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9강 (이 근호목사, 2007년 5월 11일(1),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4:26,27을 읽겠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 하라 구로(劬勞: 자식을 낳고 기르는 괴로움)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괴롭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일도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여성들은 아기를 낳을때 많이 아플것이다’는 것인데 이것이 한사람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 적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일도 이 말씀 안에 있고 그 바깥으로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여러분이 살아가시는 모든 것은 다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자 하여도 여러분보다 더 센 게 말씀이기에, 도망치는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인정하면 됩니다. “주여 말씀대로 하옵소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폭발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성취성을 보이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살아 있고 말씀이 살아 있음을 나를 통해서 불쑥 불쑥 드러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살아가시면 쓸데없는 걱정 근심 따위는 아마 없을 거예요. 내안에 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여러분의 욕심이나 욕망밖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 10:17-20)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말씀 밖으로 못 벗어나는데 그 말씀의 계획이란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큰 고생을 하고 끌려가는 수모를 당할 것인데 그때 그 일도 다 말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쓸데없이 걱정할 일이 아니기에 안심하고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그들에게 잡힌 것도 하나님의뜻이요, 잡혀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며, 또 어떻게 벗어날지를 걱정하는 것들이 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이 만들어낸 상황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는 상황이고 예수님께서 미리 아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오줌이 마려울 때 걱정합니까? ‘주여! 오줌이 마렵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오줌이 마렵습니까? 하나님께서 마렵게 하시니 마려운 것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데 그게 왜 안 떨어질까요? 저는 하늘의 태양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내 맘대로 안되는 것도 있구나!’ 내 팔은 내 맘대로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내 맘대로 되는데 왜 태양은 왜 내 맘대로 안 되는 겁니까? “태양아! 오늘을 뜨지 마라!”
이 세상에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세상에 내 맘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이 나도 내 맘대로 안 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합니다. 내가 되고 싶다고 해서 남자가 된 게 아닙니다. 여자분 들도 여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부다 내 맘대로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내가 태어난것 자체부터 내 맘대로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내 맘대로 되게 하려고 힘을 쓰다 보니까, 사지가 틀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고민에 빠집니다.
안산강의 중에 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자기가 그동안 생각했던 생각의 틀이 허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니까 너무 억울해서 운다’고 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내 맘대로 내식대로 봤는데 그게 뜻대로 안될 때 무엇이 부끄럽고 속상하냐 하면, 그동안 내가 세상을 본 것이 엉터리로 드러나서 분하고 원통한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10장에 따르면 그렇게 분하고 원통해 하지 말라는 거죠. 왜 그러냐 하면 ‘끌려가서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너희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이야기를 하는 다른 분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 성도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의하면 ‘성도 안에 어떤 분이 계셔서 이야기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잡혀가게 된 것도 성도를 편하게, 혹은 힘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고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일부러 어떤 의도를 가지고 붙잡히게 했기에 붙잡혀야 되는 겁니다.
태양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태양을 바라보는 내 소원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따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진짜 주인은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 몸을 차 몰듯이 몰고 다니시는 거예요. ‘내가 왜 이 자리까지 왔는가?’ 그것은 여러분의 속에 계신 분에게 물어 보세요. 그러면 그분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하시는 겁니다.
찬송가 460장의 가사에 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게 약간 미진하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정도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내 맘대로 안 되더라’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맘대로가 아니고 내 속에 계신 그 분 맘대로 지금까지 이끌려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여러분이 성도라면 ‘자기 일에 대해서는 없고 전부다 주님의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것은 주님의 일이지 내가 관여하고 걱정할 사항이 아니다.’ 내가 나를 조종한다고 덤벼들면 이것은 불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뜻은, ‘제가 여기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라고 늘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저는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합니다. 마치 태양을 움직이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투하는 거예요. 어린이여러분! “태양, 너는 왜 거기 떠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입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고 답하겠지요. 그러면 참새에게 “너는 왜 하늘을 날고 있느냐?”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요? “하나님이 날게 하셨다”고 하겠지요.
“들꽃아! 들꽃아! 너는 왜 거기 그렇게 함초로이 피어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나를 피어나게 하셨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물어 볼게요? 여러분은 왜 그런 얼굴모양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답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품고 사는 사람과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을 격리시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옥에 가서야 하나님을 알게 만들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지금부터 천국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면서 살도록 한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8은 매우 어려운 대목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둘로 나눕니다. 한쪽은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이고, 또 한쪽은 육체를 따라 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들었어요.
어떤 중국집에서는 머리를 써서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서 접시를 반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자장면, 한쪽은 짬뽕을 담아서 양쪽 다를 내미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자장이면 자장, 짬뽕이면 짬뽕’으로 양쪽을 격리시켜서 섞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둘로 나누는데 ‘핍박을 받는 쪽이 짬뽕(성도)’입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쓴 사도바울이 이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등에 업고 사람들 앞에서 죽은 예수님을 내동댕이치면서 “이분이 죽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지금 유럽과 FTA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관료들이 협상을 하고 있는 테이블에다가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업고 와서 내동댕이치면서 “협상이고 뭐고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고 내치는 사람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남북회담, 북한과 남한과 통일문제를 협상하는 그 회담장소에 죽으신 예수님을 어깨에 메고 와서 거기에 턱 놓고 “남북관계 협상하는 사람들아! 당신들은 예수님이 왜 죽은줄 아느냐! 죽은 이유를 대라”고 따지는 분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합니다. 청군 백군 나누어서 달리기도 하고 양쪽에서 응원전이 한창입니다. 그 한복판에 사도바울이 나타나서 "청군이고 백군이고간에 예수님이 고난받은 것을 너희는 어떻게 보나? 이분이 왜 죽은줄 알아?” 이렇게 나서시는 분이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면 패션쇼에 가 보면 모델들이 죽 나오면서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 댑니다. 거기에다가 예수님몸을 던져 놓고 “패션쇼고 앙드레김이고간에 예수님이 왜 죽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아느냐? 예수님이 왜 죽었는가?”고 외칩니다. “이분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왜 죽었느냐?”
사도바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 이것보다 더 생생하게 이야기 할 수는 없어요. 이것이 전부입니다. 지금 우리 동네에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 아카시아 향기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죠. 그런데 그 아카시아 향기를 맡고 있으면 천국에 갑니까?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이 다 같이 아카시아 향내 맡으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자장면과 짬뽕이 구분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아카시아 향기에 흠뻑 취해서 다들 좋아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죽으신 예수님을 업고 와서 거기에 턱 부려놓고 “너희들! 예수님이 왜 핍박받고 죽은 줄 아느냐?”고 할 때 지옥 가는 사람은 “아저씨! 지금 꽃향기 냄새 좋은데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소”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그는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은 “아카시아 향기도 좋다만 내가 아카시야 향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구원은 이분이 나의 죄를 다 대신 했기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라고 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코스모스나 태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태양과 코스모스는 주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물개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있던가요? 오리가 예수님을 싫다고 했던가요? 장미가 예수님을 비웃고 놀리던가요? 그런 것들로 하나님이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시여! 아카시아 향기가 너무 좋습니다. 오! 태양이여! 저 태양을 과연 누가 만들었던가!” 그런 것을 외치고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 안 될 사람의 나뉨은 예수님의 고난 받음을 통해서 모두 결정 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교회는 가짜들만 모여 있는 엉터리 교회, 복음이 없는 교회입니다. 사도바울이 당회장 같으면 십자가만 이야기했을 겁니다. 다른 이야기를 안합니다. 왜? 다른 이야기를 하면 왜 안 됩니까?
“여러분! 계절이 5월이라 아카시아 향내가 진동합니다.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요!”
“그렇지요. 여러분은 성도 맞습니다.”
이런 것으로 때우는 겁니다. “여러분! 어버이날도 끼어 있는 가정의 달인데 부모님 잘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아멘.(부모 효도 하니까 천국 가겠네)” 이러고 있는 겁니다.
아카시야 향내 맡은 것이 핍박도 아니고, 부모효도 하는 것이 핍박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이유가 거기에 담겨 있지 않아요. 그래서 이것이 짬뽕인지 자장인지 구별이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확실하게 구분하려고 마음 단단히 먹고 왔어요. 육체로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난 사람을 구분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양쪽이 절대 섞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를 담아서 “자장입니까? 짬뽕입니까?”라고 묻는 식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을 펼쳐 놓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한 학생이 불이 나서 화상을 심하게 입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진짜 살아 계시다면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제가 학생회 총무이고 교회봉사도 잘하고, 예배도 안 빠지고 다 참석하고, 목사님도 잘 섬겼고 어린 시절에 유아세례 받고 신앙생활 잘해온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할 때, 어떤 목사님이 와서 “조금만 더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치료하는 광선을 보내시리라.’(말 4:2) 그러니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세요”라고 한다면, 그 청년은 ‘본인이 왜 화상을 입어야 되는지 자신이 왜 악한자에게 묶여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그냥 자기 소원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 전하는 사람이 그 청년 앞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놓으면서 “지금 너는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느냐? ‘왜 나를 불구자로 만들었느냐’고 한탄하는데 너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지금 네가 그 형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화상을 입는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운명으로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실컷 걱정하다가 그 걱정했던 것들이 예수님의 죽으심, 그 고난과 피 흘리심 앞에서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이 나오죠. 그럴때 어떤 사람이 “얘! 너는 무슨 낙으로 사느냐?” 할 때, “저는 예수님이 나 대신 돌아가신 그 낙으로 삽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이 하고자 해서 한 일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육체도 있고 성령도 있어요.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육체와 성령을 비교해서 ‘육체는 죄가 되고 성령께서 육체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라는 것을 이야기 할 것이 있는 반면에,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그 안에 육체밖에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건, 뭘 하건 간에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원만 이야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육체를 따라 났기에 성령이 없습니다. 로마서 8:9,11에서 ‘예수님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은 ‘신이시여! 왜 나의 소원대로 안됩니다. 왜 나의 처지를 이런 꼴로 만드십니까?’라는 소리만 나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너 말고 네 속에 누가 들었는지를 말해 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목사님! 누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누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핍박을 할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핍박 받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핍박하는 사람은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만 있는 영의 사람을 육체로 난 사람이 왜 핍박을 합니까? 그것은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그 사람의 고집을 꺽고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고난을 증언케 하도록 해서 나오도록 합니다.
육체로 난 사람은 자기 속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없습니다. 없으니까 약이 올라서 공격하는 겁니다. 사실은 더 깊은 내막이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에 대해서 없는 쪽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이 들어 있는 쪽을 공격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사도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2000전에 있었던 과거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인류전체가 뱀(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여인의 후손(예수님)에 대해서는 참지 못하고 대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싫어하는지, 얼마나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감추려고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 예수님이 들어 있으니까 육체로 난 마귀가 그 예수님을 보고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을 핍박 하게 되는 겁니다. 핍박을 하니까 2000년 전의 십자가에 죽었던 그것만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그 뒤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사람은 십자가 사건을 똑같이 되풀이 하면서 본인도 핍박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때문에 고난 받는 그런 경로를 밟게 됩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야고보나 다 같이 들어 있는 공통된 것은, ‘예수 이름으로 핍박받거든 구원 받은 줄 알아라’고 이야기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졌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린도후서 1:3-10)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이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도다.”(로마서 8:17,1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립보서 1:29,3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베드로전서 2:20,21)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야고보서 1:2-4)
지난 수요일 설교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합니다. 갑자기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음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관심사를 문제 삼습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그림 잘 그리고 있어? 열심히 잘 그려야 영광돌려.” 이렇게 해야 할 텐데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 사람을 툭툭 치면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바빠요. 그림 그리는 것 안보입니까?” 소프라노 가수가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음악이나 들으세요. 나 지금 노래하느라고 바쁘거든요”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참기름 장사는 참기름을 열심히 짜서 한 병에 5천원씩 받으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병원에서 수술 받고 아파서 누워 있는데, 그 옆에 다가가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네 안에 내(예수님의 영)가 있느냐’를 묻는 겁니다.
그 안에 예수의 영이 있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네게 알게하신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마 16:17) 그렇게 되지만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단지 육체(껍데기)만 남아 있기 때문에 “저리 가세요”라고 나옵니다. 그게 바로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내가 왔으되 나를 영접치 않았다”(요한복음 1:10,11)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요한, 베드로, 바울, 야고보에게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이 한마디로 말하면 뭡니까? ‘예수님이 왔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 제가 이런 대목을 듣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갈때 그냥 가지 말고 담요 들고 가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기다렸다는 듯이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누가 너더라 안식일(법)을 어기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더냐?”고 합니다.
이 때 38된 병자의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를 낫게 하신 예수님이 가라 하더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우선입니까, 자기 속에 예수님이 우선입니까? 예수님이 우선이잖아요. 그게 성경전체의 뜻(목적)입니다.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 되었노라’(롬 1:6 ; 14:7,8 ; 고전 6:19,20,23 ; 갈 2:20)입니다.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을 볼 때에 ‘책임론’이 있고, ‘자격론’이 있습니다. ‘책임론’은 ‘왜 말씀대로 살지 못했는가’라고 책임을 묻는 겁니다.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기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 책임론입니다. ‘책임론’에 따르면 성경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지옥 갑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책임을 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자기가 자격을 줍니다. ‘너는 영생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격을 줍니다. 자기가 다 지켰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지요.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러한 인간이었는데 내가 공짜로 이런 자격을 부여했다”라고 되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이기에 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러니까 너는 이미 구원받을 자격을 가진 자야”라고 되는 겁니다. 자격을 주님이 주셨기에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한번 자격자는 영원한 자격자입니다. 그 자격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똑바로 해 똑바로 하란 말야. 똑바로 앉아 그렇게 해서 천당 가겠어?” 이렇게 묻지를 않습니다.
“네가 삐딱하게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똑바로 앉아서 구원받은 거야. 그래서 그 자격을 너희에게 부여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만이 아니고 그 성경을 다 지켜서 책임지신 분이 함께 들어와 버립니다. 옛날 성경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 시대에는 성경이 우리 마음속에 와 버렸습니다.
그 성경과 그 성경을 우리 대신 주님께서 다 지켰다는 것을 겸하여 우리에게 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지켰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습니다’를 고백하게 합니다. 이게 ‘자격론’입니다. ‘책임론’은 모든 철학과 윤리입니다.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야 인간답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격론’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짐승만도 못하다. 그런 죄인인데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졌다’입니다.
인간속에는 항상 양심(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이 먼저 나오느냐 하면, ‘책임론’이 먼저 나옵니다. ‘내가(목사인데, 집사인데, 성도인데) 이렇게 살아야 되겠나? 나는 죽어야 돼. 나같은 인간은 살 가치가 없어.’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래 죽어라! 죽는데 너는 이미 구원받은 것으로 여기고 죽든지 말든지 해라”고 할 때 “주여! 감사합니다”가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완벽’이 아니고 ‘감사’입니다.
그런데 ‘책임론’은 무엇을 주장하겠습니까? ‘이것은 이미 되니까 앞으로는 이것을 지켜야지. 올해는 이것 지키고 내년에는 저것마저 지켜야지. 그래서 나는 완벽에 완벽을 기해야지. 누가 흠잡아도 흠잡히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지. 역시 나는 책임질 줄 아는 훌륭한 인간이야.(하하!) 십년을 믿으니까 신앙생활이 이제야 감이 잡히누나.’ 이런 사람한테는 감사보다도 ‘혹시 내 험담을 누가 끄집어낼까’ 싶어서 항상 예민해 있습니다. ‘나, 건드리지마. 나 완벽해.’ 맨 날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하면 잘 울어요. 왜 우는가? 그동안 내가 완벽하게 한 것(자기의)이 ‘와장창’ 다 깨지니까, 자기의가 깨지니까 속상하잖아요. 그래서 우는 겁니다. 드라마 보면 우는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왜 웁니까? 운다는 것은 ‘잘만하면 책임질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그런 실수를 안했을 텐데’라는 것 때문에 웁니다. 그동안 쌓아놓은 자기의가 무너지는 것이 원통해서 웁니다. 그것이 ‘책임론’입니다.
성경전체는 ‘예수님이 일부러 오셔서 구원했다’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러 오셨다’(마 9:13)는 겁니다.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는 ‘왜 내 힘으로는 안 되는가를 주님 앞에서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분이 던진 구원에 포크레인처럼 딸려 올라가면 됩니다. 그냥 자격을 주시는 겁니다.
‘네 안에 내가 있어서 네가 잘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만큼 잘났다’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간증집회를 보면 ‘실수를 줄이면 복 받는다’고 나오는데 그것은 점점 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육체의 사람들로 들통 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27을 봅시다.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앞에 내세우면서 이 말을 같이 곁들여서 내세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사도바울의 모든 이야기가 뭐라고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에게 던지면서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고난 받았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사도바울의 일관된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그렇게 던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합니다.
‘남편 있는 자.’ 이것은 육체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속한 사람은 뭐가 없어요? 남편 없는 자입니다. ‘남편 있는 자’(육체)에서 자녀가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 없는 여자는 아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가 없어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이사야 54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습니까? 그냥 ‘십자가를 믿어달라’ 하면 될 터인데.
그 이유는 십자가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짜로 예수 믿는 사람과 성령에 의해서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이런 것도 이해하는 사람만이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고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데 집에 자녀가 있더라.’ 이것은 이해하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운 이야기입니다. “아빠! 나는 어디서 왔어?” “아빠하고 엄마사이에서 태어났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옆집에 보니까 아빠가 없고 엄마만 있는데 애들이 있어요. “엄마! 옆집에 내 친구를 보니까 아빠가 없는데 그 애는 어디서 태어 난거지?” “옛날에 아빠가 있었단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남편이 없는데 자녀가 있다’는 이야기가 십자가와 무슨 상관입니까? ‘남편이 있어서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만 이해가 되신다면 ‘당신은 십자가를 가짜로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남편 있고 아내가 있어서 그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났다’는 것만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육체로 자기의 의지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백이면 백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전혀 남편이 없는데 여자 혼자 몸에서 자녀가 나왔다. 그것도 많이 나왔다’고 할 때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창세기 3:15과 창세기 15장 16장을 생각합니다. 창세기 3:15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자 홀로인 채 자식이 태어난다’는 말은 ‘그 여자의 맞은편에 반드시 뱀의 후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그 사이에서 자녀가 나왔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등장되지 않습니까? 마귀의 실체(정체)가 드러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마귀가 동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창세기 3:15에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진짜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은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 되어지는 세상이 아니고 그 상식 배후에 하나님이 창세기 3:15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그대로 되는데 그 된 증거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나 대신 죽는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다’고 믿습니다.
그 십자가사건과 세계 전체를 연관시킬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여자의 후손에서 자녀가 태어나고 그 자녀가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하면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그런 뜻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약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마치 누구와 같이?
이삭과 같이.
갈라디아서 4:28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십자가를 엉터리로, 건성으로(성경에 있으니까, 또는 기독교가정에서 자랐으니까 억지로 믿는다는) 믿는 그런 사람들과, 진짜 이삭과 같이 약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근원부터 통채로 새롭게 이해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숙이 삽을 박아서 뿌리부터 푹 떠올리는 식으로 ‘나는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이고 약속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약속대로 갈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을 상식에 의해서가 아닌 전혀 다른 관점, 성경적인 약속의 관점에서 다시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만이 제대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이른 댓글을 단적이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에 시간당 얼마씩 돈을 받고 한다’(십자가마을게시판)는 이야기에 단 댓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거덜 나서 텅텅 비어 있기에 그 텅텅 빈 신앙의 내용을 대체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색이다. 왜 예수 믿는 것이 거덜났는가? 식상하니까. 처음 믿을 때는 좋았는데 점점 시시해졌다. 예수님이 별로 좋지 않다. 예수 앞에 서는 것이 별로 기쁘지도 않다.”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육체로 예수를 믿고자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믿음, 소망,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욕망체감의 법칙에 의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떨어져 갑니다. 처음에는 좋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예수도 재미도 없고, 교회도 재미도 없고…’ 점점 효력이 떨어집니다. 사랑도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처음에는 죽고 못살것 같이 하다가 결혼한지 6개월만에 도파민의 효력이 떨어지면서 시들해집니다. 부부간에 대화도 없어요.
“밥! 아는! 자자!”
“나, 친정 가뿔란다.”
“갈라믄 가라.”
“그럼 니는 나 사랑하나?”
“사랑 같은 소리 작작 해라. 사랑 다 떨어졌다.”
“그럼 왜 사는데?”
“정으로 살지 사랑으로 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은 유효기간이 있어서 효력이 다 떨어집니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믿는 것도 6개월만 지나면 다 시들해지고 귀찮아집니다. 그게 육체로 난 사람입니다. 자기 힘으로 억지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예수로 시작한 듯이 보여도 나중에는 예수고 십자가고 치워버리고 ‘내 교회 채우기, 내 교회 부흥, 내 교회 전도…’로 모든 것을 대체합니다.
이제는 설교시간마다 예수 이야기는 안하고 교회 이야기만 합니다. 목사 자신부터 예수는 식상해서 귀찮고 싫으니까 그저 돈 나오는 교회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댓글에 쓰기를 “신학교 들어갈 때는 ‘예수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졸업할 때 되면 ‘교회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졸업해서 목회를 좀 하다 보면 ‘가족을 위해서 죽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다 필요 없고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점점 바뀝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꼭 해야 됩니까? 그 이유는,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무슨 힘입니까? 약속이 와서 우리를 구원시킵니다. 그 약속이 뭡니까? 이 세상의 상식을 깨는 겁니다. 남편 있는 여자에게서 자녀가 나오기 마련이고 남편이 없으면 자녀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없어야 되고 예수를 다 안 믿어야 정상입니다.
남편 있는 여자만이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이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님이 생명을 줬기에 예수 믿기만 하면 누가 나를 때려죽여도 나는 천당 간다’는 것을 어느 인간이 믿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미치면서 ‘예수님뿐’이라고 하는 사람의 눈에 비로소 어떤 종류의 사람이 악마(뱀의 후손)인가 하는 윤곽이 잡힙니다. 그들을 대하여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을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막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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