 거예요.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함께 있을 용도로 함께 있을 필요 있다는 그 관점에서 우리를 보게 되면 우리 몸은 있다가 없어져야 될 하나의 비유에 해당된다. 이 비유란 말은 히브리서 9장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깁니까? 건강보험 넣지요. 또 상해보험 넣지요. 연금 또 계산하잖아요.

왜 그래요? 왜 그걸 고려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가장 소중한 그 자체고 목적이로 최종적인 목적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유로 보지 않습니다. 내 몸이 없으면 나도 없어요. 내 몸이 없으면 나도 없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왜? 가장 지킬 게 내 몸뚱이인데 이걸 지키려고 하니까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야 되잖아요. 정신 바짝 차린다는 것은 그만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걷는 것처럼 무서운 거예요.

로마서 이건 제가 혼자 찾고 알려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이렇게 돼 있어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성령한테 우리의 주인을 양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주인공이기 때문에 호락호락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때는 총신으로 한 대 맞아야 돼.

우리가 언제 총신으로 맞아야 이게 철이 나느냐 하면 예수님이 지금 뉴욕의 허름한 건물 옥상 가까이 5층에 가고 있고 우리는 한 2층 따라 갔을 때 그때 <천로역정> 같은 소설 생각나면 됩니다. 단테의 <신곡> 같은 것, 임윤찬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책. 조금만 하면 누굴 따라 잡아요? 신앙생활 바짝 하면 누굴 따라 잡습니까? 예수님을 따라 잡을 때 그 예수님이 죽으라고 총신을 집어던져서 우리가 나가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비유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너 같은 죄 때문에 나 같은 의인이 너와 더불어 죽음의 길로 갔어야 해, 이 바보야. 네가 나를 따라 잡아?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따라오겠다고?” 베드로야, 뭐라 합니까? “오지 마.” “제가 주님도 따라가겠나이다.” “오지 마.” 마귀를 통해서 세 번이나 부인하게 만들었어요. 개인의식을 가지고 못 따라오도록, 주님을 따라올 수 없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생활 어떻게 할까 생각하지 마시고 무엇이 신앙이 아닌가를 매일같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적어야 되겠지요. 중요하니까. 무엇이 신앙이 아닌가? 내가 나를 간섭하는 것, 이게 신앙이 아닌 거예요.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악바리 같이 설치는 이게 신앙이 아닌 거예요. 왜 우리는 나를 놔주지 않습니까? 놔주지 않는 이유가 무섭기 때문에 그래요. 왜 무섭습니까? 혼자기 때문에. 혼자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무서워요.

기름 값 오른 것도, 콩나물 값 오른 것도, 계란 값 오른 것도 다 무서워요. 금리가 대출이자 오른 것도 무섭고요. 은행에서 대출이자 많이 받아서 새 아파트 구입한 젊은 사람들 영끌 했는데 이자 많이 올라가면 무섭습니까, 안 무섭습니까? 무섭지요. 무섭다는 말은 평소의 마음가짐이 마음 씀씀이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나는 내 인생은 내가 지켰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주님 저만치 가면 주님 곧 따라 갈게요, 이러고 싶은 거예요.

주님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방향도 몰라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저 낮은 곳을 향하는 건 모르고. 주님은 휘장 가운데 있다는 말은 주님은 다윗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언약궤가. 그런데 다윗은 휘장이 비 온다고 천막 덮어놓은 그 천막이 너무나 안쓰럽고 허접하게 보이니까 미안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주님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나단 선지자에게 미안한 너를 비유로 만들어버리겠다. 자꾸 혼자 있는 버릇이 되니까 자기 처지와 하나님 처지와 자꾸 비교해서 하나님을 잘 대우해주면 하나님이 그동안 준 복처럼 계속이 복이 오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닌데. 역대상 17장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영어에 이런 말 있어요. assistants 조력자, 축구에서 손흥민이 어시스트해서 케인이 골 넣었다, 그런 것 있잖아요. assistant는 옆에서 뒤에서 도와주는 자거든요. 그럼 assistant는 주인공이다, 주인공 아니다? 주인공 아니에요. 성도는 assistant, 쉽게 말해서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에요. 그런데 신약에서 이걸 어떻게 완성시키느냐 하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종을 뭐로 만드느냐? 이걸 아들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안 됩니다. 자, 역대상 17장 봅시다. 하나님이 성전 짓지 말라고 했고요. 성전 못 짓습니다. 다윗에게 짓지 말라 했어요. 그러면 솔로몬이 성전 지었잖아요. 솔로몬 성전은 비유라니까요. 이런 게 참 어렵지요. 다윗이 생각한 성전은 백향목 궁처럼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의 물질성을 유도했어요. 유도하고 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개인적 자기중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가를 티를 내게 만들어요. 바짝 이걸 잡아당겨놓고 그게 아니야, 라고 쳐버려요. 그러면 다윗이 생각하는 성전은 뭐냐? 어떤 특정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공간성, 그리고 괜찮은 재질로 만든 화려한 인간의 궁전 같은 으리으리한 집, 그걸 성전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 17장에서 하나님이 생각한 성전은 뭐냐? 다윗이란 가문이에요. 다윗 집이에요. 그게 11절에 나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가 열조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네 뒤에 네 씨 곧 네 아들 중 하나를 세우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니 저는 나를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자, 묻습니다. 성전을 누가 짓습니까? ①다윗, ②솔로몬, ③하나님, 몇 번입니까? 일단 구약에서는 12절의 말씀에 근거해서 솔로몬이 지어야 돼요. 네 아들 중에 하나가 성전을 지어야 돼요. 내 집, 나를 위한 집을 지어야 돼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이게 비유입니다. 허상이란 말입니다. 허상인데 그냥 허상이 아니고 절차상 허상이에요.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진짜 하나님의 개념에 합당한 성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을 어디에 동원시키느냐 하면 인간에서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은 허구적인 것만 내놓는다는 그 절차가 그 안에 포함이 된 채 성취가 돼야 돼요. 어렵지요. 우리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게 성전이야, 주는 게 아니고 우리를 불러내요. 이리와, 이리와, 불러내서 내가 성전 지어줄게, 불러내는 거예요.

불러내면 인간은 자기가 성전 짓는데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성전 짓는 걸 시킨 줄 알고 바짝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할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짓는다, 우리 손으로 짓는다, 라는 것처럼 느끼는 그것을 칠 때 그 치는 현장에 성령에 의해서 성전을 짓습니다. 그게 스가랴에 나와요. 오늘 너무 많은 걸 해서 나중에 체해서 소화제 찾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요.

스가랴 4장 6절,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신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도 아니에요. 부활하신 예수님 몸을 성전이라고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령께서. 죽은 예수님을 성령님이 와서 일으키거든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예수님 부활되지 않습니다.

성전은 예수님 부활되신 분이 성전이 아니고 앞에 절차가 필요해요. 죽었던 예수님이라는 내용이 담긴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내신 예수님의 성전이에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같은 말 아니냐. 같은 말 아닙니다. 집 헐어버리고 새 집 지으면 옛날 집 어디 있습니까? 없어지지요. 그런 게 아니고 새 집 지었는데 새 집 안에 헌 집이 기초가 돼 있는 새 집, 그게 성전이란 말이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의 보좌가 이렇게 돼 있어요.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보좌.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님을 죽음을 안 지워버리고 포함시키느냐? 예수님의 창 자국, 못 자국은 부활 되도 여전히 남아 있느냐? 그것은 마귀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랑을 넘어서 아무나 마귀든 누구도 다 오너라.

옛날에 우리나라 불교에 유명한 중이 있잖아요. 성철이란 중은 너무 사상이 깊어서 4월 초8일에 법어를 날리죠. 법어 내용이 이거에요. “사탄님이 어서 오소서. 당신을 환영합니다.” 악마여 어서 오소서.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국민들에게 우리 불교는 악마, 천사 가리지 않고 부처는 너무 자비가 많아서 다 용서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기독교보다 한 수 높은 더 대승적인 넓은 안목을 가진 것이 불교니까 불교에 많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에서 한 거예요.

왜냐하면 기독교는 악마는 천국에 못 간다는 걸 알고 그걸 편협적인 교리로 본 거예요. 종교로 본 겁니다. 누가? 성철이란 사람이. 그런데 성철이란 그 사람이 누구의 자녀에요? 아담의 자녀지요. 우리는 누구의 자녀입니까? 아담의 자녀지요. 그러니까 성철이란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 마음 저 찌꺼기에 교회 장로니 집사니 목사니 뭐 평신도 하더라도 남아 있겠어요, 없겠어요? 남아 있지요.

하나님 너무 하시지, 교회 안 다녔다고 절에 갔다고 마음 착한 우리 어머니를 지옥 보내. 그건 너무 섭섭해, 이런 식으로. 그럼 내가 두 배나 열심히 해서 지옥에 간 어머니를 천국으로 끌어당겨야지. 그게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설이에요. 인간들이 다 계획이 있어요. 인간은 자기 개인주의가 허물어지지 않고 생생하게 개인주의가 살아 있으면서 구원도 받으려고 욕심을 내고 있어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자, 천국의 요소가 뭐가 했어요, 방금? 제가 수요일도 언급했어요. 천국은 무슨 요소가 있느냐? 우리 중심에 내가 어떻게 해볼까가 빠져있는 상태,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이 중심으로 박힌 사람은 천국에 들어갑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은 그런 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열두 제자 있잖아요. 요한복음 2장 안 찾아봐도 아니까 그냥 넘어가서 이야기해봅시다.

요한복음 2장에서 제자들에게 보라 했어요. 46년 되도 준공되지 아니한 아직 짓고 있는 성전을 보라 했어요. 헤롯 성전입니다. 보라 할 때에 봤냐? 봤습니다. 내가 저거 헐어버리고 사흘 만에 짓는다 했어요. 그것 때문에 그게 화근이 되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되거든요. 나중에 유대인들한테. 성전을 헐라하고 사흘 만에 짓는다는 작자를 우리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 이래서 죽여 버려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46년 동안 짓고 있다. 헐어버려라. 내가 며칠 만에 짓는다? 3일 만에 짓는다. 그럴 때 제자들이 어떤 생각 갖겠습니까? 어떻게 3일 만에 짓느냐, 이것 생각하겠지요. 그러니까 본인은 46년 동안 지은 성전, 그리고 3일 만에 짓지 못하는 성전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주께서 지은 성전에 못 들어간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고, 내가 성전에 못 들어간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건 생각 못하고 성전에 들어갈 생각만 하는 거예요. 무슨 어떤 방법이 없나, 이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중에 요한복음 2장에 나오지요. 그때 그 성전은 그때는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되고 난 뒤에 그 성전은 부활된 예수님의 자기 몸을 가리켜 하심이라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베드로가 따라 죽으려 했는데 누가 말렸어요? 예수님이 말렸지요. 이 말은 베드로 못 들어가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 가는 곳에 갈 수가 없어요.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소를 마련하고 처소를 마련했다는 말은 처소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창세전에 예정한 건 있지만 처소는 없어요. 예정했다고 천국이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뭔가 해야 돼요. 예수님이 뭘 하느냐?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을 건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 몸을 건져요. 예정된 사람의 몸을 건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몸을 건진다고요.

예수님의 자기 몸을 건지고, 자기 몸에서 나온 성령을 보내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팩트에요. 내가 덜렁덜렁 가는 게 아닙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돼요. 그래야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보통문제가 아닌데요. 아무도 못하잖아요. 지금 제가 답변하는 게 그이야기에요. 이거는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래 나오면 저쪽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으로 할 수 없으면, 하나님이 하신다면 교회에 사람으로 해보겠다는 온 사람들 다 떠날 건데 그러면 교회는 문 닫아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있고, 속으로 가만히 이야기하는 사람 있을 거예요.

그러면 주의 방법은 뭐냐? 교회 문 닫으란 이야기에요, 결국은. 어제부로 교회 문 닫고 다음 주로 문 열면 돼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돼요. 교회가. 그래야 무섭지 않습니다. 만약에 교회 문 열어서 교인 수 계산하면 온 교인 두려워요. 목사부터 해서 무섭습니다. 이 앞자리에 앉은 사람 다음 주에 다른 교회 갈까 무서워요.

그럼 그 교회는 사람만 있어요. 누가 없습니까? 주님이 함께 하는 성전이 아닌 거였어요. 인간들이 사람들 모아놓고 하나님께 드릴 생각한 거예요. 그런 교회 안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사람을 성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내 일에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간섭하지 마세요. 죽은 나를 살리는 것도 성령이 하시는 일인데 왜 우리는 내 인생을 보람 있게 착실하게 번듯하게 남보란 듯이 나 인생 이렇게 바르게 살았다. 십자가를 자랑해야지 왜 그걸 자랑하고 있습니까? 또 십자가 자랑하라 하면 이렇게 자랑하는 사람 있어요.

내 인생에 나는 십자가 알게 되어서 이제부터 십자가 자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것 자랑하지 마시고 내가 십자가 자랑하지 마시고 십자가가 스스로 자랑하도록 하세요. 나를 밟고. 말이 자꾸 길어지는 이유가 하도 구라가 많아서. 자꾸 가짜들이 끼어들어서. 차 가는데 자꾸 새치기 끼어들어서 가로막는 거예요.

다시 정리해봅시다. 성전은 비유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비유고 다윗도 비유에요. 허구다 이 말입니다. 허상입니다. 그런데 그 허상이 불필요한 허상이 아니고 assistant 그 허상이 보조자가 될 때 성전이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역대상 17장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지은 집은 하나님 아들 만들기에요.

하나님이 친히 아들을 만드는데 어떻게 아들을 만드느냐 하면 다윗을 죽여서 다윗을 아들 만들어요. 다윗을 죽이는 방법은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게 만들어요.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기 위해서 누가 여기에 등장하느냐 하면 밧세바라는 유부녀가 등장해요. 제가 필름을 반대로 돌리는 겁니다. 처음에 다윗이 어슬렁거리다가 어떤 여인이 목욕했다는 그것부터 돌리는 게 아니고 거꾸로 돌리는 거예요. 솔로몬이 왜 생겼느냐 하는 거예요.

솔로몬이 왜 생겼느냐 하면 죽은 다윗 위에 생겼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다윗 안 죽었는데 하잖아요. 다윗의 자손이 죽었어요. 누가? 밧세바와 다윗의 얘가 죽었단 말이에요. 다윗과 밧세바가 합궁해서 낳은 얘가 있어요. 그 얘를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로 삼아서 성전 만들 게 한 게 아니고 그 얘를 죽이는 거예요. 그 얘를 죽여서 죽은 토대 위에 솔로몬이 나오게 해서, 솔로몬은 다윗의 얘가 죽지 아니하면 솔로몬은 안 생깁니다.

죽은 그걸 내용으로 해서 예수님 십자가를 내용으로 해야 부활이 돼요. 못 자국, 창 자국 없는 부활은 부활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본격적으로 하는 게 부활이에요. 십자가로 무효로 하는 게 부활이 아니고. 한국교회 목사들 다 그렇게 가르치잖아요. 십자가 지나갔고 부활만 남았다. 그게 아니고 십자가를 본격화시킨 게 부활이에요. 부활이 보조적, assistant 보조적이에요.

다윗의 자손 얘가 죽어야 죽은 바탕 위에 다윗의 자손이 나타나요. 갠 이름도 없어요. 그냥 다윗의 이름으로 죽은 거예요. 걔 살리려고 다윗이 얼마나 금식하고 일주일 동안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는 소식 듣고 입 싹 닦아버리죠. 이거는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이 스스로 이뤄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우리가 프리 자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 인생 자체가 없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이 내가 구성한 내 인생을 죽인다는 사실만 반복해서 경험할 뿐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밤에 잘 때 자는 척해도 안 부셔져요. 자는 척하면서 25분 만에 자버려요. 자게 되면 그다음부터 나는 없어졌어요. 그다음에 자면서 잔다, 잔다, 이건 안 자는 거예요. 그건 자려하면 멀었어요.

진짜 자버릴 때는 완전히 죽은 자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어린아이와 어른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잘 때는 똑같아요. 굳이 실험 안 해도 되겠지요. 애들 잘 때나 천하의 흉악범도 교도소에서 잠 잘 때는 어린아이 같아요. 왜 어린아이 같으냐? 어린아이 특징은 자기의식이 거세됐거든요. 휘발성, 자기의식이 잘 때는 날아갔어요.

요샌 휘발성을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유성 페인트 칠해서 냄새나서. 약간의 사건이 있었어요. 수성을 칠해야 되는데 유성을 칠해서 지금 집에 들어가질 못해요. 수요일에 약간 언급했거든요. 휘발성이 날아가야 돼요.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잠 잘 때 내 걱정이 휘발성으로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 오늘 염려는 요걸로 끝. 요걸로 끝났다. 내일 염려하지 마라. 내일은 내가 다른 상황 준비해줄 테니까. 또 너를 죽이는 상황 줄 테니까 오늘은 네 잠과 함께 고이 잠들어라. 현미처럼. 싱크대 앞에서 자빠져 죽어버린 현미처럼. 그냥 사람은 언제 그날 밤이 마지막 밤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권한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후손이 된 이유가 있어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이것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가는 것과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습니까? 못 들어갔지요. 모세가 죽어야 모세언약이 삽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이뤄져요. 죽지 않는 주님은 주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하나님이에요. 죽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인간은 개인으로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자기가 살아 있는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해서 또는 흥정, 거래를 시도해서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게 모든 종교와 모든 이방신들의, 인간이 창안한 신들의 특징이에요. 오, 거룩한 신이시여, 이렇게 나오지요. 오, 죽으신 신이시여, 이거 아니지요. 죽은 자에게는 말을 걸지 않아요, 인간들은. 죽은 자에게 말 겁니까? 신이 죽었는데 말 걸 수 있습니까? 말 걸지 못하도록 하나님 쪽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마태복음 19장인가 거기 보면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 가기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만큼 힘들다 이렇게 하니까 제자들 쪽에서 아예 단념을 했어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이게 바로 assistant 해야 돼요. 내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를 보조로 받쳐주면서 그런 고백을 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에요.

그걸 사도 바울 편지에서는 뭐냐 하면 사랑, 긍휼이라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랑을 받은 자만이 주를 사랑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에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 갑자기 저주가 튀어나와버려요. 사랑과 저주가 완전히 첨예하게 다 같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뭐냐?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돌보지 않는 것. 마치 뭐와 같이? 슬기로운 어른이 아니라 아무것도 어린아이와 같이. 그래서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과 연결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간주를 합니다. 간주를 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장소기 때문에 충분한 하나님의 자기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홀로 죽은 게 아니고. 아까 총신 맞은 이야기 몇 번 하는지 그 총 덩치에 맞은, 몸체에 맞은 거예요. 총알에 맞은 게 아니고.

그다음에 뭐가 어려우냐 하면 솔로몬이 성전을 만들었다는 게 어려워요. 솔로몬이 총을 만들 때 거기다가 총알을 집어넣은 거예요. 쉽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윗은 총 몸체한테 맞아 죽었는데 솔로몬은 거기다가 총알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이 말은 어떤 방법론을 또 구상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솔로몬과 다윗입니다. 성전은 다윗이 지었습니까, 솔로몬이 지었습니까? 하나둘셋.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하나둘셋. 짜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하나둘셋. 맞추는 것처럼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습니까, 다윗이 지었습니까? 하나둘셋, 다윗이 지은 거예요. 그래 정답은 다윗의 후손이 지었다 해야 돼요. 솔로몬이 지은 게 아니고 다윗의 후손이 지은 거예요. 그 다윗의 후손 그걸 뭐냐?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주일날 설교할 건데 특별히 여러분들에게 먼저 합니다. 로마서 1장을 이건 봐야 돼요. 로마서 1장 3절 그것 읽고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복음을 설명합니다. 복음이라 해놓고,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돼 있지요. 혈통에서 나셨는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이 혈통이 죽어야 돼요. 죽지 않는 혈통은 혈통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줘요.

그래서 수요일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제목이 [경로변경]이었어요. 혈통은 혈통인데 그냥 살아 있다, 살아 있다고 가는 것 말고 살아 있다가 중간에 뭐가 되느냐? 끊어져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혈통, 그 혈통으로 오신 분이 제대로 된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면 다윗 그다음에 육체적 혈통 있잖아요. 솔로몬, 그다음에 르호보암 이건 뭐냐? 비유지요. 비유고 모형이고 그림자지요. 허구죠. 허상이죠. 마치 오늘날 우리 몸처럼.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금 12분 뒤에 죽는다고 봅시다. 12분 전에 여러분 살아 있어요. 그러면 8분 전에 살아 있어요. 1분 전에 살아 있습니다. 자, 카운트 들어갑니다. 의사가 5, 4, 3, 2, 1. 1초 전에 살아 있어요. 1초 후에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흙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선 혼이 떠나니 흙이 된 거예요. 이사야 2장 22절, 호흡이 떠나면 흙이 돼요. 이거는 흙으로 났으니 흙으로 간 거예요.

그러면 필름을 거꾸로 돌려봅니다. 원래 흙인데 주님께서 비유로 사용하기 위해서 모형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꾸준히 계시를 가지고 여러분을 천국까지 끌고 온 거예요. 진짜 몸은 아담의 흙의 몸이 아닙니다. 진짜 몸은 하늘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된 몸이 우리 몸이에요.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했습니다. 제가 지어낸 것 같으면 진짜 안 되는데 이게 고맙게도 제가 지어낸 게 아니고 성경에 있으니까 감사할 뿐이죠. 우리는 이미 죽었고, 죽어갈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살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살았고. 이쪽은 죽었고 이쪽은 살았고. 우리는 뭐냐? 왜 죽었는데 있느냐? 비유라니까요, 비유. 모형이에요. 모형 된 성전.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입장 말고 개인주의 입장 말고 주님 입장에서 우리를 다시 한 번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받아주는 것은 오직 성령이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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