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8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46

갈라디아서 제 18강 (이 근호목사, 2007년 4월 13일(2), 서울의존교회)

2007-11-27 09:11:43 조회 : 44          
20070413-(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18강  이름 : 오용익
사도바울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 권위를 인정해 주세요. 그가 빈말을 한다든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거든요. 사도바울이 전한 이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우리는 저주를 받습니다. 구원과 저주가 결정적인 문제로 되어 있는데 사도바울이 어떤 취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우리가 모르면 안 됩니다.

바쁘다든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런 것은 몰라도 된다’고 하면서 넘어가려 한다면 곤란합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사람인데 영에 속한 사람은 영과 육 양쪽을 다 아는데 그 차이점을 다 압니다. 그 차이점이란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하면 육이고 착한 일을 하면 영이’라는 식으로 차이점을 두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개인의 역량, 노력, 시도는 전혀 상관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영에 속한 인간과 육에 속한 인간이 갈라져 버렸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은, “열심히 해보세요. 노력합시다. 같이 기도해 봅시다”는 식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정해준 그 경계가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 본인도 어쩔 수 없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을 핍박하게 되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은 그냥 당하게 되어 있지요. ‘굴육’입니다. 그냥 당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예수님가신 길이 , A - B - C - D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면, 성령께서는 우리하고는 의논하지 않고(성령은 우리의 개인 사정이나 안타까움같은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가신 코스가 어떤 코스인지를 그대로 자기백성에게 적용시켜서 인도합니다.

예를 들어 A코스에 가면, “얘들아! 여기가 예수님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이야기한 곳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고 이야기를 했던 곳이야. 알겠지? 너희도 쓸데없는 것 가지고 예수님한테 시비를 걸지 마.” 하고 넘어 가는 거예요.

그리고 B 코스에 가면 “여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우리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이렇게 까불다가 도리어 핀잔을 들은 곳이다”라는 식으로 인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코스대로만 가요. 우리가 원하는 코스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코스 그대로 성지순례 하듯이 그대로 가버려요.


결국은 어디까지 갑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간다는 말이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죄가 발각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또 예수님께서 어느 도시에 가서 열심히 귀신을 쫒아내고 권능을 많이 행하고 병도 고치고 했건만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 해요. “호! 솜씨 괜찮구만. 내 병이나 고쳐보지.” 이런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봐라! 아무리 많이 권능을 행해도 깨닫지 못하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곳이 된다. 하나님아버지여! 이것을 똑똑하고 배운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된 것입니다.” 이런 것 까지도 우리에게 알려줄 때 ‘아하!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또다시 깨닫게 되는 거예요.

성령께는 이미 확정된 코스가 있습니다. 쓸데없이 나의 코스를 만들어서 “처음에는 내가 사업을 해서 50억 벌고 그 다음에 100억, 다음에 1000억, 그 다음에 재벌이 되는 코스로 성령께서 인도하소서”라고 하는데 성령께서는 거기에 가담하고 편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전을 가지고 꿈을 꿉니다. 그것을 육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일단 하나님이 주신 신체가 있으면 그것을 기초로 해서 자꾸 꿈을 꿉니다. 만약에 열일곱된 소녀라면 ‘우선 성적을 10등에서 2등으로 끌어 올리고, 다음에는 서울법대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그 뒤에 큰 회사의 2세를 남편으로 만나서 그 뒤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되리라’ 하는 코스의 생각을 할 수는 있잖아요.

‘키는 178센티미터가 되고 싶다든지 남편의 인물은 잘생겨야 된다는 것, 그 남편이 얼굴만 잘생긴 것이 아니라 너무 자비가 많아서 자기 손에 물도 안 묻히고 산다’는 것도 생각해 볼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응답해 달라고 금요철야기도회를 한다는 말이죠. 자기 육체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 이것이 육체의 한계입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영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를 잘되게 하기 위한 영이기에 실상은 영이 아니고 육체에 속하는 겁니다.

영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육체외부에서 난데없이 날아온 거예요. 은혜로 주신 것이 되는데 생각지도 않게 난데없이 날아온 것이 영이 되는 거예요. 난데없이 날아와서 나의 육체의 생각을 꺽어 버리고 굴욕적으로 만들고 나의 육체에서 나오는 소박한 꿈조차 박살내 버립니다. 그럴 때 그 힘이 바로 영의 힘인 것입니다.

예상치도 않았는데 남편감이 등장할 수가 있습니다. 전혀 자신의 타입도 아닌데 남편감이 등장하는 식으로 영의 힘이 작용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얼마나 실망하는지 모릅니다. 애 낳고 살면서 차츰 적응하니까 그 실망이 엷어지면서 실망으로 잘 안보이게 됩니다만 처음에는 실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돈이 되나? 인물이 되나? 뭐가 되는게 하나라도 있나?’ 전혀 자기타입이 아니라서 실망덩어리인데 어쩌다 보니까 사건이 임해서 결혼을 하게 된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일하시는데 어떻게 일하시는가? 나의 소박한 꿈을 깨는 쪽으로 영적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트릭을 씁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주께서 해 주신다면 미리 미리 내가 원치 않는 것만을 골라서 기도하면 그런것들만 제외되어서 영적으로 나에게 올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머리를 굴립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내가 병낫기를 원하지만 내가 영적인 것을 더 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게 된다면 병낫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미리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예상합니다. 주께서 내 쪽에서 예상한대로 기도를 반대로 하시기에 당연히 병이 나을 것을 계산하는 겁니다. 그런 계산은 누구나 다 합니다. 그것조차도 육에서 건져낸 가짜 영이 되는 겁니다. 진짜 영은 무엇이 빠져 있는가? ‘나에게 무엇을 해 달라. 내가 뭐 되게 해 달라’는 것이 없어지고 ‘주께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셨군요.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는군요. 주께서 나보다 더 힘이 세시군요. 주께서 나보다 더 열심이 많으시군요’라는 것이 느껴질 때 그것이 영적입니다.

‘내 기도대로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내 기도 말고 주께서 기도하셔서 이런 결과를 저에게 은혜로 주셨군요’ 라고 느껴질 때, 그것이 영적인 겁니다. 철저하게 ‘나’라는 육체를 부정해 버리죠. ‘나’라는 육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담속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모든 아담적인 요소들도 다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각들, 즉 사랑, 우정, 가족, 교회, 천국 등의 모든 것이 기존의 내 육체를 근거로 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던져진 사랑, 우정, 가족, 교회, 천국입니다. 반드시 날 집어 넣어 줄 때 좋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 오게 되면 ‘나’중심의 틀이 깨져 버리고 예수님을 위한 천국, 예수님을 위한 교회, 예수님을 위해서 맺어진 가족, 예수님을 위하여 주신 사랑이 됩니다. 전부다 내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쪽으로 가는 틀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나의 영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집이 네 채가 있고 땅은 15만평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해서 벌었는가?”
“주께서 주시데.”
“그냥 주실 리가 있겠어? 기도를 했든지, 뭐가 있으니까 주셨겠지.”
“아니야. 그냥 주셨어.”
“그러면 왜 나에게는 그냥 안주시는데?”
“그야, 주님 맘이지. 안주는 것을 왜 나보고 그래?”

어떤 집사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집사님은 기도를 참 열심히 하네요?”
“기도할 힘을 주시니까 하는 거죠. 제 힘으로 못합니다.”
“기도할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도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기도할 힘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도할 힘을 주시니까 기도를 많이 하게 되던데요.”

어떤 집사님이 헌금을 많이 합니다.

“집사님! 어떻게 그리도 헌금을 많이 하십니까?”
“주께서 헌금을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와! 믿음이 참 좋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셔서 그렇게 한 겁니다.”
“얼마나 겸손도 한지.”
“어허! 겸손한 것이 아니라니까?” 화를 막 내죠.
“겸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헌금하도로 했다니까?”
“와! 저 겸손 봐!”
“에잇! 겸손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주께서 하셨다니까? 내가 육적으로 하면 한푼도 하기가 싫어요. 그런데 주께서 하시니까 주님 영광 위해서 주께 도로 드린 거예요.”

바라기는 그런 교인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주께서 하실 문제라서 우리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라면 지금은 주의 형상을 입어야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꾸 주께서 하신 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훈련하고 수련을 쌓고 단련을 했기 때문에 반복해서 같은 행위를 하다 보니 어떤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그렇게 나왔다’는 가능성을 자꾸 심어주려고 해요.

그것은 법이 되어 버립니다.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 성경은 하루에 몇 장? 몇 분? 몇 시간? 어느 정도? 어느 만큼의 양? 이것은 법적으로 규정이 되어 버리죠. 그 법을 지키는 것을 성경에서 육체라고 합니다. 육체란 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법을 주셨다. 그러면 누가 지키는가? 내 육체가 지킨다’라는 그런 고리, 그런 관계가 필요가 없습니다.

왜? 법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법을 지키려 하는 자체를 통해서 법에 종노릇 하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 안에 법 말고, 곧 법을 지켜야 될 당사자인 육체 없이 하늘나라 백성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약속에서 낳아진 자녀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약속과 육체로 대비시킵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는니라.”(갈 4:23)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한쪽은 약속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한쪽은 육체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뭘로 구분하는가? 어머니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삭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분명히 사라입니다. 그런데 이삭의 어머니가 사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사라는 그냥 비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실체는 어디에 있는가? 하늘에 있습니다. 사라는 비유인데 사라가 등장한 이유는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유 때문에 등장한 거예요. 이삭의 어머니도 아니면서 왜 사라는 등장해야 하는가? ‘적어도 하갈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등장했다는 겁니다. 하갈은 철저하게 인간의 육체를 다 보여줍니다. 인간의 육체의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전부가 다 하갈에 속하는 겁니다. ‘여자가 애기를 낳았다’ 하면 전부가 다 하갈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기를 낳을수가 없습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자는 다 어디에 속합니까? 사라에 속합니다. 흔히들 말하는 불임여성들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는데 아기를 가진 사람이 사라에 속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기를 가질 수 없었는데 아기를 낳았다.’ 이게 말이 돼요? 하나님의 율법 성경은, 이렇게 ‘말이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소위 ‘말이 되는 전체’를 다 저주해 버립니다.

소위 말이 된다는 그 자체를 전부다 영적이 아니고 세상 적이라고 다 매도해 버립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격? 품위? 체면? 그런 것은 사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목사님!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사도바울이 사람을 개과천선한다든지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길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주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영적인가? ‘제발 영적인 사람이 되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영인가?’라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잘해 봅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 “열심히 합시다. 잘해봅시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누가 꽃봉오리인가? 애초부터 법 없이 생명을 얻은 사람이 누구냐?” 그 말입니다. “누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 그 보배를 가진 자인가? 두꺼운 삽겹층을 뚫고 영적인 은총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어떤 인간도 그 육체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에 속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이미 어머니가 이 땅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자력으로, 즉 육체의 능력으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통로는 이미 없습니다. 도리어 자기가 지키고자 하는 법에 종이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철학을 공부하고 이런 저런 학문을 연구해 보니까 이것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만든 법의 노예가 된다.’ 자기가 만든 양심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인 노릇을 하려고 그렇게 애써도 자기가 만든 법에 의해서 스스로 노예로 전락하면서 살아갑니다. 극복도 못하면서 극복하면서 산다는 티만 내는 가증스런 위선자들의 집합체가 인간입니다.

성경말씀 어느 것도 못 지킵니다. 10% 지키고 90% 못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절도 못 지킵니다. 대전에서 있었던 지난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로마서강의를 하는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지나간 시절의 유머라 별로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소를 훔쳤는가?”
“저는 소를 훔친 것이 아니고 노끈(소에 매여 있는)만 훔쳤을 뿐입니다. 노끈만 훔쳤는데 큼직한 소가 붙어 왔습니다.”

이것이 지난 60년대의 개그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많이 웃었습니다. 지금은 애들도 안 웃습니다. 율법 뒤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율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안식일만 지키면 나머지 9개의 계명은 계속해서 차례차례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한 계명 하나 하나에 거대한 율법전체가 다 끌려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몰라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황사현상인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 법 못 지켰다고 퇴근할 때 마다 이슬(술)로 삽니다. 아침 되면 미안한 마음, 참회하는 마음으로 양심을 풀고 또 다시 법을 지키는 법의 노예입니다.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수렁에 빠지는 거예요. 이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이 법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지고 ‘자유하는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자식이 없다는 자체를 무엇으로 봅니까? 자유라고 합니다.

“기록된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2,23)

자유가 무엇인가? 자기 육체로부터 자유할 때 자유입니다. ‘내 육체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상관없다.’ 이것을 자유라고 봅니다. ‘나는 내 육체하고는 상관 안 해. 나는 내 육체하고는 거래 안 해. 나는 내 양심한테는 묻지도 않아.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이것이 참 중요한 겁니다. ‘나는 나하고 안 놀아. 왜? 나하고 거래하는 분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게 하늘에 있는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진정한 자유자, 사라 같은 분(사라는 비유니까)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갑니다. 다른 사람은 지옥 갑니다. 이것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때려죽인다고 해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있고 하나는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람만이 천국가고 나머지는 다 지옥 갑니다.

“육체로 어떻게 종교적인 노력을 하자.” 그것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이미 확정된 결과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육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왜? 자기를 둘러싼 그 두껍게 둘러친 오존층 같은 그 세상신(악마)의 모든 술책을 완전히 뚫어서 영이 들어왔고 그 뚫린 과정과 절차를 다 알기 때문에 무엇이 육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영의 사람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의 육체에서는 무엇이 나온다? 법이 나온다. 법이 나오면 육체는 반드시 법의 노예가 된다. 계속해서 육체를 낳아봐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생물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식이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죽지 않는다. 민들레는 퍼지기 때문이다. 고래는 죽지 않는다. 고래는 계속 번식하기 때문이다. 신은 영생불멸을 자손번식이라는 이름으로 주었다. 따라서 종교적인 영생이란 없다. 같은 종이 계속 번식하면 그것을 전체적으로 볼 때 개체는 죽더라도 전체는 살아 있으므로 그것이 영생이며 신의 뜻이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그런 논리라면 짝짓기를 많이 하면 그것이 영생을 더욱 크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육체를 따라난 자식은 아무리 많은 자식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과학자들은 존재로부터 시작합니다. “있잖아. 있는데서 또 있고 또 있으니까 그것은 있는 것 맞잖아.” 그런데 영적으로는 “있다고 하는 그것은 인정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있다”가 됩니다. “그리스도한테 심판받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진짜 예수님이 구원할 사람은 이 땅의 있는 데서는 없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능력에 의해서만 생긴 사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봅니다. 왜?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능력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로 할 수 있지만 인간의 육체로 못하는 것은 누가 하는가? 그리스도가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은 없는데서 생겨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지 다른 사람은 안 된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아주 단호하게 도장을 박아 놨어요.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9)

이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유는 자기 육체를 통해서 선택을 강요받는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이 중국집에 가보시면 거기서도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부부간에 혹은 가족끼리 가면 중국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싸우고 나와서도 싸웁니다.

“여보! 자장면을 시킬 것을 왜 짬뽕을 시켰을꼬.”
“짬뽕이 어때서?”

그런 다툼이 일어나는 이유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일 좋은 중국집이란 주방장이 주는 대로 먹는 집이 제일 좋은 곳입니다. 주는 대로 널름 받아먹으면 됩니다. 자기 육체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주시는 대로 널름널름 받아먹으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자유인이란 나의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유가 내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내 육체는 두가지점에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이미 선악과 따먹은 것을 취소할 수 없는 육체입니다. 또 하나, 내 힘으로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그 육체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았어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육체입니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인간의 육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도록 추방까지 시킨 상태에서 그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고 덤벼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세상에 종교가 수십만가지가 있습니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내 육체로부터 시작된 종교가 다 거짓말입니다. “저리 꺼져!”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 “한번 봐 주세요”가 어떻게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죽음 대기표 받고 번호 부르면 그냥 죽으세요.

이와 같은 이야기를 불신자가 들었다면 그가 어떤 소감을 말하겠습니까? 불신자는 아주 간편하고 기분 나쁘지도 않습니다. 괜히 이쪽에서 저쪽 기분 나쁠 것을 걱정했지 불신자는 기분이 나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육체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착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신입니다. 예수님이 와도, 성령이 와도, 성부가 와도, 천사가 와도 다 산타할아버지입니다. 이미 ‘내 육체를 위하고, 나를 위하는 신이다’고 우상을 확정지어놓았습니다.

이세상의 모든 법, 국가의 헌법을 포함한 모든 법은 반드시 그 앞에 무엇이 붙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만약에 우리나라의 세금법이 자기 맘에 안들면 다른나라로 이민가면 됩니다. 미국가든 호주가든 캐나다 가면 됩니다. 나를 위한 법이 아니면 그것은 법이라고 보지를 않습니다. 모든 법은 ‘나를 위하여’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공부해라! 공부하란 말이다!” 그 앞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우리 집안을 위하여.” 항상 그것이 붙어 있습니다.

“아침에 밥 먹고 가라!”
“왜요?”
“우리 집안(나)을 위하여.”

사도바울이 옛날에 그랬던 사람이었습니다. 법을 지켜도 ‘나를 위하여’ 지켰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없다”(빌 3:6)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하면서도 항상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 육체를 위해서’ 하는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고 난 뒤부터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 난 뒤에, 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것이 나를 위하여 내 육체를 위한 일이었다는 것이 한꺼번에 정리정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좋게 하기 위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람을 좋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과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길에서 돈 100원(바울같이 거듭난 영적인 사람) 줍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람 쉽게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아예 기대를 하지 마세요. 기대가 없으면 주신 것도 은혜가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몇 명이 되어야 할 텐데.’ 이것은 중국집에 가서 괜히 짬뽕을 찾는 격입니다. 짬뽕이든 자장이든 주는대로 먹으면 됩니다. “형제여! 반갑다. 친구야.” 이러면 됩니다. ‘저 사람은 성도 되어야 하고, 저 사람은 절대로 성도 되면 안 되고’, 이런 식으로 자기 육체로 정돈에 나서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더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시내산과 예루살렘입니다.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5,26)

시내산과 예루살렘,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시내산안에 예루살렘이 포함되어 있고 이쪽 편에 그냥 예루살렘이 아니고 그 앞에 뭐가 붙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붙은 것은 곧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합니까? “영적인 사람들아 너희들은 이 정도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의 차이점을 알아야 된다”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 차이점을 모르면 갈라디아서 4장을 그냥 건너뛰어야 할 판입니다. 이것을 건너뛰면 ‘그리스도의 형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되는 겁니다. 우선 시내산과 예루살렘, 이 두 가지가 나왔지요. 그에 앞서서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과입니다. 서로 대립되는 둘로 내세운 것이 이런 것을 푸는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처음것만 열면 다음 것들은 자연히 풀리게 되는 그것을 열쇠라고 합니다.

그 열쇠의 첫 번째 포인트가 하갈과 사라입니다. 같은 여인인데 서로 대립되는 겁니다. 이 두 여자는 그냥 여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자식 낳는 기능’입니다. ‘시내산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대조시킬 때 왜 위에 있는 시내산은 없을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위에 있는 시내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 이렇게 대조되어야 할것인데, 밑에는 시내산이 있고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 있는 시내산은 없고 위에는 그냥 예루살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담긴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시내산부터 풀어야 합니다. 전 시간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모세가 있고 율법이 있다면 나중에 오신 예수님이 율법을 해석하고 아브라함을 해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율법속에는 아브라함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나 신명기가 다 율법이 아닙니까? 그 창세기 이야기속에 아브라함이야기가 들어 있으니까 창세기가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시내산에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시내산을 다른 말로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내산과 예루살렘의 차이가 뭡니까? 시내산은 율법이지만 예루살렘은 율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일단계로 율법인것과 율법 아닌것의 비유가 이 지상에 있었다는 겁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대표하고, 예루살렘은 율법과 상관없이 존재하더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수 있는데 율법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예루살렘이 지상에서는 그냥 ‘율법과 관계없음’으로 되어 있는데, 이 율법 없는 것이 위로 갔습니다. “하늘에 예루살렘이 있다’는 말은, 땅에 있는 시내산과 땅에 있는 예루살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이고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모형은 실체가 드러나면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아파트를 시공하기 전에 건축설계의 모형을 그대로 지어놓은 축소모델이 있습니다.

그 모형이 좋다고 해서 그 안에 들어가서 살수는 없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처럼 소인국이라면 모를까 이 덩치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진짜 아파트를 놔두고 모형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고 한다면 매우 곤란한 일입니다.

“엄마! 나, 모형에 들어가서 살고 싶어”
“네가 개미냐? 거기 들어가서 살게. 그것은 진짜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진짜가 나타났으니까 앞에 것 둘은 사라져야 됩니다. 사라지는데 이 둘은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비유를 나타냈습니까? 육체를 드러내서 사용한 비유 아닙니까? 진짜 하늘의 예루살렘이 오게 되면, 예루살렘이든 시내산이든 육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전체가 하늘의 예루살렘과 대비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성경해석을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기도하고 앉아 있자는 것이 아니고 언약적으로 하자는 겁니다.

언약적으로 하게 되면, 시내산이든 예루살렘이든 이 전체가 육체란 이유로 말미암아 하갈에 속하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라에 속합니다. 시내산은 예루살렘과 비교해서 시내산은 율법이 있고 예루살렘은 율법이 없습니다. 율법이 없다는 쪽으로 비유하자는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무엇과는 상관이 일체 없다? 법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법과 상관이 없기 때문에 법을 지킬 당사자인 육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자, 여기 제 육체가 있습니다. 저를 어떻게 구원합니까? “‘나’라는 이 근호를 어떻게 구원합니까?”라는 말은 곧 이 육체가 구원받고자 해서 시도하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러한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육체가 무슨 구원을 받아?”
“제 육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육체는 육체라니까? 안된다니까! 구원은 육체 없이 되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습니까?”
“똑같은 소리 또 할래?”

두 언약이라는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가 소속된 언약에서 못벗어난다’는 겁니다. 내가 언약을 이용해서 내가 구원받겠다는 방식은 언약에서 용납이 안 됩니다. 언약은 큰 강물과 같아서 휩쓸리는 겁니다. 큰 한강이 흘러가는데 그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하다가는 거기서 빠져 죽습니다. 그 물결이 위에서 밀어붙이면 그냥 딸려 들어가야 합니다. 언약이란 거대한 탁류와도 같습니다. 육체란 그 거대한 탁류 같은 언약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하나의 개체일 뿐입니다. 개체가 탁류를 이길수 없습니다.

두 언약의 강줄기는 그 원천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두 언약이 나왔기에 예수님이 작정한 언약을 어느 인간도 거역할 수는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이 주어지면 천국먹고, 지옥이 주어지면 지옥을 먹어라. 그냥 주는 대로 먹어라.” 물론 지옥 가는 사람이 그것을 기분나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죽는 것 뿐이지 지옥같은 것은 신경도 안씁니다. 그러니까 기뻐할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뿐입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 이 말을 왜 기분나빠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결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그 사람들이 지옥을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믿더라도 내 입맛에 맞는 지옥을 자기가 만들어 냅니다. ‘나처럼 착한 인간은 천국, 나처럼 나쁜 인간은 지옥.’ 이런 식으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지옥이 있기 때문에 거대한 탁류, 예수 그리스도가 만든 지옥은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있기는 있습니다. 어떤 예수? ‘날 위한 예수’입니다. 유대인들이 고대한 메시아는 자기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였습니다. 다니엘에 보면 짐승이 나옵니다. 그 네 짐승에 대해서 해석이 역사적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바벨론, 메대와파사, 헬라, 로마로 확정되었습니다. 짐승이 역사적으로 확정되었다는 말은 그 반대쪽에 있는 진짜 성도의 나라는 그 짐승으로부터 공격받는 쪽이고 그쪽이 확정된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네 나라에 시달리는 나라가 누구입니까? 유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확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인자, 메시아가 오면 마지막 네 번째 나라인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줄 것이고 그리되면 자신들이 제사장나라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어느 누가 봐도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정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반박했습니까? 예수님이 반박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한 것은 짐승쪽으로 해석한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당신은 무슨 권리로 그런 권리를 하는가?”라고 물으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해석자”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뭐든지 예수라는 작자의 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이단이고, 예수의 말을 들으면 무조건 백성입니다.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 독선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또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 이 소리를 들은 유대인들은 기가 찼습니다.

“이게 아직 안죽어 봐서 저런 소리를 한다. 한번 죽어봐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실제로 죽였더니만 이번에는 제자들이 나타나서 시체를 빼돌리고 나서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했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큰소리 치더니만 기어이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동행할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식사하면서 영안이 열리고 나서 보니 ‘부활하신 그 주님이 바로 그 주님’이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왜 인간의 모든 자기를 위한 성경해석이 이단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계셔서 세상의 모든 역사가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한 이후부터 전부다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누구 중심입니까? 나 중심으로 전부다 바뀌어서 거기서 예수도 나오고, 성령도 나오고, 천국도 나오고, 메시아도 나옵니다. 전부다 뜯어보면 자기입니다. 자기집안, 자기교회, 자기 잘되는 것, 그게 바로 육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이렇게 어렵게 한 이유가 뭡니까? “진짜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그것만 나는 챙긴다.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 되려고 시도하는 그것을 나는 반갑지도 원치도 않는다. 진짜 영적인 사람이 누구냐?” 지금도 그 사람은 핍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율법과 대비시켜 놓고 이 대비를 땅에서 하늘로 옮겨 간 것은, 인간의 육체로서 어떤 노력을 다해도 결국 하늘의 예루살렘에는 입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렇게 두 언약으로 설명한 겁니다. 어떤 인간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에 머물고 육체의 한계를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을 봅시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참, 대단히 어려운 말이 아닙니까? 잉태치 못한 자가 무슨 자식이 있습니까? 이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이것을 육적인 사람들보고 납득하라고 할 때 납득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겠지요. 방금 읽은 대목의 정답은 간단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못하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대로 반드시 사람이 못한다는 것만 골라서 다 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설명할 때 어떻게 설명하는가? “사람은 못하지롱?”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계통입니다.

예수님아래서 육체에 속한 언약과 약속에 속한 언약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어떻게 구원하느냐? “사람은 못했지롱?” 하는 방법으로만 무조건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수시로 무엇을 느끼느냐? ‘이것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구원된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내가 성경을 알기를 아나? 기도를 제대로 하기를 했나? 내가 구원된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로 된 일이야.’ 이것이 지식이 아니고 실제의 느낌으로 와 닿는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몰라! 하여튼 구원된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이것은 내가 안했어. 주님께서 하셨어.”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소리는 “그저 주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고백을 털어 놓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포도원비유에서 가장 늦게 와서 달랑 한 시간 일하고 한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은 사람에게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묻습니다.

“너는 한시간만 일한 주제에 왜 더 많이 일한 우리하고 같은 품삯을 받았어?”
“나도 몰라. 다만 주인이 그렇게 주던데?”
“에이! 빽 썼지?”
“몰라! 주시니까 그냥 받았지 뭐.”
“너, 일한 것이, 한 시간 밖에 안 되잖아.”
“내가 받은 삯은 한 시간 일한 값이 아니고 그냥 받은 거야. 그냥 받은 것이지 한 시간 일했다고 해서 받은 것이 아니야.”

먼저 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릅니다. 나중 온 사람들은 알죠. 이것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거저 줬다는 것을 압니다. “일한 것도 없이 거저 의인되었다”(롬 4:6)는 사실, 아무 착한 일도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의인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다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받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서 아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용서를 다 해버렸다’는 사실을 나중에 통보받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해소되는 겁니다. 해결과 해소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문제는 문제대로 남고 해결은 해결대로 남습니다. 그런데 해소되어 버리면 문제자체가 날아가 버려서 문제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문제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평생 동안 살면서 울고불고 하는 것은 다 내 육체가 자아내는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전부 다 그리스도의 두 다리 가운데 한 다리입니다. 주님의 약속계통이냐? 아니면 육체계통이냐? 육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그는 지옥 갈 인간이고, 나의 행함이 아니고 주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되었다면 그 사람은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되에 그냥 쉬면서 노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영생주기로 작정한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다니면서 성령세례 주셔서 “너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통보해주는 그 일을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되었다는 것을 평생토록 증거하고 자랑할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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