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22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8:51

갈라디아서 제 22강 (이 근호목사, 2007년 6월 8일(2), 서울의존교회)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크게 그렸습니다. 크게 이렇게 계십니다. 우리를 그리겠습니다. 우리는 그냥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없어요? 예수님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면 있지만 현재 안줬다고 보면 자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1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했잖아요. 여기 떡이 있는데, 여러분에게는 떡이 없다고 치고 떡을 주면 비로소 있지요. 예수님께서 이 자유를 줄때 만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유를 안주면 자유가 없지요.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준겁니까? 예수님이 준 겁니까? 여러분이 만들어 낸 겁니까? 예수님이 준 겁니다. 그러면 그 자유는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다 누구 공로고 누구 덕이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았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자유’를 줬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예수님이 주기 전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이 율법이라는 벽을 뚫어서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못갑니다.

탈옥수 아시지요? 교도소에 갇혔는데 자기 힘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탈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 힘으로 구원을 받으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줄 필요가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 힘으로 뚫어내면 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면 이 말은, 우리가 절대로 우리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없다? 구원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두 가지를 알았어요. 첫 번째는 내 힘으로 절대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 때문에 나는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안 겁니다. 두 가지 하면 앞에 것을 잊어버리니까 다시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무엇을 알았는가? 절대로 나의 선행으로는 천국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못하지만 주님은 해 내고야 말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야! 네가 구원받은 증거를 대봐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내 대신 몽땅 내 죄를 가져 가사 용서하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볼 때,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이 “너는 믿는데 왜 나는 안 믿어지지?” 그때 사도바울이 “너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모르는 거야.”라고 답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나’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안다고 치고 이제부터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자, 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 뚫지 못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5:2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한글로 되어 있지만 무슨 뜻인지 잘 감이 안 잡힙니다.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의 끝을 잘라서, ‘너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법(언약)을 지켜야 돼’라고 하나님께서 지정을 한 겁니다. 쉬운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나무젓가락이 있습니다. 나무젓가락이 여기에 꽂혀 있으면, 엄마가 ‘여기 나무젓가락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지?’하고 찾고 다닙니다.

“나무젓가락 여기 있는데요.”
“어디 있지?”
“여기요. 여기 있어요.”

이 나무젓가락을 할례라고 해 봅시다. 할례라는 것은 내가 가는 곳에 할례가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 있지요. 할례라는 말은 ‘할례’를 받고 난 뒤에 받은 ‘할례’를 없애려고 하면(나무젓가락을 빼려고 하면) ‘나’도 같이 빼야(죽어야)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또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나는 할례를 행했다 그런데 이게 무효라고 하면 차라리 날 죽여라. 나한테는 나무젓가락이 여기 있다. 이걸 빼낸다고? 그러면 차라리 날 죽여라’ 이렇게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라’라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했어요. 나무젓가락을 꽂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꽂았는데 예수님께서 “어이! 그거 빼라니까!” 그때 유대인들이 “이거 안 빼. 이거 빼면 나도 죽어. 할례(나무젓가락)가 있는 이상은 나도 구원을 받은 거야. 이것과 나를 분리할 수 없어. 나는 이것을 붙들고 구원을 받을 거야.” 이렇게 자꾸 우기는 거예요.

그렇게 우기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예수님의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기 전에, 아직 이 사람들이 자유를 안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할례라는 것을 행했습니다. 할례를 받아 놓고는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봐라! 할례라는 법이 있잖아. 내가 할례 받은 증거(생식기)를 봐라”면서 이런 식으로 자랑하니까, 그것은 할례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할례 뒤에, 플러스, 십일조 더하기, 유월절 더하기, 안식일더하기, 십계명 더하기 등등 365가지의 온갖 법이, 줄줄이 사탕으로 하나를 끌어올리니까 그 전체가 다 딸려 오는 거예요.

여러분 기차놀이 해보셨죠? 꼬리에 또 붙고 또 붙고 계속 자꾸 자꾸 붙는 거 있지요. 독일 동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왕궁의 공주가 하도 웃지를 않아서 공주를 웃길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창문을 열어놓고 밖을 내다보면 공주가 마구 웃고 있는 거예요. 어떤 바보가 황금오리를 들고 가니까 사람들이 그 황금이 탐이 나서 손을 대니까 딱 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떼려다가 뒤에 붙고 또 붙고 그래서 한꺼번에 네 명이 그 뒤에 붙어 따라가니까 그걸 보고 공주가 뒤로 넘어가게 웃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보와 공주가 결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할례만 딱 끊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할례라는 것은 그 뒤에 있는 그 나머지 성경말씀을 다 지킬 의무를 가진 자가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 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네가 기관차 한번 해 볼래? 객차 한 100개 달고 달려볼래?”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목사님! 저는 할례는 안 지켰지만 십일조는 지킵니다.” 십일조를 앞세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앞세우면 뒤에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할례를 행해야 하고, 안식을 지켜야 되고 줄줄이 다 해야 합니다. ‘나는 십일조는 안해도 십계명은 지킨다’고 하면, 그 십계명 뒤에 뭐가 붙습니까? 율법이 다 붙는 거예요. 얼마나 무겁고 힘든 짐입니까?

다 지켜야 됩니다. 돼지고기 먹지 말아야 되고, 오징어도 먹지 말아야 되고, 굽이 갈라진것만 먹고, 굽이 안 갈리진 것은 못 먹고, 되새김질 하는 것만 먹고, 되새김질 하지 않는 것은 못 먹고, 이런 것을 다 지켜야 됩니다(레위기 11:1-23). 온갖 율법을 다 지켜야 됩니다. 심지어 신명기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자식이 말을 안 듣거든 동네에서 때려죽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제가 그렇게 말 안 듣는 아들이라면 이 온 동네 아파트 주민들이 저에게 돌을 던져서 죽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면 그 사람은 죽어야 됩니다(출 31:15). 아빠한테 욕을 했다? 그 아이는 죽어야 됩니다. 점을 쳤다? 죽어야 됩니다(민수기 18:9-14). 모조리 다 죽여야 합니다. 나중에 살아남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더 심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 오른팔이 범죄하거든 잘라버리라.’(마 5:29,30)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것도 간음죄다 … 먹을 것, 마실 것을 염려하는 것은 다 이방인이다 … 맹세하지 말라 … 남이 돈을 빌려 달라 하거든 그냥 주라.’(마 5:28,31,32,34,42) 이래서는 대부업(貸付業)이 되겠습니까? 그게 ‘쩐의 전쟁’이 되겠습니까? 어떤 것도 하나의 율법을 주었다 하면 다른 것도 다 연결연결 되어서 어느 것 하나를 달랑 지킬 수가 없습니다. 다 지켜야 됩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의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다가 다른 것 하나를 어기면 어긴 그것에 의해서 심판받는다’(약 2:10,11)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다른 계명은 주시지 않았겠는가’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뭘 뜻합니까? 어떤 인간도 이 율법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율법의 쇠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누군가 이 할례를 지켜야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에 할례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었습니다. 그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11,12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나머지 모든 율법도 다 지켜야 된다는 의무를 함께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를 우리에게 이미 줘버렸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하는, 육체에 흔적을 남기는 그런 할례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내야 하는 의무가 있기에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뭘 명했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 할례를 비롯해서 이 모든 말씀을 한꺼번에 한사람에게 다 몰아주어주었습니다. 예수님 한분에게 다 몰아줬습니다.

골로새서 2:14,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무엇도 같이 살아난 겁니까? 이 모든 법을 다 몰아서 받으신 한사람인 예수님, 그 분이 죽었다가 다시 산겁니다. 이런 비유에는 화투가 적절합니다. 패가 좋지 않을 때는 패 좋은 사람에게 한꺼번에 몰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다 몰아줘서 혼자 게임하게 하고 따면 몫을 달라는 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모든 패를 한꺼번에 다 몰아서 쥐는데, 과연 그분이 제대로 모든 말씀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의 승리는 어디서 판가름 나는 겁니까? 모든 율법이 주는 저주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몰아줬던 그분이 드디어 모든 율법의 저주로부터 미리 자유(승리)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승리가 우리에게 올 때 몸으로 하지 않은 할례, 그런 할례가 세례라는 이름으로 대신 주어져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공로가 거저 우리의 공로가 되도록 해서 우리가 이 모든 법을 이미 다 지킨 것으로(의인 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이런 율법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5:1입니다.

십일조든 안식일이든 주일성수든 뭐가 되었든 그런 것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육을 가지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이 육을 대신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 내 육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했다는 말은 더 이상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묻고 싶어서 간질간질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사도바울이 하는 여러 가지 명령과 권면들은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그것도 하지 말아야 됩니까?”라고 묻고 싶을 겁니다.

자, 십자가를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죽은 우리를 십자가의 공로(의, 은혜)가 와서 우리로 하여금 의인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2007년도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2008년도에 의인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성령의 은혜가 오고, 그러다가 안 오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2007년도에 왔으면 2008년도에도 온다는 말입니다.

오게 되면 이 사람은 2008년도에도 의인되겠지요. 그러면 이 사람에게 무엇이 따라가야 되겠습니까? 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공로로만 의인되는가를 2007년도에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2008년도에도 왜 이 사람은 예수님의 공로로만 의인되는가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2007년도에 뭘 알았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에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2008년도까지는 뭘 몰랐는가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다’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거죠. 2007년도에 ‘술 취하지 말라’를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술을 계속 먹고 있었는데 성경에 보니까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온 겁니다.

자기가 이것을 지키려고 하는데,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술은 끊을 수가 있지만, 그 다음에 연이어 나오는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은 자기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자기 능력으로 술도 끊을 수가 없지만. 이 사람은 뭘 아느냐? 이것을 알아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2007년도에 나에게 와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일을 시켰다는 겁니다. 나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집어넣으니까 이 사람은 술을 끊고 성령에 취하게 된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아직도 뭘 모르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데모데전서의 말씀은 몰랐어요. 그것은 모른 채 ‘야, 나는 이제 술도 끊어도 성령에 취해서 산다. 나 같이 완전한 인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렇게 우쭐거렸는데 2008년도에 가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대하고 나니까, ‘아하, 술은 끊었지만 이 말씀은 나에게는 할 수 없는, 안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안된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너는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지, 술 끊었다는 너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소급해서 다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성령이 오고 난 뒤에 뭘 더 알게 되냐? ‘아하,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 성령의 공로요 주님의 은혜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 자기는 성령이 오기 전에는 그것을 몰랐으니까요.

그런데 2009년도에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하여 이득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 이런 자랑은 다 악한 자랑이다’라는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이 튀어 나오네요. 그러니까 앞에 있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었고, ‘술 끊는 것’도 내 실력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전체를 종합해 볼 때, 이 사람이 뭘 아느냐?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나를 그냥 가만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수시로 말씀을 통해서 ‘이러니까 너는 예수의 공로로 구원받아야 돼.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 거야’라고 그것을 통보해주고 알려주는 일들을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을 통해서 수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2014년도에 많이 알았어요. 그런데 2015년도에 뭘 알았느냐? 전에 이미 많이 알았다고 여기는, 이미 떼었다고 여겼던 술을 마셔버린 겁니다.

이것은 뭐냐? 주님께서 수시로 자주 자주 나를 가지고 왜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받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가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말씀만 계속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온유, 화평, 자비, 양선 …’ 하니까, ‘온유, 화평’은 할 수 있는데 ‘자비, 양선’은 좀 못하겠더라,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네 가지 다 내 힘으로는 될 수 없었고, 그때 나왔던 것은 주님의 공로였고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십자가라는 것은 한번 그때 그 십자가가 아니라 계속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십자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운 것, 안산에서 강의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졌는데, 시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나’라는 것이 과거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과거가 모여서 ‘나’가 됩니다. 우리를 뜯어 보면 전부 다 과거가 다 들어 있습니다.

과거의 것이 나를 밀어붙여서 오늘날의 ‘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내일의 될 것은 지금의 과거가 앞으로의, 내일의 ‘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현재 내가 가진 모든 것, 나의 안경, 나의 가방, 나의 mp3, 나의 구두, 나의 옷등 전부 다 내 것인데 이런 내 것이 모여서 ‘나’가 됩니다. “나는 과거에 이렇게 잘나가서 지금의 ‘나’가 되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4장에 보게 되면,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죽으심을 짊어졌잖아요. 그런데 예수의 죽으심이라는 것을 짊어지게 하신다는 말인데, 예수님의 죽으심은 옛날에 일어난 사건이잖아요. 우리는 2000년 전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2000년이라는 것이 숫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2000년을 쳐주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짊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어린이도 있고, 어른도 있고, 선풍기도 있는데 성령께서는 선풍기가 있느냐, 어린이가 있는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여기 있고 그 십자가에 예수님 달려 있고 나는 그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고 그것만 달랑 남게 합니다. 성령이 그렇게 만듭니다.

옆에 친구들이 있고, 무엇이 있고, 이런 것들이 다 없어지게 만들고, 지금의 2007년도 사라지게 만들고, 선풍기도 내 것이고 마이크가 내 것이라는 이것도 없어지게 만들고, 달랑 있는 것은 뭐냐, 예수의 죽으심, 십자가 앞에 내가 등장하는 이것만 잠시 느끼게 합니다. 잠시, ‘아, 옛날 그 십자가가 옛날로 끝난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 순신 장군의 죽으심을 지금 짊어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순신 장군의 시체를 끄집어내서 질질 끌고 다니거나 메고 다닐 수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이미 죽은 모친의 시체를 파내서 끌고 다니면 그것은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육은 안 되는데 죽은 예수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꽂히게 만들어 버리면 뭐가 깨지는가? 시간 깨지고 공간 깨집니다.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만들어낸 내가 되고, 현재 내 것이라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 됩니다. 시간 깨지고 공간 깨지면 누가 깨집니까? ‘나’가 깨지지요. 내가 깨지고 내안에 주님의 십자가가 꽂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예수님이 무엇을 행했다’는 것이 나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미 죽은 나를 통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술을 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취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득 보겠다고 큰소리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줄 로 알게 했습니다. 전부 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해 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뭐냐? 그것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입니다.

그게 내열매가 아니고 누구의 열매? 성령께서 내 안에 작업을 하신 열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일을 나를 통해서 배태(나타나게)케 하십니다. 그럴 때 ‘아하 주님한테는 내역사가 따로 없구나. 주님께서는 내 것이라는 것을 인정 안 해주는구나. 그저 주님의 것으로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내 안에 십자가사건을 일으키게 하시는구나’를 알게 합니다.

여기에 십자가높이 있고 예수님이 달려 있고 우리는 그 앞에서 서 있다고 할 때 뭐가 보입니까?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 11:8)고 하지요? “너희가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하는 그 대목이죠.

“뭐가 보이더냐?”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 십자가는 왜 있지?”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네가 왜 죄인인데?”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을 보니 하나도 제가 죄인 아닌 것이 없네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원수를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영화가 무슨 영화입니까? ‘밀양’입니다. 그 영화 다 보셨지요? ‘해적’은 보면서 그것은 안보고. 상처받은 영혼이 원수를 용서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해줘 버렸어요. 여기에 그만 화가 나서 주인공이 실신해 버립니다. “상처받은 내가 원수를 용서해야지요. (그래야 자존심이 세워지니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야지 왜 내 허락도 없이 하나님이 내 원수를 용서합니까?”

주인공이 뭘 모르냐 하면, 그것이 바로 가해자가 되는 짓인 줄, 그것이 십자가의 피를 모독하는 ‘나’, 내가, 바로 내가, 바로 내가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아무나 용서하면 어떤데? 왜 꼭 자기가 해야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을 복수하는 겁니다. 자기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가로채 갔습니다. ‘원수사랑 내가 한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나’는 뭡니까? 바로 그 ‘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 때에만 비로소, 우리 속에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이름으로 원수 사랑이 나옵니다. ‘내가 바로 나밖에 모르는 주님의 원수였습니다. 나밖에 모르기에 나는 의인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나는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때려죽인 예수님이 저기 걸려 있다는 사실, 그 밑에서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났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 바라보면서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다’라는 겁니다. 이 말은 슬퍼하자는 말이 아니고, 반대로 드디어 신났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제 되었다. 나는 이제 살았다’는 그 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를 다른 말로 고치면 ‘나는 살았다’ 그 말입니다. 내가 절대 내 힘으로 율법을 뚫고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정도로 나는 죄에 가로막혀서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는 그 사실이 ‘이미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뭐할 거냐? 앞으로 뭐할 거냐 하는 것은 내 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맘대로 우리를 부리고 활용할 겁니다.

“사도바울아!”
“예!”
“로마로 가야지.”
“왜 가는 데요?”
“가라 하면 가면 되지 왜 말이 많아. 그냥 가!”

맘대로 활용해서 사도바울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아, 이제 그만 살고 죽어야지.”
“예.”
그리고 죽어 버립니다. 맘대로 활용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주의 것이기에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고, 맘대로 활용합니다. 맘대로 활용하되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죄가 되고 주님한테는 뭐가 되고? 의가 되고. 뭘 해도 죄가 되고 주님한테는 뭘 해도 의가 되고. 따라서 우리는 뭘 해도 의인되고.

그 앞에 것을 빼버리면,

“이 근호 목사는 말하기를 성도가 뭘 해도 의가 된대.”
“그 앞에는 뭐라고 하는데?”
“그 앞에 것은 안 들어서 몰라.”

그 앞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뭘 해도 죄고, 그것을 용서하시는 주님은 뭘 해도 의고, 따라서 우리는 뭘 해도 우리한테서는 뭐가 나오고? 주님의 의가 나오고 우리 의는 안 나오고. 그래서 우리는 의의 종(롬 6:13)이 되고 그 열매는 영생입니다(롬 6:23). 이미 영생 받았기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개인적으로 설치고 다닐 그런 처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에 한 것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전 세계가 어떻게 갈라진다고 했습니까? 쫙, 양쪽으로 갈라진다고 했습니다. 이쪽에는 뭐 좋아하는 사람? 자장면 좋아하는 사람, 이쪽에는 뭐 좋아하는 사람? 짬뽕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장면 만드는 아줌마는 어디에 있는 아줌마? 하늘에 있는 아줌마, 짬뽕 만드는 아줌마는 어디에 있는 아줌마? 땅에 있는 아줌마.

여기 자장면 쪽에 모인 사람은, 뭐 하나를 보고 왔습니까? 자장면 하나 먹고 싶어서 온 겁니다. 이 사람들은 뭐 먹고 싶어서 왔어요? 짬뽕 먹고 싶어서. 짬뽕이 먹고 싶어서 온 사람들은 자기 육의 실력을 믿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장면 먹고 싶어 온 사람은 어디에 속한 사람?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자, 이렇게 나누어 보니까 결국은 여기서 뭐는 사라집니까? 개인적인 실력, 개인적인 느낌, 개인적인 봉사, 개인적인 충성은 여기서는 둘 다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성격을 규정해 버립니다. ‘너, 누구야?’가 아니라 ‘이쪽에 속한 사람 맞나?’라고 합니다. ‘너, 뭐 될래?’가 아니라 ‘너, 어느 쪽에 속할래?’라고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스키 잘 타는데요.” 그거 치우고, “너는 무엇을 바라보느냐?”라고 묻습니다. “제 실력을 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어허, 네 실력 같은 것은 안 본다니까?” 개인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두 패로 쫙 갈라집니다. 하늘에 속한 여자, 땅에 속한 여자로. 그래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오늘날 개인적인 주체의식이 강한 개인한테는 이런 생각이 정말 이해하기 불가능하죠.

“목사님! 저 구원받아요? 저 선택 받았어요?” 맨 날 ‘나’ ‘나’ 이래요. “당신은 없어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아마 어느 부류(집단)에 속할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집단에 가보세요. 그러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있을 거예요.”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모였습니까? 자기의 육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기도자랑, 신앙실력자랑, 전도자랑, 성경공부 많이 한 것 자랑, 전부 다 내 실력 내 육의 노력, 이런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쪽, 영에 속한 사람은 뭡니까? “당신은?” “주님의 공로로!” “그러면 당신은?” “주님의 공로로!”

“네 필통은 어디서 왔지?”
“선생님이 주신 거예요.”
“네 필통은?”
“선생님이 주신 거예요.”
“그러면 모두 다 선생님이 주신 필통!”

개인을 묻지 않습니다. 개인 간 경쟁하지 않습니다. “김 집사는 십일조를 잘하는데 당신은 왜 십일조를 안 해?” 이렇게 묻지 않아요. 개인을 물으려면 육을 물어야 합니다. “김 집사는 십일조를 하는데 최 집사는 십일조를 왜 안 해?” 이렇게 개인적으로 따지고 묻고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모였어요?” 그것을 묻습니다. 내 주특기 말고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면서, 누구 공로로, 누구 덕분에 살았다는 그것만 바라본다니까요!

그런데 이쪽의 지옥 가는 사람은 뭡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네 실력이 뭐야? 누가 잘났어?” 개인을 묻습니다. 지옥 갈 사람들은 개인을 묻습니다.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갈 인간이냐, 천국 갈 인간이냐'는 그 사람이 성경을 몇 독 했느냐, 신학을 얼마나 했느냐가 아니고 ‘그 사람이 아직도 개인적인 문제에 매달려 있느냐, 아니면 쳐다보는 대상이 주님이냐’ 그것으로 결정 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성화가 몇 점인가? 너는 70점, 나는 80점, 이런 개인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 전체 어느 곳을 펴도 “주님의 공로로 구원 받습니다. 우리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우리 힘으로 될 것 같으면 왜 주님이 십자가를 졌겠습니까? 대신 다 몽땅 가져갔대요.”

제가 집에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음식쓰레기를 비웁니다. 비워보면 참 신기한 일이 있어요. 저녁에 내놓은 쓰레기가 그 이튿날 아침이 되면 감쪽같이 없어진 겁니다. 누가 가져갔습니까? 환경미화원이 가져갔지요. 저는 믿습니다. 뭘? 쓰레기차의 존재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뭘 믿었습니까? “내가 네 모든 죄를 용서하리라.” 간음한 여인은 그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믿었어요, 안 믿었어요? 믿었습니다.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는 누굴 믿었습니까? 옆에 계신 분이 내 죄를 다 가져간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예수님이 쓰레기를 치운다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그러면 왜 안 믿었습니까? 일부러 안 믿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두 부류로,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사람과 개인의 신앙적인 자질을 믿는 사람과 두 쪽으로 나뉘어져서 구원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느 쪽이냐를 묻는 거죠.

그 두 사람 사이의 십자가, 세 사람이 한 세트가 되어서 2007년도, 2008년도, 2009년도 그것이 한 세트로 우리에게 덮치면 ‘십자가를 중심해서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것과 동일합니다. ‘너는 구원받은 강도야? 아니면 다른 쪽이야? 너는 어느 쪽이야?’라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양쪽포함해서 세 사람이 세트로 우리를 덮쳐버립니다. 그렇게 덮치면 ‘우리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하나님의 성도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거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까? 이 근호 목사가 지어낸 이야기에요? 아니지요. 여전히 율법에 기대를 걸고, 율법에 기대를 건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는 ‘나’에게 기대를 건다는 말인데, 내가 율법, 하나님을 말씀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어떤 의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를 거는 사람은 어디서 끊어진 사람이다? 그리스도에서 떨어진 사람이고 은혜에서 끊어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의롭다’하는 것이 율법 말고 다른 계통으로 이미 왔습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거든요. 어느 집사님께서 “여기 비타 500이 있으니 잡수세요”하고 줬는데 내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 의존교회 집사들은 뭐합니까? 비타 500 안주고! 정말 이래 나오기에요?” “보소, 보소. 눈 있거든 앞에 보소. 그게 뭔데?” “아이고, 비타 500이다. (맛있게 드시면서) 아이고, 주여! 은혜 감사합니다.” 이래서 (비타 500먹고) 구원받는 거예요.

이미 ‘의롭다’하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했는데, 그것(이루신 것) 안보고 이것(말씀)을 지켜서 남과 경쟁해서 이겨서 천당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사람인데 이 끊어진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나, 예수 믿는 법을 지켰다.” 예수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는 겁니다. 그 사람한테는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는 것이 뭐예요?

자기 육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행한 일 중에서, 더하기를 해서 다른 것도 지키고 예수 믿는 것도 지키고, 많이 지키면 뭐 하나 남지 않겠나 싶어서 온갖것을 다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키는 육이 여전히 살아 있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 믿음은 어디 있느냐?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좆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역사”라는 말은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일하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일하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안겨준’ ‘사랑이 주신’ 뭐 밖에 없다? 믿음 밖에 없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내가 믿었다’거 하지 않고 뭘 이야기하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으로(사랑 때문에) 믿었다’고 하겠지요.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죠. 주님의 사랑을 믿죠.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지 내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너, 예수 믿었는데 왜 믿었어?”
“내가 예수님을 사랑했잖아.”

이러면 땡!(틀렸다)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야 합니까?

“너, 왜 믿었지?”
주님이 사랑이 내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왔어.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 일을 하니까 나는 믿음이 생겼어. 내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 거야”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지금 이 중에서 여러분이 남들이 하지 않는 전도를 매일 같이 해서 교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매일같이 혹시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닙니다.자, 그런 사람이 있을 때 제가 말합니다.

“집사님! 전도 몇 명 했습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한 750명 정도 했습니다.”
“그럼, 집사님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주님이 공로로 구원받지요.”
“그러면, 전도한 게 뭡니까?”
“그거는 죄지요. 뭐.”
“왜 그게 죄 입니까?”
“내 죄를 드러내기 위한 전도행위였으니까요. 전도행위는 주의 일이지만, 그게 내 죄고, 그게 용서가 필요한 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차원에서 남들에게 시키지 않는 전도를 나에게 시켰습니다.”

이렇게 나올 때, 100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안돼요.

“집사님, 교회 헌금 합니까?”
“미쳤다고 헌금 합니까?”
“왜 헌금 안하십니까?”
“이 근호 목사님 강의하는 것을 보니 헌금 하지 말라면서요.”
“헌금 하지 말라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는 ‘자발적으로 하라’는 것이 나오는데, 왜 이 근호를 들먹거리면서(핑계 삼아서)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자발적으로 하라’고 되어 있거든요(고후 8:4, 9:7) ‘하라’고 할 때, 해 보니까 안 되지요? 하는 것은 되는데 ‘자발적’이 안 되지요. 더러워서 하죠. ‘아, 드러버라. 주고 말자. 아, 드러버. 조라, 조.’ 이렇게 억지로 내지요. 그럴 때 그 죄가 어떻게 됩니까? 용서를 받지요. 주님한테. 그러면 그 용서를 받기 위해서 뭘 가지고 했습니까?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라’는 말씀이 필요하지요. 그 말씀을 해 보니까 숨겨있던 죄가 나오고, 그 죄는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겁니다.

주기도문에 뭐가 나옵니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나옵니다. 이것 성경대로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이것 성경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에 있는 양식 다 내어 버리고 하루치만 달랑 있어야 됩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 없습니다. 말로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지만 ‘적어도 세 달치는 양식이 꽉, 쟁여져 있어야지’라고 하잖아요.

세 달치 양식 쟁여 놓았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우리나라 법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내일 염려는 오늘 하지 마라. 내일 염려는 내일로 족하다’(마 6:34)는 이것을 지킬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밤에 잠잘 때 내일 생각 합니까, 안합니까? 하지요.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은 주식 값 떨어질 때, 그 사람은 염려가 대단합니다. 그럴 때 그런 죄까지 누가 용서했다? 예수님이 용서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식 붙들고 벌벌 떨게 하시는 그 주님의 놀라운 사랑! 주식 값 좀 떨어지면 벌벌 떨게 하고(심지어 약 먹고 자살소동 벌이고 난리 피우고…), 주식 값 좀 올라가면 찧고 까불거리게 하는(하, 조금만 더 집어넣을 것을…) 이런 것을 통해서, 자살하든 뭘 하든 간에 그런 인간까지 구원하시는 주의 십자가의 능력,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잡고 흔드시고 사용하셔서 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안 되는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강도처럼 놀랍게도 십자가의 공로로 이미 용서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니 이것이 큰 은혜요 기적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보다도 이 은혜를 남한테 자랑할 수 있는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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