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21강 (이 근호목사, 2007년 6월 8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5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지난시간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둘 중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다고 했습니다. 전 세계가 여자에 의해서 수박이 쪼개지듯이 쫙, 갈라지는데 이쪽도 여자가 있고, 다른 쪽도 여자가 있습니다. 이쪽여자는 하늘에 있는 여자이고, 이쪽 여자는 땅에 있는 여자입니다.
땅에 있는 여자 쪽에 서겠습니까, 하늘에 있는 여자 쪽에 서겠습니까? 어느 쪽에 서겠습니까? 둘 중의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 삼은 없고, 양쪽 다 하는 것도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쪽에서 골라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여자에 따라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냐, 땅에 속한 사람이냐, 이렇게 둘로 나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두 명이 있지요. 이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쪽 여자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고, 이쪽 여자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여자의 약속을 받는 사람들이고,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여자의 약속을 받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여기 있는 여자가 자장면을 주겠다,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자장면을 먹어야 됩니다.
다른 쪽 편에서 짬뽕을 먹는다면, 그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짬뽕을 먹어야 됩니다. 양쪽이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 여기 다 모이라고 하면,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여기에 모이겠지요. 그리고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두 번째 여자 쪽으로 다 모이겠지요.
이렇게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어떤 아이가, 나는 우동을 먹을래, 이렇게 한다면 자장면 먹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너, 나가, 여기는 자장면밖에 없어, 하고 내쫒겠지요.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A라는 남자, B라는 여자, C라는 아이,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다 왜 모였습니까? 자장면 먹기 위해서 다 모였지요.
그러면 자장면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서로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키, 나이등등 다 차이 나는데 오로지 자장면 먹을 사람, 이 소리를 듣고,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키가 작든 크든, 공부를 못하든 잘하든 관계없이 자장면을 먹으려고 우르르 쫒아 오겠지요. 반대편에는 짬뽕을 먹기 위한 사람들은, 그 형편 처지와 관계없이 짬뽕 먹기 위해서 다 모이겠지요.
이렇게 세상은 두 종류의 세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는, 목사님이나 그밖에 분들에게, 나는, 나는, 이렇게 자꾸 개인을 내세우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저애보다 더 낫지요? 이런 소리 하면 안돼요. 나는 저애보다 더 똑똑하죠? 이런 것을 주장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고, 자장면 소리를 듣고 그게 좋아서 모였기 때문에 우리를 묶어 주는 것은 자장면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장면 먹으로 왔다가, 나는 자장면 먹기 싫다, 나는 다른 것 먹을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고, 너는 나가! 라고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장면 말고 다른 것을 주신다고 한다면 잘못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중의 하나만 먹도록, 자장면 먹든지, 짬뽕을 먹든지 되도록 처음부터 세상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나는 기도도 오래한다, 나는 성경도 많이 봤다, 헌금도 많이 한다, 전도도 많이 한다, 봉사도 많이 한다, 이런 것 자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시는 대로 먹는 것이지, 자기 재주를 내놓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 돌아가시고 난 처음의 교회를 초대교회라고 하는데,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인사를 했습니다. 자장면, 자장면, 충성, 자장면, 이렇게 했습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주께서 오십니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교회 보면, 자장면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려고 왔기 때문에, 네가(목사님) 먼저 나에게 인사해야지. 나 이교회 아니어도 갈 교회 많다. 날 알아달란 말이야. 난 믿음이 너무 좋단 말이야. 우리 애는 공부도 잘해. 이런 식으로 으스대고, 이런 것을 자꾸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이야기한 것 가지고, 모여라 하면 모이는 겁니다.
여기 의존교회 어린이들이 있는데, 만약에 천국 갈 사람은 누구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남철을 들고, 이게 하늘의 지남철인데 붙을 사람! 그러면서 죽 다니다가 쫙 붙으면, ‘아, 너는 천국 가는 사람’, 안 붙고 그냥 있는 사람들은 ‘천국 못가는 사람’, 그렇게 갈라지는 겁니다. 저는 공부를 잘했으니까 보내주세요. 안보내줍니다.
하나님께서 자석을 들고 다니듯이 죽 다니면, 종이는 지남철에 안 붙지요? 쇠붙이만 붙지요. 종이가 건방지게 “저도 천당 가고 싶어요” 하면 “너는 붙지도 않으면서 무슨 소리 하는거야, 저리가! 안 붙는 것은 할 수 없어. 너는 지옥가야 돼” 하고 “천국 갈사람 누구지?” 할 때 천국 가는 사람에 한해서만 붙는 겁니다.
지금까지 잘 이해되었다고 치고, 그러면 짬뽕에서 자장면으로 옮겨갈 수는 없을까? 옮겨 갈수는 없어요. 이 사람은 짬뽕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아무리 짬뽕을 싫어한다고 말해도, 마음속에 ‘짬뽕을 나는 좋아한다. 좋아한다’가 계속 나오기 때문에, 이 사람이 아무리 자장면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나는 싫어. 나는 싫어.’ 이것이 나오기 때문에 자장면을 안 좋아하는 것이 들통 나서 자장면 쪽으로 옮겨갈 수 없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보지 않고 약속을 가지고 그 사람을 보신다. 개인의 믿음, 개인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편은 누구야?’하고 하늘나라 편을 모으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편이 된 사람들은 서로 싸워야 되겠어요, 안 싸워야 되겠어요? 당연히 천국 갈 사람끼리는 안 싸워야 되겠지요.
그리고 천국 갈사람 같으면 교회를 싫어해야 합니까, 좋아해야 합니까?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싫어. 나는 집에서 나 혼자 천국 갈 거야.’ 이런 것이 됩니까, 안됩니까? 그것은 좀 이상한 사람이죠. ‘난 자장면이 싫어’와 똑같은 것밖에 안됩니다. 자장면 좋아하는 사람은 “자장면!”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자장면!” 하면서 같이 모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장면과 짬뽕이 쫙! 하고 수박이 두 조각나듯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갈라내시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이렇게 공부를 했는데 다시 한 번 신신당부를 합니다. “나는 요!”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한테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개인은 보지 않습니다. “저 천국 보내주세요.” 그것도 안 통합니다. “나는 … .”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네가 센가 내가 센가 한번 붙어볼까?” 이런 것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체로 다루고 개인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수학여행 가는데, “제주도로 갈사람 여기 모이고, 하와이로 갈사람 저기 모여라.” 그런데 어떤 아이가 “저는 백두산에 가고 싶은데요”하면, 그런 것은 안 통합니다. ‘제주도냐 하와이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미 정해졌습니다. 천국 갈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가고, 안갈 사람은 약속 말고 다른 것을 믿기 때문에, 땅의 것을 믿기 때문에 그들은 못가는 겁니다.
한가지 만 더 이야기 합니다. 짬뽕 쪽 사람들, 즉 이 땅의 여자 쪽 사람들은 무엇을 좋아할까요? 그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26,27 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하면, 내 것이 있다는 것이 좋아요. ‘내 것이 있다.’ 내 지우개, 내 컴퓨터, 내 시계, 내 휴대폰, 내 것이 있다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자장면쪽(천국 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즐거워하는가? 내 것이 없다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내 직장, 내 사업체, 내 여자, 내 남자, 내 엄마, 내 아빠, 내 동생, 이런 것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나도 없다,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4장 27절에 “잉태치 못한 자여”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라.”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기분이 그렇게 즐거운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 것이 없으면 기분이 좋아요, 나빠요? 이래놓고 질문하니까 답변하기 참 곤란하지요? 여러분의 시계는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인데, 만약에 어떤 친구가 여러분의 것을 빼앗아 간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기분이 나쁩니다. “왜 내 것을 가져가? 기분 나빠”라고 하잖아요.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기분이 나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특징(개성)이 있느냐?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홀가분하고 기분 좋다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 기도하는데, 한쪽은 “하나님! 저에게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라고 기도하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제가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기뻐하겠습니까?
이 질문도 참 무지 어렵고 곤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믿음이 있는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 믿음이 없는 사람을 좋아해요. 내 것(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 때문에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약속은 나에게는 없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내 안에는 없고, 내 밖에 있는 약속,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워하는 것이고, 지옥 가는 사람은, 무조건 내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을 가지고 나를 천국에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4:27에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라고 즐거워하는 사람, 좀 정신 이상자 같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저보고 미쳤대요. 미쳤다는 말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복음에 미쳤답니다. 세상에 이것이 고린도 후서 5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도바울보고 복음에 미친 자라고 했습니다(고후 5:13-15 ※행 26:24-29).
아무나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너는 왜 십자가 복음밖에 모르나? 그러니 너는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미친 사람은 뭐냐 하면, 십자가 복음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기도, 내 것 되는 기도, 내 것 되는 전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헌금, 내 것으로 하는 봉사,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 그런 것이 줄줄이 있어야만 그것 가지고 천국에 들어 갈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것을 보지를 않습니다. 왜? 이미 확정된 운명대로 갈 뿐이지 개인적인 자질과 능력이 얼마나 우수하고 뛰어난가? 그런 것을 일체 보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능력으로 와도 그 사람은 교회의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란 자기처럼 잘난 사람끼리 경쟁하기 위한 곳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왔어요?”
“주님이 불러서 왔죠.”
“나하고 같네요. 나도 주님이 불러서 왔어요.”
그런 사람들은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왔어?”
“나는 버스 타고 왔어”
이런 식으로 전부 다 자기 자랑하는 데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내 것이 없는데, 위에서 소집해서 불러준 겁니다. 여기 남자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나중에 군대에 갑니다. 군대에 소집되면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제주도, 전국 8도에서 얼굴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다 모입니다. 누가 소집했습니까? 국가(국방부)에서 소집했습니다. 이렇게 소집하면 군에 가기 싫어도 다 모여야 합니다.
이렇게 국가에서 강제로 소집하면, 전에 친했는지, 아는 사이였는지 그런 것을 물어 볼 필요 없이 강제로 소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소집해서 교회 만들었습니다. 단 소집당했다는 그것만 알고 소집장만 들고. 예수님이 불러서 여기 왔다는 그것만 있지, 자기가 자기 소망대로 오지는 않아요. 그런데 가짜 교회들은, 지옥 갈 교회들은 내 것을 가지고 발휘해서 천국에 가려고 자꾸 내 것을 내놓습니다.
지옥 갈 사람들, 땅의 여인 쪽 사람들은 ‘내 것이 있다’는 그것이 즐겁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즐거워요. 집이 세 채가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땅이 15만평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애들이 세 명이 있어도 내 것이 아니고,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값으로 산 주의 것이라는 것, 내 것은 일체 무장해제 당한 상태로 내 것은 일체 없어요.
일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사람을 편하게 만듭니다. 일체 없다는 그것을 가지고, 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것을 가지고 (오늘 강의하려는 주제인데) ‘자유’라고 합니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자유입니다. 만약에 내 것이 있다면 사람이 자유롭겠어요, 자유롭지 않겠습니까? 안 자유롭지요. 내 것이 있다면. 참 성경이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것이 있는 데서부터, 네 것은 일체 없었어, 라는 쪽으로 빼내어 주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자식이 없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말이지요. 왜? 없어도 되니까, 내 것이 없어도 되니까. 구원받는 것은 내 것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예수님의 것)로 구원받기 때문에 구태여 따로 내 것을 챙길 이유가 없다니까요.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초등학교라 하지 않고 국민학교라고 했습니다. 대충 기억에 국민학교 1학년 7반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한반이 60명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똑같은 필통을 다 나눠 주었습니다. 선생님이 60개를 가져와야 할 것을 59개를 가져왔어요. 죽 나눠주는데, 제가 앉은 자리가 제일 끝자리였습니다. 죽 나눠주는데 저에게까지 오더니 “얘야! 네 것은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문방구에서 네 것은 따로 사서 주마” 해서, 애들 것보다 더 좋은 필통을 사서 저에게 줬어요. 제가 기분 좋았겠어요, 기분이 나빴겠어요? 막 울었습니다. 똑같은 것을 주지 않고 왜 나만 다른 것을 주느냐, 해서 그 필통을 집어 던지면서 막 울었어요. 지금 실험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20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는데, 19개의 똑같은 셔츠를 나눠주고, 한명에게만 색다른 것을 주면, 그 애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나쁘겠습니까?
기분이 나쁠 겁니다. 왜 똑같은 것을 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네 것도 있잖아”라고 하면 “내 것은 싫어, 나도 똑같은 것을 달라”고 하겠지요. 현재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일체 거부하시고 예수님의 공로로 생긴 것을 가지고, 천국 가는 사람은 똑같은 예복, 똑같은 것을 나눠줍니다. 나눠주게 되면 천국 가는 사람끼리는 서로 서로 잘났다, 못났다는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할 수가 없겠습니까?
저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필통을 가지고, “내 필통이 더 좋다. 더 반짝인다”하고 자랑하겠어요, 못하겠어요? 똑같은 필통이기에 “너도 가졌나? 나도 가졌네. 와! 우리는 둘 다 선생님의 사랑을 받았구나”하고 서로 얼싸안고 좋아 하겠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차이나는 것들을 가지고 경쟁 붙여서 승리하는 자를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더 낫다, 못하다는 말을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것을 똑같이 나누어 줌으로써 예수님의 것이 있는 사람만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그러면 개인은 어떻게 됩니까? 개인이라는 것은 그 앞에서 없어지는 거죠. 사람이 내 것이 있어버리면 저 사람이 가진 것과 내 것을 서로 비교하게 되는데, 모두 다 자기 것을 다 빼앗겨서 자기 것이 없어요. 모두 다 자기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이라고 서로 내밀 수 있는 비교할 거리도 없어요. 여기 계신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가, 아니면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가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믿음입니까?
제가 방금 질문한 것,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 겁니까,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이 나은 겁니까’라고 한다면 이미 김 명현 목사님의 믿음이 가짜고, 이 근호 목사님의 믿음 자체가 가짜입니다. 왜? 그것은 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즐거워하는 반면에,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즐거워하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내 것’이 있다고 할 때 이 ‘내 것’은 어디서부터 만들어졌을까요? 이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합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들어 냅니다. ‘육’이란 육체, 신체를 말합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만들어서 ‘내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겠다고 오기를 부려요.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안 넣어 줍니다.
육을 가지고 ‘내 것’을 어떻게 만듭니까? 여기에 율법(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내 것’이 있다고 만들어요. 이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율법에 속한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람은 ‘내 것’(여자로 말하면 내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내가 잉태치 못했기에 내 자식이 없습니다.
그 말은, ‘내가 육을 가지고 율법을 지켜서 내 것을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들 수 없으니까 뭐가 됩니까? 무능한 자가 되는데, 지옥 가는 사람은 유능한 자가 됩니다. 무능한자, 이 사람을 두고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보고 “너는 구원 받았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무능한(너의 구원에) 자였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성경공부해도 그것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는 무능한 자였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무능한 자였다”는 말은 “너는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어”라는 뜻입니다. 유능한 사람, 이 사람은 자기공로 자기 육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자기 육을 포기를 못합니다. ‘나는 율법을 가지고 육으로 지켜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내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아니고 내가 노력했기에 내 것이라고 인정할만한 내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사람들은 자기 것이 따로 없습니다. 왜? 자기는 하나님의 법(율법)을 통해서 무엇인줄을 알았어요? 무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 것은 없고 하나도 없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숙제를 내어 주면서 “두 시간 뒤에 올 테니까 숙제를 해놓아라”고 했어요.
“1번, 숙제 했나?”
“예 썰!”
“2번, 숙제했나?”
“예 썰!”
“너는 했어, 안했어?”
“못했습니다.”
“왜?”
“숙제 할 줄 몰라요.”
“이중에 천국 갈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숙제가 안 되는데 저마다 숙제 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 겁니다. 십일조를 하려면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십일조 되는데(마 23:23 ; 눅 11:42)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tithe mint and dill and cummin, and have neglected the weightier provisions of the law: justice and mercy and faithfulness; but these are the things you should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사람들은 수입의 10%를 내면 그것으로 십일조를 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숙제를 내 주신 예수님이 와서 보니까 숙제를 제대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데 안식일을 지키는가를 보니까, 자기들은 지켰다고 하는데 보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부자청년인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쳤습니다. “네 것을 다 버리고(이러면 내 것이 없게 되죠) 나를 좆아라”하니까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마 19:16-22)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지켰다는 십일조, 십계명 다 거짓이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들은 “나는 십일조, 구제, 금식 다 했습니다”(눅 18:12)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 집어 치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세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보니 저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죄인 맞습니다”(눅 18:13)할때 예수님이 “네가 바로 의인이다”(눅 18:14)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노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 아들은 가출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 탕자입니다. 또 한 아들은 가출도 안하고 충실하고 아버지를 도와서 일했습니다. 둘 중에 어느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했을까요? 탕자가 아버지를 흐뭇하게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탕자는 무능하기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집에 있던 아들은 삐져서 “나는 가출도 안하고, 충성을 다했는데 …”라고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맘을 네가 그렇게 모르는 구나.” 그 탕자는 아버지가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은혜를 주면 그 은혜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소를 잡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탕자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옷도 나는 무능한데 아버지가 그냥 은혜로 주셨고, 이 가락지도 은혜로 주신 가락지다.’
큰아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역시 나는 이런 옷을 받을만해.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속 썩인 일이 없거든. 이 가락지 받는 것도 너무 늦었지. 사실은 진즉에 받아야 할 가락지를 이제야 받는구나.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지’라고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 둘중에 누구를 쥐어 박겠습니까? “이게 어디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과 은혜를 자기 공로로 다 바꾸어 놓는가! 엉망이구만!”하고 나무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준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지키지도 못하면서 자꾸 내 것,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것을 박살내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사람들은 오히려 율법을(자기를 부수는) 가지고, 오히려 자기가 지켰다고 으시대는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임금님이 자기 신하가운데 못된 신하가 있어서 사약을 내려 줬습니다. 사약을 내려 주니까 이 바보 같은 신하가 하는 말이, ‘임금님이 나에게 보약을 다려 주셨다’고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임금님이 나를 인정해서 내려주신 보약이기에 이것은 함부로 먹을 수가 없다’고 선반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나중에 임금님의 관리가 와서 “이보게! 임금님이 준 사약을 마셨는가?” 하니까, “너무 귀해서 아까워서 모셔두고 안마셨다”는 겁니다. 임금님이 노해서 “에이 무엄한 놈! 더 독한 약을 아예 양푼에 담아서 먹여라. 이 약은 네가 폼을 잡으라고 준 약이 아니고, 먹고 죽으라고 준 약인데 세상에 ‘임금님이 나를 사랑해서 줬다고’ 한다고? 먹고 죽어라!”
그래서 그 신하는 하사받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제가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죽으라고 주는 하나님의 사약입니다. 그러면 이 약은 오늘날 어떤 약으로 오느냐? 그림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유능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여기 있는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를 뭐로 봅니까? 무능한 사람,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지, 내 행함, 내 공로로 구원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 것이라고는 없고 몽땅 주님께서 다 빼앗아 가는 것을 아주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착각을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율법이 들어오면 육(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평소에 자기를 돋보이고 싶고 으시대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율법을 주니까 그 율법을 자기가 지켰다고 아주 좋아들 했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립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옛날에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주니까 그들이 매우 자랑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십자가를 주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율법을 지키다가 이제는 십자가까지 주니까 이제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을 하겠지요. 여기 비타 500을 주니까 맛있다고 하면서 잘 먹어요. 그런데 “이것은 십자가인데 한번 드시겠습니까”라고 줘서 “십자가를 먹어 보니 어떤가?”라고 하니까, “맛있지요!” 뭐든지 주는대로 먹고 맛있다는 식이어서 괴물 같아요.
다 내 것을 만들어요. 말씀을 주면 말씀대로 잘 지키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수도 잘 믿고,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면 십자가도 잘 믿고, 전부 다 잘 믿어요. 저는 그것을 쓰레기통이라고 합니다. 휴지통에 휴지 들어가니까 골인, 공들어가니까 그것도 골인, 이것 저것 많이 들어갑니다. 다 들어가니까 하나님께서 여기에 폭탄을 집어넣었어요. 폭탄이 들어가니까 슛 골인, 합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쓰레기통이 폭발해서 다 날아가 버립니다.
십자가는 율법 지키듯이 그렇게 믿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너는 이제 죽었어!” 하고 폭탄을 터뜨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받은 순간 펑, 하고 폭탄이 터지면서 우리는 죽습니다. 그렇게 터지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십일조면 십일조, 안식일이면 안식일, 목사님이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잘하고, 율법대로 다 잘했는데 거기에 십자가가 들어오니까 펑, 하고 터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었습니까? 율법대로 잘 지키는 우리가 터져서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처음부터 율법은 우리보고 ‘지키면 산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은 인간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주니까 넙죽넙죽 잘 받아먹네. 에라, 이것도 한번 받아먹어라. 십자가를 집어넣으니까 펑, 터져버립니다.
사도바울이란 사람이 나는 율법에 대해서는 흠이 없이 완벽하다고 으시대던 사람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믿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펑, 하고 터졌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지금까지 안 것은 다 엉터리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는 것을 가지고 내가 믿고, 내가 지키고 내가 잘해서 구원 되는 줄 알고 오해를 했다.”(빌 3:4-8)
약간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상이고, 예수 믿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이 되어서 서로 서로 공격하지 않고 좋게 지내는 하나님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 십자가에 함께 죽이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을 예수님이 죽이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던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진짜 하나님은 너희들 손에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너희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다”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당신이 누굽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 예수다.”
그냥 예수가 아니고, 네가 지금 핍박하는 예수입니다. “참 힘들겠다. 나를 핍박한다고 네가 실컷 고생하고 있구나.” 예수님이 그 당시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열심 냈던 사도바울에게 한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뭐했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계속 미워하고 공격하고 핍박하는 가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도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열심히 믿는 그것으로 인해서 누가 괴롭게 되었습니까? 진짜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괴롭게 되었지요. 그때부터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고,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나타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하나님은 다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도바울은 자기가 경험한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그 가짜 하나님을 부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이야기가 십자가로 가짜하나님을 부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나온 하나님입니까?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님입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님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부숨으로써 비로소 우상은 깨어지고 진짜 참된 하나님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우리를(내 것) 죽이는 하나님이고, 가짜 하나님(우상)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내 것을 살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한테 당하는 사람은 무엇이 기분이 좋습니까? 전에는 내 것이 있었는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일체 내 것이 없다는 것이 기분 무지 좋은 겁니다.
전에는 “야, 너 쌍커플이 없는데 수술해라.” 이렇게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내 얼굴이 내 얼굴(짝)이 아니야”라고 기분 좋아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채 하나님을 믿을때는,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쌍커플을 주옵소서”라고 했는데,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원하는 혜택을 입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내 것이 있어야 혜택이고 뭐고 있지요 내 것이 깨어진 마당에 뭐가 있습니까?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 날아갔는지 기분 좋은 겁니다.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니까 그것처럼 편한 게 어디 있습니까? 내 다리도 내 다리가 아니고, 내 손도 내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법을 지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법이라는 것은 누가 지켜야 합니까? 내가 지켜야 되는데 내가 없는데 무슨 법을 지킵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육에 속한 사람, 그 반대편에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법을 지키고 영에 속한 사람은 누가 법을 지킵니까? 성령이 법을 지키기 때문에 이 사람은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고 어디에? 성령에게 소속된 사람, 그러면 법은 누가 지킵니까? 성령이 지켜서 예수님의 공로로 그냥 우리에게 넣어 주지요.
성령이 오실 때는 어떻게 오십니까?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령이 와야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닫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는데 그 “깊은 것”이 뭐냐?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만 깨닫습니다. ‘아하! 내가 못한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구나. 그러니까 우리는 내것이 없는데, 주님의 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니까 우리는 졸지에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된다’는 겁니다. 가만있는데 의인이 되었습니다. 학교도 안가고 가만있는데 천사가 나풀나풀 날아와서,
“애야! 너 이름이 뭐지?”
“철이에요.”
“철이 너 의인이야.”
“저는 오늘 학교도 안가고 집에 있었는데요.”
“학교 가든, 안가든 관계없이 너는 의인이 되었어. 하나님이 너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어.”
이렇게 될 때 그 아이가 밖에 나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보고 의인이래.”
“꼬마가 무슨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의인이야?”
“나는 꼬마고 착한일 한적 없어.”
“착한일 한 적도 없는 네가 어떻게 의인되었어?”
“예수님의 공로로 의인 되었대”라고 자랑하게 될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이미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다시 한 번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속한!” 육이든 영이든 “속한” 사람이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 성령에 속한 사람은 영입니다. 내가 성령을 쥐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잠식하고 덮어버린 사람, 성령에 소속된 사람. 아까 논산훈련소(군대)에서 누가 소집한다고 했습니까? 나라에서 소집합니다.
우리는 누가 소집합니까? 성령이 소집합니다. 성령이 소집해서 뭐라고 합니까?
“천당 왜 가?”
“예수님 공로 때문에 갑니다.”
“너는 왜 가?”
“예수님 공로 때문입니다.”
“너는?”
“예수님 공로죠”
전부 다 한결같이 누구 공로로? 예수님의 공로로!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 개인은 가라! 오직 집단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몸밖에 없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의 결론입니다. 잠시 쉬고 다음 시간에 5장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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