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0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49

갈라디아서 제 20강 (이 근호목사, 2007년 5월 11일(2), 서울의존교회)

지난 시간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 믿으라’ 할 때 ‘믿습니다’ 하면 되는데, 왜 거기에 “남편이 있는 자녀, 남편 없이 되어진 자녀, 핍박당한다, 내어쫒으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 믿는 그 사람은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앞에 세워놓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오늘은 어떠셨는지요?”라고 시어머니나 시아버지 섬기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영으로 아예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이 세상에서 당했던 것과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니까 그 사람만이 진짜 성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하나님 여기 계시고, 예수님 여기 계시고, 모든 인간이 여기 있습니다. “자! 다들 예수 믿어라. 믿으면 구원된다.” 이렇게 예수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야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꼭 집어서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꼭 집어서 지적된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사라고, 이삭입니다. 그리고 진짜 이런 사람만이 예수믿는 사람이라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따로 정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쫒겨난 이스마엘이고, 하갈입니다.

왜 이렇게 딱 정해 주는가 하면, 그것조차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약속된 사람만 믿어진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제가 믿은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으로 믿게 되었어요”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진짜로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들어있지 않고, 약속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든 뭘 하든 간에 자신이 애를 써서 다가서야 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약속 없이 태어난 자식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이스마엘이 엉터리라서 안돼!”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약속 없이 자기 육체대로 믿는 사람은 엉터리믿음이라서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은 4:21에 보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나름대로 할수 있다고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율법(법)지키기’ 입니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도 믿고 구원도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사고방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지 약속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31에 보면,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자유하면 자식도 자유 합니다.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자유 하는 자식이 태어난다고 합니다. 자유라는 말은 어디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법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 법에 저촉 받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그것이 약속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뭘 하든지 법(규칙)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목사님! 성경도 법인데 법대로 지켜야 구원받지 어떻게 법 없이 구원됩니까?”라고 반문하신다면 그 사람은 “남편이 있어야 자식이 있지 남편없이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라는 상식선에서 자녀를 생각하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상식을 진리로 믿기에 무엇이 안 되느냐 하면, ‘남편 없는 자식이 많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남편 없이 무슨 자식이 있습니까?

“남편이 없어도 약속이 있잖아요.”
“세상에 남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남편 아내가 결합해서 자식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냥 남편 없이 자식이 태어납니까? 그런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없는 사람을 새로 만들어서 그 사람들만 천국에 보내는 그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법이 있었지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법 없이 하늘에서 오신 분의 영이 임한 사람은 법과 상관없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 모아서 천국에 보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낳은 자녀입니다”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9)라고 한 겁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종교(열심히 해야 구원 받는다)를 완전히 다 깨버립니다. 성경을 덮은 채 들었다면 ‘저 목사가 미쳤지’라고 하지만, 저는 저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보고 이 성경의 본문을 해석해 보라고 합니다. 철학자여! 칸트여! 헤겔이여! 철학을 이야기하지 말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더 많다”를 해석해 보라는 겁니다.

해석 못합니다. “철학자여!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기고 그들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라고 한다면 철학자들(법으로 난 자)은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에 악마가 어디 있는데? 다 지어낸 이야기지.” 그렇게 이야기 할겁니다. 제가 ‘666’(계 13:18)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666’은 무엇인가? 666은 짐승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666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호기심은 참 많은데 짐승이 있다는 것은 거부하거든요.

왜 거부하는가? 짐승이 실제로 이 땅에 있다면 평소에 짐승하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의 생활이 마귀(짐승)과 상관없다고 여기고 살아 놓고 666이 뭔지는 무지 궁금해 하는 거예요. 실제 생활은 악마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면서 성경에 666이 나오니까 ‘그게 바코드냐, 뭐냐?’고 궁금해 죽겠다는 식으로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게 상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면 “믿지 뭐. 믿습니다.” 그걸로 끝나요. “그런데 예수 믿는 믿음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 되고 법으로는 안 됩니다” 하면, “그런 게 어디 있어? 내가 믿을 때 나의 의지로 ‘믿습니다’ 해서 믿었는데. 그리고 믿으면 법을 지켜야지.” 이렇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같은 아브라함의 자식으로서 한집안에 같이 있었으면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입니다. 똑같은 현상이 야곱과 에서간 에도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제 이야기가 듣기 싫다면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안들은 것으로 해야 합니다. “목사님! 야곱과 에서의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요. 그냥 ‘예수 믿으라’고 해주면 저는 예수 믿습니다. 다른 것은 다 안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자꾸 우기시는데 에서와 야곱이 있다는 말은 그 두 사람 다 한 부모에게서 나왔어요. 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은 남편 없이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누구입니까? 에서가 아니고 야곱입니다. 목사가 맘대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놓고는 미움 받는 자녀와 사랑받는 자녀를 한집안에 딱 붙여 놨어요. 그것도 쌍둥이로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집안에 혹시 쌍둥이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 집안에 한 자녀는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한쪽은 미움 받게 되어 있구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러면 얼마나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일부러 그렇게 하십니까? 같은 이삭집안인데 둘 다 함께 천당 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보기도 좋고 안 싸워도 좋고요.

왜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인간과 천당 갈 인간을 한 집안에 붙여 놓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는 안 믿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예수라는 겁니다. 십자가는 인간 힘으로는 절대로 안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유아세례 받고, 신앙교육 받으면서 자라고, 학교도 미션스쿨 다니고 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십자가는 안 믿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짜 믿어진다면 그는 모든 법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 양심(법)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양심이 있다는 말은 우리 속에 율법이 이미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신의 눈치를 살핍니다. ‘하나님! 제가 잘했습니까? 아니면 못했습니까?’ 이렇게 눈치를 살핍니다. 행동 하나 하나마다 다 눈치를 살펴요. 매일 반성하죠. 그게 우리의 상식이고, 버릇이고, 관행입니다.

그런데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소급해서 이야기합니다. “지금 내가 특별히 뭘 더 잘못한 것이 아니고 처음 태어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아예 자기 자신을 통째로 법에서부터 벗어 버립니다. “잘했건 못했건 상관없이 이미 뿌리부터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다. 상한심령이다. 우슬초로, 주께서 죄 씻는 그 장치로 인하여 나는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진짜 통째로 ‘나는 무엇을 해도 죄’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신이 임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것은 잘했는데 이것은 못했고 이것은 못했지만 저것은 잘했다’고 이렇게 꼭 따집니다. 우리 안에 뭐가 있기에 그렇습니까? 양심이라는 법(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이 내 허락도 없이 마구 쑤셔대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고 삽니다. 사람은 14초마다 한번씩 거짓말 한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또 종류도 다양합니다. 과장되게 말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말을 해야 하는데 안하는 것도 포함해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우리는 매일같이 부지런히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해놓고 거짓말 했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킵니까? 우리 속에 법(양심)이 있어서 거짓말 한 것을 다 집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양심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합니다. ‘양심아! 눈 좀 감아줘. 이것은 돈 벌기 위해서 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도 알지? 나없으면 너도 없다는 것. 그 대신 이번 주에 2천원씩 하던 헌금, 3천원으로 할게. 이제 됐지? 그것으로 그만 넘어가자.’ 이러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매일 흥정합니다.

“그럼, 목사님! 흥정한 그것이 나쁜 것 아닙니까?” 흥정해서 나쁜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나빴어요. 흥정한다고 해서 더 나쁜 사람 되고 흥정 안한다고 해서 덜 나쁜 사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은 아예 소급해서 통째로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전부다 죄가 된다는 것을 일괄적으로 다 알아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며 그 상한심령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약속된 약속의 위대성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줄인다면 “나는 너를 가지고 내 약속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너를 구원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약속중심에 예수님이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죽으심을 믿게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죽으심 자체가 구원받는 유일한 근거인 것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9장에 나옵니다. 한 소경이 지나가니까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자기 죄나 부모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영광을 위함이다”고 합니다. 왜 그런 관점, 그런 안목을 우리는 수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볼 줄 모르느냐 이말 입니다.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말입니다. 법대로 양심대로 한다고.

지금 우리 주인이 누구입니까? 성령께서 계시고 예수님이 주인인데, 마치 내가 내 주인인양 왜 그리 철없고 무모한 객기와 오기를 부리십니까?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저 어린애가 주스를 마시는데 저는 주께서 마시게 하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물을 마시면서 뭘 느끼겠어요. ‘물을 안 흘리고 마셔야 돼. 잘 마셔야 돼. 한꺼번에 잘 마셔야 돼’ 라는 생각들을 할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애 가운데 양심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양심껏 맘대로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과는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자가 되는 겁니다. 자유자라고 해서 양심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쑤셔 댑니다.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고 매일 쑤셔 댑니다.

다음 주에 책이 한권 나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이근호저. 대장간. 2007) 그 책에 방금 한 이야기들이 잘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이 한마디에 이것이 무용지물이 되도록 만드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이 세상에서 앞장세웁니다.

그러니까 누가 위대합니까? 죄를 안 지으려고 조심하는 우리가 위대한 것이 아니고, 이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대함이 부각되겠지요. 저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 이것을 누가 믿을 것이냐’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자유입니다. 왜? 법에는 해당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짓을 합니까? 법(양심)대로 하는 짓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운명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보고 마음껏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마음껏 하는 것이 되는가,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 속에 법이 있고, 그래서 마음껏 하고 나서는 후회를 합니다. “주여!” (내 양심에 어긋났다고) 울고불고 난리 납니다. 주님께서 “네 마음대로 해봐라. 네 마음대로 찢고 또 찢고 뭘 하든 맘대로 해봐라.” 아무리 해도 주님의 마음에 변함이 없습니다.

욥이 울고불고 난리 났어요. “주여! 이럴 바에야 뭐하려고 태어나게 했습니까? 차라리 모친의 태중에서 죽는 것이 났지. 왜 햇빛을 보게 했습니까?”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욥 3:1-16)

주님께서는 가만 계십니다. “그래. 계속 해봐라.” 결국 욥에게 원하는 것은, “네 여호와가 누구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관심사가 ‘나’ 자신이 아니라,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시길래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합니까? 누구시길래!” 여자의 후손(약속의 자녀)이기 때문에 상식으로 통하는 세계가 아니라 상식밖의 세계로 구원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까짓거 믿어주지.’ 그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나도 놀라는 겁니다. ‘내가 그걸 믿다니! 나는 내 양심을 알고, 나는 내 양심대로 살려고 하고, 법을 준수하는 그런 인간밖에 안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초월하는 그것을 내가 수용할 수 있다니!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기적이다’

그러면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뭡니까? ‘육체로 난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뱀의 후손, 다시 말해서 악마의 행세를 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약속대로 됩니다. 약속대로 된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으로 살든지 아니면 뱀의 후손으로 삽니다. 제 삼의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살래? 뱀의 후손으로 살래?’ 둘 중의 하나뿐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인간들은 악마의 행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마의 행세란 뭐냐?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예수님에게서 욕을 얻어먹은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똑같습니다. 자기 손에 있는 법을 가지고 법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복음을 공격하는 식으로 행동을 합니다. 모든 육체로 난 사람은 공식이 있습니다. 악마의 행세를 하는데, 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예수의 복음이 소용없다고 외치는 사람, 그 모든 것이 불신자들의 공통점입니다.

불신자들은 갈라디아서에 있는 대로 시내산, 율법으로 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을 주신 것은 ‘네가 악마에 속했다. 혹은 죄에 속했다’는 그 정체를 폭로시키기 위해서 법을 줬다”는 겁니다. 모세 율법에 대해서 사도바울 외에 이렇게 확실하게 설명한 분이 없습니다. 법은 왜 줬습니까? 정체를 폭로하는 겁니다. 어떤 정체? 법 밖으로 한발자국도 못 벗어나는 채로 법에 살고 법에 죽는, 법에서 태어나서 법으로 살고 법에 의해서 죽는다는 겁니다. 저주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저주의 자식으로 살다가 저주의 자식으로 죽는데 그 이유는 ‘그토록 신봉하고 지키려고 애썼던 그 법 때문에 저주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법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맞아! 내가 죄인이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용없다. 그것은 아무 힘이 되지 못한다’고 공격하고 핍박하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상 사람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때, 어느 한 장소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말구유에서 들린 아기울음소리를 따라 목동들이 가보니 거기 아기 예수가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우선 부모입니다. 그 다음에는 목동들이 알았고 그 다음에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을 아기 예수 쪽으로 몰아넣게 한 것은 사람입니까, 천사입니까? 천사입니다. 이 천사는 세상 모든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된다고 누가복음 1장에서 사가랴(세례요한의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누가복음1:13-23)

모두들 고이 잠든 밤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목자들도 천사가 와서야 알았습니다.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비밀이 천사에 의해서 알려졌다는 말은 그것을 악마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헤롯왕이 죽이려고 한 겁니다. 모든 사람은 다 상식선에 있습니다. 아빠 있고 엄마 있고 자식이 태어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거기에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아버지는 목사고 엄마는 사모고 자녀들은 다 교회 다니는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상식입니다.

아버지는 목사고 엄마는 사모고 아들은 중이 되는 경우가 정상인데 그것은 정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 경우란 아버지는 불신자 목사, 엄마는 불신자 사모, 그래서 아들은 중이 되어서 가족 세 명이 다 불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죠. 혹시 그중에 하나 목사가 복음을 안다면 그것은 기적을 받은 겁니다. 왜 기적이냐 하면 상식선에서 기독교 문화나 토양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독교 문화, 토양은 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는 법에 대해서는 지는 예가 없고 반드시 이깁니다. 처음에 조상 아담이 법대로 해서 졌습니다. 초장부터 법대로 해서 졌기 때문에 아담 후손 대대로 선악과 따먹고 법에 졌기에 법에 다 묶여 있습니다. 물론 생명나무는 따먹을 자격도 안 되고 추방된 상태이기 때문에 뱀의 후손이 율법 하에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법대로 해서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식으로 해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 출석해서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십일조 하고, 봉사활동 참여하는 식으로 기껏 흉내 내는 식으로 다 합니다. 그것, 신앙 아닙니다. 천사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경은 그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경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합니다. 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관심이 누구에게 갑니까? 카메라로 치면 마태(카메라1), 마가(카메라2), 누가(카메라3), 요한(카메라4)의 그 초점이 어디로 따라갑니까? 아기 예수의 출생과 그 마지막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전부다 예수님이 가는 그 행적만 집중적으로(클로즈업) 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만 비로소 그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예수를 통해서 그 비밀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사람은 뭘 믿었습니까? 신을 믿었습니다. 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신을 믿었잖아요. 여호와라고 하든, 삼위일체라고 하든지 법으로 다가설 수 있는 신을 믿었고 그것이 육체에서 난 사람의 주특기이고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있으니 신은 섬겨야 된다는 것도 알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선하고 착하게 바르게 살면 완전해 진다는 것도 아니까 십계명을 주면 십계명도 지키고, ‘뭐든지 법대로 해서 신(여호와)께 영광 돌리고 충성하자’는 것만 남아 있는 겁니다. 지금 아기 예수가 뭘 하기 위해서, 뭘 주기 위해서 왔는지 그것을 몰라요.

다만 ‘나’라는 인간은 여기 있고 신(하나님)은 저 위에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법이 있어서 ‘인간 쪽에서 지키면 그만이다’는 그것뿐입니다. 이게 바로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육체론 난 사람은 그것뿐입니다. 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는 이유는 법은 나를 살리기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도 지워지고 식상하면서 노쇠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법은 내 안에 양심으로 굳어져서 결국 남는 것은 ‘나’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자기 부인이 아니라 ‘나’만 달랑 남아서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그런데 진짜 천사를 만난 목자들이나 선지자는 관심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장 36절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된 지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주의 율법을 좆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누가복음 2:36-39)

과부된지 몇년 입니까? “팔십사년이라.” 그동안 중매가 얼마나 많이 들어왔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84년동안 혼자 살았다’, 팔자가 더럽지요? 그런데 메시아(아기예수)를 만나고서는 자기가 84년동안 혼자 살았다는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을 만났다는 그것으로 자기 사명이 끝나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 26절에 보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누가복음 2:25-33)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가서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29절에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딘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인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 말 중에서 자기 이득, 자기출세, 자기승진, 자기가족 행복 같은 것이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딴 사람이 되었다는 그 기쁨이 전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다른 부류에 속하고 다른 층에 속하고 다른 계열에 속한 사람이라는 그것으로 그 사람은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떻고, 내 학위가 무엇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어요. 그런 사람 봤습니까? 없다고요? 창세기 3:15에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 있고 여자의 후손이 있습니다.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당황스럽게 만들지요. 여자의 후손이 있다는 말은 내가 뱀이 자손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법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다는 말은 법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서 지옥 간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이런 복을 받으려면 뭘 해야 합니까? 이런 복은 기도를 며칠 동안 하면 됩니까?”라고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너, 여자의 후손 계열 맞아? 아니면 뱀의 계열이고.”
“왜 그렇습니까?”
“그게 약속이야.”

약속이 덮쳤습니다. 약속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니까 빠질 인간은 빠지고 올라올 인간은 올라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구름타고 올 때에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쪽은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일입니다. 약속대로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나는 육체다!” 그런 소리가 아니고 “목사님 백날 그 소리 해봐야, 나는 그저 착하게 살면(사람이 완전할수야 없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남에게 해코지 안하고, 파출소 다녀가면서 험한 꼴 안보이고, 그저 착실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신이 계신데. 태양을 만드시고 달을 지으신 분이 계신다면 나를 나쁜 쪽으로 몰아가지는 않을겁니다. 내가 이해하기는(목사님이 아무리 약속 이야기를 해도, 그리고 성경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옳다는 느낌이 오네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신 죽었다는 말은 그냥 공연히 하는 말이고, ‘나처럼 착하라’ 그런 뜻이겠지요.”
“아닌데요. 그런 뜻이 아닌데요.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뜻인데요. 십자가는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라는 뜻인데요. 이미 우리는 죽은 놈이라는 뜻인데요. 자기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인간은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예수님이 그런 소리를 했습니까?
“그런 소리를 했는데요.”
“우리 교회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하던데요?”
“그건 너희 교회 목사고 우리 교회 목사는 그것만 골라서 이야기하던데요?”

‘지켜라’가 아니고, ‘못 지킨다’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법과 상관없이 ‘이미 구원 되었습니다’ 하는 것을 통보해주는 거예요. ‘지키고, 못 지키고’와 상관없이 예수님은 자기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우리에게 해줄 것을 다 해주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진짜로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만이 나의 자랑입니다”라고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교회가 다 성도인데. 어느날 목사가 새로 부임했어요. “말씀대로 살아서 복 받읍시다”라고 나오니까, 모든 성도가 ‘언제쯤 예수 이야기가 나오나…’ 하고 있는데 끝까지 안 나옵니다. “여러분! 목사한테 순종해야 됩니다. ‘아멘’ 소리가 적은 것 보니까 순종을 안 하겠다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렇게 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헌신예배로 외부강사 한번 불러서 경험담을 들어 볼까요? 목사 우습게 여기다가 자식들 다리 부러지고 망한 이야기 들어 볼까요?”

복음 아는 교인들이 불러와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왔어요. “여러분! 바치면 복 받습니다. 미쓉니까?” 또 아멘이 없어요. “이래도 아멘이 없어요?” 또 다른 사람 불러온다면 또 오라고 하고. 이렇게 되어야 신자인데 어떤 사람은 “목사님! 목사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은데 다른 목사가 저렇게 말하니까 또 마음이 흔들립니다.”

이것은 자기양심 총동원해 예수 믿어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애 쓸 필요 없다니까요? 애 안 써도 됩니다. 애 안 쓰고 ‘내가 믿는가’ 점검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용을 안 써도 믿어지는가 한번 점검해 보세요. 용을 안 써도 믿어지시거든 여러분에 어떤 환란 핍박이 와도 계속 여러분은 믿는 사람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예수 믿기 힘든 경우에 사람은 그나마도 믿는 척이라도 합니다. 사람이 수천억 재산을 가진 상태에서 예수 믿어 보세요. 정말 안 믿겨 집니다. 돈이 좋은데 예수가 왜 좋습니까? 예수 없어도 돈이 있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 처하게도 하고 부하게도 해서 ‘진짜 네 안에 예수 주신 믿음이 들어 있는가’를 매일 같이 매일 같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확인케 하는 그런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 있어도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어렵다’고 여기지 마시고 ‘나쁜 짓을 해서 이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것과 구원이 상관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은 별로 없지만 혹시 누가 여러분에게 “한 15억을 그냥 드릴게요” 라든지, “아파트 한 채가 그냥 남아도는 것이 있어서 드립니다” 하거든, 여러분이 교회나 목사에게 충성해서 받은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개집 하나 들어 왔군’하면서 그 개집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거 팔아서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지 말고 ‘개집인데 그냥 살지 뭐’라고 사시기 바랍니다. 착한 일 해서 복 받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 해서 저주받는 것도 아닙니다. 저주하고 복이라는 것은 성도하고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예수님 자신이 필요해서 우리가 들어 간 겁니다. 우리가 필요해서 우리가 예수 믿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십자가만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왜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많다”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진짜 신자 맞아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4장 끝에 ‘자유’에 대해서 나옵니다. ‘자유’라는 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환경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는 의존교회인데 의존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의존교회는 환경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유 안에 그냥 놓여 있는 상태를 자유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고 ‘네가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가’를 보라는 말이죠. 그 둘러싸인 것이 법이 없는 것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법으로 묻지 않고 사랑으로, 다른 말로 예수님의 자유함(자유분방함)속에 우리가 놓여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자유가 우리 자유가 되어서 우리가 예수님의 자유와 한통속이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법의 저촉을 받지 않듯이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법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합니다.

예수님 바깥에 뭐가 있습니까? 인간의 법(양심)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이 말하는 어떤 법이나 양심에도 저촉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로마서 8:31-39)

“누가 정죄하리요.”(로마서 8:34) ‘주께서 위하시는데 누가 송사할 수 있겠는가?’어떤 경우에도 ‘성도는 성도를 용서하신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이 꽉 잡아 버렸어요. ‘너를 용서하신 사랑은 어떤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악마? 권세자? 천사? 어떤 세력이 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서는 철수되지 않고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 그 안에서 늘 살래. 나, 주님 밖으로 안 벗어날래’라는 그런 기쁨을 우리에게 주지요. ‘내가 죽어도 주의 것이 되고 살아도 주의 것이 될래’라는 마음이 생기도록 합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자유인이고 그 사람은 하루 살면서 어떤 사태가 오더라도 그것 때문에 기죽거나 좌절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지요. 어떤 사태도 예수님이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신 일들이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은 아침운동을 하면서도 ‘예수! 예수!’ 하는 식으로 살아야 합니까?”라는 것이 궁금합니다. 여러분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기도하고 예수를 부르짖고 성경을 보겠다’고 규칙을 세우는 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오늘은 석장을 읽기로 했는데 두 장 밖에 못 읽었다. … 내일 놀러 가는데 오늘 다섯장을 읽고 내일은 안 봐도 된다'라고 할 때, 일단 ‘네 맘대로’ 하세요. 그렇게 하시면서 내속의 법이 얼마나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지를 맛보시는 기분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법을 가지고 장난을 쳐도 내 맘속에 그것이 내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치밀어 오르는 기쁨으로 느끼신다면 신자 맞습니다.

그러데 석장 볼 것을 두 장 본다든지, 사흘간 안 본다든지 했을 때에, 나는 좌절하고 낙심한다고 느껴지신다면 그것은 신자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신자겠지요. ‘내가 좌절하고 낙심해야 맞는데 이상하게 낙심이 안 되네? 이상스럽게 낙심이 안 돼.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드시거든 신자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법이 있고, 그 법이 있음을 무시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 법보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법을 이겼다는 것이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항상 여러분 속에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저녁에 식구들을 보면 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들어옵니다. 식구가 셋 같으면 피곤한 가족 셋이 모였어요. 작을 일에도 짜증을 부립니다.

“나, 건드리지 마. 화낸다.”
“너만 그래? 나도 그래!”

으르렁 거리면서 서로 공격을 해대니 식구대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난리입니다. 그럴 때 ‘우리 집이 대체 성도가정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가는데, 개중에 철없는 사람은 일부러 찬송가를 불러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괜히 귀신 굿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피곤할 때 성질나는 것, 성질나도록 피곤케 함으로 말미암아, 너의 구원은 너의 성질과 상관없다는 것을 피곤한 몸을 통해서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성질을 있는 대로 다 내는 내 모습, 진짜 성도가 아닌 사람은 그것으로 희망 없어요. 그런데 진짜 성도는 그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양심에 묻지 않고 구원해 주시는), ‘내가 이렇게 죽었다’고 십자가에 내동댕이쳐진 예수님의 그 고난 받으심을 생각하면, 주님의 고난 받으심 앞에 우리의 어떤 행동도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걸 아는 순간 몸은 피곤해도 그 사람의 태도는 바뀝니다. “미안하다. 내 본심이 아니었어. 내몸 피곤하니까 그런 모양인데 나도 피곤하니까 그러네. 내 참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은혜 받은 애들 같으면 “아빠! 내가 좀 성질냈는데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안 그러기는요. 또 그러지요. 그러나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한 식구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들 피곤한 가운데서도 자기 속에 누가 들어 있는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대로(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우리를 덮쳤는데 우리는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내 스스로 완벽하고 의롭게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다 그것이 마귀의 속임수 인줄 압니다. 법을 의식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 법에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이미 우리를 법으로 묻지 않는 사람 되게 했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 바라 보면서 희열과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는 성도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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